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길준(兪吉濬, 1856년 양력 11월 21일(음력 10월 24일) ~ 1914년 양력 9월 30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외교관, 작가이며 대한제국의 정치가·개화 사상가·계몽운동가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고 자는 성무(聖武) 또는 성무(盛武), 호는 구당(矩堂), 천민(天民), 구일(矩一)이다.
근대 한국 최초의 일본과 미국 유학생의 한사람이며, 개화파의 이론가로서 수많은 저작물을 발표하여 개화사상을 정립하였다. 그는 서구의 의회 민주주의 체제와 합리주의 사상을 적극 수용해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전근대적인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의 변화, 개혁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실패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이 맺어지자 이 조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었고, 전국민을 선비로 만든다는 목적으로 흥사단을 조직했다.
1870년(고종 7년) 박규수, 강위, 유대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박규수 사후에는 유대치와 강위, 오경석에게서 수학하였다. 1871년 향시에 장원하였으나 번번히 대과에 낙방하고, 당시 과거 시험의 폐단을 비판하였다. 1881년 일본에 파견되는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다녀왔으며 이후 일본과 미국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였다. 갑신정변 실패 직후 귀국하여 6년간 감금당했다가 풀려나 김홍집 내각의 내무부협판과 내무부대신으로 활동하였다. 1894년(고종 31년) 갑오경장 당시 단발령을 전격 추진하였으며, 양력 사용, 신식 학교 건설 등의 개혁정책을 수립했다. 갑오경장과 을미개혁 이후 제도 개편을 추진하다가 아관파천으로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 뒤 고종을 퇴위시키고 의친왕을 추대하려는 정변을 꾸몄다가 발각되어 실패했으며, 1900년(광무 3년) 한국으로 환국을 기획하다가 외교문제가 되자 일본 정부에 체포되어 4년간 구금당했다.
1905년(광무 8년) 11월 을사 보호 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의 한일 합방 야욕을 예상하고 이를 반대하였으며, 교육과 계몽의 필요성을 외쳤다. 이후 계산학교 등의 학교를 설립하고 노동야학회를 조직하여 문맹퇴치와 국민 계몽 등의 활동을 하였다. 국내 산업 자본의 육성을 위해 국민경제회, 호남철도회사, 한성직물주식회사를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흥사단의 조직과 1909년의 한성부민회와 청년학우회 등의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나, 한일합방을 막지는 못했다. 1910년(융희 4년) 10월 1일의 한일합방 역시 반대하였으며, 한일 합방 무효 시위를 기도했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이후 총독부의 회유와 일본 정부가 준 작위를 거절하고 여생을 마쳤다. 그는 각종 저서와 계몽 강연을 통해 서구의 의학, 교육 등 신문명의 존재와 민주주의, 자본주의 등을 소개하였다. 사후 안창호에 의해 애국자이자 이상적인 정치 지도자로 추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