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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 오른편으로 기품 있는 다지 반송 두어 그루가
그 푸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11시5분, 왼편으로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간이이정표는
'등억온천'이라고 써놓았습니다.
왼편 산자락 아래 등억(登億)리의 지명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째, 등억은 <등어리>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登)"은 높다
내지 오르다 라는 뜻을 가졌으며, <어리>는 <밝>이 음전(音轉)한 것으로
본다면 높고 광명한(밝은)마을.
둘째, "등어귀(登口)"로 보는 것. 즉 억(億)은 어귀(於口)이고 어귀는 안(內)
에 대응하는 말로 드나드는 목(項)의 첫머리인 것.
또 어귀의 옛말은<입>이라고도 하였습니다.
*2003년4월13일(日)雲
▲낙동정맥종주22구간(배내고개~환타지주차장)*사진78컷
해봉(21명)
제22구간 : 左 울산광역시 상북면, 삼남면, 右 밀양시 산내면,
♠참 고
♣울산광역시[蔚山廣域市]
경상남도 북동부 해안에 있는 시.
면적 1,056.29㎢
인구 104만 225명(2001)
인구밀도 985명/㎢(2001)
가구수 32만 2838(2001)
행정구분 1군 4구 4읍 8면 46동
*시의 꽃 배꽃 *시의 나무 은행나무 *시의 새 백로
동쪽은 동해에 면하며, 서쪽은 경북 청도군과 밀양시·양산시, 남쪽은 부산 기장군, 북쪽은
경북 경주시와 접한다. 한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공업도시다. 2001년 현재 행정구역은 1군
4구 4읍 8면 46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시청 소재지는 울산광역시 남구 신정1동에 있다.
동아시아의 중앙부와 한반도의 동남단에 있다. 천혜의 온난한 기후를 가진 항구도시이며,
도심지는 신·구시가지와 배후 도시로 구분되고, 농어촌 지역과는 그린벨트로 나뉘어 있다.
특히 울산 주변 동해안과 내륙지에는 천혜의 자연경관이 있어 자연 속에 둘러싸인 관광도시
로도 유명하다.
울산만에는 울산항·온산항·방어진항이 연이어 있으며, 이들 항구는 일찍부터 동아시아로 뻗어
나가는 한반도의 관문 구실을 해왔고, 현재에도 세계 각 나라들과 교류·협력 관계를 넓혀가고
있다. 재정자립도 87.2%를 자랑하는 한국 7대 도시의 하나이다.
연평균기온 14.3℃, 연평균강수량은 1,272mm이다.
♣삼남면[三南面]
위치 울산 울주군
인구 1만 3450명(2001)
면적 31.13㎢
주요문화재 *상천리 국장생석표(울산유형문화재 2), *언양향교(울산유형문화재 8),
*언양부로산 봉수대(울산기념물 16)
동쪽으로 삼동면(三同面), 북쪽으로 상북면(上北面)·언양읍(彦陽邑), 남쪽으로 양산시 하북면
(下北面)과 접한다. 5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동부에 구릉상의 산맥이 이어지고 서쪽에 신불산(神佛山)이 있어 이 두 산지 사이를 태화강
지류가 북류하면서 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경지율은 적지만 농업이 주업을 이루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 등이고, 산지가 많아서 한우가 많이 사육되며, 대도시에 가까워
젖소·돼지·닭 등의 사육도 성하다. 공업은 대규모의 섬유와 전기기계공장이 입지하여 많은
노동인구를 흡수하고 있다. 면의 중앙부를 부산~경주 간 고속국도와 국도가 통과하고 있다.
문화재로는 상천리 국장생석표(象川里國長生石標:울산유형문화재 2), 언양향교(彦陽鄕校:울산
유형문화재 8), 언양부로산 봉수대(울산기념물 16), 작천정(酌川亭), 보은리 태봉(寶隱里胎封),
축성사지(丑城寺址) 등이 있다.
♣사진은 오 지호 대원이 촬영했습니다.
♧산행 코스(22차)
09시32분 배내고개
10시11분 배내봉
11시33분 간월산정상
11시55분 간월재
12시55분 신불산정상 식사
13시45분 신불재
14시38분 영취산정상
15시20분 산불감시초소매점
16시40분 환타지아 주차장
총 7시간8분
♣ 참여 대원(21명)
대장 : 김성수, 하종관(후미담당)
신철호, 강형태, 정영길, 김 신, 김두호, 오지호, 이승우, 백운기,
조숙희, 남상기, 이종원, 임경애, 이혜년, 윤말순, 하영평, 김종식,
권오갑, 이동회, 김영순.
☞☞☞☞어머니를 자연으로 보내드린 뒤,
삼우제(三虞祭)도 마치고 오랜만에 참여하는 낙동정맥 종주.
20여 년 전, 직장동료들과 통도사에서 영취산을 올라 간월재로
하산한 기억이 아스라이 떠오르는 영남알프스,
잿빛추억 희미한 회상의 산행이 될 것 같습니다.
전국적으로 황사가 예상된다는 일기예보 속에 불경기 탓인가
시민회관 앞은 썰렁, 지난번에 문상 온 집행부요원, 회원들과
고마운 인사를 건넵니다.
평소와 같이 산행도를 받아 캠코더에 입력시키는데
약사 임 대원이 고맙게도 집에서 만들어 온 원두커피를 권합니다.
김 윤근 대원등 고정멤버 몇몇은 개인사정으로 불참한 가운데
타 산악회의 산행 취소 팀을 기대하며 10여분 늦게 출발합니다.
영락공원입구 고정멤버는 여전하고 김 대장의 안내방송을 마치고
지난번 산행비디오를 보며 달리다
신 고문과 조 대원이 잡담을 나누자
임 대원이 악의 없는 한마디를 던집니다.
“나~ 참! 허심천댁 두 사람이 함께 차에 타면 씨끄러워서 못 쌀겠어!”
신 고문이 남천댁이 사돈 남의 말 한다며 응수하자
주변에 웃음탄이 터집니다.
'서 울산' 나들목으로 빠져 언양에 진입할 때
간월재의 이동매점에 맥주도 판다는 김 대장의 이야기에
조 대원이 배낭에 넣어왔든 캔 맥주를 무겁게 짊어지고 갈
필요가 없다며 집행부 젊은이들과 나누어 마셔버립니다.
24번 국도를 달리다 석남사 앞을 거쳐 밀양터널로 올라가다
왼편 배내고개 쪽으로 빠져 가파르게 올라갑니다.
방금이라도 산사태가 날 것 같은 벼랑길의 가파른 고개,
깊은 갈 之자 오름에 김 대장이 하차,
유도를 받아가며 힘겹게 두어 번 쉬며
9시27분, 배내골 이천리 대형안내간판이 서있는
배내고개에 올라섭니다.
9시32분, 김 대장의 설명을 듣고
왼편 남쪽능선 길로 출발합니다.
일기예보와 달리 푸르지는 않지만 황사기는 보이지 않고
포근한 날씨에 등산로도 자갈길 이지만 적당합니다.
앙증맞은 노란 양지꽃들의 인사를 받으며
통나무계단을 거쳐
9시42분, 좌우로 억새가 조망되는 곳에서
2시 방향으로 배내봉이 반깁니다.
뒤돌아 지난번 거쳐 왔든 능동산과 가지산을,
그리고 좌로 재약산 사자봉등을
캠코더에 담습니다.
버스 안에서 엄살로 역코스로 가겠다든
임 대원이 썬 글라스를 낀 체
사부작사부작 잘도 올라갑니다.
하늘에는 여객기 한대가 하얀 비행운을 길게 끌며
북쪽으로 날아갑니다.
10시4분, 갈림길 이정표(송곳산정상3.5km 오두산정상0.6km 간월산정상2.5km)가 서있는
헬기장에 오르니 사방 막힘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종주 길은 오른편으로
평탄하게 이어지는 능선길입니다.
10시11분, 그냥 평탄한 능선 길의
배내골에서 이름을 따온 배내봉 도착.
오 대원과 기념 촬영합니다.
한전기공연합산악회의 목 정상비(배내봉966m)가 세워져 있는데
정상비가 없으면 그냥 지나칠 펑퍼짐한 능선입니다.
중간 그룹도 시야에서 보이지 않아 바쁘게 길을 걷습니다.
잡목사이로
멀리 간월, 신불산이 아련히 보이고
10시19분, 좌로 벼랑을 끼고
암괴가 나타나며
앙증맞은 제비꽃이 얼굴을 내밀고 반기는데
바윗길이 계속됩니다.
우측으로 멀리
사자봉과 재약산이 보이고
뒤돌아본 배내봉이 민둥으로
삭막하기만 합니다.
짧은 오르막 바위 길을 거쳐
10시30분, 등산로는
좌로 천 길 낭떠러지의 벼랑길로 이어지고
왼쪽 건너편 산자락에 자연파괴 앞잡이 채석장이 보입니다.
오 대원이 디카를 든 체 이야기합니다.
“완전히 낭떠러지네요, 그지에... 아이구~ 무서워라~”
작은 암봉 턱에 올라
선두그룹이 간월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모습이
아스라이 보입니다.
10시42분, 내리막 암능을 타고 내려가다
좌 벼랑바위 길은 다시 이어지고
봉오리 맺은 진달래가
군락을 일우고 있습니다.
잘록이로 내려가는데
간월산에서 내려오는 젊은이들과 조우,
민망스럽게 빤히 쳐다보는 걸 먼저
“반갑습니다!”
하고 인사하니
“네...”
멀뚱멀뚱 응답합니다.
씁쓸한 기분으로 내려가는데
갈색 낙엽속의 이름 모른 야생화가 앙증맞게 피어있어
쓴 기분을 달래줍니다.
오른편 산비탈 임도로
오토바이와 사륜구동차가 고속으로 달려옵니다.
간월산까지 간다는 부부등산객이
잰걸음으로 앞서 내려가고
하 대장이 왼편으로
앙상한 가지를 드리운 나무를 가르치며
돌배나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다시 노란 양지꽃이 활짝 웃으며 반기고
간월산은 저만큼 멀리 솟아있습니다.
등산로 오른편으로
기품 있는 다지 반송 두어 그루가
그 푸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11시5분, 왼편으로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간이이정표는
‘등억온천’이라고 써놓았습니다.
왼편 산자락 아래 등억(登億)리의 지명유래에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째, 등억은 <등어리>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登)”은 높다 내지 오르다 라는 뜻을 가졌으며,
<어리>는 <밝>이 음전(音轉)한 것으로 본다면 높고 광명한(밝은)마을.
둘째, “등어귀(登口)”로 보는 것. 즉 억(億)은 어귀(於口)이고 어귀는
안(內)에 대응하는 말로 드나드는 목(項)의 첫머리인 것.
또 어귀의 옛말은<입>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이러한<입>은 옛 지명에<入>으로 쓴 용례가 있습니다.
이 <어귀>가 준말이 “억”이라 하니 등억의 “億”은 이 “억”의 음차.
그러므로 등억(登億)은 높은 곳(신불산이나 간월산 등)을 오르는 어귀(들머리)
또는 “岳“의 어귀에 있는 마을이란 뜻이 되고 오름(登)은 곧 악(岳)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상북면 등억리 마을 동쪽에 묘하고 아담한 산봉우리 하나가 솟아 있는데
1998년 10월 19일 지방기념물 제 19호로 지정된 <언양천리성>이 있는 산성입니다.
이를 세칭 <과부성>이라 불러오고 있는데 그 이면에는 아래와 같은 통탄할 지난
사연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조총, 화약 등 선진무기를 사용하는 왜병들과 칼, 창, 활, 농기구 등 낙후된
원시 전쟁무기를 든 의병들의 격전지였던 과부성, 치열한 접전이 이곳에서 벌어졌습니다.
이곳 등억리와 인근 마을 의병들은 이 과부성으로 올라가서 왜적과 대치, 포위한 왜병을
향해 활을 쏘고 횃불과 돌을 던졌으나 그 거리가 미치질 못하고 왜병들은 조총으로 쏘아
부치니 어쩔 도리가 없어 성중의 의병들은 하나 둘 차례로 쓰러져 종말에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못하고 몰살당하고 말았습니다.
왜병이 이동한 후에 피신했던 마을 사람들이 나타나서 과부성으로 가보니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정경으로 의병들의 시체가 즐비, 마을 사람들은 전쟁 중이라 누구누구의 시체
라는 것을 가리지 못하고 한구 한구씩을 운구했다가 그 넘어 산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이와 같이 몰살을 당한 과부성 싸움이 끝나고 나니
이 마을에는 몰 과부가 생겨나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 산을 가리켜 <과부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 대장의 친구는 앞서 올라가고
11시10분, 비탈 오름길에서 오 대원이 배낭을 내려놓고 먹고 가자며
노란 참외 2개를 깎아 세 사람이 나누어 먹고 다시 오름을 탑니다.
된비알에서 노장 등산객이 쉬엄쉬엄 쉬어가며 올라가기에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으니
“가는데 까지 가 봅니더~”
물병을 기울여 목을 축이고
담담하게 웃으며 이야기합니다.
11시19분, 억새와 봉오리를 맺기 시작하는
진달래가 군락을 일우고 있는
턱에 올라서니
하 대장의 친구가 대기하고 있다
광활한 재약산과 사자봉을 배경으로
각자 기념 촬영합니다.
산죽 길을 거쳐
다시 바위사이 길을 오르는데
좀 전에 앞서 올라갔든
부부등산객이 바쁘게 내려옵니다.
가파른 갈 之자 바위 길을 거쳐
11시33분, 옛날 이 산의 기슭에 간월사라는 절이 있어
부쳐진 이름의 간월산 바위정상에 올라섭니다.
여기도 자기 무리전시용인가
두개의 정상비가 약 2m 간격으로 서있습니다.
하나는 ‘肝月山 해발1083m'1991년5월 동양나이론언양산악회에서,
다른 하나는 그 뒤 2001년4월 고현산우회 ’간월산 1083m‘라고 음각했는데
왜 이런 낭비를 하는지 답답합니다.
기념촬영하고 좌로 날등을 타고 가다
2시 방향으로 저만큼 신불산과
배나무가 많아 부쳐진 이름의 이천리와
바로아래 거대한 분지의 간월재를 내려다봅니다.
산악의 무법자 4륜 구동차 서너 대가 주차해 있고
이동주점 차량 두어 대도 보입니다.
왼편으로 암괴를 끼고 바위 길을 가다
오른편으로 꺾어져 내려갑니다.
11시55분, 임도공사 때 밀었는가
분지 같은 간월재에 내려섭니다.
왼편은 20여년 전 좁은 등로 였든 길이
간월마을로 꼬부라져 급하게 내려가는 넓은 임도,
오른편은 배내골로 길게 완만하게
내려가는 임도로 이어져 있는데...
신불산 유래 간판과
간월재 이정표와 산불감시탑이 보이고
대학생들 서넛이 평상복에 운동화차림으로
소풍삼아 도시락을 들고 올라와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정표(간월산정상0.8km 파래소폭포6.0km 신불산정상1.5km 홍류폭포2.8km)를
촬영하고 이동주점 노천탁자 앞에 앉아
막걸리와 어묵과 김치를 안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정 대장과
후미 팀이 합석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정 대장은 이미 선두그룹과의 한잔을 시작으로
후미를 기다리며 연작중이고 상기한 얼굴로 홈피 등으로
이야기꽃을 피우다 술잔을 권하지만
앞으로의 산행과 내 주량을 알기 때문에
막걸리 반잔과 어묵으로 만족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광폭타이어에
진흙을 무친 난폭 차량을 캠코더에 담고
12시10분, 옛날 산중허리에 신불사라는 사찰이 있었다
해서 부쳐진 이름의 신불산(神佛山) 으로 먼저 올라갑니다.
신불산 공비토벌 격전지 안내간판이
아직도 해결을 못보고 있는
동족상잔의 아픔을 되새기 게 합니다.
펑퍼짐한 비탈진 너럭바위 사이 길로
많은 등산객이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12시25분, 통나무계단을 오르는데
위쪽에서 중년남자가 꼬마아가씨를 다리고
내려오고 있어 캠코더로 촬영하며
몇 살이냐고 물으니 어리둥절하다 아빠가
“여섯살입니다. 하고 대답해야지!”
하니까 손가락을 펴 보이며
“여섯살요...”
합니다.
너무 예쁘고 대견해 장하다며 추겨주니
부녀가 웃으며 기분 좋아합니다.
마주 내려오는 사람이 빤히 쳐다보며 내려가려고 하면
상대방이 나이가 많든 적든 저가 먼저
“반갑습니다!”
인사를 건넵니다.
“네....”
시무룩하게 응답하는가 하면
때로는 마주
“반갑습니다!”
며 기분 좋게 응답하기도 합니다.
“반갑습니다!”
나이든 저가 소리쳐 먼저 인사하는 건
그 자체로도 즐겁고 힘이 나기 때문입니다.
12시27분, 앞으로 조망이 확 트이는 턱에 올라
오른편으로 꺾어 촬영하며 오르는데
뒤에서 부부인 듯 한 여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야~호!”
하고 외치자 중년 남편이 퉁명스럽게
“얏호, 좋아하네. 아직 반도 못 올라 왔는데~”
퇴박을 줍니다.
산에 올라 와서 부부싸움이라도 했는지
도대체 무뚝뚝한 남편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오름길,
바위사이 높은 바위 돌 옆에
가지가 부러진 제법 굵은 진달래나무
한 그루가 서있는데 올라가는 사람마다
마치 손잡이처럼 얼마나 많이 잡고 올라갔는지
빤질빤질 윤이나 있습니다.
바위능선에 올라서니
10시 방향으로 펑퍼짐한 신불산 정상이 보이고
다시 뒤돌아보니 멀리 운문, 가지, 고헌산에서
그리고 간월산 능선에서 시작하여 시계방향으로
서서히 턴하며 10시방향의 신불산 정상까지
촬영하며 돌아갑니다.
허공에는 까마귀 한 마리가 선회하며 날아가는데
‘울주군’이라고 쓴 하얀 벤치가 시선을 끌고
정 대장과 하 대장이 벌근 얼굴에
가쁜 숨을 쉬며 뒤따라올라 앞 찔러 갑니다.
그래서 젊음은 활기차고 좋은 것인가 봅니다.
헬기장을 거쳐
12시46분, 아마추어 햄이 안테나를 세워놓고
무선교신하며 흰 벤치에 앉아있는
왼쪽으로 꺾어지는 능선에 올라섭니다.
정 대장이 물을 마시며 벤치에 앉는 모습을 뒤에 두고
좌측으로 꺾어져 평탄한 능선 길의 정상을 찾아가는데
마준 편에서 40대 후반의 부부,
10대 남매를 다리고 나온 가족 팀을 발견하고
캠코더로 촬영하며
“반갑습니다! 아주 보기 좋습니다!”
라고 인사하니 활짝 웃으며 기분좋아합니다.
우측으로 멀리 영취산과
좀 더 가까이는 신불재가 보이고
얼마가지 않아 또 다른 중년남자가
다섯 살 꼬마의 손을 잡고 마주와
또 칭찬해 줍니다.
자식사랑과 가정교육은
이런 대자연과 함께하며
서로 정을 주고받는 게
물질만능의 외국 유학이나
전문학원에 보내는 것 보다
몇 십 배 자녀의 장래와 가족을 위해
좋다는 걸 요즈음 들어 새삼 느낍니다.
12시55분, 통도사 쪽에서 올라온
김 총무가 기다리고 있는 펑퍼짐한
신불산 정상에 당도 합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과 열사들이 구국결사대(會盟)를 조직하여
홀연히 떨쳐 일어나 단조성 (丹鳥城)에 진을 치고
왜적과 싸워 선혈을 뿌린 고혼이 잠들고 있는 성스러운 곳이 였고
6 25동란 시에는 공비들이 신불산을 거점으로 양산시 일부지역과
울주군 일부지방 및 서부 6개 면을 활동지구로 하여 준동한 근거지였든,
우리나라에서 해발 1,000m가 넘는 고산지대에
유일한 신불산 '단조늪'이 있다고 합니다.
소백산 바람도 유명하지만 신불산 바람도 일찍 한가을에 불어와
논에 벼를 베어 깔아 놓은 것을 회오리(호더락)바람이 둘둘 말아
네 것, 내 것, 할 것 없이 섞어 놓고 아이들은 이불 밑으로 파고들고,
아낙들은 장독대 뚜껑 걱정이고, 남정네들은 지붕 홀랑 날아가지는
않을까 염려할 정도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눈에 조금 익은 정상주변이지만 바위에 태극기를 새기고
신불산1209m라고 음각한 석판을 부쳐놓은 건 생소하고
또 다른 정상비 앞에는 단체 등산객들이 정상비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한다고 떠들썩합니다.
왼편으로 ‘신불산 리치’가 꿈틀되듯
암능이 그 험함을 보여주고
멀리 경부고속도로가 길게 뻗어 있습니다.
‘신불리치’를 배경으로 수고한 김 총무와
오 대원이 기념촬영하고 있는데
돌탑 옆 노천 찻집의 메뉴판이 시선을 끕니다.
‘山人의 따뜻한 마음. 미숫가루 이천냥, 커피녹차 천냥, 율무코코아 천냥’
막걸리 때문에
뒤늦게 하 대장의 친구가 도착합니다.
주변을 캠코더에 담고
또 다른 큼직하게 누운 정상비 아래에서
김 총무는 먼저 출발하고
정 대장등 후미그룹 다섯 사람이
준비해간 도시락, 빵등으로 점심식사를 합니다.
기분이 도도한 하 대장과 정 대장의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집니다.
사량도 개척부터 시작하여
정 대장의 총각시절 부인과
처음 만났든 북한산을 비롯하여
하 대장의 한라산 등반이야기까지.
갈 길은 아직 멀어
촬영하며 가는 내 느림을 생각하여
먼저 가겠다며 일어섭니다.
13시33분, 다시 촬영하며 영취산이 저만큼 보이는
억새로 덮인 광활한 신불재로 내려갑니다.
왼편으로 야트막한 대피소 지붕이 보입니다.
13시45분,
신불재 이정표(가천마을4.5km 신불산0.65km 영취산2.3km)앞을 거쳐
다시 지긋한 오르막을 오릅니다.
가천리(加川里)의 유래는
첫째“들”하는 소리에 대하여 한자를 골라보면 더한다는
뜻을 가진“더할 가“加(가)” 를 취하게 되고,
둘째로“내”는 내 천자(川)의 우리말의 뜻을 한자 음으로 취하여
“加川” 이 된 것입니다.
“들 내”는“들에 있는 내”의 뜻으로 억지로
“野川”으로도 표기가 가능하 다고 할 것입니다.
큰비가 오면 이 일대가 대 하천으로 변하는데
이름 그대로“들내”인 것을 실감하게 되고
마을이 크지면서 분동,
한자가 보급되면서 한자로 표기하게 되었는데
‘큰 들내’를 1911년에 가천리(加川里)로 되었다고 합니다.
10여분 올라가다 뒤돌아
지나온 황량한 억새능선과
신불 리치를 촬영하고
올라가다 다시 뒤돌아 본
신불산과 ‘신불 리치’가 아쉽다는듯 손짓합니다.
왼편 멀리 차주에 올라갈 정족산과
그 자락에 아스라한 경부고속도로상에 각종 차량이
개미떼처럼 달리는 모습을 줌아웃으로,
가까이는 삼성SDI공장을 캠코더에 담습니다.
턱에 올라서서
가까이 보이는 영취산 암벽과
왼편으로 암벽 팀이 휴식하고 있는
아리랑리치를 촬영합니다.
영취산에서 하산한다는 선두와 교신.
2시 방향으로 멀리 봉긋하게 솟아있는
체이등과 죽바우등이 시선을 끕니다.
14시17분, 좌로 ‘빠른 하산 길’이라 쓴 간판이 보입니다.
‘장재마을1시간, 가천버스정유소1시간15분
*에베로릿지 가는 길‘라고 써놓았습니다.
14시19분, 좌측 비탈을 따라 임진왜란때
의병들이 몰사한 한 많은 역사를 간직한
단조산성[丹鳥山城] 흔적이 보이고
등산로는 지난 집중폭우 때 피해를 입었는지
깊이 1m도 넘게 길게 파여 있습니다.
14시30분, 영취산 정상바위를 머리위에 두고
우리들을 환영해 주듯 물통을 길게 매단
대형헬기 한대가 우리들의 머리위에서
한 바퀴 선회하는 걸 재빨리 캠코더에 담습니다.
산불예방감시 비행인가.
휴일도 없이 산불방지를 위해 비행하는
그들의 노고에 손을 흔들어줍니다.
왼편으로 정상매점을 바라보며
바위 길로 올라가는데
오른편의 암괴에 붙어있는 이끼가 누렇게 말라있어
바라보는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왼편으로 휘돌아 올라서니
14시38분, 해발 1092m의 영취산 정상입니다.
지도상에는 1058.9m로 표기되어있습니다.
태극기와 ‘영취산 (취서산) 1059m’라고 음각한
석판을 바위에 부착시켜놓았고
약 2m 거리에 또 다른 정상석비가 세워져 있는데
높이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북쪽으로 국립지리원에서 위도설정에 관한
안내간판이 서있고
멀리 간월산까지 뻗어있는 광활한 갈색 영남알프스
주능선이 한눈에 펼쳐져 있습니다.
이를 배경으로 기념촬영하고
하산 길로 접어듭니다.
이제 낙동정맥은 서남쪽으로 뻗어가는 능선을 두고
동남쪽으로 급하게 곤두박질치듯 떨어 집니다.
우리 선조들이 이렇게 길을 바꾼 건
몇 주일에 걸쳐 시살등 오룡산 염수봉등으로 가다
낙동강에 막혀 되돌아왔을 걸 생각하면
새삼 그 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처에 있는 이정표는
‘시살등3.0km 극락암 백운암2.1km 신불산2.95km'
라고 써놓았습니다.
짧은 산죽 길을 지나
돌탑을 쌓은 바위위에 올라서니
발아래는 천길 벼랑.
확 트이는 조망에 오른편으로 멀리 오봉산이 보이고
순간,
한 마리의 새가되어
훨훨 날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전면으로 통도사와 환타지어,
고속도로 건너 차기에 올라갈 골프장, 공원묘지, 정족산과
천성산으로 이어지는 낙동정맥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14시50분, 왼편으로 되돌아 나와
이제 잡목을 잡으며 급 비탈길로 내려갑니다.
곳곳에 산사태가 염려될 정도로 문어져 가는
된비알이 계속되고 바위절벽 아래 길을 거쳐
15시7분, 스테인리스 박스로 보호한 샘터에서
시원한 약수한잔으로 갈증을 풀고 내려갑니다.
그 사이 정상매점에 들려 약주 한 병을 사고
산장지기가 선물했다며
책 한권을 들고 내려 오는 하 대장.
동행인이 바로 ‘영축산 약이 되는 식물’을 썼다는
산장지기 송산재님과 인사를 나눕니다.
15시14분, 벼랑의 암괴아래의 매점과 산불감시초소에서
후미그룹이 벼랑 끝의 전망대에서 조망을 하고 있습니다.
임도에 내려
왼편, 감시초소를 잠시 둘러보고
내리막길의 무릎통증 때문에 걸음이 늦어,
지름길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조심조심 내려갑니다.
곧 하 대장 등 후미 팀이
나를 앞질러 가볍게 내려가는 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하 대장의
“오디~”라는 메아리가 몇 번 들리고
임도를 가로질러
비탈길 등산로를 조심스럽게 내려가다
15시51분, 작은 임도에서
좌측으로 뒤돌아보니
산자락에 고사목인지
헐벗은 수목이 100 여 평 깔려있고
그 아래쪽으로 너덜지대가 흘러내려
일부 등산객들이 너덜을 타고 내려 옵니다.
너덜 끝 길을 따라 폭우로 깊게 파인
등산로를 따라 내려가다
이제 우로 양산시 상북면과
울산시 삼남면의 경계선을 탑니다.
뒤돌아보니
영취산의 우람한 암봉이 쳐다보입니다.
전방에는 차기에 찾아갈
정족산이 가까이 보여
캠코더로 촬영하자 테이프가 끝납니다.
간이배낭을 뒤지다
예비 테이프를 버스안의 배낭에 두고 온 걸
뒤늦게 깨닫는 내 우둔함.
하 대장과 동행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하 대장이 이번에 별세한 어머니와 동성동본인 진주 하씨고,
그의 어머니가 나와 동성동본인 의령 남씨라는 사실을 알고
기이한 인연이 라는 걸 느낀다고 합니다.
오른편으로 구릉의 작은 숲과 왼편의 황토와
벚나무를 바라보며 정맥길은 계속 이어집니다.
벚꽃터널을 거쳐
삼남목장을 가로질러
아스팔트 포장도로에 오르고
지내마을 빌라촌의 근사한
적송 앞에서 영취산을 담고
16시40분, 김 대장이 마중 나온
‘통도환타지어 주차장’도착.
7시간8분의 산행이 끝납니다.
불고기 파티로 뒤풀이를 장식하든
대원들이 어서 오라고 손짓하지만
바쁘게 버스에 올라 예비테이프를
바꾸어 먼저 도로변으로 나가
영취산과 우리들이 내려왔든
정맥 길을 촬영하고
벚나무 아래의 뒤풀이마당으로
찾아갑니다.
말없는 김 총무가 준비,
후미 팀을 위해 평상위에서
열심히 고기를 굽고 있는데
오 대원이 소주잔을 권합니다.
벚꽃 잎이 떨어지는 평상위에 벌어진
남겨진 두부와 불고기와 소주가
그렇게 맛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캔 맥주 조 대원이 꼬추 타령을 하자
애처가 신 고문이 해설을 해줍니다.
내용인 즉,
평소 산행 후 뒤풀이 장을 잘 마련해 주었듯이
임 대원이 종가 집 안방마님처럼 준비를 했는데
오늘은 풋고추 열개를 갖고 와 뒤풀이 마당의
상위에 내어놓고 잠시 불고기를 굽는 사이
대원들이 하나 둘 집어가 눈 깜짝 할 사이 없어지자
뒤늦게 이를 발견한 임 대원이 특유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냅다 소리를 지릅니다.
“내 꼬추는 어데 갔노!”
그만 주변이 폭소가 터지고
짓궂은 대원들은 아래돌이를 만지며
짐짓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자연을 흠뻑 들어 마신 대원들은
모두 동심으로 돌아가 다시 박장대소,
저도 그 이야기에 마음껏 웃습니다.
꾸밈없이 물 흐르듯 살아가신
어머니 품 같은 영남알프스
자연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산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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