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복음화 현장에서 신앙선조 숨결 느낀다
“주교좌성당서 수녀원·순교성지까지 오늘날 신앙터전과 옛 순교현장 공존”
*여정 - 부산교구 남천주교좌성당-부산교구청-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원-수영 장대골 순교사적지
(약 2km, 1시간 소요)
주교좌성당과 교구청, 수도원, 그리고 성지까지. 한 달음에 이렇게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황령산 자락의 상큼한 공기와 저 멀리 광안대교가 보이는 이 코스는 비록 빼어난 자연경관 속을 걷는 길은 아니지만 골목골목 찾아가며 성지, 성당, 교구청, 수도원을 한번에 볼 수 있는 종합선물세트다.
▶ 따사로운 빛의 향연
바닷바람으로 더욱 차갑게 느껴지는 탓일까. 쌀쌀한 기온에 움츠러진 몸과 마음으로 부산시 수영구 남천1동 69-1 남천주교좌성당에 발을 디뎠다. 웅장한 자태에 압도되는 성당 앞에는 작은 잔디 마당이 있고, 입구 오른편에 본당 주보인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동상이 눈에 띈다.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오는 따사로운 빛의 향연. 성당에 들어서면 벽이자 지붕 역할을 하고 있는 커튼월이 모두 스테인드글라스로 처리돼 있다. 가로 53m, 세로 42m, 총 2226㎡의 넓은 면적으로 이뤄져 있는 이 작품은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큰 원 세 개를 중심으로 그 안에 여러 가지 작은 형상들이 그려져 있다. 서양화가 조광호 신부(인천가대 조형예술대학장)의 대표작인 스테인드글라스는 1993년 계획돼 2년여의 작업 끝에 완성됐다.
이제 남천성당을 떠나 장대골 성지까지의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덧붙여 추위를 녹이기 위해 따뜻한 차 한 잔 하고 싶을 땐 남천성당 앞 ‘빨마 북까페’를 추천한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아늑한 조명, 벽면을 가득 채운 책들 사이에 조용히 퍼지는 성음악 그리고 향기로운 차 한 잔이 어울리는 곳이다.
▶ 교구 역사와 사업을 한눈에
남천주교좌성당을 나와 왼쪽으로 130m만 올라가면 바로 부산교구청이 나온다. 순례지에 교구청이 포함된 이유는 단순히 성당과 가까이 있어서만은 아니다. 부산교구 홍보전산실은 교구청 내 홍보전시실과 공소체험관 등을 운영하며 교구의 역사와 다양한 사업들을 소개하고 있다.
1층 로비와 맞닿아 있는 홍보전시실의 영상실에서는 교구의 역사와 성지 등을 소개하는 다양한 영상을 볼 수 있고, 전시실에는 교구사, 사업 소개, 특수사목, 사적지 소개, 주요 소식, 사진전 등 다양한 부스를 만들어 놓았다. 주요 고문서와 교구의 발전사가 전시돼 있으며 전자 액자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교구청 주차장 옆에는 공소체험관이 있다. 공소의 변화와 현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으며 각 공소의 옛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뿐만 아니라 고 이갑수 주교의 제대 등 오래된 성물들과 신앙 선조들의 뜨거운 마음으로 채워진 이곳은 그야말로 보물창고다.
▶ 포근한 어머니 동산에서
교구청을 나와 부산KBS 뒷길로 200m를 직진하면 옛 부산시장 관사가 나온다. 지금은 시민들을 위한 공원으로 개방돼 있고 정원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으니 둘러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여기서 우측으로 100m, 다시 좌측으로 600m를 가면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원을 만날 수 있다.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는 1945년 해방과 함께 만주지방이 공산화 되면서 연길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14명의 수녀들이 청주 성심보육원에 모였으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피란, 1951년 부산 초량동에 성분도 자선병원을 열고 1965년 지금의 광안동 수녀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은혜의집, 어버이집, 유치원 등 다양한 피정 및 복지시설로 운영되고 있는 수녀원은 아름다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차분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릴 수 있다. 또 산책로와 야외 제대 등이 마련돼 있고, 이해인 수녀의 해인글방이 운영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순교자에게 바치는 기도
수녀원을 나와 오른편으로 다리 밑을 지나면 800m 직선 주로가 나온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골목골목 시장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에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다. 왼편에 황령산을 오르는 등산로가 나오기도 하고 오른편에는 저 멀리 광안대교가 보인다.
수영중학교가 나오면 그때부터는 수영 장대골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있다. 수영중학교에서 왼쪽, 350m를 지나 호암초등학교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마지막 고개를 넘어가면 수영 장대골 순교사적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수영 장대골은 병인박해 당시 경상 좌수영이 있던 곳이다. 또한 신앙선조들이 처형당한 순교현장이기도 하다. 이곳은 동래지역 전교회장이었던 이정식(요한), 이관복(프란치스코), 박소사(마리아), 이삼근(베드로), 양재현(마르티노), 차장득(프란치스코), 이월주(야고보), 옥소사(발바라) 등 10여 명이 혹형을 당하고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했다.
나무들과 잔디로 아름답게 꾸며진 장대골에는 커다란 순교자 기념비와 돌제대, 십자가의 길 등이 있다. 십자고상 앞에서 자연스레 두 손을 모으고 여기까지 나를 이끈 올레길을 떠올려보며 묵상에 잠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