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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통치 전기
BC29년 ~ BC19년 (아우구스투스 34세 ~44세)
<젊은 최고 실력자>
- BC31년 9월 "악티움 해전"
- BC30년 8월 안토니우스 자결, 클레오파트라 자살.
- BC29년 8월 옥타비아누스 로마에서 개선식 거행.
- BC29년9월
카이사르에게 바치는 신전 건립 공표(포로 로마노 중심부)
원로원 의사당(쿠리아) 건립 공표(카이사르의 포룸에 잇대어 건립)
아폴로 신에게 바치는 신전 건립 공표 (팔라티노 언덕)
- 사회간접자본 정비
플라미니아 가도의 전면적인 보수 공사.
<군비 삭감>
- BC29년 안토니우스의 병사들까지 합세 50만으로 늘어난 군사력의 대폭 삭감.
28개 군단 16만 8천명으로 줄임.
막대한 퇴직금과 정착 비용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보물과 개인 재사능로 해결.
- 군제 개혁도 동시에 실행.
<국세 조사>
- 17세 이상의 성년 남자로서 로마 시민권 소유자
BC28년 406만 3천명
BC8년 432만 3천명
AD14년 493만 7천명
<영묘 건설>
- 마르스 광장 북쪽 끝 부근에 웅장하고 화려한 영묘 건설.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정보 공개>
- BC59년 카이사르가 만든 일보(악타 다우르나), 원로원 의사록(악타 세나투스) 법률 개정.
악타 세나투스는 전과 마찬가지로 속기로 기록되어 모두 공문서 보관소(타불라리움)에 보관.
악타 디우르나는 관보가 됨.
- 아날레스 막시마(최고 제사장 연대기)
<원로원 "재편성">
-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안토니우스는 원로원 의원수를 늘려 1천명이 넘었슴.
- BC28년 옥타비아누스는 그것을 500명으로 줄임
카이사르가 등용한 갈리아 인들을 상대로 의원직을 사퇴하도록 설득. 70명 축소.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까지 속주민의 원로원 의원 등용 중단됨.
의원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 140명을 강제로 의원직 박탈.
자신과 아그리파가 30명을 고르고 이들이 또 다른 30명을 고르는 방법으로 600명 선출.
<공화정 복귀 선언>
- BC27년 1월 13일 원로원에서 옥타비아누스는 공화정 체제로의 복귀를 선언
"그동안 행사했던 권력들을 포기하고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의 손에 되돌려 주겠다."
군사와 내정과 외치를 모두 돌려주겠다고 선언.
원로원이 정책을 세우고 민회가 승인하는 것으로 성립되는 과두정(올리가르키아)의 부활.
※ 옥타비아누스가 누린 특권
1. 삼두 정치권 ... BC43년말 제2차 삼두 정치에서 얻은 권리
안토니우스는 죽고 레피두스는 은퇴한 상태로 삼두 정치가 유명무실해져 있었슴.
2. 이탈리아 서약 ... BC32년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를 상대로 결전을 벌이기 전
이탈리아 반도에 사는 모든 시민에게 요구한 서약.
3. 세계적 합의(콘센수스 우니베르소룸) ... 이탈리아 서약을 속주까지 확대한 것.
※ 옥타비아누스가 내놓지 않은 것.
- 집정관 직을 사임하지 않았다.
BC43년 19세로 집정관에 선출된 뒤 BC31년부터는 연속하여 집정관 취임. BC27년엔 7번째 집정관을 하고 있었고 그 후 BC23년까지 해마다 집정관으로 선출됨.
-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
양아버지인 카이사르한테 물려 받은 세습 권리로 "임페라토르"를 항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유지하기로 함.
- "프린켑스"(제일인자)라는 칭호.
<아우구스투스>
- BC27년 1월 16일 공화정 복귀가 선언된 날로부터 3일만에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부여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
- 제안자 폴리오
BC49년 1월 루비콘을 건넌 카이사르를 따랐다.
BC49년 4월 시칠리아에 파견되는 쿠리오를 따라 참전.
BC49년 8월 참패 후 패잔병을 모아 시칠리아까지 데리고 옴. 군단장으로 승진.
디라키움 공방전, 파르살루스 회전에 참가. 탑수스 전투와 에스파냐의 문다 회전에도 참전.
BC44년 서부 에스파냐 속주 총독으로 임명됨.
카이사르의 유언이 공개된 후 폴리오는 안토니우스 파에 가담.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연합하자 폴리오는 안토니우스를 버림.
옥타비아누스가 공직 복귀를 인정해 줌.
원로원 의석은 버리지 않았지만 다른 공직은 사퇴하고 교양인의 우아한 인생을 선택.
- "아우구스투스" ... 신성하고 경배를 받아 마땅한 인물이나 장소를 의미.
<이미지 작전>
- 일부러 자신의 공적인 이미지를 청년기로 여기는 30대로 한정, 조각상도 30대의 것만 남음.
<작가가 본 아우구스투스>
- 아우구스투스의 "심모원려"는 중요한 특징이다.
- BC27년에 이미 데생 정도는 그려져 있었을 것.
① 중앙정부에 관한 행정 개혁
② 속주 통치의 기본 방침 확립.
③ 군제 개혁.
<"내각" 창설>
콘실리움 프린케피움(제 일인자 보좌 위원회) 창설.
구성: 프린켑스인 아우구스투스를 중심으로
집정관 두 명
법무관(프라이토르)
회계 감사관(콰이스토르)
재무관(켄소르)
안찰관(아이딜리스)
원로원 의원들 중 추첨으로 15명 선발.
콘실리움에서 이루어진 결정은 "원로원 권고"와 똑같은 가치를 가짐.
집정관이기도 한 아우구스투스에게는 거부권(Veto)이 인정되어 있음.
원로원 회의를 월 2회로 줄이고 2개월간 휴가도 둠.
반면 "내각"은 연중무휴임.
<속주 통치의 기본 방침>
-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평화가 확립될 때까지 속주의 군사도 맡김.
- 로마 국가의 영토
알프스에서 메시나 해협에 이르는 본국 이탈리아.
"원로원 속주" ... 원로원이 임명한 총독이 통치하는 속주(프로빈키아)
"황제 속주" ...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통치하는 속주
이집트 ... 특수한 정세 때문에 정복지 아우구스투스 개인 영지로 삼음.
동맹국
- 원로원 속주 총독은 명예로운 경력을 위해 무보수로 문관들이 통치
- 황제 속주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임명하는 장군들이 통치한다.
이들은 급여가 보장되는 공직의 무관들이다.
이 무관들을 지휘하기 위하여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이ㅁ페리움 프로콘술라레 마이우스(전군 총 사령관)이라는 공식 칭호가 주어짐.
<"안전보장">
국가의 목표가 침공에서 방위로 바뀌어 안전보장의 필요성이 생겼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역사상 최초의 상비군을 창설하게 된다.
<서방 재편성>
- BC27년 가을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 마르켈루스와 티베리우스를 데리고 남프랑스로 들어감.
-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의 수도인 나르본에서 겨울을 보냄.
갈리아는 우력 부족 하이두이 족, 오베르뉴 족, 세콰니 족 및 링고네스 족에게 산하의 중소 부족을 통합하는 역할을 맡겨두고 있음.
속주세는 갈리아 전체가 1년에 4천만 세스테르티우스로 결정되어 있었슴.
- BC30년부터는 아우구스투스가 보낸 해방 노예가 갈리아에도 10분의 1 세를 부과하려고 하자 갈리아에 불온한 기분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속주세를 10분의 1로 하면서 관세를 2.5%에서 1.5%로 인하하기로 함.
- 에스파냐 북부 산악 민족 제압
타라고나에 머물동안 아그리파를 보내 두 차례의 전투로 제압.
- 갈리아 지역 재 편성. 크게 다섯 지방으로 나눔.
1.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라고 불리는 남프랑스 속주.
이미 200년이나 로마 속주가 되어 로마롸가 많이 진행된 원로원 속주.
2. 아퀴타니아 속주
가론 강 북쪽의 강력한 부족인 오베르뉴 족이나 비투리지 족과 혼합하는 방책으로 범위를 북쪽으로 넓힘.
3.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
4. 벨기카 속주
벨가이 족이 사는 지방과 링고네스 족, 세콰니 족, 트레베리 족이 사는 지방을 합하여 "벨기카 속주"라는 이름으로 재 편성.
5. 게르마니아 속주.
<"국세청" 창설>
-"프로쿠라토르 임페리얼"(황제 재무관) 신설.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임명.
출신 계급은 원로원 계급 다음인 "기사 계급"(에퀴타스)
급료를 지불하는 국가 공무원.
- 목적
첫째, 속주에서징세의 공정성을 확보.
둘째, 제국 통치라는 웅대한 청사진에 따라 세금을 배분.
셋째, 통치의 연속성 확립, 10년 이상 근무도 가능.
- 에스파냐 속주 재 편성.
가까운 에스파냐, 먼 에스파냐로 양분된 것을 삼분함.
* 남부 "베티카" 속주
* 서부 "루시타니아" 속주.
* 동부와 제패를 끝낸 북서부를 포함한 "타라코넨시스" 속주.
갈리아 원주민들과는 달리 에스파냐 원주민에게는 지도자가 될만한 유력한 부족이 없어 제대 군인을 이주시켜 식민도시 (콜로니아)를 건설.
<"행운의 아라비아">
- "아라비아 펠릭스"(행운의 아라비아)
아라비아 반도 끝에 있는 예멘.
향료와 몰약, 진주, 보석 그리고 인도를 거쳐 오는 중국산 비단 같은 고급품을 거래하여 돈을 버는 행운을 타고난 아라비아.
- 아우구스투스는 BC26년부터 BC24년까지 이 지역 원정을 나섬.
국민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지 않고 재원을 확보하기 위함.
6개월이나 걸려 사막 300키로를 행군하여 사베이족의 수도인 마리바 성벽 앞에 이르긴 했으나 공격할 여력이 없어 회군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홍해의 북부 3분의 1을 장악하고 아라비아 쪽의 레우케코메, 이집트의 베레나스 그리고 나일강 연안의 콥트에 세관을 설치 하였다.
- 아우구스투스는 아버지 카이사르가 시작한 브리타니아 정복을 계승할 뜻은 밝히지 않음.
도버 해협과 가까운 켄트 지방에 사는 두 부족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사절을 보내 복종을 맹세.
아우구스투스는 브리타니아 정복은 절박한 과제가 아니라고 판단.
- 마우리타니아 왕국은 굳이 속주로 만들 필요가 없어 동맹 관계를 지속하는 쪽을 선택.
마우리타니아 왕국의 왕조가 단절되고 누미디아 왕의 아들을 유바2세로 왕위에 앉힘.
아우구스투스가 옥타비아누스였던 시절에 살던 집에서 거주하고 있을 때, 옥타비아의 집에 맡겨져 있던 이집트 왕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스와 결혼 마우리타니아 왕가의 부흥에 성공.
- BC24년말 아우구스투스는 서반부 재 편성을 끝내고 로마로 돌아옴.
원로원은 개선식을 거행할 권리를 인정하고 그 사실을 통고했으나 아우구스투스는 개선식을 거행하지 않고 호주 1인당 400세스테르티우스씩 선물만 나누어 줌.
<"호민관 특권">
- BC23년 40세의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 직을 사임한다고 선언.
단, 1년 기한으로 호민관 특권을 부여하는 조건을 제안.
※ 호민관 특권
1. 신변 불가침권.
2. 평민 대표로서 평민의 권리를 지키는 지위.
3. 평민 집회 소집권.
4. 정책 입안권.
5. 거부권(베토)
- 소수 지도 체제인 제정으로 서서히 바꾸어 가는 수법
"카이사르" ... 카이저(독일), 차르(러시아)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되어 얻은 성이 제정시대가 진행되면서 "황제"의 대명사가 됨.
"제일인자"(프린켑스)
사실상의 제정이 시작된 것을 숨기기에 좋은 명칭.
"아우구스투스"
체제(테제)와 반체제(안티테제)에서의 초월을 의미.
"임페라토르"
개선 장군에서 전군 총사령관으로 의미가 변함.
"호민관 특권"
거부권 때문에 이 권한을 원한 것.
- 아우구스투스에게 이런 대권을 넘겨주게 된 이유.
첫째, 집정관 연임 저지에 집착한 원로원.
둘째, 호민관 제도가 로마 시민들에게 매우 익숙한 제도였음.
※ 황제들의 공식 명칭
"Imperator Caesar Augustus Tribunicia Potestas"
<화폐개혁>
- 로마의 화폐는 은화만 동전아었으며, 금화는 주로 기념 주화로 발행되었슴.
- 카이사르가 금과 은의 상대적 가치를 1:12로 하여 금화를 통화에 편입시킴.
동전 주조는 원로원의 권한이고 은화와 금화의 주조권은 종신독재관인 자신이 갖기로 함.
- 아우구스투스의 화폐제도 확랍.
1. 금화 1아우레스는 은화 25데나리우스이고 동전 100세스테르티우스에 해당.
2. 경제인은 정치를 이해하지 못해도 되지만 정치인은 경제를 몰라서는 안된다.
3. 로마 제국의 기축통화이지 공통 화폐는 아니었다.
<선거제도 개혁>
- 카이사르가 건설하기 시작한 "사이프타 율리아"(율리우스 투표소)는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완성됨.
- 각 선거구의 결과가 그 선거구의 표가 되고 그 표를 집계하여 당락을 결정.
이 방식은 로마가 공화정으로 바뀐 BC509년부터 계속되고 있었슴.
-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수도 로마 이외의 지역에서 투표하는 것을 인정.
- 아우구스투스는 선거법 위반에 대한 벌칙도 법제화.
-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과 법무관은 카이사르가 개정한대로 2명과 16명으로 그대로 둠.
그러나 "명예로운 경력"의 출발점이기도 한 회계감사관의 정원은 40명에서 20명으로 줄였다. 그 대신 자격 연령을 30세에서 25세로 낮추었다. 이로 인해 회계감사관이 원로원에 들어갈 때까지 4년의 시차가 생기고 이를 심사하는 재무관의 역할을 가진 아우구스투스는 자격심사를 할 수 있는 기간이 길어졌다.
<로마 시대의 "노멘클라투라">
- 외출 시 동반하는 "노멘"(이름)을 "클라토르"(알려주는 자)의 역할을 하는 노예.
- 아우구스투스는 술라나 카이사르와는 달리 카리스마가 없고 자제력이 남달리 뛰어난 사람이었다.
<핏줄에 대한 집착>
- BC23년 말 누나 옥타비아의 아들인 마르켈루스가 병사.
카이사르가 착공하고 아우구스투스가 완공한, 폼페이우스 극장 다음 두번째로 석조 극장의 이름을 "테아트룸 율리아"(율리우스 극장) 이란 이름을 쓰지 않고 "테아트룸 마르켈루스"라고 지음.
- 16세에 미망인이 된 율리아는 아우구스투스의 요구에 따라 아그리파와 재혼
아그리파는 옥타비아의 딸 마르켈라와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고 있었지만 아우구스투스가 이혼시킴. 이혼한 마르켈라는 안토니우스의 아들을 새 남편으로 맞음.
아그리파는 율리아와 결혼 후 두 아들을 출산.
<"식량 안보">
- 제 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후 시칠리아 섬을 카르타고에서 양도 받음.
BC22년 후 밀은 시칠리아에 의존하고 본국은 올리브와 포도 생산에 전념.
- 식량 부족 사태가 심각해져 집정관이 원로원에 임시 비용 지출 결정을 요구함.
갑론을박으로 시간만 보내게 되자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에게 독재관 역할을 요청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사양하고 자기 지갑을 풀어 자파 사람들을 해외까지 급파하여 밀을 대량으로 사들여 주민들을 위기와 공포에서 구해 줌.
- 토론을 거듭한 뒤에야 결론을 내리는 공화정 체제의 한계를 깨닫기 시작.
- 28년 뒤에 다시 식량 위기가 닥쳐오자 "식랼처 장관"이라는 관직을 신설하고 기사계급을 임명.
※ "물 안보"
아그리파가 가도 건설과 상하수도 건설을 위해 노예들로 만들어 놓은 기술자 조직을 아그리파의 사후 아우구스투스가 인수 그들을 기사 계급에 포함시키고 이들을 중심으로 "공공사업청"을 신설 함. 수도국도 이에 포함됨. "수도국장"은 집정관 경험자가 취임하도록 요구함.
<동방 재편성>
- BC24년 로마의 동맹국인 갈라티아(소 아시아 중앙부)에 왕가의 혈통을 잇는 마지막 왕이 사망.
- 에스파냐의 타라고나에 머물고 있던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를 동방으로 보냄.
아그리파는 소아시아 서해안 근처에 있는 레스보스 섬에 머물면서 갈라티아를 평화적으로 속주화 하는 교섭을 시작.
아그리파는 동방의 속주를 순행하는 것은 물론 유대까지 출장을 다니며 동방 재편성의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다.
- 아그리파가 기반을 마련해 준 덕분에 아우구스투스는 느긋하게 BC22년에 동방 재편성을 위해 수도를 떠날 수 있었다.
- 최초의 행선지는 시칠리아 섬이었다.
BC44년 카이사르가 시칠리아와 남프랑스 속주에 라틴 시민권을 주기로 결정했으나 석달 뒤에 암살됨으로 인해 아직도 속주 상태로 남아 있었다.
7개의 기존 주요 도시를 잇는 도로망을 확충하고 전략 요충마다 제대 군인을 이주시켜 식민도시 7개를 건설했다. 내륙 지방에서 산출되는 농산물을 항구까지 효율적으로 운송할 수 있는 체제가 확립됨.
사르데냐 섬과 코르시카 섬의 도로망도 계획하고 공사 시작.
- BC21년 그리스로 순행.
그리스는 로마 내전 중 주요 전투의 무대가 되어 경작지는 황폐해 지고 인구 유출이 일어나 인구가 줄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테네에 머물면서 자치도시와 식민지 그리고 그 도시들을 잇는 모로망 건설을 통한 그리스 재건을 구상.
아테네 북부에 넓은 시장을 지어 아테네 시민에게 기증, 아테네 시는 로마와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치는 신전을 아크로폴리스에 세우고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 조각상을 신전 안에 세움.
- BC21년 아우구스투스와 아테네에서 합류한 아그리파는 오리엔트 대책을 인수인계.
아그리파를 수도 로마로 돌려 보내고 아우구스투스는 젊은 티베리우스를 동방 순행에 동행함.
- BC21년 겨울을 기후가 온난한 사모스 섬에서 보냄.
- 로마는 소아시아 각 왕국과 동맹 관계를 맺는 것으로 일관.
기존 소아시아 속주 ... 아시아, 비티니아, 킬리키아
- 갈라티아 왕 사망 후 아그리파와 갈라티아 유력자가 교섭.
⑴ 부채 상환 기간의 연기.
⑵ 속주세의 공정 과세, 수입의 10분의 1
⑶ 속주 총독의 통치 지역을 명확하게 한다.
⑷ 군단을 상주시키지 않는 대신, 제대 군인을 이주시켜 식민도시를 건설한다.
갈라티아 속주의 수도도 앙카라로 결정, 이를 연결하는 가도와 로마의 사회 간접 자본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감. 이로서 갈라티아는 평화적으로 로마의 속주에 편입됨.
- 시리아 속주
황제 속주로 삼고 평시에도 4개 군단을 주둔 시킴.
속주의 수도는 안티오키아로 이미 카이사르가 잘 정비해 둔 건축물을 유지만 하면 됨.
헬리오폴리스(오늘날의 발베크)에 군단 ㄱ;ㅈ;를 건설.
대상로를 고려하여 그 연변에 있는 도시 다마스쿠스와 팔미라를 집중적으로 진흥 시킴.
이들을 잇는 도로망을 정비함.
자유도시였던 시돈과 티로는 로마 상인 시해 사건으로 자격 박탈됨.
<유대 문제>
- 시리아 속주 남쪽에 위치. 베리투스(오늘날의 베이루트)와 요파(오늘날의 텔아비브)가 속함.
- BC63년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정복.
- BC48년에 카이사르가 패권 확립을 시도했지만 속주화 할 생각은 없었다.
시리아의 헬레니즘 세계에 비해 유대세계이기 때문에 통치가 어렵게 생각되었다.
- 유대 왕 헤톳왕(헤로데스)
BC73년생. 아우구스투스보다 열 살 위.
BC40년 유대를 침공한 파르티아 군은 당시의 왕을 생포하고 친파르티아인 왕의 동생을 왕위에 올림. 퇴위 당한 왕의 고관이었던 헤롯은 로마에 망명함.
당시 로마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공동 통치를 하고 있었다.
헤롯은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항테서 받은 "로마 시민과 원로원의 친구이자 동맹자"라는 칭호를 갖고 조국으로 돌아감.
반격에 성공하여 유대 왕위에 오름.
클레오파트라가 간절히 원했는데도 안토니우스는 유대 왕국만은 넘겨주지 않을 정도로 헤롯을 높이 평가. 안토니우스가 죽은 후에도 헤롯과 아우구스투스는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
니콜라스라는 인물이 좋은 관계 유지에 이바지 함.
다마스쿠스 태생의 그리스인.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의 애들 가정교사.
헤롯왕의 고문이 됨. 이 두 사람은 유대 왕국은 로마의 "클리엔테스"로 존속하는 것이 최선책이라는 의견에 일치.
헤롯왕의 친 로마 정책
유대 국내에는 그리스, 로마 신들을 모신 신전이 세워짐.
ㅇ아우구스투스에 대한 감사 표시로 사마리아를 세바스티아로 개명하고 카이사레이라는 항구도시 건설, 아우구스툿에게 바쳐진 신전을 세움.
<파르티아 문제>
- 이집트가 무너진 뒤로는 대규모 정규군을 가진 유일한 나라가 되었슴.
- 로마와의 대결
루쿨루스와 폼페이우스는 유프라테스 강까지는 진격을 했지만 파르티아와 정면대결은 않았음.
BC53년 삼두정치의 일원인 크라수스가 처음으로 파르티아와 정면대결을 했지만 참패하고 은독수리 깃발, 군단기를 모조리 뺏김.
BC44년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원정을 떠나기직전 살해됨.
BC36년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 원정에 도전, 8개월에 걸친 원정에서 2만명이나 되는 병사를 잃고 실패.
두번의 패배 사이에 한 차례 가벼운 패배가 있었다.
- 파트리아 왕족들 간의 내분.
왕 프라테스 4세가 노령이 되자 동생 티라다테스가 왕세자를 붙잡아 로마로 보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후하게 대우를 해 주었다. 늙은 왕의 측근들이 잔격에 성공, 패배한 티라다테스는 시리아 총독에게로 도망. 로마는 이 사람도 죽이지 않고 살려 둠.
- 파트리아는 왕의 이름으로 로마에 강화를 제의하고 두 인질을 돌려 달라고 함.
로마는 두 번 대전 시 빼앗긴 은 독수리 깃발과 포로가 된 1만명의 로마 병사를 돌려 달라고 함.
아우구스투스는 왕자만 돌려 보내고 티라다테스는 넘겨주지 않았음.
왕자는 조국에 돌아가 왕위에 올랐으나 로마와의 강화에 응하지 않음.
- 아르메니아가 친파르티아 정책을 폄.
안토니우스가 선왕을 폐위 시키고 아들인 아르탁세스를 왕위에 앉혔으나 반로마 정책은 변하지 않았슴.
- BC21년 티베리우스가 시리아 속주에 주둔하고 있는 4개 군단을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진격.
아르메니아 궁정은 아르탁세스 왕을 죽이고 사절을 급파하여 복종을 맹세.
티베리우스는 왕의 동생 티그라네스를 왕위에 앉히고 로마와의 동맹 관계를 갱신.
새 왕은 로마에서 오랜동안 볼모 생활을 하였던 사람임.
- 파르티아는 북쪽 국경을 맞대고 있는 아르메니아가 로마쪽으로 돌아가자 왕 프라테스 5세는 로마가 제시한 조건을 모두 수락하고 그동안 방치해 둔 강화조약을 냊기로 결정.
BC21년 5월 12일 강화조약 조인.
은 독수리 깃발은 모두 반환되었으나 포로가 된 로마 병사는 생존자가 없어 갑옷과 무기만 반환.
파르티아와 강화조약을 맺은 날인 5월 12일을 국경일로 함.
포로로마노 한복판에 서있는 카이사르 신전 옆에 개선문을 세움.
- 보스포루스 왕국과 동맹 관계를 맺음.
보스포루스 왕국의 왕족은 페르시아계였지만 지도층은 700년 전부터 이 지방에 정착한 그리스계 주민이었다.
왕위를 둘러싼 분쟁에 아그리파가 소규모 부대를 파견, 분쟁 조정에 나서 여왕을 정점으로 하는 안정된 정권이 성립되고 로마와 동맹관계를 맺음.
<이집트>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멸망한 뒤 이 나라는 아우구스투스 개인 영지가 됨.
형식은 개인 영지이지만 로마인들은 국가의 소유지로 생각.
신격화한 파라오의 지배를 받은 역사가 긴 이집트는 시민공동체인 국가 로마의 지배보다는 "신의 아들"인 아우구스투스에게 지배를 받기를 원함.
- 이집트 경제의 토대는 나일강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농업에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말기에는 나일강 강물을 활용하기 위한 관개 시설도 황폐해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음. 아우구스투스는 나일강물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수로망 정비공사를 시작하였고 이로 인해 이집트 농업의 부흥은 그 기반이 마련됨.
- 아우구스투스는 이집트에 토지 사유제를 도입하기로 함.
그리스계 주민들은 상업과 공업의 융성을 눈 앞에 두고 있어 농업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음. 이집트인들은 수천년 동안 사유지라는 개념을 갖지 않고 살아와 사유유지제도가 먹혀들지 않음. 아그리파와 마이케나스를 비롯한 측근들과 원로원 계급에 속하지 않은 친구들에게 땅을 사게 함. 해방노예들한테 까지도 땅을 사게 함. 이로서 이집트의 농업 생산성은 비약적으로 향상됨.
- 정교 분리
이집트의 신관들은 독립된 사제 계급을 이루고 있었으며 신전 소유지를 빌려주는 대지주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권위와 권력을 모두 갖고 있어 이집트 국정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신전의 영지들을 몰수하고 사유화를 장려하고 임차 형식을 취하기로 함. 대신 이집트를 통치하는 정부가 신관들에게 봉급을 주도록 했다.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최고 신관이 모든 신전을 감독하도록 결정.
<수도 로마로 돌아오다>
- BC19년 그리스를 거쳐 귀국길에 오름.
- BC19년 10월 21일 로마에 돌아옴.
집정관 퀸투스 루크레티우스를 비롯한 원로원 의원들과 법무관 호민관응 포함한 일행이 캄파냐(나폴리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까지 마중을 나옴.
그 후 해마다 "카페나 문" 근처의 신전에 마련된 제단에서 "아우구스탈리아"라는 의식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