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정산종사의 일제(日帝) 대응
일제 말기의 총부 청문
정산종사는 대종사 열반 엿새 뒤인 원기28년(1943) 6월6일에 종법사에 취임하였다.
대종사가 열반하자 일제는
여느 신흥종교들처럼 불법연구회도 종권 쟁탈전을 벌이다 자멸할 줄 알았으나,
의외로 결속이 잘되어 잘 유지되는 것을 보고 방침을 바꾸었다.
처음에 유사종교로 분류하여 조선총독부에서 관할하지 않고 도경에 일임하여
일개 순사를 파견하여 단속하였으나, 예상 밖으로 회체(會體:교단) 유지가 견실한 것을 보고
당국은 이에 대한 대책을 달리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강제로 해체시키면 민심이 소란해질 우려가 있으니
1944년에는 지방행정 조직까지 전투사령부 체제로 예속되면서
호남 전투사령관인 마끼(牧) 소장이 총독부에 불법연구회의 처리건을 내신하였다.
그리하여 총독부는 종교문제 촉탁으로 있는 일본 불교신문사 사장
나까무라 겐타로(中村健太郞)에게 불법연구회의 실정을 조사하도록 일임하였다.
총부를 방문한 나까무라 촉탁은 불법연구회에
상당히 우호적인 태도로 은근히 생각해 주는 척하면서 그들의 황도불교화 계획을 진행시켰다.
그는 불법연구의 실정을 조사하여 보고하길
강경책을 써서 해산시키면 민심이 소란해질 우려가 있으니 유화책을 써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이 안을 받아들여, 총독부 경무국은 7, 8차의 회의 끝에
불법연구회를 강압적으로 해체시킬 것이 아니라,
저들의 앞잡이로 이용하려는 유화정책으로서 황도불교화 할 계획을 세웠다.
정산 종법사 취임 후 당면한 난관은
패전의 빛이 날로 짙어져 가는 일정당국의 노골적인 탄압과 수탈에 대처하는 일이었다.
일경은 대종사가 열반하면 내분으로 불법연구회가 자멸될 것을 은근히 기대하였으나
일사불란한 계승 전진을 보고 탄압과 수탈을 가중하였다.
일제는 불법연구회의 교화단 조직을 위험시하여 이를 금지시키고,
총부를 비롯한 각 교당의 범종을 헌납이라는 미명 아래 강제 공출하고,
모든 법회는 집회계를 제출토록 하여 임석 경관의 감시를 받아야 했으며,
국방 헌금과 근로 동원이 가중됨은 물론,
산업부의 농작물은 강제 공출되어 총부의 식량 사정이 절박해졌고,
징병 징용훈련 등으로 여자 청년 임원들은 정신대를 면하기 위하여 집으로 돌아가기도 하고
경성 동대문 부인병원(원장 황정신행)에 취업하기도 하였다.
회체(會體:교단) 유지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일제말기 정신대를 면하기 위해 동대문 부인병원에 취업한 총부 여학원생들.
앞줄 서울교도 성의철, 병원장 정자영, 이공주, 병원 건물주 황정신행,
뒷줄 간호보조원으로 근무하는 여학원생 송자명, 이용진, 송영봉, 김서업, 박은섭.
후일 연밥 따는 철 따로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도 불법연구회에서는 은인자중하여 희망을 가졌다.
1944년(원기29) 10월 정산 종법사는 대중들에게
당장의 현상에 절망하지 말고 시간이 지나면 ‘연밥 따는 철이 있으니’
안심하고 동요하지 말 것을 당부하며 다음 한시를 주었다(정산종사법어 국운편 1장).
稽山罷霧鬱嵯峨(계산파무울차아) 계산에 안개 개면 울창하고 높을지요
鏡水無風也自波(경수무풍야자파) 경수에 바람 자도 잔물결은 절로 있다
莫言春度芳菲盡(막언춘도방비진) 봄철 지나 꽃다운 것 다 시든다 말을 마라
別有中流採荷(별유중류채지하) 따로이 저 중류에 연밥 따는 철이 있다
정산 종법사는 또 이런 말로 대중을 위로하였다.
“일본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일하는데 그것은 꼴머슴이다. 후에는 큰머슴이 들어온다.
큰머슴이 들어와야 우리나라가 좋아진다”
1944년 12월, 전라북도 병사부 사령관 마끼 소장이
불법연구회를 친일단체로 만들려는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이리역 앞 2층 집에 연회석을
차려 놓고 박장식 총무부장과 박광전 교무부장을 초청하여 황도불교화에 앞장설 것을 통고하였다.
그뒤 계속적으로 간부들을 불러 회명을 개칭할 것과
『정전』과 <회규>까지 그들의 국체(國體)와 국책(國策)에 맞도록 개편 시행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 일에는 일본측 승려 5, 6명이 계속적으로 불법연구회 총무부장 1인을 상대로 끈질기게 강요,
1945년 2월에 일방적으로 일을 마무리지었다.
이렇게 총독부와 마끼 소장은 긴밀한 연락관계하에 불법연구회 황도불교화 공작을 비밀리에
진행시켜 문서 작성이 끝나고 이제 불법연구회 종법사의 도장을 찍는 순서만 남아 있었다.
황도불교화 인준 피해 정산종사 부산으로 피신
교단 유지가 풍전등화의 위급한 지경에 당하자 정산 종법사는 수석부서장인 총무부장을
전격 교체시켰다. 1945년(원기30) 2월 영산지부장 송도성을 총무부장으로 전임시켰다.
이 무렵 총부 구내에 얼마 남지 않은 대중들은 매일 보국대라는 명목으로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다.
이에 대처하여 송도성 총무부장은 ‘증산대’를 조직하고 자진하여 대장이 되고 대중들의 선두에 섰다.
일제의 생산 증강 근로 보국정책에 응하여 자체 산업활동을 전개하여,
그들의 지시에 의하여 보국대에 나가는 대중들을 새말, 계룡리, 오룡동 등지로 인솔하여 다니며
토탄을 캐도록 하였다. 땔나무가 귀한 때라 토탄으로 연료를 대용하던 시절이었다.
주산 송도성 단장은 매일 작업에 나가기 전 몇 마디 훈시를 통하여
그날의 마음 대중을 잡도록 하고 흩어진 대중의 마음을 결속시키는 한편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인내심과 용기를 갖도록 격려하였다.
일제, 앞잡이로 이용하기 위해 황도불교화 강행, 전투사령부 총부 장악
정산종사, 황도불교화 인준 피해 부산 행가, 총부 귀관중 대전서 해방 소식 들어
송도성 총무부장이 총부의 교정 서정 전반의 일을 책임지고 일사불란하게 이끌게 되자
원기30년 6월 정산 종법사는 전시하 지방교화 시찰이라는 명목을 빙자하여 부산에 내려갔다.
부산 앞바다에 연합군의 B29가 폭격하여 상당히 동요 중에 있었다.
부산과 하관 사이에 미군 잠수함이 연락선을 엎는다는 둥
부산을 향하여 미군이 함포 사격을 한다는 둥 소문이 돌았다.
총부에서는 부산에 있는 교무들을 총부로 오게 해야 한다는 주장과
순직을 각오하고라도 그대로 지부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었다.
정산종법사는 이를 기회로
“내가 가서 실정을 보아 취사해야겠다” 하고 직접 부산으로 내려 갔다.
총독부 경무국 고등계에서는 조선 실정에 밝은 하네야마(華山)라는 승려를 파견하여
불법연구회 전주지부(현 전주 교동교당에 위치함)에 주재시켜
매일 도경과 익산총부를 오가며 서류 수속을 밟고 있었다.
40대쯤 되어 보이는 일본 승려 하네야마는 실상 조선 사람으로,
우리 말을 하는 법이 전연 없었지만 교당에서 숙식을 같이 하고 법회에도 참석하며
일동 일정을 경무국으로 보고하였다.
전투사령부 총부 장악 황도불교화 강행
불법연구회가 온건하게 순응하고 협조하는 듯하면서
황도불교화에 승인하는 마지막 절차는 시일을 늦추고 순응하지 않자
7월25일경에는 이른바 호선군(護鮮軍)이라 이름하는 전북지구 전투사령부를 총부에 진입시켜
대각전과 양잠실을 장악하고 총부 정문에 걸 간판까지 준비하여 왔다.
일제는 군부(호선군)를 총부에 주둔시켜 불교의 황도화라는 마지막 계획에 박차를 가하였다.
불법연구회의 황도불교화는 풍전등화처럼 시간문제로 남아 있었다.
주산 총무부장은 경성 동대문부인병원에 근무하는 야무지고 민첩한 송자명을 전주교당으로 보내 하네야마의 동정을 파악하여 보고토록 조치하였다.
명목은 귀 치료차 귀가한 공양주 후임으로 갔지만
박진오가 솔가하여 교당에 들어와 감원 일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따로 그 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불법연구회 황도불교화 서류 수속은 완료되고 종법사 인준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일제는 부산에 체류하고 있는 정산 종법사의 귀관을 독촉하였다.
그러나 정산 종법사는 부산에서 시일을 끌면서
계속적인 폭격으로 인한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겠다며 귀관 날짜를 늦추었다.
전쟁 말기여서 그들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인 ‘민심 수습’이란 정당한 명목에,
도경은 다만 시국이 안정되어 종법사가 빨리 귀관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정산 종법사는 초량교당에 머물면서 교무들을 당리교당으로 피신시킬 예정으로
초량회관 법당 벽에 ‘사은상생지 삼보정위소(四恩相生地 三寶定位所)’라 써붙이고
시국의 진정을 위해 기도하였다.
총부 귀관 중 대전에서 해방 소식 들어
8월15일, 이날 오전 11시경 전주교당에서였다.
하나야마는 교당 식구들에게 말했다.
“정오에 천황폐하께서 중대 발표를 하니 방송을 듣도록 합시다”
대청 마루 벽에 달린 라디오 아래로 교당 식구들이 모였다.
12시경에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 소리를 듣고
교당 식구들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 지경으로 기뻐하였다.
마루 건넛방에서 방송을 듣던 하네야마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빈 몸으로 나간 뒤 그로부터 그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가 남기고 간 서류에는 불법연구회에 관한 동정은 물론,
요주의 처벌 대상에 대한 인물 파악도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8월15일 이른 아침에, 정산 종법사는 부산의 일을 대강 마무리 짓고 귀로에 올랐다.
기차로 오던 도중 대전역에서 해방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한편 해방되기 6일 전인 8월9일 새벽, 소련군이 두만강을 건너 경홍으로 불시에 진입해 들어와
나진, 웅기, 청진 등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북쪽의 피난민들이 선박을 이용하여 남으로 내려와
군산역, 이리역으로 몰리는 사태를 빚고 말았다.
이에 대처하여 불법연구회에는
일제 당국의 지원을 받아 이리역에서 군인막사를 빌려 구호사업을 전개하였다.
불법연구회의 전재민 구호사업은 여기서부터 시작하였고
이때 사업에 적극 나선 회원들은 거의가 어린 총부 학원생들이었다.
일본이 항복하고 사흘 뒤 호남지구 전투사령관 마끼 소장이 총부에 와서
황도불교화 공작의 사실 전말을 얘기하면서
‘간판까지 가지고 와서 강압적으로 달려고 했던 그 찰나에 해방이 되었으니
이제 당신들끼리 잘해 보라’며 격려하고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