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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차중락(車重樂 1941년~1968년 10월 11일)
차중락(1942년~1968년 11월 10일)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1968년 26세의 젊은 나이에 뇌막염으로 요절하였다. 차중락은 1942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8남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차중락의 부친은 보성전문 마라톤 선수이자 큰 인쇄소를 경영하여 집안이 매우 부유하였고, 모친은 경기여고 단거리 선수였으며, 시인 김수영은 차중락의 큰이모의 아들이었으니 그와는 이종사촌간이었다. 차중락은 장충초등학교, 경복중학교,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한 바 있다. 그는 학교를 다닐 때마다 육상선수로 활약하였고 대학생 시절에는 보디빌딩을 하여 대학교 1학년 1961년 미스터코리아 2위에 입상하기도 했다. 차중락은 원래 장래 희망이 영화감독이었으며 회화적 감성의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다. 차중락은 초등학생 시절 포스터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이 거리마다 붙어 있을 정도로 그는 그림에 소질이 있기도 했다.
그는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를 다닐 때, 그의 어머니 친구의 아들 후랭키 손이 일본에서 활동하다 귀국해 차중락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넌 일본에 가면 대성공을 거둘 것이다."라는 말을 하여 차중락은 일본행을 결심했다. 그러나 그는 20세 때 대학교를 중퇴하고 밀항선도 탔다. 그러나 그가 도착한 곳은 부산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밀항 사기에 걸려들었다. 그는 서울로 돌아와 그의 사촌형 차도균(키보이스 멤버 중 한 명)의 권유로 1963년 키 보이스에 합류했다. 그는 미8군 무대에 오른 첫날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시민회관 공연때는 검은 고무장화를 신고 나갔는데 이 모습까지 비슷하다하여 '한국의 엘비스'로 각인되는 계기가 됐다.
차중락의 애인은 에바 가드너와 비교될 만한 미인이었으며 키보이스 멤버인 윤향기의 글에서는 이대 메이퀸이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녀와 차중락의 사랑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66년 가을 어느 날, 차중락의 애인은 미국으로 떠나 버렸다. 그리고 그 해 11월 10일, 엘비스 프레슬리의 'Anything that's part of you'를 편곡한 차중락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 전국에서 크게 히트하였다.
1968년 11월 10일, 차중락은 서울의 어느 공연장에서 노래를 부르던 중 뇌막염으로 쓰러져 사망하였다. 지금 그의 묘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공원묘지에 위치해 있다. 묘비의 글 <낙엽의 뜻>은 조병화 시인이 짓고, 그의 맏형 차중경이 썼다. 묘비의 아랫부분에는 당시의 유명 배우들과 가수들의 이름이 나와 있으며, 그 다음 해부터 가수 차중락을 기리는 낙엽상이 제정되어 그 해 가장 뛰어난 신인들에게 이 상이 주어졌다. 낙엽상 제정 첫해 수상자는 나훈아와 이영숙, 그리고 1972년 제4회때는 김세환, 이수미가 수상하기도 했다.
요절가수 차중락은 잘생긴 얼굴, 미스터 코리아 2위로 선정될 만큼 건장한 몸매,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빼다박은 뛰어난 모창으로 60년대 말 젊은 여성들에게 가히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미8군에서는 '코리언 엘비스'라는 애칭으로 불렸을 만큼 외국과 한국의 정서를 적절하게 퓨전한 감정처리가 독특했던 저음의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서울 신당동 토박이로 전문학교 마라톤선수 출신으로 토건업과 인쇄소를 경영했던 부친 차준달과 경기여고 단거리선수 출신인 모친 안소순의 8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난 차중락과 함께 11명의 형제자매는 부모의 기질을 이어받아 예체능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첫째는 역도선수, 둘째는 경복고 밴드반장과 연대 야구부 주장을 맡았던 재주꾼이었고 넷째인 중광은 성균관대 야구부 투수이자 그룹 다크 헤어즈의 보컬이었다. 다섯째 중용은 양정고의 마라톤선수이자 그룹 가이스&돌스에서 탬버린을 치며 노래하는 직업가수로 형제들 중 차중락과 외모와 목소리가 가장 흡사해 대역으로도 활동했을 정도였다.
낭만적이고 유순한 성품의 셋째 차중락은 경복고시절 음악보다는 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영화감독을 꿈꾸며 진학한 한양대 연극영화과 신입생 시절에는 극장을 안방 드나들 듯했다. 영화마니아였던 그가 음악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동화백화점(지금 신세계백화점) 4층의 음악 감상실에서 접하게 된 팝과 재즈에 심취하면서부터이다. 좋아했던 가수는 폴 앵카와 엘비스 프레슬리. 가끔 무대에 올라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부를 때는 반응도 좋았다.
동경에서 팝가수로 활약하다 돌아와 미8군 무대에서 이름을 날리던 작곡가 손목인의 큰 아들 후랭키 손은 차중락의 천재적인 엘비스 모창에 흠뻑 반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일본무대에 설 수 있다면 크게 성공할 것이라는 그의 권고로 차중락은 일본에서 노래 아르바이트를 하며 영화감독 수업을 받아보겠다는 야심을 품고 1963년 학교까지 중퇴하고 밀항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아버지의 사업실패까지 겹쳐 방황했다. 63년 10월 사촌형인 차도균의 권유로 그룹 키보이스의 리드보컬로 합류하면서 새로운 인생의 전기를 맞았다. 고무장화를 신고 엘비스의 모창을 멋들어지게 하며 대중들에게 첫선을 보인 시민회관 공연은 큰 화젯거리였을 만큼 성공적이었다.
이때쯤 차중락은 수년간 사귀어오던 이대생 애인과 헤어지는 실연의 아픔을 겪었다. 신세기레코드 사장의 아들 강찬호 역시 실연의 아픔 속에 쓴 자작시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를 엘비스 프레슬리의 히트곡(Anything that's Part of You)에 편곡해 동병상련의 차중락에게 선사했다. 당시는 반주음악 완성 후 가수가 노래를 불러 녹음을 완성하던 때. 그룹 키보이스는 반주음악의 템포와 필링을 함께 표현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드문 동시녹음을 시도했다. 대중들의 반응은 실로 폭발적이었다. 계절의 분위기와도 맞아 떨어져 엄청난 인기몰이를 한 차중락에게는 집요한 솔로 독립 유혹이 거셌다.
이때가 67년. 솔로 독립 후 차중락은 아침에 눈을 뜨면 차가운 콜라를 두병이나 마셔야 겨우 정신을 차릴 만큼 피로가 쌓이는 눈코뜰새없는 생활의 연속이였다.당시 그의 라이벌은 신장염으로 사지를 넘나들면서도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배호로, 좋은 친구사이였던 차중락과 배호는 가요황금기를 이끌었던 쌍두마차였다. 그룹출신이었던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매력의 트로트와 팝 창법으로 여성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배호는 기혼여성들의 사랑을, 차중락은 젊은 여성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을 정도로 두 사람의 인기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였다.
솔로 독립 후 최대 히트곡은 TBC라디오 드라마 주제가였던 <사랑의 종말-신세기. 1967년>이다. 이곡은 TBC 방송가요 대상 남자 신인가수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던 명곡으로 꼽힌다. 그러나 차중락 개인이 가장 좋아했던 곡은 <마음은 울면서>와 <철없는 아내>이었다. 잘생긴 외모, 건장한 체구, 달콤한 노래, 낭만적이며 호탕하고 부드러웠던 성품의 차중락의 일거수일투족은 여성 팬들의 관심사였다. 극성 여성 팬들의 접근이 스캔들로 비추어지고 미8군 시절부터 그를 사랑했던 외국인 여성 알렌의 존재도 정신적인 부담을 안겨주었다.
27세의 건장했던 젊은 가수도 인기라는 족쇄에는 무기력했다. 건강을 돌볼 수 없을 만큼 바쁜 연예생활과 잦은 스캔들에 시달리던 차중락은 결국 서울 동일극장 무대위에서 고열로 쓰러진 후 1968년 10월 11일 자신의 대표곡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발표 1주년 날 28세의 젊은 나이에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다음 해부터 가수 차중락을 기리는 낙엽상이 제정되어 그 해 가장 뛰어난 신인들에게 이 상이 주어졌는데, 낙엽상 제정 첫해 수상자는 나훈아와 이영숙, 그리고 1972년 제4회때는 김세환, 이수미가 수상하기도 했다.
짧은 가수생활동안 겨우 20여곡만을 남겼지만 가을과 낙엽의 계절을 대표하는 명곡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은 불멸의 생명력을 지닌 채 낙엽을 사랑하는 가을연인들을 위해 올해도 목청을 가다듬고 있다.
차중락의 묘소는 현재까지도 망우리 양지바른 곳에 잘 관리되고 있으며, 1969년 2월 11일 건립된 추도비에는 조병화 詩 「낙엽의 뜻」이 기념사업회 명의로 새겨져 있다. 그당시 망우리 공동묘지 차중락의 무덤가에서 때때로 밤샘을 하는 열성적인 여성팬들이 있었다. 모두 다 애띤 소녀였다. 도심지가 아득히 내려다보이는 호젓한 산골짜기에서 귀신이 나올 것 같은 공동묘지 무덤들 사이에서 눈 오는 밤을 혼자 또는 수명이 밤새우는 여고2-3년생들. 단순한 팬이라기엔 실로 엄청난 집념이 아닐 수 없다.
그 소녀들은 차중낙의 무덤가에 돌을 모아 조그마한 돌성을 쌓아 놓았다. 성이라기보다는 편지를 넣기 위한 우체통이다. 그 돌로 된 우체통에는 고인에게 바치는 연서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차중락의 낙엽따라 가버린사랑
코리안 엘비스라 불리우던 차중락이 엘비스 프레슬리의 Anything thats part of you 멜로디에 강찬호씨가 가사를 만들었다.
1966년 12월 키보이스 시절 발표한 이 노래를 계기로 솔로로 전향한 차중락은 이 노래를 녹음한지 정확히 2년 뒤인 스물여덟 나이로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처럼 그도 그렇게 젊은 나이에 타계했다.
차중락~~~ 찬바람이 스산하게 불고 가을 단풍이 곱게 물든
1968년 10월11일 청량리 로터리에 있는 동일극장 쇼무대에서 자신의 대표곡, 이 노래를 부르다가 쓰러진 그는 뇌막염으로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그는 미스터 코리아 2위에 입상할 정도의 미모에 고운 목소리로 소녀들에 인기가 대단하였다. 차중락은 사촌형 차도균(키보이스 멤버)의 권유로 1963년 키 보이스에 합류 하였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원 노래보다 한국에서 더 유명해진 노래로 차중락이 일찍 죽어서 이 노래가 더 유명해 졌는지도 모르지만 인생이란 허무하지 않은가 말이다.
짧은 생애를 마감한 그는 바쁜 스캐즐과 여배우들과의 스갠달에 시달렸으면 겨우 20여곡의 노래를 남기고 떠났지만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그누구 보다도 그의 노래를 무척 좋아했다. 그의 묘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공원묘지에 있다
영화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은 1969년 <김기덕>감독이 만든 작품으로
요절한 가수 <차중락>이 불러 히트했던 노래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여배우 문희가 여 주인공으로 나왔고
70년대 중반까지 간간히 활동했던 남자배우 <고강일>의 데뷔작 이기도 하다 영화는 차중락의 자서전 격인 이야기를 재미있게 묘사하여 영화로 재구성 했으며 여성 관객들의 눈물샘을 많이 자극 하였다.
영화줄거리
중락과 소영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소영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자, 소영의 오빠는 그녀를 재일 교포이자 재벌 2세와 맺어 주려고 하자 소영은 집을 나와 버린다. 하지만 중락은 그녀와 결혼할 형편이 되지 못하고, 결국 소영은 어쩔 수 없이 재일교포와 결혼해 일본으로 떠난다.
소영과 헤어진 후 중락은 소영을 그리는 마음을 담아 노래를 만들고 가수로 성공한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그리움은 병이 되고, 중락의 소식을 들은 소영이 찾아 오지만, 중락은 숨을 거두고 만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가 죽은 뒤에 만들어진 영화로써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내내 차중락의 목소리로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이 애절하게 흐른다.
차중락은 '철없는 아내' '사랑의 종말" 노래도 상당한 인기였으며 한편 차중락의 사촌이 차중광이 그의 노래를 이여 받았다.
나도 사랑에 종말.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이란 노래를 늘 입에 달고 다녔던 추억이 새삼스럽다. 한편 그가 죽은뒤 가수 차중락을 기리는 낙엽상이 제정되어 첫해 수상자는 나훈아와 이영숙, 그리고 김세환, 이수미가 수상하기도 했다.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 가수 차중락
1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따스하던 너의 두 뺨이 몹시도 그리웁구나푸르던 잎 단풍으로 곱게 곱게 물들어 그 잎새에 사랑의 꿈을 고이 간직 하렸더니
2
아~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 가는 줄 왜 몰랐던가 사랑하는 이 마음을 어찌 하오 어찌 하오 너와 나의 사랑의 꿈 낙엽따라 가버렸으니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차중락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며
따스하던 너의 두뺨이 몹시도 그리웁구나
푸르던 잎 단풍으로 곱게 곱게 물들어
그잎새에 사랑의 꿈을 고이 간직 하렸더니
아아아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 가는줄 왜 몰랐던가
사랑하는 이 마음을 어 찌 하오 어찌하오
너와 나의 사랑의 꿈은 낙엽따라 가버렸으니
아아아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 가는줄 왜 몰랐던가
사랑하는 이 마음을 어 찌 하오 어찌하오
너와 나의 사랑의 꿈은 낙엽따라 가버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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