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와 마찬가지로 경남 밀양 또한 영남알프스의 넓고 깊은 자락에 수많은 문화재와 유적지, 고택들을 품고 있는 고장이다.
이번 주 답사한 제13코스는 밀양이 자랑하는 전통마을과 정자를 거치며 옛 정취에 듬뿍 취하는 길이다. 유서깊은 전통을 가진 한옥마을과 넓은 들판, 폐허로 남은 절터와 정자를 찾아가며 밀양이 갖고 있는 다양한 특색들을 느낄 수 있다. 또 난생 처음으로 어마어마하게 넓은 대추밭 사이를 지나기도 한다. 녹음이 뒤덮인 산자락에 끝 없이 펼쳐진 대추밭 언저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그들이 흘린 땀'의 숭고함에 대해서도 생각할 기회를 가진다.
코스 출발지는 경남 밀양시 산외면 남기리 남가마을의 남계교다. 그리고 종착점은 단장면 미촌리 구미마을 버스정류소. 총거리는 14㎞이고 순수하게 걷는 시간은 4시간40분, 휴식 등을 포함하면 6시간 정도는 걸린다. 거리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이유는 막바지 구간인 칠탄정, 칠산정 구간의 묵은 옛길에 수풀이 우거졌기 때문이다.
◇ 다원고개 넘고 동창천 건너 14㎞, 넉넉 잡아 6시간
영남알프스 둘레길에서는 흙돌담 정겨운 전통 한옥마을을 자주 만난다. 경남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또한 그 중 한곳이다. 옛 사람들의 운치를 그대로 살리고 있는 마을을 지날 때면 개척단의 발걸음도 더욱 가벼워진다.
엄남천에 놓인 남계교를 건너 사거리에서 직진, 계속 동쪽으로 남계마을 들판길을 따른다. 정면 왼쪽의 꾀꼬리봉이 우뚝하고 오른쪽에는 물류창고가 있는 야트막한 화지산이 보인다. 두 산 사이의 안부 고개로 넘어갈 예정이다.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밑을 지나 양덕동(마을)에 들어선다. 양덕(陽德)이라고 한 것은 꾀꼬리봉에서 내려온 산기슭에 위치, 양지 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마을회관 앞에서 진영기와산업(주) 굴뚝을 보면서 직진한 후 공장 왼쪽의 골목으로 진입한다. 매꽃, 인동덩굴 등이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었다. 3분 후 Y자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간다. 주변에는 온통 대추나무 일색이다. 다시 3분 후 갈림길에서 오른쪽 비포장 임도를 택해 50m쯤 가면 널찍한 공터가 나오는데 왼쪽을 잘 보면 임도로 휘어져 오르는 길이 보인다. 그 임도를 따라 가면 7분 후 다원고개에 닿는다. 능선을 타고 왼쪽으로 가면 꾀꼬리봉, 오른쪽은 화지산으로 가게 된다. 일단 우측으로 몸을 돌린 후 보이는 능선 마루금길과 왼쪽 11시 방향으로 휘돌아가는 길이 보이는데 비스듬한 왼쪽 길을 택한다. 3분 후 또 다시 작은 안부고개에 닿는다. 우측은 화지산, 직진하면 금촌리로 내려가는 길이지만 왼쪽 능선길로 가야한다. 3분 후 무덤 앞 갈림길에서 능선을 버리고 왼쪽 내리막 길로 떨어진다. 얼마 가지 않아 다죽리 다원마을 포장도로에 닿는다.
밀양사 산외면 다죽리 혜산서원 대문인 상례문을 나서는 개척단.
다원마을은 문화부장관을 역임한 연극배우 손숙 씨의 고향마을로, 일직 손씨 재실과 혜산서원(惠山書院) 등 고택들이 즐비해 은근히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이정표를 보면서 도로를 건너 혜산서원 방향으로 간다. 격재선생 신도비를 일별하고 흙돌담길 깊숙이 자리잡은 상례문(尙禮門)으로 들어가 서원의 강당과 사당 등을 둘러본다. 반질반질하게 윤이 날 정도로 깨끗하게 닦인 강당 대청마루는 후손들의 정성어린 관리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서원을 나와 흙돌담길을 따라 걷는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11호인 다죽리 손씨 고가 등 고택들이 이어진다. 참 운치있는 마을이다. 만화정과 운강고택이 있는 청도군 신지리 못잖다. 그러나 길에서 만난 마을 주민 아주머니는 "처음 온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지요. 그렇지만 뭐, 사람사는 곳이 다 마찬가지라오. 들일 하고, 농사 짓고, 자식 키우고. 그렇지 않소?"라며 밭으로 향한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는 말이 한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손씨 고가에서 우측으로 꺾어 걸으면 옛 24번 국도 아스팔트 도로 사거리다. 나중에 이곳으로 돌아올 예정이지만 일단 왼쪽으로 꺾는다. 산외면사무소를 지나 주유소 앞에서 왼쪽 골목으로 들어선다. 그 골목 깊숙한 곳에 모당천(毛唐泉)이라는 샘터가 있다. 중국 원나라 말기에 모 씨와 당 씨가 전쟁을 피해 이곳까지 와서 식수용으로 팠다는 오래 된 샘물이다. 모당천을 지나 잘 생긴 소나무와 홍단풍의 호위를 받으며 올라서면 언덕 위에 죽원재사(竹院齋舍)라는 재실이 있다. 조선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지방관과 언관을 지낸 오한 손기양 선생을 기리는 제사를 모신 별묘가 있던 자리다. 1753년 최초 건립됐으며 이후 세월이 흐르며 황폐해 졌다가 1956년에 밀성 손씨 문중에서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했다. 본당 건물 앞 뜰에는 월연정과 금시당에서도 보았던 백송(白松)이 늠름하게 서 있다.
◇ 산외면 소재지 다죽리 전통한옥마을 운치 가득
다죽리 소재 죽원재사 가는 길. 홍단풍과 백송이 길손을 맞아 준다.
죽원재사를 나오면 모당천 앞에서 직진, 마을 길을 따라 나오면 다원2리 경로당을 거쳐 옛 24번 국도에 닿는다. 우측으로 꺾어 산외면사무소를 거쳐 최초에 24번 국도에 닿았던 갈림길까지 돌아간다. 여기서 옛 국도를 건너 마을앞 들판인 다원들 사이 농로를 따라 율전마을 쪽으로 간다. 신 24번 국도 굴다리를 거쳐 직진하면 '털보양어장'을 가리키는 푯말 앞에서 화살표 방향대로 우회전하고 율전마을회관을 거쳐 털보양어장을 지나면 동천(또는 단장천)둑길에 닿는다. 우회전하면 '리더스CC' 표지판이 있다. 활성2교 다리를 건너는데, 다리 밑 하천에서 다슬기를 줍는 50~60대 주민들이 눈에 들어온다. 초여름 햇살을 받은 여울이 반짝인다.
대추밭 속에 숨은 영원사지. 조선 초에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리를 건너면 큰 길을 버리고 왼쪽 강변 쪽으로 꺾어야 칠탄정으로 가는 길이지만, 일단 영원사지(瑩源寺址)에 들르기 위해 골프장 방향으로 직진한다. 영원사지 위치 안내판을 지나고 골프장가든 식당을 지나면 갈림길에서 우측 마을길을 따른다. 활성2동 경로당 앞을 지나면 온통 대나무 천지다. 5분 후 대추나무밭에 숨은 영원사지에 닿는다. 골짜기 상류에 보면 골프장이 있고, 그 오른쪽에 자씨산 부도골이 보인다. 이 깊은 골짜기에 골프장을 건설한 것을 납득할 수 없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다. 영원사 창건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고려 충숙왕때인 1313년 왕사가 된 보감국사(寶鑑國師)가 머문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보감국사( 1250~1322)는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 스님의 제자로서 왕사에까지 오른 고승이다. 이 절터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호인 보감국사 부도와 제13호인 보감국사 묘응탑비가 있고 몇기의 고려시대 석불이 남아 있을 뿐 주변은 온통 대추밭일 뿐이다. 묘응탑비의 탑신도 오간데 없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있다. 묘응탑비의 비문은 익재 이제현이 썼다고 알려졌지만 내용을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비 상하단부의 조각 솜씨만은 예사롭지않다. 절은 조선 초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 드넓은 대추밭 속에서 찾은 영원사지 쓸쓸함 만 남아
인적 적어 반 폐허가 된 칠산정 경내에 거대한 은행나무만 우뚝하다.
15분이면 다시 활성2교 앞 골프장 입간판 앞까지 갈 수 있다. 다리 우측으로 진입, 강변의 숲길을 따른다. 큰 높낮이 변화없이 강변을 따라 가는 한적한 숲길. 그러나 최근에 인적이 드물어서인지 잔가지들을 제법 헤치면서 진행해야 하는 길이다. 이 길도 정비만 제대로 된다면 '제12-1코스 상편'에서 답사한 금시당~팔각정 산책로 못잖은 걷기 좋은 길이 될 수 있겠다. 17분쯤 가면 다죽리의 죽원재사에 모셔진 오한 손기양 선생이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는 칠탄서원(七灘書院·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2호)과 칠탄정(七灘亭)에 닿는다. 북쪽을 바라보며 지어진 이 건물은 강당과 정자 서재와 동재가 운치를 더하지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탓인지 잡초와 먼지만 무성해 을씨년스런 느낌을 준다. '칠탄'이라는 명칭은 산내천과 단장천이 합수된 단장면 단장리에서 이곳까지 흐른 동천의 거리가 칠리이며 이 구간을 '칠리탄'이라고 해서 붙었다고 전해진다.
칠탄정의 동제 누각인 운강루(雲江樓) 아래 문을 통해 나가서 30m쯤 가면 우측으로 살짝 오르는 희미한 길을 타야 한다. 이곳부터는 길 상태가 험한 편이다. 안내리본을 잘 보고 조심스럽게 진행하자. 칠탄산 옆자락 타고 가는 험로를 30여분 가서 무덤을 만나면 길은 다시 좋아진다. 우측으로 살짝 틀면 일직 손씨 돌무덤이 있고 곧바로 갈림길이다. 왼쪽으로 살짝 돌아 다시 우측으로 임도처럼 넓은 길을 따른다. 묵었지만 그래도 갈만한 길이다. 5분 후 제대로 된 깔끔한 임도에서 우측으로 가면 곧바로 칠산정(七山亭)이 있다. 이 곳 역시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아 문화재라는 느낌이 덜하다. 다만 마당으로 들어서면 수백년 묵은 은행나무가 우뚝 서 있어 가을 분위기가 참 좋을 듯 할 뿐이다.
칠산정에서 구미마을까지는 15분이면 족하다. 구미교를 건널 때 우측에 보이는 봉우리는 계령산. 다리 건너에 버스정류소가 있다. 제13코스의 종착점이다.
# 떠나기 전에
- 혜산서원 건물 사이 담장, 대원군 서원철폐령 피하려
밀양 산외면의 면소재지인 다죽리에 있는 혜산서원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7호로 지정돼 있다. 이곳은 조선 초기 문신이자 학자인 격재(格齋) 손조서(1412~1473)의 학덕과 인품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조선 영조 29년(1753년) 건립한 서산서원이 있던 터에 1971년 확장 중건한 곳이다. 이 서원에는 한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일반 서원과는 달리 강당과 사당 살림채 등이 모두 담으로 구분돼 있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조선 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당시 건물의 강제 철거 만이라도 피하기 위해 일직 손씨 문중에서 가정집 처럼 꾸몄기 때문이다. 건물들 사이에 담벼락을 만들고 건물의 이름도 일반 가정집에 흔한 이름들로 바꿔 비로소 큰 화를 면했다는 것이다. 지혜의 산물인 셈.
격재 선생은 집현전학사 병조정랑 봉산군수 등을 역임한 학자로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보면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마을에 돌아와 두문불출하며 학문의 길만 닦았던 인물이다. 그의 비장한 충절은 흔히 생육신의 그것에 비견된다.
# 교통편
- 밀양버스터미널서 정문마을까지 버스 30분 간격 운행
무궁화호 열차는 부산역 기준 오전 5시10분 첫차를 시작으로 20~4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43분 소요, 3800원. 밀양역에서 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한 뒤, 정문마을행 새마을버스 또는 얼음골 표충사행 직행버스를 이용한다. 새마을버스는 오전 6시10분부터 약 30분 간격으로 있고 직행버스도 7시05분부터 약 20~4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정문마을에서 하차, 남가마을 쪽으로 약 300m 걸어가면 남계교가 보인다. 코스 답사 후 종착점인 구미마을 버스정류소에서는 그냥 500m가량 걸어서 사촌마을 버스정류소에서 밀양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는 것이 좋다. 사촌마을 버스정류소에서 오후 4시35분, 7시25분에 탈 수 있다.
자가용 이용의 경우 신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에서 내려 밀양 방향 24번 국도 긴늪사거리에서 좌회전, 200m쯤 간 후 다시 좌회전해 굴다리를 지나면 정문마을에 닿는다. 정려각에서 100m쯤 직진, 다리를 건너지 말고 좌회전해서 300m쯤 가면 된다.
밀양시 발행 관광안내서에도 수록된 칠탄정. 그러나 관리가 제대로 않돼 먼지와 잡초만 무성하다.
아무리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했다지만, 이번 제13코스 답사 도중 들린 중요 문화재인 밀양 칠탄정(七灘亭)과 칠산정(七山亭)의 폐허나 마찬가지인 몰골(?) 앞에서는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다.
두 곳 모두의 마당에는 웃자란 잡초들만 무성하고, 대청마루에는 쥐똥과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아 있다. 여러 부속 건물마다 처마 밑에는 거미줄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펼쳐져 있기까지 하니 그 을씨년스러움에 기가 질릴 지경이다. 사실 칠탄정과 칠산정은 위치나 주변 풍광 면에서는 둘레길 개척단이 지금껏 답사한 각 구간에서 만난 그 어떤 정자나 서원들과 비교해봐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다만 관리 실태만은 가장 낮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어 안타까운 심경이다. 아니 '관리'라는 말을 꺼내기조차 부끄러울 지경이라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지 난감하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칠탄산 자락에 자리잡은 칠탄정과 칠산정이 어떤 곳인가. 우선 칠탄정의 내력부터 살펴보자. 동천강 변에 북쪽을 보고 앉은 칠탄정은 임진왜란 당시 밀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손기양(1559~1617)이 만년에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1725년에 후손들이 건물을 다시 지어 진암서당이라고 명명했고, 1844년에는 청절사(淸節詞)라는 사당도 함께 지어 손기양의 위패를 모시고 '칠탄서원'이라고 불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훼손됐다가 1914년에 다시 복원했다. 칠탄정과 중앙의 강당을 두었고, 동서쪽에는 누마루가 있는 누각을 지어 강물과 그 너머 다원들판, 다죽리 마을, 비학산과 꾀꼬리봉 등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게 했다. 현재의 건물은 비록 20세기 초반에 지은 것이라고 하지만 조선 후기 양식을 대부분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이같은 역사성과 가치를 인정받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2호로 지정됐다. 손기양 선생은 밀양 손씨 문중 출신이다. 또 칠산정은 경남 문화재자료 제478호로 일직 손씨 가문의 별업 겸 재실이다.
이들 두 곳 모두 수백 년 자란 은행나무와 베롱나무들이 경내에 그 세월의 흔적을 안고 우뚝하게 서 있고 주변의 아름드리 소나무들도 그 기품이 여전하지만 각 각의 건물들이 문화재다운 관리를 받지 못하다 보니 그 빼어남이 반감될 수밖에 없다.
누구를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행정기관에서 무관심했든, 해당 문중에서 관리를 소홀히 했든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개척단이 칠탄정과 칠산정을 답사하면서 '우리의 문화재 관리 수준이 과연 이 정도밖에 안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을 솔직히 고백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근년 들어 찾는 이 드물어서 더욱 을씨년스런 이들 고 건축물들에 둘레꾼들의 발길이라도 계속 이어진다면 잃었던 생명력을 서서히 되찾을 것이고 제대로 된 관리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기대감을 나타내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