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케돈 공의회는 에우티케스의 단성설을 단죄하고 '한 위격 안의 두 본성'에 관한 교리 정식을 확정했다. 사진은 미국 미주리 주 컨셉션 수도원 대성당에 있는 19세기 벽화 '예수 탄생.' 【CNS】
칼케돈 공의회 신앙고백문
여기서 칼케돈 공의회에서 통과시킨 신앙고백문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칼케돈 공의회의 가장 중요한 성과가 바로 이 신앙고백문일 뿐 아니라 이 고백문은 그리스도 신앙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핵심 교리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칼케돈 신앙 정식(신경)'으로 알려져 있는 이 신앙고백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니케아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그리고 에페소 공의회를 언급하면서 신앙고백문이 이들 공의회와 같은 노선에 있음을 밝히면서 이 공의회 신경들을 고백합니다.
둘째 부분은 에페소 공의회에서 단죄받은 네스토리우스주의(예수의 인성을 지나치게 강조해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불러서는 안된다는 주장)를 다시 단죄하면서 칼케돈 공의회의 도화선이 된 에우티케스주의(천주 성자의 신성이 예수의 인성을 흡수해서 신성만 남았다는 주장)를 단죄합니다.
셋째 부분은 신앙고백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본성에 관한 핵심 교리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셋째 부분의 핵심 대목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교부들을 따라 우리는 모두 한 목소리로 고백하라고 가르친다. 한 분이시며 동일하신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서도 완전하시고 인성에서도 완전하시며, 참 하느님이고 이성적 영혼과 육신으로 이뤄진 참 사람이시다.
신성으로는 성부와 동일본질(homousios)이시고 인성으로는 우리와 동일본질이시니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시다. 신성으로는 모든 세대에 앞서 성부에게서 나셨고 인성으로는 이 마지막 날에 우리와 우리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
우리는 고백한다. 한 분이시며 동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독생자이신 성자는 두 본성이 섞이지도(혼합) 바뀌지도(변화) 않으며, 나뉘지도(구분) 갈리지도(분리) 않으신다.
두 본성의 구별은 두 본성의 결합으로 결코 없어지지 않았으며, 두 본성이 하나의 인격(프로소폰, προσωπον)과 하나의 위격(휘포스타시스, hypostasis) 안에 결합되면서 각각의 속성이 보존됐다.
두 위격으로 분할되거나 구분되지 않으시는 그분은 한 분이시며 동일하신 독생자, 하느님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는 예전에는 예언자들이 그리고 나중에는 예수 그리스도 친히 그분에 관해 가르쳐주신 바이며, 교부들의 신경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바다."
칼케돈 공의회의 이 신경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느님이시고 참 사람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성으로는 하느님 아버지 곧 성부와 본질이 같고, 인성으로는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본질을 지니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이 되신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결합했지만 그 이후에도 신성과 인성은 섞이거나 변하거나 나뉘거나 갈라지지 않고 그 고유한 속성을 하나의 위격 안에서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인격 또는 위격을 나타내는 용어 프로소폰(인격 또는 위격)을 사용하면서 같은 의미로 휘포스타시스(위격 또는 실체)를 다시 한 번 사용함으로써, 공의회는 오해 소지를 없애고 '한 위격 안의 두 본성'교리를 확정한 것입니다. 공의회 결과 및 의의
공의회 교부들은 교황 특사 편에 보낸 서한을 통해 교황 레오 1세에게 공의회 교령들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마르키아누스 황제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나톨리우스도 각각 교황에게 편지를 써보냅니다. 하지만 레오 1세 교황은 공의회가 통과시킨 교회법 규정 제28조에 대해 강력히 반발합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로마에 이어 서열 2위로 격상시킨 이 조항은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를 각각 서열 2, 3위로 보는 로마의 입장과 니케아 공의회 교령에 위배된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한동안 공의회 결정을 승인하지 않던 레오 1세 교황은 453년 3월 21일자로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에게 서한을 보내 신앙과 관련된 문제들에 한해서만 칼케돈 공의회 교령들을 승인한다고 발표합니다. 말하자면 교회 법적 규정 제28조에 대해서는 승인을 거부한 것입니다.
이미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때에 교회법적 규정 제3조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로마 다음 가는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로마 교회의 반발을 산 적이 있었는데, 칼케돈 공의회 결정으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로스의 갈등 국면이 더욱 심화된 것입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이런 갈등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깊어집니다.
동로마제국 황제 마르키아누스는 이에 앞서 452년에 여러 차례 칙령을 발표해 칼케돈 공의회 교령들을 승인하고, 신앙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토론을 금지시켰습니다.
아울러 에우티케스에게는 성직을 박탈하고 추방했으며, 그의 서적들을 불태우도록 했습니다. 에우티케스는 얼마 후 사망했으며, 공의회에서 단죄된 디오스코루스는 강그라에서 지내다가 454년에 사망합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좌의 권위를 격상시킨 교회법적 규정 제28조로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갈등은 깊어졌지만, 칼케돈 공의회는 '한 위격 안에서 두 본성의 결합'이라는 신앙 정식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교리를 확정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의의를 지니는 공의회로 평가됩니다.
나아가 칼케돈 공의회는 니케아 공의회(325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 신경들을 비롯해 제3차 세계공의회인 에페소공의회에서 인정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치릴로의 편지 내용과 레오 1세 교황의 '교리 서한' 내용을 신앙고백문에 포함시킴으로써 앞선 공의회와의 일치와 계승이라는 성격을 지닙니다.
이를 통해 이 네 공의회가 세계공의회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도 칼케돈 공의회의 의의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한 세기 반이 지난 후 교황 그레고리오 1세(재위 590~604)는 이 네 공의회가 네 복음서에 해당하는 권위를 지닌다고 밝혔습니다.
칼케돈 공의회가 '한 위격 안의 두 본성'이라는 신앙 정식을 통해 에우티케스의 단성설을 단죄하고 그리스도론과 관련한 교리를 확정했다고 하지만 교리 논쟁이나 이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칼케돈 공의회의 교리 정식에 못마땅해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공의회의 '두 본성'이라는 표현이 반대파인 네스토리우스의 '두 본성'과 비슷하다고 보면서 단성설을 계속 내세운 이들이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중심으로 여전히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첫댓글 오늘날 당연하게 생각 했던 것들이 공의회 소집으로 '하나의 위격에 두 본성'교리가 확정 된거네요.
좋은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