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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1월 31일 호프부르크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분위기였다. 황제는 정무를 보며 카타리나 슈라트를 기다리고 있었고 결혼을 앞둔 황녀 마리 발레리와 스테파니 황태자비는 음악 선생과 함께 레슨 중, 모처럼 빈에 있던 황후는 그리스 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황태자 루돌프는 늘 그렇듯 황궁에 없었고 아무도 그에 대해서는 걱정을 하지 않았다. 한 대의 마차가 급작스럽게 호프부르크로 뛰어들기 전까지는. 마차에서 뛰어내린 것은 황태자의 친구인 호요스 백작이었다.

황실 소유의 사냥터 마이얼링에서 함께 사냥을 하기 위해 초대받은 백작은 그 날 새벽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전하기 위해 마이얼링에서 바덴 역을 거쳐 전 속력으로 호프부르크로 달려왔다. 마이얼링의 사냥 별장 황태자의 침실에는 남녀가 쓰러져 있었다. 아직 앳된 소녀는 장미를 손에 들고 침대에 누워있고 권총을 든 남자의 머리에는 총상이 있어 여자를 쏘고 나서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죽은 소녀는 눈을 뜬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날 오전 호프부르크에 예고 없이 한 방문객이 들이닥쳤다. 황제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한 헬레네 베체라 남작부인은 암담한 심정으로 실종된 딸 마리를 찾고 있었다. 이틀 전 아무 연락 없이 종적을 감춘 그 소녀는 애인과 도피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문제는 그 애인이었다. 마리 베체라가 사랑하는 그 남자는 황태자 루돌프, 오스트리아 제국의 계승자였던 것이다. 딸이 연인과 도피했음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실종의 공모자로부터 뒤늦게 이 사실을 들은 베체라 남작부인은 경악해서 선약도 없이 황궁으로 달려왔다.
베체라 남작부인을 맞이한 것은 그 황태자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트 황후였다. 황태자가 데려간 딸 마리를 돌려줄 것을 애원하는 남작부인의 말을 굳은 표정으로 듣고 있던 황후는 남작부인의 말이 끝나자 침착하게 평소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의 딸이 죽었음을 알려주었다. 남작부인은 울부짖으며 쓰러졌다. 눈물범벅이 되어 오열하는 남작부인에게 질책으로 격앙된 황후의 목소리가 내리쳤다.
"하지만 루돌프가 죽었다는 사실은 아시오?"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태자 루돌프 프란츠 카를 요제프 대공(31)과 남작의 딸 마리 베체라(17)가 마이얼링 별장에서 서로를 죽음의 동반자로 삼아 세상을 떠난 사건. '마이얼링 사건'으로 알려진 이 일을 두고 수많은 루머가 흘러나왔다.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황실과 전통주의자들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상상력과 낭만, 음모론이 덧붙여져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부풀려졌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한 황태자와 연인의 정사(精死), 마리의 임신으로 관계를 청산하려다 거부당한 루돌프가 협박을 받자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설, 심지어 마리 베체라가 황제의 사생아라는 것을 안 루돌프가 절망해 자살했다거나 마리에게 살해당했다는 등... 소설가 클로드 아네는 이 사건을 동반자살로 규정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주제로 <덧없는 사랑>이라는 낭만적인 소설을 써서 사건의 이미지를 굳히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마이얼링 사건의 진위는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수수께끼에 싸여있다. 그의 죽음은 정말 자살인가? 소설의 낭만적인 내용과 달리 황태자와 마리 베체라의 관계는 그렇게 절실했던 것은 아니었다. 온통 정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황태자. 그를 가장 배척했던 것은 그의 탄생을 염원했던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황제였다. 거대한 다국적 제국의 후계자였던 루돌프. 그는 왜 마이얼링에서 어린 연인과 죽음을 선택해야했던 것인가?
그는 오래 전부터 삶을 포기하고 죽음을 탈출구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30세 생일 마부인 브라트피슈가 장수를 기원하자 그는 말했다.
"자넨 너무 큰 것을 바라는군. 나는 그렇게 오래 살지 않을 거야."
엘리자베트 황후의 헝가리인 시녀 마리 페스테틱스 백작부인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이른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행동을 했다.
"황태자께서는 만령절(고인을 추모하는 11월 2일)에 내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겠느냐 물으셨다. 나는 내 자신의 죽음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대답했고 황태자는 다시 자신이 죽으면 자기를 위해 기도하겠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황태자보다 훨씬 나이가 많으니 그럴 기회가 없다고 대답했고 황태자께서는 고집스럽게 자신이 죽으면 만령절에 관 옆에서 기도해주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내가 승낙할 때까지 물러나지 않으셨다."
(페스테틱스)
루돌프는 1858년 8월 21일 황제 프란츠 요제프와 황후 엘리자베트, '시씨'의 처음이자 마지막 아들로 태어났다. 황제 부부의 신혼 처소였던 락센부르크 성에서, 합스부르크 가문과 제국의 환호 속에서 태어난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미래의 황제로서 자유롭지 못한 유년기에 묶이고 말았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황제가 요람에 넣어준 훈장을 받고 19보병 연대 대령으로 임명되어 2살 때부터 기저귀를 차고 군복을 입고 연대 대표단의 접견을 받았다. 문제는 이러한 교육 방식이나 군인의 삶이 루돌프의 의지와 관계없이, 맞지도 않는 방식으로 실행되었다는 것이다.
황제는 '통치자는 신에 의해 국가의 통치권을 부여받았다'는 왕권 신수설을 굳건히 믿어 의심치 않고 자유주의 등을 억압하는 신 절대주의Neo-
어릴 때부터 사냥이 취미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빈 여기저기에 사냥용 별장을 짓고 휴가나 틈날 때마다 나가 사냥을 즐겼다. 프란츠 1세의 시대까지는 궁정 악단의 음악이 울리는 가운데 포획해 둔 야생동물을 백마를 탄 황제들이 추격하는 궁중 행사였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직접 총을 들고 사냥꾼과 다름없이 숲과 산을 돌아다녔고 루돌프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 날 어느 장소에서 멧돼지, 사슴을 몇 마리 사냥했는지 자랑스럽게 적곤 했다. 루돌프가 8살에 처음 사슴을 총으로 잡았을 때 프란츠 요제프는 너무나 기뻐 아들을 '어린 사냥꾼 만세'라고 부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루돌프가 가고 나서 황제는 '사슴을 보면 루돌프가 생각난다'며 사냥을 한동안 멀리한다.
강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주눅들어 자란 루돌프는 어머니의 애정도 관심도 받지 못했다. 한 때 서로 사랑했지만 황제와 황후는 뿌리부터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성향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고 여기에 시어머니의 독선이 더해지면서 루돌프가 태어났을 무렵 부부는 이미 육체적, 정신적으로 멀어진 상태였다. 이런 소원한 부부 사이가 자식들과의 관계에도 그대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엘리자베트가 루돌프를 낳은 것은 의무를 다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연이어 딸 둘을 낳고, 전 제국이 실망하면서 아들을 낳아야한다는 압박에 지친 그녀는 한 때 아들을 낳아 자신을 짓누르는 시어머니에게 대항할 자기 편으로 키우고자 했다. 하지만 막상 그를 임신했을 때 황후는 장녀 조피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과 자책에 시달린 임신 기간을 보냈다. 시어머니와 담당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데려간 어린 딸이 헝가리에서 죽었기 때문이었다. 딸을 죽게 했다는 슬픔에 잠긴 엘리자베트가 다시 임신했을 때 그녀의 육체적 정신적 상태를 깊이 염려한 친정 어머니는 이 새 임신이 딸의 회복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까다롭고 불안정했던 루돌프의 기질은 뱃속에서부터 슬픔과 죄책감에 시달린 어머니의 상태가 그대로 전달된 것일지도 모른다.
대망의 아들을 낳았지만 패배감에 모든 것을 체념한 그녀는 조용히 시어머니에게 그를 넘겨준 채 일체 아들의 양육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머니가 되기 위해 싸웠지만 딸의 죽음으로 실패했다고 생각한 그녀는 자신이 엄마 자격이 없음을 자책하며 우울증에 빠져 아이들을 돌보려 하지 않았고 할머니 조피 대공비는 당연하게 손자를 데려다 자기 식으로 양육했다. 황실의 후계자를 낳고 절대군주로 길러내는 데 일생을 바친 그녀는 이제 손자를 아들과 똑같은 황제로 만드는 것에 전부를 건 것이다.
어린 루돌프와 기젤라는 하루에 1번 정해진 시간 만나는 어머니를 낯설어 했고 황후는 자기 생활로 빠져 긴 여행을 떠나면서 1년에 몇번 보지도 못하는 아이들과는 더 낯설고 서먹한 사이가 되어버린다. 황태자를 낳고 의무를 다 했으니 이제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 자신의 인생을 찾기로 결심한 황후는 두 아이를 마음 깊이 증오하는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자식들에게는 먼 곳에만 존재하며 가끔씩 얼굴을 비치는 추상적인 존재가 되었다.
황후는 자식들에 대해 결정권도 없고 아이들을 데려가버린 대공비의 행태나 양육자, 교사, 교육방식에도 일체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루돌프의 교육 상황을 듣고 바로 교관의 해임을 요구하며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나 딸 기셀라가 16살에 혼담이 오가자 결혼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임을 걱정하여 반대했듯. 황후는 자식들의 삶에서 중요한 고비에는 늘 나서준다. 하지만 그 후에는 다시 관심을 잃고 자기 생활로 되돌아가 버렸기에 황후는 루돌프나 기셀라와도 평생 정서적으로 가까울 수 없었고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아이보다는 자신에게 더 골몰했고, 또한 자식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애정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황후는 다정한 편지와 선물을 보내며 늘 옆에 없지만 루돌프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루돌프에게 그녀 자신의 성향 -섬세한 감수성, 예민함, 변덕스러움, 광기의 가능성-을 그대로 물려주었고 성인이 되어서까지 루돌프가 가장 동경하고 간절히 열망한 존재였다. 시씨가 마음을 달리 먹었다면, 최소한 그를 이해하려고 알아가려는 노력을 했더라면, 그의 편이 되어 주었다면 루돌프는 비운의 인물이 되지 않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루돌프는 엄격한 할머니와 강압적인 아버지, 무책임하고 늘 떠나있는 어머니라는 가정 환경에서, 차기 황제이자 작은 성인으로 양육되었다. 아들이 과로로 쓰러질 만큼 혹독한 훈련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황제로 만든 조피 대공비와 그 결과물인 황제는 이제 이 병약한 루돌프를 군사적 훈련, 무조건적 복종 등 군인 교육을 시켜 미래 황제에 걸맞는 인물로 만들고자 했다.
양육 장소, 방식, 담당자와 교관을 정하는 것도 모두 군인 관점에서 결정이 내려졌다. 황제의 아이들은 모두 할머니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황실에 충성한 장군들의 미망인들에게 주는 보상처럼 맡겨졌다. 그들이 자식이 있는지나 아이를 키워본 일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루돌프 역시 그러한 카롤리네 폰 벨덴이라는 미망인의 손에 맡겨졌는데 벨덴 부인의 남편은 1948년 혁명에서 황실을 지켜준 은인으로 조피 대공비는 그에 대해 보답을 하려 했다. 아이를 낳은 적도 기른 경험도 없지만 벨덴 부인은 훌륭하고 따뜻한 성품을 지녀 기셀라와 루돌프를 애정으로 돌보았고 특히 황태자의 어린 시절 내내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황태자는 그녀를 '보보'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의지했지만 6살에 새 교관에게 군인 수업에 끌려가면서 울며 불며 부인과 헤어져야했다. 부인은 육아실에서 물러난 후에도 황태자의 성장을 관심으로 지켜보았으며 황태자는 죽기 전 '보보'에게 다정한 이별의 편지를 보냈다.
<황후, 벨덴 부인, 남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 가장 간단한 것이었다. 단순한 애정과 보살핌, 그리고 이해. 오늘날에는 양육에 있어 당연하고도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간주되는 이러한 것들이 루돌프의 주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 중독자이고 무미건조하며 권위적인 아버지, 만사에 무관심하고 자신에게만 열중해 늘 떠나있는 어머니, 왕가의 명예를 최우선 순위에 놓은 야심적인 할머니. 이들 중 누구도 그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의 성향을 이해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을 밀어붙였다. 조피는 그에게 완전히 잘못된 교육 방침을 선택했고 황제는 이에 동의했고 황후는 이를 방조해서 최악의 결과를 가져온다.
황제와 대공비는 합스부르크 남자들이 필수적으로 거치는 군사 교육을 통해 군대를 거느릴 수 있도록 군사학적 '교육'이라는 이름의 '단련'을 시켰는데 시기가 너무 일렀다. 황제는 조피 대공비가 추천한대로 아들이 여섯 살 생일이 지나자 군복을 입혀 전속 교관 레오폴드 공드레쿠르트에게 맡겼는데 이 교관이 용감하고 죽음을 두려워 않는 전형적 군인이지만 사창가에 출입하고 성경에 시가를 끼워 다니는 위선자라는 면모는 고려되지도 않았다. 온통 남자, 군인들 속에서 위축된 루돌프에게 교관은 육체와 정신을 단련한다는 명목으로 자는 중 얼굴에 얼음물을 붓거나 귓가에서 권총을 발사했고 눈보라 속을 행군시키거나 동물원에 가두고 멧돼지가 달려온다고 소리쳐 공포에 빠뜨리는 등 훈련은 정도가 지나치게 가혹했다. '교육'은 완전히 실패해 허약한 루돌프를 앓아눕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심신에 상처를 입은 루돌프는 노이로제와 온갖 병을 앓으면서 폭력적이고 신경 과민, 허약 체질에 겁 많은 아이로 변했다. 또한 수줍음 많지만 독단적이고 사사건건 자신의 껍질에 틀어박혀 말수가 줄고 어둡고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 되었다. 거기다 이런 면은 황제의 심기를 자극해 루돌프를 질타하게 만들어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었다.
궁정의 허례허식과 경직성을 증오한 황후는 늘 부재중에 아들에게도 무관심으로 일관했지만 우연히 그 교육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를 유발했는지 알고 격분해 처음으로 아들을 위해 즉시 나섰다. 그녀는 황제를 몰아세워 교육을 중단시키고 교관의 해임을 요구했다. '그가 안 나가면 내가 나간다'는 아내의 위협과 매력 앞에 황제는 굴복했다. 1865년 남편과의 협상에서 승리한 황후는 자녀들의 교육 전권을 위임받아 공식적으로 양육권을 되찾고 7 세 이후 루돌프의 교육 정책은 일변했다.
그녀가 양육권을 찾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스스로 교관을 골라준 것이었다. 1867 년의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 사상 기반이 된 자유주의 사상가와 이를 지지한 정치인, 교육 관계자와 친분이 깊었던 황후가 택한 새 교관 요제프 폰 라투르-투른베르크 백작(1820-1903)은 그녀의 뜻에 따라 황태자의 새 교육계를 소박하고 자유로운 의식을 가진, 제국에 속한 모든 국가와 사회적 계층 인사들로 골고루 구성시켰다. 그들 몇은 극히 빈곡한 상태에서 발탁되고 라투르가 선발 한 교사의 대부분이 어느 정도 어떻게 든 자유주의와 관련이 있었다.
특히 귀족들을 놀라게 한 것은 황태자가 평민 출신 교사에게서 교육받게 된 것이다. 사람은 신분이 아닌 능력에 따라 직책을 받아야한다는 이념의 실천으로 그 중에는 1878년까지 교사직을 맡으며 청년 루돌프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유명한 국민경제학자 칼 맹거, 당시 새로운 자연과학적 지식을 가르친 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호흐슈테터, 저명한 조류학자이며 동물학자인 알프레드 브렘 등도 있었다. 루돌프는 근엄하고 어려운 부친이나 교관과 달리 자신을 이해와 관심으로 대해주는 교사들을 아버지, 숙부, 형처럼 의지하며 인간적인 애정 관계를 형성했고 멩거와는 아버지처럼 친근한 사이로 지냈으며 특히 라토르는 일생 연락하며 가까이 지낸 황태자의 정신적 아버지같은 존재였다.
이 교사진을 통해 황태자는 자유로운 생각과 의지를 존중받으면서 자연히 그들을 본보기 삼아 사고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뜻으로 진보적 교육을 받으면서 그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군주제를 낡은 것으로 여기고 군주제라는 국가 형태를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기는 자유사상의 옹호가가 되었다. 이러한 교사진이 훗날 황태자가 자유주의를 신봉하고 자신의 출신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에게 비판적인 태도를 갖게 된 원인이라고 말해진다. 현재도 발행되는 오스트리아의 자유주의 계열 신문 <프레쎄>의 전신인 <비너 타크블라트>의 편집장를 친구로 사귀고 그를 통해 나중에 프랑스 총리가 되는 조르주 클레망소라는 친구를 얻게 되는 것도 그들 자유주의자들의 인도였다.
루돌프의 교육은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받았던 것과는 대척점에 있었다. 프란츠 요제프는 합스부르크 전통에 충실하게 교육되어 6살에 재상 메테르니히와 교관 하인리히 프란츠 폰 봄벨 백작에게서 주 13시간, 7살에 32시간 이상의 수업을 받았다. 독일어, 지리, 종교, 프랑스어, 헝가리어, 체코 어 등 통치에 필요한 과목과 그림, 댄스, 체조, 펜싱, 수영, 군사훈련 등을 받으면서 여기에 역사, 승마, 이탈리아 어, 음악까지 추가되었다. 12살에는 일주일 50시간에 달하는 수업, 13세에는 지나친 공부와 훈련으로 인한 과로와 스트레스로 앓아누웠지만 잠시 쉬고 더 많은 분야가 추가 되어 1844년부터는 철학, 법, 정치학, 천문학, 공학, 폴란드어까지 늘어났다. 그를 몰아붙인 어머니 조피가 슬퍼할 정도로 지독한 것이었다.. 수학과 언어는 싫어했지만 역사와 지리는 좋아했다. 조피 대공비는 역사와 종교를 중요하게 여겨 이 두 과목 수업에는 꼭 동석해 지켜보았다.
독일어, 외교 필수인 프랑스어, 라틴어, 헝가리어, 체코 어, 폴란드어, 이탈리아 어 등은 다민족 국가 합스부르크의 통치자로서 추가된 것이다. 군사적으로 진영 지휘 연대의 배치, 보병, 포병, 기병 등의 훈련을 받고 요제프 라데츠키 장군 옆에서 참전해 실전 경험도 가졌다. 이는 당시 불안했던 빈의 혁명적 기운보다 이탈리아 전선이 더 안전하다는 대공비의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별 전공이나 도움은 안 되었다고,,,,ㅋㅋ)
하지만 메테르니히의 절대주의와 라우셔 대주교의 종교에 좌우되어 보수적, 가혹하고 엄격했던 프란츠 요제프의 교육과 달리 루돌프의 교육 시스템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그의 교육은 국가와 교황청의 협약에 따라 교회가 최상급 감시 기관이 되는 일반적 교육 시스템을 이탈했다. 그는 빈 궁정에서 감히 언급도 할 수 없는 프랑스 혁명과 1848년 혁명의 배경과 의의에 대해서 배웠다. 그는 시대의 흐름과 그에 따른 변화를 거부하는 귀족들의 무지를 질타했다.
"그들은 학문에 대해 모르면서도 학자들을 모욕한다. 자신들이 전혀 알지 못 하는 것을 왈가왈부하려 한다."
15세 때 그는 군주제에 대한 의견을 남겨놓았다.
"군주제는 오늘부터 내일까지밖에 버티지 못하고 결국 무너질 거대한 폐허 위에 서 있다. 군주제는 수세기 동안 지속되어 왔지만 국민이 맹목적으로 따랐기 때문에 문제가 없던 시절은 지났다. 군주제의 임무는 끝난 것이다."
그는 귀족계급과 교회의 특권에 반대하는 반교권주의자였다. 제국을 떠받치는 성직자 계급의 세속적 권한과 종교지상주의를 철저한 무지와 무식의 산물로 치부했다. 귀족 집단과 성직자가 유착해 민중을 억압하고, 종교는 민중을 우매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보았다.
맹거와 함께한 영국 여행에서 영국 귀족 자제들이 가진 ‘공인으로서의 책임의식과 의무감’에 깊은 감명을 받은 루돌프는 그저 무도회와 사냥에만 열중하는 오스트리아 귀족 청년들의 게으름과 무지를 한탄하면서 <오스트리아의 귀족과 그 사명을 가진 젊은 귀족들에 대한 경고> (1878년)라는 익명의 정치 팜플렛(당시 ‘팜플렛’은 비방 문서를 의미했다)을 기고해 노는데 정신 팔린 귀족들을 비판했다.
루돌프는 종교적, 정치적, 국가적 소수집단에 이해와 관심을 보이며 반유대주의에 맞서 유대인 친구들과 언론인들을 사귀었다. 현재까지 오스트리아에 발행되는 진보계열 신문 <프레쎄> 지의 전신인 <비너 타크블라트>의 창간자이며 유대인인 힐쉬 남작, 편집장 모리츠 세프스(1835-1902)와 그의 매형인 훗날 프랑스 수상 조르쥬 클레망소(1841-1929) 등을 소개받아 가까이 사귄 것도 라토르 등 자유주의자들의 영향이다. 18 세까지의 교육 기간 동안 루돌프의 교사는 동시에 30 명이 넘을 때도 있었지만,이는 19 세기 후반 당시의 왕, 귀족의 교육에서는 많지 않은 수였다. 예외 인 것은 이러한 교사들의 대부분이 보수적 인 왕후 귀족의 교육과는 정반대 자유주의의 신봉자였던 것이다. 따라서 루돌프는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 세의 보수적 오래된 사상과는 달리 어머니와 같은 자유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 아버지 황제에게 강하게 반발하고 절대 군주제를 맹비난 했다.
반유대주의자들과 보수 세력은 이런 황태자를 불쾌하게 여긴다. 행정부와 경찰도 황태자가 좌파가 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감시를 강화했고 교우관계를 주시했다. 그의 사상과 행동은 궁정의 관념과 대치되어갔다. 구제불능의 보수주의자에 머리가 굳은 아버지와는 자연히 대립할 수밖에 없는 구도가 되어갔던 것이다. 황제가 아들에게 만족하는 것은 사냥 등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에서 개가를 올렸을 때 정도였고 아들이 높은 지적 성취를 이룩해 자신을 능가하는 존재가 되자 누구와도 권력을 나눌 마음이 없는 황제는 아들에게 담을 쌓아버렸다. 특히 고위 귀족으로 이루어진 교계는 자신들을 비판하고 교권을 무시하던 루돌프가 죽었을 때 일부러 조종을 울리지 않거나 추모객들이 오지 못하게 교회 문을 닫아버리는 식으로 불만을 표출했고, 자격이 없는 황태자에게 종교적 제의를 치러주는 것까지 비판했다.
1877년 7월 24일 그가 19세가 되면서 엘리자베트가 황제와 맺은 교육 불간섭 협약이 종료되었다. 그가 성인이 되어 궁정에서 받는 모든 공식적 교육이 끝났다는 의미였다. 19세기 자연과학 혁명에 큰 영향을 받아 자연과학과 기술적 발전의 정열적인 후원자로, 스승인 알프레드 브렘(1829-1884)과 함께 조류학을 연구하고 탐사를 통한 논문, 수필도 다수 집필한 황태자는 대학에 가서 자연 과학 공부를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대학 교육은 왕가의 후계자가 할 일이 아니고 무려 황태자를 평범한 학생들 틈에서 똑같이 시험관 앞에서 머리 숙이는 수험생으로 만들 수 없었던 황제는 그를 군대에 집어넣었다. 황제는 오스트리아 전군 통솔자였고 합스부르크의 남자들은 모두 필수적으로 군에서 복무해야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어머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비록 그녀가 원했던 바가 아니라도 버림받은 루돌프는 간절히 어머니의 존재를 필요로 했지만 성인이 되면서 그들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을 실감했고 의지할 곳은 똑같이 버림받은 누나 기젤라 뿐이었다. 엘리자베트의 관심은 막내딸 발레리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어머니의 무관심과 궁정의 압박 속에서 아버지를 닮은 무덤덤하고 선량한 성품의 기젤라가 이를 잘 견디며 여동생을 아낀 반면 어머니를 닮아 섬세하고 예민한 루돌프는 (적어도 동생이 성장해 그 집착적 사랑도 고통이었음을 알기 전까지는) 어머니를 독차지한 어린 동생을 질투하고 방해물로 여겼다. 남매의 관계는 발레리가 자라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면서 좋아졌지만, 공무를 포기하고 가족과의 접촉이 거의 없는 어머니 는 자기 생활과 여행에 몰두하여 끝내 아들 루돌프의 이해자는 될 수 없었다.
황실 초상화에서 찾을 수 있는 황후의 특징. 오로지 딸 발레리만 죽으나 사나 곁에서 안고 붙여놓고
시선도 오로지 발레리에게만 꽂힘
이렇게 불편한 가족관계 속에서 지속적인 욕구 불만을 맛본 루돌프는 난교에 물들며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의전 담당관인 칼 봄벨이 여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황태자를 불온서적과 잘못된 자유주의 학문에서 멀어지도록 사냥, 승마, 여자 등 사교적인 활동에 나서게 하라는 황제의 밀명을 받은 그는 황태자의 난봉을 그대로 방치하고 오히려 비결과 연애 사업에 매진하게 부추겨 자신 같은 쾌락에 빠진 난봉꾼으로 만들어놓았다. 제국 내 10대 소녀들은 그의 사진을 신문에서 오려내 갖고 다녔으며 그가 나타나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당연히 매력적인 현실의 왕자 루돌프를 거절할 여자는 없었고 그는 쏟아지는 인기와 관심에 취해 기꺼이 유흥에 자신을 내던졌다.
그렇게 살면서도 그는 자신의 지위와 본분을 잊지 않았다. 1888년 30살의 루돌프 황태자는 보헤미아 주둔군에 소속되어 위험한 정치 활동으로 아버지 황제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루돌프의 귀족과 교회 정치에 대한 비판, 자유주의 성향, 공화주의 사상은 황제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불온사상'이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당혹스러워 아들을 엄하게 추궁했고 한편으로 이해해보려고 애썼지만 전제정치를 지향하는 아버지와 비판하는 아들의 관계는 점차 위험 수위에 다다랐다.
유럽은 연이은 전쟁과 패권 다툼으로 혼란스러웠고 그 가운데서 영원할 것만 같았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점차 영토를 잃고 쇠퇴해가고 있었다.
1866년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쾨니히그라츠에서 격파하고 1871년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는 베르사유의 거울의 홀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독일 제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한 때 오스트리아의 제후국이던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배제하고 독일 제 2제국으로 탄생한 것이다. 다민족으로 이뤄진 제국 체제 때문에 문제거리가 산적해있던 오스트리아는 헝가리를 받아들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탄생시키는 것으로 무마했지만 이는 얼마 가지 못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 내에서 주도적 위치를 영구히 상실하고 궁지에 몰린 황제는 제국의 재건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루돌프의 의견들을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치부했다. 아내와도 그랬었듯, 아들의 정신적인 관심사와 취향에 대해 이해심이 없던 것이다.
황제는 희극을 즐겨서 막내딸 발레리와 극장에 출입했지만 문학이나 음악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루돌프가 작가, 저널리스트와 어울려 예술을 논하고 글을 쓰는 일들을 당연히 이해하지 못했다. 황제는 황태자가 현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한 입문서로 여겨지는 <말과 그림으로 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 24권을 펴낼 때 편집 위원장을 맡고 기사를 썼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황태자의 작품>으로 불리며 1885년에서 1902년까지 진행된 이 편찬 작업에서 루돌프는 1, 2권의 대부분 내용을 직접 작성했다. 일생 동안 황제의 역할 외에 다른 일을 해본 적 없는 프란츠 요제프는 장래 황제가 출판 일에 직접 관여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루돌프가 교사인 알프레드 브렘과 함께 조류학 탐사를 다니자 보수반동과 민족주의 진영, 교회는 그를 자유사상가이며 심각한 반교권주의자라고 비방했다. 그가 프리메이슨에 가입했고 상스럽고 짐승같은 브렘에게 현혹되어 타락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적대자들의 정상에 자리한 황제는 결국 루돌프와 브렘의 만남을 직접 금지시키고 말았다.
루돌프의 죽음은 19세기, 그것도 왕실의 가장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겉으로 알려진 내용일 뿐이다. 그의 자살은 단순한 죽음을 넘어 수많은 다민족으로 이루어져 갈등을 빚고 있는, 낡고 찢어지기 직전에 있는 누더기 옷 같은 제국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유능한 한 사람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낡고 흔들리는 군주제는 절대 왕정의 시기가 지나고 있음을 부정했지만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국가의 절대적 상징처럼 인식되어 국민의 존경을 받았고 그의 존재 자체가 제국의 존속을 유지시켰다. 민중 역시 시대를 뒤덮기 시작한 어떤 파국의 징조를 실감하고 있었다. 빈의 프라터 공원에서는 밤마다 환한 조명과 왈츠와 우아한 음악, 웃음이 넘치고 만연한 명랑한 분위기 속에서 축제와 무도회가 연이어 열렸지만 그 밑바탕에는 생명력을 다해가는 시대에 대한 불안감이 깔려있었다. 시민들 사이에는 자신도 이유를 설명하지 못하는 광기와 자살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실연한 처녀, 성적이 떨어진 학생, 재정적 손실을 입은 신사 등 계층을 막론하고 갖가지 방식의 연이은 자살이 전염병처럼 번져 신문을 장식하고 정신이상자들이 급격히 늘어가는 도시. 그 시대의 빈은 '비단 드레스 밑의 더러운 속치마'로 비유되는 화려함, 변혁의 기운, 소모적인 느낌과 몰락의 예감이 지배하는 세기말의 도시였다.
“빈에서 태어나 자란 우리는 1차 세계 대전 전, 도시에서 멋진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 시대가 끝나리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 했고, 합스부르크 왕조가 몰락하리라는 것은 짐작조차 못 했다. 우리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도시에서 멋지게 즐겼으며 그 위를 비추는 빛이 파란만장한 일몰의 빛이라는 것은 한순간도 생각지 않았다.”(막스 그라프)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 구스타프 클림트의 눈부신 황금빛 색채,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요제프 슘페터, 말러, 쇤베르크, 마카르트, 에곤 살레, 오스카 코코슈카 등이 쏟아져 나왔다. 이상할 만큼 문화와 지성이 한꺼번에 꽃피는 도시에서 예술에 열광하는 빈 사람들은 이런 불안감을 음악과 왈츠를 즐기며 낭만으로 극복하려 했지만 루돌프 황태자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나치게 활달한 시대를 ‘병든 시대’ ‘산 채로 썩어가는 시대’라고 표현했다. 개혁주의와 자유주의, 볼테르와 데카르트에 매료된 그는 제국이 다민족으로 이뤄져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정치적 야망과 러시아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 반교권주의적 견해를 갖고 있어 아버지 황제와 교권주의자인 총리 에두아르트 타페 백작과도 사이가 멀어졌다.
루돌프가 해결하려 했던 문제의 근원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체제에 있었다. 이 시기 제국의 구성원들 사이에는 민족주의와 정체성 찾기가 열병처럼 번져나갔는데 다민족 국가는 근본적으로 모순적인 구조이다. 언어, 문화, 생활양식, 인종 등 서로 다른 민족들을 한 제국 안에 끌어안고 지배하는 것은 자연 서로 간의 충돌과 제국 내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불러왔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성립은 이러한 모순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한 쪽의 요구를 들어주어 진정시켜 놓으면 다른 쪽에서 불만에 차 항의해 왔다.
1867년 이중 제국이 성립되고 헝가리가 특별대우를 받기 시작한 것이 민족 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수없이 금이 간 항아리를 낡은 철사줄로 겨우 한 데 묶어놓은 것'에 비유되었다. 체코 인들은 체코 어를 독일어와 공용으로 취급해줄 것을 요구했고 크로아티아에선 헝가리 타도를 외쳤다/ 슬로베니아는 슬로베니아어를 가르치지 않으면 독일어권에서 분리되겠다고 위협했다. 독일 민족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국민이라는 이유로 정부가 이들의 충성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소수 민족, ‘외국인들’을 우선적으로 만족시키느라 자신들은 뒷전인 정부에 당연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국회의사당에서는 매일같이 각 민족간 대표들이 서로 다른 언어로 폭언을 퍼붓고 고성을 높이는 싸움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 제국을 이루고 있는 민족간 분쟁과 민족주의가 퍼지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아 떨어져 나가려 하면서 이 ‘금이 간 항아리’는 깨지고 말 것 같은 상태였던 것이다.

첫댓글 전 루돌프 황태자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어머니 엘리자베트 황후가 여행 및 외모 관리에 쏟는 시간과 관심의 100분의 1만큼이라도 루돌프에게 베풀어주었다면, 자살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기만 해도, 루돌프가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요.
엘리자베트 황후의 여행 일정도 이래저래 어처구니없어서,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돼요. 하루에 외모 관리를 위한 운동 대여섯 시간, 머리 손질에 세 시간, 옷 입는 데 세 시간씩 걸렸다는 걸 보고, "저렇게 할 거면 도대체 비싼 돈 들여서 여행은 왜 하는 거지?"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더랬습니다.
그라니아님이 쓰신 본문에서도 언급된 이야기지만, 19세기 말, 1900년 즈음의 빈은 거의 불가사의하기까지 한 도시예요. 미술, 사상, 철학, 음악 등에서 역사에 남을 만한 걸작과 위인들이 말 그대로 쏟아져나오다시피 했지요. '이상할 만큼 문화와 지성이 한꺼번에 꽃피는 도시'라는 표현에 백번 공감합니다. 오히려 오스트리아 제국 전성기 때보다 저 세기말 때에, 예술적,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문화적 유산이 훨씬 더 많을 정도니, 이상해 보일 정도예요.
거대한 제국이 멸망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저렇게 문화적 발전과 혁신이 쏟아져나오다시피 하다니, 생각할 때마다 정말 신기합니다.
아마 제국이 멸망하기 전 마지막으로 빛나느라 그랬던 건지도 모르죠~ 해가 지기 전 석양이 젤 눈부신 것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