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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의 생활
- 믿는 이의 체험 -
믿는 이가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갖고 완전히 하나님으로 만족할 때 그들은 느낌의 생활을 체험하게 된다. 믿는 이는 이러한 체험을 아주 보배로운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은 믿는 이가 죄에서 벗어난 체험을 가진 후 아직 완전한 영적 생활에 들어간 체험을 갖기 전의 일이다. 대부분의 믿는 이는 영적 지식의 부족으로 종종 이러한 체험이 그들을 즐겁게 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러한 체험을 가장 영적이고 가장 하늘에 속한 체험으로 여긴다. 이러한 느낌의 생활이 그들에게 준 즐거움은 아주 만족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느낌의 생활에 대한 체험을 버리기 어렵고 버리지도 못한다.
이러한 생활을 할 때 믿는 이는 손으로 주님을 만질 수 있는 것같이 주님을 아주 친밀하게 느낀다. 그는 주님의 사랑을 아주 달콤하게 느끼며 자기 자신도 아주 주님을 극도로 사랑한다고 느낀다. 그는 마음속에 불덩이가 타오르는 듯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이것은 그가 이미 하늘에 오른 것 같이 느끼게 한다. 그의 가슴 속에 무언가가 작용하고 있는 것 같고 그는 무슨 보배라도 얻은 듯 기묘하고도 평안하다. 그가 무엇을 행하든지 이러한 느낌은 항상 함께 한다. 믿는 이가 이런 것을 체험한 후에 그는 자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게 되고, 이미 세상을 벗어나서 천사들의 대열에서 함께 멀리 날아다니는 기분을 갖는다.
이럴 때에 성경을 읽는 것도 흥미가 있다. 읽으면 잃을수록 이러한 기쁨이 더욱 많아진다. 기도도 아주 용이한 것이 된다. 이때 하나님 앞에서의 표정도 아주 기뻐하는 표정이다. 기도하면 할 수록 하늘의 빛 비춤이 더욱 밝게 빛나는 것 같다. 이럴 때에 믿는 이는 주님께 많은 결심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낸다. 이때 믿는 이는 조용히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기를 좋아한다. 이때의 즐거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글로 다 형언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오랫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주와 교통하기를 바란다. 전에는 사람들 가운데서 무언가 자기의 욕구를 채워보려고 그들 가운데 생활하기를 좋아했지만 이제는 홀로 있기를 좋아한다.
이때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도 아주 쉬운 것이 되어 버린다. 본래 사람들에게 아무 할 말이 없었지만 이제는 사랑의 불길이 마음속에서 불타오르기 때문에 그는 주님에 대해 말하는 것을 아주 흥미로운 일로 여긴다. 이때에는 말할수록 더욱 힘이 나서 주님을 위해 고난 받는 것도 아주 달콤하게 느껴진다. 주님께서 이렇게 친근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는 주님을 위해 몸을 불사르고 뼈가 부서진다 하더라도 기꺼이 기쁨으로 한다. 이러한 느낌 안에서 모든 짐은 가벼워지고 모든 어려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느낌이 있을 때 믿는 이의 밖의 행위도 같이 변한다. 본래 말이 많았던 그가 이제는 이 느낌의 도움으로 잠잠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사람이 끝없이 말하는 것을 볼 때 그는 그것이 틀렸다고 판단한다. 본래 경솔했던 그가 이제는 신중해졌다. 다른 사람의 경건치 않은 것을 볼 때 그는 느낌이 있게 되고 그 틀린 것을 판단할 줄 알게 된다. 어쨌든 이러한 체험이 있을 때 믿는 이의 밖의 행위는 전보다 많이 조심해지고 보는 눈도 전보다 더욱 밝아지므로 다른 사람의 단점을 더욱 볼 수 있게 된다.
다른 믿는 이를 볼 때 그는 마음속으로 은근히 그들을 불쌍히 여긴다. 그들이 자기와 같은 체험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기쁨을 최고라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의 이러한 생각을 알지 못한다. 그는 형제자매들이 냉랭하게 주를 섬기는 것을 보고 그들의 생활에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와 같이 하나님의 기쁨으로 충만한 생활만이 가장 고상한 생활이라고 생각한다. 이럴 때 그는 다른 믿는 이들은 다 산골짜기를 거닐고 있는데 자기만 산꼭대기 구름 위를 날아다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이 오래갈 수 있는가? 이러한 느낌을 일생동안 매일 유지할 수 있는 믿는 이가 있는가? 많은 믿는 이들은 이러한 체험을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한다. 가장 슬픈 것은 이러한 체험을 가진지 한두 달(일반적으로 말해서)도 채 안 되어서 그가 가장 좋아했던 즐거움이 홀연히 사라진다는 것이다. 아침 일찍 그가 변함없이 성경을 읽지만 전과 같은 맛을 잃어버린다. 그가 기도도 하지만 몇 마디 하기도 전에 그는 할말을 잃어버린다.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이 느끼게 된다. 전에 그는 영적 노정에서 다른 믿는 이들은 자기를 따라갈 수 없었다고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자기 자신이 그들과 똑같고 그들 중에 하나라고 느끼게 된다. 그의 마음은 많이 냉랭해지고 전에 불타던 느낌이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는 주님께서 그와 함께하시고 그와 가까이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주님께서 그와 아주 멀리 있는 것 같다. 때로는 주님께서 어디에 계신지 조차도 모른다. 이제 고통을 받는 것이 전과 같이 즐겁지 않고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이제 전도하는 것도 전과 같이 흥미가 없고 한두 마디만 하면 더 말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어쨌든 이런 때에 모든 것이 어둡고 메마르며 고갈되며 죽어 있고 냉랭한 것 같다. 이때 믿는 이는 마치 주님에 의해 무덤 속에 남겨진 것 같이 그를 위로하는 것이 없게 된다. 전에 그가 유지하기를 바라던 기쁨도 사라졌다.
이럴 때 믿는 이는 자기 자신이 무슨 죄라도 범해서 주님께서 그를 버렸다고 생각한다. 만일 범죄하지 않았다면 어찌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지 않느냐고 한다. 그래서 그는 현재 자기의 행위를 조사하여 자기의 어떤 것이 주님께 득죄했는가를 알려고 한다. 그는 다시 전에 느꼈던 친밀함과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자기가 죄를 거절하고 자백한 후에 주님께서 다시 자기를 충만하게 해 주시기를 바란다. 그러나 자신을 조사해 볼 때 그는 자기에게 어떤 특별한 죄도 발견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이전과 다를 바가 없다. 그는 현재 그의 상태가 주님을 떠나게 했다면 과거의 상태도 주님을 족히 떠나게 했겠지만 그가 죄를 범하지 않았는데 왜 주님께서 자기를 떠나셨느냐고 묻게 된다. 믿는 이는 이런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를 모른다. 그는 자기가 어떤 면에서 주께 죄를 범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자기를 거절했고 사탄이 기회를 타서 범죄로 인해 자기를 참소하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주님 앞에서 용서를 구하고 다시 이전에 얻은 것을 얻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믿는 이는 자기가 잃어버린 것을 즉시 회복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날이 갈수록 그의 속에 고갈된 느낌이 더욱 심해지고 더욱 냉랭해진다. 이럴 때 그는 무엇을 해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때로는 어떤 흥미도 발견하지 못한다. 이럴 때의 기도도 억지로 하는 몇 마디이다. 전에는 몇 시간이고 막힘없이 기도했지만 이제는 몇 분밖에 기도하지 못한다. 몇 분의 기도를 한다 하더라도 그 기도는 억지로 한 것이다. 그의 느낌으로는 이 몇 분의 시간은 기도하는 것 같지 않다.
성경을 읽는 것도 똑같이 메마르다. 전에는 읽을수록 흥미 있었지만 이제는 성경이 마치 돌밭 같아서 어떤 것도 캐내지 못한다. 사람을 대하는 것이나 다른 어떤 일도 그를 기쁘게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인이기에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따라 할 뿐이다. 이것들은 모두 메마르고 무미건조한 행위이다. 이렇게 될 때 어떤 사람들(모든 사람이 아님)은 퇴보하게 된다. 많은 일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면서도 자기가 가련한 상태에 떨어졌다는 핑계로 상관하지 않는다. 또한 자기가 응당해야 할 본분에 속한 일들을 자기의 냉담함을 인해 상관하지 않게 된다. 다시 그의 느낌이 생길 때 그의 바로잡아진 밖의 행위는 전과 같게 된다. 전에 그는 마음속으로 다른 사람의 무례함을 불쌍히 여겼지만 오히려 지금 그는 그들과 같이 되어 버렸다. 전에 말 많고 경솔하며 비웃기를 좋아하고 시끄럽게 하기를 좋아하던 성격을 이제 다시 반복하게 된다. 비록 전에 한 차례의 변화를 거쳤지만 이제는 지난 역사를 되풀이하게 되었다.
믿는 이는 느낌에서의 기쁨을 잃어버릴 때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한다. 그는 주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므로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주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지 못하므로 주님께서 그를 싫어하신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태로 얼마 동안 지나다 보면 그는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조차도 모르게 된다. 이때 그는 낙심하지 않으면 전에 잃었던 것을 회복하려고 안간힘을 쓸 것이다. 주님을 사랑했던 그가 그분을 가까이하려고 하겠는가? 조금도 그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 그가 어찌 이 상황을 견딜 수 있단 말인가? 만일 이때 믿는 이가 낙심하여 외면적으로 퇴보하지 않는다면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찾기 위해 전진할 것이다. 비록 그기 힘을 다하여 이러한 고갈된 느낌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쳐 보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에게 밖으로 좋은 행실 - 이때의 모든 것을 억지로 한다 - 이 있으면 그의 마음은 그가 외식하고 있고 좋게 보이려고 하나, 실지는 그렇지 않다고 책망한다. 그에게서 나온 노력은 항상 성공하지 못하고 많은 실패를 범하게 된다. 이것은 자연히 믿는 이에게 고통을 더한다. 만일 이때에 누가 그를 칭찬한다면 그는 옆에 있는 사람들이 그의 심중의 느낌이 얼마나 흑암인지를 모른다고 생각하므로 아주 부끄러워한다. 누가 책망할 때 오히려 그는 자기의 약함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공의롭다고 느낀다. 그리고 다른 믿는 이가 성장하고 주의 친밀한 교통을 갖는 것을 보고서 그는 그들을 아주 부러워한다. 이때 그는 자기를 둘러싼 사람들이 다 자기 보다 낫고 선한 행실이 있는 반면에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끼게 된다. 이렇게 고갈된 상태는 계속 쉬지 않고 지속되는 것인가, 아니면 믿는 이가 전에 얻은 체험을 다시 얻게 되는가? 그가 다시 얻게 된다. 얼마 안되어 어쩌면 몇 주 후에 돌연히 그가 잃어버렸던 느낌이 다시 회복된다. 이러한 일은 어떤 이의 말씀을 들었거나 뜨겁게 기도한 후에 일어날지도 모른다. 또한 아침 일찍 성경을 읽을 때라든지 밤중에 깨어 주님에 대해 묵상할 때 일어날지도 모른다. 시간은 일정하지 않지만 그 기쁨은 다시 회복하게 된다.
이때에 그는 전에 잃어버린 상태를 다시 새로이 회복한다. 주님의 임재가 전과 같이 선하고 마음속이 전과 같이 뜨겁게 되며, 기도와 성경 읽기에 전과 같이 흥미를 되찾으며, 주님 자신이 전과 같이 사랑스럽고 친밀하며 만질 수 있는 분으로 느껴진다. 주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더 이상 무거운 짐이 되지 않고 마음속의 좋아하는 대상으로 회복되었다. 이제 모든 것이 원상태로 회복되었고 다시는 흑암과 고통과 메마름이 없고 다만 기쁨과 적셔짐이 있게 되었다. 믿는 이는 전에 자신의 불성실함 때문에 주님께서 자기를 떠났다고 생각하고, 이제 그가 다시 주님을 얻었으므로 현재 자기가 얻은 것을 보존하고 느낌의 생활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힘을 다한다. 그래서 그는 밖의 행실을 더욱 조심하고 자기의 할 수 있는 날마다 주님을 섬기고, 자기의 기쁨을 보존하고 전과 같은 실패를 다시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기묘한 것은, 그가 충성을 다한다 하더라도 한동안 지난 후 주님은 다시 그에게서 사라지고 기뻤던 모든 느낌도 완전히 잃어버려 다시 그는 고통과 흑암과 메마른 상태에 떨어지고 만다.
믿는 이의 체험을 연구해 보면 우리는 믿는 이가 죄에서 벗어나고 한 인격체로서 하나님을 접촉한 후에 이러한 체험을 갖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초기에 주님은 믿는 이에게 그분의 사랑과 임재와 기쁨을 느끼게 하신다. 그러나 얼마 후 이러한 느낌은 다시 사라진다. 또 한동안 지난 후 이런 느낌은 다시 찾아와 믿는 이를 기쁘게 한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그런 느낌을 다시 잃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그런 느낌이 생겼다가 사라졌다가 하는 체험은 일반적으로 믿는 이들 일생에 적어도 몇 차례 발생한다. 믿는 이가 육에 속하고 아직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는 이러한 체험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믿는 이가 처음보다 더 진보하고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된 후에는 이러한 체험을 갖게 된다.
- 이러한 체험의 의미 -
믿는 이 자신은 이러한 체험이 영성의 최고봉이며 그러한 체험을 잃었을 때를 영성이 가장 낮을 때로 본다. 믿는 이는 종종 자기의 생명이 높고 낮음에 대해 말한다. 그의 뜻은 그가 즐겁고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임재를 느낄 때가 그의 영성이 낮을 때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꿔서 말하면 그의 마음 속에 뜨거운 불을 느낄 때가 그가 영적일 때이고, 마음 속에 냉랭함을 느낄 때가 그가 혼에 속할 때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믿는 이의 일반적인 관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것인가? 이것은 완전히 잘못 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모른다면 우리는 완전히 실패하게 된다.
믿는 이는 ’느낌‘이 언제나 혼 생명의 일부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믿는 이는 느낌에 의해 살 때에 그가 느끼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는 혼에 속한 사람이다. 믿는 이가 즐거움을 느끼고,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주님의 임재를 느낄 때 그는 느낌을 말미암아 사는 것이다. 고갈과 어둠과 고통을 느낄 때에 그가 혼에 속한 것처럼 적셔짐과 광명과 즐거움을 느낄 때에도 똑같이 혼에 속한 것이다. 영에 속한 생활은 전혀 느낌의 지배를 받지 않고 느낌 안에 있지도 않다. 영적인 생활이 느낌을 지배하는 것이지 결코 느낌이 영적인 생활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믿는 이에게 가장 영적인 체험으로 오해되고 있는 것은 바로 느낌의 체험이다. 많은 믿는 이들은 영적인 생명 안에 들어간 적이 없기 때문에 이상에서 말한 기쁨에 찬 느낌을 영적인 체험이라고 말할 뿐 이것이 혼에 속한 것인 줄 모른다. 영적인 체험은 직감 안에서의 체험이고 이외의 것들은 모두 혼적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믿는 이의 가장 큰 과실을 볼 수 있다. 그가 감정의 작용을 받아서 자기가 하늘에 오른 것 같다는 느낌을 갖고서, 자신이 승천의 생명을 소유한 것으로 착각하는데 사실 그것은 그렇다는 느낌일 뿐이다, 그는 주님께서 그와 함께 한다는 느낌이 있을 때에 주님께서 계시고 그것을 느끼지 못할 때는 주님께서 그를 떠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것은 그렇게 느껴지는 것뿐이다. 그는 자기 마음속에 불타오르는 느낌과 주님을 아주 사랑한다는 느낌이 있을 때가 참되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불타는 느낌이 없고 냉랭하게 느낄 때에 그는 주님에 대해 사랑을 잃어 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단지 그의 느낌인 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우리의 느낌은 가장 믿을 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느낌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믿는 이는 똑같은 것이다. 믿는 이는 자신이 진보했다고 느낄 뿐 사실은 진보하지 않았을 수 있다. 자신이 퇴보했다고 느끼나 실제로는 퇴보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이것들은 그의 느낌에 불과하다. 믿는 이가 느낌으로 충만할 때 그는 자신이 이미 진보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여전히 혼에 속한 사람이다. 단지 일시적인 감정의 충동으로 흥분한 것이다. 그러나 감정이 식어질 때에 그는 다시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간다. 감정의 작용이 혼에 속한 사람을 전진케 하듯이 성령의 능력은 영에 속한 사람을 전진하게 한다. 이 양자 사이에 오직 성령의 능력만이 사람을 참되게 전진하게 한다.
- 하나님의 목적 -
그럼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이러한 느낌을 주시고 다시 가져가시는가? 하나님께서 이러한 기쁨을 믿는 이에게 주신 것은 몇 가지 목적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믿는 이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기쁨을 믿는 이에게 주시는 목적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그분이 주신 은사를 통해 그분 자신을 가까이 하도록 사람들을 매혹시킨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이러한 은혜를 통해 그분이 어떻게 그들을 사랑하시는지 알며, 그로 인해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분의 사랑을 믿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믿는이는 느낌이 있을 때만 그분을 사랑하고 느낌이 없을 때는 그분을 잊어버린다.
하나님께서 믿는 이의 생명을 이렇게 다루시는 목적은 믿는 이에게 자기 자신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믿는 이가 일생토록 배우기 가장 어려운 공과가 바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임을 안다. 즉 자기의 부패함을 알고 자기의 헛됨을 알며 죄로 충만함과 선한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이 공과는 믿는 이가 일생 지속적으로 배워야 할 공과이다. 또한 이 공과는 배울수록 더 깊어지고 하나님 눈에 자기의 생명과 성품이 얼마나 더러운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공과는 믿는 이가 배우기 싫어하는 공과이자 믿는 이의 천성으로 배울 수 없는 공과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믿는 이가 자기 자신을 아는 단계까지 인도 되도록 많은 방법으로 그들을 가르치신다. 하나님의 많은 방법 중에서 기쁜 느낌을 주셨다가 다시 가져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하나님께서 믿는 이를 이렇게 다루신 후에야 믿는 이는 자신의 부패함을 알게 된다. 고갈될 때 그는 자신이 기쁠 때를 생각하게 되고,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사를 잘못 사용했으며, 자신을 높이 보고 다른 사람을 멸시했으며, 그날 그날의 감정에 따라 이용 당해 영에서 나오지 않은 일을 한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믿는 이를 겸손하게 만든다. 만일 그의 이러한 체험은 단지 자기 자신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안다면, 결코 그러한 체험을 가장 고상한 체험으로 여겨 전심으로 추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믿는 이에게 그가 고갈할 때와 같이 기쁠 때에도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믿는 이에게 그가 빛 가운데 있을 때라도 어두움 가운데 있을 때보다 진보한 것이 아님을 알기 원하신다. 이 두 가지 상태에서 그의 생명은 똑같이 부패한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믿는 이가 그들의 환경을 이기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환경의 변화로 인해 다르게 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 무릇 환경에 따라 생활이 달라지는 사람은 거의 주 안에서 깊은 체험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은 다름이 아닌 감정임을 안다. 환경의 영향으로 감정은 우리의 생활이 달라지게 한다. 그러므로 믿는 이가 자기 환경을 이기기 원한다면 그의 감정(느낌)을 이기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항목이다. 만일 그가 순간순간 변하는 느낌을 이기지 못한다면 그는 환경을 이길 방법이 없다. 이는 우리에게 환경이 변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은 우리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우리의 느낌은 변한다. 만일 사람이 자기 느낌을 이기지 못한다면 그의 생활은 느낌에 따라 변하게 된다. 그러므로 환경을 이기려는 사람은 자기 느낌을 이기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은 그들이 이러한 느낌을 이기는 것을 배움으로써 그들의 환경을 이기게 하는 데 있다. 만일 그들이 이러한 강렬하고 상반된 느낌을 이길 수 있다면 항상 변하는 밖의 환경을 이길 수 있게 된다. 이럴 때 비로소 믿는 이는 견고한 지위와 확고한 생활에 이르게 된다. 그렇지 않을 때 그들은 물결을 따라 흘러가게 된다. 하나님은 믿는 이가 느낌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변함없기를 원하신다. 느낌이 있을 때와 같이 없을 때에도 믿는 이는 성실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과 교통하며 일하며 기도하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가 자기의 느낌이 광명인가 어두움인가에 따라 그분의 생활을 바꾸기 원치 않으신다. 만일 마땅히 충성을 다해야 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중보 기도해야 할 항목이라면 즐거울 때나 고통스러울 때에 변함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결코 적셔짐이 있을 때는 이렇고 메마를 때는 다르게 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믿는 이가 그의 생활에서 여러가지 다른 느낌을 이길 수 없다면 다른 환경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믿는 이가 환경을 이길 수 없는 것은 느낌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또 하나의 의도는 믿는 이의 의지를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다. 참된 영적인 생활은 느낌의 생활이 아닌 의지의 생활이다. 영에 속한 사람의 의지는 이미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되었기 때문에 영의 계시를 기다리고 좇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믿는 이의 의지는 대부분 연약하여 자기 주장을 관철하지 못한다. 혹은 감정의 작용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거절한다. 그러므로 강한 의지를 훈련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공과이다.
믿는 이가 흥분할 때 그는 감정적인 작용의 도움을 받기 때문에 매우 쉽게 전진한다. 그러나 낙담할 때 믿는 이는 감정의 도움이 없고 의지가 움직이기 때문에 전진하기가 쉽지 않다. 하나님의 목적은 감정의 흥분이 아닌 의지의 강건함에 있기 때문에, 그분은 믿는 이에게 메마르고 고갈되며 담담하고 거친 느낌을 줌으로써, 그가 영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의지를 사용하여 흥분될 때에 한 일을 하게 하신다. 흥분 될 때는 감정이 작용한 것이지만 이제 하나님은 믿는 이의 의지가 감정의 작용을 대신하기를 원하신다. 이렇게 감정의 도움이 없을 때만이 의지가 사용됨으로 강건케 될 수 있다. 많은 믿는 이들은 자기에게 느낌이 있을 때가 가장 생활이 높을 때라고 생각하고 느낌이 없을 때는 가장 낮을 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믿는 이의 생활은 영이 의지와 더불어 이루어지는 생활인 줄을 모른다. 믿는 이에게 느낌이 없을 때에 그의 의지가 이른 곳이 바로 믿는 이의 생활의 참 모습이다. 고갈 될 때에 믿는 이가 생활하는 그것이 그의 참된 생활이다.
하나님께서 믿는 이를 이렇게 인도하시는 또 하나의 목적은 바로 믿는 이를 가장 높은 생활로 인도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믿는 이의 체험을 살펴본다면 주님께서 한 단계 더 높은 영적 노정으로 인도하실 때마다 그분은 항상 그러한 단계의 생활을 먼저 느끼게 한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믿는 이가 한 차례 그 단계의 생활을 느낀 후에 그의 영적 노정도 한 걸음 더 전진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먼저 느낌으로써 믿는 이가 얻어야 할 것을 얻게 하시고서, 그 다음 그러한 느낌을 거두어 가심으로써 믿는 이가 영을 사용하여 의지로 느낌에서 얻은 것을 보존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그의 영이 느낌에 상관없이 의지로 말미암아 전진한다면 그는 자기의 생명에 참된 전진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체험으로 증명될 수 있다. ’높았다가 낮아지는‘ 이러한 생활을 체험할 때 우리는 조금 진보했다가 다시 퇴보했으므로 시종 자라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마 우리는 지난 몇 년 혹은 몇 개월 사이에 진보했다가 퇴보하고 퇴보했다가 다시 진보한 것만을 체험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영적 생명의 상태를, 그런 체험을 처음 가질 때의 상태와 비교해 본다면 우리가 실제로 진보한 것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진보하는 것이다.
많은 믿는 이들이 이 교리를 모르기 때문에 많은 실수를 범한다. 그가 주님께 완전히 드려져 새로운 영성의 체험(성화, 승리 등) 을 구할 때 그는 참으로 확실하게 새로운 생활에 들어서서 자기 자신이 진보하고 환호와 빛과 경쾌함이 충만하다고 느낀다. 이때 그는 자기가 사모하고 추구하는 완전한 생명을 이미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얼마 안 되서 그의 새 체험은 돌연히 사라지고 그의 즐거움과 느끼는 흥분도 사라진다. 그리하여 믿는 이들 중에는 자신이 완전히 거룩하게 될 수 없고 다른 사람처럼 더 풍성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낙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그가 오랫동안 사모한 것을 얻은 지 얼마 못 되어 다시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영적 노정의 한 법칙인 줄을 모른다. 느낌에서 얻은 것은 반드시 의지 안에서 보존해야 한다. 의지 안에서 보존한 것만이 믿는 이의 생명의 일부가 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 느낌을 가져간 목적은 믿는 이에게 느낌이 없을 때, 느낌이 있을 때 얻은 것을 의지로 행하게 하는 데 있다. 믿는 이가 이렇게 한동안 행한 후에 그는 느낌에서 잃었던 것이 부지불식간에 그의 생명의 일부가 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영적 노정의 한 법칙이다. 이 법칙을 기억한다면 믿는 이는 낙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의 핵심은 사람의 의지에 있다. 당신의 의지가 변함없이 주께 순종하고 영의 인도를 따르길 원하는가? 만일 원한다면 느낌이 아무리 변해도 상괸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느낌에 상괸하지 말고 우리의 의지가 영에 순종하는지를 주의해야 한다. 예컨데 갓 거듭날 때 믿는 이는 즐거운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얼마 후(몇년 후) 이러한 즐거운 느낌이 사라지는데 이때 우린 그가 멸망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의 영 안에 이미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의 느낌이 어떤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생활의 위험
하나님께서 이러한 체험을 우리에게 주실 때 만일 우리가 그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한다면 아무런 위험이 없게 된다. 그러나 만일 믿는 이가 하나님의 목적을 모르고 또 자기의 이러한 느낌을 따라 산다면 느낌이 있을 때 빨리 전진하고 느낌이 없을 때는 전진하지 못한다면 영성의 위험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은 자기들의 느낌을 생활의 원칙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생활은 많은 위험이 뒤따른다. 만일 믿는 이가 이러한 좋은 느낌을 따라 산다면 그의 의지는 항상 약하여 영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게 된다. 또한 영의 지각이 자라고 발전할 가능성이 없다. 이는 믿는 이가 자기 느낌으로 영의 직감을 대치하기 때문이다. 이때 그는 감정을 따라 행하게 된다.
이러므로 그의 영의 직감은 한 면에서 감정의 억압을 당하게 되고, 다른 면에서는 무시되고 사용되지 않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직감은 자라기 어렵게 된다. 이것은 바로, 오직 감정이 안정될 때만 사람에게 그 의미를 깨닫게 할 수 있고, 사람이 자주 사용해야만 강건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믿는 이가 이렇게 감정을 의지하여 살 때 그의 의미가 항상 위축되어 스스로 설 능력을 잃게 되고, 직감도 분명한 느낌을 내기 어렵게 되고, 그는 더욱 느낌의 자극으로 살게 된다. 그러므로 의지는 느낌의 작용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믿는 이의 영적 생활이 없는 것 같이 되어 버린다. 감정의 작용은 이렇게 믿는 믿는 이에게 아편과 같은 것이 되어 버리는데, 믿는 이는 진상을 모르고 이것을 최고의 영적 생명의 단계요, 그들이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믿는 이들이 이러한 오류에 빠지는 이유는 이러한 느낌이 생길 때, 비록 그들이 주님을 아주 사랑하지만 특별히 주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데 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느낌도 거절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다는 느낌도 내게 해가 된단 말인가?” 이러한 질문은 믿는 이의 어리석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믿는 이가 즐거운 느낌으로 충만할 때 정말 주님을 사랑하느냐고 물어야 한다. 그가 즐거운 그 느낌을 사랑한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서 이러한 즐거움을 주셨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느낌을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이 아니겠는가? 만일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이 우리를 어떤 환경에 두시든지 우리는 그분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우리가 느낌이 있을 때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느낌이 없을 때는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느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믿는 이들은 이러한 느낌을 하나님 자신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이 다른 것임을 모른다. 성령의 지시하심이 있을 때만이 믿는 이는 고갈될 때 그가 간절히 구했던 것이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가 사랑했던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그를 즐겁게 한 그 느낌이었다. 이러한 느낌이 그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를 느끼게 하지만 그는 직접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러한 느낌(하나님의 사랑과 임재를 느끼게 한 느낌)이 그에게 적셔짐과 빛 비춤과 상쾌함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일단 그가 이러한 느낌들을 잃어버리면 그는 다시 그것들을 추구하게 된다. 그들 마음속에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이지 하나님 자신이 아니다. 만일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큰 물과 많은 물’이 몰려와 그들을 고통스럽게 할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아주 어려운 배우기 어려운 공과이다. 주님을 믿는 우리들은 즐거움이 없을 수 없다. 주님 또한 그분께서 주신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기 원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분께서 주신 즐거움을 누린다면(우리 스스로 그런 즐거움을 느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즐겁게 할 때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고갈 되게 할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한다면) 이런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해가 없고 유익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즐거움을 누린 후에 그 즐거움을 좋다고 여겨 종일토록 그 즐거움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떠나서 그분이 주신 즐거움을 찾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즐거움은 하나님 자신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민일 우리가 하나님 외에 그분이 주신 즐거움을 누린다면 우리의 영적 생명은 이미 위기에 떨어진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으로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면 우리는 영적 노정에서 진보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으로 인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 - 이 즐거움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일지라도 - 을 사랑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은사 주신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여전히 혼에 의해 살고 아직 무엇이 참된 영적 생활인지를 인식하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다만 즐거운 느낌을 우리 하나님으로 삼고 이것으로 즐거워한다. 믿는 이가 이렇게 오류를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따라 그 즐거움을 가져가시며 오리혀 그로 괴로움을 느끼게 한다. 이 목적은 사랑해야 할 것은 그분께서 주신 즐거움이 아닌 그분 자신임을 알게 하는 데 있디. 만일 믿는 이가 하나님으로 기뻐한다면 자기가 괴로울 때에도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을 가까이 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어두움 안에 빠진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목적은 믿는 이의 영적 생명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믿는 이가 그분 외에 숭배하는 우상을 파고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영적 생명을 해롭게 하는 것들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으로 인한 느낌이 아닌 그분 자신 안에 살기를 원하신다.
믿는 이가 이렇게 느낌을 따라 살고 영에 의해 의지로 말미암아 살지 않을 때 사탄에게 속임을 당하고 또 한 가지 위험에 떨어지게 된다. 이것은 앞 장 들에서 다루었으므로 여기서 간략하게 보겠다.
한 가지 우리가 알야야 할 것은, 사탄은 자기의 느낌을 하나님께 속한 느낌으로 가장하여 그것을 믿는 이에게 준다는 것이다. 믿는 이가 완전히 영을 좇아 행하기를 추구할 때 사탄은 여러 방면에서 여러 느낌으로 믿는 이를 혼돈시킨다. 만일 믿는 이가 고의적으로 느낌을 따라 행한다면 사탄은 자기의 속임수를 더욱 사용할 기회를 획득하게 된다. 믿는 이가 계속적으로 느낌을 구하려 할 때 사탄은 그의 느낌을 하나님에게서 온 느낌으로 착각하도록 더욱 많은 느낌을 그에게 줄 수 있게 된다. 이러므로 그는 사탄의 궤계에 넘어가게 된다. 악한 영은 사람에게 흥분을 느끼게도 하고 실망을 느끼게도 한다. 처음에 믿는 이가 속임을 당하여 사탄의 느낌을 받아들일 때 사탄은 믿는 이의 혼 안에서 이미 어떤 ‘발판’을 얻은 것이다. 이후로 그는 더욱 간교한 속임수에 넘어갈 것이다. 사탄은 그의 느낌에 초자연적인 것을 체험케 하여 그가 그의 전신이 진동되고 만져지며 뜨거워짐을 느끼다가 냉담해짐을 느끼고, 인도를 받는 것처럼 느끼고, 뭔가 가득 찬 것을 느끼며, 몸이 나른해지며 공중에 떠다니는 것을 느끼고, 머리에서 발 끝까지 전신이 불타는 것처럼 느껴지고, 전신의 더러움이 다 제거되어 모든 것이 정결케 된 것처럼 느끼도록 한다. 믿는 이가 악한 영에 의해 이런 경지까지 속을 때 그의 온 존재는 지속적으로 이런 느낌들을 좇아 살게 되고, 그의 의지는 완전히 마비되며그의 직감은 완전히 포위당한다. 믿는 이의 온 존재가 완전히 겉사람 안에 살게 됨으로 그의 속사람은 묶임을 당하게 된다. 이런 단계에 이를 때 모든 것을 사탄의 뜻에 따라 행하게 된다. 이는 사탄이 믿는 이에게 어떤 느낌만 넣어주면 그대로 따라 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는 이가 이것을 모르고 자신이 신기한 체험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영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초자연적인 체험은 오늘날 믿는 이의 영적 생명을 가장 해롭게 한다. 아주 좋은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 이러한 올무에 빠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들의 이러한 신기한 체험이 그들 몸에서 영의 역동적인 활동을 느끼게 하고, 그들을 슬프게 하고 즐겁게하며, 냉랭하게도 하고 뜨겁게도 하며,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한다. 또한 이상과 꿈을 보게 하며, 소리를 듣게 하며, 불을 잡게 하고, 말할 수 없는 신기한 느낌을 갖게도 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것을 성령께서 주신 바 믿는 이가 도달할 수 있는 극치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러한 것들이 혹시 악한 영들의 일이 아닌가를 확실히 알아보지 않는다. 그들은 성령 외에 악한 영들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경의 모든 일은 사람의 영 안에 있다는 것과 육신 안에서 사람에게 무엇을 느끼게 하는 것 중 십중팔구가 악한 영들에서 온 것임을 더욱 생각하지 못한다. 오늘날 믿는 이가 무슨 이유로 이러한 경지에 떨어지게 되는가? 이는 그들이 영 안에 살지 않고 느낌 안에 살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악한 영들이 속임수를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는 이는 느낌의 생활을 포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악한 영이 자기를 속이도록 지위를 내어주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몸의 느낌을 주의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영이 우리의 뜻에 어긋나게 우리 몸에 어떤 느낌을 가져오는 일을 허락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밖의 육신에 있는 모든 느낌을 거절해야 한다. 육신의 어떤 느낌도 믿지 말아야 한다. 이런 느낌을 따라 행하지 말고 금지시켜야 한다. 이것은 사탄의 속임수의 시초이다. 우리는 오직 우리 온 존재의 가장 깊은 것의 직감을 따라 행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신중히 믿는 이의 느낌의 생활을 살펴보았다면 믿는 이의 이러한 체험에 일관된 원칙을 볼 수 있다. 이 원칙은 다름이 아닌 ‘자아를 위한다’는 것이다. 무엇때문에 즐거운 느낌을 구하는가? 자아를 위해서이다. 무엇 때문에 고갈될 것을 두려워하는가? 자아를 위하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육신의 여러 가지 느낌을 원하는가? 자아를 위하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초자연적인 체험을 원하는가? 자아를 위하기 때문이다. 아! 우리가 가장 신령하다고 생각하는 느낌의 생활 속에도 자아를 위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도록 성령께서 우리 눈을 열어주시기 바란다. 우리가 즐거운 느낌으로 충만될 때에도 우리의 생명은 여전히 자아를 중심 삼는 것 - 자기를 즐겁게 하기를 좋아함 - 임을 알게 하기 바란다! 영적 생명의 허위를 시험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어떻게 자아를 대하는가에 있다. 그 시금석은 바로 자아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