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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민주주의와 인권 18권(4호) / KCI등재 2018. 12
윤수종 (전남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이 논문은 1970-80년대 농민운동의 주요 흐름 가운데 하나인 기독교농민회(이하 기농)의 조직과 활동을 전남 지역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 종교에 의지해야만 운동을 할 수 있던 시절, 농민운동은 가톨릭농민회(이하 가농)로부터 시작하였다. 그러나 농촌지역에 성당보다는 교회가 훨씬 많았고 교회는 청년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1970년대 후반 농민교육을 받은 농촌청년들이 해남과 무안, 강진 등에서 활동하면서, 1978년 도 단위 조직으로서 ‘전남기독교농민회(이하 전남기농)’를 결성하게 된다. 선진적인 농민활동가들이 전남기농을 기반으로 전국적으로 교육과 조직활동 을 펼치면서 1982년에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이하 전국기농)가 결성되었다. 전남기농이 먼저 만들어져 점차 지회활동을 확산시키면서 군기독교농민회를 결성해 나갔고, 전국기농은 전국단위에서 선도적인 투쟁을 하며 군기독교농민회가 현장에서 다양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투쟁을 벌여 나갔다.
기농은 미국 대사관 앞 농축산물수입반대투쟁, 부채공청회 형식을 통한 부채투쟁, 군 단위 정치투위의 조직 등을 주도하였다. 농민들의 일상적인 경제투쟁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문제제기도 적극적으로 해나갔으며, 여성농민들의 활동도 촉진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기존의 조직과 활동을 과감히 해소하고 농민운동통일에 적극적 으로 참여하였다.
중심어 : 기독교농민회, 전남기농, 부채투쟁, 수세투쟁, 농민운동통일
Ⅰ . 머리말
1970-80 년대 농민운동을 말할 때 조직으로는 가장 먼저 가톨릭농민회 ( 이하 가농 ) 를 , 사건으로는 함평고구마사건 ( 서경원 , 2003: 215-229; 조영호 , 1984: 171-185) 을 떠올린다 . 농민운동은 가톨릭 농민들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 실제로 농촌지역에 성당보다 교회가 훨씬 많았고 , 교회에서 많은 청년이 모일 수 있었다 . 가농 중심으로 농민운동이 시작되었지만 , 1970 년대 초부터 농민운동을 확산시키자는 기독교계의 움직임이 있었다 .
대표적인 기독교계의 움직임으로 ‘ 크리스찬아카데미 ’ 의 농민교육 프 로그램과 ‘YMCA 연맹 ’ 의 농촌개발사업을 들 수 있다 . ‘ 한국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회교육원 ’( 이하 크리스찬아카데미 ) 은 1974 년 발족됐으며 , 노동 ・ 여성 ・ 농민 등의 분야에 관한 강좌를 실시하였다 . 크리스찬아카 데미에서 실시된 농민교육의 목적은 농민운동가 양성이었으며 , 이를 위해 농민의 민주적 정치역량을 강화하는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 이 교육은 약 5 년간 진행되었으며 , 약 800 여명의 교육생이 참가하였다 . 농민교육 프로그램 참여자들은 서로를 ‘ 동지 ’ 라고 부르며 대안적인 농업관련 교육에 참여하였다 ( 장상환 , 2001: 3-5). 교육 후반기에는 부 락개발교육 , 농촌신협교육 , 농촌여성교육도 실시하였다 ( 이우재 , 1991: 222). 가농은 자체 교육을 하였지만 , 가농회원을 크리스찬아카데미에 파견하여 교육을 받게 하기도 하였다 ( 한국가톨릭농민회 , 1999: 49-50). 이 시기에 농촌청년활동가들은 농민교육을 통해서 연결망을 만들어 갔고 , 이것이 나중에 농민운동이 지역에 뿌리내리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 조영욱 , 1998). 같은 시기에 ‘ 대한 YMCA 연맹 ’ 도 ‘ 농촌신용협동조 합 ,’ ‘ 양곡협동조합 ’ 운동과 ‘ 부락개발사업 ’ 을 전개하여 농민들의 인식향 상에 기여하였다 ( 대한 YMCA 연맹 , 1991). 이렇게 교육받은 농촌청년들 과 농촌지도자들 및 대학생들이 이후 농민운동을 펼쳐 나가게 되었다 .
가농교육이나 크리스찬아카데미 교육을 받고 해남과 무안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농촌청년들은 기독교농민을 조직화할 필요성을 제 기하였고 , 1978 년 3 월에 ‘ 전남기독교농민회 ’( 이하 전남기농 ) 가 창립되었다 . 이렇게 시작된 기독교농민운동은 지역 조직화와 전국 조직화를 지향하여 , 1982 년 3 월 ‘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 이하 전국기농 ) 를 결성하여 전국적인 농민운동 조직의 틀을 세우게 된다 . 특히 중간조직으로서 전남기농을 먼저 결성하고 그것을 축으로 전국조직과 군단 위조직을 결성해 나갔다 .
농민운동의 역사에서 가톨릭농민회의 활동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 고 있다 . 그러나 가농에 이어 전개된 기농 또한 독재정권에 대항한 항 의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가면서 농민운동을 확산시켰고 , 그 이후 1990 년 결성된 ‘ 전국농민회총연맹 ’( 이하 전농 ) 의 뿌리가 되었다 . 가톨릭농민회는 전농이 결성된 이후에도 조직을 재건하여 생명운동 쪽으로 활로를 개척하였다 .
그에 반해 기독교농민회는 대부분 전농활동에 결합하고 일부 회원들만이 개별적으로 생명공동체운동을 벌여 나가는데 그쳤다 . 이처럼 가농과 다르게 전개된 기농의 운동 의제와 운동방식 , 활동은 농민운동의 내부적 차이를 드러내고 , 나아가 농민운동의 과제와 한계를 드 러내준다고 할 수 있겠다 .
그리고 가농은 자신의 운동의 역사를 전국적으로 그리고 지역별로 꾸준히 정리해 왔다 . 가농은 1984 년에 그 이전의 농민운동 사건들을 인권운동 차원에서 정리하면서 , 함평고구마사건이나 오원춘사건 등을 중심으로 가톨릭농민운동에 대해 기술하였다 ( 명동천주교회 , 1984). 1999 년에는 가농운동 30 년사를 정리하였다 ( 한국가톨릭농민회 , 1999). 더 나아가 가농은 교구별로 가농 농민운동사를 정리하기도 하였다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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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주교구 , 마산교구 , 안동교구 , 원주교구가 연합회별로 가농 농민운동사를 정리하였 다 .( 가톨릭농민회 광주연합회 ・ 우리농촌살리기운동 광주본부 ・ 천주교광주교구 농민사목 , 2013; 가톨릭농민회 마산교구연합회 , 2009;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 2011; 가톨릭농민회 원주교구연합회 , 2009).
그리고 일부 연구자들이 가농운동의 초기 10 여 년간의 상황과 활동에 대해 정리했으며 ( 정호경 , 1986), 특히 함평고구마사건 사례를 집중적으로 다 루곤 하였다 ( 조영호 , 1984; 서경원 , 2003). 다른 연구자들은 가농운동 의 조직변화나 교구단위 농민운동사 연구 , 지역분회의 활동 등을 소개하였다 ( 박래성 , 1998; 이호철 ・ 김종헌 , 1997; 최세정 , 2001). 또한 가 농은 1990 년대 들어 생명운동으로 전환하였는데 , 이에 대한 연구들이 이루어졌다 . 가농의 생명공동체운동에 대한 연구 ( 김승오 , 1993), 우리 밀살리기운동과 가농 조직의 관계에 대한 연구 ( 최영분 , 1997) 가 대표 적이다 . 이처럼 1990 년대 이후의 가농활동에 대한 연구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가농의 활동이 다른 방식으로 계속되고 활발해졌기 때문 으로 보인다 .
그에 반해 기농에 대한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 다만 , 1970-80 년대 농민운동을 개관하면서 가농과의 대비 속에서 기농을 언급하거나 ( 엄 영애 , 2007), 주요농민운동단체의 형성을 다루면서 기농을 언급하는 정도이다 ( 정명채 ・ 민상기 ・ 최경환 , 1995). 기농을 단독으로 다룬 연구는 기농 10 년사 가 유일하다 ( 한국기독교농민회 , 1992). 이 저서는 기존 권익운동적인 기농운동을 마무리하고 나서 사무국장이 10 년 활동을 정리한 것인데 , 회의나 조직정관 , 임원 등을 나열하고 각 지역으로 확산해 가는 인물간 네트워크를 소개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 사실상 기독교농민회에 대한 정리나 연구논문이 없다고 할 수 있다 . 이 논문에서 참고할 수 있었던 연구들은 전남지역 YMCA 농민회 ( 이하 Y 농 ) 에 대한 연구 ( 윤수종 , 2015) 와 전남지역 기독교농민회의 활동 이 활발하였던 1980 년대 무안지역의 농민운동에 대한 연구 , 농민운동 통일과정에서 전남지역 농민운동조직들의 통일과정을 유형별로 정리 하고 해석한 연구 ( 김준 , 1993; 김준 , 1995) 였다 .
또한 기존의 기독교농민회 운동에 대한 언급은 학술연구라기 보다는 단순한 문제제기와 주장을 담은 글들에서 이루어져 왔다 . 이에 이 논문은 기독교농민운동의 중심이자 뿌리인 전남지역 기독교농민회의 조직과 활동을 살펴봄으로써 , 기독교농민회 운동의 실체를 확인하고자 한다 .
이를 위해 , 1970-80 년대 농민운동을 대상으로 한 논문과 기타 주장 과 문제제기 위주의 비학술적인 글 ( 에세이 , 일반 농정잡지 투고글 , 기농대의원대회 자료 , 투쟁일지 등 ) 을 중심으로 전남지역 기독교농민회 의 조직과 활동을 미시적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 본문에서는 전국기농 과 전남기농의 창립과 활동을 중심으로 농민운동 전개양상을 살펴볼 것이며 , 전남지역 기독교농민회의 투쟁활동을 각 군별로 제시하고자 한다 . 마지막으로 농민운동통일과 기독교농민회 운동의 해체 과정을 기술하고자 한다 .
Ⅱ . 전남기독교농민회의 창립과 활동
1. 기독교농민회 결성 움직임
1970 년대 중반 이후 기독교농민들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은 농촌 교 회의 평신도와 청년세력 일부가 지역단위 농민운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 시작되었다 . 당시는 크리스찬아카데미 농민교육을 통해 농업 ・ 농민문제에 대한 사회과학적 인식과 농민대중의 주체적 참여에 의한 농민운동을 통해서 농민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 농민교육을 받은 농촌청년들이 가톨릭농민회 에 참여하거나 지역단위에서 자발적으로 농민소모임을 조직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 그리고 한국기독청년협의회 (EYC) 2) 농촌분과위원회와 연계하여 활동하는 기장 ( 기독교장로회 ), 예장 ( 예수교장로회 ), 감리교 3) 농촌청년들이 지역에서 농촌청년활동을 하면서 기독교농민들의 느슨한 모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
이후 전체 농민운동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농민들 보다 수적으로 더 많은 기독교농민들을 포괄하는 조직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 이에 1977 년 농민운동의 역량강화 및 농민운동세력의 양적 확산 방안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 즉 보다 많은 농민대 중의 양적 확보를 통하여 농민운동의 저변을 확장해야 할 필요성이 농민운동 내부에서 광범위하게 제기된 것이다 . 이렇게 1970 년 중후반 부터 당시 농민운동세력 확장에 대한 농민운동 내부의 현실적 요구가 있었다 . 동시에 민중 신학의 현장실천을 매개하고자 했던 기독교민주 운동세력의 지원을 받아 농촌교회 평신도와 농촌교회 청년 , 그리고 일반농민대중을 농민운동세력으로 조직하여 전체 농민운동 발전에 기여할 수 있겠다는 인식이 있었다 .
그러한 인식 위에서 전남의 무안 , 해남 , 4) 강진 , 보성 등지에서 농민 운동에 선진적으로 참여하고 있던 농촌교회 평신도와 청년활동가가 모여 기독교농민의 조직화에 대해 논의하고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 1977년 12 월 서울 선교교육원에서 기독교농민회 조직체의 필요성과 의의 에 관한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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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기독청년협의회 (Ecumenical Youth Council in Korea, EYC) 는 1976 년에 결성된 초교파적 기독청년운동조직으로 , 민주화 운동과 평화통일 운동에 앞장섰으며 특히 민중과 함께 하는 실천적 삶을 지향하였다 .
3) 기독교 분파로 기장은 한신대학교 출신들로 이루어진 교회 ( 목사 ) 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 . 예장은 총신대 , 고신대 , 각종 신학대 출신자들 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러 분파가 있다 . 기장에 비해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 으로 평가되고 있다 . 감리교는 자유주의교단으로 감리교목사들이 농민운동에 참여 하기도 하였다 .
4) 해남 YMCA 는 1976 년부터 농촌사업을 벌여 신용협동조합과 양곡협동조합 설립 , 그리고 시범부락사업을 해 왔다 . 그 사업에 참여한 농민들은 사업과 관련된 교육을 받으면서 ‘ 해남 YMCA 농촌개발연구회 ’ 를 신협과 별도로 조직하여 농민들을 결속시 키는 작업을 해 왔다 . 이 농촌개발연구회 성원들 가운데 일부 ( 정광훈 , 윤기현 , 정광식 등이 중심적인 지도력을 맡았고 김남주 , 황석영 등도 가세하였다고 한다 ) 가 1977 년부터 해남에서 기독교농민회를 조직하려고 했으나 경찰의 방해로 미루어 졌다 .
이 회의는 전남지역 기독교농민운동의 주도세력들이 전체 기독교민주운동세력과의 연대와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 민중신학자 , 기독자교수 , 기독교인권운동세력 , 기독 청년 , 농민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는 농촌교회 목회자들이 함께 하였 으며 , 전체 기독교민주운동세력과 함께 기독교농민운동의 필요성과 의의를 공동으로 인식하고 지원과 지지를 획득하고자 하였다 . 1978 년 2 월에는 한국기독청년협의회 농촌분과위원회의 지원으로 농촌청년교육을 선교교육원에서 실시하였고 , 이 교육과정에서 기독교 농민회의 필요성과 조직화의 당위성을 교육하면서 농촌청년들의 인식 을 심화시켰다 . 교육을 마치면서 ‘ 전남기독교농촌청년회 준비위원회 ’ 를 결성하고 전남지역에서부터 기독교농민회 조직준비를 시작하였다 . 5) 이후 전남기독교 농촌청년회 준비위원회는 2 월 중에 몇 차례 조직준 비모임을 갖고 창립준비를 하였다 . 이 과정에서 기독교농민회는 청년 층에 국한하지 말고 전 계층의 농민이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는 인식을 함께 하고 , 청년조직보다 농민조직을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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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977 년 당시 EYC( 한국기독청년협의회 ) 회장은 서경석이었고 , 농촌부 간사 김기영 , 김의기 ( 농촌분과 위원회 간사 , 5 ・ 18 진상을 보고 와서 기독교회관 8 층에서 뛰어내 림 ), 나상기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 당시 서울 종로 5 가 기독교회관에 기독교장로회 사무실이 있었고 여기에 EYC 가 있었다 . 그리고 서대문에 선교교육원 ( 서남동이 있 었음 ) 에서 개신교출신 농민운동가들 , 농촌 청년들을 교육시켰다 . 여기서 교육받으면서 최우열 ( 해남읍교회 , 해남 YMCA 총무 ), 조병환 ( 강진교회 ), 정만호 ( 충북 청원 덕촌교회 ), 배종렬 등을 비롯하여 EYC 활동가들이 함께 기독교농민회를 만들어 갈 것 에 대해 논의하였다 . 논의 및 검토 결과 전남은 먼저 출발할 수 있겠다고 의견을 모았고 , 전남기독교농촌청년회나 기독교농민회로 조직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예상 하였다 .
2. 전남기독교농민회의 창립
‘ 전남기독교농민회 ’ 는 1978 년 3 월 8-9 일 해남 북일면 신월교회 6) 에서 무안 ・ 해남 ・ 강진 ・ 보성 ・ 영암 등지의 농민 46 명이 참석한 가운데 농민교육 7) 을 받고 전남기독교 농촌청년회 발족을 위한 창립대회를 통해 결 성되었다 . 그러나 임원 선출과 사업 ・ 예산안 심의는 경찰의 방해로 하지 못하고 지역 대표에게 위임했다 . 8) 이후 지역 대표들은 3 월 9 일에 광주의 동국여관에서 전남기독교농민회 발족모임을 갖고 , 임원과 상임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사업계획 등을 확정지었다 . 9)
창립대회에서 전남기농은 ‘ 농민대중의 제반 지위향상과 민주화와 협동화를 통한 정의롭고 자유로운 사회발전을 실천하는 농민운동단체 ’ 로서 자신을 규정하고 있다 . 10) 이렇게 결성된 전남기농은 교육을 통해 마을과 군 단위의 조직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 결성 직후 주로 마을 단위의 기초 교육에서 기독교농민회 소개 , 농민문제의 본질 , 마 을활동의 방법과 사례 등을 교육하였고 , 마을에 있는 교회의 청년회 집회 등을 교육장으로 활용하면서 지회 활동을 활성화시켰다 . 교육 및 지회 조직 형성과 확장에 치중하였고 , 1978 년에 ‘ 무안지역협의회 ’, 1979 년에 ‘ 해남지역협의회 ’ 를 비롯해 16 개의 지회를 조직했다 . 지회는 읍 , 면 , 또는 마을 단위로 회원 5 명 이상으로 구성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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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당시 전남지역에서 기독농민활동가들이 제일 많은 곳인 해남을 장소로 선택하게 되 었다 . 처음에는 해남읍교회에서 조직하려고 하였으나 당시 장로들이 반발하여 시골의 아주 작은 교회인 신월교회에서 조직하게 되었다 .
7) 강사로는 이우재 , 심상봉 , 서경원 , 배종렬이 참석하였다 .
8) 신월교회에서 조직결성을 마무리하지 못한 지역대표들은 실은 대흥사에 있는 사당인 표충사 ( 表忠祠 , 서산대사 유물이 있고 낮에만 개방하는 곳 ) 를 빌려 문을 잠그고 거기서 회의를 하여 조직결성을 마치고 광주에 가서 선포하게 되었다 ( 윤기현 증언 , 5 ・ 18 기념재단 , 2009: 183).
9) 초대 임원으로 회장은 배종렬 ( 무안 ), 부회장은 문경식 ( 보성 ) 과 황연자 ( 해남 ), 총무 정광훈 ( 해남 ), 서기 김정순 ( 강진 ) 등이 되었으며 , 상임위원들은 서기를 뺀 전체 임 원과 정광식 ( 해남 ), 윤기현 ( 해남 ), 박상문 ( 무안 ), 손옥자 ( 무안 ) 등이었다 .
10) 회칙 제 3 조 , “ 본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 아래서 농민의 경제적 ・ 사회적 ・ 정치적 지 위향상을 도모하고 , 민족전통을 이어받은 주체적 농민문화를 창조하여 민주화와 협 동화를 통한 정의롭고 자유로운 사회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
그리고 지역 협의회는 3 개 이상의 지회를 가진 군 단위에서 구성하였다 . 11) 농민회 조직은 ‘ 전남기독교농민회 - 군단위 지역협의회 - 지회 - 회원 ’ 의 틀을 갖추어 나갔다 . 특히 전남기농은 「 지회학습회운영지침서 」 를 만들어 현 지 농민들에게 배포하였다 . 운영지침서는 농민의 자기의식화를 위해 학습회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경제적 협동사업 , 권익실천 및 마을민 주화활동 , 봉사활동 및 문화활동 등을 전개해 나갈 것을 촉구하였다 . 또한 전남기농 활동가들은 전국단위 기독교농민회 조직의 결성에도 기여하였다 . 그리고 서울에서는 NCC(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 주최로 전국 단위 기독교농민회 발족을 위한 모임을 3 차례 가졌다 . 1978 년 여름부터 전국기농준비위원회 발족을 위한 논의를 시작하였다 . 12) 이후 전남 , 전북 , 경북 , 경남 등지에서 온 10 여명의 농민운동활동가들이 1978 년 12 월 전주에 모여 ‘ 전국기독교농민회 준비위원회 ’ 를 결성함으로써 , 전국단위 기독교농민회의 조직준비를 시작하였다 . 이처럼 전남 기농을 중심으로 전국 조직화 활동이 구체화되고 확장되었다 . 13) 전남 기농은 1982 년 3 월 18 일 영등포 산업선교회관에서 열린 전국기농 창립총회에 다른 지역 농민회와 함께 참여하였다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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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회칙 제 7 조 , “ 읍 , 면 , 또는 마을단위 회원 5 명 이상으로 지회를 구성하고 , 3 명 이상의 회원으로 준지회를 구성한다 .” 제 8 조 , “ 지회 3 개 이상의 군단위로 지역협의체를 구성한다 .”
12) 1978 년 여름 전북 송광사 냇가에서 교육 겸 전국기농 준비위원회가 모였다 . 전국에 서 10 여 명의 활동가들이 닭도 몇 마리 잡아 모임을 하고 있는데 경찰들이 알고는 여러 대의 지프차로 다가와서는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 모두 주민등록증을 내놓으 라는 등 압박하였다 . 배종렬 장로가 혼자만 대표로 보여주겠다고 하니 , 경찰들은 모두 보이라는 것이었다 . 이때 여성회원인 소정렬씨가 구호를 외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그녀의 선창을 따라 모두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모두들 다시 용기가 생겼다 . 농민회원들이 강하게 나가니까 결국 경찰들이 물러났다 ( 한국기독교 농민회 , 1992: 15).
13) 1979 년부터 한국기독청년협의회 농촌분과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전국기독교농민회 준비위원회의 주관으로 전북 , 경북 , 강원 , 충북 , 충남 등지에 농민교육을 실시하여 타지역 농민운동활동가를 양성하였다 . 그 결과 1980 년 5 월 2 일 전북기독교농민회가 전주 성광교회에서 40 여명의 농민회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창립되어 , 전북지역에서 기독교농민회가 조직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
3. 전남기독교농민회의 초기 활동 15)
결성초기에 전남기농은 교육활동과 지회조직 형성 및 확장을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권익실천활동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 대표적 인 권익실천활동으로는 농민의 부당한 인권침해를 시정하는 운동 , 농협강제출자거부 , 을류농지세 시정 , 수세시정 , 경지정리 부실공사 시정 , 노풍피해보상투쟁 등이 있었다 . 주로 마을주민들의 부당한 피해에 대한 보상투쟁과 농협민주화 투쟁을 현장단위에서 전개하였다 . 또한 지 역농민운동세력과의 연대투쟁으로서 함평고구마사건 기도회 및 단식 투쟁 , 광산 삼도단지 경지정리사건 및 벌교토지투쟁 , 쌀 생산비 보장을 위한 쌀생산자대회 참석 , 오원춘씨 사건 기도회 참석 등 가톨릭농 민회와 지역단위 권익투쟁에도 함께 하였다 . 그 밖에 군수 , 면장 , 조 합장의 면담과 항의를 통한 시정요구나 질의서나 건의서를 발송하여 행정적으로 시정요구하는 등 낮은 차원의 시정 ・ 요구 방법으로 현장에서 활동하였고 , 지역단위에서 기도회나 단식투쟁에 동참하는 등 연 대투쟁을 전개하였다 . 전남기농의 권익실천활동은 행정적이고 제도개 선 투쟁으로서 시정 ・ 요구투쟁에서부터 옥내집회 , 기도회 등 농민대중 의 생활상요구에 기초한 경제투쟁까지 매우 다양하고 폭넓게 이루어 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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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전남기독교농민회 (1978 년 3 월 9 일 창립 ), 전북기독교농민회 (1980 년 5 월 2 일 창립 ), 경북기독교농민회 (1982 년 3 월 19 일 창립 ), 충북기독교농민회 (1982 년 2 월 15 일 창립 ) 의 임원단 및 주요 활동가 50 여명이 참석하였다 .
15)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기농 , 각년호의 ‘ 활동보고 ’(1982-1991) 참고 . 창립총회 에서 전남기농회장 ( 배종렬 ) 이 연합회 회장을 맡게 되었고 , 서울 종로구 연지동 기독교회관 709 호실에 연합회 사무실을 열었다 . 1983 년에 사무국이 정식으로 구성되었 는데 , 초대 사무국장 ( 나상기 ) 이 각 지역을 연결하며 농민회조직결성을 촉진하였다 .
또한 전남기농은 이러한 권익실천활동을 해 나가면서 조사활동도 병행하였다 . 가농이 해오던 쌀생산비 조사에 협력하면서 , 지역 특성에 맞는 작목들에 대해 조사하였다 . 전국단위에서 주도하면 전남기농이 실행해 나갔다 . 마늘 , 양파 , 고추 , 보리 등에 대한 조사를 하면서 신품 종 벼 강제경작 및 피해에 관한 조사활동 , 농민생활 의식조사 , 농촌교회 평신도 의식조사 등을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등의 주변 단체와 협력하여 실시하였다 .
마을 단위의 조직기반이 생겨나가면서 대중 활동의 일환으로 농민 문화활동도 전개하였다 . 각 지역별로 학습회를 정례화하였고 , 특히 간부활동가의 소양을 갖추기 위해 사회과학과 농민문제 , 농민운동에 관 한 학습활동을 하였다 . 특히 농민활동가 스스로 성서연구 , 민중신학 학습 등을 통해 농민운동이 교회운동으로서의 정당성을 가질 뿐 아니라 성서적 실천과도 합치한다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 이 과정에서 기농은 농촌목회자와의 유대관계를 깊이 가지기 위해 노력했다 . 초기에는 지역단위에서 이러한 교육 , 조직 , 권익실천활동을 전개하 였지만 , 권력이 농민운동을 탄압하게 되면서 16) 어려움을 겪었다 . 기농 역시 그 활동이 위축되어 지역단위 조직화 및 실천활동에서 큰 진전을 이루지 못하였다 . 그러다가 1979 년 10 월 26 일 박정희의 암살 이후 민주화의 봄을 맞이하자 기농은 전체 농민운동과 민주화운동세력 과 함께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 현장의 교육과 조직화는 물론 , 강제농정 철폐 , 농협민주화 등의 권익실천활동을 전개하였다 . 그리고 당시 헌법개정운동에 발맞춰 전국농민단체들과의 공동연대활동으로 1980 년 4 월 대전에서 전국적으로 500 여명의 농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 헌법개정 및 농업관계법령 개정 ’ 에 관한 공청회를 가졌다 . 이 공청회에 전남기농이 참여하였다 . 이때 전국에서 100 여명의 기농 회원들이 전국적 활동에 처음으로 연대하여 참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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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1979 년 크리스찬 아카데미 농촌교육담당자 ( 이우재 , 황한식 , 장상환 ) 등의 구속사건과 경북가톨릭농민회 간부 오원춘씨 구속사건을 통해 독재정권은 농민운동을 좌경 용공 불순세력으로 선전하는 등 농민운동을 탄압하였다 .
Ⅲ .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창립과 전남지역 기독교농민회의 활동
1. ‘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 (전국기농)의 창립
전남기농 소속 활동가들은 1978 년 12 월 전주에서 ‘ 전국기독교농민회 준비위원회 ’ 를 결성한 이후 이를 전국단위 기독교농민회 조직으로 확대 발전시키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교육을 하였고 ,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각 도의 기독교농민회를 조직해 나가도록 촉진하였다 . 그리고 전남기농은 1980 년 5 월 14 일 여러 농민단체들 및 대학교들 과 함께 ‘ 농민선언 ’ 을 발표하였다 . 이 선언을 통해 농민권익 신장을 위한 각종 권리를 확인하고 , 정부 및 관료의 부정과 반농민정책에 대해 농민운동을 전개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
농민운동 세력은 1980 년 함평고구마사건 2 주년을 맞이하여 5 월 19 일 광주에서 전남가톨릭농민회 , 전남기독교농민회 , 해남 YMCA 농민회 등이 주축이 되어 농협민주화 투쟁 (‘ 관제농협타도대회 ’) 을 대대적으로 계획하였다 . 민주화 공간에서 노동운동과 빈민운동 등 다른 부문운동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것에 비해 활동이 미진하였던 농민운동은 국면 전환을 위해 치밀한 준비를 하여 5 월 19 일 대대적인 시위를 계획하였다 . 마침 전두환 ・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군부독재세력에 의한 5.17 비 상계엄확대조치가 발동되고 이후 2,000 여 명의 광주시민을 학살하는 만행이 자행되었다 . 그와 더불어 군부세력은 모든 민주운동세력을 연 행 구속하고 민주운동단체 활동을 정지시켰다 . 5 월 19 일 계획은 무산 되었고 , 17) 기농회원들은 광주민주화운동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었다 . 18)
일시적으로 전남기농과 군기농은 활동중지 상태에 들어갔지만 , 곧바로 현장단위교육과 조직적 기초를 다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
1980 년 5 월에 전북기독교농민회가 조직된 뒤에는 , 전남기독교농민 회와 전북기독교농민회가 중심이 되어 타지역 조직활동을 지속적으로 하였다 . 1982 년 3 월에 경북기독교농민회와 충북기독교농민회를 조직 됨으로써 전국기독교농민회 조직의 지역단위 토대가 확보되었다 . 이 를 바탕으로 1982 년 3 월 18 일 영등포산업선교회관에서 전남기독교농 민회 , 전북기독교농민회 , 경북기독교농민회 , 충북기독교농민회의 임원단 및 주요 활동가 50 여명의 대표들이 참석하여 ‘ 한국기독교농민회 총연합회 ’ 19) 를 창립하였다 .
전국기농의 초창기 활동은 전남기농의 활동역량을 기반으로 하면서 타지역 기독교농민운동의 활성화를 위한 교육활동과 이를 통한 조직활동의 강화에 역점을 두었다 . 농민교육은 지역단위에서 마을기초교육 , 문화교육 , 1 차 농민교육을 실시하였고 , 전국단위에서는 회원의 역량강화를 위한 2 차 농민교육 , 간부양성을 위한 3 차 농민교육 , 조직가를 위한 지회장교육 , 과제교육으로서 농가부채교육 , 그리고 기독교농민회의 지지기반 확보를 위한 농촌목회자 교육 등을 실시하면서 , 농촌교회 평신도와 농촌교회 청년 및 일반농민들을 농민운동세 력으로 양성하고 농민활동가의 질적 역량을 강화하였다 . 또한 전국기 농은 사무국을 두고 각종 농민운동 자료들을 만들어냄으로써 농민운동의 방향과 과제를 제시하여 , 지역 기독교농민회들이 운동해 나가도록 안내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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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전날인 5 월 18 일에 광주에 와서 준비 중이던 농민들과 19 일에 광주로 올라온 농민들은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 휩싸이게 되었다 .
18)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농민운동지도부나 활동가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 윤기현이 광주에 있다가 20 일 해남에 내려가서 40 여명 이상의 농민들과 함께 광주로 오게 되어 해남농민들은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다 ( 윤기현 증언 , 5 ・ 18 기념재단 , 2009: 189-190).
19) 한국기독교농민회 총연합회는 “ 본 회의 목적에 찬동하는 군단위 이상의 농민단체로 구성되며 각도 , 군 기독교농민회는 지회로 구성한다 ” 고 하여 , 초창기 지역단위 기독 교농민회의 중심조직인 군지역협의회를 군기독교농민회로 조직형태를 변경하여 군 단위 독자적 농민회를 조직하여 회원단체로 가입하도록 하였다 .
2. 전남지역 기독교농민회의 조직과 활동
1) 교육과 조직
전남기농 활동가들은 다른 지역의 군 농민회와도 단위 농민회 결성은 물론 전국조직의 결성을 위해 활동하면서 아직 기농이 결성되지 않은 전남의 다른 지역의 조직화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 회장과 총무를 축으로 20) 교통이 불편한 시절에 버스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 교회 장로들을 중심으로 농민회 조직에 나섰다 . 또한 전남기농은 이미 1981 년에 아시아의 농민 ・ 농촌 과 농촌문제자료집 을 만들어 배 포하고 강의에 활용하였다 .
전남기농이 중심축이 되어 전남지역 각 농촌에 지회를 건설하면서 군기독교농민회를 결성했다 . 초창기에 지역협의회 형태로 유지하던 것을 군기독교농민회 형태로 만들었다 . 1982 년에 해남군기독교농민회 21) 와 마을단위 지회 16 개를 조직하였고 , 1983 년에 강진군기독교농민회 , 함평군기독교농민회와 마을단위 지회 12 개를 조직하였다 . 전국 기농에 여성농민위원회를 특별위원회로 조직하였는데 , 전남지역에서는 무안여성농민협의회 (2 개 지회 ) 를 조직하여 여성농민들의 자주적 활동을 강화하였다 . 무안군기독교농민회는 봄과 가을에 야외에서 단 합대회 및 친목을 도모하는 야유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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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전남기농의 임원현황은 다음과 같다 . 1978-1981 년 회장 배종렬 , 총무 정광훈 ; 1982- 1983 년 총무 김홍재 ; 1984 년 회장 김홍재 ; 1985-1986 년 회장 정광훈 , 총무 최병상 ; 1987 년 회장 김정순 ; 1989 년 회장 김병길 , 부회장 문용기 , 총무 윤기현 , 여성간사 문영란 .
21) 해남기독교농민회의 창립 시기가 애매모호한 것은 1978 년부터 1982 년 시기까지 지역협의회로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 1979 년 2 월 해남 Y 농촌개발연구회가 해체되고 , 회원들 가운데 일부는 기독교농민회를 조직하는 쪽으로 가고 , 일부는 해남 YMCA 농 민회를 창립하였다 . 해남 Y 농촌개발연구회에서 나와서 기독교농민회를 조직하려던 회원들은 해남군기독교농민회를 조직하려 했으나 1978 년 전남기독교농민회 조직결성에 합류하고 해남지역에서 활동하면서 해남협의회를 유지하다가 1982 년에 해남군 기독교농민회로 명칭변경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운영과 관련해 보면 , 각 지회장과 마을대표로 구성된 운영위원회를 매월 각 지회장 집에서 열었으며 , 운영위 모임에서 각 지회 활동보고와 평가를 통해 앞으로의 활동방향과 방법을 모색하였다 . 또한 운영위 모임에서 매월 약간의 회비를 걷어 군 농민회 자립기반을 마련 하였다 . 그러나 당시 군사정권은 농민운동 세력을 공산당이나 간첩으로 간주하였다 . 일반농민들이나 교회를 상대로 기농회원이나 기농조직에 대해 갖은 모략과 악선전을 하기도 했다 . 그러나 농민들은 예전처럼 당하지 않고 , 적극적으로 항의하거나 사과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 23) 1983 년에는 함평군기독교농민회와 강진군기독교농민회가 결성되었다 . 24) 1983 년 당시 전남기농 회원구성을 보면 전남 20 명 , 강진 44 명 , 무안 20 명 , 해남 8 명으로 총 92 명이었다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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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5 월에는 망운 톳머리에서 무안지역 가톨릭농민회와 함께 모여서 친목과 결속을 다지는 야유회를 가졌는데 , 기농 활동가들과 가농 활동가들 ( 기농에서는 배종열 전국 회장 , 김홍재 전남 총무 , 허훈순 부녀간사가 참여했고 , 가농에서는 정연석 교육부장 , 최성호 전남총무가 참석하였다 ), 그리고 120 여명의 회원이 참석하여 활동가들의 강 의를 듣고 농악놀이를 즐겼다 .
23) 전남 장흥군 장동면에 살고 있는 기농회원 이흥원 , 황의천씨 등은 경찰서로 불려가 조사를 받으면서 지서장의 훈시를 들어야 했다 . 내용인즉 “ 기농은 북한 김일성에게 자금을 받는 빨갱이 동조세력이므로 가까이 하면 당신들도 큰 코 다친다 ” 는 것이 었다 .(1982.5). 이에 배종렬회장과 상임위원들이 장흥으로 몰려가 지서장을 불러냈 다 . 지서장에게 “ 기농이 김일성 자금으로 운영된다고 말했다는데 사실이냐 ?” 고 묻자 처음에는 그런 일 없다고 딱 잡아뗐다 . 그래서 회원들을 대질시켰더니 벌벌 떨면서 잘못했다고 비는 것이었다 . 결국 지서장은 그 마을로 들어가 유지들과 마을사람들을 모아 놓고는 “ 기농에 대해 잘 모르고 한 말이니 용서해 달라 . 사실 알고 보니 기농은 농민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곳이더라 . 그러니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 고 기 농 홍보까지 하고 , 음료수까지 사다주며 백배사죄했다 ( 한국기독교농민회 , 1992: 48).
24) 강진에서는 회원농민 40 여명이 3 월 15 일 강진읍 교회에서 강진군기독교농민회 창립 총회를 갖고 임원회 , 상임위원회 , 이사회를 구성하여 농민회 조직을 마쳤다 . 강진에서는 율변마을 ( 칠량면 단월리 ) 과 덕촌마을 ( 도암면 덕서리 ) 에 각각 지회를 새로 두었다 . 함평에서는 11 월 21 일 손불중앙교회에서 회원농민 15 명이 참석하여 창립총회를 갖고 임원회 , 상임위원회 , 지도위원회를 구성하여 함평군기독교농민회를 조직하였 다 . 함평에서는 백옥마을 ( 손불면 월천리 ) 과 수문마을 ( 손불면 대전리 ) 에 각각 지회를 새로 두었다 .
이 시기에는 회원교육 , 임원교육 , 지회장교육 , 부채교육 등 다양한 교육을 하였으며 , 전국단위의 교육에 지역의 회원이나 활동가들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 강진에서는 지역교육도 실시하였고 , 26) 지회조직을 활성화하고 회원들의 의식을 높이기 위한 마을교육도 함평 , 무안 , 해남 , 강진에서 실시되었다 . 27) 무안군기독교농민회는 5 월 13 일 60 여명이 참여하여 회원대회를 개최하였다 . 특히 해남군기독교농민회는 ‘ 추수감사제와 농민축제 ’ 를 1,200 여 명의 농민이 모인 가운데 개최하여 문화 행사를 갖고 농민운동의 대중성을 확보해나갔다 .
1984 년에 전남기농은 지역운동조직인 전남사회운동협의회 ( 이하 , 전 사협 ) 에 회원단체로 가입하고 임원을 맡아 민주화운동에 참여였다 . 이 해에 새로 결성된 지회로는 전남기농 관할 광주지회 1 곳 , 무안기독교 농민회의 3 곳 ( 물암지회 , 오류여성지회 , 용정여성지회 ) 이 있었다 . 오류 와 용정의 여성지회는 전국기농 산하 여성농민위원회를 만들어가는 토대가 되었다 . 여전히 교육활동에 치중하여 , 전국단위 교육에도 참여 하였지만 각 군 기농단위의 교육도 하였다 . 농민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농민운동활동가들을 모아 함평 , 무안 , 강진 , 해남 무안에서 간부훈련 28) 을 하였으며 , 무안에서는 간부훈련 외에도 여성교육 , 문화교육 , 마을교육 (3 회 ) 등을 실시하였다 . 강진에서는 지역교육과 마을교육 을 하였다 . 함평에서는 3 회에 걸친 학습회도 하였다 . 이처럼 전국기농 , 전남기농 , 각 군기농은 끊임없이 농민교육을 해나갔다 . 전남기농활동가들은 그 교육들에서 강사로 활동하였으며 , 교육받은 농민들을 대상으로 농민회 조직을 결성하도록 촉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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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함평이나 다른 지역의 회원들이 포함되지 않은 수치이다 .
26) 강진에서는 1 월 9 일에 10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실시되었고 , 무안은 계획했으나 실시하지 못하였다 .
27) 14 회 ( 함평에서 한번 , 무안에서 세 번 , 해남에서 네 번 , 강진에서 다섯 번 ) 에 걸쳐서 마을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21 명이 교육에 참여하였다 .
28) 함평 , 무안은 두 차례에 걸쳐 (1 차 24 명 참여 , 2 차 26 명 참여 ), 강진과 해남은 한 차례에 걸쳐 ( 각각 5 명 , 8 명 참여 ) 간부훈련을 하였다 .
또한 1983 년부터 전국기농 사무국이 정식으로 구성되어 사무체계 를 갖추면서 전국단위운동을 보다 계획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 1984 년에는 전국기농에 홍보부가 설치되어 각종 농민관련자료와 농민운동 관련 자료들을 만들었는데 , 29) 전남기농과 전남지역 각 군기농은 자료와 홍보전단들을 농민회원들과 지역농민들에게 배포하였다 . 전국 단위 농민운동이 전개되면서 문화활동도 상당히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 1983 년부터 전남지역에서는 농민문화교육을 실시하면서 풍물을 함께 배웠다 . 교육 이후에는 마을과 지역에서 풍물패를 조직하여 집회와 시위에서 활용하였다 .
2) 투쟁활동
전국기농이 결성되면서 전남지역 기독교농민회는 보다 다양한 권익 실천을 위한 투쟁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
1982 년의 투쟁활동을 보면 , 장흥농민 탄압사례 공개사과건 , 이방 마을 ( 무안 해제면 용학리 ) 의 재해보상 사건 , 신만리 ( 무안 해제면 만 풍리 ) 염전으로 인한 염해 피해 보상 사건 , 무안 해제면의 방위병에 의한 농민회원 신원조사 사건 , 불량 보릿겨 사건 , 규산질 비료 강매 사건 , 강제출하 및 농협직원의 조합원에 대한 폭언 사건 , 무안 해제면 오류리 농협총대 선거불법 시정 , 부당농지세 시정 등 문제를 제기하거나 시정을 요구하는 활동을 하였다 . 이 시기 기농의 투쟁활동은 피 해 , 농민회 탄압 , 농협부정 등에 관련한 다양한 민주화 요구가 주를 이루었고 무안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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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농가부채자료 , 마을활동의 길잡이 , 기독교농민회 안내 팸플릿 , 교육수첩 , 만화로 농민문제를 정리한 농사꾼타령 , 농협의 운영과 역사 , 농협법규집 , 농지세란 무엇인가 , 기농회지 , 농민시사모음 , 농민선교자료집 , 농업경제 Ⅰ・Ⅱ , 농민의 노래 모음집인 「 농민가락 차차차 」 등이었다 . 그리고 여성농민 학습자료로서 「 다람쥐 꽃신 」 , 「 어머 니 죄인 」 등 여성농민문제를 동화에 비유하여 쉽게 설명한 자료를 만들어 제공하였 다 . 홍보선전 전단으로 ‘ 농가 빚 탕감하라 ’, ‘ 농가부채 해소방안 ’, ‘ 빛 없이 잘 사는 마을을 만들자 ’, ‘ 외국농축산물수입 중단하라 ,’ ‘ 기독농민 민주화선언 ’, ‘ 쌀수매에 대 한 성명서 ’ 등을 대량으로 제작하여 현장에 배포하였다 .
1983 년에는 전국기농이 ‘ 농가부채특별위원회 ’ 를 구성하고 전국 17 개 마을을 대상으로 농가부채조사를 실시하였으며 , 가농 , YMCA 농촌 부와 공동으로 농가부채세미나를 개최하여 부채문제 해결을 위한 연 대활동의 토대를 만들었다 . 1983 년에 시작된 농가부채대책활동은 이후에 더욱 확대되고 전국적인 부채해결투쟁으로 확산되었다 . 전남지역에서도 부채문제를 제기하고 교육을 하였다 . 또한 가농이 주도한 ‘ 농협조합장 직선제요구 백만인 서명운동 ’ 에 적극 연대하여 함께 서명에 나섰다 . 그리고 해남과 강진에서 저소득마을지원자금 사건에 개입 하였고 , 무안에서는 추곡수매가배정 요구 사건에 개입하였다 . 전국기농은 1984 년에는 1983 년 활동을 이어나가면서 특별히 농가 부채해결을 위한 전국적 활동을 전개하겠다고 밝혔고 , ‘ 농가부채연구 위원회 ’ 를 설치하여 농가부채실태에 대한 연구와 조사를 하였다 . 전남지역 각 군기농에서는 주로 장날 , 장터에서 농가부채해결을 요구하는 홍보 선전 전단을 농민대중에게 배포하면서, 지역여론화와 농가 부채해결을 위한 농민대책조직화에 주력하는 농가부채해결활동을 하였다 . 30)
또한 현장 ( 지회 ) 단위에서는 추곡수매가 동결과 쌀값 하락에 항의하며 수매량확대투쟁을 전개하면서 수세현물납부투쟁도 함께 전개하였고 , 부실경지정리 시정 , 비료출고료 시정 , 비료조별판매 시정을 통해 일상적 농민권익 투쟁을 전개하였다 . 지역별 권익실천활동을 보면 , 함평에서 비료조별판매 시정 활동이 있었고 , 무안에서는 수매배정량 부정 대책 및 추가수매 운동 , 용정리 부당을류농지세 문제 해결 , 해제면 부당버스요금 시정활동 등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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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농가부채투쟁은 기독교농민회가 1980 년대 초반에 벌인 투쟁활동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
그리고 함평 ・ 무안 농민대회를 가농 , 함평무안현장대책위원회와 함께 개최하고 경찰의 폭력적인 탄압과 구속에 대한 대책활동을 벌였으며 , 함평무안 농민현장사건 보 고대회도 개최하였다 . 해남 , 강진에서는 회원대회를 개최하였다 . 1984 년의 대표적인 현장투쟁은 함평 ・ 무안농민대회였다 . 함평군기독 교농민회 , 무안군기독교농민회와 가톨릭농민회 , 함평농우회 31) 들이 연대하여 만든 ‘ 함평 ・ 무안 지역 현장문제 대책위원회 ’ 32) 가 주최하여 농민 대회를 개최하였다 . 33) 대회의 목적은 이 지역 주산물인 양파에 부과된 과도한 을류농지세 , 생고구마수매 , 외국소 도입으로 인한 소사육농가 피해 , 영세농가의 과중한 부채 , 추곡수매가 , 농협민주화 , 도시자본의 투기로 인한 소작 , 전두환의 방일 등 농민의 삶을 파괴시키고 가난과 소외 속으로 몰아가는 현안의 농민문제에 대한 농민들의 요구를 주장하기 위함이었다 .
그러나 당국은 전투경찰 , 군청직원 , 면사무소직원 , 농지개량조합직 원과 농협임직원 등 전행정력과 경찰력을 투입하여 대회를 열지 못하 게 막았다 . 34) 대회는 농민들을 분산시켜 대회개최를 막으려는 경찰의 봉쇄와 이에 맞서는 농민들의 반복되는 결집투쟁으로 변하였다 . 35) 전남기농은 가농 광주연합회와 함께 ‘ 함평무안현장사건 보고대회 ’ 를 개최하였고 , 36) 농민운동 탄압에 대해 항의하고 함평무안농민들에 연대할 것을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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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이 이름으로 공식적으로 조직된 것은 1985 년 4 월이다 .
32) 공동위원장 김홍재 ( 기농 대표 ), 이영만 ( 가농 대표 ).
33) 1984 년 9 월 2 일 함평장터에서 700 여 명의 농민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하였다 .
34) 함평읍으로 들어오는 모든 길목을 차단하고 대회를 원천봉쇄하였고 , 모여드는 500 여 명의 농민을 경찰차에 태워 강제로 집으로 돌려보내고 60 여 명의 농민을 연행하 였다 . 봉쇄를 뚫고 모여 시위하는 200 여 농민들을 전투경찰은 폭력으로 진압하였다 .
35) 전국기농의 간사 ( 허헌중 ) 가 코뼈가 부러지고 무안 농민 ( 신기철 ) 이 사복경찰이 휘두 른 사이다 병에 맞아서 머리가 찢어지고 엄지발톱이 빠지고 손가락이 부러지는 등 부상을 입었다 . 이 대회로 인해 전국기농 회장 ( 배종렬 ) 과 가농 전남연합회 총무 ( 노금노 ), 무안 농민 ( 신기철 ) 이 구류 선고를 받았다 ( 한국기독교농민회 , 1992: 67-68).
36) 9 월 20 일 오후 6 시에 광주가톨릭센타에서 개최 .
농민들은 ‘ 함평 ・ 무안 현장문제 대책위원회 ’ 라는 현장대책조직을 별도로 구성하여 치밀하고 조직적인 준비를 하였고 , 투쟁방법도 소극적 인 옥내집회 방식을 탈피하여 적극적이고 목적의식적인 가두투쟁을 전개하였다 . 함평 ・ 무안농민대회는 사전 정보유출로 주요 지도부가 사전 검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00 여명의 농민들이 가두투쟁을 격렬하 게 전개하였으며 , 양파에 대한 을류농지세 부과 철회 , 생고구마 전량 수매 , 농지개량조합 특별조합비 부과철회 등 지역현장농민들의 경제 적 요구와 농가부채 탕감 , 외국 소 도입으로 인한 농가피해보상 , 하추곡 수매가 인상 , 비농민 토지소유의 농민상환 등 전농민의 일반적 요구 , 그리고 전두환의 방일반대 , 지방자치제 실시 등 정치적 요구를 주 장하면서 투쟁하였다 . 그 결과 지역농민들의 경제적 요구는 거의 관 철시켰고 광범위한 농민대중의 지지기반을 확보하는 등 큰 대중적 성과를 가져왔다 . 함평 ・ 무안농민투쟁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결합하여 농민대중투쟁의 방향을 제시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
이처럼 1980 년대 전반 전남지역 기독교농민회의 활동은 제반 민주화 요구 투쟁과 부채투쟁 그리고 함평 ・ 무안농민대회로 요약할 수 있겠다 .
Ⅳ . 전남지역 기독교농민회와 농민대중운동의 성장
1. 전국기농의 방향제시
1982 년 전국기농이 만들어진 이후 1983 년 3 월에 충남기독교농민회 가 조직되어 , 전남 , 전북 , 충북 , 충남 , 경북 등 5 개도에 기독교농민회 가 활동하게 되었다 . 이어서 1986 년부터 강원도 기독교농민회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 경남은 거창농민회가 조직되어 회원단체로 가입함으로써 , 전국기농은 7 개 도에 지역농민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 이렇게 조직적 기반을 갖추어 가면서 전국기농은 1985 년 4 월에 외 국농축산물 수입요구 규탄대회와 미국 대사관진입투쟁을 전개하였 다 . 37) 이러한 투쟁은 이후 1985 년 7 월부터 9 월까지 전국 각 지역 ( 군 ) 에서 벌어진 대규모 소값피해보상투쟁을 촉진하였다 . 전국 20 여개 군 단위 지역에서 전개된 소값피해보상투쟁 ( 일명 , 소몰이싸움 ) 은 가농이 주도하고 기농이 함께 참여한 대중적 연대투쟁으로서 전체농민운동의 질적 전환을 가져왔다 . 전남에서는 무안 , 강진에서 소값피해보상요구 시위를 하였다 .
1986 년부터 기농은 군부독재종식과 민주헌법쟁취 , 외국농축산물수 입반대운동을 운동 중심과제로 삼고 , 농가부채탕감운동 , 농협민주화운동 , 부당수세철폐운동 , 일상적 권익실천 등을 일상과제로 내세워 활동 을 전개하였다 . 이러한 흐름에 맞추어 각 군기독교농민회도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
1987 년에는 농민운동의 활동목표를 ‘ 외세의 수탈과정을 종식시키고 민족자주와 민족통일의 기초를 닦으며 , 독재권력을 극복하고 정치 , 경제 , 사회 모든 분야에서 민주적 제권리를 쟁취하는 것 ’ 으로 하였다 . 마침 6 월항쟁이 발발하자 기농회원들은 적극적으로 이에 동참하였다 . 1988 년부터 기농은 운동목표를 농민운동조직통일사업과 농민투쟁확대 로 설정하여 활동하였다 . 전국기농은 「 농민신문 」 과 「 세상이야기 」 를 매월 ( 각각 11 회 , 10 회 ) 정기적으로 발행했으며 , 성명 , 전단 등도 발행하여 지역에 배포하였다 . 또한 도 ・ 군단위 농민교육 , 활동가교육 , 회원수 련회 , 일일교육 등을 광범하게 실시하였다 .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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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4 월 22 일 영등포산업선교회관에서 ‘ 미국농축산물 수입요구 규탄대회 ’ 를 가졌다 . 여기에 참석했던 농민들 가운데 20 여명의 농민회원이 규탄대회를 갖고 22 일 저녁과 23 일 아침 두 차례에 걸쳐 세종로 미국대사관에 진입하여 농산물수입요구 반대시 위를 하였다 .
1989 년 들어서는 농민운동조직통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 물론 1989 년 조직개편의 와중에도 한국기독교농민회 ( 한국기농 ) 는 전국단위에서 9 ・ 8 힐튼호텔 앞 미국식품 반대시위 , 11 ・ 28 수입개방저지 농민대회 등의 투쟁활동을 해나갔다 . 그리고 여전히 기농 활동가들이 여러 지역 현장에 교육을 하면서 조직을 확대해 나갔지만 , 기농의 이름이 아니라 ( 군단위 ) 지역농민회 이름으로 조직해 나가면서 ‘ 전농 ’ 의 군농민회 로 통합되어 갔다 .
이처럼 전국기농은 1980 년대 후반 들어 농민운동의 방향과 과제들을 설정하고 농민신문을 발행 ・ 배포하였으며 , 각종 교육을 실시하면서 지역 기독교농민회의 활동방향을 선도하였다 . 특히 권력을 군 부독재로 규정하고 민주화 요구를 앞세우면서 농민의 요구를 제출해 나갔다 .
2. 전남지역 기독교농민회의 조직적 성장
1985 년부터 1989 년은 자주적인 농민대중운동이 크게 성장한 때이다 . 이 시기 기농 역시 조직을 확대하고 농민운동의 확산에 이바지하였다 . 전남지역에서 군기독교농민회로 1986 년에 담양군농민회 , 장성군기독교농민회가 새로이 결성되었다 . 특히 담양에서는 1986 년부터 조직 활동에서 농민대중조직건설 강화의 방향에 입각하여 기독교농민 회가 아닌 군 단위농민회로 조직하였으며 , 전국기농에 회원단체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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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이상 전국기농의 활동은 기농 , 「 활동보고 」 (1985-1988) 참조 .
39) 이러한 방식으로 조직화한 다른 지역의 사례로서 1986 년에 고창군기독교농민회는 고창군농민회로 , 1987 년에 영동군기독교농민회는 지역의 자발적 농민운동세력과 연합하여 영동군농민회로 조직명칭을 바꾸면서 지역단위 농민대중조직으로 발전하 였다 .
구체적으로 조직 활동을 살펴보면 , 1985 년에 전남지역에서 기독교 농민회는 기존에 있던 조직에 더하여 전남 , 무안 , 강진 , 해남에 각각 1 개씩 지회가 결성되었다 . 그리고 해남에서는 면단위협의회 즉 송지면협의회가 결성되었다 . 상반기에는 나주 동강면에 여성준지회와 지회가 각각 1 곳 , 무안 평산에는 여성준지회 1 곳이 조직되었다 . 이러한 조직을 만들어 가기 위한 전단계로 다양한 교육이 있었다 . 간부훈련 , 지역교육 , 마을교육이 있었고 , 특히 문화교육이 늘어났다 . 40) 투쟁의식을 고취하는데서 더 나아가 기존 가요의 가사를 바꿔 부르는 노래부르기활동이 늘어났고 , 투쟁현장에서 노래부르기가 항상 이루어 졌다 . 그리고 여성농민위원회 활동을 통해 여성교육이 진행되었다 . 여성농민교육활동을 보면 , 전국단위 교육도 있었지만 , 지역단위 교육도 이루어졌다 . 41) 그리고 다른 단체와 연대하여 지역교육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 함평농우회 (6 월 18 일 ), 해남 기장여신도회 (9 월 5 일 ) 의 여성교육이 그러했다 . 여성교육에서도 문화교육과 마을교육이 이루어졌다 . 마을교육을 할 때에는 월례회도 함께 하였다 . 42) 이처럼 전남기농과 각 군기농은 전국 단위의 농민교육에 참여하기도 하였지만 , 지역에서는 간부훈련 , 지역교육 , 문화교육 , 마을교육 등을 실시하였으며 , 특히 이 시기에는 여성교육을 많이 하였다 .
또한 도 단위 , 군 단위 농민회들은 상임위 , 임원회 , 간부회의 , 지도 위 등의 회의를 하였으며 , 강진군기독교농민회와 무안군기독교농민회 는 총회를 개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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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전남 ( 간부훈련 2 회 ), 강진 ( 간부훈련 2 회 , 지역교육 6 회 , 문화교육 4 회 , 마을교육 5 회 ), 무안 ( 간부훈련 2 회 , 지역교육 3 회 , 문화교육 8 회 , 마을교육 2 회 ), 해남 ( 간부훈련 3 회 , 지역교육 2 회 , 문화교육 1 회 , 마을교육 1 회 ) 에서 교육이 있었으나 , 함평에서는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
41) 무안의 경우 용정 (3 월 7 일 ), 홍릉리 (8 월 22 일 ), 유월리 , 평산 몽탄 등에서 있었고 , 강진 회선리 , 나주 대지리 등에서도 있었다 .
42) 영광군 도동과 무안군 나드리에서는 문화교육도 있었다 . 무안의 경우 용정 (6 회 ), 유월리 (3 회 ), 평산 (3 회 ), 나드리 (1 회 ), 조암동 (1 회 ) 에서 마을단위 교육을 실시하였다 .
연대활동을 보면 , 전남기농이 ‘ 전사협 ( 전남사회운동협의회 )’ 에 참여하였고 , ‘5 월 민중민주화운동탄압저지대책위원회 ’ 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 강진기농은 강진가농 , 강진 탐진농우회와 연대하여 ‘ 강진농협문제 대책협의회 ’ 에 참여하였다 . 함평기농은 함평농우회와 연대하였고 , 무안기농은 함평무안대책위에 참여하였으며 가농과 연대하여 무안소몰 이 싸움에도 참여하였다 . 해남기농은 지역 농민단체와 연대하여 농축 산물수입반대 농민대회를 개최하였다 . 이처럼 1980 년대 후반에는 여 러 농민단체들이 연대하여 투쟁하는 일이 늘어났으며 기농은 적극적으로 연대활동에 참여하였다 .
홍보선전활동을 보면 , 전남기농은 성명서 , 선전벽보 , 회지 , 교육자 료를 간행하여 배포하였다 . 특히 1985 년에는 전남기농의 회지인 「 전라도농민 」 을 창간하였으나 , 43) 1986 년부터는 전사협 이름으로 「 전남농 민신문 」 이 발행되다가 1987 년 3 호부터는 다시 전남기농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
1986 년 들어 전남기농은 지역단위에서 1 차 농민교육 ( 지역교육 ), 전국단위에서 2 차 활동가교육 , 3 차 간부교육을 지속적으로 하면서 , 홍보 교육과 강사개발교육을 새로 개발하여 지역단위 자체 교육실시 기반을 다졌다 . 그리고 마을단위 여성농민기초교육과 지역활동가교육을 농한기에 집중하여 실시하였다 . 그리고 무안 용학교회에서 이루어진 두 번의 농민교육 44) 에는 여성농민회원 여러 명이 참석하였다 . 조직적인 측면에서 특기할 사항은 담양의 경우 군조직 명칭을 일반 농민회로 하면서 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회원조직으로 가입하였다는 것이다 . 45) 농민운동통일이란 전망에서 기독농민들이 주도해서 조직하더라도 일반농민회 이름으로 조직하고 , 이어 통일된 군단위 농민회로 통합되어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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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창간호에서는 ‘1985 년 전남농민운동과 앞으로 할 일 ’ 과 ‘ 민주제 개헌으로 농민생존권 보장받자 ’ 는 특집을 꾸렸고 ‘ 그 많은 수세 거두어 어디에다 쓰는거냐 ’ 란 농민의 주장을 싣기도 하였다 .
44) 7 월 21-23 일 , 담양군 교육 , 25 명 참석 ; 8 월 20-23 일 , 무안 , 강진 , 해남 , 담양 교육 ,35 명 참석 .
45) 1 차 중앙상임위원회 회의 (8 월 11-13 일 ) 에서 담양군농민회를 승인하였고 9 월 12 일 결성되었으며 ( 총무 , 양희중 ), 장성군농민회 조직은 준비되고 있었다 (1987 년 2 월 28일 결성 예정 ). 다른 지역의 경우 , 거창과 상주가 있었다 .
전반적으로 1987 년의 농민운동은 민주화운동 흐름에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투쟁을 하였다 . 무안에서는 2 월 7 일과 3 월 3 일에 ‘ 고 박종철 열사 추모대회 및 고문정권 규탄대회 ’ 를 개최하였다 . 전남기농은 이 대회를 적극 지원하였고 , 5 월 4-5 일에는 가농과 상임위원 연석회의를 열어 양 단체 상임위원들이 참석한 채 농민운동발전을 위한 연대강화 를 확인하고 연구모임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 이후 6 월 민주항쟁에 전 남 지역의 농민운동세력의 일부 ( 특히 무안 ) 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농민의 입장을 선전하였다 . 6 월 이후 각 군기농은 민주헌법쟁취국민 운동본부 46) 군단위 지부조직과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반독재민주화투 쟁을 농민의 생존권확보에 기초하여 전개하였다 . 물론 전국기농은 국 민운동본부 농민위원회 조직과 활동에 , 전남기농은 국민운동본부 도 농민위원회 조직과 활동에 , 각 군기농은 국민운동본부 군지부 조직과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농민생존권 확보와 민주헌법쟁취 및 군 부독재정권타도 투쟁을 전개하였다 . 선거과정에서는 지역단위 공정선 거 감시투쟁과 선거무효화투쟁 ( 전남 중심 ) 을 전개하였다 .
무안기농은 무안가농과 공동신문제작 , 공동투쟁 등 연대활동의 범위를 넓혀나가 ‘ 무안군농민운동협의회 ’ 를 결성하였다 . 그리고 농민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기존에 농민회 조직이 없던 군들에서 농민회 조직 결성을 하게 되었다 . 47) 그리고 3 월 20 일에는 무안군기독교농민회 현경면협의회가 면 농협회의실에서 결성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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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1987 년 초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을 계기로 반독재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 동시에 민주화 세력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요구도 점점 강해졌다 . 기존 군부독재권력 이 4·13 호헌조치를 통해 기존 헌법을 고수하겠다고 하자 , 범국민적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 5 월 27 일 , 민주화 운동을 하나의 흐름으로 결집시키고자 야당과 재야민주 세력이 합심하여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 이하 국민운동본부 ) 를 출범시켰다 . 국민운동본부는 6 월 민주항쟁을 주도하면서 사회의 민주화에 큰 공헌을 했다 .
47) 전국기농은 1987 년 1 차 중앙상임위원회 회의 (3 월 17-18 일 ) 에서 장성군농민회를 승인하였으며 , 나주와 곡성은 군 단위 조직 준비위 결성 단계에 있었고 , 담양은 조직 재정비에 들어갔다 . 나주군은 8 월에 조직완료 중이었다 .
이러한 조직화를 위해서 전남기농과 해남기농은 겨울에 1986 년의 운동을 정리하면서 농민교육을 실시하였다 . 48) 3 월과 8 월에도 전남기농의 농민교육이 이루어졌고 49) 군 농민교육이 나주 , 장성 , 담양 , 무안 , 곡성 , 화순 , 해남 등에서 이루어졌다 . 50) 교육은 주로 교회에서 이루어졌고 해남 (2 박 3 일 ) 을 제외하고 1 일 교육이었으며 , 25 명에서 120 명에 이르기까지 많은 농민들이 참여하였다 . 이처럼 농민회조직화의 시도는 조직이 있는 곳에서 뿐만 아니라 없는 곳에서도 이뤄졌다 . 이때도 다른 지역의 군 단위 교육에는 전남기농이나 전남지역 각 군기농의 농민활동가들이 교육강사로 많이 활동했다 .
전국기농의 여성농민위원회는 여러 지역에서 현장 조직 활동을 진행하면서 교육 , 선전 , 투쟁을 벌여나갔는데 , 특히 무안에 지역여성농 민위원회가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
1988 년 들어서 전남지역에는 수세투쟁이 광범하게 확산되면서 농민투쟁을 주도하였다 . 전남기농과 각 군기농은 수세투쟁을 조직하고 지원하면서 대책위조직 등에 개입하기도 하였다 . 그리고 이어서 군면 단위 수세대책위들이 결성되어 나갔다 . 그런데 이러한 투위조직들은 기존의 농민운동 조직 계통에 속하기 보다는 자주적인 농민운동의 흐름 위에 있었다 . 한편 충북 , 경북 지역에서 고조된 고추투쟁이 전남지역에도 확산되었다 . 동부지역의 고추투쟁과 서남부 지역의 수세투쟁은 1989 년 2 월 13 일 ‘ 부당수세폐지 및 고추전량수매 쟁취 전국농민대 회 ’( 일명 여의도농민시위 ) 51) 로 결집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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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1 월 14-17 일에 무안 한산촌에서 전남 1 차 교육이 있었고 , 이 교육에 여성농민 12 명이 참석하였다 . 그리고 2 월 23-26 일에는 해남 1 차 교육이 있었다 .
49) 전남기농의 농민교육이 3 월과 8 월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3 월 24-27 일 , 8 월 17-19일 , 한산촌 각각 45 명 참석 ).
50) 나주군 (4 월 5 일 , 고막원교회 , 80 명 ; 4 월 26 일 , 영동교회 , 70 명 ; 5 월 1 일 , 성결교회 , 45 명 ), 장성군 (4 월 23 일 , 백운교회 , 100 명 ), 담양군 (3 월 1 일 , 신광교회 , 60 명 ; 5 월 13 일 , 남문교회 , 40 명 ), 무안군 (5 월 3 일 , 복결교회 , 70 명 ), 곡성군 (7 월 22 일 , 옥과면 , 25 명 ), 화순군 (7 월 24 일 , 능주교회 , 120 명 ), 해남군 (8 월 5-7 일 , 민박촌 , 27 명 ).
그리고 1989 년 3 월 들어 전국기농 산하의 모든 군조직이 군단위에 서의 농민운동조직 통일사업을 벌여 1 군 l 농민회로 군단위 통일적인 농민대중조직을 준비하고 정비해 갔으며 , 농민운동의 전국적인 조직통일을 위한 과도적 연합체로서 ‘ 전국농민운동연합 ’ 결성을 준비해 갔다 . 요약하자면 , 1985 년에는 전남기농과 무안 , 강진 , 해남 기농이 활동 하였고 , 1986 년 들어 함평과 담양 기농이 추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 다 . 1987 년에는 장성 , 나주 기농이 추가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 그리하여 농민운동통일 직전에는 7 개의 지역 군 단위 기독교농민회와 전남 기농이 활동하고 있었다 . 그리고 농민운동 조직통일 과정에서도 전남 기농은 여러 지역에 교육을 하면서 농민회를 조직해 나갔다 .
3. 전남지역 각군 기독교농민회의 투쟁활동
이 시기 전남기농과 전남지역 각 군기농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
1) 전남기농
전남기농은 전국기농과의 연계 아래 각 군기독교농민회의 활동을 촉진하고 각종 자료와 홍보물을 만들고 독자적인 홍보활동을 하였다 . 또한 지역사회의 운동단체들과 연대활동을 통해 민주화요구를 관철시켜 나가려 하였다 . 시기별로 주요한 활동을 중심으로 전남기농의 활동을 살펴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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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1989 년 2 월 13 일 전국 99 개 군 농민 1 만 5 천여 명 (2 만 3 천여 명 이상으로 추정하기도 함 ) 이 여의도 광장에 모여 개최하였다 . 가농 , 기농 , 전국농민운동연합과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 학생들이 참여했다 . 시위대가 국회의사당 쪽으로 진출하자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였고 , 분노한 농민들은 만장이나 깃발을 달기 위해 가져온 대나무로 죽창을 만들어 이에 대항하였다 ( 죽창시위로 불리기도 한다 ). 권력의 탄압에 농민들은 2 월 25 일 ‘ 여의도 농민집회 폭력진압 규탄과 수세 완전폐지를 위한 전국농민대회 ’ 를 26 개 군에서 동시에 개최하면서 투쟁하였다 . 이 투쟁을 계기로 농민 운동조직통일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
1985 년에 전남기농의 주도 아래 해남에서 400 여명의 농민들이 「 전남농민큰잔치 」 를 열고 농민격문을 배포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 52) 여기에서 발표한 ‘ 전라도농민격문 ’ 에서 농민들은 농산물수입강요 반대 , 농산물생산비 보장 , 부채탕감 , 소값피해보상 , 재벌소유지 농민반환 , 어민피해보상 , 농촌중학교 의무교육화 등을 주장하였다 . 이처럼 전남기농은 개방농정 등 농민문제를 폭로하고 선전하는 활동 ( 유인물 살포 , 벽보 붙이기 ) 을 하였고 농협민주화 활동도 하였다 . 또한 나주 ・ 무안 영산호 간척농민 경작권수호투쟁을 지원하였고 , 나주지역의 비료임의선매 시정 활동을 벌였다 .
1986 년에 전남기농은 지역 농민운동세력과 연대하여 ‘ 전남지역 농민생존권 확보 및 민주헌법쟁취 투쟁위원회 ( 농민투위 )’ 를 결성하였다 (3 월 10 일 ). 이어서 이 농민투위는 4 월 4 일 장흥지원 재판 후 실천대회를 개최하였다 . 6 월 13 일에는 전남지역운동단체 53) 및 농민운동단체 ( 함평농우회 ) 와 함께 구속된 농민활동가 54) 석방을 요구하면서 농성에 돌입하였다 .
1986 년 하반기에 들어서 전남기농은 농가부채탕감운동과 부당수세 거부운동을 전개하면서 ‘ 빚 때문에 못살겠다 . 정권 갈아 빚 없애자 ’ 는 전단을 살포하고 , 벽서 , 마이크 홍보 등 일상적 경제투쟁을 전개하였다 . 특히 연말연초 부채상환기에 직면하여 11 월 7 일 ‘ 무안군조합빚 상 환거부대책위원회 ’ 를 결성하였고 , ‘ 전남농가부채조사단 ’ 의 활동을 수렴하여 11 월말 기독교농민회 활동가들의 주도하에 ‘ 전국농가부채대책 위원회 ’ 를 결성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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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9 월 6 일 오전 11 시 해남에서 400 여명의 농민들이 모여 「 전남농민큰잔치 」 를 열고 이 어서 12 시 반경 20 여명의 농민들이 가두에서 소값피해 보상하라고 외치며 농민격문 을 배포면서 시위를 하다가 연행되었다 . 모여있던 농민들이 석방을 요구하며 농성에 돌입하여 오후 6 시경 모두 석방되어 해산하였다 .
53) 전남사회운동협의회 , 민중문화연구회 , 민가협광주지부 , 전남민청 .
54) 노금노 함평농우회 회장 , 김석형 무안기농회장 , 양종환 기농총무 , 성호길 함평농우회 회원 .
전국기농에서는 12 월 29-30 일에 신민당 중앙당사에 10 여명의 대책위원 농민들이 들어가서 농가부채해결을 요구하는 농성투쟁을 전개하였는데 , 이에 발맞추어 전남지역에서 70 여 명의 농민들 ( 주로 전남기농 회원 ) 이 부채해결을 위한 농성에 돌입하였다 . 1987 년 6 월 항쟁 기간에는 지역의 농민들도 다양하게 시위에 참여 하였다 . 전남기농은 6 월 항쟁 기간에 주요 시위에 참여하였다 . 6 월 10 일에 광주에서 100 여명의 전남농민들이 ‘ 폭력정권 몰아내어 농민세상 이룩하자 !’ 는 플랜카드를 내걸고 가두시위에 참여하였다 . 6 월 19 일에 는 광주원각사 집회시에 ‘ 전남농민들이 애국광주시민에게 드리는 글 ’ 을 배포하고 시위에 참여하였다 . 26 일에는 광주공원에서 열린 국민평화대행진에 무안 55) 을 제외한 전남농민들이 집결하여 「 전남농민격문 」 을 배포하였고 , 집회에서 농민연설을 하고 금남로의 가두시위에 참여 하였다 . 또한 전남기농은 가농 및 서울지역학생대표들과 함께 전남지 역 농민학생농촌활동 공동추진 예비모임을 갖고 농활을 추진하였다 . 1987 년 하반기에는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전남농민위원회 ’ 가 중심이 되어 농민관련 선언 , 결의 , 운동과제 등을 제시하였다 . 농협민 주화투쟁과 쌀생산비보장운동도 전개되었는데 , 여타 농민운동단체와 전남기농이 함께 참여한 ‘ 국민운동본부 전남농민위원회 ’ 는 9 월 15 일 ‘ 조합장 직선제 및 쌀 한가마 10 만원 쟁취를 위한 1 단계 투쟁기간 ’ 을 선포하고 전남농민 50 만 명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 이와 함께 전남기농은 ‘ 농협민주화 투쟁을 위한 긴급대안 ’ 이라는 현장에서의 민주화투쟁을 위한 지침서를 만들어 배포하면서 면단위 농협민주화 추진을 촉구하였다 . 11 월 30 일에는 국민운동본부 농민위원회와 가농 전남연합회 주최로 ‘ 추수감사제와 전남농민대회 ’ 가 광주 호남동 천주교회에서 농민 500 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 이처럼 1987 년은 이미 여러 농민단체들이 연대하여 투쟁을 전개하였고 전남기농은 이 연대투쟁의 주요한 고리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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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무안에서는 해당지역에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
1988 년은 농민운동에서 투쟁이 가장 고조된 해였다 . 모든 농민투쟁이 현장에서부터 전국 단위로까지 확산되었으며 , 각 농민단체별 각개 약진 방식이 아니라 연대투쟁의 방식으로 힘을 모아갔다 . 또한 농민 운동은 생산자단체들과의 연대를 다각도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 기독 교농민회는 농민연대투쟁에 지속적으로 참여했을 뿐 아니라 ‘ 전국농민단체협의회 ’ 56) 결성을 적극 주도하였다 . 또한 기독교농민회는 수세 폐지운동을 전남북을 중심으로 충남 , 경기 등 평야지대에 걸쳐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는데 기여하였다 . 연일 군 ・ 도 단위에서 집회 및 투쟁을 하였으며 , 전남기농과 각군 기농은 지역의 수세투쟁을 촉구하고 홍보하였으며 , 수세투쟁의 실무자로 들어가 일하였다 .
전남기농은 1988 년 3 월 14 일 나주수세대회를 지지하는 ‘ 호남농민 격문 ’ 을 발표하여 부당수세거부, 농조해체 ・ 수리청 신설 , 적립금반환 등 을 주장하였다 . 4 월 14 일에는 수세 폐지를 위한 전남북농민대회에서 「 농민문제 누가 해결할 것인가 」 란 유인물을 통해 농민만이 투쟁을 통 해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 그리고 10 월 28 일 ‘ 전국수세폐지대 책위원회 ’ 가 결성되었을 때 , 전남기농 총무 ( 최병상 ) 가 대책위 총무를 맡아 수세투쟁의 실무를 해 나갔다 . 57)
1989 년 들어서는 농민운동통일을 위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 가농과 기농이 중심이 되어 전국농민운동연합을 결성하고 각도에 조직결성을 해나갔다 . 전남지역에서도 전남농민운동연합 58)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농민운동 통일을 준비해 나갔으며 전남기농도 이에 편입되었다 . 이 와중에도 전남기농 활동가들은 여러 지역 ( 곡성 , 신안 , 보성 , 승주 등 ) 에 농민교육을 하면서 농민회 조직을 시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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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전국농민단체협의회는 농민의 권익 보호 , 농민단체의 공동과제 해결 , 농업의 안정적인 발전 추구를 목적으로 1988 년 10 월 31 일 설립된 단체이다 . 농민운동조직 뿐 만 아니라 각종 생산자조직들이 결집한 단체로 , 나중에 농민운동을 확산시키기도 하였다 .
57) 수세투쟁이 가장 활발했던 해남과 나주에서 기독교농민회가 수세투쟁에 미친 영향 력은 크지 않았다 . 해남의 경우 해남 YMCA 농민회가 수세투쟁을 촉진시켰고 , 나주 에서는 학생운동출신자들과 자주적 농민운동흐름이 수세투쟁을 주도하였다 .
2) 각 군기독교농민회의 투쟁활동
(1) 무안기농
전남지역에서 기독교농민회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은 무안이다 . 1985 년에 무안군기독교농민회 ( 이하 무안기농 ) 는 농민문제를 폭로하는 선전활동 ( 각종 낙서 , 벽보 붙이기 , 유인물 살포 ) 을 하였고 , 양파수입반 대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 여름 들어서는 무안가농과 함께 ‘ 소값폭락 규탄대회 ’ 를 개최하였으며 59) 또한 농협과의 대화를 통해 농협민주화 활동을 전개하였다 . 내부적으로 단합하고 교류하는 모임을 하였으 며 , 60) 12 월 6 일부터 겨울 동안 ‘ 농가살림 망치는 외국농축산물 수입 중지하라 ’, ‘ 소값피해 보상하라 ’, ‘ 농가부채 탕감하라 ’ 등의 구호를 쓴 플랜카드를 마을에 게양하거나 , ‘ 미국 소야 느그집 가라 !’, ‘ 농민살길 보장 받는 민주헌법 쟁취하자 ’ 등의 구호를 벽에 쓰는 홍보활동을 대 대적으로 전개하였다 .
1986 년 들어 무안기농은 4 월 하순에 일주일 이상의 긴 투쟁을 전개하였다 . 낙서 등 광범한 선전 , 「 무안농민 」 과 「 무안농민신문 」 의 발행 , 도지사 면담 등의 활동을 통해 대회를 준비하여 , 4 월 19 일 지역 내 농민운동세력과 함께 (‘ 농민투위 ’ 이름으로 ) ‘ 수입개방저지 및 미 국예속정권 타도를 위한 무안농민실천대회 ’ 를 개최하였다 . 61) 대회는 4월 25 일까지 일주일 동안 무안읍 일원과 해제면 소재지 , 망운면 소재지 등에서 이어졌으며 , 농민들은 “ 미국예속정권타도 ” 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수입개방저지투쟁을 벌였다 . 한편 26 일부터는 ‘ 망운농협민주화 실천대회 ’ 를 개최하였다 . 또한 무안투쟁의 후속작업으로 선전물 ‘ 무안 농민은 왜 싸워야 했나 ’ 등을 광범하게 배포하고 구속된 회장 ( 김석형 ) 석방운동 , 법률구조비 모금운동 등을 계속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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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가농과 기농이 연합하여 전국 농민운동연합과 각도 농민운동연합을 결성하면서 농민운동통일 조직을 지향해 나갔다 . 나중에 전국농민협회와 자주적 농민회들이 결합하여 농민운동을 통일하게 된다 .
59) 7 월 29 일에 무안가농과 함께 주최하여 농민 100 여명이 모인 가운데 ‘ 소값폭락규탄 대회 ’ 를 갖고 경운기에 소를 싣고 읍내로 진출을 시도하였다 . 경찰의 봉쇄로 농성에 돌입하였고 경찰의 폭력으로 다수가 부상하였다 .
60) 야유회 2 회 , 수련회 1 회 , 농활잔치 7 회 등 .
무안농민실천대회를 통해 농민회원들은 장기간의 선전활동을 해냈고 , 농성기간 중에는 일반농민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 농성 , 가두진출 , 옥외방송 , 여성농민들의 전달조 활동 등 현장에서 농민들의 실천활동 이 두드러졌고 , 조직이나 기구 중심이 아니라 농민들 스스로 통일적 으로 대응해 나갔다 . 이 대회는 명칭에서 보듯이 당시 정권을 미국예 속정권으로 규정하고 , 강력한 정치투쟁을 감행한 대표적인 군단위 투 쟁이었다 . 더욱이 면단위 투쟁으로 이어져 망운농협민주화농성에 참여하고 수매장 ( 부정등급 ) 투쟁을 벌였으며 , ‘ 마늘생산비쟁취 및 살인농 정철폐 실천대회 ’(7 월 4 일 ) 까지 개최하였다 .
이어서 ‘ 무안군 조합빚 상환거부 대책위원회 ’ 를 구성하여 부채해결 활동까지 벌였다 . 무안기농은 지역부채 ( 농협 , 축협 , 수협 등 ) 의 구체적인 조사활동을 통해 여론화를 도모하고 , 이를 「 부채대책 」 이란 선전지 에 담아 폭로하면서 부채해결을 촉구하였다 . 전남기농이 조직한 전남 농가부채조사단은 호별 방문을 통한 선전선동과 장터 대중연설을 기획하고 실천해 나갔다 . 특히 유인물 배포 뿐만 아니라 벽서작업 , 마이크 선전 등 새로운 선전방법을 개발하여 홍보선전활동을 강화하였다 . 무안조합빛상환거부대책위원회에서 발행한 「 부채대책 」 은 이 지역의 부채를 조사한 자료에 근거하여 부채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큰 호응을 얻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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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무안버스정류장 앞에서 100 여명의 농민들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했고 , 격렬한 가두투쟁을 전개하였다 . 여성농민들이 시위에 대거 참여하였다 .
하반기에는 무안 몽탄면에서 ‘ 몽탄면수세시정대책위원회 ’ 를 구성하여 수세투쟁도 벌여나갔다 . 겨울에 들어서 마늘 수매장 ( 부당등급 ) 문제를 둘러싸고 무안기농과 가농 무안군협의회가 통합하여 만든 ‘ 무안군 농민운동협의회 ’ 가 활동에 나섰다 . 그리고 기농과 가농의 조직이 공동선전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 이처럼 현장에서는 이미 농민운동단 체 간의 연대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
1987 년 들어 무안기농은 다양한 정치활동을 벌여나갔다 . ‘ 고 박종철 열사 추모제 및 고문정권 규탄대회 ’ 를 개최하였고 (2 월 ), ‘ 무안군 민주 화 및 농민생존권쟁취운동협의회 ’ 를 1 천여 명이 참석하여 결성하고 가두시위를 하였다 (4 월 10 일 ). 이 협의회는 2 개읍 8 개면 지역위원회를 설치하였다 . 5 월 18 일에는 가농 무안군협의회 , 무안군민주화 및 농민 생존권운동협의회와 함께 ‘5 ・ 18 광주 추모제와 농가부채 해결 및 마 늘 ・ 양파 생산비 보장 무안군민공청회 ’ 를 150 여 명의 농민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하였다 . 군청 앞마당에서 농성을 하던 농민들은 “ 직선제개 헌 , 군사독재 물러나라 !” 는 구호까지 외치며 가두시위를 하였고 , 이어서 광주와 목포로 재집결하여 민주화대행진에 참여하였다 . 영세민취 로사업 부정 폭로와 보상활동 같은 경제적 이익 활동도 벌였다 . 무안 기농은 이처럼 6 월 항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민주화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 6 월 항쟁 기간 , 특히 6 월 26 일 민주화대행진 광주 시위 때에 무안기농은 무안지역에서 독자적인 집회 및 시위를 하였고 , 62) 여기서 국민운동본부 무안군지부가 결성되었다 .
1987 년 하반기에 들어서도 무안기농은 정치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 여타 농민단체들과 함께 망운면농민회원 연행사건에 공동 대응하였으며 , 창포간척지양도추진위원회 결성 (10 월 10 일 ), 선거규탄군민대행진 (11 월 21 일 ), 광주학살 원흉처단 군민대회 (11 월 28 일 ), 부정선거감시 활동 , 부정선거규탄대회 , 선거무효투쟁 등을 주도하였다 . 이러한 투쟁 의 여파로 경찰의 폭력에 시달린 무안농민들은 두 차례에 걸친 폭력 규탄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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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농민들 100 여 명이 구시장터 입구에서 ‘ 독재타도 민주헌법쟁취는 우리 손으로 ’ 라는 플랜카드를 앞세우고 “ 민주헌법 쟁취하여 마늘 ・ 양파 생산비 보장받자 !” 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 이어 터미널에서 대중 집회를 갖고 목포로 재집결하였다 . 그런 데 이날 무안에서 군경찰서 병력이 모두 도시로 동원되고 20 여명 밖에 없었기 때 문에 읍단위 시위는 제지받지 않고 진행되었다 .
더욱이 공세적인 경제투쟁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 영산호 간척 지 조성과 전용을 둘러싸고 농민들은 영농개척단을 결성하고 영농을 하고 소식지까지 발간하여 활동을 알렸다 . 63) 그리고 6 월 항쟁 기간과 그 이후에도 계속 농민생존권투쟁을 벌여 나갔다 . 무안기농은 면마늘 양파대책위들과 함께 마늘양파생산비보장을 촉구하였으며 64) 우유전량 수매투쟁 , 65) 버스교통비 인하투쟁도 벌였다 . 그리고 여성농민들의 활동도 두드러져 , 농어촌의료보험제도 개선을 위한 여성농민대회를 개최하기까지 하였다 .
전에 해오던 농협민주화투쟁과 쌀생산비보장운동도 전개하였다 . ‘ 국 민운동본부 전남농민위원회 ’ 가 주도한 ‘ 조합장 직선제 및 쌀 한 가마 10 만원 쟁취 ’ 를 위한 전남농민 50 만명 서명운동에 무안기농이 적극 참여하였다 . 또한 면별로 대중집회를 통해 ‘ 농협민주화추진위원회 ’ 를 결성하고 서명운동을 전개하면서 농협민주화와 쌀값보장을 촉구하였다 .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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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4 월 15 일에 몽탄면 새마을영농개척단 발대식을 하고 영산호 간척지를 농민에게 불하할 것을 요구하며 토지 없는 농민을 모아 4 월 20 일부터 영농에 착수하였다 . 50 여 명의 농민으로 결성된 몽탄 새마을영농개척단은 정부가 농지조성 목적으로 만들 었던 영산호 간척지를 재벌들이 공업용지로 전용하려 하자 일부 개답이 끝난 갈산 지구 간척지에서 4 월 21 일부터 영농을 개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 당국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10 월 중순 유채와 보리파종을 실시하며 싸웠다 . 영농개척단은 소식지 영 산호의 함성 을 발행 ・ 배포하였다 .
64) 6 월 20 일에는 현경 ・ 망운 ・ 운남 ・ 해제면 마늘양파대책위원회와 함께 해제 중앙교회에서 ‘ 마늘양파생산비보장을 위한 기도회 ’ 를 개최하였다 . 7 월 4 일에는 300 여명이 참여하여 ‘ 무안 양파마늘생산비보장대회 ’ 를 군청 앞에서 개최하고 일반대중 500 여명과 함께 읍 내 가두시위를 하였다 (7 ・ 4 무안농민투쟁 ). 이후 면별로 투쟁보고대회를 개최하였다 .
65) 7 월 7 일에 무안군 낙우회원 80 명을 결집하여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66) 무안농민들은 몽탄면 (150 명 ), 망운면 (100 명 ), 해제면 (500 명 ) 등 각 면별로 대중집회를 통해 ‘ 농협민주화추진위원회 ’ 를 결성하고 서명운동을 전개하면서 농협민주화와 쌀값 1 가마 당 10 만원 쟁취를 주장하였다 .
1988 년 들어 농어민의료보험이 전국적으로 실시되게 되었다 . 그러나 사보험형태인 조합주의 의료보험으로 인해 농민에게 의료보험은 혜택이 아니라 부담으로 다가왔다 . 기농은 연초부터 의료보험제도 개 선운동을 벌여나갔다 . 특히 여성농민위원회가 활동하던 무안에서는 여성농민들이 의료보험거부 투쟁을 전개하였다 . 67) 겨울 동안 마을교 육을 시작으로 마을별로 대책위를 구성하고 고지서를 반납하고 이어서 ‘ 농어촌의료보험제도 개선을 위한 무안여성농민대회 ’ 까지 개최하며 의료보험료납부거부를 하였다 . 68) 이어서 전국 단위 투쟁에 결합해 나 갔다 . 69) 수확기에 접어들어서는 고추전량수매 시위와 농성 , 야적시위를 하여 고추추가수매를 관철시키기도 하였다 .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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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12 월 선거기간 중에 의료보험공단 측은 농어촌의료보험증을 배포하였다 . 그런데 농민들에게 요구한 의료보험료는 도시에서 50 만원 월급을 받는 회사원과 맞먹는 것이었다 . 호당 평균 400 만원의 빚을 지고 있는 농민들은 비싼 보험료에 반발하였으며 , 의료보험료를 색깔이 다른 또 하나의 세금으로 인식하였다 .
68) 1988 년 1 월 22 일 무안 유월리를 시작으로 용정 , 수양촌 등 5 개 마을 2 개 교회에서 교육을 실시하면서 , 여성농민들은 의료보험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마을별로 의 료보험거부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 마을별 대책위원회는 자체적으로 면사무소나 군의료보험조합에 고지서를 반납하였다 . 이에 좀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싸움을 전개하기 위해서 ‘ 무안군 의료보험여성대책위원회 ’ 를 구성하였다 . 대책위는 2 월 4 일 4 개면 ( 몽탄 , 현경 , 운남 , 해제 ) 여성농민 17 명이 참석한 가운데 농어촌의료보험제도 개선을 위한 무안여성농민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2 월 10 일 ‘ 농어촌 의료보험 제도 개선을 위한 무안여성농민대회 ’ 를 무안시장공터에서 열었다 . 여성농민들은 부 당한 의료보험제도를 널리 폭로하기 위해 , 플랜카드와 피켓을 앞세우고 구호를 외 치면서 행진하였다 . 무안군 의료보험조합 앞에 모인 여성농민들은 “ 현행 의료보험제도가 농민실정에 맞게 될 때까지 우리는 납부를 거부한다 ” 는 구호를 외치며 각자가 가지고 온 의료보험 고지서를 직접 반납하였다 .(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 1988 년 3 월 : 54-55)
69) 기독교농민회는 의료보험개선의 방향으로 통합의료보험 쟁취를 내세웠으며 , 6 월 28 일 각 농민단체 , 빈민단체 , 의료인단체들이 모인 가운데 ‘ 전국의료보험대책위원회 ’ 를 결성하고 의료보험투쟁을 벌여나갔다 .
70) 10 월 15 일 해제면 장터에서 농민 3 백여 명이 고추전량수매 시위를 벌였으며 , 28 일 에는 현경면 농민들 100 여명이 단위농협 앞에서 고추전량수매를 요구하며 농성하 였다 . 무안농민회 창립준비위원회 ( 무안기농 포함 ) 가 주도하여 12 월 14 일에는 ‘ 무 안고추생산비보장 및 전량수매 대회 ’ 를 개최하였으며 , 현경면과 해제면 등 6 개 읍면 500 여 명의 농민들이 고추를 실어다 군청에 쌓아놓고 15 일간 농성을 벌여 고추 추가 수매를 할 수 있었다 .
또한 정치투쟁으로 무안기농은 3 월에 ‘ 민중의 당 ’ 무안지구당 창당 과 뒤이은 활동에 농민활동가들이 개입하였고 , 총선대책을 세우고 반 민정당 활동을 벌였다 . 그리고 가농무안협의회와 함께 「 무안농민신문 」 을 계속 발행하였고 , 71) 성명서도 함께 발표하였다 .
(2) 강진기농
1985 년에 강진군기독교농민회 ( 이하 강진기농 ) 는 외국농축산물수입 반대 및 소값피해보상요구 투쟁을 벌였다 . 72) 농민들은 ‘ 강진농민만세 !’ 라는 유인물을 통해 취로사업 노임전액 현금지불 , 부실제방공사 피해 보상 , 수세폐지 , 소값피해보상 , 농가부채 전액 탕감 , 외국농축산물수입 중지 , 농산물생산비보장 등을 요구하였다 . 강진기농은 취로사업 공동운영권 쟁취활동도 벌였고 , 농활실태 조사활동도 벌였다 . 또한 부당 수세거부운동을 촉진하였으며 , 이러한 운동을 하면서도 야유회를 두 번 갔고 풍물놀이를 한번 하였다 .
1986 년에 강진기농은 이른바 쇠똥물투척사건을 벌였다 . 강진기농은 강진가농 , 탐진농우회 , 강진기독교장로회청년회와 연대하여 강진군 농협신축 개관식장에 들어가 쇠똥물을 넣은 계란을 개관식에 참 석한 주요 인사들의 얼굴에 던지며 호화판 농협 규탄 및 수세거부 똥물투척 시위를 전개하였다 . 73) 또한 강진기농은 맥주맥 권익실천, 수세시정투쟁 등에 동참하였다 . 여름에는 해남기농과 함께 농민대회 를 개최하였으며 , 농지개량조합 저수지 수몰농가의 피해보상투쟁도 전 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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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8 월에는 무안농민회 창립준비위원회 명의로 「 무안농민신문 」 을 발행하였다 .
72) 9 월 9 일 강진읍 우시장에서 외국농축산물수입반대 및 소값피해보상요구 가두시위를 벌였다 . 20 여명의 농민들은 ‘ 강진농민만세 !’ 라는 유인물을 통해 농민의 요구를 제시하였다 . 15 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강진읍교회에서 농민 50 여명과 목회자 등이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고 농민의 주장을 알리는 가두방송을 하며 농성에 돌입하였 다 . 오후 내내 방속과 농성을 계속하였고 새벽에 농민 13 명이 석방되고 2 명이 구 류처분을 받았다 . 이어서 15 일까지 연행자석방 요구 기도회를 하였다 .
73) 1 월 22 일 50 여명의 회원 ( 농민 총 70 여명 ) 이 강진군 농협신축 개관식장에 들어가 쇠똥물을 넣은 계란을 국회농수산분과위원장 ( 김식 ), 농협중앙회장 ( 윤근환 ) 등의 얼굴에 던지며 호화판 농협 규탄 및 수세거부 똥물투척 시위를 전개하였다 . 이어 소값피해보상 , 농가부채탕감 , 농협민주화 , 외국농축산물 수입중단을 주장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 이후 벽서작업도 하고 전남지역 단위 투위를 결성하여 4 월 4 일 구형 재 판후 300 여명이 참여하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
1987 년에 강진기농은 부채투쟁을 전개하였다 . 부채전단을 배포하고 농가부채공청회를 개최해 나갔다 . 74) 그리고 여름에는 대학생농촌활동을 계기로 대중집회를 개최하였다 . 75) 하반기에 들어서 면농민회들이 결성되었는데 76) 강진기농이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 8 월 30 일에는 ‘ 국민운동본부 강진농민위원회 ’ 가 결성되었고 , 농민들의 주장을 담은 ‘ 우리의 요구 ’ 를 발표하였다 .
가을 들어 수세투쟁이 전개되었다 . 강진기농의 활동에 힘입어 수세 대책위원회들이 결성되어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 12 월 들어 ‘ 강진군수 세거부대회 ’ 를 2 차에 걸쳐 대대적으로 개최하였다 . 77)
이러한 흐름을 이어받아 1988 년 1 월 19 일 ‘ 농조해체 강진군민대회 ’ 로 까지 이어갔다 . 군민대회는 강진부당수세거부대책위원회 주최로 이루어졌다 . 78) 이 수세투쟁에서 강진기농이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 강진기농은 여름에는 여름농활을 계기로 농민 - 학생 농활공동추진위원회 에 참여하였다 . 가을 들어 면농민회가 주최한 농협민주화토론회를 개최하였고 79) 참여농민들은 농협의 민주화와 농조폐지를 주장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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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3 월 들어 강진기농은 장날에 농가부채 전단을 수차례 배포하였다 . 이어 4 월 9 일에 농가부채공청회를 개최하려 하였으나 장소인 군민회관의 대여불허와 군수의 불참으 로 연기하였다 . 5 월 4 일 다시 공청회를 시도하였고 , 경찰의 저지로 장소를 장터로 옮겨 농민 150 여명이 1 시간 가량 노상 부채공청회를 개최하였다 .
75) 7 월 19 일에 농민과 학생 등 2 천여 명이 참가하여 버스터미널에서 농활해단식을 하면서 대중집회를 개최하였다 .
76) 신전면 (8 월 25 일 ), 도암면 (9 월 10 일 ), 칠량면 (9 월 21 일 ) 에서 면농민회가 결성되었다 .
77) 9 월 24 일에 강남 , 삼신지구 수세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수세투쟁을 본격적으로 시 작하였다 . 강진기농은 10 월 6 일 「 강진농민 」 창간호를 발행하면서 쌀값문제와 농협 문제를 제기하였고 , 수세와 면단위농민회 창립 등 강진농민들의 목소리를 담아냈다 . 11 월 들어서는 화산지구와 옥천지구에서 수세거부 준비위와 대책위가 결성되었고 , 12 월 강진군수세거부대회로 이어졌다 .
78) 농민 100 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광명교회 옆 시장통에서 개최되었다 . 경찰의 무차별 구타와 연행에도 농민들과 여성농민들의 항의와 시위농성 끝에 연행된 집행부가 석방되고 대회를 개최하였다 .
(3) 해남기농
전남지역에서 가장 오래전부터 활동해 온 해남군기독교농민회 ( 이하 해남기농 ) 는 1985 년 들어서도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 수협부 조리 , 농협 냉장고판매 , 수매시 들머리 등에 대한 시정활동을 벌였고 , 농약피해조사활동을 하고 알타리무우 피해보상활동을 지원하였다 . 1986 년 들어 해남기농은 지역의 농민운동가들과 공동으로 수입개 방저지투쟁을 전개하였으며 , 민주농협쟁취투쟁 , 농지세문제 시정요구 등의 활동을 하였다 . 80) 여름 (8 월 5-6 일 ) 에 강진기농과 연대하여 ‘ 강진해남농민대회 ’ 를 송호리 해수욕장에서 개최하였으며 , YMCA 민주 교사 규탄대회에 연대하였다 . 그 외에 방위협의회 회비 반환 (2 천만 원 ) 활동을 벌이고 , 맥주맥 관련 공판에서 유인물을 살포하였다 ( 신정 지회 ). 또한 수매장 ( 부당등급 ) 문제를 제기하였고 , 5 ・ 18 관련 시위를 벌였다 . 이처럼 해남기농은 지역내 농민활동가들과 연대하면서 다양 한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 「 해남농어민신문 」 을 발간하여 해남농민의 투 쟁을 전하고 농민문제 등에 대해 분석하고 운동방향을 제시하였다 . 1987 년에 들어 해남기농은 어민분과를 두어 어민문제와 수협문제 에 관한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고 , 강제출자금 반환 , 대출비리 시정 , 수협 임시법 폐지 등 어민의 요구를 제출하였다 . 81) 해남지역은 바다에 접하고 있어서 많은 농민들이 어업활동을 겸하기도 하였는데 , 특히 수협의 부정과 반농민적 태도에 대해 농어민들이 분노하였고 , 해남기농은 어업관련 문제들을 계속 제기해 나갔다 .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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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9 월 9 일에 신전면농민회와 도암면농민회가 주최하여 ‘ 농협민주화를 위한 신전 ・ 도암 농민 대토론회 ’ 를 도암교회에서 3 백여 명의 농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하였다 .
80) 해남기농은 해남읍에서 4 월 6 일 장날에 소몰이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 4 월 15 일 옥 천면에서 민주농협쟁취 관련 전단을 살포하였다 . 5 월 9 일에는 신민당 ( 당시 야당 ) 지구당개편대회에서 시위를 하여 해남시장으로부터 농지세문제를 시정하겠다는 확약을 받아냈다 .
그리고 해남기농은 지역의 문제들을 찾아내 해결하려고 하였고 정치투쟁도 전개하였다 . 4 월에는 송지면 군곡지구 농지정리 투쟁에 개 입하였고 , 7 월 들어서는 대학생농촌활동에 결합하였으며 , 8 월에는 공동방제 농약쟁취투쟁을 전개하였다 . 공동방제농약을 산간벽지에는 배포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빼돌린 행동에 대해 해남기농 회원들이나 서서 되찾아 왔으며 , 4.13 호헌반대 투쟁도 전개하였다 .
이러한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해 나가면서 면단위농민회를 결성해 나갔다 . 이미 결성되었던 송지면 협의회에 추가로 7 월 30 일 북일면협 의회가 창립되었다 . 83) 이들 협의회는 면단위 신문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 84) 또한 해남기농은 수협문제를 계속 제기하면서 송지민주농협 추 진위를 결성하였다 . 이러한 활동 위에서 10 월 들어 국민운동본부 해 남군지부가 결성되고 , 이어서 송지면 수세거부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11 월 7 일 ). 겨울 (11 월과 12 월 ) 에 들어 면단위 수세대책위원회들이 속속 결성되었고 , 군단위 ‘ 수세거부대회 ’ 가 열렸다 . 그러나 수세투쟁을 촉진하고 적극 결합한 것은 해남 YMCA 농민회였고 ( 윤수종 , 2015), 해 남기농은 「 해남농어민신문 」 을 통해서 수세투쟁을 촉구하였다 .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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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4 월 30 일 -5 월 1 일에 해남기농 회원 12 명이 북일면 , 북평면 , 송지면 24 개 마을에 유 인물 ‘ 강제출자를 조건으로 한 서환 ’ 을 배포하여 어민의 요구를 제출하였다 . 이 유인 물 배포혐의로 기농회원 4 명이 구류처분을 받았고 이들은 유치장에서 4 ・ 13 호헌조치 에 반대하는 단식농성을 하였다 .
82) 5 월 1-5 일에도 수협민주화운동을 벌였고 , 그 과정에서 선전활동 혐의로 4 명이 구류처분을 받았다 .
83) 해남지역은 해남 YMCA 농민회가 활동하여 면단위농민회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 예를들어 송지농어민형제회 (8 월 30 일 , 송지농어민신문 발행 ).
84) 8 월 17 일에는 해남기농 송지면협의회에서 「 송지신문 」 창간호가 나왔고 , 25 일에는 해남기농 북일면협의회에서 「 북일농민신문 」 창간호가 나오는 등 , 면단위 기농신문들이 발행되었다 .
1988 년 들어 해남기농은 해남 YMCA 농민회 및 해남부당수세거부추 진위원회와 공동주최하여 ‘ 해남농어민하계단합대회 ’ 를 개최하였고 , 86) 여기서 활동가들은 연대와 통일을 위해 노력하고 싸워 나갈 것을 다짐하였다 . 해남기농은 「 해남농어민신문 」 과 유인물과 전단 87) 을 발행 ・ 배포하며 의료보험 문제를 제기하고 독재권력을 비판하였다 . 그리고 지역의 현안인 맥주맥전량수매를 요구하는 전단을 해남 YMCA 농민회와 함께 발행 ・ 배포하고 이후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 또한 농촌활동 농 민학생공동추진위원회 발대식에도 참여하였다 .
이 시기에는 농민운동이 확산되면서 면단위조직이 결성되어 갔다 . 해남기농 산하에도 면단위조직으로 협의회들이 결성되고 여름 들어서는 좀 더 조직적인 틀로 면농민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 면농민회들은 신문발행을 통해 해당지역의 당면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을 도모 하였다 . 88) 이후 해남농민들은 고추투쟁과 수세폐지투쟁을 이어갔으며 , 해남기농은 면단위농민회를 통해서 이 투쟁들을 지원하였다 . 1989 년 이후 농민운동조직통일 과정에서 해남기농은 해남군농민회로 통합되어 갔다 .
(4) 함평기농
함평군기독교농민회 ( 이하 함평기농 ) 는 다른 조직들과 연대하여 1984 년 ‘ 함평 ・ 무안농민대회 ’ 를 개최하였다 . 그 이후 함평기농은 1986 년 4월 민주헌법쟁취 서명운동을 전개하였고 , 5 월 17 일 ‘ 군사독재 , 미국예 속정권타도 ’ 시위를 벌이는 등 정치투쟁을 해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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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해남기농은 수세투쟁을 개량적인 경제투쟁으로 여겨 다른 투쟁들에 비해 덜 강조했던 것 같다 .
86) 1 월 4 일 송지면 송호리 해수욕장에서 약 100 여 명의 활동가들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하였다 .
87) 「 의료보험대책 」 (1 월 30 일 ), 「 농민 무시한 노태우 정권의 보통시대 개막이란 말짱 거짓말 」 (3 월 1 일 ), 「 민정당 정권이 우리 농어민에게 준 기막힌 선물 」 (4 월 2 일 ).
88) 산이면협의회 (1 월 9 일 ) 와 마산면 협의회 (3 월 31 일 ) 가 결성되었다 . 8 월 들어 면농민회들이 창립되었고 ( 산이면농민회 , 8 월 1 일 ; 현산면농민회 , 8 월 25 일 ), 해당지역의 당면문제 ( 송지면 , 방파제공사로 어업권피해 ; 현산면 , 화전답 ; 산이면 , 고추생산비 ) 들을 제기하고 해결을 도모하였다 . 또한 현산면농민회는 「 현산면농민신문 」 창간호를 발 행하였다 (9 월 22 일 ).
1987 년 들어 함평기농은 함평농우회 , 가농 함평협의회와 연합으로 ‘ 함평부채농가대책위원회 ’ 를 구성하여 활동하고 공청회를 개최하려고 하였다 . 89) 이러한 연대활동을 이어가 함평기농은 함평농우회와 농민활 동가간담회를 갖고 함께 운동해 나갈 기구로 ‘ 함평군농민위원회 ’ 를 결성하였다 . 이후 함평군농민위원회가 주도하여 ‘ 민주농촌실현을 위한 함평농민대회 ’ 와 ‘ 민주정부수립을 위한 함평군민결의대회 ’ 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 90) 이를 통해 농민의 살길을 찾기 위해 민주정부를 수립 하자고 주장하였다 . 이처럼 함평기농은 함평농우회와 연대하여 , 국민 운동본부 지부가 아니라 함평군농민위원회를 결성하고 기관지 「 함평 농민신문 」 을 발행하였고 , 면단위 농민위원회도 결성 ( 손불면 , 학교면 ) 하면서 지역정치운동을 이끌어 갔다 .
1988 년 들어서도 함평기농은 함평농우회와 함께 ‘ 함평군농민위원회 ’ 이름 아래 활동하였다 . 함평군농민위원회는 연초에 의료보험문제를 제기하였고 , 마을대표들을 주축으로 대책위를 구성하여 의료보험료의 부당성을 선전하고 부당의료보험거부 군민대회까지 개최하였고 , 여기서 의료보험료 현실화와 조합통합일원화를 주장하였다 . 91) 여름에는 대학생농촌활동을 계기로 발대식에 참여하였고 , 농활이 끝날 때 700 여명의 농민과 학생이 참여한 가운데 경운기와 트랙터를 동원하여 의료보 험조합 앞에서 ‘ 외국농축산물수입저지 농민결의대회 ’ 를 개최하고 가두 시위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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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3 월 28 일에 ‘ 함평부채농가대책위원회 ’ 가 주축이 되어 4 월 7 일 함평천주교회에서 공청회를 개최하려고 하였으나 경찰의 봉쇄로 무산되었다 .
90) 1987 년 8 월 들어 함평기농은 함평농우회와 농민활동가간담회를 갖고 함께 운동해 나갈 기구를 만들기로 하고 9 월 2 일 ‘ 함평군농민위원회 ’ 를 결성하였다 ( 함평 가농은 불참 ). 이어 함평군농민위원회는 9 월 20 일 함평농고 뒤 야산에서 ‘ 민주농촌실현을 위한 함평농민대회 ’(300 여 명 참석 ) 를 , 11 월 21 일 함평공원에서 ‘ 민주정부수립을 위 한 함평군민결의대회 ’(1 천여 명 참가 ) 를 개최하였다 .
91) 2 월 50 여 개 마을대표가 농민위원회 사무실에 모여 ‘ 함평군의료보험조합 대책위원회 ’ 를 결성하였다 . 대책위는 460 여개 마을에 의료보험료의 부당성을 교육하고 3 월 2 일 2 천여 명의 농민이 참여한 가운데 ‘ 부당의료보험료거부 군민대회 ’ 를 개최하였 다 . 경찰과의 충돌 속에서도 대회를 개최하고 농민들의 주장을 제기하였다 .
함평군농민위원회는 여름철에 ‘ 함평여성농민단합대회 ’ 를 개최하였고 ‘ 함평농민체육대회 ’(8 월 16 일 , 150 여명의 농민 참여 ) 를 개최하는 등 운동의 지평을 넓혀갔다 . 겨울에 들어서는 수세운동이 전개되어 12 월 들어서 나산면과 엄다면에서 수세폐지대책위원회가 결성되고 결의대회 등을 개최하였다 . 이에 함평군농민위원회는 산하에 ‘ 수세폐지 및 농가부채 정리를 위한 특별위원회 ’ 를 설치하여 활동하도록 하였다 .
(5) 장성기농
장성군기독교농민회 ( 이하 장성기농 ) 는 1987 년 들어 3 월에 적십자회 비거부 투쟁 , 무보수부역거부 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 4 월에는 남 면에서 자갈대 ( 도로보수비 ) 징수거부 투쟁을 벌여 자갈대를 없애는 결과를 얻어냈다 . 그러자 삼서면에서도 농민들이 항의하여 자갈대가 없어졌고 , 자갈대투쟁은 여러 면으로 확산되어 갔다 . 다른 문제로 적십자회비 대책활동도 조직적으로 전개하였다 . 이처럼 농민들의 이해 와 관련된 쟁점들을 제기하면서 장성기농은 지역농민들을 각성시키려고 하였다 . 7 월 9 일에는 국민운동본부 장성군지부를 창립하였으며 , 이어서 수문설치 투쟁도 전개하였다 .
8 월 들어서 장성기농은 수세문제를 제기하고 면단위 수세교육 , 수 세공청회를 통해 수세거부를 결의하였으며 , 군농민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 92) 추수를 마치고 장성기농은 ‘ 농민추수감사제 및 농조해체결의대회 ’ 를 개최하여 93) 수세투쟁의 열기를 이어갔다 . 농민대회 이후 장성지역에서는 면단위 농민교육이 계속 진행되었고 면별수세대책위 원회가 구성되어 갔다 . 장성기농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 농조해체결의 대회 ’ 를 1,2 차에 걸쳐 개최하였으며 94) 수세투쟁을 대중투쟁으로 확산시켜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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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8 월 26 일 삼서면 협의회에서 , 8 월 27 일 남면 백운교회에서 수세교육을 하는 등 면 단위 수세교육을 통하여 부당수세거부운동을 촉발하였다 . 8 월 30 일에는 백운교회에 서 150 여명의 농민이 수세공청회를 개회하고 농지개량조합 대표를 출석하도록 요청 하였다 . 이에 농지개량조합 장성지소 재무계장과 총무계장이 참석한 채 공청회를 진행하고 참석 농민들은 부당수세를 거부하기로 결의하였다 . 9 월 6 일에는 장성제일 교회 앞 노상에서 ‘ 제 1 회 장성군농민대회 ’ 를 개최하였다 . 미리 준비하여 교회 안에서 집회를 하려고 하였으나 교회의 반대로 옥외집회를 하였다 . 전경과의 실랑이 속에서 회장 , 총무 등이 연행되고 목회자 등이 경찰에 의해 부상당하였다 . 농민대회에서 농민들은 농민의 권익을 지켜나갈 것을 천명하며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농민조직 을 더욱 활성화할 것을 다짐하였다 .
장성기농은 1988 년 여름에 「 장성농민신문 」 을 발행하기 시작하여 , 95) 현장의 문제들을 알려나갔다 . 그 연장선상에서 고려시멘트 공해피해에 대한 주민들의 투쟁을 소개하고 농협민주화투쟁을 촉구하였다 . 그리고 11 월에는 700 여명의 농민이 교회에 모여서 추수감사제를 지냈다 . 1989 년 1 월 9 일 장성기농은 3 차 정기총회를 열었고 총회의결로 명칭 (‘ 장성기독교농민회 ’) 을 ‘ 장성군농민회 ’ 로 바꾸었다 .
(6) 담양군농민회
1986 년 들어 활동을 시작한 담양군농민회 96) 는 연말에 소식지 「 대나무골 함성 」 을 창간하였고 (12 월 22 일 ), 농협 이용고배당금 시정 활동을 벌였다 .
1987 년 5 월 이후 담양농민회는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담양농민토론회를 개최하였다 . 97) 그리고 기관지 「 대나무골 함성 」 을 매월 발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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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11 월 5 일 장성기농은 남면 백운교회에서 농민 700 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회를 개최하였다 .
94) 18 일 장성공용정류장에서 열린 1 차 대회에는 2 천 5 백여 명 , 24 일 황룡장터에서 열린 2 차 대회에는 1 천여 명의 농민이 참석하였다 .
95) 8 월 5 일에 「 장성농민신문 」 창간호를 , 이어 2, 3 호를 발행하였다 . 이 신문은 ‘ 관제언론을 배격하고 장성지역의 농민들의 눈과 귀가 되어 알려드리고 항상 현장에서 살 아 숨쉬는 신문이 되겠다 ’ 고 포부를 밝혔다 .
96) 기농활동가들이 조직하였고 전국기농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 이름은 담양농민회로 하였다 . 그 때부터 일반농민들이 종교적 색채를 띤 농민회를 들어오기를 꺼린다고 하여 이렇게 이름 붙였다고 한다 ( 최병상 증언 , 5 ・ 18 기념재단 , 2009: 330).
그리고 6 월항쟁의 흐름 위에서 국민운동본부 담양군지부가 결성되었는데 , 98) 담양군농민회가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 이어서 무정 면협의회가 결성되었다 . 담양농민회는 농지세 교육을 계기로 농지세 문제를 제기하였고 , 이후 11 월 들어 수세교육을 하면서 99) 수세거부운 동으로 나아갔다 . 12 월 들어서는 선거유세기간 동안 수세거부운동을 하며 면별 ( 용면 , 무정면 , 담양읍 , 대전면 ) 수세대책위원 모임을 개최하여 농조의 대응에 대처방안을 탐색하였다 .
1988 년 들어서도 담양군농민회는 농촌의료보험납부거부 , 농지세시정투쟁 , 수세폐지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 100)
(7) 나주기농
농민운동이 확산되어 가면서 전남기농 활동가들은 여러 지역에 농민교육을 실시하였다 . 농민교육은 농민회조직을 촉구하는 조직화의 출발이었다 . 나주에서도 농민교육에 이어 , 나주시 중앙성결교회에서 나주시 ・ 군 기독교농민회 ( 이하 나주기농 ) 창립대회가 1987 년 8 월 27 일 열렸다 . 나주기농은 창립선언문에서 농민생존권 , 관제 협동조합 , 농지 문제 , 농축산물수입 및 가격문제 등을 제기하였다 . 나주지역은 11 월 들어 수세거부투쟁이 시작되었고 그와 함께 면농민회들이 창립되었다 .
그러나 나주기농은 수세투쟁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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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 농민과 농지세 ’(5 월 5 일 ), ‘ 농협은 농민을 위한 조합인가 ?’(5 월 13 일 ), ‘ 잘 산다는데 왜 ? 농가 빚은 늘어만 가나 ’(5 월 19 일 ), ‘320 가지 이상의 외국농산물이 농가에 미치 는 영향 ’(5 월 26 일 ), ‘ 농촌공해의 심각성 ’(6 월 2 일 ), ‘ 농민의 토지와 민정당의 임대차 관리법안 ’(6 월 9 일 ).
98) 8 월 12 일에 민주쟁취 국민운동 담양군지부가 결성되었다 . 담양읍 중앙교회에서 100 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결성선언문에서 농민의 생존권 보장을 주장하고 농축수 산물수입 , 농가부채 등의 문제를 지목하였다 .
99) 9 월 20 일에는 무정면협의회가 농민 70 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결성되었고 담양군농민회장의 농지세교육을 들었다 . 「 대나무골 함성 」 4 호 (10 월 20 일 발행 ) 에서 농지세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면서 11 월 이후 수세교육을 해 나갔다 . 11 월 18 일 용면 신광교회에서 80 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수세교육을 하였고 , 25 일에는 담양읍 남문 교회에서 50 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담양읍 수세교육 및 간담회를 개최하였다 .
100) 8 월에는 농지세시정투쟁을 전개하였고 , 11 월 22 일에는 담양예수교농민회와 함께 주최하여 담양읍 양각리 농민 100 여명이 ‘ 수세폐지농민대회 ’ 를 개최하였다 .
나주기농과는 다른 흐름으로 YMCA 농민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중심이 된 나주농민회가 12 월 4 일 창립되지만 , 이 농민회는 수세투쟁을 주도했던 자주적 농민회 흐름이 1988 년 3 월 8 일 결성한 나주농민회 ( 이름이 같음 ) 에 흡수되었다 . 나주기농 회원들도 이 나주농민회에 통합되어 갔다 .
(8) 곡성과 기타 지역에서 기농활동
곡성지역에는 가농의 활동이 이어져 왔으며 , 1988 년 8 월에 가농 곡 성군농민회가 고달면 , 곡성읍 , 석곡면 중심으로 성당이나 공소가 있는 곳의 농민들에 의해 결성되었다 .
전남기농 ( 그리고 전국기농 ) 활동가들 ( 배종렬 , 최병상 등 ) 이 곡성 , 신안 , 보성 , 승주 등에서 농민교육을 실시하고 농민회 조직을 독려하 였다 . 이러한 흐름 위에서 담양에서처럼 곡성과 신안 지역에서는 기농활동가들이 조직하여 농민회를 결성해 나갔다 . 그러나 이름은 기독교농민회라고 하지 않고 곡성군농민회 , 신안군농민회라고 하였다 . 101) 곡성 지역의 경우 옥과면에서 경지정리 싸움을 하면서 1989 년에 기농 흐름 위에서 농민회가 조직되었으며 , 나중에 가농 곡성농민회와 통합되어 곡성군농민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 보성과 승주에서도 농민 교육 활동을 하면서 조직화가 시도되었지만 농민회조직으로까지 이어 지지는 않았다 .
4. 소결
전남기농이 중간조직으로서 역할하면서 각 군기독교농민회는 다양 한 투쟁을 전개해 왔다 . 그 중에서도 특히 무안 , 강진 , 해남 , 함평 , 장성 기농이 활발히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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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기농은 이미 농민운동조직통일의 방향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하고 이렇게 조직화해 나갔다 .
가장 활발하게 투쟁하였던 1987-1988 년은 투쟁 조직의 확장뿐만 아니라 자발적 농민 조직화와 다양한 의제가 제기되는 운동 활성화 시기였다 . 대표적으로 1987 년 수세거부투쟁은 자발적인 농민조직화를 통해 전개되었는데 , 기농은 YMCA 농민회 등과 함께 수세투쟁을 촉진시키는 활동을 하였고 일부 투쟁조직에 개입하여 활동하였다 . 그리고 강진 , 해남에서는 대학생농 촌활동에 맞추어 ‘ 농활공동추진위원회 ’ 를 구성하고 보고대회 , 시위 등 으로 현장문제를 고발하는 공동투쟁을 벌였다 .
이와 더불어 농민 의식 고양과 농민의 의견과 생각을 대외적으로 알리는 홍보활동이 활발하게 나타났다 . 전국기농은 「 농민신문 」 (10 회 ), 「 세상이야기 」 (11 회 ), 그리고 농민운동의 평가와 방향을 밝힌 「 농민세 상 」 을 지역에 배포하였다 . 전남기농에서는 「 전남농민신문 」 을 발행하였고 , 전단과 성명서를 만들어 배포하였다 . 102) 군 단위에서는 대부분 군단위농민신문을 발간하거나 창간하였고 , 면단위 신문이나 특정단체 신문 ( 「 영산호의 함성 」 ( 영농개척단 발행 )) 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 그리 고 전남기농은 해남 , 강진 , 장성 등에서의 지역투쟁과 관련된 전단을 만들어 배포하였다 . 103) 1987 년에는 전남지역 기농 군단위에서 많은 홍보활동이 이루어졌다 . 104) 이처럼 1987 년 들어 농민들의 자주의식은 날로 고양되고 현장에서는 농민들의 자주적이고 자발적인 투쟁이 급속 하게 확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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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상반기에 제작하여 배포한 전단으로는 , ‘ 전남농민이 광주애국시민에게 드리는 글 ’(6 월 19 일 ), ‘ 전남농민이 목포애국시민에게 드리는 글 ’(6 월 23 일 ), ‘ 전남농민격문 ’(6 월 26 일 ), ‘ 하계전남지역 농촌봉사활동을 시작하면서 ’( 농촌활동 공동성명서 )(6 월 30 일 ) 가 있다 .
103) 해남 , 수협전단 2 회 발행 배포 ; 강진 , 농가부채공청회에서 ‘10 만 강진군민에게 드 리는 글 ’(4 월 ) 작성 배포 ; 장성에서는 ‘ 고질적인 자갈대 징수 폐지하라 !’ 는 전단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
104) 신문 28 회 , 전단 23 회 , 성명서 26 회 , 자료집 2 회 등의 발간 .
1988 년은 농민들의 자발적 조직화가 더 진전되었으며 농민대중의 참여 속에 수세거부투쟁은 수세폐지투쟁으로 전환되었다 . 수세투쟁이 각군에서 대중적으로 확산되면서 , 면단위 , 군 단위 수세대책위들이 결성되었다 . 기농은 이러한 조직화에 실무자로서 기여하거나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 기농은 또한 토지무상양도투쟁을 적극 지원 독려 하고 의료보험제도개선투쟁을 전개하였으며 , 농축산물수입저지 및 제값받기투쟁 , 농수축협법개정운동 , 쌀값보장운동 , 농약피해보상운동 , 강제부역거부투쟁 등을 함께 벌여갔다 .
그 밖에 주요한 투쟁으로 토지투쟁을 들 수 있다 . 전남에서 기농은 9 윌 14 일 신안 , 영암 , 해남의 토지투쟁농민들과 결합하였으며 , 토지투 쟁을 전국적으로 확대해 나갔다 . 105) 그리고 양담배 수입개방으로 담배 경작 농가들이 고추농사로 몰리자 과잉생산으로 고추값이 폭락하여 충북과 경북을 중심으로 고추제값받기투쟁이 벌어졌는데 , 전남 , 전북 , 충남에까지 확대되어 가을부터 전농민적인 투쟁으로 폭발되었다 . 이에 전남기농은 군기농들과 함께 고추투쟁을 전개하였다 .
그리고 각 군기농의 활동을 보면 기농을 비롯하여 농민조직들이 연대하여 활동하거나 별도의 조직을 구성하여 활동하기도 하는 등 현장에서는 농민운동의 통일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1989 년 들어서면 전남기농이나 각 군기농은 이름이 거의 사라지고 군 단위 농민회로 통합되어 갔다 . 그런 와중에도 전남기농 활동가들은 각 지역에서 농민교육을 하면서 통일된 농민회조직을 결성하도록 촉진해 나갔다 . 물론 각 군기농 조직이 통합되어 가는 모습은 각 군의 운동조직들의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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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전남지역의 토지투쟁농민들과 평택 , 완주 , 서산 , 홍성 , 아산의 토지투쟁 농민들 , 그 리고 기독교농민회 , 가톨릭농민회 , 전국농민협회가 모여 ‘ 토지무상양도 전국대책위 원회 ’ 를 결성하여 전국적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
Ⅴ . 농민운동조직 통일과 전남지역 기독교농민회의 해체
1. 농민운동조직의 상황
농민운동 통일이 이루어지던 시기의 전남지역 농민운동조직의 현황을 보면 < 표 1> 과 같다 .
가농 : 한국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 기농 :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 ( 전남기독교농민회 ), Y 농 : YMCA 농 ( 어 ) 민회 , 전농협 : 전국농민협회 , 전농연 : 전국농민운동연합 전남준비위 , 독자농 : 자주적 농민회 , 전농 : 전국농민회총연맹 , 0 은 조직존립을 표시 .
전남지역의 활동을 놓고 보면 , 가농은 1974 년부터 분회들을 건설하면서 여러 지역 (14 개 지역 ) 에 조직을 만들어 왔다 . 광양 , 여천과 같은 도시나 광주에 가까운 화순 , 그리고 외따로 떨어진 섬인 완도 , 다른 조직들이 활발하게 활동한 담양 , 승주 , 해남을 제외하고 모든 군에 농민회 조직을 만들었다 . 각 지역의 지역협의회와 가농 전남연합회가 조직되어 활동해 왔다 . 기농은 무안 , 해남 , 강진 , 함평 , 장성 등에서 활발히 활동해왔고 1980 년대 후반 들어 담양과 나주에서도 활동해 왔다 . 그리고 농민운동조직 통일과정에서도 기농활동가들은 농민교육 과 농민회조직을 여러 지역에서 촉진해 나갔다 . 106) Y 농은 1970 년대부터 해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1985 년부터는 승주 ( 순천 ) 에서도 활동해 왔다 . 가농과 기농에 비해 상대적으로 교육을 강조하고 일찍부 터 신협활동과 양곡조합활동을 벌여 왔으며 해남에서는 수세투쟁을 촉발하고 적극 활성화해 나갔다 ( 윤수종 , 2015)
그 외 조직으로 전국농민협회 ( 이하 전농협 ) 에 속한 군단위 조직이 있었다 . 전농협은 기존의 가농과 기농이라는 종교적 조직틀로는 농민 운동을 전개해 나가기 힘들다는 판단에서 ‘ 자주적 ’ 농민운동조직을 표방하면서 결성되었고 (1987 년 2 월 26 일 ), 전국적으로 30 여개 군단위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전남지역에서는 전농협 소속 지역조직은 함평 , 강진 , 담양에 있었다 . 107)
그리고 < 표 1> 에서 잘 반영되지 않은 조직적 흐름이 자주적 농민 조직 ( 대중조직 ) 들이다 . 1986 년부터 제기되기 시작한 ‘ 대중노선에 입각 한 농민운동 조직건설 ’( 허헌중 , 1987: 209-260) 108 움직임은 1987 년 초 부터 실천적으로 모색되기 시작했다 . 여러 가지 농민운동 전국조직이 존재하는 속에서 전국조직에 속하지 않은 군 단위 독자적 ( 자주적 ) 농민조직이 속속 생겨나게 되었다 . 이들 조직은 1987 년에 곳곳에서 결성되었으며 , 전국조직의 지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군단위에서 자주적이고 독자적으로 결성된 것으로 , 전국조직의 분파주의를 비판하고 지 역에 기초한 농민운동의 연대와 통일을 강조하였다 .
------------------------------각 주-----------------------
106) 농민운동 통일이 논의되어가던 와중에 담양 , 곡성 , 신안 지역에서 기농이 농민회를 조직했지만 기독교농민회라는 이름을 안 붙이고 농민회라는 이름으로 조직하였다 . 보성과 승주에서도 기농활동이 있었고 군단위농민회로 조직되어 갔다 .( 최병상 증언 , 5 ・ 18 기념재단 , 2009: 330).
107) 1985 년 함평지역에서 ‘ 함평농우회 ’ 가 결성된 것을 시작으로 1986-7 년 사이에 담양 ・강진 ( 탐진농우회 ) 에 결성되었다 .
108) 허헌중은 이 글에서 종교에 의지한 농민조직에서 벗어나 농민대중에 의거한 농민 투쟁 및 농민조직화를 주장하였다 .
그리고 자주 ・ 자립적인 군 단위 대중조직들은 면단위 조직체계를 구성하고 조직관리 , 운영을 면단위 중심으로 진행하기 시작했으며 , 군 단위 조직이 없는 지역에서는 독자적인 면단위 농민조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 또한 현장단위에서부터 조직적인 연대와 통일성의 확보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 예를 들어 무안가농과 무안기농이 공동신문 제작 , 공동투쟁 등의 연대활동을 해 나가면서 ‘ 무안군농민운동협의회 ’ 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
자주적 농민조직이라 할 수 있는 대책위원회나 운동협의회 , 농민위원회 등의 명칭의 조직들과 면 농민회들이 광범하게 결성되면서 그 위에서 군 농민회가 만들어져 왔다 . 이들 조직들과 면 농민회들은 가 농의 지역협의회나 분회 , 기농의 지역조직과 독립적으로 결성되었으 며 군단위 조직으로 결합되어 갔다 . 이러한 자주적 농민조직들이 활발히 결성되면서 가농 , 기농 , Y 농 , 전농협 등에 속한 군단위농민회나 지역협의회 , 지회 , 분회 조직들도 투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군단위조직 ( 군농민회 ) 을 만들게 되었다 .
이러한 전남지역 대중조직 결성은 면단위 농민조직의 확대와 생산자 대중조직 ( 투위 ) 의 결성으로 나아갔다 . 특히 수세폐지투쟁의 성과로서 면수대위가 급속도로 면 농민회로 발전하였고 , 그러한 기반 위에서 군단위농민회 조직이 결성되어 갔다 .
이처럼 자주적 농민조직들은 1987-1988 년 시기에 기존의 다른 조직이 있던 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농민조직이 없던 지역에서도 결성되어 왔다 . 그리고 1989 년 들어서는 거의 모든 군에서 군농민회 결성을 향해 나가거나 군농민회를 결성하였다 .
그리고 대중투쟁이 활발해 지면서 농민조직들 간에 연대투쟁이 생겨났고 , 1980 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농민투쟁은 조직별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전개되었다 . 1989 년 여의도농민시위 이후 전남지역 기독교농민회는 독자적인 활동을 접고 군농민회 결성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
2. 농민운동조직 통일과 기독교농민회
1988 년의 전국적인 농민투쟁의 확산으로 농민운동의 대중적 기반이 확대되면서 현장에서부터 농민운동 조직들 간의 연대투쟁이 활성화되었다 . 그 결과 농민운동 조직들 간의 연대와 신뢰의 폭이 쌓이고 농민운동 조직을 통일하기 위한 노력이 구체화되면서 자주적이고 대 중적인 군 농민회가 속속 생겨나기 시작했다 . 이와 같은 성과에 기반 하여 1988 년 말부터 농민운동 조직을 통일하기 위한 협의가 전국단위에서 더욱더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
1989 년 들어 기독교농민회는 총연합회 ( 전국기농 ) 와 도 , 군 단위에 서 ‘ 전국농민운동연합 ’ 에 조직적으로 결합하여 조직통일사업을 전개하였다 . 기농 , 가농 등 기존 농민운동조직이 ‘ 전국농민운동연합 ’ 을 통해 산하 군조직을 해산하고 그간의 조직역량을 자주적인 군농민회 건설에 수렴키로 하였다 . 기독교농민회는 공식적으로 조직개편을 해나가게 되었다 .
전국기농은 1989 년 2 월 27 일 한국농업기술자회관에서 임시총회를 개최하였다 . 22 개 군 대표가 참여한 가운데 열린 임시총회는 ‘ 모든 산하 군 조직이 총연합회로부터 탈퇴를 전제로 하여 농민운동의 자주적 통일을 위한 기농의 입장을 공식 선언하고 , 2 개월 안에 도농민회를 제 외한 모든 군조직이 총연합회에서 탈퇴하여 농민운동의 자주적 대중 조직화와 군단위 농민운동 통일사업에 기여 ’ 하며 , 향후 기농은 ‘ 농촌내 교회와 신자의 개발 , 의식화를 통해 농민운동을 확대 , 강화한다 ’ 는 내 용의 조직개편을 위한 제안을 임시총회에서 의결했다 ( 한국기독교농민회 , 1992: 133).
이제 기농은 평신도 농민이 개별 가입하는 농민선교단체로 되었고 , 그간의 투쟁적인 군기독교농민회들은 통일된 조직 (1 군 1 농민회 ) 으로 흡수되었다 . 실제로 전남지역 군기독교농민회 조직이 통일과정에서 활동하며 결합해 나간 곳은 강진 , 나주 , 담양 , 무안 , 장성 , 함평 , 해남 , 곡성 등 이었다 . 기농회원들은 다른 농민조직 구성원들과 함께 혹은 경쟁하면서 군농민회를 만들어 갔다 ( 김준 , 1995: 229).
전남기농이나 각 군기독교농민회는 통일된 도 , 군 조직화에 적극적으로 결합하여 전국농민회총연맹 ( 전농 ) 의 결성으로 나아갔다 . 그리하여 마침내 1990 년 4 월 23 일 전농이 결성되었다 .
3. 전국회원조직으로서 기독교농민회의 존속과 해산
1990 년 들어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 전국기농 ) 는 2 월 15-16 일 백주년기념관에서 제 5 차 정기총회를 개최하였고 , 조직의 명칭을 ‘ 한국 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 에서 ‘ 한국기독교농민회 ( 이하 한국기농 )’ 로 바꾸 었다 . 개편된 기독교농민회는 군농민회를 회원단체로 하는 연합체가 아니라 평신도 농민이 개별 가입하는 단일조직 구조였다 . 실은 마을 , 면 단위가 아닌 교회 단위로 재출발하였다 . 한국기농은 평신도농민이 개별 가입하는 선교단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109) 10 년 동안 해왔던 농민권익운동에서 퇴장하게 되었다 .
------------------------------각 주-----------------------
109) 이미 1989 년 5 월 11 일 제 1 차 중앙상임위원회를 개최하고 사업재정계획을 확정하고 사무국장을 선출하였다 . 실무자들이 전남지역 활동가로 채워졌다 . 최병상 ( 전남 무안 ) 이 신임 사무국장으로 , 김병길 ( 전남 함평 ) 이 서기로 선출되었다 . 6 월 26-27 일 기농 간부와 농촌목회자 , 기독교 사회운동 단체의 간부들이 참여한 가운데 정책협 의회를 열어 평신도 농민이 개별 가입하는 선교단체로서의 기독교농민회의 이념 , 위상 , 역할과 조직구조를 구체화하였다 . 정의 , 생명 , 공동체를 이념으로 내세우고 농촌교회와 신자를 주체로 농민선교활동에 임하는 임무를 설정하였다 .
1990 년 들어 한국기농은 농촌교회와 평신도 농민의 교육 , 조직에 주력하였다 . 지속적인 교육을 통하여 110) 조직기반을 확보하였으며 , 나중에 교회지회가 4 개 생겨나고 군위원회가 l 개 결성되었다 . ‘ 우리농축 산물먹기국민운동본부 ’ 결성에 참여하면서 연대하여 농축산물 수입반 대운동과 도 ・ 농간 직거래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 전남지역에서는 전남평신도농민교육을 하였다 .
1991 년 들어 한국기농은 유기농법과 도 ・ 농직거래 등 경제협동사업을 활성화시키기로 하고 협동사업위원회 구조를 강화했으며 협동사업부를 두었다 . 111) 한국기농은 1991 년부터 정의 ・ 생명 ・ 공동체운동의 이념을 중심으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
교육홍보활동을 통해 농촌현장 깊숙이 회원 , 조직을 확대해가는 한편 , 협동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여 사업기반을 확충하고자 했으며 , 우리 농축산물먹기 국민운동본부 , 전국농민단체협의회와의 연대를 통해 농민운동의 지평을 넓히고 교회 안에서 농민선교단체로서의 위상을 확립하고자 했다 . 이러한 노력 위에서 1992 년에 고흥군위원회가 7 개 교회의 농민들을 중심으로 조직되기도 하였다 .
그러나 지역단위의 조직화는 진전되지 못하였고 개별 교회 중심으로 공동체를 결성하여 농산물을 생산하고 공급하며 소비자들과 연계 하는 활동 ( 생협 ) 을 벌여 나갔다 . 112) 조직화를 시도하고 한국기독교농민회 전남지부라고 칭하고 전남총무를 두었지만 결국 교회별 활동으로 나아갔다 . 113) 한국기농은 조직적인 활동이 미진한 채 전국단위 조직으로 느슨하게 존속하다가 해산되었다 . 114)
------------------------------각 주-----------------------
110) 개교회 교육 58 회 , 회원교육 6 회 , 도 단위교육 3 회 , 전간부수련회 1 회 , 활동가교육 1 회 , 실무자교육 1 회 , 농촌목회자 사모교육 4 회 , 농촌목회자 세미나 3 회 , 농촌목회 자와의 교육정책협의회 5 회 .
111) 협동사업위원장 김영원 전회장 , 협동사업부장 이재욱 선출 .
112) 한마음 여전도회공동체 ( 고흥군 동강면 매곡리 매곡교회 ), 한마음공동체 ( 장성군 남 면 마령리 백운교회 ), 그루터기공동체 ( 무안군 해제면 산길리 강제석 집사 ), 한생 명공동체 ( 승주군 외서면 월암리 외서교회 손형옥 집사 ) 등이 있었다 .
Ⅵ . 맺음말
이상으로 1970 년 -80 년대의 농민운동의 중요한 흐름 가운데 전남지역 기독교농민회의 조직과 활동을 살펴보았다 .
1970 년대 후반 농민교육을 받은 농촌청년들이 해남과 무안 , 강진 등에서 활동하면서 1978 년도 단위 조직으로서 ‘ 전남기농 ’ 을 결성하였 다 . 선진적인 농민활동가들이 전남기농을 기반으로 전국적으로 교육과 조직활동에 나서면서 , 1980 년에 전북기농이 , 1982 년에 충북 , 경북 기농이 만들어졌고 , 그 기반 위에서 1982 년에 ‘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 합 ’( 전국기농 ) 이 탄생하게 되었다 . 분회활동을 기반으로 농민운동을 확산해 갔던 가톨릭농민회의 조직활동에 비해서 , 기독교농민회의 활동은 좀 더 정치적이고 보다 활동가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 기농은 1980 년대 내내 ‘ 투위 ( 투쟁위원회 )’ 등을 만들어 나가면서 가농과 함께 농민 운동을 주도하였다 ( 정명채 ・ 민상기 ・ 최경환 , 1995: 59-84).
먼저 전남기농은 점차 지회활동 등을 확산시키면서 각군 기독교농 민회를 결성해 나갔고 , 그 과정에서 자주적인 농민운동이 확산되는데 촉매역할을 하였다 . 그리고 투쟁내용이나 방식으로 볼 때 , 전국기농은 전국단위에서 선도적인 투쟁을 하고 , 전남기농이 촉진 및 매개 활동 을 하며 , 각 군기농이 현장에서 투쟁을 벌여 나갔다 .
투쟁 내용에서는 가농과 함께 하는 것이 많았지만 가농에 비해 좀 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투쟁들을 해 나갔다 . 농축산물수입반대투쟁을 미대사관 앞에서 벌인다든지 , 부채투쟁 등을 제시하고 부채공청회 형식을 만들어 낸다든지 , 군단위 정치투위를 조직해 내는 등의 활동을 주도하였다 . 농민들의 일상적인 경제투쟁에만 기울지 않고 정치사회적인 문제제기를 적극적으로 해 나갔다 . 그리고 여성농민들의 활동을 촉진하였다 .
------------------------------각 주-----------------------
113) 나주 고막원교회 , 장성 백운교회 , 고흥 과역중앙교회 , 승주 외서교회 등을 들 수 있으며 , 이 교회들은 1980 년대 후반에 농민운동의 집결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
114) 한국기독교농민회는 2004 년 11 월 10 일 총회를 열어 해산을 결의하였다 .
조직적으로는 전남기농이라는 중간조직 결성을 통해 전국조직의 결성을 도모하고 다시 각군 농민회의 활성화를 통해 농민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 이러한 기독교농민회의 활동은 ‘ 전농 ’( 전국농민회총연맹 ) 의 군농민회 단위 조직화에 쉽게 통합되었다 . 가톨릭농민회 활동농민들 은 전농으로의 조직통일 과정에서 일부 주춤하거나 운동에서 벗어나기도 하였다 . 그에 비해 기농활동가들은 전농 결성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 전농 초기의 조직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 나갔다 . 그 이후 가농운동이 생명운동 등으로 확산되어 가며 대중적 기반을 마련 해 간 반면 , 기농운동은 전농 속에 편입되면서 해소되었다 .
이 논문은 전남지역 기독교농민회의 조직과 활동을 살펴보았지만 , 현장의 투쟁사례를 나열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 기독교농민회 운동의 기초자료를 제공하는 수준에 머물고 말았다 . 더욱이 각 군기농의 활동도 주요한 투쟁을 소개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 각 군농민회의 활동 을 좀더 구체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겠다 . 그리고 기농 운동이 지니는 의의와 한계에 대해서는 1980 년대 사회운동과 농민운동 전체의 지형 위에서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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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Organization and Practice of
Christian Peasants' Associations in Jeonman Region
Yoon, Soo Jong
(Department of Sociology, College of Social Sciences , Chonnam National University)
This article focuses on the organization and activities of the Christian Peasants' Association(CPA) at Jeonnam region, which has been leading struggle for the creation of the peasant movement. The peasant movement began with the Catholic Peasants' Association when it was possible to exercise only by religion. But in rural areas, churches were much more than cathedrals, and rural churches became a place where young people could gather. In the meantime, there has been a movement to revitalize the movement of Christian farmers in the intention to spread the peasant movement at the 1970’s.
In the late 1970s, rural youths who were trained as leading farmers gathered and discussed about rural issues in Haenam, Muan, and Gangjin. In 1978, they formed 'Jeonnam Christian Peasants' Association(JCPA)' as a regional unit. In 1982, the "Federation of Christian Peasants' Associations"(FCPA) was born, as advanced farmers of JCPA engaged in education and organization activities nationwide.
JCPA was first formed to promote peasant movement and oganizations, and FCPA played a leading struggle at the national level, and CPA of each county raised various problems in the field and struggled to solve those. FCPA led the struggle against the importation of agricultural products in front of the US Embassy, the debt struggle that created the form of public hearing about debt, and organised struggle committees according to counties and issues. It did not only engage in everyday economic struggles of the peasants but also positively raised political and social issues and promoted the activities of women farmers. And it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unification of peasant movement by boldly abandoning its existing organization and activities.
Key Words : Federation of Christian Peasants’ Associations, Jeonnam Christian
Peasants’ Association, Debt Struggle, Water-Tax Struggle, Peasant Movement Unific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