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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의 원류인 보탑사 3층 목탑을 찾아
돌과 나무로 빚어낸 문화 : 법주사, 삼년산성
답사에 앞서
오늘 우리가 답사지로 정한 곳은 지리적 위치면에서나 그 내용에 있어서 매우 독특한 곳입니다.
충청북도라고 하면 사방이 육지로 둘러싸인 내륙지방이기에 흔히는 궁벽진 곳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 사람들은 한반도의 중원(中原)땅으로 자부할 만큼 한반도의 중심적 위치에 있으며, 실제로 삼국시대 때는 통일의 전초기지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그런 만큼 이 지역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인들이 세운 철옹성같은 산성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제일 먼저 찾아가려는 삼년산성은 신라인들이 세운 것으로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곳입니다.
뿐만 아니라 장기간의 전쟁을 치루기 위해서는 군인들의 식량을 쉽게 조달할 수 있어야 하는데 충청북도 땅은 물자 공급처로서도 적격의 땅이었습니다. 진천땅을 ‘생거(生去)진천’이라고 하는데 이는 산 좋고 물 좋고 인심 좋아 사람이 한평생을 살기에 적합하다는 말입니다. 이면에는 먹고 살기에 충분한 농토를 갖추었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마음이 넉넉한 곳이라면,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조상들의 훌륭한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우리나라의 산성의 특징과 역사적 위상, 정취까지를 고스란히 맛볼 수 있는 곳이 충청북도 땅이고, 또한 우리나라에 드물게 남아있는 목탑이 충청북도 땅에 있습니다.
현존하는 목탑 가운데 한때 전라남도 화순의 쌍봉사 삼층전이 대표적이었지만 최근에 불타 새로이 중건된 모습이고,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목탑으로는 이제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입니다.
여기에 신라인들의 강력한 통일의지를 담아냈던 신라 황룡사 구층목탑의 맥을 이어받아 ‘금세(今世) 불교건축문화의 집약’이라고 일컬어지는 목탑이 충북 진천 보탑사에 건립되어 새로운 문화답사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번 답사길은 ‘돌과 나무’ ‘인간과 자연’ ‘자연과 문화’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문화재들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도록 합시다.
삼년산성(三年山城)
충청북도 보은읍 오정산(烏頂山) 능선에 쌓은 우리나라의 산성을 대표하는 석축산성(石築山城)이다.
산성 근처에 이르러 산성을 올려다 순간 그 위용에 놀라기도 하지만,
점판암계의 판돌을 엇물려가며 거의 수직으로 13m에서 20m까지 쌓아올리고, 성벽의 너비(폭)는 8~10m쯤 되기에 산성 위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이 지역은 대전 청주 상주 영동으로 연결되는 요지로서, 삼국시대에 백제의 남진을 막기 위해 신라 자비왕 13년(470)에 쌓았다. 삼년동안 쌓았다 하여 삼년산성이라고 부르는데, 소지왕 8년(486)에 개축하였으며, 오정산에 있다하여 오정산성이라 불리기도 한다.
산성을 돌아보면 바로 느낄 수 있듯이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듯하다.
통일신라 헌덕왕 14년(822)에 반란군이 한때 진을 친 곳이기도 하고, 후백제왕 견훤이 이곳에 진을 치고 고려 태조 왕건을 물리치기도 한 곳이다.
삼년산성은 능선을 따라 병풍처럼 둘러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전체 둘레가1.7km쯤 되며, 안쪽은 골짜기를 이룬다. 아미지(蛾眉池)라는 연못터가 서문 근처에 남아 있고 수문(水門)도 발견되었다.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 우물도 다섯 군데가 있었다 한다.
지금은 성벽이 많이 허물어졌지만 여전히 옛날의 위용을 느낄 수 있으며 서문 쪽 일부 산성이 복원되었고, 성문은 동서남북 네 군데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현재 우리가 드나드는 곳은 서문터이다.
이곳 성문은 다른 곳과는 달리 안에서 밖으로 열게 되어 있는데, 이는 성안의 군사가 출동하기에 편리한 공격적인 문의 형태이다. 또한 서문의 문지방돌에는 수레가 드나들 수 있도록 홈이 파여 있는데, 그 너비로 보아 바퀴의 축거리가 1.66m나 되는 큰 수레가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동문 자리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벽에는 수구가 뚫려 있고 요소요소에 반원형의 치성이 설치되었으며, 모서리에는 망루터가 남아있다. 사적 235호.
법주사(法住寺) 가람 배치도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의신조사(義信祖師)에 의해 세워진 법주사가 몸담고 있는 속리산은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래는 구봉산(九峯山)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그런데 소달구지를 타고 가던 사람이 신라 고승인 진표율사(眞表律師)를 만나 깨달음을 얻고 출가하였다하여 속리산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신라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헌강왕 12년(886)때 법주사와 부근 암자들을 둘러보고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으나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세속을 여의지 않으나 세속이 산을 여읜다(道不遠人 人遠道 山非離俗 俗離山)”고 읊기도 했다.
법주사가 오늘날 법상종(法相宗)인 미륵신앙의 중추적 요람이 되는데는 진표율사의 공력이 매우 크기에 대해서 진표율사와 미륵신앙에 대해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진표율사와 미륵신앙
진표율사는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면 사람으로 성은 정씨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진표율사는 12살에 출가하여 금산사에서 숭제법사로부터 “미륵부처님의 도법을 일심으로 깨쳐서 미륵불의 계를 구하라”라는 계를 받고,
15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다가 27살에 전라북도 변산에 있는 부사의방(不思議房 ; 생각과 의논을 끊어버린다는 선불교의 한 방법)에서 수도를 시작한다.
3년 동안 일심으로 수도를 하지만 수기(授記 ; 어느 정도의 공부가 익으면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 혹은 여러 보살들이 와서 믿음을 주는 것으로, 그러면 도 닦은 사람이 ‘야! 나는 반드시 도통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진표율사는 3년 동안 수도를 했는데도 아무런 계시가 없자 절망하고 자살하려고 절벽으로 몸을 던졌다. 그 때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나타나 진표율사의 몸을 받아서 바위에 올려놓았다. 여기에 용기를 얻어 21일을 기약하고 망신참법(亡身懺法 ;돌을 가지고 자기의 몸을 막 찧으면서 자신의 몸을 잊고서 참회하는 방법)으로 도를 닦는다.
그러다 보니 3일만에 팔이 부러지고 다리가 부러지고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런 7일째 되는 날,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나타나 진표율사를 간호하여 몸이 회복이 되었다.
그리고 21일 째 되던 날 도솔천에서 미륵부처님이 천중(天衆)들을 거느리고 와서 “잘하는구나 대장부여! 이처럼 열심히 계(戒)를 구하다니…”하면서 189개의 간자(簡字)와 점찰경(占察經) 두 권을 전해주었다.
도솔천은 불교에서는 우주를 통치하는 미륵부처님이 계시는 최고의 하늘이 된다. 그 미륵부처님이 “이제 너는 이 몸을 버리고 이 뒤에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다시 태어나리라.”는 말씀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 뒤 진표율사는 도통을 하고 김제 금산사에서 주석하고 미륵장륙상을 세운 뒤 앞서 얘기한 속리산에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과 함께 금강산에 발연사(鉢淵寺)를 세워 제2도량으로 삼고, 마지막에 제자인 영심을 통해서 속리산 법주사에 미륵을 세우게 한다. 곧 속리산 법주사는 미륵불의 도량으로 용화(龍華)세계의 구현이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석가모니불은 원래는 미륵보살과 같이 수행하고 있었는데, 그 근기(根機)면에서 보면 미륵이 석가보다 먼저 성불할 수 있었으나 석가보살의 수행은 맹렬하고 진실하여 보통 백겁이 요구되는 보살의 수행기간을 91겁으로 마치고 성불하였다고 한다.
석가가 현재불이 되었으므로, 미륵은 자연히 당래불(當來佛)로서 아직도 도솔천에서 수행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석가여래도 도솔천에서 보살로 있다가 성불할 때 하얀 코끼리로 화하여 우리가 사는 염부제(閻浮提)에 하생하고 마야부인에게 잉태되었다가 태어나 세상을 구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석가모니불이 설법을 마치고 멸한 후 56억 7천만년이 지나 염부제인 지상에 내려와서 바라문의 여자 범마파제에게 잉태되어 마침내 부처가 된 미륵은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세 번에 걸쳐 인연있는 사람들에게 설법을 행하게 된다고 한다.
이를 일러 용화삼회(龍華三會)라 하는데, 인간은 일심으로 미륵을 믿고 철저히 수행하고 착한 근기를 쌓아서 용화삼회의 설법에 참가하여 구원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미륵 신앙이다.
그런데 진표율사가 보니 미륵부처님이 1,200년 뒤에 이 땅에 오시더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세워진 것이 증산사상이다. 어쨌든 우리나라의 미륵불 신앙은 진표율사에 의해서 시작되고 그 용화삼회의 구현이 금산사와 법주사, 발연사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법주사의 가람 배치
창건때 법주사의 가람배치는 미륵신앙 도량으로서 미륵불을 모신 용화보전을 중심으로 하였지만 고려시대로 들어오면서 미륵신앙과 화엄신앙을 아우르는 이중적 신앙체계를 갖게 되었다.
앞 쪽에 있는 법주사 배치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대웅보전과 용화보전이라는 두 개의 중심을 두고 두 중심에서 이어지는 축이 팔상전에서 직교하도록 한 구조는 이러한 복합적인 신앙체계를 가람배치에 구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승병의 본거지란 이유로 정유재란(선조30년, 1597) 때 불타고 선조 35년에 사명대사 유정이 법주사의 중건을 주도하며 팔상전을 재건하기 시작한 이래 인조4년(1626)에 벽암 각성(碧岩 覺性)선사에 의해서 중창이 마무리 되었다.
이 무렵에는 초창기의 법상종 고유의 배치에다가 다른 여러 신앙체계가 섞여져 대규모의 통불교 가람이 되어 있었다.
참고로 벽암선사는 보은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때 팔도도총섭이 되어 명나라 장군과 함께 해전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으며 1624년부터 3년 동안 지금의 남한산성을 쌓은 분이다.
병자호란 때에는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의승군(義僧軍) 3천명을 모아 항마군(降魔軍)을 구성하여 싸울 정도로 대단한 열정을 지닌 스님이다.
현재의 모습은 1990년에 청동대불을 완성하면서 이루어졌다. 청동대불은 옛 용화보전 자리의 남쪽에 자리잡게 되는데 이는 미륵불상이 팔상전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게 되는 경우를 고려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전체적인 가람 구조를 왜곡시키고 흩트려뜨렸다. 게다가 석연지와 희견보살상 석등의 위치를 모조리 옮김으로써 기존의 미륵 신앙축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본다.
법주사의 건물과 유물
사천왕문(四天王門):법주사의 절 안으로 들어서는 첫 번째 문이 금강문이고 두 번째로 통과하는 문이 천왕문이다.
안성 칠장사와 마찬가지로 이곳의 사천왕상 역시 흙으로 빚은 소조상으로 높이 5.7m의 거구이다.
사천왕은 하늘나라의 동서남북 4주를 다스리는 왕이었는데 나중에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을 모신 절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사천왕은 수미산의 중턱에 있는 사왕천의 주신으로, 위로는 도리천에 계시는 제석천을 섬기고, 아래로는 팔부중을 지배하며, 불법(佛法)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이기에 무섭게 표현된다. 하지만 가만히 뜯어보면 무서운 듯하지만 눈매나 입매 등의 표정을 보면 매우 부드러우면서도 익살스러운 느낌마저 있다.
법주사의 사천왕은 1624년 천왕문의 중창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몇 차례의 보수를 해왔다. 사천왕은 각각 잡고 있는 물건에 의하여 구별되는데 지역마다 다르며, 법주사의 사천왕은 다음과 같은 물건들을 들고 있다.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 ; 불국토를 지키는 천왕) - 비파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 ; 눈이 큰 천왕) - 용(龍)과 여의주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 ; 자꾸 커지는 천왕) - 칼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 - 보탑
팔상전(捌相殿, 국보 제55호)
우리나라에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목탑이다. 화순 쌍봉사 대웅전이 원래는 3층 목탑이었지만 1980년에 불타고 최근에 다시 중건하였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황룡사 9층탑을 비롯해 기림사의 3층목탑까지 크고 작은 목탑들이 전국에 건립되었으나 대부분이 몽고침입과 임진왜란때 불타버렸다.
이 탑 역시 임진왜란 때 불탔으나 사명당 유정대사가 다시 세웠는데 무려 완공까지 22년이 걸렸다고 한다. 아마도 경제적 여건의 악화로 공사가 간헐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보이는데 실제로 오층탑의 구조 수법이 각층마다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탑의 기단에 해당하는 월대는 통일신라시대 때 조성된 것을 그대로 썼는데, 임진왜란 이후 새로 지은 1층은 1출목의 주심포 형식, 2층부터 4층까지는 2출목의 주심포로 동일하지만 2층과 3층의 추녀와 귀포 구조법이 서로 다르며, 5층은 3출목의 다포형식이다.
내부 공간은 3층까지 하나로 트였으며 중심칸 주위를 순회할 수 있도록 하였다. 중심부에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8개의 장면으로 묘사한 그림(팔상도)을 한면에 2장씩 걸고 각면 불단에는 중심불과 오백나한상들을 배열, 팔상전 공간에 영산전 혹은 나한전의 기능까지 혼합한 것이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915호):석가모니를 대웅세존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대웅전은 바로 이 석가모니불을 모신 전각이다.
그러나 법주사 대웅보전에 모셔진 부처는 가운데 비로자나불과 왼쪽의 석가모니불, 오른쪽의 노사나불의 삼존불이다. 이러한 구성은 화엄경의 삼신설(三身說)을 기초로 법신불(法身佛, 비로자나), 보신불(報身佛, 노사나), 화신불(化身佛, 석가)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이 전각의 주불은 석가가 아닌 비로자나이며 대적광전이라 함이 올바른 명칭일 것이다.
아마도 조선 후기에 대부분의 통불교 사찰의 주건물이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전이었던 유행에 따라 대웅보전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옛 기록에는 대웅대광명전으로 남아있다.
기단과 계단석의 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1624년에 중창되고 여러 차례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전면 7칸, 측면 4칸의 2층 건물이다. 절집 가운데 현존하는 2층 건물은 4개에 불과한데 그 가운데 법주사 대웅보전, 무량사 극락전, 마곡사 대웅전이 충청권에 위치하므로 백제계 건축의 전통일 가능성도 높다.
이 세 사찰은 평지형 입지를 가진 점 등 많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대웅보전은 기둥 사이에도 포작이 있는 다포계 건물로 아래층은 2출목, 위층은 3출목의 서로 다른 포작을 갖는다. 포작의 모양도 위층은 곡선형, 아래층은 직선형이다. 용마루까지의 전체 전각 높이는 19m.
원통보전(圓通寶殿, 보물 제916호)
관세음보살을 모신 건물은 격이 높으면 원통전, 격이 낮으면 관음전이라 통칭한다. 건물의 위상과 명칭과의 관계는 다른 전각에도 나타난다.
예컨대 대웅전이 부불전이 되면 능인전, 대적광전은 비로전, 극락전은 미타전, 용화전은 미륵전으로 명칭이 바뀐다.
원통보전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건물은 법주사내의 용화보전, 대웅보전과 함께 중요한 불전으로 인식되어 왔다. 기단은 팔상전과 같이 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며 역시 1624년 벽암 선사 때 중건되었다. 1892년 중수를 거쳐 1975년 해체 보수되었다. 정면 3칸 8.63m, 측면 3칸 8.2m로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다.
지붕은 사모지붕으로 흔치 않은데, 이러한 절집은 불국사 비로전 정도에 불과하다. 한 변의 3칸 가운데 중심 칸은 넓고 양옆 칸은 좁다. 내부 중심에 4개의 높은 기둥을 세워 넓은 칸을 만들고 바깥으로 낮은 기둥을 세워 연결시킨 구조방식의 결과이다.
목탑과 같은 다층 건물을 만들 때 쓰는 방식이기 때문에 내부의 가운데 칸은 높고 주변 칸들의 천장은 낮아서 마치 ‘집 속에 집’이 들어가 있는 꼴이 된다. 이러한 절집들로는 선암사와 흥국사들이 있는데 모두가 원통전이라 관음신앙과 연결되는 건축구조가 아닌가 생각된다.
주역의 의미로 살펴볼 때 원통(圓通)이라는 이름과 집의 구조는 모두 하나로 일치함을 엿볼 수 있다. 곧 원통이란 이름은 상징적 의미의 하늘(○)이며, 정사각형의 집구조인 네모는 땅(□), 지붕의 삼각모양은 사람(△△)으로 모두가 360˚로 서로 상응하는 천지인 삼재(三才)로 삼위일체를 뜻한다.
관세음보살이 주원융통(周圓融通)하게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분이기에 사모지붕의 네모난 집 구조로 원융(圓融)의 관음신앙을 표현했다고 해석해볼 수 있다.
석등은 사찰에서 법당이나 탑 앞에 세워 불법의 진리를 밝히는 상징 물로 세어지며 때로는 고승의 사리탑 앞에 세워지기도 한다.
일반 석등과는 달리 기둥 대신 마주 서있는 사자상을 조각하여 쌍사자 석등이라 하는데, 경남 합천의 영암사지 쌍사자석등, 국립광주박물관의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과 더불어 신라의 3대 쌍사자 석등이라 한다.
이 가운데서 법주사의 쌍사자 석등(높이 3.3.m)이 단연 우수한 것으로 손꼽힌다. 신라의 것은 아니지만 양주 회암사터의 무학대사 쌍사자석등조각도 주목할 만하다.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 보물 제15호):
높이가 3.9m로 8각형으로 된 불발기집 사면에 사천왕이 조각되어 사천왕 석등이라 불린다.
앞의 쌍사자 석등과 마찬가지로 불발기창에는 문을 내고 문틀을 못으로 고정시켰던 흔적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석등의 기본 형식을 잘 따르고 균형감과 당당한 품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8각의 댓돌 위에 커다란 반구(半球)형의 돌을 깎아 연못을 만들어 올려 놓은 이 석연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작품이며
석조물 전체에 꽃, 구름, 난간, 덩굴 등의 무늬가 어우러져 매우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특히 댓돌 위의 기둥돌에는 피어나는 구름 모양을 조각하여 이 연지가 땅위의 연못이 아니라 천상의 연못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봉발석상(奉鉢石像, 바리를 받쳐든 석조 인물상, 충북 유형문화재 제38호):
일명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으로, 이 조각상은 여러 곳이 훼손되어 있지만 신체의 표현 감각이 매우 생생하고 그릇의 조형미도 세련되어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석상이 가섭존자(伽葉尊者)란 설과 희견보살상이란 설이 있다.
일설에는 몸과 팔을 불태워 부처님께 정성을 바침으로써 몸에서 타오른 불꽃이 1,200년 동안 꺼지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묘법연화경의 희견보살상이 뜨거운 향로를 이고 있는 모습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부처님을 향한 공양 가운데 향 공양을 으뜸으로 여겼으므로 이 조각을 향로 공양상으로 해석하는 것도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옛 선희궁 원당(宣喜宮 願堂)
대웅보전 앞 동쪽에 자리잡은 집으로 솟을삼문을 두고 낮은 담장을 두른 전면 3칸, 측면 3칸의 작은 건물이다. 1765년경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선희궁 원당으로 조영되었는데, 불교사찰 안에 있는 유교 건축으로 조선시대 어려웠던 불교계의 사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은 비어있지만 한때 법주사와 관련있는 역대 큰 스님들의 초상을 모셔둔 조사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법주사의 앞 서쪽 추래암(墜來岩)이란 바위에 새겨진 높이 5m의 불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걸터앉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불상이 갖추어야 할 형식도 완전하며 1350년에 그려진 고려시대의 ‘미륵하생경변상도(彌勒下生經變相圖)의 형식과도 동일하여 고려시대 말기에 새겨진 미륵불상으로 추정된다.
능인전(能仁殿):1624년에 중창된 건물로, 뒤쪽에 세존의 사리탑이 있어 원래는 사리탑을 예배하는 적멸보궁의 역할을 한 건물이지만 현재는 불상과 16제자상을 봉안해 영산전 또는 나한전의 기능을 갖는다.
신법천문도설 병풍(新法天文圖說屛風, 보물 제848호):
1743년에 제작된 것으로 8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폭의 크기는 가로 56cm, 세로 183cm으로 용화보전 전시관에 진열되었다.
서양인 쾨글러가 연구한 천체관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김태서와 안국빈이 중국에 가서 배워온 것이다. 300개의 별자리에 3,083개의 별을 갈포에 그려넣은 것으로 지금도 1,855개 이상의 별을 헤아릴 수 있을 정도로 매우 꼼꼼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밀한 도면이다.
중국의 천문도와도 구별되는 조선식의 표기도 등장하고 있어 이 천문도는 새로운 지식의 습득을 바탕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병풍은 1758년 영조가 선조어필병풍을 포함한 4개의 병풍을 하사할 때 함께 같이 보내준 것으로 전해진다.
이밖에도 법주사 입구의 정이품송과 더불어 경내의 철확(鐵鑊 ; 쇠솥, 충북 유형문화재 제143호), 철당간, 세존사리탑, 자정국존비, 벽암대사비, 부도 등등 눈여겨 볼거리들이 많다.
농(籠)다리(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
충청북도 진천군 구곡리 굴티(중리)마을 세금천(洗錦川)에 놓여진 다리로 고려 고종때의 권신이었던 임연(林衍, ?~1270)이 놓았다는 설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라의 명장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 고구려로부터 낭비성을 되찾은 후 그 기념으로 다리를 놓았다는 전설이 있다. 진천의 손꼽는 ‘상산팔경’ 가운데 ‘농암모설(籠岩冒雪)’이 있는데 바로 이 농다리 위에 흰눈이 쌓였을 때의 정취를 말한다.
다리의 전체 길이는 93.6m로 처음에는 교각의 수가 28개였다는데 지금은 양쪽으로 두 개씩이 줄어서 24개만 남아 있다. 농다리란 이름은 밟으면 움직이고 잡아당기면 돌아가는 돌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농다리를 차근히 살펴보면,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쌓아올리고, 교각들도 양끝을 유선형으로 오므리고 위로 올라갈수록 좁게 만들었다.
뱀이 지나가는 듯 약간 구불거리며 사행(蛇行)하는 형태로 조성해 물의 저항을 덜 받아 오래 쓸 수 있게 한 고려인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보탑사(寶塔寺)
삼국시대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지대로 고려시대 큰 절터(蓮谷寺)로만 전해오던 연곡리 비선골[碑立洞] 보련산 자락에 세워진 절이다.
진천에서 보탑사를 찾아가다 보면 신라 장군 김유신의 사당인 길상사(吉祥祠)를 지나고, 골짜기에 들어서는 김유신의 생가터를 지난 뒤 왼편으로 ‘연담(蓮潭)’이라 이름 붙여진 연곡저수지를 지나야 보탑사에 닿을 수 있다.
우리는 바로 그 연꽃 안에 보탑사와 함께 서 있는 환희를 느낄 것이다. 아래쪽의 연담과 연관시켜본다면 이곳은 풍수지리학적으로 볼 때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명당이 되는 곳이다. 경내에는 보물 404호인 백비(白碑)와 연곡사지 3층석탑이 있다.
보탑사는 신라 황룡사 9층 목탑의 맥을 이어 1300년 만에 사람이 오를 수 있게 지어진 목탑으로 백팔번뇌의 의미를 담아 높이 108척(32.7m) 규모로 지었고, 상륜부까지 포함하면 전체 높이는 42.7m에 이른다.
전통기법대로 금속 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모두 목재를 짜맞추어 3년에 걸쳐 지었으며 천년을 내다보고 지었다 한다.
3층목탑을 ‘통일대탑’으로 이름한 것은 우리나라의 무궁한 발전과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기원하는 동시에 전통목조 건축문화를 재현함으로써 다음 세대에게 문화민족의 긍지를 심어주기 위해서란다.
보탑사는 1991년도 고건축 문화재 팀이 이곳을 답사하고, 신영훈 문화재 전문위원의 감독아래 1992년 5월에 착공하여 건축한 것으로, 1층에는 심주(心柱)를 중심으로 사방불을 모시고 2층에는 경전을 모셨으며 3층에는 미륵삼존불을 모셨다. 구체적으로 층별 구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1층 금당(金堂):심주를 중심으로 석가여래,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를 모신 보탑사의 본당
2층 법보전(法寶殿): 불, 법, 승 3보중의 법보, 즉 석가세존의 가르침인 8만대장경을 봉안하는 법당
3층 미륵전(彌勒殿):석가 세존께서 열반에 드신 뒤 부처님이 안 계신 세상이 계속되다가 장차 이땅에 오시어 새로운 정법(正法) 시대를 여실 미래불인 미륵불을 모시는 법당
탑 앞의 석등을 보면 기단은 사각형을 이루고 그로부터 오각, 육각, 칠각, 팔각, 구각으로 부재를 다듬어 올렸고, 상륜부에서 원형이 되었다. 하늘과 땅 사이의 조화를 다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보탑사라 이름한 뜻은 법화경 견보탑품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문을 다보여래께서 증명하고 찬탄하기 위해 칠보탑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여주신 것과 관련,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보배탑을 세움으로써 모든 사람의 가슴에 부처님의 자비심이 가득 차고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뜻에서라 한다.
목탑 오른쪽으로는 8각 평면, 8모지붕의 영산전을 세워 부처님 당시 영산에서 5백명의 비구들에게 설법하시던 모습을 재현했다.
끝으로 보탑사 삼층 탑전 찰주기(刹柱記 ; 목탑을 세우려면 중앙과 네 귀퉁이에 기둥을세우는데 가운데 기둥을 찰주라 하고 네 귀퉁이 기둥을 사천주, 四天柱라 한다. 찰주 아래 돌을 심초석, 心礎石이라 하고 여기에 부처님 사리를 봉안한다.)를 살펴보자. 보탑사를 지은 의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목탑의 역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기에 일부 소개한다.
“‥‥‥천축에서 불법이 전래한다. 천산산맥 너머 아득한 길로 해서 동방에 전륜(轉輪)하였다. 부여족들이 영두(迎頭)하여 봉불을 발심한다. 부여의 지족인 선비(鮮卑)는 돈황에서 석굴을 개착하고, 고구려인은 백두산의 울울한 대목(大木)으로 목탑을 완성한다. 가람의 시작이다. 팔각 목탑을 중심에 두고 사방에 전각을 짓는 독특한 사원이 계발된다.
목탑은 동방 불찰(佛刹)의 표상이며 흙을 빚어 구워 만든 벽돌 전탑의 모범이다. 무성한 송림이 없는 평원에서의 전탑 조영은 저절로 차서를 겸양할 수 밖에 없다.
고구려 목탑은 황하 이남으로 한반도로 왜국으로 전파되고 색북(塞北)과 남계(南界)에도 파전(播傳)한다. 그 중에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는 더욱 융성하였다. 도회지에 무수한 사원들이 즐비하면서 높고 낮게 목탑들이 들어차니 장관을 이루었다.
익산 미륵사에서도 석탑과 함께 백제 무왕이 경영한 구층 목탑도 위위(威威)하였고, 신라 선덕왕이 국력을 경주하여 조영한 황룡사 구층탑도 엄중 장대하였다.
고구려에서는 목조의 묘탑도 계발하였다. 거대한 방추형 석대로 능묘를 형성하여 인도 석가탑에 방불케 하고 그 위에 상륜처럼 목탑을 세웠다. 동명성왕릉도 그와 같은데 고구려 수도 국내성 장군총이 그것이라 이른다. 칠단 거석 고단 능침상에 목탑이 용용(聳聳)하였다.
목탑은 불사리 장치하고 감실을 여는 형과 각층마다 불전을 조성하여 발원을 함축하는 유형이 있다. 이는 석탑이나 전탑에서도 상부(相符)한다. 분황사 탑은 감실형을 대변하고 황룡사 탑은 불전형을 대표한다. 보련산 보탑사 삼층목탑은 황룡사 구층탑을 계맥하였다.
소진된 기풍을 바로잡는 정기를 진작하여 중흥의 전기를 마련하자는 의도이며, 황룡사 탑으로 삼국을 통일하였듯이 보탑사 탑 준성을 계기로 남북의 합일을 기원하자는 의지이다.
우리가 통일대탑(統一大塔)이라 부르는 소이연(所以然)인데 보탑이 비록 삼층에 불과하나 규모는 장대하다‥‥‥
보련산 보탑사 삼층 보탑 준성에 찬하기를 / 천년 마의 발현이라 대중들이 작약동심하고 / 금세 문화집약이라 환희 동참하였다 / 준성 이후 보탑사와 삼선포교원은 무궁무진 / 화주시주 권선일념 모든 대중은 / 홍복이 무량하여지이다‥‥‥
<출처 : 2004년 家苑 어린이.학부모 문화유적답사 안내 프로그램 자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