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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장인이셨던 고 박병학목사님의 회고록입니다. 읽어보시면 은혜 받을 것입니다.
(사진: 저자 박병학목사님, 방윤아 사모님)
박병학 목사 인생 회고록
“석양의 나그네 길”
목 차
1.소시의 성장-3
2.부친의 친필 설교와 순천성경학원 진급증서-4
3.보통학교 시절-5
4.가사 돕기와 피난 생활-6
5.징용과 해방-6
6.공무원 10년 생활기-9
7.여순 사변(여수 순천 반란 사건)과 6.25동란-11
8.도주행각-14
9.6.25동란 후 공직생활 마감까지-16
10.목회 길로 나선 나의 심령-18
11.신학교 진학생활-21
12.기도 중 영감받았습니다-24
13.비봉 박병학 목사님 연표-30
1.소시(少時)의 성장(成長)
1)저의 부친께서 처음 믿게 됨과 봉서 교회가 태동함
저의 부친께서는 일찍이 “밀양박씨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과 정부인(貞夫人)의 장남으로 태생하여 일본이 한국에 침략 전부터 공직과 군수부에 충성하다가 1918년부터 1923년까지 6년간 저의 조부께서 중병으로 계실 때 저의 부친께서 간호하실 때 철저한 미신 숭배 생활을 하였고 현재 저의 형 박병식 장로 위로 두 아들이 죽고 할아버지께서도 돌아가시자 큰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때가 1924년 5월 경 목영석씨(후일 목사가 됨)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저의 부친께서는 당시 봉서리 어른으로 당시 동아일보를 받아 보신 분은 저의 부친뿐이었기에 부락민들에게 존경을 받았고 당시 매약상의 자격증을 받아 부락민의 생명을 지켰던 어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존경받는 어른께서 예수를 믿고 나면서 동민에게 전도를 하니 남녀는 물론이요 어린 아이들까지 다 믿게 되었는데 주일이 되면 십리 길 되는 당시 개척교회였던 관리교회로 출석하고 밤예배는 저희 집에서 모였는데 부락민 거의 전체가 출석했다고 합니다.
1924년 가을부터 가칭 ‘봉서개척교회’라 칭하고 저희 집에서 모였고, 그러나 주일 낮예배는 관리교회로 몇 년간 다녔다고 합니다. 그후 저의 부친은 1926년 봄철에 집사로 임명받고 1930년에는 영수(현재 안수집사)로 투표 당선되어 봉사하시다가 1939년 장로 장립을 받게 되었습니다.
2)저의 어렸을 때 신앙생활
(1)새벽기도 훈련
제가 철이 들기 시작한 여섯 살 때 저의 아버지께서는 봉서교회를 개척설립하셨습니다. 또한 열렬한 신앙생활에 따른 “주일성수”와 “새벽기도”, “조력회” 등에 참석하는 철저한 규범에 따라 자랐습니다.
저희 새로 지은 새집 상점방(商店房)에서 아버지와 형님과 제가 잘 때 초저녁에는 아버지께서 예수님 탄생 이야기와 물위로 걸었다는 이야기,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는 이야기, 빌라도 법정에서 고통 당한 이야기, 골고다 십자가에서 죽었다 삼일 만에 살아나셨고 사십일 후 하늘로 승천하셨다는 예수님 이야기와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요셉, 다윗 이야기 등 밤마다 그 이야기에 너무 너무 즐거웠으나 새벽 4시만 되면 아무리 추운날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버지께서 깨우면 짜증이 나고 괴로웠으나 비봉산 중턱에 있는 초가 예배당에 삼부자가 먼저 들어섰고 새벽 종치는 일은 어린 나의 책임이었습니다. 삼부자가 추운 예배당에 엎드려 기도한다고 했으나 철부지한 어린 저희들은 어떻게 짜증이 났는지 모릅니다.
(2)예배참석
새벽 4시에 예배당에 들어서 기도하고 있다 보면 농촌에서 피곤에 지친 몇몇 여집사들이 나와서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그들의 정성을 나의 하나님께서 받으신 줄 믿습니다. 아버지의 지루한 설교가 끝나고 나면 보통 아침 6시가 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가정에서 빼 놓치 못할 초보적인 신앙 훈련인가 봅니다.
(3)주일 성수의 하루
철이든 6세 때부터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돌아오면 저희 어머니께서는 온 가족에게 세탁한 새 옷을 입혔고 저는 주일학교에 먼저 가서 종치는 일과 친구 인도하라는 주일학교 선생님 말씀에 따라 친구를 찾아서 꼭 한 사람씩 인도했고 인도해서 출석 때 등록하면 선생님께서 주시는 “꽃 패”를 받는 것이 그리도 기뻤습니다. 다섯 사람을 인도하면 그날은 “꽃 패” 다섯 장을 받았습니다.
주일학교 시간에는 예수님 이야기, 구약의 유명한 신앙의 선진들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매우 기쁜 시간이었습니다. 또 분반 공부시간에는 문답식 공부를 하는데 남들보다 많은 대답을 할 수 있어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독특한 신앙인이어서 주일학교를 마치고 나면 장년 주일학교 공과공부에 참석케 하였고 이어서 장년 정식 예배까지 참석케 하여 마치고 나면 오후 1시가 넘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점심을 먹고 나면 오후 2시 30분부터 믿는 가정마다 돌아가면서 조력회 예배에 참석했고 오후 4시에 조력회를 마치고 나면 오후 6시까지 조력회 회원들과 함께 집집마다 심방했습니다. 오후 7시가 되면 저녁밥을 먹고 틀림없는 밤 예배에 참석할 뿐 아니라 종치는 일을 맡았기 때문에 제일 먼저 참석하였습니다.
2.부친의 친필 설교와 순천성경학원 진급증서
3.보통학교 시절
내가 다니던 당시학교는 보통학교였습니다. 저의 고향 전남 고흥군 도양면 봉서리에서 4km 떨어진 곳에 있는 당시 면소재지인 관리에 도양보통학교가 있었고 그 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일제시대인지라 교장은 물론 일본 사람이었고 선생도 일본 선생이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 내가 2학년 때 1935년에 일지사변이 일어났고, 4학년 때 1938년에 대동아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제가 재학 시절에는 신사참배, 동방요배, 일어전용, 창씨개명 등으로 우리 한 민족에게 최대 박해가 극심한 때였습니다. 일본 나라에 4대 명절이 있었으니 첫째 원년(元年) 1월 1-1월 3일, 둘째 기원절(紀元節)-2월 11일, 셋째 천장절(天長節)-4월 29일 넷째 명치절(明治節)-11월 3일이었습니다. 이 절기가 주일이 되면 전교생이 등교해야 했고 학교에서는 기념식을 마치고 녹동항 시내 동산에 있는 신사당에 가서 신사참배를 마치고 해산했습니다.
주일날이 명절이 되어 기념식에 불참한 학생 몇 사람이 있었으니 이들은 예수 믿는 학생들이었습니다. 저들은 다음 월요일 날은 매 맞고 체벌 당할 준비를 단단히 하고 등교하여 많은 매를 맞고 종일 단에 올려놓고 아침부터 종일 두 손을 들고 체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기뻤습니다. 그때에 우리 교회 담임이신 오석주 목사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설교하실 때마다 이 세상에서 예수로 인하여 맞는 매는 하나는 하늘나라에서 면류관에 빛난 보석 한 알씩 달리는 법이니 많이 맞으면 많이 달린다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 저들은 매를 때리면 속으로 하나, 둘, 셋 하고 세기도 하고 집에 돌아오면서 오늘 나는 면류관에 보석 20개를 달게 되었다며 자랑도 했습니다.
저의 부친과 오석주 목사님과 목영석 장로님과 고광채 장로님 등은 학교에 여러 번 호출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보통학교 5학년 1학기를 마치고 자퇴했고 집에서 형님과 가사를 돕는 농부가 되었습니다.
4.가사 돕기와 피난 생활
나는 12세에 보통학교 5학년 1학기를 마치고 자퇴했고 형님은 14살에 보통학교를 졸업했고 두 형제는 최선을 다하여 대 농가의 논과 밭과 바다에 김(해태) 채취 등 농군으로 농사짓기에 힘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동아 전쟁은 격렬해질 뿐 아니라 일본군이 계속 패전과 후퇴되어 일본 경찰들은 우리 믿는 성도들을 미국 선교사들의 비밀 스파이 즉 간첩 질한다고 교회 박멸운동은 시작 되었고 특히 목사 장로는 무조건 감옥에 감금하기에 열심 했습니다.
도양지서(당시에는 도양주재소) 순사들은 매일같이 저의 아버지를 잡아 가기도 하고 저의 형님은 군인에 지원시키라고 협박하면서 저의 형님을 억지로 지원시켜 전쟁 일선에서 미군들에게 총살당해야 미국과 원수가 될 것이라 하면서 심한 협박과 고통을 주었습니다. 오석주 목사님은 순천노회가 신사참배를 하지 않기로 가결하였는데 즉시 체포되어 투옥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도 주일 낮 설교도 못하게 하지요 형님을 더 이상 보호할 수 없고 기독교 박해는 더욱 심하여 1942년 여름에 전남 영암군 삼호면 삼포리 영호정부락 황도란 곳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습니다.
많은 논과 밭과 산판과 바다에 해태 양식장 권리권 등을 다 팔아서 갔으나 그 많은 재산은 다 탕진하고 형님은 그곳에서 징병 당해서 군에 입영했고 나는 징용당하여 일본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 가정이 흉년을 참지 못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의지하지 못하고 가족을 거느리고 가산을 등에 메고 모압 땅으로 갔다가 가산 탕진 당하고 두 아들 잃어버리고 자신도 죽고 말았으니 노파 할머니 나오미는 빈털터리로 고국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옴같이 저희 아버지께서도 재산을 다 탕진하고 아버지의 손발 같은 두 아들을 다 잃어버리고 어린 자식들을 앞세우고 고향에 돌아갔으니 통곡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5.징용과 해방
1945년 2월 어느 날 아침 식사 중에 있는데 영암군 삼호면 면서기 김종대 씨가 갑자기 저희 집 방문을 열더니 붉은 영장을 내보이며 나에게 일본으로 갈 영장이 나왔으니 지금 자기와 함께 출발해야 한다면서 밥상을 밀치고 나를 죄인 체포 하듯 끌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은 유난히도 외롭고 쓸쓸한 아침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형님은 고향에 다니러 가고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만 있었는데 갑자기 끌고 나서니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이 대성통곡하면서 삼호면 사무실까지 울면서 따라왔습니다. 면서기 김종대씨는 나를 앞세우고 발걸음을 재촉하였는데 마치 심청이를 앞세우고 재촉한 뱃사공들과 방불했습니다. 삼호면 사무실에 들어서니 울음바다였습니다. 그곳에 12명이 잡혀왔는데 그 즉시 영암군으로 보내졌고 영암군 각 면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모두 87명이었습니다.
이 87명의 징용대원은 운명을 함께한 나라를 잃고 끌려간 이스라엘 민족의 포로와도 같이 어린 소년들이었습니다. 군에 끌려온 87명 중에서 대장과 부대장을 뽑는데 제가 대장으로 뽑혔고 부대장은 학산면에서 잡혀온 이 씨인데 이 사람은 일본에 있다 폭격이 너무 심해서 귀국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도피하는 요령을 잘 알고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나는 일본 사정과 경험 없는 철없는 어린 마음으로 다만 전쟁이 극심한 때라 일본에 가면 죽는다는 것이 상식이요 매일 B29의 미국 전투기의 폭격으로 일본은 화염에 쌓인 일본을 생각하면서 나는 영암군청에 대장이 될 때 마음속으로 결심했습니다. 일본 시모노세끼에 상육 즉시 도피하리라 했으나 실상 일본 시모노세끼에 도착해보니 삼엄한 경계에 기회를 얻지 못하고 그날 오후 7시경에 기차에 몸을 싣고 새벽 2시에 오가야마 갠 구라사기 시에서 하차하여 도선을 타고 무기시마 조선소에 입사했습니다. 그날 밤은 계속 비가 내렸습니다.
1)중대장이 됨과 도피할 수 있는 기회
조선소에 와서 보니 큰 학교였습니다. 삼층건물 3동이 있는데 각동마다 일층에 교실 열칸이 있고 2층도 3층도 교실이 열 칸씩 있었습니다. 한 교실에 10명씩 배치되었고 이 1 교실을 1 소대라 했으며 각 층마다 중대가 된 것입니다.학교 한 동에 1 연대가 있음으로 건물이 3동이므로 3 연대가 있었고 이 3 연대가 연합하여 1개 부대를 이루게 되었고 각 층 첫 교실은 중대장실과 대대장실이 있었습니다. 이곳에 수용된 한국의 어린 소년들은 징용으로 끌려온 어린 애들이었습니다.
나는 2층에 3소대를 맡은 2 중대장이 될 수 있었는데 영암군에서 잡혀온 징용자 87명 전원이 이곳 수용소까지 입소되었다하여 중대장에 임명되었습니다.
전라남도 각 군에서 잡혀서 관여 연락선 속에서 함께 입소한 각 군 수용된 어린 소년들은 각 소대에 분산 수용되었습니다.
나는 이미 여수 수용소에 집합하여 관여 연락선을 기다린 때 15일간 수용되어 있을 때 영암군에 부대장은 저에게 일본에 가면 도피하자는 제의를 해 왔고 쾌히 승낙하였습니다. 이 부대장은 일본 지리(地理)를 잘 알고 도피 요령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에 징용된 많은 사람들이 도피는 하지만 대개 잡혀가게 되는데 지리를 모르고 도피 요령을 몰라서 잡혀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연락선 속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저와 부대장이 도피할 것이라는 눈치를 챈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런 사람은 저들 곁에서 떠나지 않고 따랐습니다.
2)도피와 은둔생활
저들이 무기시마 조선소에 입소한 그날 밤부터 계속 비가 와서 2일이 지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이제 저와 이씨가 운동장에 나서자 8명이 졸졸 따라왔다. 운동장 정문에 위병이 보더니 저의 중대장 완장을 보더니 묻지도 아니하여 무사히 통과했으나 도선장에 도착하여 헌병 두 사람에게 당장 걸렸으나 제가 앞에 나가서 지난 번 조선에서 징용자의 물건을 구입 차 구라시기에 간다면서 나의 부하 9인을 데리고 간다고 했더니 무사히 통과시켜 주었고 배를 타고 구라시기 시에 도착하면서부터는 도피해서 저와 이씨는 해군 본부가 있는 구례시로 가서 오모리 한바 즉 오모리 구미에 방공호를 파는 일을 했습니다. 이곳 미히라조는 해군 사령부가 있는데 이 사령부가 다 방공호 속에 있었고 이 방공호 속에는 폭탄제조소, 탄환제조소, 심지어 군함도 이 산속에 정박케 하였던 것을 보았습니다.
3)하나님은 나의 생명을 구원해 주셨음
일개월간 오모리 구미에 있다가 폭격이 너무 심해서 히로로 갔다가 히로에서 15일 즉 보름 간조(보름간 일한 것을 계산함)해 가지고 지난 번 있었던 오모리 구미 옆에 있는 미하라 구미에서 일하기로 하고 다음 날 아침에 미하라 구미 방공호 앞에 모여서 8명이 막 방공호 굴로 들어가려 할 때 저쪽해서 오모리씨가 삽을 들고 박병학 저놈 쳐 죽인다고 하면서 쫓아왔고 저는 그곳에서 피하여 미하라 주인집으로 돌아와서 피하여 있는데 오모리씨가 이 집에까지 와서 나를 찾다가 돌아갔는데 미하라 주인이 대성통곡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하는 말이 우리 일꾼 7명이 방공호 속에서 작업 중 어제 발파할 폭발물이 오늘 갑자가 폭발하여 작업 중인 인부 일곱 명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아 나의 하나님이 나를 살려서 목사로 쓰시려고 오모리씨를 시켜 내가 방공호로 들어가기 전에 나를 쫓았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 밤에 울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4)은둔생활 동안 하나님의 보호
1945년 이 때는 대동아 전쟁의 막바지인지라 일본 땅은 황폐되었고 특히 오가야마현과 히로시마현은 매일 아침 9시부터 10시까지는 규칙적으로 B29가 융단폭격을 퍼부었습니다. 히로시에 비행장이 있었는데 군비행장이었고 산을 넘으면 구례시에 해군 군항 항만이요, 해군 본영이 있었고 약 20Km 서쪽으로 가면 육군본부가 있는 히로시마가 있으니 이 지역은 완전히 초토화된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 시가지는 온통 비어 있었고 역마다 군마를 타고 감시하는 헌병과 경찰관들만 돌아다니고 늙은 할아버지나 할머니 젊은 여인들뿐이었고 청년들은 볼 수 없었습니다. 만약 젊은 사람이 있다면 징용자 중 기피자뿐인데 구례시에서 히로시로 다시 구례시로 도도리현 히노군 시여야마로 저의 친척집으로 활보하면서 다녔으나 경찰이나 헌병에게 한 번도 심문 당함이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임을 확실히 믿으면서 감사할 뿐입니다.
이런 위험과 고독 속에 잠길 때마다 나의 아버지께서 교훈해 주신 요셉의 일생기를 생각하면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5)8.15해방과 귀국(해방의 태풍 속에서 나를 구원해 주신 나의 하나님)
1945년 9월 10일 경 일보 도도갱 오촌 숙부 김자근 씨 댁에서 있다가 8.15 해방이 되고 귀국하게 되었는데 오촌 김자근씨께서 큰 배를 구입하여 한인 가족 약 50인을 싣고 요나고항 현재는 마쓰에시 시마네갱 현 갱죠쇼사이지인데 이곳 요나고시에서 출항시간이 오후 5시경 일본 연안을 감고 시모노세끼를 목적하고 항해를 시작하였는데 캄캄한 밤에 태풍이 불기 시작하고 비는 악수같이 내리고 파도는 큰 산 같이 몰아닥쳐 다 죽었다고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할 것 없이 대성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제 오촌은 선주로서 배 밑창에 울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 가족들을 부둥켜 앉고 함께 울면서 나더러 너희 숙모와 어린 동생들을 안심시켜 달라고 부탁하고 선장실로 갔고 저는 죽게 되니 진정한 기도가 나왔습니다. 유라굴로라는 풍랑 속에 바울의 기도를 들어 주신 우리 하나님은 장차 목사가 될 사람을 죽이지 않으려고 그 큰 태풍 속에서 하마다 항구에 간신히 입항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시기 위하여 배에 승선된 모든 사람들을 살려 주심을 또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3일이 지나서 하마다 항을 출항하여 센다이항에 도착했다가 당일 부산항에 도착했고 다음 날 여수항을 지나 녹동항 고향 땅에 돌아왔습니다.
6.공무원 10년 생활기
1946년 9월 9일 소록도 갱생원(나환자 수용시설) 감찰실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감찰원으로서 직원지대와 병사지대에 순찰과 사상범 감찰이 주 임무였습니다. 해방 후가 되어서 나환자 중에도 공산사상자가 병사지대에서도 활동했고 직원 중에도 좌익사상자가 내적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군정시절이었고 아직 우리나라 정부가 설립되지 않은 때인지라 국가적으로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나는 감찰실에 근무하면서 앞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것을 알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었습니다. 1947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되고 1947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초대 제헌 국회의원이 선출되어 국회가 조직되었습니다. 저는 정식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국가 공무원 5급 16호봉에 봉직되어 갱생원 후생과 복리계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48년 7월 30일 총무과 서무계로 이동발령을 받았습니다.
나는 당시 기독교 신자로서 주일이 되면 녹동교회나 봉서교회로 나가서 예배를 드리는 중 너무 불편하고 주일을 범하여 예배를 드리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때 직원 중에 4명의 신자가 있었는데 주일이 되면 괴로웠습니다.
1)나의 결혼
1948년 1월 5일 나는 방윤아씨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나는 당시 갱생원 감찰원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요 저의 처는 1945년에 소록도 갱생원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정식 간호원으로 의무과에 근무 중에 있었는데 그때 예수 믿는 간호원은 두 명이 있었는데 그 중 한 간호원이었습니다. 당시 의무과에 있는 문태식 의사가 적극적으로 아내에게 청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결혼 조건으로 첫째는 예수를 믿을 것, 둘째는 의사를 포기하고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될 것을 서약하면 결혼을 고려해보겠다고 했더니 문태식 선생은 다 허락하겠으니 결혼을 하자고 독촉하였습니다. 그때 제가 아내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나는 당시 감찰원으로 하급직원이요 의사와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단지 나는 장로의 아들이요, 모태신앙자니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누구를 더 사랑하고 인정하는가 하고 여러 번 생각 끝에 장로의 아들에게 시집가기로 결정했더니 일생 목사의 사모가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신앙적으로 선택한 것을 귀히 보시고 남편을 신학공부하게 하셔서 목사로 기름 부었으니 복 중에 복을 받은 사모가 되었답니다.
2)직원지대 교회 창립
직원 중에 기독교 신자가 4 사람이었는데 세 사람이 나에게 교회 설립을 제의하면서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원장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고등관 관사 한 동을 얻어 직원교회를 설립하게 되었고 초대 목사를 청빙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는 독신으로 모시기로 하고 고흥시찰에서 순천노회에 요청하여 강인수목사님께서 부임하시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부임하고 보니 직원교회(소록도 직원교회) 설립자로서 너무 기뻤습니다. 저는 직원 식량 배급 사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원장님께 사정하여 2인분(목사님과 식모)을 식량 배급키로 결정하고 목사님의 목회생활에 적극 협조했습니다.
교회는 날로 부흥하여 원장님도 교회 출석을 잘 하므로 약무계장, 감찰계장, 보육소장, 초등학교 교장, 직원 간부들도 출석하여 교회는 대 부흥이 되었습니다.
3)이근호 순경 돕기
이근호 순경은 녹동지서에 근무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순경의 부인이 위궤양으로 매일 투약해야 살아가는 처지였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저에게 와서 약을 타가야 함으로 저와 친절했고 저는 약국계장께 이야기 하여 무료로 매주 약을 얻어 투약했었습니다.
7. 여순 사변(여수 순천 반란 사건)과 6.25동란
이 두 사변은 대한민국에 치명적 대 사변이었으며 전국이 화염에 초토화가 되었고 수만의 인명이 죽음에 이르는 대 재난의 사변이었습니다.
1)여순 사변(여수 순천반란 사건)과 이근호 순경의 죽음과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나를 살려 주셨음
1948년 11월 어느 날 갑자기 여수 15연대가 반란을 일으켜 여수를 점령하고 순천까지 점령한 후 습격부대 일부가 고흥군을 습격하였고 녹동에서 지방 폭도와 합류하여 소록도에 들어왔는데 고흥군 경찰서장은 경찰관 전원을 거느리고 녹동에서 배를 타고 장흥군으로 도망했는데 이근호 순경은 자기 부인과 어린 아이를 데리고 저에게로 왔지요. 몇 시간 후에 반란군 습격부대장과 대원과 지방폭도가 소록도 사무본관에 들어와 전 직원을 모여 놓고 이곳 소록도 내에 검은 개 한 마리가 있으니 자기 집에 감춘 사람은 자수하라고 했고 일분 내에 자수하지 않으면 그 직원은 검은 개와 동일하게 처단하겠다고 했으나 나는 자수하지 않았습니다. 일 분이 지나니 박병학 나오라 하기로 나갔더니 사무본관 지붕으로 끌고 가서 지붕 끝에 세워놓고 대장이 총부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려고 하더니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다하면서 나를 데리고 내려와 이놈은 죽일 놈이 못 된다 하면서 내보냈고 이근호 순경은 체포되어 사형에 처형을 받았으니 우리 하나님 나의 하나님은 나를 아버지의 종으로 쓰시려고 사경에서 살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2)6.25 동란 때 나를 보호하신 나의 하나님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군대가 일시에 38선 전역에서 남한을 공격하여 단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계속 남하하여 전남 광주 지역이 점령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갱생원 원장은 우리는 전 직원이 갱생원을 사수하자 하면서 직원 한 사람도 이탈없이 뭉치면 산다하여 사수키로 했습니다(당시 보사부장이 소록도에 내려와 원장님과 약속을 함).
1>김정복 목사님께 도피권유
나는 이때 김정복 목사님을 찾아뵙고 목사님께 권면했습니다. 목사님은 나이가 많으신 노 목사님이어서 거동하기 불편한 목사님이었습니다. 나의 제의는 “목사님 저희 집에 채취선 배가 있으니 내가 식량을 싣고 내가 노를 저어서 나로도를 지나 붓돌 바다를 지나면 여수가 나오지요, 여수서 통영까지 사랑 바다를 지나 갱이 바다를 지나면 진해 앞 바다에 이르고 이곳을 지나면 부산에 도착합니다. 가는 뱃길을 제가 잘 아니 도피합시다.”라고 권유했더니 김목사님께서 “병학이 하나님께 영광의 면류관 받기 싫은가? 이런 좋은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내,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도록 단단히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서원하시게,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장중에 있지 공산당의 총부리에 있는 것은 아니내.”라고 말씀하셨고 이 말씀을 들을 때 나는 문득 여순반란 사건 때 생각이 나서 목사님 말씀이 “옳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자네는 이미 하나님께 체험해보지 않았나” 하시면서 참새 새끼 한 마리의 생명도 하나님께서 허락 없이는 죽지 않는 법이라고 교훈해주셨습니다.
2>김정복 목사님의 순교(殉敎)
김목사님의 사위는 공산당원으로 고훙군 내무서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당시 경찰서를 내무서라 불렀고, 지서를 분주소라 불렀음). 김목사님과 소록도 형무소장이 함께 잡혀 고흥으로 넘어갔는데 형무소장은 광주 형무소로 넘어가서 살았고 김목사님은 자기 사위가 고흥 내무서 감옥에 두었다가 뽑아내리라 하였다가 능력이 없었는지 자기도 도망하고 목사님은 감옥에 있다가 감옥에 있던 26명 전원이 총살을 당하여 김목사님도 그때 순교를 당하셨습니다.
3>나의 첫 번째 체포
1950년 8월 16일에 나는 녹동 분주소에 끌려가서 30일간 취조를 받았는데 나의 죄목은 8월 13일 주일 날 교인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기도 시간에 내가 기도하면서 태극기와 이승만 대통령 사진을 앞에 놓고 대한민국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했다고 목공 김홍근씨 동생이 거짓 밀고하여 많은 매를 맞고 14일 만에 풀려 나왔습니다.
4>두 번째 체포
1950년 9월 1일 또 잡으러 와서 체포되었고 녹동 분주소에 재차 수감되었다가 5일 후 새벽에 고흥 내무소로 압송당하여 형사계 기관반실에 수감되었습니다. 이 기관반실에는 모든 기관에서 근무한 공무원들만 따로 수용된 곳인데 2일에 지났는데 소록도 갱생원장 김상태씨와 감찰계장 최종원씨가 체포당해 이곳 기반반실에 함께 수감되었습니다.
1950년 9월 9일 오전 10시 기관반 내 형사(지방폭도였음)가 나를 꿇어 앉혀놓고 최조를 하였다. 첫 번째 질문으로 “이 세상을 누가 만들었나?” 나의 답은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였다. 두 번째 질문으로 “무엇으로 만드셨나?” 답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드셨습니다.” 세 번째 질문으로 “몇 날 동안에 만드셨나?” “6일 동안 만드셨다.” 네 번째 질문으로 “체 칠일에는 무엇을 하셨나?” “제 칠일은 안식일이니 그 날은 거룩하게 예배하는 날입니다.”라고 대답했더니 진짜 예수쟁이 왔다고 하면서 밖으로 나가더니 몽둥이 하나를 들고 와서 막 치려고 할 때 기관반장이 밖에서 막 들어오면서 동강면에 검은 개(경찰을 말함)가 나타났으니 지금 출동하라면서 출동시켰고 다음 날 무죄로 저를 석방시켰습니다. 9월 11일 석방시켜 주어 나왔으나 그날 취조당한 날 기관반실 안에는 소록도 원장과 감찰계장이 바로 곁에서 듣고 있다가 그 형사가 출동한 후 기관반장도 없는 순간 원장임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공산당원 앞에서 그렇게 말하면 죽는 법이네. 그러니 다음 취조 때 물을 때에는 세상을 누가 만들었냐하고 물으면 ‘아메바’로 시작하여 진화되어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어 사람이 되었다 하십시오.”하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5>세 번째 체포
1950년 9월 12일 다시 분주소에서 잡아가더니 자수서를 쓰라 하기에 자수서를 썼더니 소록도 갱생원 직원 19명을 끌어내더니 수갑 줄에 매여서 고흥군 정치보위부로 압송 당하여 도보로 가다가 풍양면 소재지에 있는 분주소로 끌고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북한에서 발령받고 넘어온 군위원장과 내무서장과 정치보위부장 등 간부들이 심각한 의논을 하다가 저희들 20명을 초등학교 뒷산으로 끌고 올라갔는데 이때 갱생원 직원 20명은 교도과장, 경리계장, 서무계장, 용도계장, 그 외 직원은 다 주사 급 각계 차석 급인데 전체 19명이 월남한 북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분들이 벌써 산에 가서 총살시킬 줄 알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고흥 정치부로 넘긴다고 해놓고 중간에서 처치할라 하느냐 하고 몸부림치면서 큰 소리로 울면서 소리를 지르니 부락민들이 몰려오고 보니 손에 쇠줄을 다 풀어 주면서 인솔자를 붙여 고흥정치부까지 데려가라 하며 놓아 주어 고흥 정치부에 갔더니 “자수서”를 쓴 나와 녹동 공씨 두 사람은 내일 9시까지 이곳으로 오라하고 나머지 18명은 월남한 북한 사람(갱생원 직원)은 어디론가 끌고 가고 나는 고흥 수반마을 저의 처형 집에서 자고 1950년 9월 13일 오전 9시에 정치부 취조실로 끌려가서 최조를 받았습니다.
6>취조 중 하나님의 보호하심
1950년 9월 13일 9시에 정치보위실로 끌려 들어갔는데 무조건 이놈 예수쟁이 왔구나 하고 구구식 총을 거꾸로 잡고 총 개머리판으로 치기 시작하여 계속 치는데 오전 9시부터 11시가 되도록 계속 매를 맞았습니다. 정치부원이 치다가 자신이 지쳐서 하는 말이 ‘이 놈 별난 놈이여 다른 놈은 1시간만도 쳐도 다 죽은데 이놈은 악종이구나.’하면서 더 힘을 내어 치는데 옆방에 있는 북한에서 내려왔던 군위원장이 들어오더니 ‘야 그만치라 그 놈 죽을 놈 아니구마.’하고 돌아간 후는 나 더려 ‘소리 내지 마라’하면서 개머리판으로 12시가 다 되기까지 그 총 개머리판이 쪼개져 떨어져 나가기까지 많은 매를 맞았으나 죽지 않으니 취조자가 지치기까지 했습니다. 12시에서 오후 2시까지 점을 먹고 오더니 내 몸은 땡땡 부었습니다. 오후 2시부터는 총대 손잡이 깨어져 나간 것(송곳같이 날카로운 것)끝으로 나의 등 뒤를 콕콕 찔러서 몸이 터지고 피투성이가 되고 조금 후에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때 거적 떼기에 싸서 대문 밖에 던져 살아났습니다.
그때 총대가 깨져 나가기까지 맞았으나 하나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또 집 다발을 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버석 버석할 뿐 총대는 내 몸에 살짝 댔다 떨어지고 다시 댔다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때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옛날 바울 사도가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으나 죽지 않고 살아났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했는데 하나님께서 훗날 목사로 쓸 내 아들의 생명을 내가 보호해주어야지 하고 살려주신 것을 목사가 된 후에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에게는 고난 중에도 보호하시고 지켜 주십니다. 로마서 8:17-18, 고후 13:4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신 내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를 반드시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8.도주행각
주검에서 살고 보니 보위부원들이 나를 끌어다 고흥읍 내 영광부잣집 대문간 앞으로 끌고 가서 그곳에 약 50명이 집합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함께 있게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금산면 오천교회 김상원 장로님을 만났는데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다 취조 받고 나온 사람들인데 오전 9시만 되면 각인 점호를 마치고 종일 있다가 오후 6시가 되면 집으로 돌려보냈다가 다음 날 오전 9시에 집합해야 한다면서 전쟁의 대세가 불리하면 일시에 총살시키려고 매일 점검하면서 집합시키고 지키고 있다는 것을 김상원 장로님께서 저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1)추석 명절과 귀가 명령
1950년 9월 18일이 추석날인데 9월 17일 오후 6시에 감시원이 오더니 3일간 추석 잘 세고 21일 오전 9시까지 이 장소에 전원 집합하라 명령하여 나는 곧 ‘수반마을’로 돌아와 나를 돌보고 있던 처와 간난 어린애를 등에 업고 고향집으로 돌아와 고흥읍에서 나의 큰 집까지는 16km 되는 시골길로 밤에 돌아오니 밤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눈물로 기도하고 있었답니다. 눈물로 상봉하고 그것에서 추석을 쇠고 2일이 지나고 9월 19일 오후에 고흥읍에 있는 수반마을 집에 도착했는데 이상한 예감이 돌았습니다. 고흥시내가 뒤숭숭하고 지방 유지나 공산당 두목들이 은신처로 도망간다는 정보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다음 날 20일 먼저 고흥읍을 살펴보기 위하여 아침 일찍이 읍내에 살고 계신 박집사님 집에 들렀더니 그것에 김상원 장로님도 계신데 이 집안에서는 라디오를 청취하면서 전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박집사님은 당시 국회부의장인 황성수 집의 관리인이었음). 박집사 부인을 채소장사의 모습으로 변장시켜 시내 정황을 살펴보라고 보냈는데 보고 와서 하는 말이 시내 거리마다 사람을 죽여 송장이 널려있고 공산당원들은 살기충천하여 사람을 끌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2)나의 형님께서 사투하여 나에게 뛰어왔음
1950년 9월 19일 오후 내가 고흥으로 출발 후 얼마 안 되어 녹동시내에는 공산당원들과 면위원장 분주소장 외에 부역자들이 발악하면서 분주소에 불을 놓고 민주주의에 속한 우방인을 찾으려 발악한다는 정보를 듣고 밤중에 내 형님께서는 아버지의 명령에 죽을 각오를 하고 새벽 4시에 집을 출발하여 가장 위험한 곳 두 곳(죽도 마을과 죽시 마을)을 지나면서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그곳을 통과하고 아침 6시경 수반 저의 처형 집으로 들렸는데 벌써 고흥읍 내 박집사댁으로 떠났다는 것입니다. 나의 형님은 박집사 집으로 간신히 왔다면서 속히 고흥읍을 벗어나야 산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언덕길로 고흥중학교 뒷산으로 피하여 산을 넘어 나의 처가로 피하였고 형님은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나는 처갓집 장 안에서 5일간 은신하고 있다가 정보에 의하면 녹동이 완전히 공산당원은 물러났고 민주주의 우방에 속한 지방 유지가 돌아왔다는 잘못된 정보를 듣고 고향 대봉마을 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돌아오고 보니 녹동에는 공산당 잔당들이 남아 나 같은 사람을 잡으러 날뛴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다시 도피 행각을 하게 되었는데 3일간 고통스럽게 지냈습니다.
3)아군의 녹동입항
1950년 9월 29일 오후 2시경 목포경찰서장 박형근 총경께서 부산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가는 도중 자기 고향인 녹동에 들렀다가 목포로 가려고 녹동에 들렸습니다. 그날 밤 갱생원 감찰계장과 나와 함께 박형근 서장과 함께 연회석에서 소록도 갱생원과 도양읍 내 일대 치안을 고흥경찰서원들이 도착할 때까지 치안을 맡게 해 달라 하였더니 1개 지서원을 남겨두고 가겠다고 하고 다음날 1개 지서원을 남겨 두고 떠났습니다.
4)소록도가 안정되기 까지
1950년 9월 30일 처음으로 총무과 서무계 나의 자리에 들어가서 자리 잡고 사무를 보고 있으나 사무본관 내는 쓸쓸하고 냉랭했습니다. 과거 동료들은 거의 다 도망쳤고 나와 함께 정치보위부로 끌려갔던 직원 18명 중 2명은(서무계장과 용도계장 두 형제) 총탄 부상을 입고 찾아왔고 나머지 직원 16명은 죽어 시체로 돌아왔습니다. 갱생원 원장께서 6000명 나환자들을 위하여 전 직원은 사수하자 그리고 뭉치면 살 것이요 흩어지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고 그처럼 조회 때마다 훈화했건마는 의무과 직원, 의사들, 간호원이 제일 먼저 폭도로 변했고, 총무과 직원 또 교도과 직원 보육소 직원, 선원, 목공 할 것 없이 서로 밀고하여 많은 직원들이 희생을 당하였습니다. 부역자들 중 간부들은 장흥군 방면으로 도주하였고 남은 부역자들은 그 얼굴들이 죽을상으로 출근했습니다. 고흥경찰서에서는 소록도 사무본관 내에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형사 두 명이 매일 같이 부역자 들을 잡아 고흥경찰서로 압송해 갔는데 몇 사람은 돌아오고 남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갱생원이 안정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지나서 수사본부가 철거한 후에 소록도 갱생원은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9. 6.25동란 후 공직생활 마감까지
1950년 12월 31일 이후로 1954년 11월 24일 면직되기까지 여러 우여 곡절을 당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역경 속에서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잘 섬기면서 감사해야 할 나는 신앙에서 탈선된 세상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1)동란을 겪고 난 후 공무원생활
1950년 11월부터 고흥군 단위로 정부 당국에서와 우익단체 모임이 있을 때마다 소록도 갱생원 대표자로 원장님께서 나를 추천해 주어 정보기관 또는 군부대 모임 등 여러 기관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2)서무계에서 활동
1950년 11월 1일부터 원장님께서 직접 원무 전반을 사무 담당케 하였습니다. 나에게는 사무 분량이 과중할 만큼 밤마다 12시가 넘기까지 특근을 하였습니다. 대략 사무담당사항을 보면 1>원무일지 정리 2> 과외에 속한 사항 3>식량배급사무 4>선박 입출항 사항 5>차량운행 사항 6>외래인 출입사항 7>구락부 운영 사항 8>관사배정사항 9>토지 배정사항 10> 원장실 외인 출입사항(총무과장의 특무사항) 등입니다. 단 인사사무에만 불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직무를 원장님께서 직접 명하였음으로 간섭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처럼 되고 보니 믿음이 떨어지고 믿음이 떨어지다 보니 교만이 싹트기 시작하였습니다. 잠언 18:12절 말씀에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 시94:2절에 “교만한 자에게 상당한 형벌이 따르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교회 출석도 제대로 못하고 담임목사님의 마음을 심히 아프게 하였습니다.
3)원장의 종교 탄압 공직 생활 마감
1954년 9월 어느 월요일 아침 조회시간에 원장 훈화 중 과격한 어조로 “종교란 공산당 조직보다 더욱 강력한 조직기관이며 기독교는 목사를 신격화로 섬기며 돈을 모금하는 데는 간교한 수법을 사용한다며 종교 탄압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날 즉시 보육소장 이은하 집사와 저와 두 사람이 원장실에 찾아가서 원장님께 항의했지요. 저들이 원장실에서 나온 후 강인수 목사님과 고대작 목사님께서 원장과 대 투쟁을 한 후 두 목사님은 순천노회에 보고를 하였고 즉시 순천노회는 임시노회가 소집되어 소록도 갱생원 종교탄압 전권위원회에 맡겨 처리하기로 하고 전권위원을 제헌국회 의원이신 오석주 목사님과 당시 국회 부의장이신 황성수 의원의 부친이신 황보익 목사님과 고흥시찰장이신 정규오 목사님 3인이 전권위원이 되었습니다. 당시 정부 조직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 장로님과 부통령 함태영 목사님과 보사부장관 최재유 장로님 사회부 총무과장 김득광 장로님이셨습니다.
4)갱생원 종교탄압 종결과 나의 결심
순천노회 전권위원은 즉시 이승만 대통령을 뵈옵고 소록도 갱생원 원장 종교탄압을 보고 하니 대통령께서 즉시 보사부장관을 불러 일주일 내에 갱생원장을 파면조치하고 즉시 감사위원을 파송하여 감사 조치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명령을 받은 보사부장관 최재유 장로님은 큰 근심에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국정감사 위원이 감사하면 소록도 갱생원 비행 사실이 들어날 것이 분명하고 다음에 보사부에 크게 책임추궁을 당할 것을 짐작한 최 장관은 즉시 부통령 함태영 목사님을 찾아가서 협의하고 부통령 함태영목사는 대통령 이승만 장로님께 찾아가서 종교탄압 문제는 내가 목사이니 내게 맡겨 달라 하여 승인을 받고 오석주 목사님과 함태영목사님은 너무 친절한 사이가 되어서 삼자가 합석하여(함태영부통령과 보사부장관 전권위원) 협의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1>대통령명령이신 국감 실시키로(국감 위원장은 황두현 장로님(순천노회)-황보익목사 친동생임)
2>현 갱생원장은 일 년 간 근무케 하고 일 년 후 자진 사퇴케 하기로함(보사부장관과 갱생원장은 평북 영변 사람임)
3>현 갱생원 과장, 계장, 차석까지 전원 파면키로
4>갱생원에 일반 직 중 관련이 있는 사람은 전원 자진 퇴직키로
이와 같은 협의를 하고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이은하 집사와 나만 알고 있었습니다. 이은하 집사는 오석주 목사님 사위요 나는 오목사님께서 이려서 우리 교회 담임목사였기에 잘 아는 처지였습니다.
당시 갱생원 내 그처럼 많던 직원성도들은 다 갱생원장 편이 되어 교회를 떠났으나 이은하 집사와 나와 박두남 집사만 목사님 편이 되었습니다. 이때에 이은하 보육소장은 대구 삼육 보육원으로 이동 발령이 났고 나와 박두남 집사는 파면 당했습니다.
그러나 갱생원장은 나만은 살려야겠다는 마음으로 비밀리에 장진섭(서무계 차석)씨를 통하여 종교 탄압을 하게하고 나를 파면 조치 한 사람은 총무과장인 조학윤씨임으로 원장인 나와 손을 잡자고 하면서 이번 사건이 종결되면 나를 교도계장으로 임명할 것이니 나와 손잡자고 제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허락이 되지 않았고 어찌 종교 탄압 자와 합류하느냐 하고 마음에서 거절 하고자 함은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때를 통해서 하나님의 종으로 삼고자 하시는 섭리임을 오늘에서 깨달았습니다.
5)12시간 죽음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남
1954년 11월 24일자 파면을 당한 후 고향 큰 집으로 이사 와서 있는 중 위궤양 중증으로 고통을 당하다가 여수 제중 병원에서 위수술을 마치고 배는 끓고 있는데 어떻게 갈증이 나는지 물을 먹었더니 배가 끓는 것이 중지 되고 배가 딴딴해지면서 정신이 아리송해지기 시작한데 원장 부원장 간호원이 여러 가지 조치를 다 해보았으나 더 이상 할 수 없다면서 입원실 방 위쪽으로 밀어 놓고 나간 시간이 오후 6시였다 합니다. 밤이 맞도록 저의 장모님께서 시체인 나를 부둥켜 앉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저의 장모님은 초대교회 신자로 많은 기사이적을 행했던 시골교회 집사였습니다. 얼마나 눈물로 통회 기도했더니 다음날 새벽 6시에 배에서 꼬르륵 하더니 배가 끓기 시작해서 살아났습니다. 나의 사랑하신 하나님은 오늘 목회자로 쓰시려고 저의 장모님을 통해서 살려주셨습니다. 12시간 만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10. 목회 길로 나선 나의 심령
하루 밤 괴로운 몸에 잠이 깨여 밖에 나와 하늘을 보다가 갑자기 하나님의 능력이 생각났고 미물 같고 티끌 같은 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은 유난히 하늘에 별들이 똑똑히 나타나 보는 순간 저 무수한 별들을 우리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저처럼 무거운 별들을 받들면서 운행하심이 우리 하나님이 아닌가! 이적은 지구도 우리 하나님께서 운행하시되 계절과 시간 24시의 운행도 우리 하나님께서 하신데 이 우주에 수억만 별 중 작은 별 지구 속에 한국 땅과 한국 땅 속에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대봉리 그 중 우리 집 마당에 섰는 나 얼마나 희미한 티끌보다 적고 현미경으로도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미물 같은 나의 생명의 역사를 날마다 인도하신 내 아버지! 하면서 큰 소리를 지르면 ‘감사합니다’를 외쳤습니다. ‘하나님 나의 아버지’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음 날 정인근씨께 물었지요. “나도 목사 할 수 있을까요?” 했더니 “자네는 할 수 있을 것이야. 소록도 갱생원 서무계에서 근무까지 했지 않았나”라고 했습니다.(정인근씨는 일정 시 일본 경찰을 하다가 소록도 갱생원 직원으로 근무한 경험자입니다. 또 일정시대 소록도 갱생원 총무과 서무계 직원은 전원 일본인이요 상당한 계급을 가진 사람만 그 자리에서 근무한 직종임)
1)목회 생활로 새 출발
1956년 4월 1일 모교회(봉서교회) 전도사와 의논하니 4월 3일 광주에 있는 호남성경학교(호남신학대학 전신)에서 입학시험이 있으니 가보시오 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 성경학교 간다고 했더니 기뻐하시면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4월 3일 일찍 호남성경학교에 가서 시험에 합격하여 공부하는데 교장 되신 부명관 선교사께서 광주시 유안동에 개척해 볼 생각이 없는 가고 물었습니다. 개척하면 개척비로 생활비 보조로 월 3,000원씩 도와주겠다 하기로 유안동 교회를 처음 개척하였습니다.
1학기를 마치고 1956년 7월 26일 집으로 돌아오다가 순천선교부에 들려서 인휴 선교사와 의논 하는 중(3년 간 학비 보조 요청하기 위하여) 인휴 선교사님은 사실 6.25 동란 후 목회자 부족으로 목회자 한 사람 구하기 힘든 상황이므로 나는 성경학교에 입학하면서 개척교회를 세웠다고 칭찬하면서 단독목회 제의를 하셨습니다. 실은 거문도교회에서 목회자를 보내달라하나 마땅한 전도사가 없어서 못 보내고 있었습니다. 거문도교회로 가라는 제의에 동의하여 1956년 7월 30일 거문도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습니다.
가서 보니 예배당은 일본 사람의 이층집인데 이층은 예배당이요 아래 일층에는 최집사가 살면서 저희가 들어가니 작은 방 한 칸에 살라고 하였습니다.
거문도교회 시무하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여수시에서 객선을 타면 나로도, 선죽도, 초도를 지나 거문도에 도착하기까지 꼭 8시간이 걸리는데 멀미하고 토하고 굴러다녀서 송장 같은 몸으로 배에서 내리면 지쳐 있었습니다. 그래도 교인 20여명은 전도사라고 기뻐하며 환영했지만 최집사는 냉랭했습니다. 전도사가 없었을 때는 최집사가 강단을 지켜왔기에 자기가 교역자 대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2)2차 안도교회 시무와 연도교회 개척
1957년 5월에 여천군 남면 안도리 안도교회로 이동하여 안도교회를 시무하게 되었습니다. 안도교회 시무 중 소리안도에 개척할 뜻을 품고 소리안도로 들어갔더니 5개 부락이 있었으니(서부, 동부, 까랑도 역포, 덕포) 총 주민 3천여 명이요, 기관은 면출장소, 초등학교, 어업조합이 있었습니다. 수년간 우학리교회 시무하셨던 김순배목사님께서 개척하기 위하여 많은 전도자를 보냈으나 한 사람도 안착하여 전도해보지 못하고 실패한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 연도교회를 세우시려는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내가 처음 소리안도(연도)를 찾았을 때 면출장소장 부인이 우학리교회 여집사를 만나 개척교회를 놓고 많은 의논을 했으나 최금례 집사님도 마음으로는 환영하나 워낙 마귀숭배가 심하고 외부에서 좀 똑똑한 사람 들어와도 발을 붙이지 못하게 첫째 여관도 없고 식당도 없고 거처할 곳도 없었다. 특별히 기독교회는 적극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동부와 서부 이 두 마을 뒷동산에 당산이 있는데 신을 모신 사당이 있었습니다. 바다 해초 수입의 삼분의 일을 당산 제사 비용으로 드리므로 부락 유지들이 이 비용으로 함께 사용하기 위해 이장, 조합장, 산림계장 등 이 같은 좀 유지들은 이들과 합류하여 매일 술을 먹고 허랑 방탕 하는데 전도사님이 이곳에 어떻게 들어와서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하면서 할 수 없다는 뜻을 표했습니다. 그날 밤에는 출장소장과 만나보니 참아 민망히 여기면서 안 될 것만 말했습니다.
다음 날부터 어린아이들을 산속으로 데리고 가서 예수 이야기를 하면서 복음을 전했더니 오후에도 또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오후에는 상당한 수가 출장소장 집 앞에서 기다렸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확신을 얻었습니다. 주일 날 오후 2시 30분이면 연도에 들어가는 객선을 타고 들어가면 어린아이들 4-50여명이 기다리고 있었고 주일 오후에는 깊은 산속에 가서 예수님 이야기, 구약 성도들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부락 유지들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출장소장께 나를 받아들이지 말라는 항의도 몇 번 하였다고 합니다.
안도교회 시무 2년 후에 인휴 선교사와 의논하고 여수 시찰장되신 여수 제일교회 손치호 목사님과 의논하고 연도교회 개척 예산을 세우는데 안도교회는 월 15,000원 그대로 놓고 연도교회 개척비 월 12,000원을 이곳저곳에서 모아 세워주었습니다. 나는 제의하였습니다. 안도교회에 새로운 전도사를 보내고 연도는 제가 들어가겠다고 하여 저의 가족을 거느리고 이삿짐을 싣고 연도에 들어가서 이삿짐은 출장소 사무실에 놓고 숙직실에서 그 밤을 지냈더니 다음 아침에 부락유지들과 부락 늙은 어른들께서 출장소로 몰려와서 출장소장에게 항의하면서 당장 쫓아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소장과 이장이 저희 집을 얻으려고 이집 저집 찾았으나 어느 누구도 집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예수쟁이가 자기 집에 들어오면 자기 집 조앙 귀신이 쫓겨나니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제주도 해녀들이 오면 쓰는 방을 얻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방 한 칸인데 방 벽에 똥통 구덕이 있고 또 옆에는 소마굿간이 있고 방문턱 넘어 방인데 4각으로 두루 6자 방이었습니다. 이삿짐은 중창에 장목을 걸쳐서 올려놓고 딸 둘과 아들 하나 저의 내외 5인 가족이 이곳에서 거주하면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산에나 바닷가에 가서 기도하면서 주일이면 어린아이들을 모아 산으로 갔더니 산주가 쫓아와서 자기 조상 묘지가 있는데 조상귀신이 쫓겨 가니 그곳에서 쫓아냈고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비가 오거나 물이 들면 예배를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학교 교장과 의논하고 교실 한 칸을 얻어 예배를 드렸더니 부락 유지들이 교장께 항의하므로 그도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땅을 구입하고자 이곳저곳을 알아보았으나 땅도 얻지 못하는 중 동부 마을에 한 집터가 있는데 6.25 동란 때 공산당에 부역자가 자기 집 중천장에서 피신 중 경찰이 외서 그 집 주인에게 아들 내놓으라고 해도 없다고만 하므로 이 집에 불을 놓아 그 집 아들이 불에 타 죽은 집터였습니다. 그 집 주변 사람들이 밤이 되면 늘 귀신이 나타나서 무서워죽겠다고 하는 집터가 있다고 하여 이장 소개로 그 집터 56평을 샀습니다.
그곳에 예배당을 저들 어린이들과 바닷가에서 돌을 모아서 돌 예배당을 짓고 매일 전도하고 어른들께 할 수 없어 앞으로 30년을 바라보면서 어린이 전도에 열심을 했습니다. 5개마을 집집마다 마당이 닳도록 전했더니 1년 후 주일학생수가 350명이요, 장년은 제일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에게 전도하여 장년 70명이 되었습니다. 출장소장은 손자문 집사가 되고, 최금례집사(출장소장 부인)는 권사로 여집사 3명 권찰 2명이 되었으니 우리 하나님의 산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당시 초등학생 수가 320명이었으니 학교 행사 때는 저에게 의논할 정도였습니다. 사택도 구입하였으나 사라호 태풍 때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오늘 현재는 어린 아이들이 장성하여 여수지방 도서 지방교회 중에 제일 큰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목사가 여러 사람 배출되었고 장로들이 수십 명이 배출되었습니다. 예배당을 당산 밑에 큰 예배당과 이층 사택을 짓는 엄청난 대교회가 되었습니다.
3) 나라도교회 시무와 통합 합동분열의 고통
1960년 5월에 나라도교회에 시무하게 되어 들어갔는데 전임 교역자인 원대성 전도사는 몇 년 전부터 박형룡박사 지지자로서 교인 전체를 완전 합동 측으로 돌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떠나면서 박병학 전도사는 인휴 선교사가 인정한 전도사이니 만약 통합 측으로 끌고 가려고 하면 전교인이 뭉쳐 있으면 스스로 나라도교회를 떠날 것이라 하고 떠났습니다. 나는 이런 사실을 알고 교인 전원에게 “한국교회 10년사”란 교회사(정양선목사 저)를 읽히면서 교육을 시켰습니다. 1개월 후 1960년 6월 통합과 합동이 분열할 때 우리 나라도 교회는 청년 5명만 떠나고 전원 통합에 남아 나와 함께 손을 잡고 교회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11. 신학교 진학생활
1961년 3월에 서울에 장로회 신학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지요. 1960년 남산에서 공부를 했던 총회신학은 합동과 통합으로 교단 분열이 되어 통합측은 광나루에 장로회신학대학으로 국가 인가를 받았고, 합동측은 사당동에 총회신학대학이라 하여 분리되었고, 나는 광나루에 있는 장로회 신학대학 전수학과 다니게 되었습니다.
1)장신대학에서의 공부
1961년 3월 2일부터 장로회 신학대학 전수과 1년을 공부하였는데 일반대학 과정 공부였습니다. 나의 가족은 광주 학동에서 살고 있으면서 어린 자녀들도 다 학교에 다녔습니다. 일 년을 공부하고 보니 가정생활이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할 수 없이 휴학계를 제출하고 고흥읍중앙교회를 시무하게 되었습니다. 고흥읍교회는 합동측이 강한 교회였습니다. 그 까닭은 정규오 목사가 시무했기 때문에 전원 합동으로 돌아갔고 몇 사람만 통합으로 돌아왔지요, 초대교역자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 있다가 호남신학교 제 5기생으로 편입되어 화순군 춘양면에 소재한 춘양교회에 시무하면서 호남신학교에서 공부를 하였습니다. 춘양교회를 섬기면서 열심히 전도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여서 장학금도 받고 공부했고 또 호남신학교 5기 학생회 회장으로 봉사하였습니다. 1965년 12월 17일 졸업식날 전남노회장 홍관순 목사님은 나에게 전도상을 주어 전도상까지 받았습니다. 1966년 3월 2일에 장로회신학대학 부설 신학원 시험에 합격하여 공부도 열심히 하면서 책장사도 하고 밤 12시만 되면 성동철 학생과 광나루 뒷산에 올라가서 1시간씩 기도하였습니다. 1967년 3월 학기 초에 기숙사 사생회장에 추대를 받아 일 년 간 사생회장으로 봉사하였는데 일 년 간 식대를 무료로 받기도 하였습니다. 부설 신학원 반장으로 2년 간 봉사도 했습니다.
2)강도사고시와 목회생활 중 원동교회 개척과 하나님의 은혜로 병 치료 받음
1967년 12월 14일 졸업하고 전남노회에서 강도사 고시에 합격하고 인도아 선교사의 인도로 해남읍중앙교회를 담임하여 목회를 하는 중 위장병으로 고통이 심하여 선교사와 협의하고 광주제중병원에서 수술키 위하여 문의했더니 15만원이면 된다하여 선교사께서 7만 5천원 나더러 7만 5천원 내라고 하여 내기로 약속하고 다음 날 진찰을 받았는데 외과과장이 미국에서 며칠 전에 부임하여 좋은 과장한테 수술 받게 되어 감사하다고 하면서 선교사 입회 아래 진찰을 했는데 과장께서 신경성 위장병이라 하면서 “목회자가 어려움이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해야지요, 신경질 내니 위장병이 생기지요”하니 선교사도 기분 나빠하며 돌아갔고 나는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집에 돌아와서 죽으면 죽으리라 하나님과 씨름 했던 야곱처럼 씨름하러 가자 죽으면 죽어 산 속에 묘지를 쓰고 말자하고 저의 처형과 함께 월요일 오후에 남경산 기도원에 가서 밤 예배를 마치고 산에 올라가 통곡하면서 나무뿌리를 잡고 몸부림치면서 울었습니다.
기도원에서 목사 방을 주어 산에서 내려와 방에서 찬송하면서 기도하다가 새벽예배를 마치고 산에 올라가서 계속 기도하면서 “하나님 아버지 내 입장을 아버지께서 당해보세요.” “왜 나를 버려두셨더라면 여수 제중병원에서 끝났을 것인데 왜 살려주셨습니까? 왜 히스기야의 기도는 들어주시면서 나는 버리나이까? 공평하지 못하십니다.”라고 하면서 통곡했지요. 금요일 밤에 기도중 432장(통일) “너 근심 걱정 말아라”라는 희미한 음성을 듣고 마음에 평안함을 느끼면서 찬송하였습니다. 그리고 잊어버리고 내려와서 잠을 자고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방에 돌아와서 문득 생각이 났습니다. 찬송가 432장을 찾아보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뻐서 아침밥을 짓는 저의 처형되신 아주머니를 불렀지요, 기뻐서 춤추면서 감사 찬송을 432장을 불렀습니다.
저의 처형은 밥을 지으려 내려갔고 조금 있으니 급히 화장실에 가고 십고 속은 매슥거려 곧 토할 것 같아 화장실로 달려갔습니다. 옛날 촌에서 사용하는 재래식 화장실 같은 곳에서 변을 보는데 검은색 대변이 나오더니 이어 피가 쏟아져 나오고 위로는 피를 토하였습니다. 방에 돌아왔는데 저의 처형이 화장실에 가서 보고 오더니 대성통곡하면서 속히 집에 가서 죽읍시다하며 챙겨 광주 제중병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월요일 오전에 외과 과장에게 사실을 알렸더니 대단히 죄송하면서 아무도 알리지 말라면서 수술비 일절 자기가 부담할 것이요 일 년간 가장 좋은 보신데 주겠다면서 바로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해 보니 위궤양으로 여러 곳에 상했고 한 곳은 구멍까지 났다면 성한 곳 조금 띠어서 식도하고 12지장 간에 붙여주면서 3개월 간 먹는 것 조심하면서 부드럽게 먹으면 차차 성할 것이라고 하여 8일 만에 퇴원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와 죽 3 수저만 먹어도 목구멍까지 차서 운동하면서 걸으며 트림이 나와야 속이 편해졌습니다. 그 후에 선교사님이 저희 집에 찾아와서 감사하다면서 목사란 어려움을 당할 때 박강도사님처럼 하나님께 기도로 해결 본 사람이 참 목사입니다 하면서 10만원을 주고 갔습니다.
1968년 완도군 군외면 교인동에 있는 교인동교회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시무 중 군외면 면소재지 원동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원동마을 회관을 얻어서 교인동 교회에서 오전 예배를 마치고 오후 1시에 원동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그 후에 집집마다 전도하고 오후 6시에 저녁 예배를 마치고 돌아와서 오후 7시 30분에 교인동교회는 예배를 드렸고 수요예배는 교인동교회에서 목요일 밤에는 원동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1년이 되고 보니 원동교인 수가 20명 이상이 되고 보니 회관을 사서 예배 처소가 마련되어 바로 그해 노회에 원동교회를 등록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3)성남 동성교회 개척과 하나님의 기적적인 축복
1970년 3월 20일 서울노회 마장동중앙교회에서 청빙을 받아 그 교회에서 2개월을 시무하게 되었는데 마장동 뚝방, 청계천 뚝방에 화재가 났는데 소방서에서 나와 휘발유를 뿌려 판잣집 전체를 소화시켰습니다. 정부에서는 이것 청계천 뚝방을 정비하여 도시화 시키려고 하는데 큰 골칫거리가 되었고 판자촌이 떠나지 안했기에 이때를 기회라 하여 전소시키고 이곳 화재민들을 광주 대단지로 이주를 시키는데 한 가옥에 땅 20평씩 배정하여 이주를 시켰습니다. 당시 우리 마장동중앙교인은 거의 뚝방 촌 교인들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되어 나는 교인들을 따라 광주대단지(현 성남)로 가기로 기도하고 대단지에 40평을 구입하고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당을 건축하는데 벽을 높이 쌓고 내일 상량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밤에 큰 비바람이 불어 닥쳐 높은 벽이 무너져 아래쪽 판잣집 건물 3동이 전파 되었고 1인은 병원에 입원했고 남은 세 집 식구는 은신할 곳도 없고 가제도구 이불 할 것 없이 다 파손되고 말았습니다. 날이 새고 보니 처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오직 눈물로 하나님께 속으로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철거민들은 악 밖에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저들은 횡재를 만난 듯이 매일 집에 찾아와서 배상 청구서를 내 놓고 떼를 쓰는데 내가 보기에도 안타갑기만 했습니다. 저들을 위로해 주면서 저희 방에 앉혀놓고 기도해 주고 밀가루 죽을 끓여서 함께 먹으면서 눈물로 기도해주었습니다. 병원 입원비 배상청구, 일당 노동비 등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처지에서 저의 가진 것 전체 다 분배해드리면서 사정했지요. 나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감동을 주셨고 그들도 나의 깨끗한 마음을 보고 울면서 떠나면서 당신이 섬기는 예수님을 나도 믿겠다고 돌아갔습니다.
나는 이 분들을 다 보낸 후에 허물어진 곳 땅을 팔아 다시 수진동에 40평을 구입하고 그곳에서 다시 건축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이장과 반장이 방해하며 동민들을 동원하고 건축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여 할 수 없이 경찰서에 고발했지요. 이장과 반장을 불러놓고 서장께서 교회 건축에 방해하지 말고 협조하라 잘 권면하니 저들이 조건을 제시하는데 예배당 건축을 자기들에게 맡겨주면 방해하지 않겠다고 서로 약속하고 돌아와서 건축할 것을 계약하는데 벽돌 한 장 쌓는데 몇 원씩으로 계산하여 일당을 계산해보니 일반인의 일당보다 세 곱이 비쌌으나 할 수 없이 그대로 약속했지요.
벽돌과 시멘트, 모래도 외상으로 가져와 예배당을 지어 올라가는데 벽돌 공장 주인이 대금 지불 독촉이 너무 심해서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씨에게 찾아가서 사정했더니 오늘은 안 되고 다음에 오라 하여 돌아오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집을 짓는데 돈이 없어서 당신의 종이 사정합니다. 벽돌 주인의 마음을 감동시켜 다음으로 밀쳐지게 해주십시오.”하고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속으로 또 기도로 부탁하면서 수진동에서 버스에서 내리는데 갑자기 벽돌 주인이 나타나더니 벽에다 밀어붙이더니 이 뺨 저 뺨을 한 참 맞고 발로 차더니 내일 오전까지 현찰을 가져오지 않으면 두고 보라면서 떠나갔습니다. 나는 그 담 밑에서 엎드려 울고 있었는데 조금 후에 점잖으신 어르신이 오더니 ‘당신은 누구요’ 하기에 ‘동성교회 목삽니다.’ ‘왜 그렇게 매를 맞고 있소’ 하기에 ‘벽돌 값을 못 드렸더니 이처럼 때립니다.’ ‘무지막지한 사람이구만’ 하면서 ‘목사님 나를 따라오시오’ 해서 따라 갔더니 다리 건너편 중앙 시장 곁에 대성 목재소 주인이었습니다. ‘외상값이 얼마요’ 하기에 240만원이라 하니 현찰 240만원을 주면서 ‘당장 갚아 주시오. 그리고 우리 가족이 다음 주일부터 동성교회에 나가겠소’ 하면서 나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돈을 받는 순간 ‘우리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사장님을 위해 기도해 드리고 외상값을 갚았습니다. 다음 주일에 김정우 사장 가족이 등록하고 매주일 마다 김정우 사장 가족 11조라 하여 24만원씩 하나님께 드렸으니 눈물에는 하나님의 동정심을 일으키고 통곡 속에 하나님께서도 함께 울어 주시면서 문제를 더 풍성하게 해결해 주신 내 아버지이십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눈물을 보다 못하여 함께 울어 주셨던 내 주님은 썩은 냄새나는 나사로를 살려 주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다 같이 나의 죄인 됨을 두 가슴 치면서 웁시다. 통곡합시다. 전화위복의 축복은 우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매 맞고 울면 큰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12.기도 중 영감(靈感) 받았습니다.
나는 어려운 일만 있으면 여러 기도원에 찾아가서 때로는 금식도 하면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해결을 구하였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퍼 주기를 좋아하시는 내 아버지시이죠. 삼각산 기도원, 청계산 기도원, 도봉산 기도원, 평화 기도원, 용문산 기도원 등등 찾아가서 우리 주님과 씨름 할 때가 많았습니다.
나는 돌이켜 생각해보면 소록도 갱생원 직원으로 있으면서 직원지대 1>갱생원직원교회 개척으로 시작하여 2>광주 유안동교회, 3>연도교회, 4>원동교회, 5>동성교회, 6>고흥읍중앙교회, 7>해남읍중앙교회 등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시고 바울로 만들어 이방 각처에 다니면서 매 맞고 굶주리며 교회를 개척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미물보다 못한 나에게 때로 많은 영감을 주시면서 들어 썼으니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경기도 용문산 중앙기도원에 기도 중 영감을 받으면서 글로 남긴 것입니다.
1)중앙기도원 성전에서 자탄하며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중 가로되 “세상에는 지덕(智德)이 겸비한 현자(賢者)가 많고 인망지위 높은 달인(達人)이 많으며 재권(財權) 많아 세령(勢令)하니 천하가 떨고 이런 권자(權者) 호령소리 우렁차되 천하에 천자(賤者)를 부르시고 만민 중에 약자(弱者)를 찾아 들어 쓰시려고 부르셨나이다.” 기도 중에 문득 생각하니 “나는 너를 연약한 줄 알고 불렀느니라. 건강한 자에게 의원이 쓸데없거니와 병들어 신음하니 주님이 찾아 주었노라.” 주님께서 가장 적은 종 가장 적은 일을 맡기려고 부르셨도다. 나는 이미 천백 번 넘어진 자요, 실패자 중 실패자가 치욕을 무릎 쓰고 다시 한 번 십자가 바라보고 찾았나이다. 주여 주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 넘어져서 찌기고 상한 종 더욱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신 주님 손에 의탁하나이다. 주님의 사랑에 감격되고 보니 나에게는 지자도, 현자도, 달자도, 재권도 세권도 하나의 물거품이로소이다. 주님의 대권은 사랑뿐입니다. 주님의 이 사랑은 세계를 정복했고 이 세상 대대손손 만 인류가 복종하였나이다. 주님 나의 주님 사랑만 있으면 나는 연약하지 않습니다. 이 사랑이 있는 곳에 실패 없고 낙망 없나이다. 오직 사랑의 목사만 되게 하옵소서! 아멘 할렐루야!
2)십자가 밑에서 죽어야 사는 법
심산 깊은 바위 아래 엎드려 기도하니 문득 마음에 떠오르는데 “박목사 아직 죽지 못하였도다. 과연 그러하외다. 박목사가 십자가 밑에 죽었더라면 욕을 해도 모를 것이요, 발길로 차도 모를 것이요, 나의 얼굴에 침을 뱉어도 뺨을 쳐도 죽었으니 모를 것인데 나는 아직 죽지 못했기에 욕을 했을 때 대항했고, 나의 충돌과 싸움은 내가 죽지 못한 소치입니다. 이것 죽지 않고 승리 없고, 부활 없고, 이것 죽지 않고 새 사람 새 인격 없나이다. 오~ 주님이시여! 나를 쳐 죽여 주시옵소서! 박목사 내가 내 몸을 쳐 죽이지 못하오니 다윗의 철장으로 나를 쳐 죽이시고 모세의 지팡이로 치시고 성령의 검으로 나를 치소서 죽도록 치시옵소서. 설죽이면 더 소리치며 흉한 모습만 나타내오니 완전히 죽도록 쳐서 부활의 승리자 되며 중생된 새 사람 새 인격 자 만드사 이 산정에 이 산록에 무덤 이루시고 성령의 새 사람 되어 하산케 하옵소서! 할렐루야 아멘.
3)순종이 제사보다 낫나이다.
은밀한 중 기도원 방에서 성경보다 찬송하고 또 기도하니 천국이로다. 그나마 마음 깊이 난해점(難解点)이 있으니 그를 놓고 기도하나이다. 천하 만민이 다 자기 계획 세워놓고 그를 달성하고자 힘을 다 하나 창파(滄波)에 일엽편주(一葉片舟) 그 목적지 원산(遠山)이라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 같은 죄인도 쓰시려고 분명히 예정되어 있으리라.
오~ 주님 예정하신 뜻을 가르치소서. 사랑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허락된 성령을 받으라 그리고 나의 증인이 되라 명하셨던 주님 다메섹 도상에서 햇빛 가은 불로 사울을 쓰러뜨리시고 변화시켜 이방 사도로 그 직책을 맡기셨나이다. 주님 깨달았나이다. 모리아 산정에 제사를 지내려 올라갔던 이삭이 자기 등에 장작 짐 지고 아버지 손에 들려진 불과 칼은 보았으나 제물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 물었나이다. 그러나 제단을 쌓고 보니 제물은 다른 양이 아니라 자신이었습니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나 같은 죄인에게 십자가 장작 지우시고 성령에 불과 말씀에 칼도 주었사오나 제물이 어디 있는지 깨닫지 못한 나에게 깨닫게 하옵소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교훈하신 주님 나에게 순종의 제물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할렐루야!
4)밤 2시 경에 영음이 그리워서 깊은 잠자리에서 꿇고 기도하되 꿈에서라도 주님 음성 듣기를 원하나나이다 하며 기도하다 찬송가 235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은 귀한 그 말씀 진실로 생명의 말씀이 나의 길과 믿음 밝히 보여 주니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샘이로다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샘이로다.”라는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보고 또 기도하다가 문득 생각하니 나에게 영음은 성경이요, 계시는 성경이었나이다.
사자 같이 외친 아모스의 소리가 영음이었고, 예레미야의 과부처럼 울던 소리가 영음이었나이다. 모세 앞에 가로놓인 홍해는 나의 앞에 놓인 십자가요, 욥의 탄식 나의 탄식일세, 1900년 전 바울의 복음이 21세기 내게 주신 복음이요, 노사도 요한에게 보여 주신 영현(靈顯)이 내게 보여 주신 계시로다.
성경이란 고인(古人)들의 경력사나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가 아니라 오늘의 인류에게 신앙이요, 복음이요, 계시오, 영음이로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산이요, 하해(河海)가 깊다하되 땅 아래 물이로다. 만민이 영비(靈秘)의 기적을 보기 원하되 기적은 성경이라. 계시 중에 계시오, 영음 중에 성경이 아닐 손가? 주님과 대화하는 이 순간 어찌 기쁜 일이 아니면 감사치 아니할 손가?
오~ 주님 마리아는 더 좋은 편을 택했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성경 앞에 꿇어 앉아 주님과 대화함이 성경을 읽음에 있나이다. 이 영음을 들음에 자리를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않겠나이다. 할렐루야 아멘.
5) 주여 성령으로 충만케 하옵소서.
심야 깊은 밤에 괴로운 심령으로 몸부림치다가 주여 나의 생명을 구원하소서 하고 기도 중 흙덩어리 속에 생명이 없으니 흙은 굴러 떨어져 몸부림 칠 수밖에 없나이다. 아무리 백골이라도 주님의 생령 불어 넣어 주실 때 이스라엘의 군대가 되었나이다. 한 줌에 흙덩어리일지라도 주님 함께 하시면 생영이지요, 부활의 영체이지요, 구원받은 중생의 새 사람이 되나이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주님 다락방에 내리신 성령을 내리시사 하루 3천명을 회시킨 능력의 성령이 내게도 내려 주옵소서. 받고 나면 승리요, 대권자 되리이다. 할렐루야 아멘
6.한 되 뜨거운 피보다 상한 심령을 드립니다.
창공에 높은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무수한 군상들은 하나님 영광으로 빛내고 있지만 지구 땅 한 모퉁이 산기슭 아래서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너는 무슨 존재며 너는 무엇으로 유익할꼬?” 문득 생각하니 나는 목사가 아닌가? 목사란 몸 바쳐 주님께 드리면 만족하거늘 왜 낙망하고 하였도다. 나는 다시 돌이켜 생각하니 동방박사는 귀한 예물 드렸고 솔로몬은 수수 만만의 우양을 드렸나니 나는 주님께 한 되 뜨거운 피를 드리오리까? 오~ 주님께서 받아주소서! 아니야 나의 피 속에는 혈기의 피요, 노기의 피요, 시기와 욕심의 피로 가득 찾으니 내 어찌 거룩하고 거룩하신 주님께 이 같은 뜨거운 피인들 바치오리까?
오~ 주님이시여 과연 그러하나이다. 다윗에게 분부하시되 천천만만에 우양에 제물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미6:7-8) 하셨나이다. 상하고 찌기고 문드러진 이 심령이 이 깊은 산간에서 부둥켜안고 내 주님을 바라보나이다. 창공에 빛난 무수한 군상의 빛난 영광보다 땅 위에 삼라만상의 노래 소리보다 상한 심령 부둥켜안고 몸부림 친 나를 더욱 불쌍히 여기신 내 주님이시여 나의 기도소리 더욱 처량히 들으신 줄 압니다.
다윗의 유부녀 간통죄와 살인죄를 보지 않으시고 침상에 눈물과 상한 심령을 돌보시며 함께 울어주신 주님 성전 뜰에 간음 하다 잡혀 온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하신 내 주님, 나의 한 되 열정의 피보다 먼저 나의 상한 심령에서 울부짖는 나의 심령을 받아 주옵소서! 세리와 죄인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고아와 과부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이시여 오늘 밤 나에게 자비를 베푸사 새 힘주시고 새 사람 새 인격자로 만드사 그것으로 주님께 바치게 하옵소서! 할렐루야!
7) 주홍 같고 진홍 같은 죄 흰 눈 되게 하소서 흰 눈이 쌓인 용문산 계속 맑고도 깨끗해라. 썩고 구더기 같은 만상 들 하나님이 순식간의 섭리로 백결같이 되었구나 돌이켜 생각하니 이 세상 험하고 죄악으로 차 있어도 그 속에서 움직이니 어찌 죄투성이가 아니오리까? 그러나 대속적 은총은 흰 눈 같은 은총으로 나의 죄를 가리웠나이다.
이사야가 말하기를 하늘에 사무친 죄 땅 위에 쌓인 죄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차고 넘쳐서 병들고 상하고 터진 가련한 신세라도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주홍 같고 진홍 같은 죄일지라도 흰 눈 같이 양털처럼 성결의 은총을 내려 주리라” 하셨으니 주님의 이 은총 얻고자 이 산곡에 왔나이다. 주께서 내리신 오순절에 성령의 불은 예루살렘 정화의 봉화가 되었나이다. 요엘선지를 통해서 약속해 주신 말씀 “말세에 내가 남종과 여종에게 불을 내리리니 젊은이는 환상을 늙은이는 꿈을 꿀 것이요, 하늘의 기사와 땅에서 이적이 나타나리라”했고 성전 뜰 안에서 이사야의 입에 불로 지져서 죄를 불태웠던 주님 이 약속된 불을 내려 주소서 내가 정화되리이다. 할렐루야!
8)금전(金殿)옥당(玉堂) 비단요는 나의 자리 되고 말구유 풀 자리는 주님께 돌렸도다. 용문산 골짜기 큰 바위 밑에서 간절히 기도하다 잠들었으니 꿈이냐 생시냐 주님께서 찾아왔으니 빛나고 영광스런 그 모습인가 하면 순식간에 거지로 변하신 주님, 병자로도 되셨다가 고아가 되기도 하시며, 과부로도 변하신 주님, 오~ 주님이라 한데도 반가이 받아 모시지 못한 나에게서 사라지고 말았도다. 오~ 주님께서는 찾아왔나이다. 그러나 영접치 못한 나의 신앙, 다윗의 후손들 양반자세 세도할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해주시려고 이 땅에 찾아 왔으나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라 하여 말구유 풀 자리로 내어 주고 금전옥당 비단요는 썩을 인생 감고 자고 우리 주님 방 한 칸 드리지 못해 찾아와 이곳저곳 살피다 돌아갔도다.
나는 생각하여 보니 오늘도 과부로 고아로 병든 몸으로 이 땅에 찾아오신 주님께 방 한 칸 식은 밥 한 수저 드리지 못하고 십자가 형틀만 내어 주었으니 내 어찌 목사라 할 수 있으리요,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 하나님의 우편에 영광의 보좌를 내어주었나이다.
오~ 사람의 주님 오시옵소서!
이제는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의 전 삼고 주님께 상좌로 모시겠나이다. 주님 오시옵소서! 고량진미 없사오나 믿음의 의의 성찬 드리겠사오며 금전옥당 없사오나 중생된 성결의 자리 드리겠나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주님의 마음에 함당한 것들을 드리고자 하나 나에게 의의 성찬이 없고 믿음으로 중생하여 성결의 자리 드리고자 하나 그러나 거룩한 방석이 없나이다. 주님 기도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주님께서 주셔야 베풀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간 받은 은혜 태산같이 받았으나 구원의 선물도 만세 전 하나님의 자녀로 택정함 받아 성령도 믿음도 소망도 다 은혜로 주셔서 받았으나 오늘도 계속적인 은혜 속에 살면서 주님 영접하지 못한 나의 심령 속에 그래도 버리지 마시고 더 크고 강력한 능력의 성령을 보내셔서 나를 정복하소서. 그리하시고 주님 내 심령을 정복하시고 내 속에 심령 안에서 주관하옵소서! 할렐루야!
9) 주님의 상한 손 나의 등에 얹으셨나이다. 새벽 제단을 쌓고 난 후 소리 높여 기도하다보니 눈물이 샘물같이 흐르나니 주님의 사랑의 손이 나를 안으시나이다. 오! 사랑하신 나의 주님 상한 손 내 등에 얹으소서! 험하고 쓸쓸한 가시밭 같은 세상길에서 찌기고 상한 이 몸 나 위하여 상하신 주님의 손으로 얹으사 내 심령 고치소서! 만드소서! 주전에 꿇어 엎드려 주님의 머리 만짐을 기다리나이다. 그리하면 나의 죄는 씻음 받을 줄 믿습니다. 열 나병환자들에게 제사장께 너희 몸을 보이고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던 주님의 말씀은 열 나병환자를 고치셨나이다. 아멘.
이상으로 고 박병학 목사님의 회고록 “석양의 나그네 길” 정리를 마칩니다.
나머지 부분들은 우리 자손들이 아버님을 회고하며 기록으로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
1)금곡 중앙교회 시무 이야기
2)구리 동산교회 시무 이야기
3)일동동부교회 시무 이야기
4)호평교회 시무 이야기
5)은퇴 후 영전교회 시무 이야기
6)인천 영산교회 협동목사 시무 이야기
7)안산제일 교회 협동목사로 생을 마치기까지 이야기 등입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셋째 사위 이삼규 목사
비봉 박병학 목사님 연표
*1926년 9월 20일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대봉리에서 박귀조장로 이삼덕집사와의 사이에 4남 1녀 가운데 차남으로 출생하심.
*6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서 교회 다니기를 시작하심
*1945년 2월 일본으로 징용 당하심-일본에서 도피하심
*1945년 9월 10일경 일본에서 귀국하고자 한국인 50인과 함께 귀국하심
*1946년 9월 9일-1954년 11월 24일까지 소록도 갱생원에서 국가공무원으로 근무하심
*1946년 12월 18일 순교자이신 고 김정복 목사님에게서 세례 받음
*1948년 1월 5일 방윤아사모와 결혼(슬하에 4남 3녀를 둠)
*1948년 소록도 갱생원 직원지대교회 개척
*1948년 11월 여수순천반란 사건 때 하나님의 은혜로 건짐 받음
*1950년 8월 16일 6.25사변 때 녹동 분주소에 끌려감
*1950년 9월 1일 두 번째 체포당함-고흥내무서로 압송되어 취조당함
*1950년 9월 12일 세 번째 체포당함-정치보위부실에 끌려가 죽을 정도로 매 맞으면서 조사받음
*1950년 9월 18일 추석명절 때 귀가하여 도주함
*1950년 9월 29일 대한민국 경찰 녹동항 입항
*1950년 9월 30일 소록도 갱생원에 다시 출근하기 시작함
*1954년 11월 24일 공무원직 파면당함(종교탄압에 대항하심으로)
*1956년 4월 3일 호남성경학교 입학시험 합격
*1956년 4월 광주 유안동교회 개척 시무
*1956년 7월 30일 거문도교회 전도사로 부임
*1957년 5월 안도교회 시무(2년)중 연도교회 개척하여 안도교회 사임하고 연도교회 시무(1960년 4월까지)
*1960년 5월 나로도교회 시무(통합, 합동 분열의 아픔 겪음)
*1961년 3월 2일 서울 장로회 신학교 입학(광나루) 전수과(일반대학과정) 1년 수학 후 휴학하심
*1962년 고흥읍중앙교회 개척시무
*몇 년 후 호남신학교 제 5기생으로 편입학 호신 5기 학생회장으로 봉사
*춘양교회(전남 화순군 춘양면)시무
*1965년 12월 17일 호남신학교 졸업(전남노회장으로부터 전도상 수상)
*1966년 3월 2일 장로회신학대학 부설 신학원 시험합격(반장 및 사생회장으로 봉사/2년간)
*1967년 12월 14일 장로회신학대학 졸업
*1967년 강도사고시 합격(전남노회)
*1967년 해남읍중앙교회시무
*1968년 교인동교회 시무(완도군 군외면 교인동) 중 원동교회 개척
*1969년 목사고시 합격
*1970년 3월 20일 서울 마장동중앙교회 시무(서울노회) 2개월 시무 후 청계천 철거민들과 성남으로 이주 성남동성교회 개척 시무
*1971년 목사 안수 받음(경기노회에서)
*금곡중앙교회 시무(남양주시)
*동산교회 시무(구리시)
*일동동부교회 시무(포천군)
*호평교회 시무(남양주시)-조기 은퇴
*부안영전교회 시무-정년때까지
*은퇴 후 정읍 송산동 거주
*인천으로 이사하여 거주 하시면서 영산교회 협동목사로 섬김
*안산으로 이사하여 안산제일교회 협동목사로 섬김
*성경 필사 7회 완료, 8회 사도행전 17장 15절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는 말씀까지 필사하심.
*2009년 11월 10일 발병 고대안산병원 응급센타 입원 중환자실에 계심
*2009년 11월 23일 고대안산병원에서 성포동 사랑의 병원으로 이동 중환자실 입원
*2009년 12월 2일 오후 9시 천국입성
*2009년 12월 3일 오후 4시 입관예배(안산제일교회 장인재 목사 인도)
*2009년 12월 5일 오전 9시 천국환송예배(안산제일교회 고훈목사 인도)-안산제일교회 영상실
*2009년 12월 7일 첫 성묘
*가족 관계
*아내 : 방윤아 사모
*장녀 : 박채봉(성판도)-성경온, 성경화, 성경준
*장남 : 박기수(김선임)-박종균, 박종란, 박종신
*차녀 : 박채숙(김종상)-김지영, 김원
*삼녀 : 박채연(이삼규)-이신영
*차남 : 박기성(김희숙)-박종은, 박종명
*삼남 : 박기현(송미숙)-박종윤, 박종희
*사남 : 박기권(이명순)-박예슬, 박종범
첫댓글 다시 불러보고 싶은 우리 아버지♡♡♡
인생의 나그네길에서는 눈물과 슬픔 뿐이었지만 ...*
천국에서는 우리 주님 아버지의 눈에서 흘렸던 그 눈물 닦아 주시고....*
내 아들아 수고했다 하시면서 상급으로 갚아 주셨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회고록을 눈물로 읽으면서 다시 만나 뵐 그 날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