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55대 경명왕의 큰아들인 밀성대군 박안침을 모시는 재실이다.
1927년 박해철이 다른 후손들과 함께 세운 이곳은 밀성대군과 아들 박욱, 손자 박란의 비석을 세운 경덕단과 재실인 만운재로 되어 있다. 만운재에는 박해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만운재와 앙경문, 유경각, 영첩각, 경초재, 고직사 6동의 건물이 있는데 본래 재실로 건축된 것은 아니었다. 일제시대의 일반주택인 이곳을 밀성박씨 문중에서 매입하여 재실로 사용하고 있는데 고직사와 경초재, 영첩각은 후에 추가로 세워져 지금과 같은 배치를 이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ㅁ자형의 배치를 이루고 있으며 앙경문을 들어서면 만운재가 있다. 만운재 뒤쪽에는 마당을 중심으로 유경각과 좌우로 고직사와 경초재가 놓여 있다. 유경각 오른쪽에는 별도로 담을 쌓고 영첩각을 배치하였다.
만운재는 앞면 5칸·옆면 1칸 반 규모이며 1960년대 말에 기와를 새로 얹었다고 한다. 지붕에서 내린 기와로는 담장 지붕을 이었다. 가운데에 3칸 규모의 넓은 마루를 두고 좌우에 각각 온돌방을 두었다.
유경각은 경덕산의 제사를 모실 때 준비하던 곳으로 앞면 6칸 반·옆면 2칸 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왼쪽부터 부엌·온돌방·마루·온돌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영첩각은 오른쪽에 별도의 담장을 쌓고 건축한 1칸 건물로 경덕단과 만운재를 세운 박해철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뒷벽에 영정을 모셨다.
경초재는 박해철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로 지붕은 앞면에서 보면 사다리꼴인 우진각지붕이다. 북쪽에서부터 마루·온돌방·부엌이 놓았다.
고직사는 관리인이 거주하던 곳으로 경초재와 마주보는 곳에 있으며 앞면 4칸·옆면 1칸 반 규모이다. 남쪽에서부터 마루·온돌방·부엌을 배치하였는데 오랫동안 방치하여 건물 보존상태는 좋지 않다.
만운재(萬雲齋)는 밀성대군(密城大君) 박언침(朴彦침)을 경모(景慕)하는 후손들의 결의에 의하여 홍문관 시독(侍讀)을 역임한 박해철(朴海徹)이 경덕단(景德壇)과 함께 1927년에 창건한 재실이다.
경내에는 경덕단(景德壇)과 만운재(萬雲齋)를 창건한 박해철(朴海徹)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경초재(景肖齋)와 경덕단(景德壇)의 향사(享祀)때 전사청(典祀廳)으로 사용되는 유경각(유敬閣), 영정각(影幀閣) 등 6동(棟)이 배치되어 있다.
경덕단(景德壇)은 신라 55대 경명왕(景明王)의 8대군(大君) 중 장자(長子)로서 왕통(王統)을 부사(不嗣)하고 밀성(密城)에 수봉(受封)된 밀성대군 박언침(朴彦침) 삼중대광(三重大匡) 삼한벽공도대장군(三韓壁控都大將軍) 박(朴) 욱(郁) (밀성대군의 자(子), 고려개국에 공을 세움, 추화산정(推火山頂) 성황사(城隍祠)의 사신(祠神)), 고려개국훈신요동독포사(高麗開國勳臣遼東督捕使) 박난(朴瀾)(박욱의 자(子))의 3세(世) 묘소(墓所)가 세월이 오래되어 전하지 않으므로 후손 시독(侍讀) 박해철(朴海澈)이 1927년에 후손들의 종의(宗儀)를 얻어 1927년에 건립한 단비(壇碑)이다.
경덕단 외에도 비슷한 시기에 밀성박씨 문중의 다른 주체가 건립한 밀성대군 단소가 영남루 경내에 남아있다. 따라서 경덕단(景德壇)은 밀양에 건립된 밀성대군을 추모하는 두 단소(壇所) 중의 하나인 셈이다.
경덕단은 1927년에 건립된 것으로, 무안면 소재지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북측 구릉 상에 위치해 있다. 경내(境內) 출입을 위한 삼문(三門)과 석비(石碑) 3기로 구성되어 있다. 정면 9칸 ·측면 1칸의 삼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서면 향사(享祀)때 제관이 도열하는 넓은 마당이 나오고 그 앞에 석축하여 넓은 제단(祭壇)을 만들고 중앙에 밀성대군(密城大君) 박언침(朴彦침)의 석비(石碑)를 두고 그 좌우에 삼중대광(三重大匡) 삼한벽공도대장군(三韓碧空都大將軍) 박(朴) 욱(郁), 고려개국훈신요동독포사(高麗開國勳臣遼東督捕使) 박난(朴瀾)의 석비(石碑)를 나란히 배치했다.
밀성대군 석비(石碑)의 비문(碑文)은 후손(後孫) 시용(時龍)이 짓고, 해철(海徹) 근명(謹銘)하고, 통정(通政) 농공상부국장(農工商部局長) 오세창(吳世昌)이 전(篆)했다.
제단(祭壇) 위 석비(石碑)의 좌우측과 배면에는‘ㄷ자형 ’으로 벽을 쌓고, 그 벽면에 중국에서 생산된 여러 가지 꽃무늬의 채색 타일로 화려하게 치장했다. 삼문(三門)의 외벽(外壁)은 적벽돌을 조적한 것으로, 벽면에 벽돌과 흰색 줄눈으로 길상문자(吉祥文字)와 무시무종(無始無終) 무늬를 베풀었다.
삼문(삼문) 주위의 하방(下枋) 밑부분은 적색과 흰색 타일로 무늬를 넣어 마감했다. 그리고 내벽면(內壁面)에는 노송(老松) ·학(鶴) ·해(日) 등의 그림을 그렸으며, 기둥 ·보 ·도리 ·서까래 등의 부재에는 여러 가지 그림을 그리거나 모로단청으로 채색했다.
경덕단으로 출입하는 삼문(三門)은 3칸으로, 매칸마다 가운데 기둥 열에 맞춰 두짝 여닫이 양판문(洋板門)을 달았다. 그리고 삼문(三門)의 좌우 6칸은 회랑(回廊)형식으로 단소(壇所)를 향해 개방되었다. 삼문(三門)의 중앙 칸은 소슬삼문으로, 두짝 양판문 위에 안상을 두고 그 위에 홍살문 만들어 단소(壇所)의 성(聖)스러운 상징성을 표현했다.
소슬삼문을 구성하기 위해 중앙 칸의 좌우 기둥만 원형(圓形)의 고주(高柱)로 처리하고, 나머지는 모두 각주(角柱)를 사용했다. 소슬삼문(三門)의 상부가구는 간략한 3량가(樑架)의 맞배집으로, 고주(高柱)위에 주두(柱頭)가 놓여 대량(大樑)을 받는다.
만운재(萬雲齋)는 본래 재실(齋室)로 건축된 것이 아니었다. 원소유자가 무리한 주택공사로 경제적인 곤경에 처한 것을 밀성박씨(密城朴氏) 정국군파 문중에서 이 집을 매입하여 경덕단의 재실로 사용해오고 있다.
따라서 전반적인 건물 배치는 일제 강점기의 상류주택형식이며, 여기에 재실로 사용되면서 고직사(庫直舍) ·경초재(景肖齋) ·영정각(影幀閣)을 추가로 건축하여 지금과 같은 전체 배치를 이루었다.
경덕단(景德壇) 우측에 자리잡은 만운재(萬雲齋) 경내(境內)에는 앙경문(仰景門)을 비롯 만운재(萬雲齋) ·유경각(유敬閣) ·영정각(影幀閣) ·경초재(景肖齋) 등 6동(棟)의 건물이‘口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앙경문(仰景門)을 들어서면 정면(正面) 5칸 ·측면 1.5칸의‘一자형 ’의 만운재(萬雲齋)가 있다. 만운재 뒤쪽에는 마당을 중심으로 유경각(유景閣)과 그 좌우에 고직사(庫直舍)와 경초재(景肖齋) 가 놓여 튼‘ㄷ자형 ’을 이루고 , 유경각(유敬閣) 앞쪽에 만운재가 있어 전체적으로는 튼‘口자형 ’을 이루었다. 유경각(유敬閣) 우측에 별도의 담장을 쌓고 영정각(影幀閣)을 배치했다
소유자: 밀양박씨 정국군파 종중
위치 : 경남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854
[출처] 만운제|작성자 하여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