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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의 나라 터키를 사랑합시다. '이제... 짝사랑은 그만합시다........' 라에 답변을 드립니다.
트르크족의 정신이 배어 있는 "아이 일디즈" 국기 입니다.
유목민의 후예로 가족 간의 화합을 최선으로 생각하며 국기를 사랑하고 축구를 국기로 여기는 나라, 그 나라의 7,500만 백성 모두가 하나같이 동방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을 형제의 국가라며 친한 사상을 갖고 있는 줄 이번에야 알았습니다.
지금의 터키 사람들은 우리처럼 수천, 수만 년간 그 곳에서 살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중앙아시아에서 양을 치며 유목 생활을 하던 투르크 족들(역사책에 나오는 돌궐족)이 중동으로 이주해오면서 현지인들과 융합하며 이슬람교로 개종하였고. 그 중에서 세력이 큰 오스만 투르크라는 부족이 나머지 투르크 족과 이슬람권을 통합하고'지금의 터키 땅을 지배하던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정복하여 이슬람의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이후 지금까지 이들은 계속하여 거기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유목민들은 황량한 들판에서 죽음을 무릅쓴 생활을 해야 하기에 기질적으로 친구와 적을 구분하여 친구와는 영원히 우호선린관계를 지속시키는 속성이 있습니다. 5세기 6세기경 통일 중국의 세력이 강해지자 중국의 서쪽에 위치한 돌궐족과 동쪽에 위치한 고구려는 동맹을 맺어 선린우호관계를 지속하게 되고 이는 터키의 역사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여 터키 인들은 어려서부터 고구려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갖게 되었고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대한민국에 대해 우호적인 분위기가 이어져 온다합니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의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우리의 고구려가 열심히 싸우기도 했지만 돌궐이 서쪽에서 군사적 시위를 한 것도 수양제가 군사를 돌린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터키의 교과서엔 자세히 나온다하는데 우리의 교과서엔 돌궐에 대해 아주 짧게 기술되어 있으니 우리로선 터키에 대해 잘 모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후 실지를 회복한 터키는 동방의 형제국가를 잊지 않았고 6-25라는 민족상잔의 비극이 발생하자 지원병들로 구성된 용맹한 병사들을 파병하여 우리를 공산주의의 위협에서 구해내기도 했을 뿐 아니라 15,000명을 파병하여 2,500여명이 부상을 당하고 741명의 고귀한 목숨을 대한민국에 바치기도 하였으니 혈맹으로 맺어진 형제의 국가란 말이 무색하지 않을 것이라 봅니다.
이후 국력이 약한 우리가 어려울 때 UN과 국제사회에서 이편저편을 가를 일이 있을 경우엔 숙고하거나 재는 일이 없이 무조건 대한민국 편을 들었다 하니 우리로선 얼마나 가슴 뿌듯하고 행복한 일이었겠습니까? 뿐만이 아닙니다. 2009년 가을 서해상에 있는 우리 땅 연평도가 포격을 받았을 땐 터키의 언론 매체들은 하나같이 형제의 나라에 전쟁이 터졌다며 대서특필했고 인터넷에선 형제들이여 걱정하지마라 우리가 가겠다. 라는 말이 우후죽순처럼 번져나갔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가슴 뭉클한 일입니까? 이제 우리도 터키와의 선린우호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그들이 우리에게 했던 짝사랑에 보답해야할 때가 되었다 생각되어집니다.
이렇게 남달리 대한민국을 사랑했던 투르크인들은 대한민국의 백성들도 당연히 자신들을 사랑하는 줄 알았답니다. 하지만 이 땅의 백성들은 교과서에서도 배우질 못했고 너무 가난하여 좌우를 돌아볼 형편이 되질 못했었지요, 터키하면 그저 6, 25동란 참전 16개국 중에 한나라로만 알고 있었고 어디에 있는지, 어떠한 민족인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고 지내다 2002년에야 비로서 월드컵을 통하여 터키라는 나라를 다시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늦었지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또 선조들의 덕택으로 국력이 신장되어 다 방면에서 협력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되어집니다.
터키를 여행하다 보니 터키는 다른 나라에 비해 국기를 유독 사랑하는 나라로 보였습니다. 관공서는 물론이고 주유소에도, 상점에도, 가정집에도 아이 일디즈라는 국기가 게양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산꼭대기에도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터키국기를 터키 국민은 ‘달과 별’이라는 뜻의 ‘아이 일디즈(ay yildiz)’라는 애칭으로 부른다고 하는데 BC 4세기경 마케도니아의 군세(軍勢)가 비잔티움(이스탄불)의 성벽 밑을 뚫고 침입하려 했을 때 초승달 빛으로 이를 발견하여 나라를 구하였다는 전설을 그리고 있답니다. 그밖에 1389년의 코소보전투가 끝난 후 피바다 속에 나타난 신비로운 달과 별을 가리킨다는 등 여러 설이 있지만 터키 국민들은 국기에서 조국을 위해 산화한 선조들의 얼을 본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국기를 사랑하는 감정이 남다르고 애국심이 충만한 민족이라 합니다.
1988년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터키정부의 요직에 있는 인사(국방부장관)가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형제의 나라 대한민국에 가면 엄청난 환대를 받을 것으로 생각을 하였답니다. 헌데 우리의 의전이 소홀하여 섭섭한 마음이 들었고 어찌된 일인지 거리에 나가 확인할 기회를 가졌다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중요인사가 만난 한국 사람들은 모두가 다 터키란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어느 민족인지, 터키와 어떠한 관계인지 모르고 있었답니다. 실망한 이 인사는 고국으로 돌아가 "민족이여 환상에서 깨어나자 이제 짝사랑은 그만두자" 라고 매스컴에 기고를 하였고 터키 백성들은 깜짝 놀랐다 합니다.
신이 사랑하여 만든 나라 터키는 땅이 넓고, 기름질뿐 아니라, 기온이 온화하고 4계절이 있어 사람이 살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답니다, 하지만 신은 100가지 좋은 것에 한 가지 나쁜 것을 주었으니 바로 지진입니다. 보통 100년에 한번씩은 큰 지진이 발생한다고 하는데 1999년에 4만 명이 사망하는 커다란 재앙이 닥쳤습니다. 이때 전 세계에서 터키로 구호자금을 보냈는데 한국 정부에서 보낸 금액이 7만불 당시 환율로 딸랑 7000만원이었습니다. 일본은 한국보다 100배나 많은 600만불, 한국보다 훨씬 나라가 작은 대만이 250만불, 전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 방글라데시조차도 10만 불을 보내었으니 터키 인들의 한국 사랑을 알고 있는 터키 주재 한국대사는 한국에서 보내온 이 돈이 너무 작은지라 터키 정부에 바로 전달하지 못하고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현지의 사정을 설명하고 지원을 받는 등 40일 간의 노력 끝에 터키지진모금은 23억원이 만들어집니다, 대사는 정부가 보낸 7000만원, 합하여 23억 7,000만원을 전달하여 형제국에 대한 체면을 세우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후사정을 알고 있을 터키 정부의 시선이 고울 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터키인들의 실망감은 2002년 월드컵 4강전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정점을 이루게 됩니다. 터키는 국기가 축구라 할 만큼 모든 국민이 축구에 열광을 하고 있습니다. 유명 클럽의 1년 회원권 값이 무려 2억 5000만원이나 하고, 유명클럽 간 경기에 초대하는 것이 최고의 환대로 여겨져 비즈니스에 애용될 정도라 하며, 케이블 TV의 축구경기 유료채널 시청료가 월50,000원이나 하더라도 국민의 90% 정도가 시청할 정도이고, 대화의 대부분이 축구 이야기일 정도로 축구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국민입니다. 또한 터키는 축구 이외엔 이렇다 할 스포츠가 없어 올림픽에서 조차 자국의 국기를 홍보할 기회가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일로도 국기를 홍보할 기회가 없었던 나라이지요, 축구 실력은 뛰어나지만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어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하다. 어렵게 예선을 통과하여 승승장구 끝에 브라질과의 준준결승에 축구심판으로 형제의 나라 한국인이 주심으로 배정되었다는 소식에 터키백성들은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합니다. 헌데 막상 뚜껑이 열리자 아연 실색할 일들이 벌어지고야 말았습니다. 터키 선수가 조금만 움직이면 호루라기를 불어대던 심판이 브라질 선수의 태클이나 오프사이드엔 휘슬을 불지 않는 일이 벌어졌으니까요 당연히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진 터키선수들은 울분을 감추며 운동장을 떠날 수밖엔 없었고 터키 백성들은 짝사랑의 허무함을 실감할 수밖엔 없었습니다.
터키 국민들의 여론은 분분했고 지중해 연안 7,500만의 짝사랑이 반한감정으로 번지기 일보직전에 기적적인 반전이 일어나는데 바로 붉은 악마들의 이벤트였습니다.
터키는 브라질에 지고 한국은 독일에 져, 3~4위전에서 터키와 대한민국이 결정되자 인터넷을 통해 터키란 나라가 어떠한 나라인지 터키를 알자는 광풍이 불었고 불과 몇 일만에 우리의 젊은이들은 터키가 6, 25 동란에 참가하여 미국 다음으로 많은 피를 흘리며 공산주의와 맞서 자유를 지켜낸 우방임을 알게 되었고 터키 본토에서의 무조건적인 한국 사랑을 뒤늦게 감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터기 국기와 어깨동무로 나타났습니다.
2002년 6월 29일 korea의 world cup 응원단 붉은 악마들은 경기장 입구 에서부터 소형 터키국기를 배포하고, 터키의 역사를 담은 피켓을 통해 양국의 좋은 관계를 알리자 곳곳에서 자발적인 서포터가 생성되고 국민들 사이에 좋은 감정이 생기는 가운데 다정스런 모습으로 입장한 양국 선수들은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었고, 터키의 국가가 경기장에 울려 퍼지면서 메인 스타디움의 정면을 꽉 채우는 엄청나게 큰 터키 국기가 펄렁이며 나부낄 때 터키 국민들은 생전 처음 보는 엄청난 크기의 국기와 그 국기를 향해 경건하게 오른손을 가슴에 얹어 부동의 자세로 경의를 표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한 양손에 터기 국기를 들고 환호하는 형제국 국민의 모습을 보며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감격했습니다. 역시형제들이구나! 같은 어순을 사용하고, 푸른 몽고반점을 공유하는 KOREA가 아시아에서 우리를 잊지 않고 있었구나! 자국 에서도 보기힘든,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대형 국기가 혈맹국에서 등장했고 이것을 전 세계 사람들이 본다는 것에 매우 흥분했다고 합니다. 이후 터키인들은 90분 내내 눈물을 머금으며 경기를 관전할 수밖엔 없었습니다. 월드컵 경기가 열리고 있는 곳이 터키인지 한국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관중석에선 한국인들이 한국선수보단 오히려 터키 선수들에게 더 많은 박수와 갈채를 보내었으니..... 경기는 3:2로 터키의 승리로 끝이 났고, 양국의 선수들은 서로 어깨동무를 하여 그라운드를 돌고, 관중석을 향해 인사를 할 때 그간 쌓여 있던 앙금은 눈 녹듯 사라지고 따듯한 우정과 사랑만이 가슴 한편에 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3, 4위전이니 만큼 승부에 연연하지 말고 매너와 우정, 스포츠 정신에 입각하여 경기를 치르고자 하는 우리 선수와 응원단의 행동이 터키 국민들의 마음을 연 것입니다. 게임이 끝나자 스탠드에는 다시 한 번 터키의 대형국기가 등장했고 그 위에는 보다 작은 태극기가 등장합니다. 자국 국기보다 상대편 국기가 더 큰 것은 역대 월드컵을 통 털어 처음이었다. 합니다. 전 세계 외신들은 이날의 3.4위전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구 경기였다고 보도 했으며 터키는 이날의 경기를 무려 한 달 이상을 보여주고 또 보여주었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모습에 터키 국민들은 월드컵 우승보다 더한 것을 얻었고 더욱 진한 감동을 받았다. 라고 합니다. 경기가 끝난 뒤 일부 식당에선 동양인들을 만나면 한국인이냐고 물은 뒤 음식 값을 받지 않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 달 간이나.....
경기가 끝난 뒤에 터키에서 TV를 통해 경기를 시청하던 많은 백성들이 눈시울을 적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 역시 가슴이 울컥하는 감격을 맛보았습니다. 이역만리 지중해 연변에 한국을 사랑하는 7,500만의 민중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한편으로 얼마나 뿌듯하고 자랑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라도 우리 모두는 두 나라의 우정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터키인들은 지금도 한국인을 만나면 대~한민국, 을 연호하고 짝짝짝 짝짝 박수를 치며 우정을 표시 합니다.
우리도 이제 형제의 나라 터키를 사랑합시다! 그들의 짝사랑이 헛된 것이 되지 않도록 보답을 합시다! 2012년 1월 21일 PS- 코소보 전투(1389.6.15) 1389년 6월 15일 남(南)유고슬라비아의 코소보 고원에서 있었던 싸움인데 오스만 투르크군은 술탄 무라드 1세가 인솔하였고 연합군은 세르비아왕 라자르공(公)이 지휘하였다. 싸움은 오스만 투르크군의 승리로 끝났고 발칸 반도에서 투르크 지배의 기초가 구축되었다.
터키의 경제 중심지이자 동로마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 시청 앞입니다.
슐탄 아흐메트 사원 블루모스코 앞에 선 이사장
이스탄불 시청 앞에서 휘날리고 있는 국기
히포드럼 광장
상형문자 히포드럼 광장에는 여러가지 조형물이 있는데 가장 눈에 들어오는 곳 입니다.
아주 깨끗하게 잘 정돈 된 광장 입니다.
정박사도 희포드럼광장에서 포즈를 취해봅니다.
블루모스코 경내로 들어가려 합니다.
첨탑이 6개 있는 이슬람 사원으로 1609년에 건축 되었다.
이슬람 사원 중에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중요한 건물이라 합니다.
1609년이면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이 막 끝난 시점인데 이들은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건물을 지었다니 그저 겅이로울 뿐입니다.
블루모스크 사원을 나와 식당으로 가는 중에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이스탄불 시내는 역사적 유물의 보고로 보입니다. 건물위가 둥굴고 첨탑이 있는 것은 선조인 유목민들 천막의 형상이라 합니다.
고대 동로마 시대의 성곽 1465년부터 1853년까지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술탄이 살던 곳으로 터키 이스탄불에 있다.
톱카프 궁전 보스포루스해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톱카프 궁전으로 가는 길 우리는 건물에도 쓰지 못하는 그 비싼 대리석을 도로에 깔아 위용을 높였습니다.
슐탄의 문장
톱카프 궁전의 정원 오스만 트루크 제국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톱카프 궁전의 첨탑 여기에 있으면 마치 이태리나 그리스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됩니다.
돌궐 족의 천막을 연상 시키는 식당 건물 사신이나 궐내 주재인 등 한 끼에 수천명이 식사를 할 수 있는 규모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톱카프 궁전을 나서며 정박사가 손을 흔들어 신호를 보냅니다.
오스만 트루크 제국은 비잔틴 제국을 정복한 후에도 그들의 문화를 남겨두었다.
태극기와 같이 휘날리고 있는 아이 일디즈
석가탑 형상 한국전 참전을 기리는 탑이라 합니다.
한국전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이 탑을 세웠다 합니다.
토이기 용사들을 위해 한국에서 흙을 가져왔다 합니다.
우리는 형제다. 사진을 보니 옛 조상들의 피가 섞여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괴뢰메 골짜기에서 좋은 배경을 두고 포즈를 취하는 정박사
카피도키야에서 열기구를 타기전에 가스를 넣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 명절을 즐겁고 보람있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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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열기구타고 탄성 올리던 풍광이 눈에 선합니다........
어제 하루종일 글을 썻는데 글은 다 읽었는지? 궁금합니다.
당근 ! 힘들게 쓰신 글인데 다읽었죠, 근데 뒤돌아서면 잊어버려용...몇번 읽다보면 조금은 외워질 수 있을런지원 나이의 한계네요~~~ㅋ ㅋ ㅋ
다 읽으셨다니 놀랍습니다.
이틀에 걸처 썼는데 누군가가 끝까지 읽으리라고는 미쳐 생각치 못했습니다.
다만 고생한 것을 보상 받기 위해 구정 때 조카들 보고 읽으라 하였는데 꽤나 지루해 하더군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