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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감정의 결, 모순과 충돌한 흔적들
마경덕 (시인)
지면(紙面)에 쌓인 시의 지층으로 들어가 보면 개인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시간이 퇴화해서 오늘과 내일이 되듯이 과거의 경험과 기억이 현재를 만든다. 무의식 저편에 화석처럼 남아있는 특별한 감정의 결을 수집하고 활용하는 시인들. 퇴적층을 통해 흘러간 시대를 유추하듯, 축적된 경험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발굴하고 결과물로 존재를 확인한다. 이질적인 대상들이 부딪치고 반응하는 과정에서 각각 다른 풍경이 태어나듯, 시를 짓는 일은 사실과 허구 사이를 오가며 인지하는 것과 실제 존재하는, 그 틈을 확인하고 사유하는 작업이 아닐까. 시인은 일방적인 바라보기의 태도를 배제하고 개입할 대상을 살펴 분해하고 조립하며 상상을 작동시킨다. 이때 친밀한 일상의 재료는 상징적 기능을 지닌 오브제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시인이 기록해 온 일련의 풍경에서 한 개인의 시선과 마주치는 일은 흥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누군가 순간의 직관들이 하나의 큰 호흡으로 이루어지고 그것을 ‘삶’이라고 하였다. 꽃은 피지만, 피는 모습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한계를 뛰어넘어 그 너머의 것을 찾는 과정에서 환상과 현실은 끊임없이 부딪친다. 어느 날 신영애 시인은 ‘압도적인’ 사건을 경험한다. 그의 영역에는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에서 ‘모순과 충돌’한 흔적이 있다. 숱한 균열을 시인은 어떻게 소화할 수 있었을까. 작가란 자신에게 상처가 된 장면을 형상화 시킨다고 한다. 그것이 곧 상처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출구’일지도 모른다. 유기적으로 연결된 주변의 관계망을 통해 신영애 시인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만들며 주어진 현실을 담담하게 구사한다. 현재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다른 대상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삶에 몰입할 때 시적 에너지가 발생한다. 시인의 기억이 어느 곳에서 존재하며 확장되는지,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각각 다른 속도에 대해, 거스를 수 없는 파동에 대해, 스스로 던진 질문에 ‘해답’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 지면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국화꽃 한 묶음 화병에 꽂아 가을을 들여놓았다
열흘의 개화
열흘의 우울
만개한 꽃송이 밑에
문드러진 꽃 대궁이 속앓이를 하고 있다
작은 충격에도 가슴이 쿵쾅거린다
심장 박동기 달고
스물네 시간 감시했지만
찾아내지 못한 두근거림 하나
ㅡ화병(火病)입니다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라는 의사의 말을
나는 참지 마세요, 라고 읽는다
해를 보내기엔 날이 많은데
짧은 계절을 안고 떠나버린 너
추스르지 못한 속내가 긴 밤 문드러진다
두멍에 낀 이끼처럼
더께가 지고 심통을 부리는 몸부림이었다
꽃잎 파르르 떠는 이 가을에
후드득
나는 나를 꺾고 있다
—「화병」전문
가을을 상징하는 국화가 한 묶음 화병에 꽂혀있다. 시각적 환경을 제공한 장소는 거실일 수도 있고 안방일 수도 있다. 이때 꽃을 감싼 화병 역시 ‘갈등과 충돌’의 장소이다. ‘바라봄’ 은 단순한 ‘놀이’이지만 ‘보여줌’은 화병에 의탁한 ‘꽃’의 마지막 ‘노동’이다. 이때부터 각각 다른 ‘질량’을 지닌 초를 다투는 ‘진자운동’이 시작된다.
화병에 꽂아도 열흘을 너끈히 버티는 꽃이어서 겉보기엔 싱싱해 보이지만 속사정은 다르다. 가위에 전지된 순간, 시한부 선고를 받은 꽃은 화병 속에서 악취를 풍기며 삶의 경계를 넘어가는 중이다. 적당히 관망하며 타인을 외면하는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꽃을 바라보는 동안, 우리는 향기에 취해 문드러진 대궁을 보지 못한다. ‘볼 수 없음’은 아득한 거리이다. 끝내 타협하지 못하는 둘의 관계, “화병과 꽃”은 ‘고립’의 자세로 시들고 있는데, 그 거리를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내부의 문제를 방치하면 언젠가는 외부로 드러나게 된다. 웃음에 가려진 울음일수록 상처가 깊다.
잠재된 기억을 현재의 시간 속으로 호출하는 것은 두려운 기억과 마주하는 것이다. 불편한 대면은 마치 ‘나를 꺾는’ 일이어서 화병은 깊어지고 울화가 끓어오른다. 개인의 정서에 균열이 가는 상황 앞에서 침묵은 어떤 의미였을까. 외부의 자극이 내부로 번지는 동안 몸부림이 동반되었다. 눈을 감고 예민해진 귀를 통해 시인이 들었던 소리들, 다른 감각을 집중시켜 사라진 부재의 자리를 채우기도 했을 것이다. 누군가 무음은 침묵이며 ‘말할 수 없음’이고, ‘말하지 않음’의 의지라고 했다. 그동안 자신의 내부를 ‘무음’으로 일관한 시인에게 ‘무음’은 결국 ‘없음’ 과 ‘않음’ 그리고 자신의 내부를 규정한 ‘의지’였던 것이다.「화병」은 화자의 심정을 화병(火病)과 화병(花甁)으로 접목한 개인의 실천적 고민을 보여주는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참꽃을 피울 수 있다고 했다
희미한 향을 찾아 오른손을 담갔으나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꽃은 기미가 없었고 후각은 무디어 갔다
기다림은 일요일 오후처럼 조급해지고 중심은 멀어져 갔다
체온은 항상 웃돌았다
온실에서 자란 꽃은 비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꽃잎은 한 점 빛마저 잃었다
둑 너머엔 망초 잎이 자라고 있었다
수정이 필요한 연둣빛 웃음들
흔들리는 갈증은 어디에서 멈출지
타는 듯한 향기에 벌과 나비는 숲을 잃었다
밭을 일궈 꽃을 피워보려는 무리들
계절이 바뀌면 열매를 맺을까
날고 싶었다
바람은 어디로 부는가
각자 써 내려간 낯선 문장들이
저마다 내는 쓴 소리
그 소리에 닿기 위해 지문은 사라지고
귓불에 머물던 향기는 흔적이 없다
유통기한은 길지 않았다
꿀을 주세요
수정해 줄게요
산수국 헛꽃이 아프게 몸을 뒤집는다
—「헛꽃」전문
산수국은 자잘한 참꽃 수백송이가 모여 한 송이가 된다. 꽃이 잘아 곤충을 유인하기엔 부족하다. 그래서 가장자리에 눈에 띄는 헛꽃을 피운다. ‘헛꽃’은 말 그대로 ‘헛것’이다. 긴 겨울을 보내며 얼고 녹으면 잎맥만 남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 낭화(浪花)이기 때문이다. 일생 참꽃을 위해 헛꽃으로 살다간다. “참과 거짓 사이”에서 갈등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을 닮았다. “참꽃을 피울 수 있다고 했다/희미한 향을 찾아 오른손을 담갔으나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꽃은 기미가 없었고 후각은 무디어 갔다(「헛꽃」부분)” 시인이 참꽃이라고 믿었던 시간들, 생의 변곡점(變曲點)에 오류가 생겼다. 우리는 자신의 기억, 또는 타인의 기억을 온전히 믿을 수 있는가? 한 지점에서 또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시간의 흐름에 기억은 조금씩 수정되고 지워지며 추상적인 기억만 남게 되고 잘못된 인식은 오류를 낳기도 한다. 보이는 것, 우리가 기억하는 절대적 믿음과 가치에 대한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진실”도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강렬한 경험을 제외하고 대부분 사라져버린다는 인간의 불완전한 기억으로 “지문은 사라지고” 귓불에 “머물던 향기는 흔적”이 없다.「헛꽃」은 고립된 공간에서 느끼는 고독하고 불안한 심리를 통해 “실재와 허구 사이”의 간극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신영애 시인은 현실을 위협하는 불편한 기억과 대면하며 ‘헛꽃’이라는 알레고리를 차용해 “아프게 몸을 뒤집는” 행위로 생의 의지를 다짐하고 있다.
한때는 꽃이었음을 감지한다
이른 봄
장다리꽃 위에 포르르 앉고 싶었을 나비 한 마리
수없이 날개를 폈다 접는다
가시거리는 눈과 눈 사이
왼쪽 눈이 오른쪽에게
오른쪽 눈이 왼쪽에게 할 말이 있다는 듯
눈 질끈 감고 덮어버렸던 그날
조금은 가물거리는 너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듯,
하느작거리며 무언가 새기고 있지만
스텝은 엇박자여서 읽히지 않는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나비가 전하는 말
—「비문증」전문
‘비문증’은 눈앞에 검은 무언가가 떠다니는 것처럼 느끼는 증상이다. 시선의 방향에 따라 이물질의 위치도 변한다. 잡히지 않는 무언가가 눈앞에 어른거리며 정신적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시인은 ‘눈과 눈 사이’를 날아다니는 그 ‘허구의 물체’를 “장다리꽃 위에 포르르 앉고 싶은” ‘나비’라고 보았다. 시인은 한때 “꽃이었다”고 고백한다. 재미있는 것은 화려한 장미도 향기로운 백합도 아닌 소박한 ‘장다리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장다리꽃’은 나비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꽃이 아닌가. 하지만 그 한때가 지났으니 ‘내 것’인 듯한 ‘나비’는 ‘내 것’이 아닌 것이다. 봄의 전령사인 나비가 배추밭이나 무밭을 순례하는 봄날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화려하고 가지런히 정돈된 도시의 화원에서는 이제 나비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한적한 시골길에서 만난 배추흰나비 한 쌍이 사무치듯 그리운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무심히 배추밭 한켠에 버려진 배추 한 포기가 노랗게 피어낸, 또는 무 한 개가 물고 있는 보랏빛 꽃이 얼마나 눈부신지 시인은 알고 있다. 장다리꽃이 품은 한 줌의 씨앗은 다시 돌아올 ‘봄’이다. 나비가 있기에 가능하다.
세상에는 내 것인 줄 알았던 것들이 어느 순간 손아귀를 빠져나가 타인의 것이 되기도 한다. 마치 다른 꽃으로 날아가 버리는 나비처럼, 닿을 수 없는 거리로 사라진 꿈은 엇박자여서 읽히지 않는 일장춘몽이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비문증’은 시인에게 잡을 수 없는 ‘아름다운 한때’와 같다. 이미지가 넘치는 시대의 시선은 화려한 영상으로 집중되지만 이렇게 소박하고 정갈한 시선도 있다. 신영애 시인은 의미의 양면성을 ‘비문증’에 담아 자신만의 필법으로 색다르게 변주하였다. 평소 시인이 주목해 온 수집품은 ‘자연’과 ‘사람’이다. 서정을 추구하는 작업 형식에는 생략된 선 너머, 만질 수 없는 쓸쓸한 정적이 고여 있다. 아래 예시「모퉁이를 걷다」도 유사한 맥락으로 이어진다.
공원 모퉁이를 걷는다
한 여인이 벤치에 앉아 두리번거리다 화들짝 놀란다
산책 중인 내 발소리를
기다리던 사람의 인기척으로 들은 듯
우리의 간격은 10m
그녀와 나 사이엔 보이지 않는 벽이 경계를 이루고
눈이 마주치는 순간
외로움을 들켜버린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딱히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듯했다
인적이 뜸한 저물녘이었다
비둘기 우는 소리가 적막을 깨우고
새들은 짝을 찾기 위해 귀가 밝아졌다
나도 이제
수신인 없이 통화하는 비결을 터득할 때가 되었다
말하고 싶어서
내 손은 울리지 않는 주머니 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모퉁이를 걷다」전문
‘모퉁이’는 구부러지거나 꺾어져 돌아간 자리나 변두리나 구석진 곳이다. 시인은 그 ‘모퉁이’에서 인물과 풍경을 포착한다. 느슨하게 느껴지던 공간에서 어느 순간 긴장감이 돈다. 보이지 않는 벽이 경계를 이루고 “눈이 마주치는” 순간 눈동자가 흔들린다. 외부 요소들이 홀로만의 공간에 ‘개입’했기 때문이다. 시인 역시 ‘모퉁이’를 걷는다. ‘모퉁이’가 가진 ‘한적’함에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리가 깔려있다. 새들마저 짝을 찾기 위해 귀가 밝아지는 저물녘이었다. 동병상련이라고 했던가. ‘외로움’은 서로를 알아보는 법, 시인이 바깥과 차단된 불균형에서 벗어날 방법으로 택한 장소는 ‘공원’이었다. 이 모든 과정은 ‘모퉁이’라는 장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물, 기억과 공간이 부딪치면서 파생하는 것은 “무의식의 내면에 잠재된 외로움”이다. 사람들이 모여 특정 시간에 걸쳐 무언가에 집중하게 되면 그 나름의 구조가 생기고 그 안에서 모순이 생긴다고 한다. ‘외로움’에 길들여지지 않으려 타인과 모임을 갖지만 그 구조 안에서 또 ‘외로움’은 발생한다. 주체하지 못할 감정을 어떻게 치유할까. 가상의 공간에서 같은 취향을 가진 또는 다른 가치관을 가진 개인과 개인의 소통을 가능케 하는 것은 ‘스마트폰’이다.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며 문자메시지나 통화를 통해 긴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나도 이제/수신인 없이 통화하는 비결을 터득할 때가 되었다/말하고 싶어서/내 손은 울리지 않는 주머니 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모퉁이를 걷다」부분)”에서 보여주듯, 시인과 통화할 각별한 대상은 ‘부재중’이다. 시인은 동시대의 가장 보편화된 소통의 매체를 통해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지닌 ‘외로움’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아래「건강검진」에서도 ‘외로움’의 실체를 만날 수 있다.
수사는 지하벙커에서 시작되었다
주어진 암호는 107호
가문의 내력까지 추적하며 비밀문서는 자필 서명되고
LTE로 연결된 수사망은 빠져나올 수 없다
미소 속에 감추어진 날카로운 눈빛은
모두가 명수사관임을 암시한다
그림자처럼 남겨진
그대 영상 하나 숨겼을 뿐인데…
심증은 소문보다 못해 증거가 될 수 없다
물증을 찾기 위해
최첨단 기계로 몸을 훑어가고
삼킨 것부터 배설물까지 뒤지며
토설치 않는 말을 찾기 위해 약물을 주입시킨다
거미줄에 걸린 먹잇감처럼
파리한 얼굴로 끌려 다닌 힘겨운 시간
부릅뜨고 버티던 눈꺼풀이 문을 닫는다
끝내
너를 새겨놓은 흔적, 찾아내지 못했다
오진이다
—「건강검진」전문
‘건강검진’은 몸을 뒤지는 수사의 방식으로 지하에서 시작된다. 암호는 107호, 간호사는 차트를 보며 문 앞에 대기 중인 107번을 부를 것이다. 가문의 병력까지 추적하고 자필 서명되는 수사의 방식은 최첨단 LTE로 연결되어 수사망은 빠져나올 수 없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는 모두 명수사관이다. 심증은 증거가 될 수 없어 약물을 주입시키지만 “끝내/ 너를 새겨놓은 흔적, 찾아내지 못했다// 오진이다(「건강검진」부분)” 그렇다. 심중에 깊이 새긴 흔적을 누가 알 것인가. 다만 “마음의 그림자” 하나 숨겼을 뿐이라고 생의 한 부분인 것처럼 담담히 토로하지만 ‘그림자’는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비슷한 소리들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극적인 상황도 있다. ‘그림자’ 속에는 기나긴 고통의 시간, 입을 닫고 선글라스 하나로 외부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킨 시간도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들이닥친 남편의 죽음, 운명과 충돌한 그 격동의 파문이 가슴에 까맣게 고였을 것이다. 문득, 느껴지는 빈자리의 서늘함, 지극히 사소한 일상의 말들에서, 다시는 호명할 수 없는 언어도 있는데, 짓무르고 말라버린 울음도 있는데, 미세한 균열과 붙잡지 못한 ‘단호한 이별’도 있는데 정작 ‘흔적’은 없다. ‘실체’가 없으니 쉽게 인정하지 않는 냉정한 현실을 시인은 “오진이다” 한마디로 압축하였다. 감정을 절제한 이 짧은 한마디가 시의 진수(眞髓)를 보여주고 있다. 많은 말을 생략함으로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는 은유와 언어의 절제가 돋보이는「건강검진」은 모처럼 만난 수작이다.
바람이 부고를 전했다
중부 하늘에서 세력을 넓혀가던 먹구름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추락했다
물로 빚어진 그의 몸
눈물을 쏟아내고 나면 사라진다
조문을 위해 잰걸음으로 모여드는 구름들
번개가 조등을 켜고
우레가 외는 상두소리
요란한 장례식을 치르는걸 보니 명사의 죽음인 듯
리기산의 운해로 머물고 싶었으리
메마른 나무에게 여우비로 적셔주고 싶었으리
장례는 풍장으로 치러진다
너나없이 상복을 입고
곡비처럼 찔끔거리며
휘날리는 만장의 뒤를 따르고 있다
땅에서는 망자 굿이라도 하는 듯
타닥타다닥
흙 향이 진동한다
—「그리고 구름은 사라졌다」전문
바람이 부고를 전했다. 불확실한 내일을 알리는 암시였다. 하늘에서 세력을 넓혀가던 먹구름이 사라진 것은 순간이었다. 체감한 균열과 상황을 ‘먹구름’과 연결시켜 암울한 심경을 형상화하고 있다. 평생 공들인 탑이 찰나에 무너지듯 ‘사라지는’ 것을 통해 생의 허무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일련의 기호가 사회적 약속이다. 이미지, 제도나 법률도 이에 속한다. 통상 혼자된 젊은 여인을 바라보는 고정된 시각, 또는 사회화된 개인의 의식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구름은 사라지면 그뿐이지만 “삶과 죽음”의 충돌, 우발적인 사건이 남긴 진동의 여파가 크다. 관찰의 대상인 번개와 우레를 동반한 ‘먹구름’은 생의 중간 지점에서 만난 일련의 사건이다. 개입이 차단된, 또 다른 길 하나가 생의 길목에 잠복하고 있었다. 허무하게 무너지는 구름처럼 “생의 중심”이 사라지고 이때부터 결핍이 시작되었다. 결핍은 “소유와 존재”의 두 가지 차원으로 나타나고 존재의 결핍은 “소유가 적음”으로, 소유의 결핍은 “완벽한 존재를 추구하는 욕망” 속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시인은 임의적이고 불완전한 기억에서 탈피할 수 있는 “개인의 심리”에 주목하고 현대인이 느끼는 내구성이 강한 ‘고립’이라는 소재를 활용해 “주관적 기억”을 풍족함과 상반되는 ‘결핍’의 이미지로 구현해낸다.
돌부리에 걸려 울던 일은 고난이 아니다
고열에 생사를 넘나들며
산수유를 다려먹던 일
담 넘어 벌레 먹은 장미를 훔치다 겪은 이별도 고난이라고 하지 않는다
파뿌리의 언약이 효능을 발휘할 때쯤
기가 스러지고 서로의 어깨를 내어주어야 할 때
어스름한 노을을 함께 바라보아야 하는 때에
한 사람을 하늘로 보내야 하는 건 고난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
나른해진 목소리로
오늘은 뭘 먹지
우리 뭐할까
이런 일상을 이야기할 수 없는 건 고난이다
둘이 보았던 들꽃을 혼자 바라보는 건 고난이다
소소한 일상을 혼자 하는 건 고난이다
고난에서 자란 싹은
사소한 것들을 아파하지 않는다
—「고난에는 움이 튼다」전문
‘고난’은 “괴로움과 어려움”을 아우르는 말이다. 말의 중간 마디마디에 ‘가시’가 박혀 있다. 신영애 시인은 돌부리에 넘어지거나 생사를 넘나들던 일까지 ‘고난’이 아니라고 한다. ‘고난’에도 강도(强度)가 있다는 것, 그렇다면 생사를 넘는 것보다 막중한 고난의 ‘크기’를 살펴보아야한다. 시인은 뜻밖에 서로의 어깨를 내주며 노을을 바라볼 ‘곁’이 없다는 것, 들꽃을 혼자 바라보는 것이 “견디기 힘든” ‘고난’이라고 한다. 깊이 빠져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기나긴 고통의 시간, “외로움의 덫”이 고난이었다.
어디선가 자리를 옮겨온 나무들이 지주목을 붙잡고 버티는 것처럼 죽은 나무도 산 나무의 힘이 되어준다. 시인의 지주목은 고인이 된 남편이다. 이렇듯 시인은 생명과 “죽음의 경계선을 배제하고” 생전의 “기억을 접목시켜” 공존한다. “덜 죽은 자들”이란 말이 있다. “덜 죽었다는 건 아직 살아있는” 자를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죽어야할, 하지만 아직 살아남은, ‘덜 죽은’ 자들일 뿐이다. 신영애 시인에게는 ‘덜’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궁극적인 결과는 하나이고 ‘조금 더 빨리’와 ‘조금 더 늦게’의 차이일 뿐이다.
나는
채 젖어보지도 못하고
조문을 마친
한 송이 국화였다
—「칠월」전문
한창 짙푸른 칠월의 국화였다, 예상치 못한 ‘낯선 이별’이었다. “나비가 전하는 말”은 무엇이었을까? 결핍 상황을 드러낸 짧은 시 한편이 ‘절실한’ 힘을 가졌다. 실패가 준 상처를 설득하고 설득당하며 “삶의 균형”을 맞춰가는 신영애 시집『나비가 전하는 말』은 ‘보이는’ 것보다도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부분”에 주목하고 그 몫을 훌륭히 담당한다. 시인은 개인이 지닌 ‘내면의 고통’을 자신의 공간에 처음으로 전시했다. 당당한 것들은 늘 아름답다. 아직, ‘덜 죽은’ 시간보다는 ‘살아야’ 할 시간이 많기에 시인의 색채(色彩)는 아직 싱싱한 초록이다.
신영애 시인
전남 영암 출생
2011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나비가 전하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