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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지역의 우리학교 방문기 2_ 시코쿠 조선초중급학교
오카야마를 나와 곧바로 향한 곳이 ‘시코쿠 조선초중급학교’ 이다. ‘곧바로’라는 단어는 사실 그리 적당하지 않다. 오카야마에서 시코쿠로 가려면 일단 바다를 건너야 하기 때문이다. 무려 3시간을 넘게 자동차로 이동했다.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 그 긴 시간 동안 운전을 할 수 없었던 나는 졸면서 풍경 구경도 하면서 이런저런 상념에 잠겼다.
‘아! 드디어 시코쿠 우리학교를 가게 되었구나.’
사진1. 오카야마에서 시코쿠를 자동차로 달리며 본 바다
이곳은 나에게 특별한 추억이 있는 학교다. 시간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때는 막 영화 ‘우리학교’를 촬영하던 때였다. 2004년 겨울로 기억한다. 혹가이도 최인태 교장 (지금은 이바라기 조선초중고급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시다.)이 집으로 초대를 했다. 한국에서 교장 사택이라고 하면 뭔가 좀 으리으리한 것을 상상하게 되지만 – 아!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관념일 뿐 – 내가 가 본 조선학교의 교장 사택은 그야말로 ‘소박’하기 그지 없는 곳이었다. 물론 2004년 당시 혹가이도 조선학교 교장의 사택 방문이 첫 경험이었지만, 이후 오사카나 도쿄의 교장 사택도 마찬가지였고, 오히려 혹가이도 교장 사택은 그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었던 기억이 있다. 튼 그 때 초대해 주신 덕분으로 가난한 다큐멘터리 감독의 위는 고기와 과일로 오랜만의 행복에 젖었었다. 식사가 끝나고 함께 봤던 방송 다큐멘터리. 교장이
“이것은 꼭 봐야한다. 혹가이도 조선학교만 우리학교가 아니야. 저 멀리 시코쿠도 여기처럼 큰 섬에 한 곳 밖에 없는 조선학교지만 우리랑은 사정이 많이 달라요.”
라며 틀어준 NHK 다큐멘터리였다. 녹화된 테이프를 보여준 것이다.
교장 선생 이하, 함께 초대된 젊은 선생님들, 그리고 사모님, 아이들까지 여러명이 즐겁게 식사를 마친 뒤라 결코 보여줄 수 없었지만, 그 다큐를 보고 흘렸던 눈물은 영화 ‘우리학교’를 만들면서 항상 간직하던 ‘시선’을 만들어주었고, 한 지역의 특별함을 넘어 전국의 조선학교라면 다 가지고 있을 보편적인 성격을 찾는데 몰두하게 해 주었다. 한 마디로 그 때 봤던 ‘시코쿠 조선학교의 1년’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영화 ‘우리학교’의 모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과연 어땠길래….
지금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우선 교장의 모습이었다. 아주 작은 학교버스를 운전하면서 초급부 저학년 아이들에게 가끔 학교버스 운전수 아저씨라고 불리는 교장. 아이들 등교를 그렇게 돕고나면 수업에 들어가야 하고, 수업이 끝나면 다시 아이들 하교를 돕고, 그러다가 무슨 행사가 있으면 동포들에게 얼굴 보이러 나가야 하고, 우리학교의 처지를 일본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강의, 토론 등에 참가하고, 시간이 나면 다시 학교에 와서 구석구석 청소하고, 기숙사 아이들 돌봐야 하고… 당시 20명도 채 안 되는 학생들은 정말 가족처럼 오손도손, 형, 누나 같은 선생님들과 정을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졸업식. 학교에서 유일하게 졸업을 하는 단 한 명의 중3 언니가 바다 건너 멀리 히로시마 조선고급학교로 진학한다. 언니를 떠나 보내는 동생들의 눈물, 초급부 1학년부터 중급부 3학년까지 6년 동안 기숙사 생활을 했던 언니는 다시 히로시마 우리학교에 고급부로 진학하면서 기숙사로 간다. 그 언니가 만약 거기를 졸업하고 혹시 조선대학으로 진학한다면, 이 학생은 초급부 1학년(7살) 때부터 16년 동안 엄마 품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하는 것이다.
사진2. 시코쿠 조선학교 아이들. 이 아이들 중 기숙사생이 있을지도 모른다.
조국에서 바다를 건너, 도쿄나 오사카도 아닌 다른 지역의 일본인들도 쉽게 가기 힘든 시코쿠라는 섬에서, 그것도 단 하나 밖에 없는 조선학교, 그 곳의 단 한 명의 조선학생. 이 아이 하나를 떳떳한 재일조선사람으로 키우기 위해서 부모님, 선생님들, 그리고 주변의 동포들이 기울여 왔을 구체적인 수고들.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그 때 다큐를 보고 흘렸던 눈물은 그 아이의 졸업이 눈물겨워서가 아니었다.
‘ 우리는 너무너무 모르고 있었구나, 이렇게 60여년을 살아 오셨구나. 누구도 돌봐 주지 않는 외로움 속에서도 이렇게 지켜내고 계셨구나.’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바로 눈물의 정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 학교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덧 1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버렸고, 나는 영화감독이 아니라 몽당연필 사무총장이라는 이름으로 그리던 시코쿠 우리학교를 방문한다.
고난의 학교
올 해로 69주년을 맞이하는 시코쿠 우리학교의 정식명칭은 ‘시코쿠 조선초중급학교’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초급생과 중급생이 함께 교사와 운동장을 쓰는 학교다. 여타의 우리학교와 역시 다름이 없다. 여타의 우리학교와 다름 없는 것은 해방 직후, ‘국어 강습소’를 세우면서 학교역사가 시작되었음도 마찬가지다. 이 국어강습소는 마츠야마(학교가 있는 곳이 시코쿠라는 섬의 에히메현 마츠야마 시이다)의 경우, 45년 11월 초순부터 동포 개인의 집, 터널공사현장, 철공소 사무실 등에서 시작되었다.
사진3. 초기의 시코쿠조선학교. 마루로 만든 교실바닥에 아이들의 양말이 인상적이다. 배경으로 보이는 태극기와 북한의 국기도 눈여겨 볼 수 있다.
그렇게 시작된 강습소는 곧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한반도 남단의 극심한 좌우이데올로기 대립과 일본정부의 얼토당토 않은 귀국조건(귀국시 재산을 두고 떠나라) 으로 인하여 주춤하게 되었고, 학교는 좀 더 안정화될 필요성이 생겼다. 그리고 47년 7월, 동포들은 목조 건물 50평, 교실 2개, 선생님 둘, 학생 25명으로 시작하는 ‘마츠야마 조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마츠야마에 1개교 더, 니이하마(新浜)시 2개교를 더 세워 사립학교 인가를 48년에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립학교 인가를 받은 1년 뒤 49년에 일본정부는 조선학교 폐쇄령을 공포하여 일방적으로 학교 폐쇄에 들어간다. 이는 단지 학교 폐쇄에 그치지 않고 타 지역의 조선어교실(우와지마)까지 패쇄시키는 행태까지 이른다. 이때부터 시코쿠 조선학교 건설의 암흑기 혹은 고난의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동포들은 이 시기를 ‘이동 교실’ 시대라고 부른다 한다.
49년 조선학교 폐쇄령 이후 한국전쟁이 끝나고 안정기에 접어들었던 54년까지 학교는 동포의 집에서, 절에서, 때로는 공립고등학교의 한 교실을 빌려서, 제재소 창고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이사에 이사를 거듭하였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1세 동포들은 피눈물을 흘렸으리라. 이 눈물은 스스로 땅을 사고 목조건물이나마 손수 지어 떳떳한 우리학교를 만드는 길로 승화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64년 현재의 부지에 우리학교를 이전하고 초급부 중급부가 함께 공부할 수 있는 12개의 교실과 170평(17실)의 기숙사를 지었다. 이때의 학생수가 150여명 (기숙사 생 70여명)이었다고 한다. 일본 각 지역의 조선학교를 두루 돌아다니며 그들의 학교건설의 역사를 듣고 읽고 보다 보면 느끼는 것이 있다.
“어쩌면 이렇게 ‘1세 동포들의 마음’은 한결 같았을까?”
해방을 맞은 동포들은 그 설움의 깊이 만큼이나 기쁨이 더 했고, 귀향에의 확신은 그만큼 확고했을 것이다. 그렇게 200여만 명의 조선인들 중 140만 명이 돌아왔고 어떻게든 고향에서 적응해 살았다. 하지만 돌아 간 사람들 중 많은 수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 온다. 그리고 그들이 가져 온 소식은 제주도의 흉흉한 소문과 좌우대립의 혼돈이었다. 그래 조금만 있다가 안정되면 돌아가자. 그렇게 기다리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준비하던 시간을 배반이라도 하듯이 이번에는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쯤 되면 귀향에의 욕망을 포기할 만도 한데, 그들은 결코 포기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조국이 둘로 갈라졌을 때에도 그들은 ‘나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말’을 모르던 자식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쳤다. 곧 ‘통일’ 될 거니까.
사진3. 시코쿠 조선학교의 역사자료집에 있는 옛날 학교의 평면도. 자세히 보면 칸막이를 두 개 두고 그 사이에 칠판, 책상을 놓고 공부했으며, 오른쪽 그림에서는 학교 바로 앞의 작은 강에는 돼지우리가 있다. 교사는 밤이 되면 기숙사로 사용한다고 적혀 있기도 하다.
그리고 60여년이 훌쩍 흘러 버렸다. 이제 ‘고향’이라는 단어는 그들의 자손들, 2세, 3세들에게는 돌아갈 곳이 아니라 ‘건너 왔던 곳’이 되어 버렸다. 자신이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던 고향인 것이다. 반세기가 훌쩍 넘게, 세대를 3~4대 넘어갈 정도의 시간이면 이제 ‘고향’이라는 단어는 그만 잊어도 좋으리라. 그러나 아직도 조선학교를 다니는 초급부 학생에게
“동무의 고향은 어디야?”
라고 물으면
“고향은 경상남도 ㅇㅇ 입니다”, “제주도 ㅇㅇ 입니다’
라는 답이 돌아온다. 아이들은 여전히 학교에서 자신의 고향이 어디인지를 배우고, 그 고향의 말을 배우고, 그 풍습을 배운다.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고향이지만 ‘고향’이라는 단어로 자신의 뿌리를 기억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 우리학교에서 다정한 선생님, 동무들과 함께 그 ‘고향’을 배우던, 그래서 뭔지 잘 모르지만 동질감을 느끼고 함께여서 행복했던 그 시절을 거친 조선학교 출신 재일동포들에게, 우리학교야말로 진짜 ‘고향’에 가까운 이미지가 아닐까. 그리고 1세 동포들은 그들의 지혜로운 눈을 통해 이미 이런 미래를 보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추론해 본다. 학교를 짓기 위해 그토록 온 몸과 마음을 바쳤던 흔적을 더듬다 보면 이런 생각까지 든다는 것이다. 시코쿠 우리학교도 그렇게 돼지우리와 칸막이 교실을 거쳐 지난한 세월을 1세, 2세 동포들의 한숨과 피땀과 애정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사진4. 시코쿠 우리학교의 운동회. 적은 수이지만 큰 학교와 마찬가지로 운동회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아이들의 우리 무용과 장단.
내가 10년 전에 TV화면에서 만난 시코쿠 우리학교는 생각보다 넓었다. 그렇게 작은학교라는 이미지가 강했었는데. 산길을 돌아돌아 올라간 우리학교는 도호쿠 조선학교 만큼은 아니지만 산 중턱에 떡하니 넓은 부지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 학교에 현재 다니고 있는 동포학생은 20명. 초급부 1학년생이 1명, 4학년생도 1명, 각 학년이 3명 정도. 중급부 1학년은 아예 없고, 졸업을 앞둔 가장 형님인 중3은 모두 남학생들이다.
사진5. 시코쿠 조선학교의 운동장과 교사. 정면의 교사 뒤편이 기숙사 건물이다. 운동장에서는 초급부 저학년의 체육시간.
사진6. 건물 쪽에서 바라본 운동장과 학교정문이다. 높은 산은 아니지만 어느 동네의 작은 언덕에 위치한 우리학교이다. 오래된 학교이지만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따다 놓은 예쁜 꽃이 보기 좋다. 교정의 나무로 이곳이 일본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코쿠 지방에 단 하나 뿐인 우리학교.
오카야마를 떠나 3시간을 달려오니 우선은 배가 고팠다. 학교는 마침 점심시간. 기숙사가 있는 학교인지라 학교급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김영웅 히로시마 교장, 요코마 선생님과 함께 신세를 지기로 했다. 학교급식. 실제로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일본의 모든 학교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조선학교는 사정이 약간 다르다. 정부의 지원도 없고, 학생수가 날로 줄어듦에 따라 학교 급식은 왠만해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다만 전국의 67개 조선학교 중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서는 학생수에 따라 급식이 이루어진다. 시코쿠의 경우에는 학생수가 적어서인지 기숙사생과 함께 전교생이 함께 급식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조선학교에서는 점심시간에 급식풍경이 아닌 도시락풍경이 연출된다. 학생수가 적어도 많아도 아이의 도시락을 싸는 것은 엄마들. 1년 내내, 아니 아이가 우리학교를 다니는 내내 도시락을 싸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게다. 조선학교가 아직도 훈훈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여러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매일매일 도시락을 싸주는 어머니, 일주일에 한번 혹은 이주일에 한번 학교에 나와 공동급식을 해주는 어머니들, 김치와 지지미를 일본사람들에게 팔고 그 이익으로 학교 칠판을 갈아주고 낡은 책상을 갈아주는 어른들. 주말이면 열일 체치고 학교에 나와 학교 보수를 해주는 아버지들. 조선학교 아이들에게 ‘웃어른을 공경하라’ 라고 굳이 강조하기 않아도 되는 이유가 늘 곁에서 ‘학교’를 위해 애쓰시는 부모님, 선생님들의 노고를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6. 시코쿠 우리학교 식당 풍경. 설겆이 당번인 중급생 형들, 얼마전까지 시코쿠 교장이었던 김영웅 선생님과 진지하게 뭔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초급생. 밥을 늦게 먹는 학생 옆에서 아이가 끝가지 먹을 때까지 기다려 주는 선생님. 그리고 이 학교의 자매 학생. 리량과 채량.
식사 시간이 끝나고 수업을 돌아 보았다. 다시 기숙사식당 밖으로 나오니 그 옆에 아주 오래된 건물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바로 기숙사 증축을 계기로 더 이상 쓰지 않는 옛날 기숙사. 한때는 70여명의 아이들이 북적대며 생활했을 이 건물이 이제는 창고로 쓰여진다고 한다. 왜 이렇게 옛날 기숙사를 그대로 남겨두는 것일까? 이유를 물을 필요도 없었다. 다른 조선학교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었던 풍경이었다. 바로 재정문제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철거비용이 없기 때문인 거다. 어떤 학교는 그렇게 남겨져 있는 건물을 잘 청소하여 학교역사자료관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점점 적어지는 학생수와 그에 따라 비어가는 교실을 생각하면 그것도 어쩌면 공간의 낭비일지 모른다. 학교관계자들이 왜 이런 생각을 못할까? 그들도 나름대로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푼이 생기면 그것으로 교재를 마련하고 선생들 월급을 주기 바쁜 조선학교의 현실을 생각하면 저 오래된 기숙사를 왜 철거하지 않고 썩히느냐고 반문할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는다. 한 때는 화려했고 반짝반짝 빛났을 오래된 기숙사. 바로 옆에 훌륭한 새 기숙사가 지난 시기에 건축되어 현재는 그곳에서 소수의 기숙사생과 시집장가 가지 않은 젊은 선생님들이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사진 7. 시코쿠의 옛날 기숙사. 이제는 오래된 창고 같은 모습이지만 옛날에 이곳에는 70여명의 학생들이 기숙했다.
학생수 20명의 아주 작은 학교라 할지라도 학년마다 선생님이 있으며, 자기 학년 교실이 버젓이 있다. 하지만 시코쿠가 다른 조선학교와 약간 다른 특징이라면 다른 곳보다 교실의 크기가 작다는 느낌이었다. 그 작은 교실을 3~4명이 한 학급이 되어 생활하니 그렇게 작게 보이지도 않고 딱 적당해 보이는 느낌. 조심스럽게 교실로 들어가 보니 쑥스러워하는 아이들. 역시 도심의 학생들과 다른 모습니다. 처음 혹가이도 조선학교 아이들을 만났을 때 내가 이름을 불러주며 다가가면 자기들끼리 쏙닥이고 웃으며 도망가던 아이들, 한 달 후 다시 아이들을 만났을 때 먼저 달려와 안기던 아이들이었다. 속정이 깊고 그 정이 오래 가는 아이들이었다. 시코쿠 아이들을 만났을 때 정반대의 혹가이도 지역 아이들이 떠 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사진8 중급부 교실. 학생수 네 명이 수업하고 있다. 남학생 3명에 여학생 1명.
초급부 6학년 교실에서는 국어 수업이 한참이다. “ 제 2 과 나의 고향. – 내용 ~ 일본에서 나서 자란 나에게 고향에 대하여 들려주셨지만 수술하신 후 고향이야기를 못하시는 할아버지를 보고 가슴아파하는 나 “ 간단히 칠판에 적힌 정겨운 우리글. 치마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다 가디건을 두른 젊은 여성교원이 강의를 한다. 아이들을 열심히 뭔가를 받아 적고. 그 치마저고리만 아니면 우리나라의 여느 작은 교실과 다름이 없다. 교과서의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만, 1세 동포와 고향에 얽힌 에피소드 중에 기억나는 것이 있다. 아주 어렸을 때에 일본에 건너와 우리말을 잊어버리고 평생을 일본말로 살아가던 어느 1세가 치매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그런데 치매에 걸린 그 1세 동포를 일본 병원의 누구도 간병할 수 없었다고 한다. 자신의 의사를 뭐라고 말하는데 전혀 알아 들을 수 업었던 것이다. 알고 보았더니 그 1세 동포는 치매에 걸리자 일본말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우리말만 기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병원에서는 재일조선인이 운영하는 병원인 ‘공화병원’으로 할머니를 입원시켰고, 동포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이 입원해 있던 그 곳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전혀 이해하지도 알 수도 없었던 재일동포들의 이야기이다.
사진9. 초급부6학년 국어수업. 재일조선학교에서는 학우서방이라는 출판사에서 만든 자체교과서를 출판하여, 정주를 목적으로 한 민족교육을 실행하고 있다.
아이들의 교과서는 과거 북으로부터 직접 교과서를 받았던 시절을 뒤로 하고 수십년 전부터는 자체 교과서를 사용하고 있다. 재일조선인총연합(이하 총련)이 운영하는 학우서방이라는 출판사에서 만들고 있다. 10년에 한 번씩 교과서 개정작업을 통해 새 교과서를 출판하고 있고, 이것이 아이들이 지금 보고 있는 교과서이다. 과거 ‘귀국’을 전제로 한 민족교육에서 이미 ‘정주’를 전제로 한 민족교육의 시기로 접어든 지 오래다. 스스로의 이야기와 함께 분단된 조국의 북과 남을 공히 배우고 있는 아이들이 바로 일본의 조선학교에서 받는 교육인 것이다. 조선학교가 빨갱이 교육하는 북쪽의 학교라는 말을 언제까지나 달고 사는 한국영사관, 한국정부, 보수단체, 보수 언론들이 직접 우리학교의 수업을 듣고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 물론 지난 60여년간 한국정부가 외면으로 일관할 때, 북쪽은 해마다 교육지원금을 보내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니 조선학교의 교육내용이 북을 더 우호하는 방향으로 갔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는 이들의 정체성이기도 한 대목이다. 그러나 무조건 북의 학교, 빨갱이 학교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것은 조선학교 근처에 살고 있어도 조선학교를 북한 아이들이 유학와서 다니는 학교로만 생각하는 일본인들 만큼이나 몰지각하고 몰역사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운동장으로 가니 초급부 저학년 아이들의 체육시간이다. 아까부터 바깥에서 들리던 재잘거림에 이미 마음이 운동장으로 달려가고 있었으니… 그곳에서 리량이를 만났다. 언니가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 낯선 아저씨가 이름을 물었더니 쭈뼛거리다가 옆의 아이가
“조선에서 온 사람이니 괜찮다.’ 라고 한다. 가슴이 갑자기 먹먹해졌다.
조선에서 왔으니 괜찮다. 이 ‘분단’ 없는 아이들의 마음, 조선에서 왔으면 누구라도 괜찮아. 선생님들이 괜찮다고 하면 누구라도 괜찮다. 그러니 말해도 좋아. 나는 아이들에게 ‘누구라도 괜찮은’ 그런 사람일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괜찮은 걸까.
영상. 초급부 1학년 리량이의 체육시간
유일한 초급부 1학년 리량이의 공던지기를 위해 저학년 다른 언니 오빠들이 팔 걷고 도와준다. 그토록 와 보고 싶었던 시코쿠 우리학교에 드디어 왔다. 여기는 이제 더 이상 나에게 ‘꿈에 그리던’ 학교가 아니다. 리량이가 있고, 나와 나이가 같은 고정범 교장이 있고, 눈 인사로 만족했던 끌끌한 선생님들이 있고, 도시락 만들어 우리를 기다려 줄 어머니 아버지들이 있다. 이제는 상상이 아니라 그 대나무와 낡은 기숙사와 학교식당을 ‘기억’할 수 있는 학교가 되었다. 부디부디 이 학교가 앞으로 10년 후에도 건재하길 마음 속으로 기도해 본다.
사진10. 치마저고리는 학생들의 교복이기도 하지만, 선생님들의 제복이기도 하다. 적은 수의 아이들이지만 최선을 다해서 가르치는 우리학교 선생님들.
사진11. 고정범 교장선생님의 수업시간. 지리수업인가보다. 학교 재정의 어려움은 교장이 교단에 서게 만들었다. 작은 조선학교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풍경이다.
사진12. 시코쿠 우리학교의 낡은 그네의 받침대. 학생수가 줄어들면 넓은 운동장에도 잡초가 무성해진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동포들은 다시 우리학교 아이들이 학교에 가득한 날을 꿈꾸며 오늘도 학교를 지키고 있다. 이제 그 꿈을 우리도 함께 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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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을 읽고 우리 애들이 다녔던 도꾸야마조선초중급학교를 생각났네요.
우리 큰딸이 1학년 입학할 때 전교생이 43명였구여 막내 딸 입학할 때는 전교생 13명 딸은 물론 한명뿐의 학급이였어요.
그래도 우리 3자매는 선생님과 학생모두와 가족처럼 행복하게 도꾸야마초중을 다녔서요.
패교될 그 날까지…
도꾸야마초중 마지막학생수는
7명.
이 7명을 위하여 패교전 마지막운동회는 많은 동포들이 모여주었습니다.
참. 그 나날이 떠오르네요.
지금은 학교건물도 없으니 사진과 추억속에서만 도꾸야마초중이 살아있지만 우리 3자매의 마음의 고향이기도 해요.
전국의 우리학교를 지켜야 해요.
패교된 슬픔은 바다처럼 깊으니까요.
폐교된 슬픔은 바다처럼 깊다. 꼭 기억하고 싶은 말입니다. 저 또한 지난 시간 동안 우리학교를 만나면서 폐교된 학교를 많이 만났습니다. 동포들, 부모님, 아이들의 슬픔을 조금이나마 느낍니다. 이런 일이 없도록 앞으로도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학교를 알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감독님 고맙고 힘이납니다.
덕분에 또하나의 조선학교를 다녀온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