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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少林武術의 허(虛)와 실(實)
김용수*(강원대학교), 김택호(한국스포츠사랑연구소)
국문초록
이 연구는 중국 소림무술에 대한 허(虛)와 실(實)을 찾아 소림사와 관련된 소림무술에 대하여 철학적‧역사적으로 이해하는 데 목적이 있다. 본 연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소림사와 소림무술에 대하여 전설의 소림무술, 부활의 소림무술, 창조의 소림무술로 가설을 설정하여 고찰하였으며, 소림무술의 시원이 되는 소림오권과 오전권, 오형권을 중심으로 문헌을 조사하여 분석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현재 소림무술로 나누는 무술이 전부 소림사 안에서 소림 승에 의하여 전승되었다고 볼 수 없다. 소림무술은 하남성 등봉현 일대에서 민간인 사이에 전해진 권법 등이 소림무술로 분류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현재 전해지는 각종의 투로는 고전의 내용을 발굴, 정리하여 보급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 불교 선종 초조 달마대사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내공을 쌓고 체력을 다지는 건신법인 요병 체조술(yoga)이 소림사에서 전승되었을 것으로 본다. 둘째, 소림무술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종류의 문파나 기법의 장점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어 끊임없이 발전하였으며, 많은 문파(門派)의 맨손기술과 기계기술(武器技術)에 대한 총칭으로 소림무술이라 한다. 셋째, 명나라 이후, 소림 문파는 건강체조인 ‘오금지희’를 모델로 하여 소림오권을 연구하고 개량하여 발전시켰다. 소림무술의 기본이 되는 오전권이나 오형권은 공격과 방어로 되어 있으며, 자세, 수법의 공방, 퇴법, 신법, 보법 등을 분류하여 정리하면 그 근본을 알 수 있다.
※ 주제어: 중국 소림무술, 허와 실, 맨손기술, 기계기술
Ⅰ. 서 론
소림사는 하남성(河南省) 등봉현(登封縣)의 숭산(嵩山)에 있다. 숭산은 중국의 오악(五岳) 가운데 하나인데, 오악은 동(東)의 태산(泰山), 서(西)의 화산(華山), 남(南)의 형산(荊山), 북(北)의 항산(恒山), 중(中)의 숭산(嵩山)을 가리킨다. 숭산은 태실과 소실로 나뉘는데, 소림사는 소실산(少室山) 숲속 안에 있었기 때문에 소림사(少林寺)라 불렸다(김지환, 이병인, 이영옥, 이호현 역, 2006: 337). 그리고 소림사는 북위(北魏) 태화(太和) 19년(서기 495년)에 효문제(孝文帝)의 명에 의하여 인도[天竺]에서 건너온 발타(跋陀)라는 승려를 예우하여 그를 위해 절을 지었다.
오늘날에는 소림권(少林拳) 또는 소림파(少林派)라고 이름 붙여진 무수한 무술이 존재한다. 이 가운데 북파소림(北派少林), 남파소림(南派少林), 강서상산소림(江西常山少林), 복건구룡소림(福建九龍少林), 광동소림(廣東少林) 등으로 구분되는 여러 종류의 권법과 무기술, 그 외 경공(硬功), 연공(軟功), 기공(氣功)이 있다. ‘천하쿵푸출소림(天下功夫出少林)’이라는 말처럼 무술인이라면 거의 대부분 소림파를 자처하게 되어 오히려 중국 ‘천하의 무술은 소림에서 비롯되었다(天下武功出少林)’는 억지설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소림사는 역사상 실존하였고, 지금도 남아 있는 하남성(河南省) 숭산(嵩山)의 소림사를 말한다.
중국 권법을 그 기술적 성질에 따라 분류하면, 그 대표는 외가권(外家拳)과 내가권(內家拳)의 두 가지 계통으로 대별된다. 그러나 그 설의 해석도 여러 가지 있고 정설은 없다. 예를 들면 외가는, 외공 단련 즉, ‘외형적인 힘’을 중시하고 있고, 내가는, 내공 단련인 ‘기’를 중히 여긴다(周偉良 編著, 2003: 91). 따라서 내가권은 힘이 숨겨져 있는 권법이며, 외가권은 힘이 밖으로 나타나 있는 권법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중국에서 내공법이라고 하는 것은 도인법을 말한다. 도인(導引)이란, ‘기혈을 끌어내어 그 흐름을 원활하게 한다’라고 하는 의미이며, 내가권은 무술과 도인법을 혼합시키는 것이 큰 특색이다. 내공법에 대해서는 외가권에서도 『역근경(易筋經)』,『세수경(洗隨經)』을 근거로, 소림계 외가권에는 소림권 창시 당시부터 내공법이 있었다고 반론하고 있다.
권법(拳法)은 문자 그대로 권을 사용하는 기술이다. 찌르기, 치기, 차기 등의 기법을 손발을 사용하여 행동하는 기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일반적으로는,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창시하였다고 일컬어지고 있는 것을 소림파 권법이라고 칭하고, 별칭(別稱)을 외가권, 또는 강권, 또는 경권이라고도 한다.
중국을 대표하는 소림무술(少林武術)은 ‘선종의 개조(開祖) 보리달마가 소림사에 와서 불법을 전수함과 동시에 소림권법을 창시하였다. 그러나 영향은 크지 않았다.’(김지환, 이병인, 이영옥, 이호현 역, 2006: 337)는 내용이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문제는 소림권법의 창시자라고 알려진 달마는 도대체 누구이며 언제 중국에 왔는지 조차 알 길이 없다. 달마가 페르시아 스님이며(우봉규, 2008: 18), 480년경에 중국에 왔다고 하고, 인도의 브라만 계급 출신으로 527년 중국에 왔으며, 536년에 죽었다고도 한다. 달마(達磨) 그 자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현재의 입장에서는 『역근경(易筋經)』, 『세수경(洗隨經)』, 『나한십팔수(羅漢十八手)』 중 그 어느 것도 달마의 창작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 사학자들 사이에는 ‘달마대사는 선종(禪宗)의 포교를 위해 만들어진 가공의 인물이다’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러한 현실에서 중국무술을 대변하는 소림사와 소림무술에 대한 연구가 우리나라에서는 미흡한 편이므로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 연구는 중국 소림무술에 대한 허(虛)와 실(實)을 찾아 소림무술에 대한 철학적‧역사적으로 이해하는 데 목적이 있다.
본 연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소림사와 소림무술에 대하여 전설의 소림무술, 부활의 소림무술, 창조의 소림무술로 가설을 설정하여 고찰하였다. 이러한 가설의 설정 배경은, 소림무술이 소림사, 당나라와 관련 있으며, 명대에 형성되어 명성을 날렸으며,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청나라 시대에 권법과 곤법이 성행하였다는 소림사의 무술(武術)이나 무승(武僧)애 대한 설화(說話)의 영향으로 왜곡된 소림사의 전설, 부활, 창조 등이 사실인 것 같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Ⅱ. 소림사(少林寺)와 소림무술(少林武術)
1. 전설의 소림무술
소림무술과 소림(少林)은 하남성(河南省) 등봉현(登封縣)의 숭산(嵩山)에 있는 소림사(少林寺)에서 비롯된다. 야사(野史)나 민담(民譚)에 의하면, 중국 권법의 본산지인 무당산파(武当山派)를 빼면 중국의 권법은 양무제(楊武帝) 시절(원년, 서기 520년경) 인도승(印度僧) 달마대사(達磨大師)가 괘석(掛錫)한 중국 하남성(河南省) 숭산(崇山)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소림사(少林寺)에 귀착하게 된다(김재일, 2003: 43). 이러한 가운데 청나라의 고증학자 황종희(黃宗羲)는 공격 중심의 소림사와 수비 중심의 무당산으로 분류한 바 있다. ‘무당산의 무공의 뿌리 역시 본디 소림사에 있었으며, 무당산이 독립함으로써 양자는 서로 경쟁적이지만 교류하면서 발전했고 상호 존중하면서 공존하는 관계를 맺어왔다’(송희복, 2008: 107). 즉 소림사파 - 무당산파, 북숭소림(北崇少林) - 남존무당(南尊武當), 외가권 - 내가권, 선불교(禪佛敎) - 도가사상(道家思想), 물리적 격파력 - 단전, 기공 양생술, 조선사 - 장삼풍으로 두 계열을 비교하였다(송희복, 2008: 108). 그러나 근대에 들어 중국의 무술사가 당호(唐豪)는 『소림무당고(少林武當考), 1930)』에서 ‘장삼봉은 실존을 확인할 수 없는 전설상 인물이며, 명대 영락제가 국가적 탐색을 명령한 것은 별도의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한병철, 2005: 169)라고 밝히고 있다.
일반적으로 중국 불교 선종(禪宗)의 초조(初調)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주지승으로 있을 때 많은 승려들을 맹수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고심하던 중 천축국(印度)의 ‘요병(療病) 체조술(yoga : 瑜伽)’과 동물들의 특기를 병합하여 면벽좌선 9년 만에 체계화된 무술을 창안, 불가에서 내공을 쌓고 체력을 다지는 무예로서(邱丕相 主編, 2008: 136) 민간 무술로 전승되었으며, 무술가인 서청상(徐淸祥)은 저서『중국무술지미(中國武術之迷)』에서 소림 무술기공은 ‘숭산 소림사의 달마대사와 2대 조사인 조(稠)선사로부터 시작되었다.’(백경화, 지치환, 2006: 69)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달마는 527년에 건너와서 달마가 죽었다는 시기도 528년 혹은 536년 등 여러 가지이다. 527년부터 536년까지는 면벽 9년이라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536년에 죽었다면 527년부터 536년까지 인간의 깨달음의 벽, 깨우침을 9년간 했다는 말이 성립된다. 물론 선종이나 요가에서 정좌하는 것은 당연하며, 인도 요가의 푸라나 야마라고 불리는 호흡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달마가 살았다는 527년부터 528년 혹은 536년 사이에 『역근경』, 『세수경』이 전해졌다고 믿기는 어렵고, ‘『역근경』이나 『세수경』이 무술과 관련 있다’는 주장 또한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의 존재를 인정하더라도 그의 행적을 다룬 불교 서적 중에도 ‘달마는 소림사에서 종일토록 좌선만 하고 있었다’고 했을 뿐 ‘역근경’의 이름이나 권법 비슷한 것을 했다는 내용이 전혀 나와 있지 않다. 이렇게 볼 때 ‘역근경’은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위서(僞書)일 가능성이 높다(松田隆智, 1979: 83-85, 송형석 2001: 56, 재인용).
한(漢)나라 때 유물인 ‘백서도인도(帛書導引圖)’에는 40여의 착색 인물도가 그려져 있으며, 중국 권법의 원형을 생각하게 하는 동작을 하고 있다. 그것을 태극권의 원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요병(療炳) 체조(健康 體操)의 설명화’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오늘날에도 ‘도인술(導引術)’ 이나 ‘기공술(氣功術)’, ‘양생술(養生術)’, ‘건신술(建身術)’ 등은 심력․기력을 양성하는 술(術)이라고 해서 노자(老子)를 그 원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臟原稜三, 1990: 218, 김재일, 2003: 44-45 재인용).
이와 같이 야사나 민담에서 나타난 의문점을 소림무술과 관련시켜 보면,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소림권을 창시했다고 전하는 달마(達磨)는 효명제(孝明帝) 효창(孝昌) 3년(서기 527)에 남천축(南天竺)에서 들어와 불교 선종(佛敎禪宗)의 초조(初組)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소림사는 불교 선종의 조정(組庭)이 되었다. 그러나 북주(北周)의 건덕(建德) 년간(서기 572∼575)에 무제(武帝)가 불교와 도교를 법으로 금하고 소림사를 파괴해 버렸다(서기 574). 그 후 정제(靜帝) 대상(大象) 년간(서기 579∼580)에 재건되었고 이름을 바꾸어 척호사(陟岵寺)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수문제(隋文帝) 개황(開皇) 년간(서기 581∼600)에 다시 소림사(少林寺)라 하고 밭 일백 경(頃)을 주었다. 또한 선종은 전적으로 선(禪)을 주로 하였기 때문에 선종이라 불렀다. 선종(禪宗)은 불교 수행 방법 중의 하나이다. 선(禪)은 범어 ‘Dhyana'〔선나(禪那)〕의 약칭으로, 곧 안정해서 잡념을 그친다는 뜻이다. 조용히 앉아 마음을 가다듬고 한 곳에 정신을 집중해서,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하면 심신이 가벼워져 정신이 맑은 상태에 도달하여 성정을 이룰 수 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도는 문자나 말로써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뜻)를 주장(김지환, 이병인, 이영옥, 이호현 역, 2006: 338)하고 있다.
또한 무당산파와 관련 있는 장삼풍은 북송 말기의 무당산 도사 장삼봉(張三峰), 남송 시대의 무당산 도사 장삼풍(張三豊), 원말 명초의 무당산 도사 장삼봉(張三峰)이 있는데, 실제로 역사서에는 아주 간단하게 언급될 뿐이다(한병철, 2005: 166). 중앙국술관(中央國術館)의 편심처장(編審處長)을 지낸 당호(唐豪)는 그의 저서『소림무당고(少林武當考)』에서 소림(少林)과 무당(武當)이 날조된 전설을 지적하였다.
2. 부활의 소림무술
일반적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소림무술(少林武術)은 인도 선사 달마대사(達磨大師)가 가져왔으며, 수박(手搏)․각저(角抵)가 호인(胡人)․서역승(西域僧)에 의해 전래되었다는 설은 이미 오랫동안 구전(口傳)되어 온 것이 현실이다. 물론 중국의 입장에서는 철저히 부정하고 있다. 즉 ‘대쥬신족[胡人, 夷狄]․서역(西域) 승려(僧侶) 등에 의해 수박이 전해졌다’는 것은 허구(虛構)에 지나지 않고 ‘수박(手搏), 각저(角抵)는 불교 도래 이전부터 각기(各其)에서 행하고 있었다’는 것이 중국의 입장이다(臟原稜三, 1990: 197, 김재일, 2003: 43 재인용). 그러나 臟原稜三 (1990: 280)은 『格鬪技の歷史』에서 ‘맨손의 격투기를 체계적으로 교수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은 헬레니즘 시대이므로 그 무렵 실상을 알지 못하면 서역승(西域僧)이 가지고 온 격투술의 내용에 대해서도 진짜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중국에 들어온 서역승(西域僧)들은 이러한 전통이 있는 나라에서 태어나 구체육관과 인연이 깊은 사원이나 선림에서 삼장을 배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곤법(봉술), 권법(복싱), 상박(착의(着衣) 레슬링, 단검술, 궁술, 창술 등에 통하고 있었다 해도 하나도 이상한 말이 아니고 본래 석존(釋尊) 자신이 격투술에 명수였다는 것은 안그리마라 경에 의해서 알 수 있다. 서역 제국의 불승이 이교도의 박해에서 몸을 지키기 위해 곤・장・권을 쓰는 격투술을 수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또 그 힘이 없으면 두타 행승으로서 제국을 편력(遍歷)할 수가 없다.’(臟原稜三, 1990: 280, 김재일, 2003: 43-44 재인용).
이와 관련하여 이은상(2007: 7)은 잘 발달한 역마 제도와 해상 교통로를 통해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했다. 이미 70여 나라와 관계를 맺고 있던 당나라는 지속적으로 사절과 유학생, 승려 등의 멀리 로마를 포함하여 인도, 페르시아, 사라센까지 그리고 위구르, 발해, 신라, 백제, 고구려, 일본 등까지 왕래했다. 수도 장안은 100만명의 인구를 수용했으며 전역의 상인, 학생 순례자가 찾아오는 그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큰 국제도시로 성장했다. 적어도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번성하고 강대한 국가였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1970년대 홍콩의 영화사 등이 중국 고유 무술을 테마로 한 오락 영화를 만들어 세계 시장에 내놓았는가 하면 흥미진진한 무협 소설을 통해서 소림 무술을 비롯한 전통 무예를 소개함으로써 잊혀져가던 소림사와 그 무술 고수들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되살아났다. 영화나 비디오, 무협소설을 통해서 이미 팬들에게 충분히 소개 되었지만 중국무술 특히 소림무술에 얽힌 설화는 무궁무진하다. 그 중에서 1982년 이연걸 주연의 ‘소림사’를 배경으로 한 무술 역사 영화 내용이다.
수(隨) 나라 말기 당태조(唐太祖) 즉위하기 전, 왕세충(王世充)이 난을 일으켰을 때, 이세민(李世民)이 포위돼서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에서 홀연히 나타난 소림자 무술 승려 13명(13棍僧)이 전광석화(電光石火)와 같이 빠르고 신기한 동작과 괴력의 수도, 장풍으로 수백 명을 물리쳐 그 공로로 唐 太宗 李世民으로부터 광대한 경작지를 하사받아 중국 최대의 사찰로 성장한다.
그러나 실제로 소림 13 곤승(棍僧)의 설화가 처음 보이는 것은 중화민국 초기 마량(馬良)이 지은 『중화신무술곤술과(中國新武術棍術科)』에 양계초가 쓴 서문부터이다(程大力. 1995: 78). 정작 이 설의 원자료인 소림사 경내에 있는 ‘당황숭악사바[唐皇嵩岳寺碑:太宗文皇帝御書]’에는 “… 승려인 지조, 혜양, 담종 등이… 무리를 이끌고 와서… 왕세충의 생질인 인칙(仁則)을 사로잡으니[僧志操, 蕙瑒 , 曇宗 등… 率衆以拒僞師…執充到仁則以歸…] ”라는 구절밖에 없으며(登封懸志辨公室 編, 1988: 62), 소림 승들이 곤법(棍法)을 사용해 이세민을 구했다는 내용은 없다. 그러나 이세민은 그 일을 크게 기뻐하여 담종에게 대장군의 칭호를 주었는데, 이로 인해 소림사는 천하제일의 사찰이라는 소문이 나게 되었으며, 승려도 이천 여명 가까이 늘어났다. 또한 이세민은 소림승의 공적을 담은 공적비를 세웠고 지금도 세민(世民)이라는 서명이 친필로 남아 있다.
이상의 소림무술의 부활에서 제기되고 있는 의문점을 구체화시켜 보면,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臟原稜三(1990: 277)은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계 식민지(도시국가)에서는 어디에서도 강당, 계단, 교실, 도서관, 격투기 연습장 등을 갖춘 체육관을 마련해 놓았으며 이 제도는 로마 시대에 들어가도 계속되었다. 체육관에서는 라이센스를 가진 트레이너 밑에서 권투(복싱), 상박(레스링), 단검술, 궁술, 창술, 무장 격투기 등의 연습을 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시스템은 지중해 연안 제국만이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아시아 지역의 식민 국가에서도 사용하고 있었으며, 범 그리스 경기 대회에도 아시아 지역에서 대표 선수를 출장시키고 있었던 것이다.’(臟原稜三, 1990: 277, 김재일, 2003: 44 재인용)는 가설로 소림무술을 부활시킨 점은 상당한 무리가 있다고 본다.
또한 당나라 초기(618년) 수의 장수인 왕세충(王世充)의 반란시, 이세민을 도와준 소림승[曇宗, 志操, 蕙瑒, 善頀, 普惠, 明崇, 靈憲, 普勝, 智守, 道廣, 智興, 滿, 豊]이 공을 세우게 되었다는 내용이다(邱丕相 主編, 2008: 136). 여기서 반란이란 왕세충이 헌주(軒州)라는 호를 세우고 수나라를 다시 부활시키려 일으킨 반란을 가리킨다. 이에 대하여 이세민이 반란군을 정벌하러 나갔을 때 소림사의 중들이 합세하여 왕세충의 조카 인칙(仁則)을 거느려 본조(本朝)에 귀순하는(정삼현 역, 2007: 335) 공헌을 세웠던 것이 정설이다.
3. 창조의 소림무술
송대(宋代) 소림사(少林寺)의 무술이 크게 발전하여 권술의 투로(套路)가 170여개 달하게 되었고, 복거(福居), 백옥봉(白玉峰), 추월선사(秋月禪師) 같은 고수들이 출현했다. 『소림권보수초본(少林拳譜手抄本)』에 의하면 소림사의 방장(方丈)이었던 복거는 많은 승려의 무술을 높이고 18가문의 고수를 초청하여 무술을 논했다. 이후로 도시와 향촌 각처에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맺어지는 무술 집단이 나타나게 되었고 각 집단 내부에서 완전한 무술 투로(套路)와 기법을 전수했다(전형준, 2004: 11-12). 소림파의 무술은 달마 훨씬 이후의 인물인 조선사(稠禪師)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역대 선사 중에서 여동병, 백옥봉, 각원상인 등의 무술 고수들이 배출되었다(송희복, 2008: 108).
17세기 중엽 명(明)나라가 망하고 청(淸)이 건국되었을 때 새 왕조를 반대하는 이른바 ‘반청혁명’운동의 근원지로 소림사(少林寺)가 떠올라 당시 민중들에게 깊은 신뢰와 감동을 주었으며, 소림사 승려들이 익히던 무술 등이 민간으로도 빠르게 전파되었다. 하지만 소림사나 소림무술들이 승승장구 영광의 세월만 누려온 것은 아니었다. 아편전쟁(阿片戰爭, 1840)이 발발하고, 태평천국 운동(太平天國 運動, 1851-1864), 특히 1898년부터 3년간 화북지방 일대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된 북청사변(義和団의 난, 1899)의 주동 세력들이 ‘소림권법을 휘두르는 무술인(武術人)들이 있다’고 하여 청국 군을 격파한 미국, 독일, 일본 등 이른바 연합군들은 소림무술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이 때문에 소림사는 인적마저 끊긴 폐찰로 버려지는 비운의 시기를 수십 년이나 겪었으며, 소림무술 고수들이 산이나 지방으로 흩어지거나 사라져서 그 명맥을 잇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무술 수련이 금지되었는데, 이상하게도 이때에 중국 무술의 거의 대부분이 창시되는 시기이다(周偉良 編著, 2003: 85). 이 당시 소림 승들 중 일부는 절강(浙江) 방면으로 남하하여 강서성의 상산(常山)이나 하북성의 반산(盤山)에 모여서 무술 단체를 결성하였고, 그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아미산에 숨어서 그 지방의 권법과 융합하여 새로운 권법을 창출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아미파(峨嵋派)이다. 이와 같은 여러 종류의 소림사 창조는 청나라 말기에서 민국시대 초기에까지 널리 읽혀진 무협 소설『소림연의(少林演義)』,『만년청(萬年靑)』과 『건륭황제유강남(乾隆皇帝遊江南)』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松田隆智, 1984: 63). 또 이는 반청복명(反淸復明)을 내세운 천지회(天地會 : 三合會, 洪門, 哥老會)의 기원이 되었고, 남파 소림의 대문파인 홍가권, 호학쌍형권((虎鶴双形拳), 공자복호권(工字伏虎拳), 철선권(鐵扇拳)은 청나라 때의 복건성에서 차(茶)를 팔던 홍희관(洪熙官)과 방세옥(方世玉)이 지선선사(至善禪師)와 방영춘(方永春)에게 권법을 배워서 창시했다는 등 남파 소림의 창시자는 대개 반청복명, 비밀 결사, 손문(孫文) 등과 연관이 있다. 이렇게 무술 역사상 가장 큰 전환기가 되는 시기에 『소림권술비결((少林拳術秘訣)』, 『소림종법도설(少林宗法圖設)』등이 나타난다. 물론 각원상인(覺遠上人), 일관선사(一貫禪師), 백옥봉(白玉峰) 등의 소림권의 명인에 관한 역사적 근거는 없다. 이들은 하남성 숭산의 소림 무술이라기 보다는 남파 소림의 창시와 연관이 깊다. 남파 소림이라는 광동 지방, 복건성 지방의 무술로는 홍가권(洪家拳), 오조권(五祖拳), 백학권(白鶴拳), 남파 나한권(南派羅漢拳), 구권(狗拳), 채가권(蔡家拳), 불가권(佛家拳), 이가권(李家拳), 막가권(莫家拳), 유가권(劉家拳), 영춘권(永春拳), 영춘권(詠春拳), 남파 후권(猴拳), 달마권(達摩拳), 주가당랑권(朱家螳螂拳), 주가당랑권(周家螳螂拳) 등이 있다.
소림무술 창조의 전기(轉機)가 마련된 것은 청나라 초 반청 인사의 근거지가 된 소림사가 불탄 이후 복건성에 남소림사를 세우고 무술을 전파했다는 시기이다. 『신편소람사지(新編笑覽四肢)』, 『중국무술사전(中國武術事典)』,『중국대백과전서(中國大百科典書)』류의 책을 보아도 ’몇 번 증수한 적은 있지만 정부에서 불을 질렀다‘는 기사는 발견되지 않았다. 여러 서적을 대조해 보면 1980년 중반 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나온 서적들은 이런 중국의 주장을 그대로 추종하는 면이 보인다(한병철, 한병기, 2008: 45).
또한 소림사와 연관된 창조는 중국 비밀 결사의 일종인 천지회(天地會)이다. 그 기원은 청나라의 강희(康熙, 1661∼1722) 연간으로 올리고 있다. 김용의 소설 ‘녹정기’는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천지회(天地會) 총타주 진근남이 나오고, 천지회는 반청복명(反淸複明)의 인사들이 모인 곳이라는 데, 천지회는 영어로 Triad로 번역되며, 이것이 역으로 번역되어 삼합회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근자의 연구에서 천지회의 기원도 18세기 중반∼19세기의 일이고, 결성 동기도 반청복명(反淸複明)과는 거리가 있다고 하며, 남소림사의 이야기는 당시의 지방지를 보더라도 찾을 수 없다(한병철, 한병기, 2008: 44)고 하였다. 어쨌든 청조 초년에 각지에서 잇따라 반청을 목표로 한 많은 비밀 조직―천지회(天地會), 백연교(白蓮敎), 천리교(天理敎), 팔괘교(八卦敎), 청홍방(靑洪帮) 가노회(哥老會) 등 강호(江湖)―이 있었다. 이런 조직 대다수는 노고대중, 농촌의 빈 고농을 기본적인 대중으로 하였는데, 조직의 수단은 무술 연습을 하거나 병을 치료하며 호상을 돕는다는 방식이었다(정삼현 역, 2007: 336). 실제로 기공 수련과 질병 치료, 무술 훈련 등 실용적 필요성 때문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이운자, 2005: 56)
달마대사가 만들었다는 소림『역근경(易筋經)』은 오경재(吳敬梓)가 지은 1750년경 소설 『유림외사(儒林外史)』에 ‘역근경’이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무술사가 당호(唐豪)는 ‘역근경’을 도교 계열의 양생법으로 추정하며, 자신이 모은 판본은 모두 1800년대 것이라고 하였다. 『역근경』이 달마대사 시조설로 된 것은 『역근경』의 서문을 쓴 이정(李靖)에 의해 유래한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이정의 논병(論兵)을 수록하여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라 하였고 달마가 전했다는 『역근경』의 서문을 이정의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당의 정관(貞觀) 2년(서기 628)의 일이다. 즉 ‘이 책은 달마대사의 유작이며 소림사 권법 원전(原典)이다’라고 했는데 『역근경』이라는 책은 모두 청나라 후기(1800년 이후)에 만들어 졌으며 가장 오래된 것이 청의 도광(道光) 3년(서기 1827)에 출판된 것이다. 서문에 나타난 날짜와는 천이백년의 차이가 난다. 그러나 중국 권법 연구가 당호(唐豪)는『역근경』『세수경』의 두 권은, 청나라 시대에 성문화되어진 것이라고 판단되는 연구를 몇 가지 발표하여, 이것을 부정하고 있다(松田陸智, 1979: 85).
1985년 등소평(登小平)을 비롯하여 조자양, 호효방 같은 당시 중국 최고의 실권자들이 폐허화된 이 절(少林寺)을 방문하고 재건과 무술의 복원에 열의를 보였다. 이에 따라 무술 고승인 소희 스님 등 80여명이, 명맥이 끊어지다시피 한 소림 무술의 가닥을 새로 잡고 발굴해서 정리하기 시작했다. 현재의 소림 무술은 등봉현 체육운동위원회의 소림 무술 보전 정리반에서 옛날의 권보를 찾아 복원, 보존하는 노력을 하고 있으며 소림무술 체육학교를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소림쿵푸’ 등 중화인민공화국 정책적 장려 종목 외에 대부분의 무술들이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고 보편화되어 있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문광부 중국무술조사단(2006)’의 일환으로 당랑권의 고장인 산동성을 방문 조사한 결과 전체의 무술 도장은 600개에 지나지 않았고, 전체 무술 인구는 10만으로 무술학교 형태로 개설되고 있었다. 청도(淸道)의 경우 태극당랑권 도장이 불과 4개밖에 되지 않고 소수의 전수자만이 행하고 있었다(류병관, 2006: 49)고 하였다.
청나라 이후 소림과 함께 무수히 많은 문파의 무술이 창시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문파들도 청나라 초기를 기점으로 하여 일어나고 있는데, 그 시대의 혼란기를 나타내는 일종의 몸부림으로 청나라에 대항하는 일종의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Ⅲ. 중국의 소림무술
중국 소림무술을 알아보기 위하여 소림무술의 시원(始原)이 되는 소림오권과 오전권, 오형권을 중심으로 문헌을 조사하여 분석하였다.
후한의 화타(華陀)가 창시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는 건강체조에 ‘오금지희’가 있다. 달마대사가 창시했다고 자칭하는 소림계 권법은, 이 ‘오금지희’를 모델로 하여 용권(龍拳)․호권(虎拳)․표권(豹拳)․사권(蛇拳)․학권(鶴拳)인 소림오권(少林五拳)이 만들어져 있다. 인체에는 정(精), 력(力), 기(氣), 골(骨), 신(神)이 있는데, 강한 체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이것을 주축으로 수련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권은 저마다 동물의 동작과 특징을 본 따서 고안한 것이며, 용권으로 신(神)을 단련하고 호권으로 골(骨)을 단련하며, 표권으로 힘(力)을 단련하고 사권으로 기(氣)를 학권으로 정(精)을 단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松田隆智, 1984: 62). 소림 내공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는 다섯 가지 형태의 동물 모양을 따른(허건식, 2001: 38) 연공법을 소림오권이라 한다. 역근경, 팔단금, 나한공 같이 호흡과 동작을 맞춘 일종의 고대 체조이다. 명나라 이후, 소림 문파는 이 소림오권을 연구와 개량을 가하여 발전시켰다. 소림오권이 처음 등장한 것은 청나라 말기의 존아재주인(尊我齋主人)이라는 사람에 의하여 저작된 『소림권술비결(少林拳術秘訣)』이라는 책으로, 상해 정무체육회의 노위창(盧煒昌)이 민국 초년에 산사성의 친구로부터 양도받은 것이다(松田隆智, 1984: 62). 이『소림권술비결((少林拳術秘訣)』의 내용에 다시 181식의 권법 그림을 덧붙인 『소림종법도설(少林宗法圖設)』이 있다. 『소림종법도설(少林宗法圖設)』 내용 가운데 권법 역사의 진전(眞傳)을 살펴보면, 달마대사는 나한십팔수라는 법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 법은 수백 년 뒤 각원대사(覺遠大師)에 의하여 72수 권법으로 발전되었고, 다시 백옥봉(白玉蜂), 추월선사(秋月禪師)의 가르침으로 백 칠십여 수의 권법을 제정했다. 그 권법을 백옥봉이 소림오권으로 완성시킨 것이다. 달마가 전한 선천나한십팔수(先天羅漢十八手)를 백옥봉이 정리하고 연구하여 128수로 하고 다시 오권으로 만들었다는 것인데, 서철동(徐哲東)은 책의 역사에 관한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실제로는 내공(內功)을 위한 동작이며, 남파 홍가권의 철선권과 그 맥을 같이하며 기법은 호남 상파(湘波) 소림권과 같다고 하였다(松田隆智, 1984: 62).
오형권(五形拳)의 내용은 용, 호, 표, 사, 학의 다섯 종류인데, 용권에도 몇 개의 형이 있으며, 학권에도 많은 종류가 있다. 또 복건 소림의 기법을 오형권이라 하는데, 홍가권이나 학권, 달마권, 태조권(南派) 등을 수련하는 사람들이 전하고 있다. 특히 오형권은 원전 중의 원전이라 하는데, 그 형태로 보아서는 남권(南拳)임에 틀림없다.
이상의 내용에서 오전권은 내용상 북파라 생각되며, 오전권을 제외한 오형권은 남파 소림의 여러 형태의 기법이 변형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어쨌든 오전권이나 오행권은 공격과 방어로 되어 있다. 따라서 명칭에 얽매이지 말고 자세, 수법의 공방, 퇴법, 신법, 보법 등을 분류하여 정리하면 그 근본을 나눌 수 있으며, 의미 없는 동작은 없다.
한편, 소림사의 나한십팔수는 소림의 명권사 이근생(李根生)이 전한 것이며 등봉현 체육위원회의 유진해, 왕서건 등이 발굴하고 전하고 있다. 무술적인 형태로, 소림 권술의 기초가 되는 투로의 하나이며 동작이 소박하고 투로가 간결하다. 소림사 나한십팔수는 간단한 지르기와 차기를 비롯하여 상단‧하단의 방어 등이 간결하게 조합되어 있으며 특히 헌원과오(軒轅跨虎), 긴나무자(緊哪武姿)는 불교적 특색을 보이는 자세로 보인다. 그리고 연자급수(燕子汲水)의 동작은 벽괘장(劈卦掌)의 오룡반타(烏龍盤打)와 쌍탁장(双托掌)의 동작을 연상하게 한다. 이는 무술과 관련 있는 양생술(養生術)과 권법 수행의 필수불가분의 연경단련법(軟硬鍛鍊法)으로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소림 쿵푸’의 의미는 소림사의 무술에 쿵푸의 의미, 즉 많은 문파의 권술과 기계술에 대한 총칭으로, ‘소림무술’이라는 말은 쿵푸, 그 의미를 더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소림 무술’의 역사성이 어떠하든 간에 현재 ’소림 쿵푸‘는 중국의 무술을 대변하는 가장 보편적인 무술임에 틀림이 없다. 소림사는 선종(禪宗)의 시찰(始刹)이기 때문에 소림무술이 일반적으로 수양의 한 방편임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하다(류병관, 2006: 50). 따라서 소림사가 소림무술의 수련에 있어서 강조하는 ’권선여일(拳禪如一)‘, 역애불이(力愛不二)’, ‘주수종공(主守從功)’, ‘계제살염(戒除殺念)‘의 사상들은 단순이 무술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소림권이 심신 수행의 목적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류병관, 2006: 50).
Ⅳ. 결론
중국무술(中國武術)은 산, 바다, 강, 들판과 같은 자연을 상징하는 모습들과 호랑이, 원숭이 학, 뱀, 곰들의 움직임을 상징하는 동물들의 모습들이 담겨져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중국의 역사에서 신화적 의사로 거론되는 화타가 동물(動物)들의 모습을 본 떠 인간의 건강 체조를 만들었으며, 이것이 발전되어 무술(武術)의 한 형태가 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이정학, 2008: 40).
이 연구는 중국 소림무술 대한 허(虛)와 실(實)을 찾아 소림무술에 대한 철학적‧역사적으로 이해하는 데 목적이 있다. 본 연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소림사와 소림무술을 전설의 소림무술, 부활의 소림무술, 창조의 소림무술로 가설을 설정하여 고찰하였으며, 소림무술의 시원이 되는 소림오권과 오전권, 오형권을 중심으로 문헌을 조사하여 분석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현재 소림무술로 나누는 무술이 전부 소림사 안에서 소림 승에 의하여 전승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소림무술은 하남성 등봉현 일대에서 민간인 사이에 전해진 권법 등이 소림무술로 분류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현재 전해지는 각종의 투로는 고전의 내용을 발굴, 정리하여 보급되고 있는 것이다.
선종(禪宗)은 불교 수행 방법 중의 하나이다. 중국 불교 선종 초조 달마대사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내공을 쌓고 체력을 다지는 건신법인 요병 체조술(yoga)이 소림사에서 전승되었을 것으로 본다.
둘째, 소림무술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종류의 문파나 기법의 장점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어 끊임없이 발전하였으며, 많은 문파(門派)의 맨손기술과 기계기술(器械技術)에 대한 총칭으로 소림무술이라 한다.
셋째, 명나라 이후, 소림 문파는 건강체조인 ‘오금지희’를 모델로 하여 소림오권을 연구하고 개량하여 발전시켰다. 소림무술의 기본이 되는 오전권이나 오형권은 공격과 방어로 되어 있으며, 자세, 수법의 공방, 퇴법, 신법, 보법 등을 분류하여 정리하면 그 근본을 알 수 있다.
이상의 결론에서 살펴보면, 무술은 어떠한 이론적 원리보다는 자기 자신을 지키고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한 격투 기술의 일환(박기동, 김용수, 2010: 53)으로써 몸을 통해 체험된 실제적 경험이 중요시되면서 발달해왔다. 따라서 중국무술 또한 근본적으로 격투술이며 자연적 존재로서 인간의 생산활동, 전쟁, 종교, 오락, 교육 등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필요로 했던 것이라 설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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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ruth and falsehood of Shaolin Martial Arts in China
Kim, Yong-Soo(Kangwon University)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understand Shaolin Martial Arts related to Shaolin Temple historically and philosophically by examining the truth and falsehood of Shaolin Martial Arts in China. To accomplish the intended purpose, the research is progressed after the hypothesis is set up that there are Shaolin Martial Arts of legend, of revival and of creation. Also, the documents are researched and analyzed centering on Shaolin Five Martial Arts of Fists, which are the beginning of martial arts of fists, Ojenkwon and Ohyoungkwon. The contents are as follows. First, all of current Shaolin Martial Arts classified as Shaolin Martial Arts are not handed down by monks in Shaolin Temple. Martial arts, which were passed down by civilians around Deungbonghyun and Henansung, should be classified as Shaolin Martial Arts. All kinds of fighting methods in the present have been popularized through discovering and organizing the contents of old documents. If the existence of Dharma, who is the father of the Zen Buddism, is approved, yoga, which is the method of building up a lot of qi and physical strength and healing diseases is thought to have been passed down from Shaolin Temple. Second, influenced by many kinds of factions or skills, Shaolin Martial Arts were developed constantly by adding new things to itself. Therefore, many kinds of unarmed martial arts and martial arts with weapon are generally called Shaolin Martial Arts. Third, after Ming, Shaolin Five Martial Arts of Fists in Shaolin Faction were improved and developed by modeling 'Ogeumjihe', which is gymnastics for health. Ojeonkwon and Ohyoungkwon, which are basics of Shaolin Martial Arts, consist of offense skills and defense skills. Its root can be traced by classifying and organizing the postures, fighting skills, walking, retreating and protecting methods and so on.
※ Key words: Shaolin Martial Arts in China, truth and falsehood, unarmed martial arts, martial arts with weapons
*논문접수일자: 2010년 10월 15일
논문심사일자: 2010년 12월 01일
게제확정일자: 2010년 12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