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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과 수행] <20> 김진무 “불국토 건설 매진하는 것이 성불로 가는 길”
불교는 철저히 깨달음을 지향하는 종교이다. 물론 이는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불교는 바로 ‘깨달으신 분[佛]’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전체적인 교의(敎義)의 전개는 바로 깨달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있어서는 선뜻 자신 있게 동의할 수 없는 여운을 가진다.
더욱이 최근 깨달음과 수행에 관련된 많은 논의가 나타나면서 이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되고 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涅槃; 행복)으로 보기도 하고, 깨달음에 대하여 지나치게 가치부여를 하여 나타나는 폐해를 지적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의견의 개진은 우리 불교의 현실에 있어서 절실하게 필요한 논의라고 느껴진다.
사실, 최근 전개되는 깨달음과 수행에 대한 논의의 원인을 그로부터 유추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필자는 문제의 초점을 어떤 것이 참다운 불교이고 궁극적인 목적인가에 대한 것보다는 어떠한 불교의 모습이 지금 이 시대의 시대정신에 가장 적합한 것인가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깨달음과 수행’에 대한 논의도 그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방향성을 찾을 것으로 기대하며, 또한 필자 나름의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과 깨달음, 수행에 관한 견해를 논술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부처님의 입장에서 설한 것으로,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법화경〉에서는 ‘불지견’에 대하여 명확하게 설하지 않고 다만 “그러한 모습[如是相]” 등의 항목으로 설한다. 물론 이른바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인 ‘불지견’은 희유하고도 난해하여 어찌 언설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그러함[如]”으로 밖에 표현될 수 없음이다.
더욱이 아함(阿含)으로부터 반야(般若) 등을 통하여 내재적으로 명료하게 ‘불지견’의 내용에 관하여 시설(施設)하고 있어, 눈밝은 선지식들에 의하여 ‘불지견’에 대한 해명의 실마리가 제공되고 있다. 하지만 또한 ‘불지견’의 표면적인 모호한 표현으로 인하여 다양한 견해가 나타날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불(成佛)’에 있는 것인가? 분명히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수기의 내용에 겁과 국토에 대하여 명확하게 명칭을 부여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바로 불자의 역사적 사명을 부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른바 ‘불국토(佛國土)의 건설’인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어떠한 겁에 부처가 되려면 반드시 불국을 완성해야한다는 당위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더 나아가 해석한다면, 현겁(現劫)의 석가모니불을 시봉하며 지금 이 자리에서 ‘불국토 건설’에 참여해야한다는 불자의 사명을 도출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불’이지만, 그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바로 이 땅에 석가모니부처님에 의하여 시설된 불법을 통하여 ‘불국토의 완성’을 위하여 목숨 들어 매진함에 있는 것에 더욱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것이 실질적으로 ‘불지견’에 대한 깨달음[悟.入]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본다.
수행 위한 수행에 집착하면 현실적 사명 저버리게 돼
반야학에 있어서는 ‘열반’에 대한 적극적인 반성을 통하여 이미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 ‘중생즉불(衆生卽佛)’의 명제를 논증하고 있다. 나아가서는 제법(諸法)의 ‘불가득(不可得)’을 제창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 다시 여래장(如來藏)사상을 통한 불성론(佛性論)의 입장에서 ‘열반’을 긍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최종적으로 ‘성불론’으로 전개되고 있어 역시 앞의 〈법화경〉에서 제시한 ‘성불’과 ‘불국토 건설’로 귀결되는 것이다.
사실상 모든 교의체계에서 깨달음을 논할 때, 분명하게 그 대상과 내용 및 증과(證果)를 밝히고 있다. 심지어 비교적 표면적으로 모호한 표현을 사용하는 중국선에 있어서도 깨달음에 있어서 그 대상과 내용 혹은 경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깨닫는다’.‘무엇을 깨닫다’라는 어휘가 자동사나 타동사로 사용되어도 필수적으로 그 대상은 설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명확하게 대상과 내용이 설정되어야 비로소 그에 대한 수행이 설정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불지견’과 같이 깨달음의 궁극적인 대상과 내용에 있어서는 기술적인 표현의 방법이 필요할 것이지만.
어쨌거나 모호하고 추상적인 입장에서 ‘깨달음’에 대하여 당위성과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아기에게 어쩌면 있지도 않은 ‘망태할아버지’를 끌어들여 협박(?)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토끼뿔’을 찾으려 헤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논리에 비춘다면, 과연 수행만을 통하여 궁극적인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수행을 위한 수행을 한다면, 세세생생 억겁을 통하여 수행을 한다고 해도 역시 더욱 수행해야할 수행만이 끝없이 나타날 것이다.
중국선종에서 ‘닦음이 없는 닦음[無修之修]’을 강조하고, ‘지금 바로 이 순간[當下卽是]’을 제시하는 까닭이 있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수행을 부정하는 입장은 아니다. 법다운[如法] 수행을 통한 깨달음에 대한 추구는 불교에 있어서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중국 역경가들의 탄식이 귓가에 스친다. “문화적 전통성은 가장 강력한 보수역량이다”라는…. 이러한 역경가들의 한탄이 다만 불교가 중국땅에 자리매김할 때에 터져 나왔던 역사적인 한탄이었기를 바란다. 김진무/ 동국대 교수 [출처 : 불교신문 2061호/ 9월7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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