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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문장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발췌 하였음.
현덕빈(顯德嬪) 을 옛 안산읍(安山邑) 와리산(瓦里山) 에 장사지냈다. 그 지문(誌文)에 이르기를, |
“삼가 상고하건대, 빈(嬪)의 성(姓)은 권씨(權氏) 로서, 먼 조상[遠祖] 김행(金幸) 은 신라(新羅) 의 대성(大姓)이었다. 복주(福州) 를 지키고 있었는데, 고려 태조(高麗太祖) 가 신라 를 공격할 때에 가다가 복주 에 이르니, 행(幸) 이 고을을 가지고 항복하였으므로, 태조 가 말하기를, ‘ 행(幸) 은 가위(可謂) 권도(權道)를 안다 하겠다.’ 하고, 인하여 ‘ 권(權) ’ 이라고 사성(賜姓)하였는데, 벼슬이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이로 인하여 김씨 가 처음으로 권씨 가 되었는데, 대대로 현철(賢哲)한 이가 많이 나서 영성(榮盛)하기가 비할 데 없었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정평(正平) 이니, 증 통정 대부 공조 참의 행 통직랑 판도 정랑 (贈通政大夫工曹參議行通直郞版圖正郞) 이요, 조(祖)의 휘(諱)는 백종(伯宗) 이니, 가선 대부(嘉善大夫) 검교 한성 윤(檢校漢城尹) 으로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에 증직(贈職)되었고, 부(父)의 휘(諱)는 전(專) 이니, 지금 자헌 대부 중추원 사(資憲大夫中樞院使) 가 되었다.
어머니 최씨(崔氏) 는 고려(高麗) 의 대유(大儒) 중서령(中書令) 문헌공(文憲公) 휘(諱) 최충(崔沖) 의 12세 손(孫)인 서운 부정(書雲副正) 휘(諱) 최용(崔鄘) 의 딸이니, 영락(永樂) 무술 3월 임신(壬申)에 빈(嬪)을 홍주(洪州) 합덕현(合德縣) 의 사제(私第)에서 낳았다.
빈(嬪)은 나면서 정숙하고 아름다워 외화(外華)가 보통과 다르고, 말과 행실이 예절에 합하였다. 선덕(宣德) 신해(辛亥)에 뽑혀서 세자궁(世子宮)에 들어와 승휘(承徽) 가 되었고, 얼마 아니 되어 양원(良媛)으로 승격되었다. 정통(正統) 정사(丁巳) 2월에 빈(嬪) 봉씨(奉氏) 가 부덕(不德)함으로 인하여 폐위(廢位)되매, 드디어 책봉(冊封)되어 빈(嬪)이 되었다. 공경히 양궁(兩宮)을 받들매 화(和)한 마음으로 기쁘게 받들고, 좌우(左右)의 잉시(媵侍)들에게는 항상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삼가고 화합하는 미풍을 조성하였다.
신유년 7월 23일 정사에 몸을 풀어서 원손(元孫)이 탄생되니, 양궁(兩宮)께서 매우 기뻐하시고,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서로 축하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날 임금께서 근정전(勤政殿) 에 나아가시어 교서(敎書)를 반강(頒降)하여 나라 안에 대사(大赦)하게 하시고, 또 장차 원손의 탄생한 예(禮)를 거행하려 하시었는데, 이튿날 무오(戊午)에 갑자기 병이 나시어 동궁(東宮) 자선당(資善堂) 에서 운명하셨으니, 춘추(春秋)가 스물 넷이다. 의원이 미처 약을 쓰지 못하였고, 기도(祈禱)도 신명(神明)에 두루 하지 못하여, 양궁께서 슬퍼하며 애석하게 여기시고, 나라 사람들도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아아, 슬프도다. 양궁께서 대공(大功)으로 5일간 복입으셨고, 세자께서는 기복(期服)으로 30일간 복입으셨다. 9월 초7일에 시호(諡號)하기를 현덕(顯德) 이라 하고, 예(禮)를 갖추어 안산군(安山郡) 의 고읍(古邑) 산에 장사하였다. 빈(嬪)은 타고난 성품이 한정(閑靜)하시어 입궁(入宮)하여서도 칭찬이 많아, 능히 동궁(東宮)에 짝이 되어 이 원손(元孫)을 낳으셨으니, 일국(一國)의 경사이었다. 어찌하여 한 병으로 갑자기 고치지 못하게 되었는가. 아아, 슬프도다. 빈(嬪)은 일남 일녀(一男一女)를 낳으셨으니, 여아는 이미 젖을 떼었고, 남아는 곧 원손(元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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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명(銘)에 이르기를, |
“부드럽고 지혜로운 덕(德)과 아름답고 고운 용모가 양궁(兩宮)에게 사랑을 받아, 그 책봉(冊封)하심을 받았고, 의식대로 빈(嬪)의 법도를 닦으시어 미덥게도 원량(元良)의 짝이 되셨도다. 원손(元孫)이 탄생 되어 울음소리 황황(皇皇)하니, 종팽(宗祊)에 경사가 넘쳤고 기쁨이 조야(朝野)에 가득하였는데, 하늘이여, 어찌하여 나이[年]마저 안 주셨나. 자는 듯 세상을 떠나시매 복을 누리지 못하셨도다. 슬픈들 어이하리 말씀이나 돌에 새기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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