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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법률 |
주요 내용 |
1949 |
혼합결혼금지법 |
인종간 결혼의 금지 |
1950 |
비윤리법 |
인종간 성관계의 금지 |
인구등록법 |
인종별로 등급을 정해 강제 등록 | |
집단지역법 |
인종별로 거주지역 규제 | |
공산주의금지법 |
공산주의 금지를 구실로 정치활동, 노조활동의 제한 | |
1951 |
분리대표법 |
유색인들에게 백인 대표자 4명을 할당하는 방식으로 투표권 제한 |
반투기관법 |
원주민 자치기관의 구성 | |
불법거주금지법 |
거주지역의 이동금지 | |
1953 |
시설분리사용법 |
버스, 기차, 공원시설 등의 인종별 분리이용 |
반투교육법 |
흑인교육을 원주민부로 이관, 흑인교육을 담당하는 교회나 선교단체에 대한 지원 중단 |
2) 남아공 산업화의 진전
남아공은 1960-70년대를 거치면서 도시화된 산업사회로 변화하였다. 국가의 경제성장정책은 한국, 브라질과 유사한 성격의 것이었다. 먼저 국가는 운송체계를 비롯한 인프라를 건설했다. 둘째로 국내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관세장벽을 높였고 국내 생산품과 경쟁하는 제품의 수입을 막았다. 셋째로 공공기관이 산업의 확대에 필요한 투자를 담당했다(Seidman, 1994: 72-73). 이 시기에 특히 제조업, 상업, 금융업 등이 남아공 경제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팽창하는 부문이었다. 제조업의 산출가치는 이미 1940년대에, 남아공에서 가장 먼저 개발된 자본주의부문인 광업을 능가했다. 제조업 종사자는 다른 어느 부문보다 빠르게 성장하여, 1950년 51만 명에서 1980년 146만 명으로 30년 동안 약 세 배가 늘었다.
<표 4-2> 부문별 고용 추이(단위: 1,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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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
1960 |
1970 |
1980 |
1990 |
1994 |
농업, 임업, 어업 광업, 채석업 제조업 전기, 가스, 수도 건설 무역, 요식, 숙박 무역, 창고, 통신 금융, 사업서비스 공동체, 개인서비스 정부서비스 가내서비스 |
1,018 488 510 24 94 364 248 57 75 268 641 |
1,033 601 642 33 123 513 315 120 133 443 695 |
1,076 657 1,083 46 322 737 361 190 182 629 882 |
1,010 769 1,460 79 399 944 502 292 262 976 868 |
892 758 1,517 91 468 1,017 439 448 319 1,325 794 |
861 614 1,476 71 413 925 340 469 318 1,463 767 |
합계 |
3,787 |
4,651 |
6,165 |
7,561 |
8,068 |
7,717 |
자료: Department of Finance(1998).
제조업 가운데서는 특히 중화학공업이 더 빨리 성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남아공의 경우에도 다른 나라처럼 국가의 산업정책과 금융정책에서 혜택을 받은 부문들이 급속하게 성장했는데, 정부는 중화학공업이 경제성장을 주도하기를 기대했다. 1960년대의 경우 가장 성장률이 높은 부문은 자동차를 비롯한 운송장비, 화학․고무, 기계 등이었다.
<표 4-3> 제조업의 산출량, 1954-1972(단위: 1000랜드, %)
산업부문 |
1960 |
1972 |
식품, 음료, 담배 섬유, 의류, 가죽, 신발 가구, 목재, 목재제품 종이, 종이제품, 포장 비금속제품 화학, 고무 기초금속, 금속제품 기계 운송장비 |
218,541 159,300 50,838 98,282 74,460 142,339 228,256 117,049 63,923 |
569,030(8.0) 440,989(8.5) 130,480(7.8) 312,317(9.6) 227,312(9.3) 582,412(11.7) 721,600(9.6) 437,387(11.0) 274,362(12.1) |
자료: Seidman(1994), p. 78.
이런 산업의 성장은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한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특히 중화학공업 대기업들의 출현은 곧, 대규모 공장에서 집단적으로 규율 잡힌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계급의 형성을 의미했고 노동조합운동의 확대․발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남아공의 경우에도 한국이나 브라질의 경우처럼 중화학공업, 특히 금속부문 대기업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운동을 주도하는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한편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백인 노동력만으로는 기업의 숙련노동력 수요를 충족할 수 없어 흑인 노동력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났다. 이는 작업장에서 흑인들의 힘을 강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3) 노사관계와 노동자들의 생활
아파르트헤이트는 남아공 사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남아공 자본주의의 특징이었으며, 그것을 지탱하는 핵심요소였다. 남아공의 노사관계제도 역시 인종차별에 근거한 것이었다. 산업조정법은 백인과 아프리카 노동자들간의 분할을 제도화하여, 비흑인 노동자들에게만 노동조합 결성권을 부여하였으며, ‘산업위원회’(industrial council)제도를 확립하였다. 이에 따르면 노동조합과 사용자단체는 함께 산업위원회를 설립하여 등록할 수 있었고, 산업위원회를 통해 맺은 협약은 교섭당사자 뿐 아니라 해당 산업 내 모든 사람들에게 구속력이 있었다. 하지만 흑인 노동자들은 이러한 체계로부터 배제되었다.1) 흑인 노동자들의 임금은 사용자와 국가의 대표로 구성된 임금위원회에서 결정되었다.
한편 남아공의 경우 직무할당제도에 따라 숙련 직무는 등록된 노조의 조합원들에게 돌아갔다. 1920년대부터 백인 노조들은 백인 노동자들을 저임금 흑인 노동자들로 대체하려 하는 사용자의 기도에 반대하며 정부의 보호를 요구했다. 정부는 흑인들의 숙련 직무 진입을 막아 백인 노동자들의 직무와 봉급을 보호하고자 했고, 특히 국민당은 1950년도에 직무할당제도를 더욱 강화하여, 흑인들이 도제가 되는 것을 막았다.
이에 따라 흑인들은 구조적인 저임금 상태에 놓여 있었다. <표 4-4>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1965-70년경 제조업의 경우 임금수준이 비교적 높았고 백인과 흑인간 임금격차도 작았다. 하지만 제조업에서도 백인들은 흑인보다 약 5배 정도 더 많은 임금을 받았다.
<표 4-4> 제조업과 광업의 평균명목임금, 1965-1970(단위: 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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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업 흑인 |
제조업 흑인 |
제조업 백인 |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
174.72 184.56 191.91 197.77 206.04 216.08 |
487.66 514.86 531.12 573.65 623.98 730.31 |
2,509.31 2,708.95 2,875.91 3,061.17 3,214.87 3,497.67 |
자료: Seidman(1994), p. 83.
흑인 노동자들의 생활은 이주노동시스템, 그리고 흑인거주지의 열악한 환경 때문에 더욱 악화되었다. 흑인들은 거주지에서 직장까지 오랜 시간 동안, 그것도 값비싼 가격으로, 버스를 타고 직장에 출퇴근해야 했다. 1980년대 중반의 한 연구에 따르면 하루 평균 4.5시간이 출퇴근에 소요되었고 임금의 5-20%가 교통비로 지출되었다. 한편 주택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소웨토지역의 경우 침실이 두 개인 집에서 거의 6명 정도가 살았고 다른 지역의 경우에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더욱이 주택부족으로 인한 집세의 인상은 놀라울 정도였다. 예를 들어 요하네스버그 인근지역의 경우 1977-84년 사이에 집세가 400%가 인상되었다(Seidman, 1994: 240-242).
인종차별적인 노사관계체계는 1979년의 법률개정으로 이민노동자와 농업노동자, 가내노동자와 공무원을 제외한 모든 노동자가 산업조정법의 적용대상이 됨으로써 일단 소멸되었고 이는 노동조합운동의 폭발적인 성장을 초래했다. 그러나 인종에 따른 삶의 질의 격차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3. 민족민주운동, 노동운동의 성장과 상호관계
남아공에는 다양한 정치조직, 노동운동조직이 존재한다. 하지만 삼자동맹을 맺고 있는 민족회의, 코사투, 공산당이 현재 남아공을 이끌어가고 있는 중심적인 정치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경쟁세력이 존재하지만 이들이 압도적인 조직력, 정치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당의 경우 민족회의가 압도적인 정치적 지지를 얻고 있다. 현재 민족회의의 국회의원 수는 252명으로 전체 국회의원 수의 2/3에 가깝다. 노동조합운동의 경우에도 여섯 개의 중앙조직이 있지만 코사투(COSATU)가 가장 규모가 크다. 코사투의 전체 조합원수는 약 190만 명으로 다른 모든 중앙조직2)을 다 합친 것보다 많다. 공산당의 경우 민족회의와 노동조합운동 속에서 주로 이념적 지도부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들을 중심으로 논의한다.
<표 4-5> 정당별 국회의원 수
정당 |
의석 |
민족회의 국민당 인카타자유당 자유전선 민주당 범아프리카회의 아프리카기독민주당 |
252 82 43 9 7 5 2 |
<표 4-6> 남아공 노조조직 현황(1994, 단위: 천명)
연맹 |
가입조직수 |
조합원 |
COSATU NACTU FEDUSA FITU SACOL UWUSA |
18 18 25 24 4 4 |
1,900,000 334,733 515,000 236,000 54,290 30,000 |
자료: Webster, E.C.(1998), p. 41.
1) 민족회의
(1) 민족회의의 성장․발전
남아공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은 본질적으로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이었다. 아프리카민족회의(ANC, 민족회의)는 1912년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식민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민족회의는 이 목표에 공감하는 모든 사람들을 결집하는 통일전선조직이며,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백인들뿐만 아니라 혼혈인, 인도인조직들과 회의동맹을 형성해왔다.3)
설립 초기 민족회의는 주로 지식인들이 주도하였고, 그 활동도 정부에 청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아공 경제가 발전하고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노동계급이 대중운동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에 따라 점차 민족회의에서 노동계급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민족회의의 투쟁형태도 청원에서 파업, 시위, 결근투쟁 등 대중투쟁으로 변화하였다.
민족회의가 노선을 전환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46년 10만 명에 달하는 광산 노동자들의 파업이었다. 민족회의 회원이며 공산당원인 J. B. 마르크스가 위원장으로 있던 광산노조는 임금인상, 거주의 개선, 유급휴가 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하였다. 정부는 노조 지도자들을 체포하였고, 시위를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12명의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다. 파업은 진압되었지만, 민족회의의 새로운 출발을 알린 것이었다. 그때부터 민족회의는 흑인 노동계급 회원들을 대변하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과거의 정부에 청원하는 의회주의적 전통에서 벗어나 대중동원이라는 길로 들어섰다.
<표 4-7> 민족회의 연표
1912 1944 1952 1955 1959 1960 1962 1976 1983 1990 1991 1994 |
남아프리카원주민민족회의(South African Native National Congress) 설립 민족회의 청년동맹 설립 저항운동 주도 자유헌장 범아프리카회의(PAC) 분리 민족회의, 범아프리카회의 금지 만델라를 비롯한 민족회의 지도부 체포, 구금 소웨토 학생봉기 민주연합전선(UDF) 설립 만델라 석방, 민족회의․범아프리카회의․공산당 해금 민주적인 아프리카를 위한 회의(CODESA) 시작 최초의 보통선거, 민족회의 집권 |
1959년 후반 민족회의와 범아프리카회의(PAC)는 흑인들에게 통행증제도를 거부하도록 호소했다. 1960년 3월 21일에는 샤프빌 경찰청 앞에서 패스를 불태우는 시위가 벌어졌고, 이 와중에 69명이 살해되었다. 그 다음 주에는 케이프타운, 요하네스버그, 더반에서 대량학살에 항의하는 시위와 총파업이 벌어졌다.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민족회의와 범아프리카회의를 불법화했다.
이후 민족회의는 지하에서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항하는 대중투쟁을 조직했다. 그러나 폭압은 강화되었고 평화적인 대중저항만으로는 여기에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게 되었다. 민족회의는 무장투쟁을 저항운동의 한 방법으로 택하기로 결정하고 1961년 무장조직인 ‘민족의 창’(MK)을 설립하여 주로 공공시설물 등에 타격을 가하는 식의 무장행동을 감행하였다. 또한 대중들 속에서 아파르트헤이트체제에 반대하는 투쟁을 조직하고 지도하였으며, 국제사회에서 아파르트헤이트체제를 고립시키고 남아공 민중의 투쟁에 대한 지원을 조직하는 데 힘썼다.
(2) 민족회의의 이념
1955년 6월 25일 민족회의를 비롯하여 인도인회의, 유색인회의, 백인들의 민주주의자회의 등이 참여한 민중회의에서 채택한 자유헌장은 민족회의와 남아공의 미래를 밝히는 청사진 구실을 했다. 자유헌장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 남아프리카 민중은 우리나라와 세계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공표한다.
남아프리카는 거기에 살고 있는 흑인과 백인 모두의 것이며, 국민의 의지에 기초하지 않는 정부가 권위를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불의와 불평등에 근거한 정부가 토지, 자유, 평화에 대한 우리 민중의 타고난 권리를 빼앗았다.
우리 민중이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누리며 형제처럼 살아가기 전에는 우리나라는 결코 번영하지도 자유롭지도 못할 것이다.
모든 민중의 의지에 기초한 민주국가만이 피부색, 인종, 성 그리고 신념에 따른 차별 없이 모두에게 타고난 권리를 보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남아프리카 민중은 흑인과 백인이 함께 동등한 사람, 동포, 형제로서 이 자유헌장을 채택한다.
그리고 우리는 힘과 용기를 다해 민주주의가 완수될 때까지 투쟁할 것을 맹세한다.
그리고 나서 자유헌장은 남아공이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나라가 되기 위한 요건들을 나열하고 있다.
국민이 다스린다
모든 민족집단은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국민은 국가의 부를 공유한다
토지는 경작하는 사람들이 공유한다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
만인은 동등한 인권을 누린다
단결권을 비롯한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한다
교육과 문화생활의 기회를 보장한다
주택, 의료, 휴식을 보장한다
평화와 우애가 실현된다
한편 민족회의는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민족민주혁명의 전략적 목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민족민주혁명의 전략적 목표는 통합적이며,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없으며 민주적인 사회의 창출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특히 흑인, 일반적으로는 민중을 정치적, 경제적 구속에서 해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남아프리카인들, 특히 주로 흑인이며 여성인 빈자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을 의미한다”(ANC, 1997b).
민족회의는 단순한 인종차별의 철폐나 보통선거권의 획득을 목표로 하지 않고 빈자들의 삶의 개선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도 의회주의적인 것뿐만 아니라 혁명적인 것까지를 포괄한다는 점에서 민족회의의 이념은 민중민주주의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면 이들이 지향하는 사회체제는 어떤 것인가. “우리는 시장이 가지고 있는 많은 긍정적 요소들이 시민들의 삶과 서로 긴밀하게 연계되는 사회질서를 창조하고자 한다. 선출된 대표자와 다른 수단을 통해서 사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인간적이고 바람직한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그 사회는 이른바 무분별한 시장의 힘의 볼모인 이상적인 자본주의 질서의 복제품(특히 소수 기업집단이 지배하는 경제)도 아니고, 기계적인 균등이 실현되는 평등주의적인 유토피아도 아니다. 시장이 중요한 역할을 하되, 국가는 경제의 성장․발전을 보장하고 민중의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며, 정치적 안정과 시민의 안전을 위해 필요한 환경을 제공하는 결정적인 과제를 담당한다.”(ANC, 1997b)
이는 민족회의가 일단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비자본주의 길을 지향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물론 이는 계급적으로는 노동자계급부터 흑인 자본가까지, 그리고 이념적으로는 마르크스․레닌주의부터 신자유주의 경향까지를 포괄하고 있는 민족회의의 내부 사정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2) 노동운동
(1) 노동운동의 성장과 코사투의 창립
남아공의 노동운동 내에는 민족민주주의, 작업장 중심주의, 흑인의식운동/아프리카주의 등 세 가지 주요한 정치적 경향이 있었다(Webster, 1998: 44-46).
우선 민족회의와 공산당이 이끄는 민족민주주의 경향이 있었다. 이런 전통을 대표하는 것은 1955년에 설립된 SACTU이다. SACTU는 민족회의와 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이는 SACTU가 노동조합운동의 기조를 정치적 조합주의로 설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장조직력이 취약하고 국가와 사용자들이 노동조합을 적대시하는 조건에서 SACTU는 경제투쟁이나 현장활동보다는 주로 민족회의의 강령, 곧 자유헌장의 정신에 따른 정치투쟁에 노동자들을 동원하는 데 힘썼다. SACTU는 정부의 탄압으로 1964년부터 공개활동을 중단하고 지하, 망명활동을 하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연합노동자조합(SAAWU)과 완성차부품노동자조합(MACWUSA) 등과 같이 지역에 기반한 노동조합을 통해서 이스턴케이프에서 반지하활동을 개시했다.
<표 4-8> 노동운동 연표
1915 1919 1921 1922 1946 1950 1953 1955 1973 1986 1990 |
국제사회주의자동맹(ISL) 설립 산업․상업노동자조합(ICU) 설립 남아프리카공산당(CPSA) 설립 랜드봉기 흑인광부파업 CPSA 금지 남아프리카공산당(SACP) 설립 SACTU 설립 더반파업 코사투(COSATU) 창립 남아프리카공산당 해금 |
1973년 더반(Durban) 파업으로 노동조합운동이 재개되었을 때, SACTU와 회의동맹의 다른 조직들은 망명지에 있거나, 지하활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더반지역의 노동조합들은 노동조합자문조정협의회(TUACC)를 구성했는데, 이는 1960년대 초반 이후 등장한 최초의 진보적인 노동조합 연대조직이었다. 1979년에 가서 TUACC은 케이프타운의 동부와 서부에서 결성된 노동조합들과 함께 남아공노동조합연맹(FOSATU)을 결성하게 된다.
이 새로운 노동조합들은 작업장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을 강조했다. 이들은 강력한 현장조직에 기반하여, 직접민주주의제도를 통해 조합원들에게 책임지는 노동조합운동을 펼쳐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 경향의 특징은 SACTU의 실수에 대한 평가에서 잘 드러난다. 이들은 SACTU가 현장 조직화를 소홀히 하고 회의동맹의 정치적 캠페인에 몰두함으로써 활동정지 상태를 초래했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민족민주주의 경향에 대한 대안으로서 ‘노동자가 통제하는 노동운동’을 제안했고 정치활동보다는 현장의 일상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집중했다.
세 번째 경향은 아프리카주의/흑인의식운동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흑인 중심의 사회체제를 지향하는 범아프리카회의, 흑인의식운동(Black Consciousness Movement)과 연계되어 있다. 이 경향은 NACTU로 결집했다. 하지만 이들은 노동운동 내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는 못하다.
1980년대 중반 남아공의 반아파르트헤이트투쟁은 시민전쟁의 차원으로 발전하였다. 공장과 흑인거주지에서 파업, 집세보이콧, 버스보이콧, 소비자보이콧, 결근투쟁 등 다양한 형태의 대규모 저항운동이 전개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면서 대중들은 노동조합운동이 민중의 투쟁에 함께 할 것을 요구하였다. 1983년에 설립된, 반아파르트헤이트조직들의 상급단체인 연합민주전선(UDF)에 결합할 것을 요구하였다. 작업장 중심주의 경향을 가진 활동가들은 집행부 선거에서 조합원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결국 FOSATU는 1984년 파업투쟁을 통해 학생운동, 시민운동과 공동행동을 시작하였다.
1985년에 노동운동의 주요한 두 흐름, 곧 민족민주주의와 작업장 중심주의가 결합하여 코사투(COSATU)를 설립했다. 코사투 지도부가 1986년 민족회의의 망명지도부가 있던 잠비아의 수도 루사카를 방문한 이후 그들을 해방운동의 지도자로 인정했을 때 코사투의 정치적 지향은 이미 확인되었다. 이는 곧 코사투가 민족회의와 동맹을 맺고 남아공의 민족민주혁명을 이끌어 가리라는 것을 드러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운동 내부의 의견차이는 어떤 면에서는 조직노동자들과 남아공의 해방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온 민족회의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코사투가 창립 이후 민족회의와 확고한 연대를 형성하고 유지한 것은 SACTU처럼 민족회의의 캠페인을 위해 조직원들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역량과 전략을 가진 동등한 파트너의 지위를 확보함으로써 가능했다.
코사투는 창립 이후 대규모 파업을 주도했고, 조합원 수도 급속히 증가하였다. 국가는 강력한 탄압과 비상사태 선포로 이에 맞섰다. 코사투가 탄압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노동조합 사무실이나 지도부에 의존하지 않고 현장조직에 근거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현장위원회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그들은 조직사업을 주도하였으며 일상활동을 통해 조직력을 발전시켰다. 또한 일상적인 정치이슈에 대해 개입하였다.
코사투는 총파업을 통해 백인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특히 1991년 반부가가치세 캠페인은 코사투가 정부의 반민중적인 정책에 대항하여 광범한 사회부문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 예였다. 코사투의 발의로 시민사회 내의 다양한 조직들이 모여 협상안을 만들었다. 정부가 합리적인 타협안을 제시하지 못하자 결국 1991년 11월 결근투쟁이 벌어졌고 정부는 자신의 안을 철회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코사투는 조합원들뿐만 아니라 남아공의 대다수 민중들의 정치적 희망이 되었다. 코사투는 정치적 센터처럼 행동했다. 청년학생들과 교회는 코사투가 투쟁의 방향을 제시해주기를 요구했다. 대사관, 외국 방문객, 저널리스트들은 코사투의 의견을 조사했다. 코사투는 전체 민족민주운동의 대변자 구실을 했다. 코사투의 견해는 민족회의가 불법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민족회의의 입장으로 간주되었다(Baskin, 1991: 463). 1991년에 유명한 노동조합 활동가이며 광산노조 사무총장인 시릴 라마포사가 민족회의의 사무총장에서 선출된 것은 노동운동이 남아공의 민중운동에서 차지한 지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2) 노동운동의 이념
코사투는 자신의 이념을 명확한 형태로 제시하지 않고 있으나 코사투의 주요 활동가들은 공산당원이며 공산당과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 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자신의 이념으로 내세우고 있고 공산당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다. 공산당은 이를 위한 1단계 과제로서 민족민주혁명을 제기하고, 민족회의와 함께 이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해왔다. 노동계급이 일단계 과제인 민족민주혁명을 주도적으로 수행하면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그 성과를 근거로 이후 사회주의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공산당의 이러한 전략은 남아공사회의 특성에 대한 인식과 관련되어 있다. 공산당은 남아공을 ‘특별한 형태의 식민지’로 정의한다. 이는 남아공은 식민지의 본질적 특징이 유지되고 심지어 강화된 사회인데, 다만 다른 식민지 나라와 달리 식민주의 지배세력과 대다수 억압받는 식민지 피지배자들이 한 나라에 공존하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공산당은 1994년 4월 남아공의 첫 번째 민주선거에서 민족회의가 승리한 후, 새로운 정치상황에서 열린 1995년 9차 총회에서 민족민주혁명의 공고화와 사회주의의 건설을 위한 노력이 자신과 민족해방운동 전체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점을 확인했다. “사회주의는 미래다. 지금 당장 그것을 건설하자”가 공산당의 슬로건으로 채택되었다. 공산당 의장인 은지만데(Blade Nzimande)는 사회주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사회주의는 먼저 소수 독점자본에 의한 국부의 소유를 끝내고 주요 경제부문을 실제 생산자인 노동자들이 장악하는 것, 그리고 소수 자본가계급에 의한 노동계급의 착취를 폐절하는 것이다. …… 사회주의는 노동계급과 그들이 주도하는 국가의 관리하에 국가의 자원을 효과적으로 재분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동구 사회주의가 실패했다는 사실이 사회주의가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사회주의자들에게 세계적으로, 특히 남아공에서 자본주의를 끝낸다는 우리의 목표를 이탈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잘못에서 교훈을 얻을 것을 요구한다.”(Shopsteward Vol. 6.5)
한편 1997년 코사투 6차 총회에서 대의원들은 다른 사회주의세력과 함께 사회주의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지금 사회주의를 수립할 수 있는 일련의 조치를 위해 싸울 것을 결의했다. 코사투 사무총장 실로와(Mbhazima Shilowa)는 총회 이후 “우리가 자본주의적 의제들을 수용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는 우리나라 자본주의 실패를 혹독하게 비판하려 한다. 우리는 공산당과 함께, 경우에 따라서는 민족회의와 함께 사회주의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요약한 대중적인 프로그램을 작성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실패한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대자본과 국민당이 지배한 자본주의이다.”(Shopsteward Vol. 6.5)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와 관련하여 코사투 대의원들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했다(Shopsteward Vol. 6.5).
- 자본주의에 대한 가차없는 대중적 비판을 조직하는 것
- 노동계급조직을 강화하는 것
- 주거, 운송과 기타 사회적 임금관련 기본적 요구를 충족하는 데서 시장의 영향력이 후퇴하게 하는 것
- 경제에서 공공부문과 국가의 강력한 역할을 위해 투쟁하는 것
- 비자본주의 형태의 소유와 사회적 자본(공동체소유 기업)을 실험하는 것
- 노동자 통제를 발전시키는 새로운 사회주의적 형태의 작업조직과 경영방식을 도입하는 것
- 스포츠, 문화, 미디어와 정치 등의 이슈에 관해 노동계급의 헤게모니를 개발하는 것
- 평등 개념을 강조하는 것, 특히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과 억압을 끝내는 것
- 국가가 발전적인 역할을 시작하도록 요구하는 것
- 관료주의를 줄이는 것
- 더욱 민주적인 국가기구를 창출하는 것
- 전통적인 부르주아민주주의 개념을 넘어선 참여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것
- 정부기관과 연금기금 투자자들의 책임성을 확립하는 것
또한 대의원들은 코사투의 동맹 파트너인 공산당에 대해 실질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산당과 공동프로젝트, 공동프로그램을 추진하는 것뿐만 아니라 코사투 산하조직들이 공산당에 재정적인 지원을 하고 작업장에 당조직을 건설하도록 촉구했다.
코사투 6차 총회의 결의는 공산당의 ‘혁명적인 개혁’(revolutionary reform) 노선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산당은 혁명적인 개혁 노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위한 투쟁은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단순하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인 변혁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공산당의 입장에서 현재의 과제는 ‘혁명적인 개혁’을 위한 투쟁을 지속하는 것이다. 혁명적인 개혁은 부분적인 개선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권력의 핵심을 공격하는 것, 변혁을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 국가와 법률이 갖는 가능성을 활용하는 것, 조직적인 대중운동 동력을 마련하는 것, 자본주의 지배계급의 약화, 노동계급과 민중세력의 지속적인 강화이다.”(SACP, 1998: 70-71)
물론 이런 전략이 현재의 국제정세와 남아공의 경제적 조건에서 현실성을 갖기 어렵다는 비판이 폭넓게 존재한다. 또한 사회민주주의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규정할 수도 있다. 근본에서는 자신이 지향하는 사회주의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이고 그것이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 강대국과 초국적 자본이 패권을 장악한 현재의 세계에서 어떻게 작동할 수 있으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도는 무엇인가에 대해 남아공 노동운동이 분명한 답변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아공의 노동운동이 자본주의체제를 넘어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역사적 실험’을 추진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3) 삼자동맹의 구조와 성격
코사투 지도부의 루사카여행은 삼자동맹의 출발점이었다. 삼자동맹은 코사투가 1991년 7월 네 번째 전국총회에서 삼자동맹 참여를 결정함으로써 공식적인 기구가 되었다. 하지만 코사투는 설립 직후부터 공산당, 민족회의와 수많은 공동 캠페인을 벌였다. 1994년 선거에서는 노동운동이 민족회의가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고, 현재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내각, 의회, 정부 등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삼자동맹은 우선 인적 네크워크를 통해 유지된다. 이러한 인적 네트워크는 1970-80년대 시련의 시기에 형성되었다. 당시 노동운동가들과 민족회의 활동가들은 함께 투쟁했고, 활동금지․구금․투옥, 심지어는 암살이라는 위험에 처해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만델라가 27년의 감옥생활 동안 18년을 지낸 유명한 감옥인 로벤섬에서 같이 감옥생활을 했고 거기에서 강한 연대감을 키웠고, 정치문화를 공유하였으며, 공통의 비전을 형성했다(Webster, 1998: 42).
또한 남아공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코사투 산하조직 간부이면서 공산당원이고 민족회의 회원이다. 이를 반영하여 각 조직의 지도부가 서로 겹친다. 예를 들어 1998년 공산당 10차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 30명 가운데는 코사투 사무총장, 광산노조 사무총장, 교사노조 위원장, 금속노조 사무총장 등 수많은 노조 지도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코사투 사무총장은 민족회의 전국집행위원으로도 선출된 바 있다. 이런 인적 네크워크는 각 조직들이 정책을 정식화하고 이행하는 데 서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한다.
한편 삼자동맹은 여러 수준의 회의를 통해 조정된다(Webster, 1998: 43). 이 회의들은 삼자동맹의 숨은 동력이며, 내각 밖에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시스템이다. 첫째, 삼자동맹 간사회의가 있다. 이것은 각 조직의 사무차장과 간사들로 구성되며 2주일마다 열린다. 그러나 이 회의를 전담하는 간사가 없고 별도의 시간이 할애되지 않으며 정해진 의제도 없다. 공산당 사무차장 제레미 크로닌에 따르면 회의가 체계화되어 있기보다는 콰줄루나탈의 문제나 정부기관 구조조정 등과 관련하여 삼자동맹 사이에 긴장이 발생할 경우 소방수 역할을 하는 정도이다. 다음 수준은 전국집행위원들의 회의이다. 이 회의는 자주 열리지 않는다. 하지만 각 조직에서 6-10명 정도가 참석하는 소규모 회의는 토론이 필요한 긴급한 사안이 발생했을 때마다 열린다. 실무운영의 수준에서는 교육과 같은 특별한 부문의 업무를 다루는 전국조정포럼이 있다. 예를 들어 조직활동가들은 종종 특정 지역의 조직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이나 지방수준의 회합을 갖는다.
하지만 각 조직들은 서로 상대적인 자율성을 유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코사투는 정부와 민족회의, 공산당과의 관계에서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 코사투는 재정적으로 민족회의나 정부에 의지하지 않는다. 조합원들한테 조합비를 걷고, 국제 노동운동의 지원을 받아 조직을 운영한다. 그리고 지도부가 민족회의나 공산당보다는 자신의 조합원들에게 책임지는 것을 우선함으로써 동원력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으로 삼자동맹 활동에서 개인은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상대적인 자율성을 갖는다. 제레미 크로닌에 따르면 “우리는 공산당의 위임을 받고 민족회의 집행위원회에 참석하지 않는다. 우리는 공산당의 입장을 취하지만 집행위원회의 한 성원으로서 자유롭게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다수의 입장과 일치하지 않는 입장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Webster, 1998: 43-44).
노동운동, 특히 노동조합운동은 1994년 이전에는 삼자동맹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따라서 조합원들은 노동조합운동이 삼자동맹에서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로의 이행, 특히 선거는 삼자동맹 내부의 세력관계를 민족회의 중심으로 변화시켰고, 노동운동 내에서 삼자동맹의 유효성에 대한 논쟁을 유발했다. 예를 들어 노동조합운동은 과도헌법의 초안을 준비하고 이행기의 일정을 확정하는, 제헌의회 준비모임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민주적인 남아프리카를 위한 회의(CODESA)에 민족회의와 공산당을 경유하여 간접적으로만 참여할 수 있었다.
4. 민족민주혁명, 이행기의 정치
1) 민족민주정권의 수립
1980년대 말이 가까워졌을 때 남아공의 지배체제는 더욱 심하게 동요했다.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지배시스템의 작동을 멈추게 했고 남아공을 통치불능의 상태로 만들었다. 여러 부문의 투쟁의 누적적 압력으로 지배세력은 심지어 자신의 대중기반으로부터 고립되기 시작했다. 민중의 권력 장악이라는 해방운동의 전략적 목표가 현실의 의제로 떠올랐다.
이 시기에 남아공 지배계급과 국제적 동맹세력은 민중봉기와 체제전복이라는 사태가 발생할 경우 이것이 남아공과 아프리카지역 내에서 자신의 이해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한 두려움을 없앴다. 민중운동 쪽에서는 투쟁이 오래 지속될 경우의 인적, 물적 희생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넬슨 만델라, 조 슬로보 등 민중운동 지도부는 투쟁의 기본 목표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대원칙 아래, 협상과 민주적 경쟁(선거)을 통한 체제이행을 배제하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갈등을 더욱 인간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남아공 정부는 민중운동에 대한 강한 탄압이냐 아니면 정치개혁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1989년 후반에 드 클레르크가 보타의 후임으로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는 아파르트헤이트제도를 개혁할 의사가 있음을 드러냈다. 정부는 일정한 수준의 개혁을 통해 체제위기를 막고 백인지배체제를 지속하고자 하였다. 1989년 10월 드 클레르크는 1960년대 초이래 감옥에 있던 민족회의의 지도자들을 석방했다. 1990년 2월에는 민족회의, 범아프리카회의, 공산당의 해금과 만델라의 석방을 선언했다. 이때부터 민족회의와 정부간의 정치협상이 본격화되었다.
민족회의는 “협상은 민주주의와 아파르트헤이트 사이의 타협이 아니라 정의와 인권이라는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원칙을 관철하기 위한 과정에 관한 것”(ANC, 1997b)이라는 입장에서 협상에 임했다. 그러나 정부는 소수백인 위주의 규칙과 특권을 가능한 한 유지하고자 했다. 협상은 갈등의 해결책을 찾기 위한 장이면서 힘의 균형을 이동시키기 위한 투쟁의 장이었다. 정권은 협상과정을 좌절시키고 가능한 한 연기하는 한편 보안군의 폭력과 선전을 활용했다. 민중운동은 민중과 국제사회를 계속 동원했다. 한편 테러가 횡행하던 시기에 무장투쟁을 중단하는 등 유연한 대응을 통해 협상을 진전시키고자 하였다. 결국 민중의 강력한 결의와 국내외 여론의 압력에 밀려 정권은 남녀평등을 포함한 보편적인 민주주의원리에 걸맞은 정치체제의 정착이라는 큰 틀을 인정했고, 협상은 임시헌법의 채택, 1994년 4월 첫 번째 민주적 선거, 민족회의가 지도하는 새 정부의 설립으로 귀결되었다.
하지만 이 승리는 몇 가지 점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ANC, 1997b). 먼저 민중운동이 전장에서 철저한 승리를 이루지 못함으로써 협상에서 지배집단이 별다른 저항 없이 권력에서 물러나도록 하기 위해 그들과 타협해야 했다. 국민당 등 보수세력을 포함하는 국민통일정부를 수립하고4), 아파르트헤이트체제를 유지․강화하는 데 앞장섰던 보안군, 사법기구와 정부 산하기관 등 기존 공무원들의 고용을 보장한 것 등이 이를 잘 드러낸다.
둘째로 민중운동은 국가기구를 원래대로, 그것이 설정한 규칙에 따라 질서있게, 그리고 대다수 사람들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로 결정된 상태에서 인수했다. 헌법은 새 정부가 국가기구를 변혁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이것은 국가기구 내부의 저항과 싸우는, 길고 지루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셋째, 대다수 공무원, 특히 고급관료들과 자본가들, 대부분의 언론은 여전히 소수백인 지배시기의 인종차별, 성차별 관행과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민족민주혁명을 추진하는 데서 제기되는 여러 의제를 특권계급에 유리한 것으로 변형하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마지막으로 구정권이 남아공 내외에서 ‘더러운 전쟁’에 활용하던 네트워크가 국가기구와 기업에 그대로 남아있다.
2) 전망
민중운동은 그 동안 정치적 민주화, 평화와 안정, 사회경제개혁, 인프라개혁, 의료개혁, 토지개혁, 여성해방, 교육개혁 등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만델라는 1997년 코사투 6차 총회 연설에서 그간 빈자들을 삶을 개선하는 데서 이룩한 성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민주화운동이 집권한 이래 매일 1천명이 신선한 물을 새로 공급받게 되었다. 매주 약 2만 명이 이용할 수 있는 2개의 클리닉이 새로 세워졌다. 매일 천 가구에게 새로 전기가 공급되고 있으며, 정부의 보조프로그램으로 이틀 반만에 천 개의 주택이 세워졌거나 세워지고 있다.”(Shopsteward Vol. 6.5)
한편 노동운동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높아졌다.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이제 내각, 의회, 정부기관에서 결정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으로 노동운동은 전국경제발전위원회(NEDLAC)와 같은 3자기구를 통해 정부의 경제사회정책에 개입하고 있다. 특히 노동문제와 관련하여 자본가계급과 언론의 엄청난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족회의 정부와 삼자동맹은 국회를 통해 노사관계법과 고용조건기본법 등 진보적인 법률을 관철했다. 이 법률들은 노동시장과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체제 아래서 경제자원의 불평등한 분배, 산업발전의 왜곡, 광범위한 빈곤, 인종차별적이고 비효율적인 공공서비스, 극도로 분절된 노동시장 등으로 특징지울 수 있는 경제구조가 형성되었고, 이런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점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 남아프리카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소득분배구조를 가지고 있는 나라의 하나이다. 남아프리카와 유사한 경우는 브라질, 칠레, 과테말라 같은 나라들뿐이다. 전체 아프리카인 가구의 95%가 빈곤선 아래의 생활을 하고 있다. 실업률은 높고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대부분 겨우 생존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임금을 받는다. 많은 가구는 주택, 물, 전기, 양육에 대한 지원 등을 이용하지 못한다. 실례로 가장 빈곤한 53% 가운데 약 80%는 전기를, 70%는 수도를, 80%는 하수도를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정권이 바뀐 뒤에도 경제권력의 중심은 변화하지 않고 있다. 거대한 기업집단은 여전히 투자와 금융을 장악하고 있다. 토지분배는 아파르트헤이트시대처럼 인종차별적이다.”(COSATU, 1997)
더욱이 정부의 경제정책은 ‘재건과 발전을 위한 강령’(RDP)5)에서 벗어나 노동운동과 민중의 요구를 거스르는 방향으로 설계되고 있다. 이런 점은 1996년 정부가 ‘성장, 고용 그리고 재분배’(GEAR)를 발표하면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1996년 2월부터 시작된 남아공의 통화위기로 랜드(Rand)화의 가치가 25% 이상 떨어지자 정부는 국내 자본시장과 외환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고위 공무원과 남아공개발은행(DBSA) 그리고 세계은행(World Bank)의 간부들로 구성된 정책팀을 급조해서 보수적인 거시경제정책 프로그램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재무장관인 트레보 마뉴엘(Trevor Manuel)은 그해 6월에 새로운 전략으로 ‘성장, 고용 그리고 재분배’(GEAR)라는 계획을 발표했다. GEAR는 정부역할과 공공부문의 축소 등 신자유주의적 요소를 담고 있었으며, 삼자동맹 내부의 협의를 거치지 않았다. 노동운동은 GEAR가 실업의 증대와 고용창출의 희생, 사회서비스 지출의 축소, 이데올로기적으로 추진되는 민영화프로그램의 확대, 노동기준을 훼손하는 노동시장의 탈규제, 관세인하의 가속화와 같은 수용할 수 없는 산업․무역정책 목표 등을 초래할 것(Shopsteward Vol. 6.5)을 우려하면서 거기에 대한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이런 조건에서도 노동운동은 보수세력의 간절한 바람인 삼자동맹 와해를 막고 오히려 그것을 더욱 강화하는 길을 택했다. 이를 통해 노동계급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면서 민족민주혁명을 더욱 공고히 하고 체제이행의 길을 열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남아공 노동운동은 변혁전략의 선택에서 결정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요인인 세계화추세에 대응하여 국가주권의 수호, 인력개발을 포함한 경제발전, 남아프리카지역경제의 발전, 다양한 국제연대의 추진 등을 모색하고 있다. 남아공의 미래는 노동운동과 민중의 힘에 달려 있다.
5. 한국에의 시사점
인종차별이라는 민족문제를 근거로 하여 폭넓은 전선조직인 민족회의를 통해 결국 정권을 장악하는 데 이른 남아공의 경험이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되기는 힘들 것이다. 우선 객관적인 조건이라는 면에서 남아공의 상황은 과거 일제 식민지시기 우리나라의 경우와 유사한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남아공의 인종차별과 같이 대중들의 광범한 공분을 일으킬 만한 핵심 이슈가 존재하지 않으며 이미 보통선거권을 비롯한 형식적 민주주의를 확보하고 있다. 따라서 예를 들어 전선형태의 조직형식, 무장투쟁과 같은 투쟁방식이 우리의 운동에서 전략적인 지위를 갖기는 힘들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런 점을 전제하고 남아공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실현하는 데서 노동운동이 담당한 역할과 관련한 시사점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1) 노동운동의 사회적 역할
현재 남아공의 노동조합운동, 특히 코사투는 사회적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고 집권세력으로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무엇보다 노동조합운동이 인종차별의 철폐라는 남아공 사회의 주요 모순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운동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한 일이 곧 정치세력화의 근간이 된 것이다.
국제통화기금의 관리체제에 들어서서 구조조정과 고용조정에 따른 대량실업이라는 위기를 맞이한 이후 한국 노동조합운동은 조합원들의 고용안정에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일정한 편향이 나타나고 있는 듯하다. 노동조합운동이 조직되어 있는 일부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이면서 대량실업 상황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있는 실업자, 비정규직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고용안정이라는 절실한 요구 때문에 재벌체제의 개혁, 조세개혁, 사회보장의 확충 등과 같은 사회개혁 요구가 뒷전으로 밀리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노동조합운동이 조합원들의 단기적이고 협소한 권익을 실현하는 데만 몰두할 경우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요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노동조합운동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을 피하면서 일반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얻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동운동의 역사적 경험은 이 경우 자신의 조직을 확대․강화하는 일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출발점은 바로 노동조합운동이 사회적 역할을 강화하는 일인 것이다.
2) 폭넓은 연대와 노동운동의 지도력
노동운동은 인종차별 철폐라는 공동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노동자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적인 자본가까지 광범한 계급․계층을 포괄하고 있는 민족회의와 함께 싸워왔다. 협소한 민족주의를 반대하고 흑인들만이 아니라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모든 민주인사들과 연대하여 민족민주혁명을 이끌어 왔다.
물론 이 속에서 노동운동의 요구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남아공 노동운동은 노동자계급의 지도력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굴절 없이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이해를 실현하는 투쟁에서 가장 헌신함으로써, 올바른 노선과 전략을 제시함으로써 발휘되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노동운동가들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면서 무장투쟁과 대중투쟁을 이끌고 지도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해방운동과 계급투쟁의 결합이라는 올바른 노선을 제시함으로써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활동가들과 대중을 폭넓게 결집하였다. 한편으로 ‘민주적 경쟁’을 통한 정권장악이라는 방향의 정립, 테러가 횡행하던 시기에 무장투쟁의 중단 등 유연한 대처를 통해 민족민주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
한국의 경우 일단 노동자계급이 주체가 되어 정당건설을 추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정당의 성격은 일단 노동자계급이 주도하고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반영하는 정당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정치세력화의 목표가 정권장악과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에 있다면, 광범위한 진보세력을 포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 경우 각 계급․계층간에 이해관계가 서로 다름에 따라 대립․갈등의 가능성이 없지 않고 이것을 조절․통제하는 일이 주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강력한 조직력을 가진 노동조합운동이 한편으로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대중행동에 나설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상당한 인내심과 자제력을 발휘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몰론 노동운동은 폭넓은 연대를 유지․강화하는 일뿐만 정당이 올바른 전략과 노선을 이끄는 역할을 담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노동운동이 다른 운동이나 세력을 자신의 이해관계를 실현하기 위해 동원하기보다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가장 헌신적으로 투쟁하며, 투쟁과정에서 내용적인 지도력을 확보하는 일이다.
3) 새로운 전망과 대안
남아공 노동운동은 RDP라는, 남아공이 지향해야 할 전망을 제시함으로써 노동자들과 민중을 동원해왔다. 이제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새로운 전망을 내놓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한편 거시경제정책에서 노사관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책결정과정에 개입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나름의 대안을 내놓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노동운동이 정부나 자본의 정책에 대한 ‘반대’ 이상인, 나름의 전망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철저한 민주주의의 실현 또는 근본적인 사회개혁에 대한 공감대 이상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선거라는 경쟁의 장에 뛰어들 경우 새로운 전망과 정책대안은 더욱 필수적인 요건이다. 우리가 바라는 사회는 어떤 사회이고 경제, 사회, 노사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리고 구조조정에 대한 우리 노동조합운동의 전략은 무엇인가. 구조조정에 대한 반대인가 아니면 사회통합적 구조조정인가. 우리는 여기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실장
1) 1979년까지 산업조정법(노사관계법)은 인종차별조항을 포함하고 있었다. 1956년 법의 인종차별조항은 다음과 같았다. “아프리카노동자(즉, 토착 혹인 노동자)는 등록된 노동조합의 조합원이 될 수 없다. 특정 인종(백인, 혼혈인, 그리고 인도인 등)의 노동조합만이 등록될 수 있다. 여러 인종이 섞여 있는 노동조합은 백인 조합원이 집행위원회의 다수를 차지했을 경우에만 등록될 수 있다.”
2) NACTU는 흑인의식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고 범아프리카회의와 연계를 맺고 있다. FEDUSA는 사무직에 속하는 노동자들을 대변한다. UWUSA는 줄루족에 기반한 인카타자유당의 노동조직이고 소수만을 조직하고 있다. 가장 오랜 연맹인 SACOL은 백인들로 조합원을 제한하고 있고 우익 보수당과 연계를 맺고 있다. 마지막으로 주로 과거의 직업별노조에서 비롯된 FITU가 있다.
3) 이런 점에서 민족회의는 배타적인 아프리카민족주의를 취하고 있는 범아프리카회의(PAC)와 구별된다.
4) 신정부는 ‘국민통합을 위해’ 클레르크를 제2부통령으로 선임하였으나 그는 이후 사퇴하였다. 제1부통령은 민족회의의 음베키이다.
5) RDP(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Programme)는 민족회의의 선거강령이었다. RDP의 기원은 1990년 후반 금속노조(NUMSA)가 제안한 재건협약(reconstruction accord)이다. 금속노조는 코사투가 선거에서 민족회의를 지원하는 대신 민족회의로 하여금 노동계급의 주장을 수용하도록 하고자 하였다. 민족회의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1993년에 이름을 RDP로 바꾸었다. RDP의 핵심내용은 필수적 요구의 충족, 인적 자원의 개발, 경제의 건설, 국가와 사회의 민주화 등이다.
최근 남아공 정치 및 노동 동향
가. 개관
ㅇ 1994.4 전인종 참여 민주선거를 통한 Mandela 정권 수립에 이어 1999.6 집권당(ANC: African National Congress)의 Mbeki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 되었으며, 2004.4 실시된 총선에서도 ANC는 압도적 지지(총투표자의 69.7%)를 획득, Mbeki 대통령의 재선 달성
- 2004.4 총선결과 ANC는 의회 총 400석중 279석을 획득하였으며, 야당인 DA(Democratic Alliance) 50석, IFP(Inkatha Freedom Party) 28석, 기타 군소정당 43석 각각 획득
ㅇ 흑인 민주정부가 수립된지 10년이 경과한 현재, 정치적 안정과 보수적 거시경제정책 운용에 따른 제반 경제지표의 안정화는 상당부분 달성되었으나, 실질 경제상황 개선수준은 흑인다수의 기대수준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
- ANC가 IFP를 제외한 사실상의 유일한 흑인정당으로서, 흑인다수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기는 하나, 표면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경제노선을 주창하고 있어, ANC와 소위 삼자동맹(Tripartite Alliance)으로 불리고 있는 COSATU(흑인노조)와 SACP(공산당)간 일부 정책노선(고실업문제 해소방안 등)을 둘러싼 이견과 ANC의 독단적 정책결정 및 집행 등으로 인한 균열 가능성도 상존
ㅇ 특히, 실업(공식실업률 30%), 빈곤, 범죄 및 HIV/AIDS(560만명 감염) 만연이 주요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바, 음베키 대통령은 2005년 국정연설에서 향후 10년간을 “Second Decade of Liberation”으로 명명, 주요과제로 아래를 제시
- ①민주주의 공고화, ②인종주의 청산(non-racial society), ③성적차별 철폐(non-sexist society), ④빈곤 및 저개발 극복, ⑤개인의 정신적․물질적 성취 기회 제공, ⑥치안․안보 확보, ⑦강하고 민주적인 국가 건설, ⑧아프리카 르네상스의 승리와 삶의 질 고양
- 또한 빈부격차 확대를 우려, 백인 부유층이 주도하는 제1경제(First Economy)와 대다수 흑인들의 제2경제(Second Economy)간 격차문제 해결을 위해 도시재개발, 농촌개발, 공공건설사업, 중소기업 창업융자, 기술교육 실시 필요성 강조
나. 개혁정책 추진
ㅇ 한편, 남아공 정부는 과거 인종차별정책에 의해 백인계층이 독점했던 경제적 부의 재분배 일환으로 2003.3월 광범위한 흑인기업 육성전략(Strategy for Broad-Based Black Economic Empowerment) 발표, 산업별 흑인지분 및 흑인경영자/종업원 비율을 규정하고, 흑인기업에 대한 금융지원 및 정부조달시장 입찰에 우선권 부여
- 이는 흑인정부 출범 10년 이상이 경과한 현재 정치적 안정은 달성되었으나, 경제적 불평등은 여전히 존재, 이의 해소를 위한 정책이 요구되고 있기 때문인 바, 이에 힘입어 흑인기업은 석유화학, 광업분야 및 민영화 추진 국영기업에 이어 최근에는 건설, 금융, IT분야로의 진출이 확대
ㅇ 상기 정책은 산업별 지분 및 소유/관리권의 흑인 이전에 중점을 두고 있는 바, 최근 일련의 국영기업 민영화 과정에서 집권여당 ANC 등 정치권과 연계된 소수 흑인기업가들이 우선적으로 혜택을 보고 있어, 동 정책에서 소외된 다수흑인들의 불만이 점증
- 이와 관련, 기존 백인주도의 경제와 기득권을 지속해나가려는 백인야당 들은 물론, 집권여당 ANC와 정치적 동맹관계에 있는 남아공 노조연맹과 공산당 측에서도 현 정부의 흑인기업 육성정책이 소수흑인들에게만 혜택을 주고 있다는 비판 제기
다. 최근 국내 정세
ㅇ 헌법상 연임이 한번만 가능한 현 상황 하에서 향후 음베키 대통령 후계구도 및 2009년 대선을 겨냥한 ANC내 권력 투쟁이 본격화 될 것으로 전망
ㅇ 특히, 차기 대통령 후계자로 간주되던 주마(Zuma) 부통령이 뇌물수수 혐의로 해임되었고(2005.6월), 동 해임결정에 주마 부통령을 지지하는 ANC내 노동조합 및 공산당 세력들이 반발하고 있는 가운데, 최근 ANC 전당대회(07.12)에서 Zuma 가 Mbeki 대통령을 누르고, ANC 의장으로 선출됨.
ㅇ Zuma 의 ANC 의장 당선결과, Mbeki 대통령의 레임덕 현상이 조기 가시화가 예상되는 가운데, 2009년 차기 대통령 선거까지의 잔여 임기동안 Mbwki 대통령과 Zuma ANC 의장간 권력다툼이 치열해 질것으로 전망됨.
- 집권 정부의 검찰은 Zuma 의장의 기존의 뇌물수수협의와 관련, 기소하려는 움직임을 보임.
남아공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문화 등의 미래를 점쳐볼 수 있는 남아공 집권당인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African National Congress) 총재 선거가 2007년 12월 20일 실시되었다.
이번 선거에서 전 부통령이자 현 ANC 부총재인 제이콥 주마(Zuma)가 현 남아공 대통령인 타보 음베키(Mbeki) 대통령을 물리치고 집권 여당인ANC 총재로 선출됐다. 민주화 투사 출신으로 좌파 성향인 주마 신임 총재는 림포포(Limmpopo) 주 폴로콰네에서 열린 제52회 ANC 전당대회의 총재 선거에서 전체 3834표 중 2329표를 획득, 1505표를 얻는 데 그친 음베키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당선했다.
이에 따라 주마는 2009년 퇴임하는 음베키 대통령의 뒤를 이어 차기 대통령직에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현 남아공 대통령 선출이 의회에서 이루어지는 간접선거이며 현재 여당인 ANC는 의석 수 2/3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무난히 주마가 대통령으로 취임할 것으로 예상된다. 때문에 이번 선거는 향후 5년간 남아공을 이끌 지도자를 뽑는 선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남아공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번 ANC 전당대회는 1994년 이후 실시된 다른 전당대회와는 여러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전의 당 총재 선거를 위한 전당대회에서는 이미 ANC 의장 후보를 내정하여 전당대회에서 형식으로 추대하는 형식으로 의장을 선출하였다. 넬슨 만델라도 마찬가지였으며 또한 음베키 역시 부총재에서 자연스럽게 의장으로 지명되어 만델라를 계승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즉 이번 선거는 ANC 역사상 58년 만에 처음으로 경쟁을 통해 당 총재를 선출하게 되었다.
ANC 총재 후보로는 현대통령인 타보 음베키(Mbeki)와 전 부통령이었던 제이콥 주마(Zuma)가 경쟁하였다. 주마 전 부통령은 음베키 정부 초기에는 부통령과 ANC 부총재를 맡으면서 남아공 국정을 이끌어 왔으나 성폭행스캔들과 뇌물 사건 등으로 잇따라 기소되면서 도덕성에 타격을 입고 부통령직을 물러났다. 그러나 성폭행에 대해서는 이미 무죄판결을 받았으며 뇌물사건에 대해서는 아직도 미해결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타보 음베키의 당 총재 선거 출마이다. 남아공은 헌법은 대통령의 연임만 허용하며 3선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타보 음베키 대통령은 이번 총재선거에 출마함으로써 정치적 논쟁에 휩싸였다. 음베키 측은 대통령의 3선은 가능하지 않지만 당 총재 출마는 제한한다는 ANC 규정이 없기 때문에 출마에 아무런 법적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논리로 인해 음베키는 이번 선거에 출마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다 큰 남아공 정치문제를 살펴보면 음베키의 당 총재 출마에는 많은 정치적 고려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음베키가 당 총재에 당선됨으로써 주마의 대통령 당선을 막으려는 의도가 가장 크다. 음베키가 당 총재이 되면 자신은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지만 자신이 신뢰하는 인물을 대통령으로 추천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대통령 퇴임 후에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남아공의 복잡한 종족문제이다. 남아공은 현재 11개 언어를 공식으로 사용하며 종족에 있어서도 20여 주요 종족이 있다. 이 중 줄루(Zulu)족이 약 23%를 차지하며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고 다음은 코사(Khosa)족으로 약 17%를 차지하고 있다.
남아공의 현 대통령인 타보 음베키는 만델라 전대통령에 이어 남아공의 두 번째 큰 종족인 코사족 출신이다. 그러나 최근 ANC 부총재이자 전 부통령이었던 제이콥 주마를 비롯하여 시릴 라마포사, 토쿄 섹스웰르 등 유력 대통령 후보들은 남아공 최대종족인 줄루족 출신들이다. 이는 ANC 내 권력구도에서 현정부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코사족 출신의 관료나 ANC 당 고위 간부들이 의도적으로 줄루족 출신들을 견제하기 시작하면서 종족간의 갈등이 표출되고 있다.
이의 대표적인 사례는 2005년에 부패 혐의로 기소되었던 전 제이콥 주마부통령 사건이다. 주마 전부통령은 2005년 사티크(Shaik)가 유죄판결을 받은 후 부패혐의로 기소되었다. 이 사건동안 주마는 그의 지지자에게 음베키 후계자로 오르려는 것을 막으려는 세력들의 공모에 의해 정치적으로 희생을 당하고 있음을 주장하였다. 특히 주마를 지지하고 있는 남아프리카 노동조합연맹(COSATU)의 공식적인 견해이기도 하다.
사실 ANC 내부적으로는 코사족과 줄루족 간의 종족간 파워게임 혹은 현재 남아공 집권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삼자동맹의 두 축인 급진좌파격인 남아공 최대 노동조합단체인 남아공노동조합(COSATU)과 남아공 공산당(SACP) 연합과 온건 개혁노선을 걷고 있는 현 ANC 구성원들 간의 파워게임이 시작되었다고들 말한다. 이들 게임에서 승리하는 측에 따라 남아공의 향후 정치향방도 많이 달라질 것으로 보여 남아공 내부 뿐만 아니라 외부세계에서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즉 COSATU와 SACP가 내세우는 인물이 총재나 대통령으로 선출될 시 남아공내에서는 급격한 정치, 경제적 변화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면, 짐바브웨식 토지개혁이나 혹은 지금까지 계속 추진되고 있는 국영기업의 민영화가 중단되는 등 급진적인 경제개혁 등으로 남아공 경제의 불안정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급격한 경제개혁이 짐바브웨에서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잘 알고 있는 남아공 정치인들이 이것을 실시할 지는 의문이지만 단기적으로는 백인들의 탈 남아공 현상이나 외부에서의 직접투자 감소 등이 뒤따를 수 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두려움으로 인해 타보 음베키를 중심으로 한 온건파들은 음베키 이후의 대안인물을 고심하였다.
이처럼 남아공 내의 종족문제나 혹은 정치성향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이번 선거는 ANC 전당대회 역사상 유례가 없는 상대방에 대한 비난전이 가열되어 만델라 전대통령 등은 우려를 표명하기도 하였다. 데스몬드 투투 주교의 경우 음베키와 주마 모두 당 총재로서 적절하지 않다고 비난하였다. 이번 당 총재 선거의 후유증으로 ANC가 분열될 수 있다는 일부 전문가들의 견해도 나오고 있다. 물론 당 분열까지는 가지 않을 것으로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ANC 이외의 대안이 현재까지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마의 승리로 이번 당 총재선거가 막을 내렸지만 2009년 차기 대통령 선출 때까지 남아공 정국 불안에 대한 우려도 크다. ANC 총재 3선 연임을 시도한 음베키 대통령과 주마는 경선 과정에서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이번 전당대회에서 ANC의 주요 보직까지 장악한 주마 측은 당의 실질적 최고기구인 전국집행위원회 등을 통해 정부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음베키 대통령의 권력누수에 따른 조기 사퇴설도 거론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주마의 부패 혐의도 현재 진행 중에 있어 재판 결과에 따라 그의 당 총재지위도 유동적이라 할 수 있다. 주마는 2005년 부패 혐의로 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후 2006년 9월 법원이 공소기각 결정을 내려 정치적으로 복권했다. 그러나 검찰은 금품 수수 등 주마의 부패 혐의를 입증할 새로운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내년에는 기소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즉 검찰이 그의 혐의를 입증하여 재판에서 유죄판결이 나오면 주마의 대통령 도전은 위협을 받게 될 것이며 이는 남아공에서 종족간의 갈등이 표출될 수 있는 정치적 잠재 불안 요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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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0 | ||
지난 주 ㅍ인터넷뉴스에서 25-29일에 있을 한미 FTA 저지 총파업 계획을 놓고 매도하는 기사를 써 논란이 되었다. 노동조건 개선과는 관계없는 불법파업이라고 주장하는 정부측 입장을 주류 언론이 고스란히 대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칭 진보웹저널이라 하는 ㅍ 인터넷신문에서도 같은 주장을 했다니 ‘매도’논란 이상이 될 만하다. 사실상 한미 FTA가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환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은 자명한 일인데 노동자들과 ‘무관한’ 것으로 단정 짓고 이를 ‘정치파업’으로 규정짓는 것은 결국 파업 자체를 불법화하고 한미FTA 저지에 대한 노동계의 움직임을 사전에 단속하겠다는 의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공무원노조가 철야농성을 하고 금속노조의 총파업 선언이 있었는데, 아프리카 대륙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15년만의 대규모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파업이 있었다.
대부분의 학교와 병원들은 이미 13일동안 문을 닫고 있는 상태이고, 노조들에서는 그들의 파업의 규모가 수요일에 최고조에 달할 것이라고 하면서 노동자들에게 일일 연대 파업에 참여하라는 촉구를 했다. 남아프리카노동조합회의-코사투-의장인 윌리 마디샤는 이 백만명의 남아공인들이 파업에 참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최고조에 달할 것이라고 했던 13일에는 남아공 공무원 노조를 포함해 공공부문 노동조합들이 전국 46개 지역에서 각각 집회를 열었는데, 요하네스버그에서는 약 5만 명, 남아공 수도인 프리토리아에서는 약 1만 명이 모였다고 한다. 이번 파업을 주도하고 있는 남아프리카노동조합회의(COSATU)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해 줄 것을 180만 조합원들에게 호소했다.
파업에 참가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전력, 교통시설부터 환경미화원, 그리고 병원 간호사들과 학교의 교사들까지 모두 아우르고 있다. 하물며 코사투(COSATU)는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경찰교도관 노조들까지 파업에 참가할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이번 파업에서의 쟁점은 임금 문제이다. 지난 해 10월부터 정부는 임금교섭에서5.3%의 임금 인상안을 제시했고, 이에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12%의 인상을 요구했다. 지금까지는 진행된 협상안에 제시된 양측 입장은 정부안이 7.5%, 공무원 노조측의 10%로 여전히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임금 이외에도 주택수당 및 의료수당 개선, 그리고 파업과정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의 복직을 요구하고 있다.
사실상 노조측이 협상을 거부하게 만든 ‘파업노동자 해고’의 전말은 파업중인 병원노동자-간호사 600명을 해고한 것으로 노동자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보복성 해고였다. 한국의 경우에도 합법적인 파업을 하고 있는 간호사들이 강제연행과 해고, 그리고 언론의 ‘이기적 집단’이라는 비난에 부당한 매도와 고통을 겪어야만 했었다. 이번 파업은 인종분리정책과 차별의 대명사였던 ‘아파르트헤이트’ 아래에서의 불평등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이 계급적 차별 종식으로까지 이어지지 않는다는 너무나 당연한 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파업을 주도하고 있는 남아프리카노동조합회의-코사투(COSATU)는 음베키가 정치적 배경인 집권 ANC(아프리카민족회의), 남아공 공산당과 함께 3자 동맹을 맺고 있다. 하지만 음베키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고집하고 있을뿐더러 친서방의 자본에 ‘유연한’ 정책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 왔고, 게다가 남아공의 빈곤문제 해결에 대한 의지보다는 무능함을 보여주고 있어서 코사투가 ANC와의 정치적 동맹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어 왔다. 움베키는 2001년 알제리의 부트플리카와 나이지리아의 오바산조와 함께 ‘아프리카 개발을 위한 새로운 파트너쉽-NEPAD’를 결성했던 인물이다. 이 조직은 아프리카 주도로 이뤄졌다기 보다 G8로 대표되는 서방권력자들에 의해 계획된 것이라고 얘기되고 있다. NEPAD에서는 글로벌 경제체제에 적극적으로 편입하고 민간사회 역할을 강조하면서 아프리카의 지속가능 개발과 빈곤타파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상 의제를 협소화시키고 IMF나 세계은행, 그리고 오히려 아프리카의 현재 빈곤 문제에 책임이 있는 서방국가 권력자들의 대 아프리카 정책에 맞춰 자발적으로 아프리카 체질 개선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비판을 받아왔다. 움베키가 NEPAD를 결성한 이후 G8은 소위 ‘액션플랜’이라는 것을 내놓았는데, 사실상 ‘부채, 보건, 무역, 농업 문제’ 대해 현실화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하는데 실패했다. 현재 아프리카의 빈곤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서방세계 권력자들의 위선적인 ‘도덕적 책임감’ 운운하는 의제가 아니다.
선언적이고 박제된 의제를 넘어서 ‘부채탕감, 공정한 무역, 금융투기에 대한 과세, 무기 공급 규제, 무차별적인 민영화추진 중단, 다국적기업 규제, 실질적 ODA 인상, 아프리카 식량주권 행사 가능한 프로그램 추진, 기상이변 주범인 온실가스 방출 줄이는 것’에 대한 실현 의지와 정책실시이다.
움베키의 NEPAD는 아프리카가 필요로 하고 있는 요구들을 위한 파트너쉽이라기 보다 서방세계가 ‘착한 얼굴’로 이윤착취를 노리는 실제 의도에 맞춰진 것으로 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이번 남아공 공공부문 노조의 총파업 역시 만델라에 이은 움베키 정부의 친서방적 정책과 태도에 불만이 누적된 노동자들의 분노가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번 파업은 12월 남아공공산당 총재 선거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라는 점에서 집권 아프리카민족회의(ANC)정부에 대한 남아프리카노동조합회의(COSATU)의 정치적 경고로도 볼 수 있는데, 그동안 중도적 입장을 보여온 ANC,남아공공산당, COSATU의 주류 세력에 대한 비판적이고 ‘독립된 좌파’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으로도 보여진다.
이번 파업 집회연설에서 남아프리카노동조합회의(COSATU) 사무총장 바비는 ‘음베키 정부가 경제 성장이 역사상 최고라고 자랑 한 것을 지적하면서 “노동자로 우리가 축하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음베키도 알 것”라고 음베키 정부에게 경고했다. 이는 경제 성장이라는 ’수치‘의 변화가 노동자들의 실질적 삶의 변화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입증하는 것이다.
교사 2천명이 붉은 티셔츠를 입고 거리를 행진했다. 이번 파업이 노동자들의 일시적인 임금인상 투쟁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투쟁이 경제적 투쟁에서 정치적 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과 그것은 싸우는 노동자들의 내적 힘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그들의 요구를 대변할 수 있는 독립적인 좌파가 출현하기를 기대하며, 노동자들에게 등을 돌리지 않는 진정한 노동자 정당으로 발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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