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톨로미오 반제티, 니콜라 사코 1927년 8월 22일, 메사추세츠 주(州) 보스톤의 아침은 매우 화창했습니다. 오늘 하루가 지나고 8월 23일 자정이 되면 전기의자에 앉도록 되어 있는 두 사람의 사형수에게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이었지만 여느 사람들에게는 화창한 여름날의 또 하나의 일상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사코와 반제티>를 쓴 브루스 왓슨이 ‘어떤 예정된 죽음도 이 화창한 여름날에 얼룩을 입힐 수 없을 것 같았다’고 기술했듯이 그날은 그렇게 맑았습니다. 그날 8월 22일, 쿨리지(John Calvin Coolidge, 1872-1933, 미국의 30대 대통령, 공화당 출신)대통령은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풍경에 젖으며 휴가를 보내고 있었고 오랜 기간을 끌던 찰리 채플린의 이혼 소송은 채플린의 아내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월 스트리트의 주가는 기록적으로 치솟았고베이브 루스는 40호 홈런을 쏘아 올렸습니다. 미국인들의 영웅으로 일거수 일투족이 기사거리였던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의 전국투어는 이날도 계속되었습니다. 미국인들은 곧 있을 잭 템프시와 진 터니의 세계 헤비급 챔피언전에 대해 모든 관심을 기울이며 들떠 있었습니다. 골목 여기저기의 술집에서는 재즈의 시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날도 재즈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1927년 8월 22일의 미국의 역사가 기록하게 될 일상이었지만 그 일상의 뒤편에서는 또 다른 역사가 써지고 있었습니다. 그냥 평범한 살인사건으로 시작되었으나 7년을 넘게 끄는 동안 미국사회 전체와 미국의 진보진영, 그리고 세계 모든 나라의 노동운동진영과 사회주의 운동진영의 가장 중요한 투쟁과제가 되었던 사코와 반제티 사건은 8월 22일이라는 하루의 시간만을 남겨 놓고 있었습니다. 미국과 세계 전역에서 두 사람의 사면 혹은 형집행유예와 재심을 촉구하는 대중집회가 열렸습니다. 메사추세츠 주 정부 청사에는 아침부터 시민과 노동자, 사회단체 인사들이 집결하고 있었고 뉴욕의 맨해튼 거리, 시카고, 디트로이트, 샌프란시스코에서 집회가 열렸습니다. 피츠버그에서는 광산노동자들의 사형을 막기 위한 항의파업이 경찰과의 충돌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미국 대사관 앞에서는 그동안 계속되어 왔던 집회가 이날 더욱 확대된 형태로 개최되었습니다. 파리의 미국대사관 밖에는 노동자 시위대의 공격을 우려하여 프랑스군 탱크가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영국 런던의 하이드 파크에서는 영국노동자들의 항의집회와 격렬한 시위가 계속되었습니다. 제네바에서는 미국상점과 미국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에 대한 공격이 벌어졌습니다. 라틴 아메리카 각국의 노동조합들은 사코와 반제티를 위한 항의 파업을 벌였고 그 외 시드니. 부쿠레시티, 베를린, 암스테르담, 로마, 도쿄, 모스크바,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테네, 프라하 등에서 집회가 열렸습니다. 이 처럼 8월 22일 하루 낮 동안 두 사람에 대한 사형집행에 항의하고 이를 유예시키기 위한 노력이 다방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미 로망 롤랑, 버나드 쇼, 아인슈타인, 싱클레어 루이스, H.G. 웰스, 아나톨 프랑스, 이사도라 던컨, 버트란트 러셀 등의 탄원서를 포함하여 미국에서 900통, 해외에서 1,000통의 탄원서가 앨런 풀러 주지사에게 전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지사는 형집행유예에 대해 거부입장을 계속 밝히고 있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노동운동조직과 사회주의 정당, 그리고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항의서한과 탄원서도 이 두 사람의 사형을 막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탄원서와 항의서한에는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 공산당의 항의 서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변호사 톰슨은 하루종일 형집행유예를 위해 뛰어 다녔고 퓰리처상 수상자이자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에드나 S. V. 밀레이는 주지사의 형집행정지 결정을 끌어내기 위해 주 청사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다시 쿨리지 대통령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고, 작가 아나톨 프랑스는 미국 정부를 향해〈유럽 노인의 호소〉를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 최대 황금기를 보내던 미국 자본주의의 달콤함에 취해 있던 미국인들은 사코와 반제티 사건에 대해 무심했습니다. 미국인들은 이런 모든 투쟁과 집회가 사코와 반제티 같은 이민자들과 그들이 묻혀 온 공산주의에 물들어 세상모르고 날뛰는 빨갱이들의 짓거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가는 새로운 미국에 장애가 되는 이런 행위들에 대해 정부가 좀 더 단호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황금을 쫒는 그들의 눈에 자본주의의 외진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투쟁하는 노동자와 민중들의 집회와 파업 시위는 하나의 풍경에 불과했습니다. 그 풍경을 뒤로 하고 이제 막 선을 보이기 시작한 텔레비전을 비롯한 다양한 가전제품들이 그들 눈에는 훨씬 더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저녁 6시경이 되면서 그 화창하던 보스톤에 간간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사형집행은 6시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변호사 톰슨이 마지막 면회를 했습니다. 침통한 변호사의 표정에서 희망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두 사람은 담담한 표정으로 변호사 톰슨을 접견했습니다.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자신들이 무죄임을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흥분하거나 분노하지도 않았으며 평온한 음성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톰슨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형집행을 유예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감옥 밖에서 두 사람의 구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덧 붙였습니다. 반제티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변호사님, 나는 인류의 진일보와 세상의 억압종식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후에라도 부디 나의 이름을 깨끗하게 해주기를 바랍니다.” 톰슨은 재판과정에서 두 사람이 폭력을 부정하고 무정부주의를 포기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내고 지금이라도 공개적으로 이를 선언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던지기도 하였지만 두 사람은 조용히 듣기만 하였습니다. 변호사 톰슨은 인류를 진보시키는 모든 운동은 투쟁이라고 믿고 있는 두 사람이 자신의 말에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형을 앞둔 두 사람을 위해 무슨 위로의 말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반제티는 오히려 죽음을 기정사실로 하고 자신이 예수처럼 자신을 죽인 적들을 용서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변호사는 지난 7년 여 간 수난과 고통을 당해왔고 이제 곧 사형당할 인간이 용서를 생각하는데 놀랐습니다. 톰슨은 후에 자신의 인생에서 예수와 가장 닮았던 사람은 반제티였다고 술회하였습니다. 영어가 아주 유창하지 않았던 사코는 조용하게 지켜볼 뿐 별 말이 없었습니다. 가족면회를 위해 톰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죽음 앞에서 조금도 움츠려 들지 않는 두 사람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오열과 통곡속에서 반제티의 누이와 사코의 부인의 면회가 이루어지던 시각, 두 사람이 갇혀 있던찰스타운 형무소 밖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은 무죄라는 피켓을 들고 감옥주위를 열을 지어 돌고 또 돌았습니다. 이미 시간은 8시가 가까워오고 있었습니다. 주 경찰은 감옥주위에 철조망을 치고 경계병력을 늘였고 라디오 방송사들은 생중계를 시작했습니다. 8시 40분, 찰스 타운 형무소장 헨드리가 두 사람에게 찾아 왔습니다. 수감기간 내내 두 사람에게 동정적이었던 헨드리는 그렁그렁한 눈물을 보이며 두 사람에 대한 사형집행이 오늘밤 자정에 이루어질 것임을 최종적으로 통보했습니다. 사코는 아버지에게 쓰던 마지막 편지를 부쳐달라는 부탁으로, 반제티는 필연이라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는 독백으로 사형통보에 답했습니다. 신부가 마지막 기도를 위해 들어 왔으나 두 사람은 이를 다시 거절했습니다. 오늘 벌써 세 번 째 거절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그동안 자신들을 지켜 주었던 사람들을 향해 편지를 썼습니다. “친구들과 동지들, 이 재판의 비극은 막바지에 다다랐으니 이제 모두 한마음이 되십시오. 죽는 건 우리 둘뿐입니다. 우리의 이상, 우리의 동지인 셀 수 없이 많은 여러분은 살 것입니다. 우리가 이겼습니다. 우리는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고통, 우리의 슬픔, 우리의 오류, 우리의 좌절, 미래의 전투를 위한 그리고 위대한 해방을 위한 우리 열정을 소중히 간직하십시오. 이 암흑 같은 비극의 시간 속에서 모두 한마음이 되십시오.” 같은 시각 주 청사의 앨런 풀러 주지사 방에서 에드나 S. V. 밀레이는 마지막으로 주지사를 설득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믿는 그리스도는 어디로 갔습니까? 나는 수많은 이들과 함께 당신에게 애원합니다. 우리의 의문에 대답해주기 바랍니다. 당신의 높은 지위로 베풀 수 있는 사면을 요청합니다. 오늘 밤 메사추세츠에는 영웅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그 영웅이 되는데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주지사는 거절했습니다. 사형시간이 가까워 오면서 미국 각지의 시위는 점점 격해졌습니다. 뉴욕, 펜실베니아, 콜로라도, 일리노이, 뉴저지 등에서 수십만 명이 사형집행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필라델피아와 시카고에서는 경찰이 시위군중들을 체포했고, 뉴욕 유니온 광장에는 5만명의 군중이 경찰과 충돌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8월 22일의 남은 시간들은 흘러 갔습니다. 형무소장 헨드리는 첫 번째 사형집행예정일이었던 8월 10일처럼 형집행 직전에 주지사가 형집행 유예결정을 다시 한번 내려주기를 빌었습니다. 그러나 형무소의 시계가 자정을 알리는 종을 칠 때까지 전화벨은 울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희망은 이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12시 3분, 자신의 감형가능성까지 닫아 가며 두 사람을 위한 무죄증언을 자청했던 첼레스티노 메데이로스에 대한 사형집행이 먼저 이루어졌습니다. 이어 교도관들이 사코를 데리러 왔습니다. 같이 앉아 있다가 먼저 교도관에게 끌려가는 사코를 반제티는 멍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집행장에서 사코는 ‘무정부주의 만세’, ‘안녕, 사랑하는 내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나의 어머니 사랑합니다’ 라는 짤막한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사코에 이어 형집행장에 들어 온 반제티는 너무나 무심한 표정으로 전기의자에 앉았고 얼굴에 복면이 씌워지고 나서 천천히 그의 입을 열어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다시 한번 무죄임을 말씀드립니다. 가끔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나는 결코 어떤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지금 나는 여러분이 내게 베풀어준 모든 것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나는 지금 내게 이런 일을 행하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싶습니다.” 밖에서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사코와 반제티의 형집행유예를 기대하던 사람들은 형무소의 전기불이 갑자기 흐려졌다가 밝아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두 사람이 전기의자에서 생을 마쳤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920년 5월 5일 체포되어 7년여 동안 무죄를 위해 투쟁하던 이탈리아 이민자인 생선장수 반제티와 제화공 사코는 1927년 8월 23일, 오늘, 그렇게 죽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통곡하고 어떤 사람들은 오열을 참지 못하며 머리를 가슴에 묻고 흐느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가슴을 쥐어뜯기도 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사형집행 소식은 전 세계에 전해졌고 그동안 7년여를 싸워 왔던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폭력과 압제에 대한 분노로 몸을 떨었습니다. 그들이 죽은 그 새벽, 보스톤의 찰스 타운 형무소를 적시는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고 있었습니다. 반제티와 사코가 체포된 것은 1920년 5월 5일, 사형이 집행된 날로 7년 3개월전이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뉴욕의 법무성 빌딩에서 심문을 받던 중 추락사한 그들의 동지 안드레아 살세도를 위한 항의 집회에 참석하려던 참이었습니다. 1920년 초부터 거세게 몰아닥친 빨갱이 사냥에 의해 노동운동가,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이 체포되어 온갖 고문 속에서 심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살세도는 바로 이런 일제 검거과정에서 체포되어 심문을 받던 중 의문의 추락사를 당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즉각적인 항의집회가 계획되었고 당시 무정부주의운동에 참여하고 있던 사코와 반제티는 이 항의집회에 참석하려고 했다가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처음에 이들은 시위가담 우려가 있는 위험한 인물로서 그저 격리차원에서 연행되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의례적인 심문도중 당시 메사추세츠주를 떠들썩하게 했던 메사추세츠 주 사우스 브레인트리 살인사건의 도주자와 인상착의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이들은 이내 그 사건의 용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이렇게 아주 일상적인 경찰의 업무수행의 과정에서 발생했습니다. 체포된 두 사람도, 그리고 이들을 연행한 경찰도, 메사추세츠 주의 미국인들도 이 일상적이고 우발적인 일이 미국과 전 세계를 충격에 빠트리고 격렬한 논쟁으로 몰고 갈 것이라고 당시에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용의자가 무정부주의자였고 이탈리아 출신의 이민자였던 이 사건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그 자체로 평범한 살인사건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사건이 될 수 있는 개연성을 처음부터 내포한 사건이었습니다. 사코와 반제티 사건이 정치적인 사건으로 변하게 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00년에서 1920년에 이르는 미국사회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그리고 무정부주의 운동 등 일련의 사회변혁운동을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또한당시 미국사회에 물밀듯이 밀어닥친 이민자들의 삶과 이들을 바라보는 미국사회의 인식, 그리고 일련의 갈등구조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사코와 반제티가 전기의자에서 인류의 진보를 위해, 그리고 모든 억압의 종식을 위해 숨을 거둔 날, 이 죽음을 통해 미국의 사회변혁운동의 일단을 들여다보고 사코 반제티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를 새겨 볼까 합니다. 20세기가 시작되는 1901년은 테오도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가 미국의 26대 대통령으로 임기를 시작한 해입니다. 미국역사에서 1901년부터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1917년까지의 기간은 종종 ‘진보의 시대’로 불립니다. 이 시기가 이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자본의 집중과 대량생산체제가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새롭게 정착되어 갔고 눈에 띄는 경제성장을 이룬 기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자본주의체제의 변화는 미국사회 모든 분야의 삶의 문화와 사회체제를 바꾸어 놓았으며 이 과정에서 인권과 노동권, 그리고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진보적인 장치들이 제도화되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조금은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의 미국사회의 변화를 추동한 미국 자본주의의 급격한 성장에는 19세기 후반부터 다른 유럽의 열강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며 펼쳐 나간 제국주의가 가장 중요한 배경이자 요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본은 국내적으로는 노동통제와 착취, 인권에 대한 탄압을 통해 이윤을 증대시켰으며 밖으로는 멕시코, 하와이,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멀리 아시아에 대한 제국주의적인 침략을 확대시켜 나갔습니다. 1898년에는 스페인과의 전쟁을 통해 쿠바,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미국의 자본주의체제는 자리를 잡아갔고 이 기반을 바탕으로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자본주의는 발전을 거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미국 자본주의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민중에 대한 압제와 노동자에 대한 폭력과 착취를 수반하였습니다. 이러한 자본의 폭력과 착취에 대항하여 미국의 노동운동은 치열한 투쟁을 19세기 후반기 내내 전개하였습니다. 미국의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은 1865년 남북전쟁의 종료로부터 본격화되었습니다. 이는 한편으로는 자본의 착취와 노예해방이 가져온 새로운 사회적 가치, 자유와 인권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기반으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태동한 미국의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변혁운동은 19세기 후반 미국자본주의가 그 발전을 거듭해 가던 시기에 폭발적인 투쟁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역사에서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 노조결성투쟁이 가장 강력하게 일어났던 시기가 바로 이때였습니다. 당시의 투쟁은 단순한 노자간의 충돌을 넘는 것이었습니다. 자본과 이를 비호하는 권력에 의해 일상적으로 자행되었던 살육과 학살에 대한 전면적인 투쟁을 통해 노동운동은 성장해 나갔습니다. 또한 이시기는 유럽에서 시작된 다양한 갈래의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됨으로써 미국사회의 변혁을 놓고 광범위한 사회운동, 정치운동이 벌어졌던 때이기도 하였습니다. 1875년의 광산노동자들의 파업, 1877년의 펜실베이니아 철도 파업, 1886년의 8시간 노동제투쟁과 헤이마켓 사건, 1894년 유진 뎁스가 이끈 전국철도 총파업 등이 이시기에 이루어진 대표적인 투쟁이었습니다. 이 투쟁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이 체포되고 투옥되었습니다. 1875년의 광산노동자 파업 때 권력과 자본은 파업노동자들을 몰리 맥가이어라는 아일랜드 폭력조직으로 날조하여 19명의 노동운동가들을 교수형에 처했으며 헤이마켓사건에서는 노동자들의 무장공격을 조작하여 파슨즈, 스파이즈와 같은 노동운동가들을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이런 탄압에 맞서 노동운동은 굽히지 않는 투쟁을 통하여 폭발적으로 성장해 나갔습니다. 자본은 노동운동에 대한 빨갱이 공세를 끊임없이 퍼부었지만 노동운동의 성장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미국의 노동운동은 1866년 최초로 전국단위의 조직인 전국노동자 동맹의 결성을 시작으로 1869년 노동기사단(미국사회의 전투적이고 계급적인 노동운동의 중심으로 미국의 노동총동맹과의 차이를 분명히 하면서 발전하였으며 후에 미국노동총동맹에 대항하게 되는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 산업별노조회의(CIO)의 사실상의 뿌리가 되었음), 1881년의 노동총동맹(AFL) 등의 전국단위의 노동조합 조직이 결성되면서 노동운동의 대중적 기반과 조직적 토대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 나갔습니다. 노동운동의 진전과 더불어 사회주의 정치운동도 발전해 나갔습니다. 미국의 초기 사회주의 운동은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미국이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유럽의 사회주의 운동에 내용적으로나 인적으로나 크게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사회주의운동은 제1인터내셔널에도 참여하고 있었으며 한때 제1인터내셔널 본부를 미국에 둘 만큼(제1인터내셔널의 분파투쟁에 기인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기반이 점차적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1877년에는 그 전해에 만들어 진 미국노동자당이 사회주의노동당으로 발전하였으며 1900년에는 다시 여타의 사회주의 정당과의 통합을 거쳐 미국 사회당으로 확장되어 이후 1900년대 초반, 대중운동과 보조를 같이 하는 사회주의 정당으로서 완전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같은 시기에 농민들을 중심으로 하여 미국사회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을 주창한 인민주의에 입각한 인민당(오늘-서른 여덟 번째 포퓰리즘 참조)이 창당되기도 하였습니다. 19세기 후반의 사회변혁의 정치세력으로서 양당체제를 위협할 만큼 미국민중의 지지를 받았던 정당이었지만 포퓰리즘적 요소가 내재하고 있었던 한계와 1896년 대통령선거에서의 민주당지지로 20세기가 되기 전에 인민당은 사실상 소멸하고 말았습니다. 권력과 자본은 이러한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이나 노조결성투쟁, 그리고 노동자들의 파업과 다양한 사회주의 운동이 미국사회를 뒤엎으려는 외국세력과 사회주의자들, 즉 빨갱이들의 음모라고 선동하면서 일반국민과 노동자를 운동에서 분리시키고자 동분서주하였습니다. 이러한 억압과 착취, 탄압의 검을 흔들며 미국자본은 기업의 집중과 연합을 통해 거대자본을 만들어 나갔고 이 과정에서 민중의 인권과 생존권은 자본의 발밑에서 부서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금도 잘 알고 있는 석유재벌 록펠러, 철강재벌 앤드류 카네기, 철도와 금융재벌 J. P. 모간 등은 바로 이 시기에 노동자,민중에 대한 피의 탄압을 통해 성장한 거대자본이었습니다. 20세기의 미국은 이런 역사적 진행의 과정가운데서 출발했습니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더욱 성장해 나갔습니다. 자본은 단순하게 빨갱이나 외국의 앞잡이라는 이름만으로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을 통제하는데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사회문화의 변화와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진전은 곳곳에서 새로운 진보적인 사회적 의제를 미국사회의 생활공간으로 밀어 넣고 있었습니다. 노동운동은 투쟁을 통해 미국사회에서 시민권을 확보해 나가기 시작했으며 19세기 후반부터 좀 더 조직화되고 대중적 토대가 넓어진 사회주의 정치운동은 미국정치에 의미있는 진출을 이루기 시작하였습니다.
사회당은 유진 뎁스(Eugene Victor Debs, 18555~1926, 기관차 화부 출신으로 여러차례 전국적인 파업을 조직하였고 IWW의 창설 등 미국 노동운동의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성장하였음. 후에 사회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1차대전 중에는 반전운동으로 인하여 구속되었으나 옥중에서 사회당의 대통령 후보로 다섯 번째 출마하였음)를 대통령 후보로 출마시켜 1900년에 9만 7000표, 1904년에 42만표, 1912년에 85만표 정도의 표를 얻음으로서 사회주의 운동을 대중적으로 확장하였으며 이외 상, 하원 진출과 주지사와 지방시장의 당선 등 노동운동과 함께 의미있는 승리를 거둠으로서 여전히 자본의 압도적 지배가 관철되고 있기는 했지만 미국사회의 지형을 조금씩 바꾸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노동운동의 성장과 사회주의 정치운동의 일정한 승리는 미국의 주류정치세력과 자본의 정책변화를 강제했습니다. 자본에 대한 일정한 통제와 사회개혁정책을 중심으로 한 테오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의 스퀘어 딜(Square Deal) 정책과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1924) 대통령의 뉴 프리덤(New Freedom) 정책은 바로 이런 배경 속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런 정책의 변화는 구체적으로 제도화되어 나타났습니다. 19세기 내내 노동자들의 피어린 투쟁과제였던 8시간 노동제는 1915년경에는 25개주에서 입법화되었고 소년노동자의 나이와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소년노동법은 1912년에 38개주에서 입법화되었습니다. 1912년 메사추세츠 주에서 처음 제정된 최저 임금법은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나갔으며 산업재해 보상법도 1915년까지 35개주가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여성의 참정권운동도 결실을 맺어 주별로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에 이루어진 진보중의 하나였습니다. 연방정부가 독점기업을 규제하고 자본에 대한 일정한 통제를 목적으로 제정한 클레이튼 법도 1914년부터 실시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정책변화와 법제화는 19세기 후반부터 지치지 않고 달려 온 미국의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투쟁이 있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이 시기 미국노동운동은 1905년에 창립된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 The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개량적이고 노사협조적인 노선을 유지하며 노동운동을 자본에 복속시켜 가던 사무엘 곰퍼스가 이끄는 노동총동맹에 맞선 세계산업노동자동맹의 투쟁은 20세기 초에도 치열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미조직 노동자에 대한 조직화와 비정규노동자에 대한 투쟁지원, 그리고 산업별조직화와 사회변혁운동에의 지향을 분명한 목표로 갖고 있던 이 조직은 1906년의 서부광산연맹의 파업과 ‘빵과 장미의 파업’이라는 이름이 붙은 1912년 메사추세츠 주의 로렌스 방직노동자 총파업 등을 조직하고 지도하면서 노동자투쟁의 선봉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IWW는 그 강령과 선언에서 생디칼리즘적인 색채를 강하게 드러냈는데 이러한 요인 때문에 후에 정치조직들과 결별하고 노동조합중심의 투쟁노선을 견지해 나갔습니다. 미국의 계급적 노동운동은 유럽, 그중에서도 프랑스에서 한때를 풍미했던 무정부주의 노동운동적 경향을 갖고 있었고 이런 성격은국제노동교육연맹과 같은 조직으로 이어졌습니다. 1881년에 창립된 노동총동맹(AFL)은 형식상으로, 그리고 조직의 규모로는 미국내 제1노총의 지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사무엘 곰퍼즈가 무려 37년 동안 위원장으로 있었던 이 조직은 정규직과 대공장 중심의 노동조합들을 그 기반으로 하면서 주로 사업장내의 근로조건과 복지증진에 주력하였습니다. 미국의 비정규, 비숙련 노동자들은 노동총동맹에 가입할 자격조차 갖지 못하였습니다. 노동총동맹은 정치적으로는 민주당과 공조관계를 맺어 왔으며 사회주의 정치운동이나 정치적 파업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반대의 입장을 갖거나 심한 경우에는 자본의 편을 들어 이들 운동을 탄압하는데 공동의 보조를 취하기 까지 하였습니다. 이 조직은 날로 발전하는 미국자본주의의 우산 속에서 꾸준히 성장해 나갔으며 나중에 발생하는 일이지만 IWW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산별노조회의(CIO)마저 흡수하여 자유주의적이고 보수적인 미국노총(AFL-CIO)으로 발전하게 되고 2차대전후에는 서방세계 노동운동의 국제조직이었던 ICFTU의 중심으로서 기능하게 됩니다. 이 처럼 1900년에서 1910년대 중반까지 미국사회는 자본주의 체제의 진전과 정치적 민주화, 사회운동의 시민권 확보, 몇 가지 개혁입법 등으로 특징지워지는 진보의 시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럴듯한 명칭인 이 진보의 시대라는 간판 뒤에는 소년, 여성, 계약 노동자, 흑인, 이주노동자들의 빈곤과 고통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최소한의 삶도 보장 받을 수 없는 빈곤에 시달렸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동권도 부여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저임금, 산업재해, 고용불안에 상시적으로 노출되었으며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어떤 시도에 대해서도 자본은 마피아와 용역깡패를 동원하여 무차별적인 폭력과 살육을 감행하였습니다. 미국사회는 진보의 시대라는 허울을 쓰고 있었지만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있었고 자본이 사회를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구조가 정착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사회에 대해 1915년 대통령 직속위원회로 발족했던 노사관계위원회는 보고서에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 미국의 부의 소유권은 전 국민의 2%가 전체 부의 35%를 소유하고 있고 하위 65%가 부의 5%를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부의 집중현상은 이 같은 수치보다 훨씬 더 심하다. 미국에서 제일 부자인 한 사람은 미국민 250만명의 재산액과 같은 부를 소유하고 있다.” “진보의 시대라는 간판은 그럴듯 했지만 실제로는 독점자본의 힘만 날로 커진 시대였다......사실상 현재 미국에서 파업중이거나 노조를 결성하려는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정치적.산업적.사회적 자유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사용자들이 오픈 샵을 유지하고 노동조합을 탄압하기 위하여 살인청부업자나 총잡이 등을 고용하는 일이 전국적으로 행해지고 있으며 이런 상황이 계속 방치된다면 미국사회의 인간성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 “모건과 록펠러를 비롯한 독점기업들이 미국 국민의 생활뿐만 아니라 사고방식까지도 주무르고 있다. 독점자본은 언론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으며 이를 통해 미국민들을 조종하고 있다. 더구나 독점자본은 증여, 기부금, 재단 설립 등의 수단을 통해 대학과 교회, 그 외 사회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고 있다.” <알려지지 않은 미국 노동운동 이야기> 리차드 보이어. 허버트 모레이스 공저, 책갈피, 1996 이처럼 미국사회에서 한편으로는 자본의 지배가 공고화되어 가고 한편으로는 민중의 불만이 쌓여 가고 있던 시점에서 일어난 제 1차대전은 민중의 불만을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희석시키면서 미국의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쟁기간 중 미국 자본은 유럽에 대한 금융지원과 상품판매 등을 통하여 무한정의 이윤을 확보했지만 미국의 민중들은 경제적으로 임금삭감과 동결로 인해 생존권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의 광기는 애국주의를 부추겼고 전쟁반대운동을 주도한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은 엄청난 탄압을 받았습니다. 미국정부와 자본은 전쟁을 핑계 삼아 그동안 성장해 온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을 궤멸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곳곳에서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이 체포되었고 노동자들은 강제징집되었습니다. 제1차대전이 끝났을 때 미국은 자본주의 진영의 주도권을 장악했습니다. 전쟁의 종결과 함께 미국의 자본은 이제 세계의 자본이 되었고 완전히 붕괴된 외국의 자본은 미국의 통제하에 들어 왔습니다. 이제 미국은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사회내부는 전쟁의 종결과 함께 그동안 억눌렸던 민중들의 분노가 터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단지 미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 그것이 식민지 약소국이든 아니면 유럽의 자본주의 국가든,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중의 진군이었습니다. 모든 나라가 그러했듯이 미국도 이런 민중의 진군을 억누르기 위해, 특히 사회주의 운동을 억누르기 위해 모든 물리적인 통제를 동원했고 빨갱이라는 오래된 이데올로기 공세를 다시 한번 전면화하였습니다. 이러한 자본의 공세는 모든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고 이런 공세의 이면에는 러시아 혁명에 대한 위기감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각국은 러시아혁명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각하고 볼셰비즘의 폭력성을 끊임없이 선동해 나갔습니다(오늘-스물 여덟 번째 로자 룩셈부르크를 위하여(3) 참조). 미국정부와 자본의 빨갱이 공세가 이 시기만큼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사용된 적은 없었다고 할 정도로 이 시기에는 모든 사회운동에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였습니다. 1919년에 벌어진 시애틀 총파업과위니펙 총파업에 쏟아진 공격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권력과 자본은 이 파업들이 크레믈린의 지시에 의한 볼셰비키 혁명의 일환이라면서 노동자들의 정당한 임금인상요구와 합법적인 파업을 폭력적으로 제압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노동자들은 이런 정부와 자본의 공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줄기차게 투쟁해 나갔고 미국정부와 자본은 이에 맞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전면적인 탄압으로 맞섰습니다. 1919년 9월 미국전역을 달군 강철 파업, 바로 36만의 철강노동자 총파업이 50개 지역에서 일어났습니다. 윌리암 Z. 포스터(세계 노동운동사와 세계 사회주의 운동사를 쓴 바로 그 사람입니다)의 지도하에 조직된 이 철강노동자 총파업은 한마디로 미국의 자본과 권력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전쟁과 같았습니다. 만약에 이 강철파업이 승리하고 강철의 산별노조가 조직될 수만 있다면, 천만 명에 달하는 미조직 노동자들의 상징이기도 한 철강산업에 노조결성이 성공할 수 만 있다면, 미국의 모든 산업에 노동조합이 결성될 것이며 노동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권력과 자본은 이 파업을 어떻게든지 분쇄해야만 했습니다. 언론은 일제히 이 파업이 철강산업을 장악하려는 볼셰비키들의 음모라고 몰아 붙였습니다. 자본은 철강산업을 공산화하여 노동자들끼리 나누어 먹으려는 시도라고 비판했습니다. 언론과 자본은 노동자들이 펜실베니아, 일리노이, 인디애나 등지에 소련같은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빨갱이 사냥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었지만 이 파업에 대해 가한 공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즉각 군대가 투입되었고 노동자 14명이 파업 도중 사살되었습니다. 법무성은 수 백명을 체포하였고 정부를 전복하려는 혐의가 있는 외국인은 재판 없이 추방할 수 있다는 전시추방법에 의거하여 또한 수백 명을 추방했습니다. 경찰은 파업대오에 푸락치를 심어 파업투쟁을 더욱 불법화시키는 선동을 일삼도록 하였습니다. 초기에 이 파업의 지도를 맡았던 노동총동맹은 이 파업의 전투적인 투쟁력에 놀라고 정부와 자본의 공격에 질려서 이 파업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였습니다. 이런 모든 공세에도 불구하고 이 파업은 3개월 보름동안 계속되었지만 결국 패배하고 말았고 이 파업을 계기로 미국정부와 자본은 파업종료와 함께 대대적인 공안탄압을 통해 전무후무한 빨갱이 사냥에 나섰습니다. 자본은 이 빨갱이 공세를 통하여 노동운동을 통제하고 미국사회를 전면적으로 장악하였습니다. 미국의 대규모산업 분야의 노동운동을 사실상 종식시켰고 이들 분야에서 노동운동이 조직화되는 것을 30년이나 늦추어 놓았습니다. 미국 노동운동의 산별운동은 주춤하기 시작했고 협조적인 노사관계와 자본주의에 대한 협조를 내세운 미국 노동총동맹이 운동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이 빨갱이 공세는 노동자사이를 이간질하는데도 효과적으로 기능하여 노동자가 같은 노동자의 투쟁을 빨갱이 투쟁으로 매도하는 일이 허다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미국사회를 완전히 장악한 보수정치세력과 자본은 사상 유례없는 빨갱이 사냥에 나서 1920년 1월 2일 밤 전국에서 일제히 노동조합간부와 사회운동가를 체포 연행하였습니다. 70개시에서 동시에 벌어진 이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체포에 의해 10,000명이 연행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회의 중에, 어떤 사람은 집에서, 어떤 사람은 길에서 갑자기 그렇게 끌려 갔습니다. 이 중 약 6,500명 정도는 석방되었지만 나머지 3,500명은 국외로 추방되었거나 구속되었습니다. 바야흐로 미국 전역이 권력의 공안통치와 자본의 폭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고 반공의 이데올로기가 온 사회를 묵겁게 내리 누르고 있었습니다. 사코와 반제티가 최초로 체포된 1920년 5월은 바로 이런 광기가 한참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반공 이데올로기와 함께 당시 미국사회를 관통하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었던 것은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문제와 이민자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문제였습니다. 1915년 애틀랜타에서 재건된쿠 클락스 클란(Ku Klux Klan : KKK단)은 흑인과 유대인, 그리고 이주민들에 대한 폭력적인 테러를 통해 백인 우월주의를 미국사회의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만들어 가고 있었으며 많은 미국인들이 이에 젖어 들고 있었습니다. 이 단체의 회원이 1924년에 450만 명에 달했고 단체에 기부되는 금액이 한 해 약 4,500만 달러에 이른 것만 보아도 이 단체가 미국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어떻게 자리잡고 있는 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단체의 성원들은 상,하원 의원, 주지사, 시장 등으로 진출하여 인종차별과 외국인 차별을 합법화하고 제도화하는 한편 폭력과 살해 등을 통해 백인우월주의를 미국사회의 또 하나의 지배이데올로기로 만들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인디애나, 오하이오, 캘리포니아, 텍사스, 오클라호마, 아칸소, 오레곤 등의 주 정부는 사실상 KKK단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사회의 또 하나의 중요한 사회문제는 이민자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폭력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미국은 모두가 이민자들로 구성된 국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미국땅에 발을 들여 놓았다는 이유로 본토박이 미국인들은 이민자들을 차별하고 무시했으며 최소한의 인권에 대해서도 보장해 주지 않았습니다. 1901년부터 1920년까지의 통계로만도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들은 1,300만명에 달했습니다. 이들은 미국의 산업에서 모두 최소한의 임금을 받으며 기아와 고통속에서 살았습니다. 미국 자본주의의 발전의 이면에는 바로 이민 노동자들의 희생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토박이 미국인들은 이들을 외국의 첩자, 공산주의자, 테러와 폭력의 위험성을 가진 사람들,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으며 파업을 일삼는 사람들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이들을 탄압하였습니다. 특히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지면서 이들은 언제나 일차적인 검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코와 반제티 사건은 바로 이런 사회적 요인이 강하게 작용한 사건이었습니다. 빨갱이 사냥에 광분하던 사법당국은 범죄행위의 유무 보다는 그들이 이탈리아 이민자이고 무정부주의자라는 사실에 더 주목하였던 것입니다.
바톨로미오 반제티(Bartolomeo Vanzetti, 1888-1927)와 니콜라 사코(Nicola Sacco, 1891-1927)가 꿈과 이상의 나라 미국에 도착한 것은 1908년 이었습니다. 불과 20세와 17세의 청년에 불과했던 이들이 미국에 도착하여 처음 부딪힌 현실은 굶주림과 차별, 그리고 이민자에 대한 미국사회의 편견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이민자들이 그 고통을 견뎌야 했고 사코와 반제티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반제티는 여러 날 동안 일자리를 찾아 헤매야 했습니다. 거리에서 잠을 자야 했고 굶주림을 견뎌야 했습니다. 식당의 접시닦이를 시작으로 반제티는 이곳저곳의 공장을 전전하며 고달픈 노동자로서 미국생활을 견뎌나갔습니다. 반제티는 차별받는 이민자, 착취당하는 노동자로 살아가면서 뼛속까지 후벼 파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끊임없이 살아가고 투쟁하는 노동자의 위대성을 스스로 발견하였습니다. 집회와 시위에 참여하기도 하고 자신의 공장의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을 조직하기도 하고 그로 인하여 공장에서 해고되기도 하였습니다. 반제티는 그 힘든 노동의 시간들 속에서 언제나 책을 읽었습니다. 반제티의 경험과 독서는 반제티를 이탈리아 출신의 노동자에서 세상의 변혁을 꿈꾸는 사회운동가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반제티는 당시 미국 노동운동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던 무정부주의에 심취하기 시작했고 1912년 경 ‘그루포 아우토노모’라는 한 무정부주의 운동단체에 참여하여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같은 이탈리아 출신인 사코와 만나 동지적 연대를 나누게 됩니다. 사코는 비교적 빨리 일자리를 잡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그래봐야 저임금에 따른 생활고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지만 사코는 제화공으로 구두공장이라는 안정적인 직장을 기반으로 미국생활에 조금씩 적응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사코는 정말로 성실하고 평범한 노동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평범한 노동자도 당시 미국 자본주의의 모순과 폭력은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사코는 세상에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언제나 가슴에 안고 살아갔습니다. 힘든 노동의 시간들을 쪼개어 파업지지 시위에 참가하고 노동자들의 파업에 지원금을 보냈습니다. 사코는 반제티와 마찬가지로 ‘그루포 아우토노모’의 회합에 참여했다가 이 단체의 성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같은 회원이었던 로지나를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습니다. 제1차대전은 이들 두 사람을 피할 수 없는 궁지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들은 반전운동을 함께 전개하다가 강제징집을 피해 멕시코로 도망가야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 온 두 사람은 이전의 그들이 아니었습니다. 계급의식과 투쟁의지를 가슴에 담고 세상의 변혁을 위해 싸우는 무정부주의 운동가로 변해 있었습니다. 이들이 몸을 담았던 무정부주의운동 단체는 무정부주의 운동의 기본적인 투쟁방식인 폭력혁명의 노선에 입각하여 미국정부와 자본을 상대로 투쟁을 해나갔습니다. 사코와 반제티는 이런 투쟁과 삶을 병행해 나갔습니다. 반제티는 생선행상으로, 사코는 숙련제화공으로 살았습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이들 두 사람이 매우 성실한 이탈리아 이민자였다는 사실만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사코와 반제티는 체포된 후 심문과정에서 그들이 당국이 촉각을 곤두세웠던 무정부주의 운동단체의 성원이며 병역기피자라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이미 앞서 검거된 무정부주의 운동가들로부터 확보한 증언과 또 이들이 체포당시 들고 있던 같은 단체의 회원인 안드레아 살세도의 죽음에 대한 항의 문건 등을 통해 사코와 반제티의 신분은 쉽게 드러났습니다. 두 사람의 신원이 확인되면서 병역기피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경찰과 사법당국은 이 사실만으로 이들이 사우스 브레인트리 살인사건의 진범이라는 심증을 굳혔습니다. 아니 이들이야말로 사우스 브레인트리 살인사건의 진범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미국사회를 위협하는 이민자들이었고 빨갱이였으며 병역기피자 였던 것입니다. 당시 빨갱이 사냥을 통해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을 압살하려던 미국의 사법당국에게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할 만 했습니다. 검찰측이 동원한 몇 사람의 목격자의 증언이 덧붙여지고 두 사람은 정식으로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기소되었습니다. ‘내 자유는 모든 이의 자유 속에 있고, 내 행복은 모든 이의 행복 속에 있다’는 신념을 가졌고, 감옥에서도 ‘일하지 않는 두 손’을 부끄러워했던 순수한 영혼의 두 사람은 그렇게 살인 강도가 되었습니다. 재판은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사법당국, 증인들, 배심원, 재판부, 그리고 연방정부가 모두 이 사건의 과정에서 자신들이 미국을 위해, 미국의 자본주의를 위해 할 일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이민자이자 무정부주의자가 살인범이 됨으로써 미국사회를 빨갱이 없는 세상으로 만들고, 자본이 좀 더 미국사회를 손쉽게 지배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도록 하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재판은 이런 목적에 걸맞게 법정 밖에서부터 무장경관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방청인에 대한 까다로운 몸수색을 의도적으로 연출하였습니다. 미국을 지키는 재판의 모양새를 만들어 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검찰의 심문과정과 재판과정이 진행되면서 이 사건은 많은 허점을 드러냈습니다. 사형이 종료된 후 나온 한 보고서에 의하면 메사추세츠의 법무성의 고위관리들은 이미 사코와 반제티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재판부와 연방정부도 알고 있었다는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사코와 반제티에 대한 살인협의 사건은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이 두 사람을 제거하려는 관할 검찰관과 연방 법무성 관리들이 공모해서 꾸민 음모였다. 검찰측도 이 사실을 부인하지는 못했다.” 검찰측이 동원한 증인들은 모두가 검찰의 시나리오로대로 진술했을 뿐만 아니라 증인 중에는 메사추세츠 주에 거주하지 않는 사람이 가명으로 진술한 사람도 있을 만큼 증언조차도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검찰은 사형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권총과 두 사람이 갖고 있었던 총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변호인의 반박에 증거를 들이대지 못했습니다. 배심원의 선정과정에서도 부정소지가 계속 제기되었고 사건을 맡았던 테이어 판사는 심리이전에 이미 공산주의자들을 사형시킴으로서 우리 자신을 지켜야한다는 이야기들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재판은 일사천리였습니다. 두 사람의 간절한 무죄주장은 법정을 울리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습니다. 첫 재판이 열린 지 불과 37일 만인 1921년 7월 14일, 두 사람에게는 전기의자에 의한 사형이라는 형이 언도 되었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두 사람의 재판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두 사람은 재심을 신청하였습니다. 재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두 사람은 사형을 면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재심여부를 둘러 싼 길고 긴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시간이 길어 지면서 사코와 반제티의 무죄를 위한 투쟁은 1920년대 내내 세계 모든 민중들의 투쟁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인권, 그리고 진보를 위해 투쟁하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사코와 반제티 사건은 하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세계가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구가하던 1920년대, 황금을 쫒는 광란이 지구 곳곳에서 벌어질 때, 그 그늘에서 고통받던 민중들은 모두가 사코와 반제티가 되어 갔습니다.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구가하던 1920년대의 뉴욕 그러나 재심운동 초기에는 이 사건은 세인에게는 관심밖의 일이었습니다. 1920년대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뿌리를 뽑으며 사회에 대한 전일적 지배를 확보한 미국의 자본은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인 금융자본주의를 통해 이윤을 극대화시켜 나갔습니다. 자본주의는 전후의 호황을 발판으로 금융에 기반한 자본주의체제를 확장시켜 나갔습니다. 새로운 축적의 기반을 확보한 자본은 대량생산체제에 들어갔고 시중에는 상품이 넘쳐 났습니다. 금융자본이 사회를 지배하고 사람들은 주식에 몰려들었습니다. 권력은 자본에 기대어 부패하기 시작했고 자본은 권력을 이용하여 이윤추구에 혈안이 되어 갔습니다. 금융자본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삶이 부유해지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사회는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었고 각종의 투기와 부정부패, 이윤추구를 위한 범죄가 만연했습니다. 모두가 신기루를 쫒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계급적이고 전투적인 노동운동은 시대에 뒤떨어진 운동이 되고 있었고 곰퍼즈의 노동총동맹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한 일에 발벗고 나서는 형국이었습니다. 미국 노동운동의 조직률은 날로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코와 반제티의 무죄를 위한 투쟁이 미국인의 관심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진영의 일부가 안간힘을 쓰며 사코와 반제티의 투쟁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재심여부에 대한 심리는 오랜 시간을 끌었습니다. 그리고 실제 재심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크지 않았습니다. 지루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반제티는 감옥 안에서도 공부에 열심이었습니다. 반제티는 정치경제학, 철학, 역사 등에 대해 공부했고 영어가 짧았던 사코는 영어공부를 했습니다. 두 사람의 고향에서도 두 사람에 대한 구명운동이 벌어졌습니다. 미국에 혈혈단신 홀몸이었던 반제티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쌓여 갔지만 의연하게 버텨 갔습니다. 사코는 언제나 무정부주의자로서 당당하게 살아갔던 그의 부인 로지나와 두 자녀를 면회하고 그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을 큰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사코가 그의 딸 이네즈에게 썼던 편지입니다.
사코의 가족, 딸 이네즈는 사코가 감옥에 간 후 태어났다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것을 꿈꾸듯이, 나는 다른 가난한 딸들이 그들의 오빠 동생 엄마와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고 싶었단다. 그러나 눈앞에 벌어진 못사는 사람들의 딱한 삶을 보았을 때, 아빠의 마음은 찢어지듯 아팠다. 사람은 누구나 억눌리지 않은 채 아름답고 착한 삶을 살아가는 그런 세계를 노리려고 태어났단다. 그런데 이 죽어가는 낡은 사회의 사람들은 인정 사정 없이 네 오빠와 가난한 엄마로부터 나를 빼앗아가 버렸단다. 그래도 아빠는 꿋꿋하게 자유정신을 가지고 살아왔고, 또 살아서 너의 엄마 품에 그리고 다른 친척들과 동지들 속으로 다시 돌아가리라고 믿고 살아왔지만..... 얘야! 지금 아빠의 마음은 너무나 아프구나.” 두 사람은 자신들의 명백한 무죄를 인정하지 않는 재판부를 보며 자신들의 재판이 이제 살인사건이 아닌 정치적 사건이 되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사코와 반제티의 재심이 시간을 끌면서 미국인들이 하나 둘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미국내의 모든 양심적인 지식인과 운동가들이 사코 반제티 재판의 재심투쟁운동에 뛰어 들었습니다. 사코와 반제티 사건은 점차 세계인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세계의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세력들은 이 사건의 재심과 사코와 반제티의 구명을 위한 운동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재심을 위한 결정적인 증언이 나왔고 사코와 반제티, 그리고 변호인단은 이를 통해 사코와 반제티를 석방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1925년 11월, 사코와 반제티와 같은 감옥에 있던 포르투갈계의 갱단 조직원이었던 첼레스티노 메데이로스가 증언을 자청하며 해당 사건의 진상을 털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건으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상태였지만 항소심에서 감형의 가능성을 갖고 있던 사형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사형을 면하기 어려워지게 될 것을 각오하고 사실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하여 포르투갈 갱단이 바로 사우스 브레인트리 현금수송 탈취사건을 저질렀다고 고백하고 기꺼이 사코와 반제티를 위해 증언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재심은 확실한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테이어 판사는 이런 명백한 증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심기각 결정을 내렸습니다. 사법당국은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재심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법당국과 정부가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코와 반제티 사건에서 기소된 것은 사우스 브레인트리의 살인사건이 아니라 바로 사회주의 사상이었고 이민자들의 자유를 향한 의지였고 노동자, 민중의 반전투쟁이었던 것입니다. 재심이 기각되면서 그동안 사코와 반제티를 위해 투쟁해 온 미국과 전세계 민중들의 투쟁은 본격적으로 끓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미국의 언론들이 나서 ‘법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폭력’을 규탄하고 나섰습니다. 각국의 미국 대사관앞에는 시위대가 줄을 이었습니다. 코민테른을 중심으로 한 세계 사회주의 운동진영은 조선에서 벌어진 조선공산당에 대한 재판사건과 이 사건을 1927년의 세계 사회주의운동의 두 가지 투쟁과제로 선정하고 이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습니다. 미국내의 노동조합들도 즉각적으로 규탄집회에 나섰고 동맹파업에 들어가기도 하였습니다. 어용적인 행태를 일삼고 있던 미국 노동총동맹마저도 재심을 요구하는 등 이제 사코 반제티 사건은 미국과 세계의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927년 4월 9일, 사코와 반제티에 대한 재심은 최종적으로 기각되었습니다. 두 사람에 대한 사형이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입니다. 두 사람에 대한 사형집행일은 7월 10일로 통보되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이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해야만 했습니다.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고 곳곳에서 파업이 벌어졌습니다. 온 나라의 사람들이 보스톤으로 달려 왔습니다. 매일 같이 주정부 청사에는 피켓대열이 줄을 이었고 주지사의 사형집행 유예결정을 촉구하였습니다. 마침내 주지사는 6월 2일 세 사람의 원로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위원회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입장을 발표하였습니다. 위원회의 활동을 위하여 사형집행을 8월 10일로 연기한다는 발표도 이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결정이 곧 재심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위원회는 다시 최종적으로 유죄라는 입장을 발표하였습니다. 사형집행은 이제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8월 10일 사형집행 당일날 한 차례 집행유예가 있었지만 그것이 두 사람의 생명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형이 최종확정된 후에도 사코와 반제티는 매우 평온한 일상을 유지했습니다. 반제티는 <어느 프롤레타리아의 삶>이라는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고 사코는 자신의 무죄를 단식투쟁을 통해 항변하였습니다. 사형이 확정되고 난 후 며칠이 지난 뒤 사코가 그의 어린 아들 단테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울지 말거라, 단테야! 네 어머니가 일곱 해 동안 고생하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단다. 그러니 아들아, 울지 말고 씩씩하게 어머니를 위로해 주고 소중한 이들을 사랑하고 곁에서 보살펴 드려라. 네 어머니와 함께 조용한 시골길을 산책하며 여기저기 피어 있는 들꽃을 꺾고 나무 그늘에서 쉬렴. 그러나 단테야, 행복하다고해서 너 자신만을 위하는 일에 모든 것을 바쳐서는 안 된다. 항상 기억해라. 행복한 유희 속에서 젊음을 보내기보다 박해당하고 희생하는 이들을 도와라. 그런 사람들은 아버지와 반제티 아저씨처럼 싸우다 쓰러지는 우리의 동지들이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자유와 환희를 위해 싸우다 쓰러지는 동지들이란다....... 네 용감한 마음과 선량함이 그들에게 기쁨을 주리라 믿는다. 인생에서 너는 더 많은 사랑을 발견할 것이고, 사랑받게 될 거다.” 그 당시 반제티가 <뉴욕 월드>라는 잡지와 한 인터뷰 기사를 보면 이들이 자신들의 죽음앞에 얼마나 당당했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나는 길거리에서 무시당하면서 내 삶을 살다 마쳤을 것이다. 내세울 것 없고 이름 없는 실패자로 죽었을 것이다. 평생 살아오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지금 죽어 가면서 하고 있는 일을 하리라고 기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관용을 위해, 정의를 위해,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 날을 위해 싸우고 있다. 우리의 말, 생명,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선량한 제화공, 가난한 생선 장수이지만 생명을 거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의 전부다. 마지막 순간은 우리 것이다. 그 고통은 우리의 승리이다!” 두 사람의 사형이 집행된 8월 23일의 아침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사코와 반제티의 시신이 안치된 장소에는 10만명의 사람들이 조문을 다녀 갔고 세계각국에서도 추도집회가 열렸습니다. 8월 28일에 치루어진 장례식에는 경찰의 곤봉과 군홧발에 짓밟히면서도 20만명이 참석하였습니다. <보스턴 글로브>지는 ‘현대에 와서 가장 대단한 장례식 가운데 하나’라고 보도했습니다. 8월 23일자 <뉴욕 타임스>에는 두 사람의 구명을 위해 끝까지 노력했던 시인 에드나 밀레이의 시가 실렸습니다. 당당한 죽음 앞에서 우리는 알게 되었네 알곡을 틔운 밭고랑에 잡초를 뽑아야 한다는 걸 눈앞에는 달팽이가 기어 다니고 흰곰팡이가 뒤덮었네 악의 무리가 참제비고깔과 옥수수를 뒤덮으니 우리는 그것들이 스러지는 것을 보았네
두 사람의 유골은 함께 다시 대서양을 건너 이탈리아로 돌아갔습니다. 두 청년이 미국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거의 시민 전체가 기차역에 마중을 나왔고 사코와 반제티는 각각 그들의 고향이었던 토레마조레와 빌라팔레로에 영원히 잠들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탈리아 곳곳의 거리와 도로에 사코와 반제티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탈리아에는 지금도 사코와 반제티로(路)가 수십개나 되고 있습니다. 소비에트 러시아 해군은 자신들의 배에 각각 사코함, 반제티함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두 사람의 이름을 기렸습니다. 두 사람이 사형되던 1927년 8월에 그 유명한 러시모어 산에 미국의 대통령을 조각하고 있던 당대 최고의 조각가 거츤 보글럼(Gutzon Borglum, 1867∼1941)은 사코와 반제티의 동판조각의 제작에 착수하였습니다. 이 유명한 조각가의 이 의미있는 작품은 그러나 보스톤 시당국의 거절로 오랫동안 자리를 찾지 못하다가 1997년에야 겨우 보스톤 공립도서관에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러시모어 산의 대통령 조각이 세계적인 관광지이자 위대한 예술품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에 비하여 같은 작가의 작품인 이 동판조각은 아직도 일반에게 공개되지는 않은 채 특별전시실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두 사람의 죽음 이후, 한편은 명예회복을 위해, 한편은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대립을 계속하였습니다. 반제티는 자신의 자서전 <어느 프롤레타리아의 삶>에서 자신을 ‘이름없는 군중속의 이름없는 사람’이라고 하였지만 그와 사코는 자유와 사회의 변화를 꿈꾸는 모든 군중이 부르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들을 사형으로 몰아 넣었던 사람들은 세월이 오래 지난 후에도 사코와 반제티가 유죄라는 사실을 조금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실제 사코와 반제티가 유죄였을 수도 있다는 개연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어서 이 사건에 대한 법률적인 명예회복은 아직도 논쟁의 지점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갖고 있는 본질은 그들이 사우스 브레인트리 사건을 실제 저질렀는가 만은 아닐 것입니다. <미국 민중사>를 쓴 하워드 진(Howard Zinn, 1922~2010, 반전 평화운동에 평생을 바친 미국의 사회운동가이자 진보적인 역사학자, 올해 1월에 타계했음) 은 사코와 반제티 사건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코와 반제티의 궁극적인 범죄는 아나키즘이라는 그들의 신념이었다. 이 사상은 그 안에 담긴 본질적인 진실, 즉 우리 모두는 하나이고, 국가의 경계와 국가끼리의 증오는 사라져야 하고, 전쟁은 용납할 수 없으며, 세상의 과실은 서로 나눠야만 하고, 권위에 대항한 조직적 투쟁을 통해서만 그런 세상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실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번개처럼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다.” <권력을 이긴 사람들> 하워드 진 사코와 반제티 사건은 인간이 자유를 꿈꾸고, 사회의 변혁을 꿈꾸는 것 자체를 범죄로 만들었던 폭력의 시대, 광기의 시대에 고통속에 살아야 했던 모든 민중이 자본주의의 적이었음을 확인시켜 주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시대를 넘어 지금도 반복되고 있음을 우리는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다른 폭력과 광기가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과 평화를 여전히 위협하고 있음을 우리는 오늘 똑똑히 목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용산에서, 평택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인간이하의 삶으로 고통받고 또 추방당하는 이주노동자의 삶 속에서, 물줄기가 파헤쳐진 곳곳의 남한 땅에서 우리는 봅니다. 자유와 평화를 꿈꾸는 민중들을 사코와 반제티로 만들고 있는 자본주의의 폭력과, 그 자본에 조종당하고 있는 부패한 권력의 광기를. 사코와 반제티와 그와 함께 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코와 반제티에 관한 이야기는 노래로 영화로 그림으로 수도 없이 제작되고 발표되면서 민중들과 함께 해 왔습니다. 밥 딜런과 존 바에즈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던, 미국 포크 뮤직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우디 거스리는 노래 11곡을 수록한 음반〈사코와 반제티의 발라드〉를 발표했고 영화〈사코와 반제티〉는 24회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음악과 노래는 엔니오 모리코네가 작곡하고 존 바에즈가 작사하여 직접 부른 것들입니다. 그 노래를 같이 듣습니다. <그대들에게 바칩니다. Here's to you> 니콜라와 바르트, 그대들에게 이 노래를 바칩니다. 이제 우리 마음속에서 영원히 안식을 찾으소서. 최후의 순간은 그대들의 것입니다. 그 고통은 그대들의 승리입니다. 책! 책! 책! <사코와 반제티> 부르스 왓슨, 삼천리, 2009 2007년 미국에서 발간되어 <워싱턴 포스트>가 그해 역사부문의 책으로 선정한 책입니다. 사코와 반제티 사건에 관한 많은 책이 출간되었지만 그 자료의 방대함이 다른 책을 훨씬 능가합니다. 또 단순히 사건의 유무죄를 넘어 1920년대의 미국사회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면서 기술함으로서 미국사회를 이해하고 이 사건의 역사적 함의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을 줍니다. <알려지지 않은 미국 노동운동 이야기> 리차드 보이어, 허버트 모레이스 공저, 책갈피, 1996 참 읽어 볼만한 책입니다. 미국의 노동운동사에 관한 책은 시중에서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책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입니다. 계급적인 노동운동의 관점에서 기술된 이 책은 미국노동운동사를 개관하면서도 당시의 사건들을 이야기식으로 풀어씀으로써 책을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줍니다. 더욱 좋은 것은 책을 읽는 내내 감동을 느낄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 도서출판 다른 미국의 민중사학자인 하워드 진의 저서, <미국민중사>를 중심텍스트로 하고 그의 자서전 <달리는 기차위에 중립은 없다>를 참고하면서 마이크 코노페키라는 만화가가 그린 만화입니다.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통하는 미국이 역사속에서 얼마나 야만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침탈을 일삼았는지, 또 민중들을 어떻게 억압해 왔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국역사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도움이 됩니다. 제가 먼저 만화를 추천하는 이유는 더 많은 공부를 위해 만화로 시작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아는 지식의 상당부분을 만화에 빚지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좋은 만화가 참 많이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