|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국내진학반과 해외유학반의 차이>의 줄거리:
국내 진학반과 해외 유학반을 나누어서 전혀 다른 교과과정을 실시하는 것이 민사고나 외고 과고등, 특수목적 고등학교들의 일반적인 추세라고 합니다. 국내 최고의 명문 서울대의 입학전형의 변경등이 유학반 학생들에게는 전혀 관심 밖의 일이 됩니다. 신앙은 해외 유학반 학생으로 이 세상을 사는 겁니다.
국내 진학반과 해외 유학반의 차이
(마11:1~11)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국내 진학반과 해외 유학반의 차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증거 합니다.
‘국내 진학반과 해외 유학반의 차이’
여러분, 며칠 전에 기사에 아주 참 마음이 대견스럽게 여겨지는 그런 기사가 있었습니다.
인천연안 부두에서 무려 211km나 떨어진 곳에 서해 5도 중 하나인 대청도라는 섬이 있습니다.
이 섬에 고등학교가 하나 있는데 이름이 대청고등학교에요.
그 학교에 전교생은 19명입니다, 19명.
대청고등학교 19명 중에서 고3에 속한 17세짜리 최 진수라는 학생이 있습니다.
이 학생이 이 섬에 살면서, 그 섬에도 인터넷이 되었던 모양이에요.
인터넷상에 있는 사이버 외교 사이트에 들어가서 인터넷으로 활동을 하면서 그 자기가 살고 있는 대청도에서 2년여에 걸쳐서 대청도 식물도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것을 다 종합해서 미국 LA 에 있는 명문 중에 하나인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 입학신청을 하고 식물도감을 들고 면접관들을 찾아가서 면접을 한 모양입니다.
면접관들이 깜작 놀랐다 그래요, 이 17세짜리 아이가 대청도 식물도감을 만들었어요.
조선 순조 때 정약전이 흑산도로 귀양 가서 그곳에서 흑산도 주변에 살고 있는 물고기들의 실태를 적은 ‘자산어보’라는 책을 짓지 않습니까?
이 대청도 식물도감을 지은 것이에요. 이런 모든 것이 다 종합적으로 인정을 받아서 그 명문대학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앙대학에 영어 위탁교육을 1년 받고 내년에 캘리포니아 대학으로 가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상태는 아마 추측컨대 토플이라든지 토익이라든지 하는 그런 영어가 합격점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명문대학에 입학을 허가 받았어요.
여러분 얼마나 대견합니까? 우리의 아들이 17세 밖에 안 된 아이가…
우리나라에 민족사관 고등학교라든지 외국어고등학교, 과학 고등학교 이런 특수목적을 가진 고등학교들이 있는데 추세가, 이 모든 고등학교 내에 국내 진학반이 있고 해외 유학반이 따로 있답니다.
해외 유학반 아이들의 특징은, 교과과정이 다를 수밖에 없고 그들의 특징은 서울대라든지 고려대학이라든지 연세대등 우리나라 안에서 최고로 꼽는 대학들의 입시전형 방법이라든지, 뭐 대학 내에 변화라든지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그 아이들을 만나보지는 않았지마는 관심이 있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있을 필요가 없지요.
서울대학의 입시전형방법이 이래 바뀌었다, 고대가 이래 바뀌었다, 연세대가 저래 바뀌었다, 성균관대가 이렇게 변했다, 뭐 한양대가 이렇게 되었다, 이런 거 아무 관심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서울대가 뭐 나라에서 엄청난 돈을 지원해 가지고 굉장한 혜택을 받게 되어서 어마어마하게 좋은 대학이 될 것이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해외 유학반 아이들에게는.
여러분!
신앙은 해외 유학반으로 사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이 세상 내에서 좀 더 나은 형편으로 진학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사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더 밝은 미래를 향해, 이 세계 내에서의 더 밝은 미래를 향해 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날마다 지금 위에 있는 세계의 경계 바깥으로 나가서, 해외로 나가 천국이라고 하는 곳으로 진학하는 것, 날마다 이 세상에 대해 죽어서 날마다 천국으로 진학하면서 마음이 천국에 올라간 자로서 이 땅에 남아있는 몸으로는 마음이 천국에 올라간 티를 내며 살아가는 것이지, 이 세계 내에서 더 나은 곳으로의 진학을 위해서 몸부림치며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이에요.
예수님을 믿되 국내 진학반의 입장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면, 더 밝은 미래로 진학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쫓아가면 반드시 나타나는 결과가 뭐냐?
실족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좌절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내 인생을 더 무겁게 짓누르는 분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참으로 마음 아픈 장면이 우리들에게 소개되고 있어요.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왜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힙니까? 그 의로운 선지자가.
구약을 종결하는 선지자에요, 그리고 새 시대를 여시는 예수님 메시아를 준비하는 자였습니다.
이 분이 뭘 잘못했다고 감옥에 갇혔겠습니까?
헤롯 안티파스가 동생에게 방문했다가 동생의 아내를 범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제수씨와 결혼하기 위해서 본부인과 이혼을 하고 그 제수씨를 강제로 아내로 맞이합니다.
이 사실을 세례 요한이 계속해서 지적을 했던 것 같아요,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감옥에서 그 칠흑 같은 지하 감옥에서의 하루하루를 지내는 동안에, 이 낙타 털옷을 입고 광야에서 무서운 것이 없이 하늘나라의 의를 전하며 회개를 권유했던 이 강직한 세례 요한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데 어떤 질문이냐 하면, 이 질문이 아니었어야 되는데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게 무슨 말입니까?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게 무슨 말이에요?
앞의 4장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나왔을 때 뭐라고 얘기합니까?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마땅한데 어떻게 당신께서 내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십니까?’
그리고 요한복음 같은 데에 보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세례 요한이 말을 합니다.
그리고 비둘기 같이 성령이 임하는 것을 봤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 분이 바로 오실 그분 메시아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곳곳에 씌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 세례 요한이 이렇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때 주님의 대답은 세례 요한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어요.
여러분 보세요, 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 대답하시느냐 하면, ‘내가 그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이 기대하는 대답이 아닙니다.
시각 장애인들이 보게 되고, 못 걷는 앉은뱅이가 걷게 되고,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입게 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게 되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은 이러한 기적의 수혜자들에게는 기쁨이 됩니다마는, 세례 요한이 원하는 것은 그러한 능력을 기반으로 해서 군중들이 예수님께 몰려올 때에 그 군중의 힘을 조직화 하고 단순히 따르는 자들의 그 무리들을 파워로 변환시켜서 헤롯과 같이 부정부패한 썩은 정치가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식민지 종주국 로마 같은 탐욕스러운 나라를 멸하는 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겁니다.
제자들처럼, 철없고 이기적인 제자들처럼 예수님 쫓아다니며 자기가 장관자리 하나 얻겠다고 생각한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원했던 것은 의로운 나라가, 혁명적인 변혁을 통해서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대했고, 그러한 변혁을 통한 나라의 건설이 바로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고 예수님이 바로 그런 나라를 일으키셔서 자기가 감옥에 갇혀있는 현실도, 이 의롭게 산 사람이 핍박을 받아야 되는 이 부정한 현실이 바뀔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 암흑의 감옥 속에서의 나날이 지나가고 있는데 아무런 조짐도 징조도 보이지 않고 소식도 전해지질 않는 겁니다.
예수에 대해서 듣고 있는 소식은, 예수님이 대답한 것 이미 다 듣고 있었던 거예요.
맹인이 눈을 뜨고,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천국 복음을 전하고 있다 이 얘기는 이미 듣고 있는 겁니다.
세례 요한이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이런 현실적인 정치적인 대변혁이 당신을 통해 일어날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됩니까? 라는 것이었어요.
여러분, 그래서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 ‘실족치 아니하면 복이 있다’
실족 한다는 건요 예수님을 대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겁니다, 예수님을 따르다가 예수님에게 좌절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 때문에 더 큰 실망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겁니다.
어떨 때 예수님에게 좌절하게 됩니까?
예수님은 이 세례 요한의 얘기를 어디로 이어가시냐 하면, 천국 이야기로 끌고 가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
그리고 우리가 읽지 않은 부분 11절 이하에 보면 우리가 내일 보겠습니다마는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 천국의 이야기로 이어가고 있어요.
예수님의 모든 생각과 모든 우리를 향하신 말씀은 다 이 세상에 천국을 갖다 대놓고 있는 상태에서 하는 얘기입니다.
세례 요한이 지금 원하는 것은 세계 내에서의 변화입니다.
국내 진학반이 원하는 것처럼 이 세계 내에서의 달라지는 상황을 원하고 있었고, 주님의 생각과 행동과 구원의 역사는 모든 내용이 다 천국을 이 세상에 갖다 붙인 상태에서, 세계의 경계 이 땅의 경계를 넘어서서 도달할 수 있는 천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고 천국을 주시려고 오신 것이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비교해 보면 확 드러나요.
사도 바울도 감옥에 갇혔습니다, 세례 요한보다 더 극심한 고통을 당하면서 감옥에 갇혔고, 쇠고랑에 차였고 아주 죽도록 매를 맞고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어요, 에베소에서.
근데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주님은 이 땅에 안 계셔요, 그런데 찬양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천국 티가 어떻게 나타나느냐?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몸이 감옥에 갇혀있는 상태에서 마음이 이 몸의 앞잡이노릇을 하는 상태에서 벗어나서 천국으로 들어가고 천국에 마음이 들어가서 감격하고 찬양하고 있는 동안에 천국 티가 지진으로 나타납니다, 이 땅에.
감옥 문이 열려버리고…
또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어떻게 합니까?
천사가 와서 옆구리를 차도 제정신이 안들만큼 깊이깊이 잠이 듭니다.
얼마나 편안했으면 그렇게 깊이 잠이 들겠습니까?
근데 세례 요한은 왜 이러는 겁니까, 지금 왜 이러는 겁니까?
세례 요한에게 십자가 사건이 주어지질 않고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 세계내의 경계를 벗어나서 해외, 천국이라고 하는 세계 바깥에 있는, 이 땅 바깥에 있는 천국에 마음을 둘 수 있도록 세례 요한에게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례 요한도 결국 구약에 많은 모세나 여호수아나 뭐 예레미야 이런 선지자들과 같은 대우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못 받았다고는 말을 할 수 없겠죠?
그러나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 흔들리고 실족의 가능성 앞에 빠져 들어가는 이유가 뭡니까?
국내 진학반의 심정으로 예수님을 봤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국내에서 이 세계 내에서 좀 더 나은 미래로 진학하겠다고, 좀 더 나아진 형편으로 진학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어서 예수님에게 좌절하게 된다는 겁니다, 실족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기쁨이 없어요, 천국 티도 안나요.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더 훌륭한 사람은 없다’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모니 NO, 세례 요한보다 못하다, 왜?
영원한 진리 되시는 주님을 직접 가리키시며 주님을 준비한 분이니까, 공자보다 석가모니보다 누구보다도 소크라테스보다 나을 수밖에 없지요.
근데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이보다 낫다. 아! 기가 막힌 말씀이에요, 이게 무슨 말일까요?
여러분, 국내에서 최고의 명문이 어딥니까?
서울대학이에요, 서울대학이 전 세계 대학 중에 순위가 보니까 2011년에 42등입니다 42등.
그리고 카이스트가 우리나라에서는 두 번째로 100등 안에 든 거예요, 세계에서 90위에요, 포스텍이 98위입니다.
그리고 연대, 고대, 한양대, 성균관대 우리나라에서 좋다는 대학들 100등 안에 흔적이 없어요.
홍콩대학이 22위 홍콩에 있는 대학 3개가 50위 안에 들어갑니다. 도쿄대학이 25위 이렇게.
그런데 서울대학이 42등이에요.
1등이 어딥니까? 캠브리지대, 2등이 하버드대학, 3등이 MIT, 4등이 예일 그 뒤에 5등이 옥스퍼드 대학 이렇게 나가요, 순서가.
자, 그러면 비유적으로 얘기하는 겁니다, 비유적으로.
서울대학이 전 세계에서 42위에요.
서울대학에서 1등하는 사람 전교에서 수석 졸업하는 사람, 전 세계 42위 학교에서 그리고 전 세계 1등인 캠브리지대나 2등인 하버드대학에 있는 사람 비록 1등은 아니라도, 그냥 숫자적으로 보면 이 캠브리지대나 하버드대학에 있는 사람이 서울대 1등보다 낫다 이겁니다 순위 상으로 보면, 그렇게 비교가 되겠습니까?
실제로 보면 캠브리지대 1등보다 서울대 10등이 더 나을 수도 있어요. 내용적으로.
그러나 숫자상 그리고 비유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이렇다는 거예요.
서울대 1등이 그래 봐야 서울대가 전 세계 42등이니까, 전 세계에서 1등 대학인 캠브리지나 2등인 하버드대학에서 중간쯤 하는 것보다 나을 수가 없다, 이렇게 비유적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별나게 잘난 사람 많지 않습니까? 이 세계 내에서, 국내에서, 영적인 국내에서 영적인 국내가 이 세상 안이니까.
여기서 일등 한 사람, 마음이 십자가를 통하여 이 세계에 대해 죽고 이 세계에 대해 해외인 천국으로 마음이 들어간 사람보다 나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나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요즘 기독교인들이 어때요?
세상에서 믿지 않으면서 1등한, 세계 내에서 이 국내 진학반에서 최고 대학을 들어간 사람보다 잘난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모두가 부러워하는 게, 부러워하면 진다고 그러잖아요? 근데 부러워하는 대상이 누구냐 하면 이 세계 내에서 국내 진학반에서 1등한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겁니다, 각 방면으로.
정치계, 학계, 경제계, 그거 아니라는 거예요.
자, 먹고 살 끼니도 없을 정도로 가난하고 돈이 없고 자식들은 자식대로 공부 못하고 건강도 문제가 있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 상황이 나아지는, 더 상위학교에 진학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 세계 내에서.
그런 상태에서 아예 돈이 많거나 적거나 다시 말하면 서울대가 좋아진다거나 말거나 연세대 입시전형이 어떻게 바뀌거나 말거나…
이건 무슨 뜻입니까?
돈을 벌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 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 높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 이런 거 상관도 없이, 누가 돈을 벌거나 말거나, 잘 살거나 말거나, 높아지거나 말거나 우리는 아예 이 세계 내에서 일어나는 데에 우리 마음을 둘 이유도 없고,
왜? 해외 유학파이니까 천국으로 마음이 가야 될 사람들이니까…
그렇지 않고 예수 믿으면 반드시 좌절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주시려는 것은, 이 세계 내에 진학이 아니니까.
세례 요한이 문제가 뭐였다고요? 사도 바울과 다른 게 뭐였다고요?
사도 바울은 ‘마음이 위의 것을 찾으라, 내 마음이 주님 안에서 하늘에 앉히운 바 되었다, 이 몸은 하늘에 앉혀진 마음에서 느껴지는 천국의 티를 내고 있는 중이다’
이런 분이었기 때문에 감옥에서도 찬송을 하게 됩니다.
더욱더 확고해 집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내가 갇힌 것이 복음의 진보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이게 웬일입니까?
죽음의 기운이 다가 올수록 벌벌 떠는 것이에요.
이거 뭐 세례 요한이 나쁘다고 할 수 있겠어요, 약하다고 할 수 있겠어요?
분명히 주님이 못 박으셨죠, ‘세계 내에서 제일 훌륭한 자다’
그러나 소용없어요, 세계 내에서 훌륭한 자인 한은,
예수님을 끝까지 쫓아 갈 수 없는 것이 예수님은 반드시 어떤 말씀과 어떤 행동을 하시든지 간에 천국을 갖다 붙여놓고, 그 천국을 고려해서 얘기하시는 거라서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이 세계 내에 있는 한은, 예수님에게 실망하고 좌절하고 실족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신앙은 해외 유학반이에요.
국내에서 최고대학을 가려고 노력하는 게 신앙이 아닙니다.
세계 내에서 더 나아지는 상황, 더 나아지는 내일, 더 나아지는 미래를 향하여 몸부림치며 기도하며 예수님 붙잡고 가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을, 이 세계를 서울대 있고 뭐 서울대라는 것이 비유적으로 돈 많~이 버는 거라고 합시다, 고려대 있고 고려대라는 게 아주 건~강한 미래라고 합시다, 연세대 연세대라는 것이 아주 성공하는 미래라고 생각합시다, 거기에 진학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옆집 아저씨가 뭐 연세대학을 들어가… 다시 말해서 성공했다 어떻게 성공의 방법을 가르쳐준다, 어떻게 건강하게 산다, 어떻게 뭐 돈 많이 벌고 산다 이 모든 것을 향한 진학의 노력이 아니고 관심이 없는 겁니다, 떠나는 겁니다.
그리고 이 몸이 남아 있어서 하는 일은 이 세상에서 뭐 좀 더 잘살아 보겠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가서 느끼고 있는 그 천국을 티내기 위해서, 천국을 소개하고, 천국의 티를 내고, 천국의 기운이 나타나는 걸 위해서 다른 사람들도 그 천국을 가지라고 다른 사람들도 해외로 떠나자고 권유하기 위하여 이 땅에 남아있는 겁니다, 이 땅에.
세상에 대한 변혁을 통해 혁명적인 수정과 변경을 통해서 이 세상을 바꾸겠다는 그런 거 아니에요, 세상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닙니다.
서울대가 어떻게 바뀌던 연대가 어떻게 바뀌던 고려대가 어떻게 바뀌던 상관없어요.
하버드대학을 들어가기로 꿈꾸는 사람은 그게 상관이 없는 거예요, 이게 바로 신앙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은 군중이 몰려 왔을 때 그 군중을 조직화해서 힘으로 바꾸셔서 이 현실을 바꾸겠다고 생각하시지 않으셨어요.
군중이 임금 삼겠다고 왔을 때 이미 조직이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토대가 다 마련된 거 아닙니까?
그때 그들을 흩어버리십니다, 가라, 가라, 가라!
그리고 혼자 제자들까지 보내시고 산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단독회담을 갖고 기도를 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과 개별적으로 천국으로 가기를 원하셔서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신 것이에요.
교회가 단체로 모인다, 이 세상의 변화를 정치적인 변혁을 꿈꾸고 모이는 게 아닙니다.
각자 안에서 역사하고 거주하시는 그 하나님을 서로 발견하며 내 안에 천국과 내 안에 하나님의 강화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천국을 향하도록 돕는 것이 교회이지, 세상적으로 힘을 규합해서 몇 백억 짜리 건물을 지어내서 세상에 과시하고, 이 세상의 잘못된 제도를 바꾸고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제도가 바뀌어도 해외 유학파에게는 서울대 제도가 바뀌는 것에 불과하고, 연대 제도가 바뀌는 것에 불과합니다.
왜 캠브리지 대학을 꿈꾸는 아이가 그걸 위해 싸우겠으며 그걸 왜 관심을 두겠습니까?
세례 요한의 실족의 이유?
국내 진학반의 상태로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기억하시고, 세계 바깥에 있으나 세계에 붙여 놓으신 천국, 내 위에 있는 천국에 오늘도 십자가를 통과해서 마음이 그리로 들어가고 내 몸은 천국 티를 풀~풀 내며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하신 일은 실제 천국을 이 땅에 갖다 붙이신 것입니다.
그 경계선에 십자가가 있사오니 국내 진학반의 심정을 다 십자가에서 못 박게 하시고. 이 세계 내의 경계를 떠나 내 마음이 천국으로 들어가서 천국에 들어간 마음이 느끼는 모든 천국의 기운을 이 몸으로 티내며 살아가는 하늘 백성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