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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물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24-22
주간조선 2013년 1월 28[2242]김용규 철학자·‘철학카페’ 시리즈 저자
로마 교황의 결정엔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이 가능한가?
신의 무오성이 교황의 무오성을 보장한다고 한때 믿어… 지난날의 믿음은 이제 그 이름뿐! |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사진>이 1987년 사망 전, 정의채 신부(서강대 석좌교수)에게 존재 진리에 대한 24가지 궁금증을 물었다. 그는 병세가 급속히 악화돼 정의채 신부로부터 답을 들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지난해 차동엽 신부가 책을 내고 이 회장의 질문에 대한 뒤늦은 답을 시도했다. 철학자 김용규씨가 이 회장이 가졌던 의문을 다시 자신의 인문학으로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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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3월 16일 로마 바티칸 교황청은 ‘우리는 기억한다: 대학살(shoah)에 대한 소감’이라는 문서를 발표했다. 이 문서에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학살당한 유대인을 돕지 못한 가톨릭 교인들의 잘못을 뉘우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당시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직권으로 임명한 바티칸의 ‘유대들과의 종교적 관련성을 위한 위원회’에서 10년 넘게 준비해 다듬어온 문서였다. 문서 위에는 교황이 위원회의 책임자인 에드워드 카시디 추기경에게 보낸 표지서한(cover-letter)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1998년 3월 17일자 ‘뉴욕타임스’가 그 전문을 공개했다. 그 안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난날의 과오와 비신앙적인 행위들에 대한 회개를 통해서 교회의 자녀들이 그들의 마음을 정화할 수 있도록 그들을 격려합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바티칸의 사과가 미흡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교황이 “지난날의 과오와 비신앙적인 행위들에 대한 회개”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잘못을 사과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때문에 카시디 추기경은 기자회견에서 이 문서는 가톨릭교회가 유대인 대학살을 방조한 일에 대한 ‘사과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공언했다. 그뿐 아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94년에 이미 추기경들에게 보내는 ‘교황직에 관한 가장 중요한 문서’에서 “교회가 이번 천년기에 저지른 모든 죄에 대하여 모두가 고백할 것을 제안”하였다. 바티칸의 공보관이었던 아나톨리는 그의 저서 ‘교황이 용서를 구할 때’에서 요한 바오로 2세가 1980년부터 1996년까지 총 94회에 걸쳐서 “역사 속의 교회의 잘못을 시인하거나 용서를 구했다”라고 지적했다. 역시 유례가 없는 일이다. 상당수 신학자들은 이러한 사실들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간접적으로나마 ‘교황무오설(Papal Infallibility)’이 그르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우리말로는 교황무류설(敎皇無謬說)이라고도 번역되는 교황무오설(敎皇無誤說)은 교황이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우두머리로서 신앙 및 도덕에 관하여 내린 정식 결정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가톨릭 교리이다. 그래서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로마 교황의 결정엔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이 가능한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상식적으로 보아 당연한 질문이다. 하지만 바티칸과 가톨릭교회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20세기의 탁월한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이 1971년에 출간한 ‘무오: 미해결의 탐구’에서 교황무오설은 인간이 만든 교리일 뿐이며 절대적일 수 없다고 주장했을 때, 교황청은 그의 교수 자격을 박탈했다. 왜 그랬을까. 교황무오설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났고, 또 어떤 의미를 갖고 있기에 가톨릭교회가 이 교리를 그토록 옹호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과연 정당할까. 우리는 이제부터 이 같은 내용들을 살펴보며 이 회장의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교황무오설은 어떻게 생겨났나 1077년 1월 추운 겨울날 북이탈리아 카노사(Canossa)의 성문 앞에서는 괴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962년 독일의 오토 대제가 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관을 받은 이후 기독교 세계의 수호자로 자임하던 독일의 국왕 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맨발에 내복 바람으로 추위에 떨며 서 있었다. 얼마 전 자신을 파문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알현하고 용서를 빌기 위해서였다. 교황은 황제를 사흘 동안이나 삭풍이 몰아치는 성문 밖에 그대로 방치하였다. 이것이 중세 교황권의 전성기를 알리는 첫 신호인 이른바 ‘카노사의 굴욕(Humiliation at Canossa)’ 사건이다. 그레고리오 7세는 한편으로는 교황이 황제나 왕보다 우월하다고 선포한 최초의 교황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분열된 교회를 통일하고 교회를 개혁한 장본인이다. 그는 교회개혁의 의지를 담은 27개조의 교황칙서(Dictatus Papal)를 내렸는데, 거기에는 성직매매 금지, 사제의 결혼금지. 속인의 주교 서임권 금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더불어 “로마 교회(가톨릭)는 하느님 한 분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로마 교황은 홀로 보편적(universal)이라고 불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 있다, 오직 그만이 어느 누구에게도 심판받지 않는다, 로마 교회의 결정에는 결코 오류가 없으며, 영원토록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 바로 이것이 교황무오설의 발단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교황무오설이 탄생한 시대적 배경이다. 프랑크왕국 초부터 유럽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교황은 교회의 성장과 안정을 위해 힘이 있는 왕들(예컨대 메로빙거왕조의 클로비스 1세, 카롤링거왕조의 피핀과 샤를마뉴 대제, 신성로마제국의 오토 대제 등)과 결탁했다. 교회가 가진 권리를 일부 왕에게 양도하는 대신 그들의 군사력에 힘입어 재산을 지키고 이민족과 이교도로부터 보호받기 위해서였다. 반면에 왕들은 교회의 교리를 통해 사회 안정과 통치권을 강화하면서 성직자들의 자리까지 좌우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왕과 교황이 상호부조하는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각자의 몸집이 커질수록 그 둘은 동상이몽을 꾸기 시작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혼란스럽던 유럽이 안정을 되찾고 민중들이 차츰 교화되자 교황은 더 이상 왕의 간섭을 받을 이유가 없어졌다. 왕들의 입장에서도 종교를 떠나 새로운 왕권 중심의 시대로 나아가는 데에 교황이 걸림돌이 되었다. 바야흐로 상호투쟁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바로 이때 로마 교회는 신에 의해서 설립되었고, 교황은 홀로 보편적 권리를 가지며, 오직 그만이 어느 누구에게도 심판받지 않고, 로마 교회의 결정에는 결코 오류가 없다는 선포만큼 교회와 교황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교황무오설은 이 같은 시대적 배경이 낳은 산물이다. 최후의 방어인 동시에 최상의 공격 800년이라는 세월이 그 후 바람처럼 지났다. 그 사이 교황무오설은 교황들의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부정과 부패(면죄부 및 성직매매, 축재, 축첩, 근친상간 등)로 인해 한동안 자취를 감추는 듯했는데, 19세기가 되자 다시 고개를 들고 나타났다. 강력하고 새로운 적들이 가톨릭교회와 교황의 지위를 다시 위협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종교개혁, 그리고 프랑스대혁명과 과학혁명이 대변하는 근대정신의 출현이 바로 그것이다. 막강한 도전에 맞선 강력한 대응이 교황무오설을 부활시켰는데, 그 전개는 대강 다음과 같았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새벽을 연 단테(1265~1321)의 ‘신곡’ 지옥편에는 수전노와 낭비꾼들이 서로를 등지고 반대편으로 원을 그리며 달려가다 서로 머리를 꽝 부딪쳐 비명을 지르고, 다시 반대편으로 원을 그리며 돌아 맞은편에서 머리를 부딪치고 비명을 지르는 형벌을 영원히 받는 끔찍한 장면이 나온다. 그들이 누구냐는 단테의 물음에 베르길리우스는 “머리카락이 없는 저자들은/ 본디 교황들과 추기경들이었지/ 이들은 지나치게 탐욕을 부렸어”(지옥편 7, 45~47)라고 답한다. 또 피렌체의 화가 안드레아 오르카나(1308~1368)를 비롯한 르네상스시대 화가들이 그린 ‘최후의 심판’이라는 이름의 작품들에는 교황의 관을 쓴 인물이 지옥의 불 속에서 영원히 단죄받는 모습이 자주 묘사되었다. 이것은 14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시작될 즈음에는 이미 교회와 교황의 권위가 땅바닥으로 추락했다는 증거다. 설상가상으로 16세기부터는 종교개혁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동시에 코페르니쿠스(1473~1543)와 갈릴레이(1564~1642)의 지동설이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가르쳐온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뒤흔들었다. 그러자 18세기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을 신으로 숭배하는 이신론(deism)을 믿기 시작했고, 신이 만든 천국 대신 인간이 만든 유토피아를 추구했다. 19세기에는 다윈(1809~1882)의 진화론이 나와 창조설로 시작하는 성서의 권위마저 위협했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선포한 것이 바로 이때다. 가톨릭교회는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발 벗고 나선 사람이 교황 비오 9세였는데, 그가 세운 전략적 원칙이 ‘비타협성’이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교회와 교황으로서는 어떠한 후퇴, 어떠한 양보, 어떠한 조정도 거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이때 교황과 가톨릭교회가 견지했던 비타협성을 ‘교황지상권주의(ultramontanism)’라고 부르는데, 가톨릭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최후의 방어인 동시에 최상의 공격이었다.
식스토 5세가 무적함대에 축복한 것은?
1869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는 제1차 바티칸공의회(1869~1870)를 소집했다. 트리엔트공의회 이후 300년 만에 열린 이 회의에서 합리주의, 자연주의, 유물론, 무신론 등 근대가 낳은 반(反)기독교적 사상들과 신의 예정과 은총만을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장세니즘(Jansenism), 그리고 교회에 대한 국가의 우위성을 주장하는 페브로니우스(Febronianism)주의 등이 이단으로 배격되었다. 그리고 교황의 무오성을 교리로 확정하는 교의헌장 ‘영원한 목자’가 선포되었다.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들어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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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77년 카노사의 굴욕을 묘사한 그림. |
“로마 교황은 교황좌에서 권위를 가지고 선언할 때 - 다시 말해서 자신의 지고한 사도적 권위에 입각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자요 교사라는 직분을 이행하는 가운데, 온 교회가 지켜야 할 윤리나 신앙에 관한 교의를 지정할 때 - 복되신 베드로를 통해 그에게 약속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거룩한 구세주께서 당신 교회가 신앙과 윤리에 관해 교의를 지정할 경우 반드시 부여되기 바라셨던 무오성을 지닌다.” ‘영원한 목자’의 선포는 확고한 방어였지만 무리한 공격이었다. 때문에 가톨릭 내부에서조차 반발이 일어났다.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로 이름을 떨쳤던 요한 폰 될링거, 영국의 상원의원이자 케임브리지대학의 역사신학자인 존 액턴, 그리고 영국의 저명한 가톨릭 신학자 존 뉴먼 추기경 등이 거세게 저항했다. 뉴먼은 그의 저서 ‘그의 삶을 위한 변론’에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안티오카에서 성 바울로와 성 베드로가 대립했을 때 과연 성 베드로는 무오성을 갖고 있었던가? 성 빅토리오가 아시아 교회들과 친교를 단절했을 때 과연 그는 무오성을 갖고 있었던가? 아니면 리베리오가 같은 방식으로 아타나시오를 파문했을 때는 어떠했던가? 그리고 후대에 와서 그레고리오 13세가 바르톨로메오 학살 공로로 훈장을 내렸을 때는 어떠했던가? 아니면 바오로 4세가 엘리자베스에게 했던 행동은 어떠한가? 식스토 5세가 무적함대에 축복한 것은? 아니면 우르바노 7세가 갈릴레오를 박해했을 때는 어떠했던가?” 교황이 무오하지 않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들이 증명한다는 뜻이다. 명백하고 당연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무오설을 단순히 교황의 탐욕이나 가톨릭교회의 맹목성에서 나온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교황무오설을 처음 제창한 그레고리오 7세나 그것을 교리로 확정한 비오 9세는 외부 적과 내부 이단들의 공격으로 존재마저 위태로워진 ‘보편적 교회(Catholic)’를 보호하고, 후계자들에게 전통적인 ‘믿음의 유산(depositum fidei)’을 전승하길 바라는 한 조각 단심을 갖고 있었다. 근대라는 시대적 흐름에 저항하며 ‘비타협성’을 고수했던 제1차 바티칸공의회와는 달리, 시대에의 적응을 내세워 ‘타협성’을 견지하며 교회의 보수적인 면을 개혁하려는 자세로 가톨릭교회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킨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가 교황무오설을 교리로 재확인한 것도 그래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회장의 질문에 대한 가톨릭의 답변을 들을 수 있다. 로마교황의 결정에는 잘못이 없다는 독선이 가능한 이유는 보편적 교회를 보호하고 믿음의 유산을 전승하기 위해 내리신 “복되신 베드로를 통해 그에게 약속된 하느님의 도우심” 때문이라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입장이다. 요컨대 신의 무오성이 교황의 무오성을 보장한다는 뜻이다. 이 답변은 종교적으로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는 무의미하다. 문제는 교황은 신이 아니며 교리는 신의 말씀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교리(dogma)란 본디 외부 타 종교들의 사상과 내부 이단들의 주장으로부터 기독교를 구별하고 방어하려고 만든 신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설사 신의 말씀은 오류를 범할 수 없다고 해도 교리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교황무오설도 예외가 아니다. 위에서 뉴먼 추기경은 그것을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 증명했다. 인간은 틀릴 수 있다 오스트리아 출신 철학자 카를 포퍼(1902~1994)는 인간의 이성이 불완전하고, 인간은 누구나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과학자의 학설, 법관의 판결, 정치인의 정책, 철학자나 신학자의 가르침 등은 결코 완전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오류 가능성의 원리(doctrine of fallibility)’라고 부르고, 그것을 지식의 속성으로 규정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탈리아의 기호학자이자 소설가인 움베르트 에코가 ‘장미의 이름’에서 다룬 문제가 이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소설의 주제이기도 한 오류 가능성의 문제는 소설의 끝 부분에서 윌리엄 수도사가 제자 아드소에게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라”라고 한 교훈에 담겨 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영화화되어 더욱 널리 알려졌던 ‘장미의 이름’은 중세 어느 수도원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을 추리소설 형식으로 다룬다. 사건 해결을 위해 수도사 윌리엄이 파견되지만 사건은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든다. 마지막에 가서야 모든 사건이 늙은 수도사 호르헤의 범행임이 밝혀진다. 호르헤는 플라톤 철학을 바탕으로 한 아우구스티누스 신학 전통에 서 있던 당시 보수교단에 속한 신실한 수도사였다. 때문에 그는 젊은 수도사들이 십자군전쟁을 통해 전해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들에 근거한 새로운 신학에 현혹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도사들을 살해하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가톨릭교단 간의 교리 다툼이 소설 ‘장미의 이름’의 이론적 배경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호르헤가 자신은 ‘교리’가 아니라 ‘진리’를 위해 살인을 하고 죽는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포퍼는 1965년 7월 런던 베드퍼드대학에서 개최된 국제과학철학 세미나에서 자기는 상대주의자가 아니며 “절대적 혹은 객관적 진리”를 믿는다고 했다. 그렇지만 “나나 다른 누구도 진리를 우리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의미에서 절대주의자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대표작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는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을지도 모르며, 노력에 의해서 우리는 진리에로 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라고도 주장했다. 누구든 자기가 가진 지식을 절대적 진리라고 믿거나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오류 가능성이 지식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같은 말을 에코는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이 없다고 믿는 진리… 이런 게 바로 악마야”라고 표현했다. 에코는 바로 이 문제, 오직 이 문제 때문에 ‘장미의 이름’을 썼다. 애써 당부도 했다.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라고. 에코는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 제목을 12세기에 살았던 수도사 베르나르가 쓴 ‘속세의 능멸에 대하여’라는 시 가운데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이라는 구절에서 따왔다고 했다. 해석은 독자들에게 맡겼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자. 교회가 주장하는 교리를 오류 가능한 지식이 아니라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한, 성서의 말씀은 이제 그 이름뿐이라고! 교황무오설을 진리라고 믿는 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이제 그 덧없는 이름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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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규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과 튀빙겐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영화관 옆 철학카페’ ‘데칼로그’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철학카페에서 시읽기’를 썼다.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은 신과 관련된 서양철학과 신학의 진수를 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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