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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고객으로 사랑하며 섬기며 살자(2193.2023.5.21)
엡5:22-33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서로 인사합시다. ‘평생 고객으로 정성껏 모시겠습니다’이런 이야기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고객님 안녕하십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고객님 만족하십니까? 아주 친절하게 평생 고객으로 모시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들 여러분은 서로 평생 고객으로 친절하게 모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곳이든지 고객에 대해서 상대 할 때에 보면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줍니까? 사람들은 말 한 마디에 행복할 수가 있고, 미워할 수가 있습니다. 서로에게 플러스 에너지를 가진 칭찬과 격려의 말을 얼마나 하고 있을까?
듣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이 생기고, 어깨가 으쓱해지는 말, 사랑과 위로가 가득한 말, 사랑과 희망이 샘솟는 말, 이런 말만으로도 당신의 세 치 혀는 참으로 위대한 기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에 가슴이 뭉클해지고,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쌓아두었던 원망이 눈 녹듯 사라집니다. 부부가 행복해지는 것은 큰 돈이 드는 것도, 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상대방에게 듣고 싶은 칭찬과 격려의 메시지를 건네거나 당연히 알거라 여기며 마음속에 간직했던 사랑의 한 마디 말을 하는 것에서 가정의 행복이 시작된다고 봅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썹이 없는 한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 만나기가 두려워 할만큼 큰 콤플렉스였고 대인관계에도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고 행복한 결혼생활이 시작 되었습니다 결혼 후 그녀는 항상 남편보다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정성껏 눈썹을 그렸습니다. 눈썹 없는 자신의 모습을 남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얼마 후 여자는 아기를 낳게 되었습니다. 예쁜 딸을 낳은 그녀는 병원 침대에 누웠고 남편은 머리맡에 앉아 사랑스런 눈길로 이쁜 딸을 낳아준 아내를 바라보며 땀에 젖은 그녀의 얼굴을 아주 정성스럽게 닦아주기 시작했습니다.
이마와 양볼, 입가, 턱…, 남편의 수건이 눈썹 가까이에 올까봐 조바심을 태웠지만 눈썹 가까이는 오지 않고 얼굴 모두를 깨끗하게 닦아 주었습니다. 남편은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편은 사랑스런 눈빛으로 아내를 바라보며 아내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는 것이였습니다. 이것이 행복한 부부의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부부 사이가 좋으면 ‘금슬이 좋다’라고 말을 합니다. 거문고와 비파가 서로 조화롭게 화음을 이루듯 남편과 아내가 불협화음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부부란 그 누구보다도 서로의 결점을 잘 아는 사이일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의 결점을 잘 알면서도 말 없이 포용하고 배려해주는 사랑할 줄 아는 마음만이 행복한 부부를 만드는 비결일 것입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행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행복을 빼앗아 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데 방해되는 요소는 뭡니까? 어떤 분은 ‘남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아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말은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나는 결혼을 잘못해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도 그런 생각이 옳다고 여기실까요? 하나님은 여러분의 가정이 행복치 못한 것이 여러분의 배우자 때문이라고 보실까요?
또 하나님이 실수로 여러분을 잘못 짝 지워 주신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가정이 행복하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부부가 행복해 지는 방법을 성경 여러 곳에서 가르치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불행한 원인은 남이 아닌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욕심’과 ‘탐심’이 여러분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아멘을 안하셔도 하는 수 없습니다. 왜냐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신33:29‘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 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우리는 본래 행복하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특히 가정은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도록 만드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가정의 주체인 부부행복, 이것은 하나님이 만든 최고의 복입니다. 이 부부행복이 회복되어야 가정 행복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부부행복을 이룰 수 있을까요?
1.아내가 가정 행복의 열쇠를 갖고 있기에 아내의 복종이 행복의 비법입니다.
가정의 행복의 열쇠는 누가 갖고 있나요? 하나님이 갖고 계시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구성원인 부부에게 주셨습니다. 부부 중에도 특별히 아내에게 더 많은 비중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아내들에게 먼저 명령하십니다. 22-24절‘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남편보다 먼저 아내가 행해야 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가정 행복의 열쇠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가정 행복의 열쇠는 다른데 있지 않고 복종에 있다고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복종입니까? 자기 남편에게 입니다. 남의 남편이 아닌 자기 남편입니다. 우리가 알듯이 사도 바울은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독신으로 살았으면서도 여성의 심리를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그때 당시에도 많은 여성들이 남의 남편에게는 친절하고 예의를 갖추고 예쁘게 보이려고 애를 쓰면서 자기 남편에게는 아무렇게나 하기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 같습니다.
또 어떻게 복종하라고 하십니까? 주께 하듯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주님께 복종 하듯 남편들에게 복종하라 하십니다. 왜 복종하라고 하시죠?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결정정하면 몸은 순종하듯이 아내는 머리되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저는 왜 하필이면 복종이라는 단어를 썼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순종이라면 좀 더 나을 텐데 왜 복종이라 했을까 살펴보았습니다. 순종은 순순히 따르는 것으로 자원하여 따르는 것입니다. 복종은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아내들에게 복종을 명하실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서 반발하실 분도 계십니다. 오늘날 남녀가 평등한 세상에 왜 한쪽이 일방적으로 복종을 해야 하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생각이고 성경은 남편이 머리이기에 따르라고 명령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이고 그것이 행복의 비법이라는 것입니다.
부부는 주님의 법칙대로 살아야 합니다. 골3:18-19‘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부부에 대한 주님의 법칙은 사랑과 복종입니다. 부부라는 수레는 사랑과 순종 이라는 바퀴로 갈 때 그 가정의 식구들은 화목가운데 살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할 일은 복종이라고 했습니다.
남편과 주님 중에서 누구에게 먼저 복종을 해야 합니까? 주님이 먼저입니다. 남편에게 하듯 주님에게 하라가 아니고 주님께 복종하듯 남편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순서가 바뀌면 신앙생활 자유롭게 할 수 없고, 가정생활에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도 주님이 함께 하실 때 차원 높은 행복이 있습니다. 남편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고 믿음생활을 바르게 하신다면 얼마나 복된 부부입니까?
그러나 남편이 주일날 예배 드리기 보다는 등산, 낚시, 무슨 모임에 가거나 가족끼리 놀려가자 하면서 엉뚱한 길로 나아갈 때 아내로서 어떻게 해야합니까? 누구에게 복종해야 합니까? 주님께 복종해야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남편을 위하는 길이요, 가족을 위하는 길이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길입니다. 먼저 주님께 순종하고 그 다음이 남편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엡5:23‘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고 했습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을 변화 시키려면 주안에서 순종의 향기를 나타내십시오. 남편의 권위를 짓밟지 마십시오. 주님이 남편에게 머리 역할을 맡기신 줄 알고 주께 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그 때에 주님이 허락하시는 복된 삶을 사실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그러기에 행복의 열쇠인 복종을 실행하려면 하나가 꼭 있어야 합니다. 아내가 자기를 내려놓은 ‘겸손과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절대로 복종이 어렵습니다. 정말 어떤 때는 남편이 하는 짓이 맘에 안 들고 확 뒤집어엎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는 아멘을 안 해도 됩니다. 이럴 때 ‘아멘’하면 집에 가서 싸우게 됩니다. 그래도 일단 순종하세요. 그리고 나중에 기회를 봐서 생각을 내어놓으세요. 그러면 지혜로운 아내가 되는 것입니다.
2.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남편의 사랑이 행복의 비법입니다.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한 남자의 아내가 그만 죽게 되었습니다. 이 슬픔을 당한 남자에게 한 친구가 문상을 왔습니다. 그 친구는 빈소에 오자마자 방바닥을 치면서 대성통곡을 합니다. 이 남자는 생각하기를 ‘참 수상하네, 저 친구가 왜 남의 아내가 죽었는데 저렇게 슬피 울지? 저번에 집에 몇 번 오더니 이상하게 된 게 아닐까? 한참 동안 서글프게 운 친구는 드디어 이 상주에게 인사를 합니다. 상주가 하는 말이 ‘여보게, 내 아내가 죽었는데 왜 자네 아내가 죽은 것처럼 그렇게 슬피우나?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 ‘그럼, 사연이 있지. 다 나를 위해서 운다네. 생각해 보게. 자네는 일이 잘 풀려 이제는 자유인이 된게 아닌가? 난, 언제 일이 풀릴지 기약이 없어 내 모습이 서러워 운다네’ 이것이 요즘 현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번째로 남편들에게 명령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할 일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되 아카페의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내 기준에 따라 내 요구에 따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랑은 자신을 부정하고 보상을 원하지 않는 철저한 희생적 사랑입니다. 남편의 참된 권위는 아내를 사랑함에서 나타납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희생하신 것처럼 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희생적인 사랑을 나타낼 때 남편의 권위가 세워지고 그러한 남편에게 아내가 순종하게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25절‘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아내를 어떻게 사랑하되 어떻게 사랑하라고 하시나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온전한 헌신입니다. 그렇게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8절‘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자신과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하셨습니다.
여기 보세요.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남의 아내가 아닙니다. 남의 아내에게는 온갖 친절 다 베풀면서도 자기 아내에게는 무뚝뚝한 남편이 되면 안 됩니다. 성경은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같이 사랑하라하십니다. 그러면 그것이 자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내 몸을 사랑하듯 아내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말로만 ‘사랑해’가 아닙니다. 아내가 아프면 내 몸이 아픈 것 같이 보살피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아프면 ‘왜 병원 안 가보는 거야’ 하고 소리만 지르지 말고 손으로 머리라도 만져 보고 수건이라도 언져 주고 관심을 보여 주란 말입니다. 그렇게 아내를 사랑하면 그것이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권면입니다.
저도 나이가 들더니 좀 철이 들어서 많이 변하더라고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사랑이고 그 말 한마디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내더라고요, 이럴 때는 아멘을 크게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갖고 있는 열쇠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어떻게 실현되나요? 이것도 자기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자기희생을 통한 사랑’이것을 어디서 볼 수 있나요? 우리는 그 모습을 주님에게서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교회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가시관을 쓰셨기에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으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힘들다거나 고통스럽다고 외치거나 신음하지 않고 가셨습니다. 왜요? 그 십자가를 우리가 져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희생입니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의 희생, 이것이 가장 위대한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사랑의 심벌인 것입니다. 그처럼 남편들도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말없이 묵묵히 가정의 기둥도 되어야 하지만 한 몸 된 아내를 생각하고 배려하며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남편의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그 희생으로 가정의 행복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열쇠, 복종과 사랑은 희생이라는 공동분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희생이 없는 복종은 거짓말이고 희생이 없는 사랑도 거짓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희생을 통한 행복이 이루어지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어느 유행가 가사에 있는 글입니다.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
곱고 희던 두 손으로 넥타이를 메어주던때 지금도 생생하오 여보,그때를 기억하오 막내아들 대학시험 뜬눈으로 지새던 밤들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걸치는데 큰딸아이 결혼식날 흘리던 눈물 방울이 이제는 모두 말라 여보, 그 눈물을 기억하오 봄 여름 가을 겨울속에 흰머리가 늘어가네 모두다 떠난다고 당신은 내 손을 꼭 잡았소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걸치는데 다시못을 그 먼길을 어찌 혼자 가려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없소 여보, 왜 한마디 말이없소 여보, 왜 한마디 말이없소 안녕히 잘 가시게~ ~ ~
부부중 어느 한쪽이 먼저 세상을 떠날 때 ‘가는 자’ 가 ‘남은 자’ 에게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짧습니다. ‘여보! 미안해’ 이 말속에는 참 많은 뜻을 내포합니다. 세상의 많은 짐을 맡겨 놓고 가는 것이 미안 할 수도 있습니다. 함께 살아오면서 좀더 잘해 주지 못한 것이 미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마음 아프게 한 것이 미안 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자녀들을 모두 남겨 놓고 가는 것이 미안 할 것입니다.
왜 떠나는 사람은 남은 사람에게 ‘미안하다, 용서해달라’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너무나 많은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온 것을 뒤늦게나마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비로소 참된 의미를 깨달았는데 먼저 떠나는 것이 미안할 것입니다. 만약 나의 배우자가 시한부 1개월의 삶이 남았다고 상상해 보면 내가 배우자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 떠나는 자는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지만 남은 자는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진정 소중한 것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떠나고 나면 좀더 잘해주지 못한 것이 아쉽고 안타깝다고 합니다. 그러나 함께 있을 때는 나의 소중한 배우자를 일상에 묻어 버리고 마는 것이 우리의 비극적인 삶입니다. 오늘 성경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려면 갖추어야 할 요소이기에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산울림의 법칙입니다. 한 소년이 엄마 품에 안겨 울먹거리며 말했습니다. ‘엄마, 산이 날 보고 자꾸 바보라 그래요’그 이야기를 들은 엄마가 물었습니다. ‘네가 뭐라고 했는데’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야, 이 바보야’하고 외쳤지요. 순간 엄마가 빙그레 웃으며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그러면 이제 다르게 말해 보거라. 산에 가서 ’야, 이 천재야‘하고 외쳐보렴’그러자 정말로 산이 소리쳐 주었다. ‘야, 이 천재야~~~~~~’한마디로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이야깁니다.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는 것이야말로 부부의 황금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발 아내는 남편에게 반말하지 마세요. 남편은 아내에게 소리 지르지 마세요. 내가 행하는 대로 상대가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일 바보 같은 사람은 남편을 보고 ‘오빠’라 부르는 사람이고 제일 미련한 남편은 아내를 보고 이름 부르며 야! 자! 하대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아내를 ‘내 사랑’이라 부릅니다. 목사님들 앞에서나 성도들 앞에서도 ‘내 사랑’이라 부릅니다. 호칭이 뭐냐에 따라 상대하는 자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핸드폰에 사모님 이름을 ‘조폭마누라’ 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도 무서워 그랬는지... 그래서 저도 핸드폰에 아내 이름을 아내라 하지 않고 ‘예쁜천사 정경희’라 했습니다. 근데 이 예쁜천사가 가끔 가다가 전화통화가 되면 가슴이 두근두근 거립니다. 왜, 예쁜천사랑 통화하는 것 같아서입니다. 입에 침 바르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실과 바늘의 법칙입니다. 부부란 실과 바늘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바느질 해보신 분은 아시지요? 바늘이 너무 빨리 가면 실이 끊어집니다. 또 바늘이 너무 느리면 실은 엉키고 맙니다. 그렇다고 바늘 대신 실을 잡아당기면 실과 바늘은 따로 놀게 됩니다. 그러기에 실과 바늘은 자신의 역할을 바꿀 수도 없고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남편이 시원찮다고 아내가 바늘 역할을 하려고 해도 안 됩니다. 또 반대로 아내가 시원찮다고 남편이 실 역할을 할 수도 없습니다. 실과 바늘의 조화, 여기에 부부화합의 비밀이 있습니다. 항상 함께 하시고 서로를 도우시고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수영의 법칙입니다. 수영을 땅 위에서 배워 물속에서 수영을 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들 물속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나하나 배워 익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이치를 다 배워 결혼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을 통해 사랑의 이치를 하나하나 깨우쳐 가게 되는 것입니다.
타이어의 법칙입니다. 모래에 빠진 차가 모래를 빠져 나오는 방법은 뭐냐 하면 타이어 바람을 조금 빼는 것입니다. 그러면 타이어가 좀 평평해져서 바퀴 표면이 넓어지기 때문에 모래 구덩이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부부도 마찬가집니다. 갈등의 모래사막에 빠져 헤맬 때, 즉시 자존심과 자신의 고집이라는 바람을 빼는 것입니다. 아내들의 알량한 자존심이 자기를 수렁에서 헤매게 합니다. 남편들의 어줍잖은 고집이 부부사이를 힘들게 합니다. 그때 서로 바람을 좀 빼어야 합니다. 그러면 둘 다 살 수 있습니다. 아멘? 부부사이는 배짱 튀길 일이 아닙니다. 머리가 몸에게 배짱 튀겨봐야 자기가 자기에게 부끄러운 짓이고 몸이 머리에게 자존심 내세워 바야 될 것도 아닙니다. 바람 빼세요. 아멘?
김치의 법칙입니다. 겨울이 오기전에 감장을 담금니다. 그런데 배추는 5번 이상 죽어서야 김치가 된다합니다. 땅에서 뽑힐 때 죽고, 칼로 배추의 배를 가를 때 죽고, 소금에 절일 때 죽고, 매운 고추와 젓갈과 마늘의 양념에 버무려질 때 죽고, 그리고 사람 입 안에서 씹힐 때 죽고, 5번입니다. 그래서 입안에 들어갈 때 사람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김치의 최종 행복입니다. 행복이란 맛을 내기 위해 부부도 죽고 죽어야 합니다. 몇 번 죽어야 한다고요? 5번입니다. 솔직히 내가 경험해 보니 3번만 죽어도 됩디다. 그러면 행복이 피어납니다. 아멘? 죽어요. 따라서 합시다. /내가 죽겠습니다./ 옆에 아내, 남편의 손을 잡고 따라 하세요. /여보 미안해요 /내가 죽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고객의 법칙입니다. 식당 가계에 들어가 보면 그 가계가 될 가계인지 망할 가계인지는 고객을 대하는 직원들의 자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계는 고객에게는 절대 화를 낼 수 없습니다. 항상 미소로 맞이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재빨리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어느 가계는 인사도 안하고 몇 명이세요가 인사입니다. 어서오세요. 반갑습니다. 반갑게 맞이해주는 가계도 있습니다. 부부도 그렇습니다. 남편이 퇴근을 하면 ‘어서 오세요, 고생 하셨어요’반갑게 상냥하게 맞아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왔어’ 하고 텔레비전 보고 있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3.어떻게 부부가 화목을 이룰 수 있습니까?
예전에는 부부를 ‘천정배필(天定配匹)’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이 정해준 배우자’라는 말입니다. 또한 ‘천생연분(天生緣分)’이라는 말도 있는데, 그 뜻은 ‘하늘이 맺어준 연분’이라는 말입니다. 예전 분들은 자기들 부부는 하늘이 맺어준 배필이요, 연분이라는 사상이 있었기 때문에 미우나 고우나 팔자거니 여기면서 참고 견디었던 것입니다.
부부는 주님의 눈으로 서로 이해해야 합니다. 벧전3:7에 보면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라했습니다. ‘지식을 따라’라는 말은 이는 ‘아내가 어떠한 사람인지 이해를 하면서’라는 말입니다. 부부들이 하나님이 짝 지워 주셨기 때문에 헤어지지 말고 일생 같이 살아야 책임이 있다면 상대방을 서로 깊이 이해함으로 행복되게 사는 것을 연구해야 합니다. 어떻게 이해합니까? 비판의 눈으로 보아서는 허물만 점점 커 보일 것입니다. 십자가 사랑의 눈으로 보아야 남편이나 아내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결혼해서 부부가 되어 한 두 해 살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시103:13-14절‘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이 논리를 보시면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느냐 하면 저 인간이 체질을 알고 먼지임을 알기 때문에 불쌍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궁휼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나를 봐야하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불쌍히 여겨야 하나님의 궁휼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이 회복되기를 원하세요. 부부 사이에 궁휼을 구하세요. 신혼때에 왜 그렇게 많이 싸우는지 아세요. 신혼때에 미치도록 싸우는 것은 상대방에게 내가 궁휼을 주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쓸데없는 기대감만 주어서 그렇습니다. 신혼전에는 결혼하면 왕자처럼 공주처럼 떠받들고 살겠다고 기대감을 잔뜩 주고는 결혼 하고 나서는 왕처처럼 공주처럼 떠 받들고 사는 것이 아니라 무수리 취급을 하니까 열받아서 싸우는 것입니다. 저도 신혼초에는 사소한 것 가지고 많이 싸우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60이 넘어서는 부부 싸움이 거의 없어요. 목사님 부부가 너무너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가요.
하나님이 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이 27세에 결혼했는데 신혼때에는 사모님이 허리가 22인찌에다가 바람불면 날아갈 것 같이 호리호리 했고 다소곳했고 음식 솜씨좋은 아내였습니다. 지금은 머리가 희어지고 염색을 하고 은밀한 신체는 다 말 할 수 없지만 중년의 피할 수 없는 갱년기에 복부비만 허리가 두꺼워진 것인데 하나도 보기 싫지 않습니다. 아직도 콩깍지가 벗겨지지 않아서 좋아합니다.
지금 신경쓰이는 것 하나가 있는데 건강입니다. 아프다고라고 하면 제 마음이 엄청 아픕니다. 해줄 수 없는 것이 없어서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건강이 안좋아서 걱정이기는 합니다만 골골히 백세라고 했으니 나보다 3살 더살으라고 항상 이야기 합니다. 그렇게 될줄 믿습니다. 건강이 안좋은데 필요한 것은 부부지간에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궁휼에 대해서 약점이 안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이 회복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내 아내에 남편에 자녀에 대해서 궁휼로 그들을 보살피려고 하면 하나님의 궁휼하심을 구하세요. 그래야 그 궁휼을 가지고 부부가 바라보면 불쌍해 보이고 사랑해 보이는 것입니다.
부부란 서로가 서로를 가장 잘 알면서도 가장 어려운 손님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일생 최고의 고객으로 여기며 상대를 위해 최선의 서비스를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배우자를 최고의 VIP로 모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남편이 Very(베리,매우) Important(임포렌트.중요한, 소중한) Person(펠순, 사람,인간)입니다. 여러분의 아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Very Important Person입니다. 그러기에 평생고객으로 사랑하며 섬기며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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