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태장군은 1928년 11월 통화현에서 태여나 통화현 쾌대무자의 국민학교(동안중심소학교의 전신)을 졸업하였다.
1945년에 8로군에 참가하였고 1946년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51년에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하여 미군비행기 4대를 격추하여 1등공 두차례,2등공 한차례,3등공 두차례를 세워 영광스럽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국기훈장>을 수여받았고 <공중땅크>라는 별명을 얻었다.
선후하여 중국인민해방군 공군퇀장, 부사장, 사장, 부군장직을 력임했고 1975년에는 무한군구 공군사령원으로, 1982년11월에는 중국인민해방군 공군부사령원으로, 1988년에는 중국인민해방군공군중장 칭호를 수여받았다.
중국공산당 제10차,11차 대표로 당선되였고 제5,6,7,8,9차 전국인민대표, 제8,9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으로, 지금은 전국민족위원회 상무위원으로 활약하고있다. ................................................................................................................................................................ 홍범도 장군
홍범도는 1868년 8월 27일(음력), 평양시 서문안 문렬사 부근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고조부는 평안도 용강군 화장골에서 살았는데 순조 때 농민의 난을 일으킨 홍경래(洪景來)와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는 홍경래 난이 실패로 돌아간 후, 일가친척이 화를 입게 되자 가족을 이끌고 평양으로 와서 장사를 하며 살았다. 홍범도 아버지 홍윤식은 할아버지 생전에 남긴 빚 때문에 머슴살이를 했다. 홍범도 어머니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랐다.
그녀는 인물이 남달리 뛰어나 관기(官妓)로 뽑혀갈 처지에 이르자, 외가어른들이 서둘러 홍윤식과 혼인시켰다. 가난한 부부는 생계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결혼 이태 후에는 아들을 얻는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뿐, 임신기간에 영양 섭취가 부족했던 산모가 해산한 뒤 하혈이 심하여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신음하다 이레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홍윤식은 심청의 아비처럼 동네 아낙네들에게 동냥젖을 얻어 먹이며 어린 아들을 길렀다. 그러나 그도 아들이 아홉 살 되던 해 열병으로 세상을 떴다.
일찍 부모를 여읜 홍범도는 머슴살이, 병정, 막일꾼 등 닥치는 대로했다. 그는 공장에서 막일꾼 생활 중?부도덕한 공장주가 품삯을 일곱 달이나 주지 않고, 도리어 먹고 입고 잠잔 값을 받아야겠다는 데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공장주를 냅다 꽂고서는 그 길로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외금강 신계사 주지 스님 앞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러나 평생을 절간에서 보낼 사나이가 아니었다. 한 해 남짓 수도 생활을 청산하고 하산했다.
그때 홍범도는 수도 생활 중에 여승 옥녀와 정이 들어 뱃속에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옥녀의 고향인 북천으로 가고자 봇짐을 지고 금강산을 떠났다. 하지만, 원산 교외에서 불한당으로부터 변을 당해 홍범도는 옥녀와 생이별을 하고 방랑객이 되었다. 그는 그때 불평등한 세상에서 남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지 않고 살아가자면, 남보다 뛰어난 재주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는 글을 배우지 못 했기에 무예를 닦는 길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홍범도는 강원도 회양에서 만난 포수로부터 사냥총 한 자루를 구입했다. 그 길로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서 사냥꾼생활로 생업을 삼으면서 사격술과 검술을 닦았다. 뒷날 일본군들이 홍범도란 이름을 듣기만 해도 간담이 오싹했던 백발백중 사격술과 신묘한 검술은 그때 익힌 솜씨였다. 홍범도의 사상과 인생길에 큰 파문을 일으킨 것은 1894년의 갑오 동학 농민전쟁과 이듬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이었다. 특히 일제 깡패무리들이 남의 왕궁을 마음대로 포위해서 명성 황후를 난도질해 죽이고, 그 시신마저 장작더미에 던져 태워버렸다는 얘기를 듣고 난 홍범도는 울분이 하늘을 찔렀다. 일제 침략자들이야말로 천하에 제일가는 야수 무리로 우리 민족의 철천지원수라는 것을 똑똑히 알았다. 그는 그때부터 항일 투지가 불탔다. 1895년 10월, 홍범도는 강원도 단발령에서 만난 포수 김수협과 뜻이 맞아 항일 의병을 일으킬 것을 맹세한 후, 곧 무장한 일본군 12명을 통쾌하게 처치했다. 이를 시작으로 홍범도의 맹렬한 항일 무장투쟁이 펼쳐졌다. 일제 강압에 따라 정미 7조약이 체결된 후인 1907년 11월, 홍범도와 차도선은 의병대를 만들어 함경남도 후치령에서 일제 북청수비대를 섬멸하여 첫 개가를 올렸다. 그 뒤를 이어 홍범도 의병대는 함경남도 삼수․갑산에서 일제 군경과 수십 차례나 처절한 격전을 벌여서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경술국치 이듬해 1911년 봄, 홍범도는 정예부대를 인솔하여 첫 국내 진 격전을 감행하여 함경북도 경원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여 개가를 올렸다. 또 1919년 10월에는 평안북도 강계 만포진을 공략하여 일본군과 3일간 격전을 치르면서 70여 명을 살상했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신출귀몰하는 전술로, 지금도 홍범도 장군은 우리나라 게릴라전의 비조(鼻祖)로 불려지고 있다. 일제하 우리나라 독립 전쟁 효시(嚆矢)로 일컫는 1920년 6월의 봉오동전투는 홍범도 장군 지휘 아래에 이루어졌다. 아울러 우리나라 독립전쟁사에 가장 빛나는 1920년 10월의 청산리대첩 역시 홍범도 장군이 주역으로 쟁취한 것이다.
홍범도 장군은 일제와의 생사 결전에서 부인과 두 아들까지 잃고 혈혈단신으로 남으면서도 항일 구국 투지만은 평생토록 굽히지 않았다. 장군은 일제에게는 ‘나는 장군’으로 저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고, 우리 겨레에게는 독립운동의 전설적인 영웅, ‘백두산 호랑이’로 추앙 받았다. 장군의 거룩한 발자취는 조국의 산과 계곡에, 압록강 두만강 굽이굽이에, 백두산 밀림과 드넓은 만주 벌판에, 러시아 연해주와 시베리아 황야에까지 남겼다. 장군은 조국 광복 이태 앞둔 1943년 10월 25일, 러시아 카자흐스탄의 크즐 오르다에서 75세를 일기로 파란 많았던 항일 구국 생애를 마감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돌아가신 지 40년 후, 크즐 오르다 홍범도 묘지에는 장군의 반신 동상이 세워지고 생전에 살았던 곳은 ‘홍범도 거리’로 명명되었다. 봉오동전투는 우리 독립군과 일본군 양측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 독립군 측에서는 나라를 빼앗긴 10년 만에 숙원인 독립전쟁 제1회전을 통쾌한 승리로 이끌어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떨쳤다. 아울러 우리 독립군 부대간의 군사통일을 추진하였을 뿐 아니라, 병력 보충과 군비 확충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었다.
반면 일제는 그동안 얕잡아 보았던 우리 독립군의 전투력을 새롭게 평가하여 독립군을 근원적으로 토벌하기 위해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서둘러 만들었다. 아무튼 이 봉오동전투로 민족 수난을 극복하려는 한국 독립군에게 큰 광명을 줌과 아울러, 지휘관 홍범도 장군은 일본군에게 무서운 대상으로 인식되어 그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독립군의 명장이 되었다. ................................................................................................................................................................
연변자치주 초대 주장 - 주덕해
연변조선족자치주 주도인 연길시내 한복판에 있는 인민공원에는 20m 높이의 기념비 하나가 우뚝 세워져 있다. 호요방이 지시하고, 직접 비명까지 쓴 이 비석은 주덕해라는 인물을 기념하기 위해 그가 서거한 지 14돌이 되던 1986년 7월 3일에 제막된 것이다. 모든 조선족이 그에 대해 마음으로 존경을 담고 있는 상징이다. 본명이 오기섭인 주덕해는 1911년 3월 5일 러시아 원동 연해주의 한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중국의 화룡현 수동촌, 지금의 용정시 광신향 승지촌에서 자랐다. 가정 형편상 소학교 4학년까지만 다니다 학업을 중단했지만, 야학에서 혁명의 필요성을 깨닫고 혁명의 길로 들어섰다. 1937년에는 사회주의의 수도이자, 사회주의자들의 마음속에 승리의 상징으로 혁명의 등대와도 같은 모스크바로 가 동방노동대학에서 소련공산당 역사, 세계혁명운동사, 정치경제학, 사회발전사 등을 체계적으로 공부했다.
1947년에는 동북행정위원회 민족사무처 처장, 1949년 3월에는 중공연변지위 서기를 지냈으며, 특히 동북지방의 120만 조선족 인민을 대표해 중국의 건국과 국가대사를 논의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기 전국위원회 제1차 회의에 참석해 그 회의에서 채택된 공동강령을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1959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 주석직무, 그 후 중공연변주위 제1서기겸 주장 직무와 연변대학 교장직도 겸임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 민족 정풍 때에는 지방 민족주의자로 낙인 찍혀 곤욕을 치렀고 문화혁명 시기에는 군중들에 붙들려 연변대학 창고에 감금된 채 모진 박해를 받기도 했다. 그는 1969년에 호북성 무한으로 옮겨졌으나 계속적으로 조여드는 압박으로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쳐 폐암이 발병하였고 1972년 7월 3일 61세를 일기로 끝내 생을 마감했다.
그는 죽음이 임박한 순간 까지도 연변의 산과 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를 가슴깊이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연변으로 돌아가고자 했다고 한다. 4인방이 타도된 뒤에야 그의 명예를 회복하고 공적을 인정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주덕해! 그는 혁명가이자 연변조선족 자치주 초대 주장으로 자치주 기반을 닦은 조선족의 지도자임에 틀림없다. 오늘날 조선족이 자치주 덕분에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면 이 자치주의 기반을 닦은 주덕해야 말로 그 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해야 마땅하다. 물을 마실 때 그 우물을 판 사람의 공로를 잊지 않아야 하듯이 그가 연변조선족자치주에 남긴 업적을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
문학평론가 정판룡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교육자이고 사회할동가이며 문학평론가인 연변대학 정임 부교장 정판룡교수가 암병으로 10월 7일 17시 50분 70세를 일기로 연길에서 서거했다.
정판룡교수는 1931년 10원 2일 전라남도 당양군 담양면 항교리에서 태어났다. 1938년 가족을 따라 중국에 들어와 료녕성 판산현, 흑룡강성 주하현(지금의 상지시) 등지에서 공부를 하다가 1949년 연변대학에 입학했다. 1952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55년 쏘련 모스크바대학에 가서 유학했다. 1960년 쏘련문학 부박사 학위를 획득하고 귀국한 그는 연변대학에 돌아와 교편을 잡고 장장 40년이 넘는 교수와 연구 및 사회활동 생애를 시작했다.
지난 40여년간 정판룡교수는 남다른 지혜와 담력, 창조적노력으로 민족의 교육사업과 정치, 경제, 문화 발전을 위하여 많은 일들을 했고 커다란 기여를 했다.
1960년 5월 연변대학 어문학부 당총지부서기 겸 부학부장 직무를 맡은 그는 중국의 첫 동방문학 교재편찬을 시작했다. <<문화대혁명>>기간 갖은 고초를 다 겪은 그는 1978년부터 외국문학사편찬활동을 회복, 1980년에 동서방문학이 다 들어있는 중국의 첫 완전한 외국문학사 전(前) 4권을 출간시켰다. 1979년 정교수로, 이듬해 연변대학 부교장으로 승진, 1986년부터 조선어문박사연구생도사로 되었다(1999년까지17명의 박사를 양성).
그는 낵熾?연구를 진행하는 한편 국내외 대학, 학술연구단체들과의 교류와 협력사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선후하여 <<세계문학간사>>, <<제2차세계대전이후의 세계문학>>, <<외국문학강좌>>, <<조선어문수첩>>, <<정판룡문집>>1, 2, 3권, <<세계속의우리 민족>>, <<중국조선족과 21세기>> 등 많은 저서와 책들을 내놓은 그는 중국외국문학회 상무리사, 중국조선족문학연구회 리사장, 하와이 동서방센터 객원연구원, 길림성문학연합부 주석, 중국비교문학연구회 이사, 중국조선족발전연구회 회장 등 많은 사회직을 맡고 활약했다.
정판룡교수는 1991년 국무원 발급정부특수수당 획득자로 되었고 부교장직에서 퇴임한 후 1993년 길림성 영재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1997년 한국KBS 해외동포상 학술상을 수상했다. ................................................................................................................................................................
1930년대에 중국영화계를 주름잡으며 '영화의 황제'로 군림했던 인물은 조선족출신의 김염(金焰:1910-1983)이었다. 이 뜻밖의 사실을 발견해내고 그가 남긴 발자취를 끈질기게 추적하여 영화 황제 김염의 삶과 예술을 감쪽같은 망각으로부터 건져낸 사 람은 일본인 스즈키 쓰네카스(鈴木常勝) 였다.
김염이란 이름이 일본의 독자에 이어 마침내 한국의 독자에 게도 알려진 것은 아직 채 10년도 되지 않은 1996년에 이르러서이 다.그래서 어떤 이는 김염의 생애가 그토록 오래 역사의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두고 '부끄럽고도 슬픈 일'이라고 적었다 .
'세상은 커다란 무대이고,무대는 작은 세상이다.(天地大舞臺, 舞臺小天地)'라고 했던가. 나는 김염의 생애를 추적한 이 약간 특이 한 전기 '상해의 조선인 영화황제'를 감격과 흥분 속에서 읽고 또 읽었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 중국 땅 만주로 이주했 던 가족사. 님 웨일즈의 '아리랑'으로 유명해진 김산과 현대중국 을 대표하는 극작가 조우를 만나고,'중국민족의 영혼'이라 평가받 는 노신의 작품을 읽고 감명을 받아 자신의 이름을 김신(金迅)으 로 바꾸려고 했던 톈진(天津)의 남개중학 시절. 1927년 17살의 나 이에 혼자 당시의 국제도시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갖은 自萱?하다가 '시인 감독' 손유를 만나 1930년대 중국영화의 간판스타가 되어 왕인미,완령옥,유경,전방 등의 쟁쟁한 배우들과 함께 스크 린을 수놓았던 상하이 시절. 영화예술에 기여한 탁월한 공로로 중 국 전역에서 단 3명뿐이었던 1급 연기자(행정부의 장관보다 높은 지위)로 선정되었던 1949년 이후의 중화인민공화국 시절. 그리고 위궤양 수술을 받다가 일어난,1만 명에 1명 꼴로 발생하는 위 신 경 절단 사고로 인해 영화계를 은퇴했던 1962년 이후. 김염은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 동포들(조선족) 사이에선 일찍부터 자랑스러운 조선인으로 알려져 있었지만,우리에겐 수십 년 동안 까마득히 잊혀져 있었던 한민족의 영웅인 셈이다.
일제의 침탈이 없었다면 그가 중국의 북방 천진 땅에서 표준 중국어를 배울 기회 가 없었을 것이고,표준 중국어를 구사할 줄 몰랐다면 무성영화에 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던 1930년대의 중국 상하이에서 영화배우로 서 두각을 나타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라를 빼앗기고 아버지를 잃은 원한이 없었다면 김염은 스크린에 분노와 반항의 열정을 그 토록 자연스럽게 풀어놓아 일제의 침략에 격노한 중국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지도 못했을 것이다.김염의 삶과 예술을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는 '부끄럽고도 슬픈 일'을 또 한 가지 자각하게 될 것이며,그러면 부끄러움과 슬픔이 비로소 힘이 될 것이다. ................................................................................................................................................................
해방전 최초의 조선족 시인- 리욱
시인 리욱(1907-1984)은 중국조선족문단과 한국문단에 널리 알려진 저명한 시인이다. 그는 간도문학의 개척자이며 대표자로서 널리 추앙 받고있는 민족시인이다. 그는 간도문학을 한국문학이 아닌 중국내 조선인문학으로서 자리를 잡게 한 최초의 문학인으로서 일생동안 그 터전을 갈고 닦아왔다. 리욱시인은 중국조선인문학의 몇개의 《최초》를 독점함으로서 그 가치를 빛내고 있다.
리욱은 중국조선족문학의 터닦기를 시작한 최초의 문학인으로서 1924년에 《생명의 례물》을 《간도일보》에 발표하였으며 1947년 광복직후 최초로 개인시집 《북두성》을 출판하였으며 1956년 북경에서 최초로 중국작가협회 정식 회원으로 됐으며 1957년 최초로 북경 작가출판사에서 중문시집 《장백산하》를 출판하였으며 최초로 《중국현대문학사》의 한페지를 장식하였다.
리욱은 1907년 7월 25일 로씨야 부라디보스톡 신안촌(고려촌)에서 출생, 소학교를 졸업하고 사숙공부를 하며 소시적부터 조부의 슬항서 사서오경과 절구를 배웠다. 1923년 4월 룡정 동흥중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공부했으며 1924년 훈춘 창동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는 한편 계몽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 1924년 처녀작 《생명의 례물》을 《간도일보》에 발표한 뒤를 이어 20년대에 성정시 《눈》, 《봄비》등을 쓰고 30년대를 잡아들어 《님 찾는 마음》(1930),《송년사》(1935), 《금붕어》(1938) 등을 《조선문학》, 《만가일보》, 《만선일보》, 《조광》잡지들에 발표했고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일보》의 만주특파기자로 있었기에 일제 간도헌병대의 검은 당안에는 리성학을 위험인물로 지목했다. 이 시기 리욱은 월촌, 월파, 월초, 월추, 단립, 백파, 춘파 등 십여가지 필명을 사용하였다. 1940년 8월 일제에 의해 《조선일보》가 《동아일보》와 함께 강제로 페간되자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조양천, 화룡 일대에서 광석탐사를 했다. 이 시기 리욱의 시를 당시 평론가 김우철은 1940년 5월 15일자 《만선일보》에 이렇게 적었다.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그 지향! 그것만으로 신전시인의 명예를 차줄수있지 않을까.ㅁㅁ과 케케묵은 감각의 울타리안에서 시를 창조하는 대신 시를 복제(모방)하는 이미 퇴색한 청년시인들에 비해 볼 때 아직 체내에 미숙한 오관을 가지고 떠리는 두손과 두팔을 한껏 벌리어 새로운 <포에지>의 세계로! 항시 비상을 익망하는 젊은 시인—신세대, 시인들의 활기를 나는 놉히 사고 싶다. 그러나 지나친 바상은 오히려 허망과 <넌센스>를 동반하는수가 있자 않을까? 무의미의 탐미성을 강조하는 슐레알리스트들의 시로에는 경복할수 없으므로 의미의 혼란으로 충만되여 그것이 반대로 무의미한 시작품으로 화해버리는 이런 류의 시를 쓰는 무의미를 월촌씨에게 삼가 경고하고 싶다. 의미의 람용으로 시인자신이 나중엔 판타지병에 걸려 자기도 리해하지 못하는 무의미한 푸념과 넉두리와 언어의 유희로 충만된 시를 쓰는 수가 많고 이런 시를 우리를 재ㅗ있는 신인들에게서 간혹 볼수 있다. 그러나 월촌씨는 아직 그런 환상병에 걸림지 안흘만한 자성과 건강을 가지고 있다.》
리욱의 해방전 서정시는 한시 12수를 포괄하여 민족적 특성이 짙고 랑만주의색채가 농후한것이 특징적이다.《그리고 그의 시에서는 상징주의적이며 은유적인 기법들을 재치있게 운용함으로써 자기나름의 시풍을 보여주고 있다》
광복후 리욱은 리학성이란 이름 대신 리욱이란 이름을 사용하였다.그의 창작은 사회주의, 사실주의 경향으로 발돋음하게 되였으며 시집《고향사람들》(민족출판사, 1957), 《연변의 노래》(작가출판사, 1957),《장백산하》(작가출판사, 1959) 등 시집들을 조, 한 두가지 문자로 북경에서 출판하였다. 서사시《고향사람들》은 중국조선족문단에서 최초로 창작된 서사시이다. 이는 리욱의 시창작의 고봉을 이루는 성과작이며 건국후 조선족시문학에 있어서는 하나의 리정표로 되고있다.
리욱의 한시를 보면 해방전에는 주로 절구를 쓰고 간혹 률시도 썼다. 해방후에는 대체로 사를 위주로 썼다. 그의 해방전 한시에는 애환과 향유가 섞여 있다.유고로 남긴 한시집 《협중시사》는 108수가 수록되여 있다. 김동훈은 《리욱선생은 우리 민족 한시문학의 마지막장을 휘황하게 장식한 자랑스러운 시인이다》고 말했고 조규익은 《그의 한시문학은 결코 중국문학의 아류거나 단순한 습작품이 아니라 중국현대상류문학에 속하는, 선명한 독자적개성을 띤 하나의 정신적재부이다》고 주장하고있다.
시인 리욱은 1984년 2월 26일 별세, 연변대학 학부4층 강당에서 전례없이 룽성히 추도식을 거행했다. 그의 시비는 화룡현 로과향 호곡령정상에 세워졌다. 맞은 켠은 조선 무산, 시《할아버지 마음》(1957)이 시비에 새겨져 특수한 의의를 갖게 되였다. 주성화 기자
음악가 정률성 정률성(鄭律成), 1918~1976년,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 교무장, 조선인민군협주단 단장, 중국 중앙악단 작곡가 등 력임,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작곡가.
정률성은 1918년 8월 조선 전라남도 광주군에서 태여났다. 1933년 5월 중국 남경에 이르러 "의렬단"이 꾸린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 반일비밀사업에 종사하였다. 이 시기 타고난 천성으로 성악공부와 바이올린, 피아노 공부를 하였다.1937년 10월 연안 로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문학학부 동창생 막야로 하여금 혁명정열로 넘치는 가사 "연안송"을 쓰게 하고 작곡하였다.
이 노래는 각 항일전선에, 지어 동남아세아나라에까지 보급되였으며 수천수만의 청년들을 항일투쟁에로 불러일으켰다.1938년 8월 로신예술학원을 졸업한후 연안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에 배치되였으며 1939년 1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정률성은 전우 공목과 함께 "팔로군군가", "팔로군행진곡", "팔로군과 신사군" 등 8수의 가사로 된 "팔로군대합창" 가사를 창작하고 자신이 직접 작곡하였다.
"팔로군행진곡"은 해방전쟁시기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되였으며 후에는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확정되였다.1942년 8월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 교무장으로 임명되여 태항산근거지에서 활동하였다. 1945년 8월, 조직의 결정에 따라 정률성은 조선에 이르러 조선인민군협주단 단장직을 맡았다. 그가 작곡한 "조선인민군행진곡"은 이후 "조선인민군 군가"로 되였다.
1950년 10월 정률성은 중국에 돌아왔다가 51년 다시 조선전선에 나가 "중국인민지원군 행진곡"을 창작하였다.그후 정률성은 북경에 돌아와 북경인민예술극원과 중앙악단에서 작곡가로 활약하였다. 그는 공장, 농촌, 부대로 다니며 수십수의 노래를 지었다.
1976년 12월 17일, 58세의 정률성은 뇌출혈로 서거하였다.
"천재적인 작곡가"로 불리는 정률성에 대해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이였던 왕진은 "정률성동지를 추모하여"라는 글에서 "정률성동지는 현대중국에서 섭이, 선생해의 뒤를 이어 나온 걸출하고 우수한 작곡가이며 중국무산계급혁명음악사업의 개척자의 한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김학철(1916-2001)이라는 혁명투사이며 민족작가로 중국조선족을 대변하는 강철같은 기개로 일관하여 살아온 산 증인이 있다.
사나운 비바람이 치는 길가에 다 못가고 쓰러진 너의 뜻을 이어서 이룰것을 맹세하노니 진리의 그늘밑에 길이길이 잠들어라 불멸의 영령
일제식민지 치하에 불리워진 <조선의용군 추도가>가 말해주고 있듯이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선생인 것이다. 김학철선생이 걸어온 길과 창작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학철선생은 1916년 11월 4일 북조선의 함경남도 원산에서 누룩제조업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7세에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원산에서 제2공립보통학교를 다니고 서울에서 보성고등학교를 다녔으며, 1932년 17세에 빼앗긴 조국을 찾겠다는 포부를 품고 상해림시정부를 찾아 중국으로 들어왔다.
◇1916년 함경남도 원산출생인 김학철선생이 38선 纜【?모습.
처음 상해에서 민족혁명당 상해특구에서 활동하다가 1933년 남경에서 민족혁명당에 민족혁명당에 입당, 테러리스트들의 집단인 행동대에 편입되어 테러활동에 참가했으며, 1937년 중앙육군군관학교 (황포군관학교 교장: 장개석)에 입학하여 1년간 학습을 받아 1938년 7월에 졸업했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전신, 대장: 김원봉)에 참가했으며, 1940년 8월 29일 중국공산당(지부서기: 호철명)에 가입해 1940년 가을에는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팔로군에 참가해 활동하며 전투에도 참가하는 한편 부대의 수요에 따라 작은 신문도 편집하고 직접 연극 극본도 쓰고 가사도 썼다.
1941년 12월 10일 하북성 호가장전투에서 대퇴골관통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었으며, 그후 예심에서 치안유지법위반죄란 판결을 받고 일본으로 압송되어 1943년 4월 29일 나가사끼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 미결가산 200일 언도를 받기도 했다.
1945년 2월 감옥에서 다리절단수술을 받았는데, 945년 10월 6일 석방되어 서울로 돌아와 공산당에 속하는 조선독립동맹 서울위원회 서울시위원으로 활동했다.
◇1989년 12월,조정래 대하소설 <太白山脈〉출판기념에 참석한 김학철선생.1945년 2월 감옥에서 다리절단수술을 받아 한쪽 다리를 잃은 모습.
1945년 12월 ≪주간건설≫ 잡지에 소설 <지네>를 발표했으며 그 후 1년간 육속 ≪문학≫지에 <담배국>, ≪신문학≫에 <균렬>, ≪서울문학≫에 <어간유정> 등 10편을 발표했다. <조선의용군>이라는 단편집을 묶어 ≪한성도서≫에서 출판예고까지 했는데 월북함으로써 출판되지 못했다.
1946년 12월에 조직에서 파견한 간호사 김혜원여사와 함께 북조선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처음에 ≪로동신문≫기자로 있다가 외금강휴양소 소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민족군대≫주필을 역임했다.
6.25전쟁이 폭발된 후인 1950년 10월, 중국으로 들어와 북경 중앙문학연구소(소장: 정령)연구원으로 몇 년 있었는데 북경에서 중편소설 <범람>, 단편집 <군공메달>을 한문(漢文)으로 출판했으며, 1952년 12월 연길로 와서 연변문학예술연합회 준비위원회(주장 주덕해) 주임을 임명 되었으나 반년 후 사직하고 전업작가로 활동하게 되었다.
1953년 9월 단편집 <새집 드는 날>이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출간되었으며, 장편소설 <해란강아 말하라!> 1, 2, 3부 소설집 <고민> 중편소설 ≪번영≫을 출간했으며 이밖에도 50년대 초에는 로신의 <아Q정전>을 번역출판하기도 했다.
1957년 반우파투쟁확대화속에서 ≪반동분자≫로 획분되였다. 조선공민이기에 우파분자로 하지 않고 반동분자로 모호하게 표기하고 우파분자로 취급했던 것이다. 그래서 공직과 노임마저 취소당하고 노동개조를 하면서 생활보조비 50원을 타게 된 것이 전부였다. 몇 년후 작가협회 자료실에서 자료원으로 있었으니 여전히 반동분자로 몰리게 된 것이다. 공직도 없고 로임도 없고 글도 발표할 자격이 없게 되었다.
◇1996년 11월 20일에 열렸던 <김학철선생님 문학창작 50돌 좌담회> 기념사진.
1964년부터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를 창작하기 시작하여 1965년 5월에 완성했는데, 1966년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 폭발해 그 해 12월 반란파들에게 <20세기의 신화>원고가 발견되어 기소되어 감금 되었으며 이때부터 50원 생활보조비도 취소되어버렸던 것이다.
1975년 5월 연변주법원의 10년 유기징역 판결을 받았는데 1977년 12월에 만기석방되었으며 그 후 3년간 계속 반혁명전과자 취급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1980년 12월 연변주법원에서 '원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로 선고한다'고 선포되어 1983년 국적문제를 철저히 해결하고 중국 국적을 갖게 되었고 동시에 정식으로 공직에서 이직하게 되었던 것이다.
1983년 항일회상기인 <항일별곡>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출간했으며, 1985년 ≪김학철단편소설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1986년 3월에는 장편소설 <격정시대>가 료녕민족출판사에서 출간되었으며, 1987년 6월에는 <김학철작품집>이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되었는데, 1989년 12월에 이러러서야 중국공산당 당적이 회복되었으며, 1994년에 한국 KBS로부터 '해외동포상'을 수상했다.
◇2001년 한국 밀양문화원 초청 강연장에서 김학철선생.
또한,자서전인 <최후의 분대장>이 한국의 문학과 지성사에 의해 1995년에 출간되었으며, 1996년과 2001년에 걸쳐 장편소설 <20세기의 신화>와 김학철산문집 <우렁이속 같은 세상> 한국의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되었다.
이밖에 수백편의 수필과 잡문을 여러 신문, 잡지에 발표.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다권집 ≪김학철문집≫ 출판중에 있으며, 2001년 9월 25일 오후 3시 39분에 8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중국 만주땅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선각자인 김학철선생의 생활신조는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그것이었다.
연변조선족 문학평론가인 최삼룡의 <김학철론>에서 김학철선생의 인격형성과 인격특점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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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앞에 한 거인이 서 있다.
량쪽 겨드랑이에 쌍지팽이를 짚은 척각의 로인, 년령 75세, 키 180센치, 수척한 몸매, 잔주름이 많기는 하지만 깨끗이 늙은 강파른 얼굴과 뽀족한 하관, 거기에 꾹 다문 입술과 한창때의 그런 광채는 세월과 함께 사라졌으나 정기가 도는 사려 깊고 슬기가 넘치는 한쌍의 눈. 이 거인이 바로 오늘도 백발을 흩날리면서 붓대를 틀어쥐고 문학의 고봉으로 톺아 오르는 투사이며 작가인 김학철이다.
총체적으로 령리하며 민감하며 강의한 인상을 주는 이 로인이 체질과 초상을 통하여 우리는 활발하며 움직이기 좋아하고 민감하며 반응이 빠르고 주의력을 빨리 변화시키고 흥취정서를 쉽게 바꾸며 벗을 사귀기 즐기고 다정다감하고 외향적인 다혈질의 청년 김학철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이러한 체격과 기질의 임자 김학철은 한평생 복잡하고 곡절많은 인생길을 걸어왔다. 식민지시대의 고난을 눈물겹도록 맛보면서 지낸 비애의 소년시절, 항일전쟁의 피와 불의 세례를 겪은 격정의 청춘시절, 제국주의 감옥에서 몇 년, 광복 후 서울에서의 좌익운동 가담과 창작활동 그리고 평양, 북경에서의 문필생활, 연길에서의 본격적인 문학창작과 24년의 정치박해(그 중 10년은 옥살이)를 겪은 좌절 많은 중년시절, 65세에 와서야 다시 붓을 들어 창작의 왕성기를 맞이한 만년생활. 이렇게 곡절많은 인생길을 걸은 작가는 고금중외에 드물다.
세상에 실로 렬화속에서 아홉번 나보고 빙설속에서 아홉번 얼어보고 피못속에서 아홉번 목욕해본 작가가 있다면 그가 곧 김학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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