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의 손바닥 소설 [16편]
반영(反影, Reflection)
뉴질랜드 백동흠
“우~와~ 써니 언니! 여기가 어디예요? 하늘과 강의 합궁(合宮)같아요.”“야아~ 제니 표현 죽이네. 뉴질랜드 남섬, 퀸즈타운에서도 신이 내려와 산다는 곳이야.”
스마트폰에 올라온 사진을 보고 제니가 어린아이처럼 탄성을 질렀다. 노스쇼어 이벤트 센터 부근, 킹스 반 가든 카페. 브런치를 먹으며 토요일의 여유를 즐기는 것만도 제니는 즐거웠다. 써니랑 밥 한번 먹고 싶어 제니가 약속 시간과 장소를 잡아 만난 것인데 분위기가 좋았다. 강아지까지 데리고 올 수 있어서 가족 나들이 장소로서도 제격이었다. 나이든 키위 할머니나 중년의 여인들이 친구나 배우자와 와서 담소를 즐기는 모습이 잔잔한 꽃 향기 같았다. 가든 한 쪽에 자리한 지라, 가든 내에 피어있는 갖가지 꽃들의 향기가 진동했다.
써니가 지긋이 제니를 바라보며 재미나게 사진 배경을 이야기해주었다. 나이가 써니보다는 열 살은 아래인 제니도 그런 여행을 하고 싶었다. 커 나는 아이들과 남편 뒤 바라지에 아직은 여유가 없었다. 써니야 두 딸 출가시키고 남편과 비둘기처럼 사는지라 훌쩍 날아다니곤 했다. 제니의 입장에서는 나중에 여건 되면 써니처럼 출사 여행을 할 요랑이었다. 지금은 이런 선배 언니한테 듣고 배우는 것도 좋았다. 직접 체험이 어려우면 먼저 경험자를 통해서 간접 체험을 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써니 역시나 동생 같은 제니와 함께하는 시간이면 망설이지 않고 자주 시간을 냈다. 세월 가며 나이차이가 무슨 대수겠는가. 취향이 같고 정서가 맞으면 다 친구처럼 사귈 수 있는 게 고마울 뿐이지. 외국까지 나왔으니 더 그랬다.
지난 일주일간, 써니가 고국에서 온 친구 셋이랑 다녀온 남섬 여행. 다양한 각도로 찍은 사진에 제니의 호감 어린 모습이 귀엽기까지 했다. 써니가 뉴질랜드에 살면서 일하는 짬짬이 사진 출사를 하며 찍은 사진을 보고 한국에 사는 여고 동창들도 무척 부러워했다. 그게 계기가 돼서 한국 사진 동호회에서 활동하던 친구들이 큰 맘먹고 뉴질랜드로 날아온 것이었다. 덕분에 의기투합되어 써니가 안내하며 남섬을 누볐다. 그것도 고급여행이 아니라 뉴질랜드 현지인처럼 캠퍼밴을 하나 빌려 볼 곳마다 시간되는 대로 움직였다. 먹을 것이야 필요한 재료 사서 주부실력 발휘하면 그만이었다. 근 40여 년 전, 옛 여고 시절의 수학 여행이 떠올랐다. 그 때야 여행은 언감생심이었다. 학교에서 졸업 전 떠나는 수학여행이 유일한 추억의 산실이었다. 꿈 많은 여고생들의 밤샘 수다는 아무도 못 말렸다. 새벽이 밝아오는 줄도 몰랐다.
“써니 언니, 뉴질랜드에 이런 곳도 있어요?”
“퀸즈타운, 글레노키(Glenochy)지역인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테마 여행지야.”
"글레노키하면 무슨 영화 찍은 곳 같은데요.”
“잘 아네. 반지제왕, 나니아 연대기, 사무라이 등등 많지. 퀸즈타운에서 시작된 와카티푸 (Wakatipu) 호수에 반해 흠뻑 빠졌지. 높은 산도 맑고 투명한 물에 내려와서 세수를 하나 봐. 여름에도 남아있는 만년 설 산봉우리를 올려다보는 멋도 인상적이었어. 호수 깊이가 무려 삼백미터도 넘는대. 그 길이만도 약 이백리가 넘고. 옛날 동화 속을 여행한 거지.”
“캬아~ 써니 언니 좋겠다. 풍경 이야기도 흥미롭고, 음식도 맛있네요.”.
“여행은 오감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간직하는 거래. 글레노키는 옛날 영국 스코트랜드를 재현한 분위기였어. 그 곳 사람들이 와서 정착한 목장지, 늪, 산, 강으로 남아있지. 왜 요사이 부르는 신조어 있잖아. 에코 트래블(Eco Travel). 자연 친화적인 여행지였어. 한국에서 온 여고 동창들이 껌뻑 죽더구먼. 좋은 곳에 캠퍼밴을 세우고 별장처럼 머물렀지. 옛날 서구 생활 터전으로 여고시절 수학여행을 다시 온 느낌이래.”
백년도 넘은 마을 도서관, 출장소 같은 우체국, 초기 선교사가 나올 것 같은 작은교회, 아담한 건물 사진들이 글레노키 지역의 소박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세상은 따뜻하고 온 정이 깔려서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했다.
“써니 언니. 친구분 들과 추억여행 했네요. 여행은 그런 것이 좋은 것 같아요. 내 모습을 아름다운 풍경과 외지 사람들에게 비춰볼 수 있잖아요.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었겠어요.”
“오~제니의 안목이 대단하네. 여고 동창 넷이 올해를 안식년으로 정해서 며칠을 푹 쉰 거야. 일하는 사람들은 휴가나 안식년을 가지잖아. 직장인도 병사도 성직자도 자기만을 위해 떼어둔 시간을 만들듯이 우리도 그랬어. 자식들 독립까지 시키느라 애썼잖아. 이번 사진 여행에서 포커스를 맞춘 것이 바로 반영(反影, Reflection)이었어. 나를 비춰본 시간. 눈 덮인 하얀 산 봉우리가 파란 호수에 그대로 빠져서 잠겨있더라고. 이른바 산과 호수가 서로 조우하며 대칭 구조를 이룬 거지.”
“아~ 그래서 처음 본 사진이 그랬군요. 반영, 투영. 초등학교 때 그려봤던 대칭그림, 데칼꼬마니가 생각나요. 그 때 참 신기했지요. 도화지 한 쪽에 그림 물감 칠하고 두 쪽을 접어서 누르면 대칭 그림이 나타났잖아요.”
“어쨌든 제니의 정서감각은 아직도 여고생처럼 무르익은 것 같아. 산이 강속에서 조우하는 그림을 보고 합궁(合宮)한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제니의 감수성이 대단해.”
“써니 언니의 극찬이 너무 과분한걸요. 여하튼 써니 언니가 좋은 볼거리를 많이 물어다 주고, 흥미로운 이야기도 들려줘서 오늘 음식은 제가 쏴요.”
“제니 고마워. 다음은 당연히 내가 반영으로 쏘면 될 거고. 서로를 나눈다는 것은 반영이라고 볼 수 있을 거야. 내 마음을 상대방 마음에 겹쳐서 나란한 무늬 같은 정감을 주니까.”
그때, 제니가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옆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하던 노 부부의 애완견이 제니의 다리를 핥았기 때문이다.
“아이! 깜짝이야!”
“개도 사람 좋은 것 알아보네. 아무한테나 저러지는 않아. 개도 통할 것 같은 사람에게 자기 감정을 덧씌우러 할 거야. 이것도 어쩌면 일종의 반영이겠지. 하하~”
“써니 언니. 언니랑 만나서 하는 이런 대화가 좋아요. 남 이야기보다 내 생활 속 이야기를 소재로 해서 사람 사는 세상을 공감할 수 있으니까요. 이야기 끝나고 집에 가면 마음에 남아지는 것이 있거든요.”
“제니는 유난히 감성이 풍부해. 우리에게 영혼(靈魂)이 있다고 하잖아. 영(靈)은 머리중심으로 차갑고 논리적이기도 하고. 반면에 혼(魂)은 가슴을 바탕으로 따뜻하고 정서적이지. 제니는 따뜻한 가슴의 기운이 풍부한 것 같아. 난 다소 차가운 머리에 치우친 느낌이 있는데.”
“그것 좋은 말씀이네요. 써니 언니의 영과 제 쪽의 혼이 서로 비춰주며 부족한 점 보완하고 사니 좋은 것 아녜요?”
다시 써니가 몇 컷의 사진을 클릭해 보여줬다. 하얀 눈이 덮인 산 위에 걸려있는 구름. 하얀 안개 구름 위로 분출하는 산 꼭대기. 온 세상을 삼킬 듯이 솟아오르는 바다 위의 찬란한 여명. 한 세상 노곤함을 감싸주는 따스한 석양 기운. 파란 호수 위에 백조와 흑조의 평화로운 유영. 오리들이 호수 아래 거꾸로 매달려 유유히 흘러가고 있는 그림. 투명한 반영이었다. 딱 대칭그림으로 다가오는 데칼꼬마니였다.
“캬~아~ 제니의 말씀 해설. 마치 방송에서 나누는 세상만사, ‘알쓸신잡’ 같네. 야튼 즐겁고 맛있는 브런치 잘 먹었네.”
옆좌석 노부부가 강아지를 데리고 일어났다. 이어서 어린 꼬맹이 딸 둘을 데리고 키위 젊은 부부가 앉았다. 어린 꼬맹이의 금발머리가 햇빛에 반짝였다. 써니와 제니의 시선이 꼬맹이 머리에 쏠렸다. 그래, 세상은 돌고 돈다. 어린애에서 노인까지, 아시안에서 유러피언에 이르기까지. 어쩜 서로를 비춰보는 거울인지도 모른다. 거울하니, 이 역시 반영아닌가. 지혜로운 스승은 천진한 제자를 대하며 자신을 비춰보고 더 깨우쳤다. 철모르는 제자 들 역시 해박한 스승의 지혜를 배우고 정진했다. 비춰본 것이다.
“서로를 비춰보는 일, 한편의 서정 수필에서도 반영은 충분히 이뤄지지. 눈으로 보는 사진 풍경에서도 세상을 읽고 되돌아볼 수도 있지.”
“글레노키는 어떤 계기로 출사 여행을 한거예요?”
“퀸즈타운에 사는 지인이 작년에 초청해서 다녀온 적이있어. 그 분이 이박삼일 동안, 퀸즈타운, 글레노키지역, 애로운타운 일대를 집중적으로 돌아다니며 테마기행식으로 안내해준 적이있어. 그때, 다시 오고 싶은 곳이구나, 찜해두었지. 몇번을 가도 계절이 다를 때마다 풍경도 더불어 바뀌거든. 새로운 풍경도 좋지만, 새로운 눈을 갖는 것. 진정한 여행이라잖아. 내 이야기가 아니라 마르셀푸르스트의 조언이야. 반영의 시각도 새로운 안목이지.”
“반영(反影, Reflection)! 써니 언니. 오늘 화두가 참 좋아요. 나를 비추고 상대를 받아들이는 일.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서로에게 거울이 되어준다는 사실이네요.”
써니와 제니는 크리스탈 물 컵을 살짝 갖다 대며 부딪쳤다. 목을 축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니가 써니와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신호등 앞에 선 봉고차 뒷부분 유리에 눈이 머물렀다. 양털 같은 뭉게구름이 유리너머에 실려있었다. 뒤 유리가 하늘 구름을 그새 품고 있었다. ‘우~외~ 봉고차가 뭉게구름을 싣고가네.’ 제니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
첫댓글 '나를 비추고 상대를 받아들이는 일' 세상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겠군요.
문학의 봄
글들이 그렇네요.
뉴질랜드 2월 한여름.
푸르름을 보냅니다.
안식년 없이 달려온 저도 반영이 필요한 시기인가 봅니다.
서로의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제니와 써니가 부럽기도 하고요.
늘 좋은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짬짬이 시간내서
챙겨보려 합니다.
이번 주 토일 주말과
월화 휴가내서 3박4일.
뉴질랜드 북단 휴양지.
다녀오려구요.
단편소설 시놉시스에
살좀 붙여서 오게요. ^^
개인적인 생각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수필적인 냄새가 짙습니다 ㆍ긴 대화로 설명을 해서 극적요소가 빠져 그런 것 같습니다ㅡ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ㆍ잘 읽었습니다
수필적 묘사가 좀 많지요.
시간적 서사도 요구되고요.
꽁트. 엽편. 손바닥으로 쓴.
단편. 중편. 장편과는 다른 맛~
건필 하세요. 고맙습니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찾아서 여행을 하는 가운데 사진을 찍고... 사진을 통해 서로 교감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특별한 사건 없이 수필식으로 잔잔하게 전개되는 소설도 나름 읽을만 합니다.
나를 자연에 비춰보는 시간.
친구와 추억에 젖어보는 시간.
우리는 서로의 거울이지요.
아는 것을 자랑하지 않고,
있는 것을 드러내려 않는
겸허함속에 살고싶습니다.
고맙습니다. 건강과 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