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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갈라디아서 5:4-5:15
제 목 :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0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0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0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0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08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0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1. 박해받는 바울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5: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이 박해를 받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참 의미심장한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원래의 바울은 박해를 당하던 사람이 아니라 박해를 가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도를 따르고 예수님의 도를 가르치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잡아 죽이기 위해 동분서주 날뛰던 자였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8:3], ‘사울 (즉 바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사도행전 9:1-2], ‘사울 (즉 바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표현만으로는 잘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화나 드라마를 연상하시면 훨씬 더 실감이 나십니다. 일제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독립군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눈 시뻘겋게 하고 날뛰었던 일제의 앞잡이들을 생각하시면 실감이 나실 것입니다. 또 육이오 전쟁 때 남으로 밀려들어 온 북한군들이 땅 가진 지주들을 찾아내서 무자비하게 총칼로 죽였던 모습들을 생각하시면 실감이 나실 것입니다.
예. 사도들이나 성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은 정말로 무시무시한 사람이었고, 정말로 무지막지한 사람이었습니다. 정말로 잔인무도한 사람이었습니다. 일제 앞잡이 같은 사람이었고, 공산당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사울, 즉 바울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오금이 저릴 정도였습니다. 오죽 바울이 못 되게 굴었으면 [사도행전 9:26], ‘사울 (즉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라고 기록하고 있겠습니까? 예. 사도들과 성도들은 바울의 무자비한 탄압에 치를 떨었을 정도입니다.
그랬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도를 따르고 예수님의 도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박해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여쭈어 보겠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도를 따르고 예수님의 도를 가르치면 자신이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요, 모르고 있었을까요? 당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사도나 성도들은 자신들이 왜 박해를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잘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하는 말, 자신들이 하는 행동에 아무 문제가 없고, 그 어떤 이들에게도 해를 끼친 적이 없는데 왜 박해를 하고, 왜 탄압을 하는지 억울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박해를 가했던 바울은 박해를 하는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어떤 명분으로 박해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그 이유와 명분에 따라 박해를 했고, 또한 자신도 그 이유와 그 명분에 입각해서 박해를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죽을지도 모르는 극심한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 바울은 박해받는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편안한 삶이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부와 명예가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바울은 그 길을 택하지 않고, 자칫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는 박해받는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왜 그 길을 택했을까요?
바울이 그 길을 택하자, 즉 바울이 예수님의 도를 따르고 예수님의 도를 가르치는 길을 택하자 과연 바울의 생각대로 자신에게 온갖 박해와 탄압과 시련이 찾아들었습니다. [사도행전 9: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즉 바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 날’이 며칠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회심을 하고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인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벌써 유대인들은 바울 죽이기에 돌입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바울 죽이기는 바울이 이스라엘 땅이 아닌 이방지역에서 예수님의 도를 가르칠 때에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고비도 아주 여러 차례 있었고, 감옥에 갇힌 때도 아주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방지역에서 바울이 박해를 받으니까 그 박해가 이방인들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방지역에서의 박해도 전부 유대인들의 공모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체로 잘 받아들였습니다. [사도행전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 이방인들은 대체로 바울과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우호적이었습니다. 어떤 이방인들은 바울과 바울의 동역자인 바나바를 그들이 섬기는 헤르메스신과 제우스신으로까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이방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이방인들은 대체로 바울과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방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대체로 바울을 거부했고,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인했습니다. [사도행전 13: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사도행전 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 이방지역에서 바울이 당하는 박해와 탄압과 시련의 배후에는 언제나 유대인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두 번의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에도 유대인들의 바울 죽이기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23:12-14],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여 명이더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지 못해 이를 갈고 있고, 바울을 죽이지 못해 애간장을 태우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이방인들은 바울과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 대체로 우호적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왜 이방인들은 바울과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 대체로 우호적이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이유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는 사람들이 할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소개하는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무슨 일을 하라고 요구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과 은혜로 사람들을 돌봐주시는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선교는 주로 터키, 그리스, 로마지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그들은 수없이 많은 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많은 신을 섬기다보니 그들의 삶이 얼마나 피곤하고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아마 사흘이 멀다 하고 각종 신에게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관리들과 종교인들은 제사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온갖 제물을 수시로 징수하며 백성들의 삶을 고단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소개하는 하나님은 사람에게 특별히 요구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제사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제물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즉 신을 위해 사람이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온갖 종교행위로 힘들어 하는 이방지역 사람들에게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은 참으로 신기한 신이었습니다. 참으로 획기적인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바울과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입니다.
2. 박해의 이유
다음 두 번째 질문입니다. 이방인들은 바울과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 대체로 우호적이었는데 비해 유대인들은 바울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왜 유대인들은 그렇게 바울을 죽이지 못해 안달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울이 율법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율법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 율법을 부인하고 율법을 부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을 유대인인 바울이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바울을 박해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박해를 받는 바울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는 사도와 성도들이 율법을 부인하고, 율법을 부정한다고 생각했기에 과거 그렇게 무자비한 박해를 가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는 이유가 율법 때문이라는 증거가 사도행전 여러 곳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8:12-13],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사도행전 21:28],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즉 유대) 백성과 율법과 이곳 (즉 예루살렘)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사도행전 23:28-29],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즉 바울을) 고발하는지 알고자 하여 그들의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바울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 유대인들이 바울을 박해하고 죽이려는 이유는 바울이 율법을 어기고, 율법을 비방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부인하고 율법을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부인한 바울은 죽어도 마땅한 자라고 유대인들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려도 현실감이 없어서 사태의 심각성을 잘 느끼지 못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깟 율법 좀 부인했다고 사람을 죽이려고 들어?’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혹시 우리나라 헌법 1조가 무엇인지 아시는 분, 계십니까? 우리나라 헌법 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이고, 헌법 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개항으로 이루어진 헌법 1조를 부인하면 어떻게 됩니까? 반역자가 됩니다. 자유민주주주의를 부정하면 반역자가 됩니다. 또 모든 권력의 원천인 국민을 부정하면 반역자가 됩니다. 그래서 얼마 전 끝난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모든 후보자들이 그렇게 국민을 운운했던 것입니다.
바울 당시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과 율법은 우리나라의 헌법 1조와 똑같은 의미였습니다. 이 내용을 우리나라 헌법 표현 형태로 바꾸어본다면 아마 이렇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국가이다. 이스라엘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고, 모든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율법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율법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율법을 어기고 율법을 비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부인하고, 이스라엘을 부정하는 것이고, 율법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에게 바울은 하나님과 국가와 민족을 배신한 반역자이고, 유대인들에게 바울은 죽어 마땅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실제로 하나님을 부인했습니까,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실제로 하나님을 부정했습니까, 부정하지 않았습니까?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말은 바울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도 부인하지 않았고, 율법도 부정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대해 반역한 사실도 전혀 없고, 유대 민족을 배신한 사실도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울 당시 유대인들은 바울이 율법을 부인하고, 율법을 부정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저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국가와 민족에 대해 반역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왜 유대인들이 그랬는지 잘 이해가 안 가시면 지금 우리의 상황을 생각하시면 쉽게 납득하실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는 주일성수와 온전한 십일조가 성도가 행해야 하는 최소한의 의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최소한의 의무라는 그 말을 부인합니다. 여쭈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그 말을 부인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저버린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배신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도에게 의무를 부여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성도가 헌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말을 부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분이 아니라 사람의 행복을 위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는 성탄절과, 부활절과, 추수감사절을 성대하게 보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매일 매일이 성탄절이고, 매일 매일이 부활절이고, 매일 매일이 추수감사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런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부인하고, 성경을 부인하고, 기독교를 부인하고, 교회를 부인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르게 전하고 있고, 바르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대부분의 교회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요? 그들이 보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어기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는 존귀하신 하나님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는 수백 년 동안 축적된 교회의 전통과 질서를 무너뜨리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우리는 기독교 세계에서 축출되어야 하는 자들이고, 교회 세계에서 추방되어야 하는 자들입니다. 예. 오로지 교회의 성장과 부흥, 오로지 교회의 유익과 이익, 오로지 교회의 안녕과 질서만을 생각하는 대부분의 교회 입장에서 보기에 우리는 백해무익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없어져야 하는 존재입니다.
지금 바울의 상황이 이와 똑같은 상황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성도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바르게 따르고 바르게 가르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바르게 알게 된 내용을 바르게 가르치려다 보니까 기존의 그릇된 내용, 기존의 그릇된 방식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결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지적으로 말미암아 바울은 오히려 박해를 당하고, 탄압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는 것입니다. 돌에 맞기까지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3.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믿음으로 사람이 의롭게 된다고만 말하면 되지, 굳이 율법의 행위로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필요가 있나? 유대교의 원리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속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그 시대에 굳이 율법을 운운해서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건드릴 필요가 있나? 목숨까지 내놓을 필요가 있나?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율법 잘 지키면 좋잖아? 율법 잘 지켜서 나쁠 게 뭐야? 율법 잘 지켜서 손해 볼 게 뭐야? 나라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잖아?’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말할 사람이 분명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누룩이라고 표현합니다. [갈라디아서 5: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식으로 좀 더 심하게 이야기 하면 ‘못 된 암 세포 하나가 온 몸에 퍼지느니라’입니다. 위에서 발병한 암 세포 하나가 소장에 가서 붙고, 대장에 가서 붙고, 간에 가서 붙습니다. 폐에 가서 붙고, 뇌에 가서 붙어서 결국 건강한 사람을 죽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누룩, 암 세포가 누구입니까? 바로 유대 율법주의자들입니다. 할례를 행해야 비로소 사람이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해야 사람이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해야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와 징계를 받는다고 주장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을 향해 바울은 더 심한 말을 쏟아냅니다. [갈라디아서 5:10],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심판은 하나님의 저주, 하나님의 징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저주하시고, 징계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심판은 유대 율법주의자 너희들은 죄의 원리에 사로잡힌 존재, 즉 죄인이라는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하나님의 결정입니다. 예.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원리가 아닌 죄의 원리를 따르는 죄의 종이라고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또, [갈라디아서 5: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 속에는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향한 조롱과 조소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남성 성기의 껍데기 일부를 잘라내는 종교행위입니다. 그런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에게 바울은 말합니다. ‘그깟 껍데기 조금 잘라낸다고 사람이 의롭게 되겠냐? 아예 통째로 잘라버리지 그래? 아예 통째로 잘라버리는 정성 정도는 보여야 비로소 의로운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니야?’라고 조롱하고, 조소하고, 비웃는 것입니다.
예. 바울은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조금도 타협할 뜻이 없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해야 사람이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에 조금도 양보할 뜻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오직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 곱하기 이는 언제나 사입니다. 이 곱하기 이가 결코 육이 될 수 없습니다. 이 곱하기 이가 육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수용하는 순간 이 세상은 온갖 혼란 가운데로 빠져들게 됩니다.
똑같은 이치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결코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을 다 지켜 행한다고 해서 사람이 결코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것이 이 곱하기 이는 사입니다. 그런데 율법으로, 율법의 행위로 사람이 의롭게 될 수 있다고 타협하면 이 곱하기 이는 육이라고 동조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바울에게는 한 치의 타협,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것입니다.
4. 율법의 정신
그런데 왜 율법으로는 사람이 의롭게 될 수 없는 것일까요? 솔직히 말해서 율법 잘 지키면 좋지 않습니까? 율법 잘 지켜서 나쁠 게 무엇입니까? 율법 잘 지켜서 손해 볼 게 무엇입니까? 나라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모든 사람이 모든 율법 조항을 온전히 지킨다면, 모든 사람이 모든 율법 조항대로 행하며 살아간다면 세상이 아름다워지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행복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는 법치주의 국가입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한 권리와 평등한 의무와 평등한 책임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법이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적용되고 평등하게 집행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며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들호 변호사 같은 사람이 수십 명, 수백 명씩 있어서 모든 국민이 법 앞에 아무 차별 없는 세상을 정말로 만들어 낸다면 세상은 아름다워지지 않겠습니까? 세상은 행복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해지고, 모든 사람이 법을 온전히 지킨다고 해서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진짜로 완벽하게 율법을 온전히 행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결코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모든 사람이 진짜로 완벽하게 율법을 온전히 준행하며 살아간다고 해서 세상은 아름다워지지 않습니다. 세상은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첫 번째 이유는 율법을 지켜야 하는 법 조항으로 이해하면 자신이 율법을 지켰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자랑이 되고, 자신의 의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킨 것입니다. 내가 행한 것입니다. ‘그 어려운 것을 또 해냈지 말입니다. 내가.’라고 말하며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감동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의롭지 못한 사람이 됩니다. 악인이 됩니다. 상종하지 말아야 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 율법을 법 조항으로 이해하면 지키는 사람과 지키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 구별과 차별이 발생합니다. 구별과 차별이 있는 세상은 결코 아름다운 세상, 결코 행복한 세상이 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율법을 지켜야 하는 법 조항으로 이해하면 그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율법을 다 지켜 행했다고 해서 내가 사랑을 베푼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율법을 온전히 지켰을 뿐입니다. 내가 율법을 다 지켜 행했다고 해서 내가 선한 일, 착한 일, 칭찬받을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율법을 온전히 지켰을 뿐입니다. 내가 율법을 다 지켜 행했다고 해서 내가 의로운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율법을 온전히 지켰을 뿐입니다.
내가 율법을 온전히 지켰다는 것만으로 끝나지 세상이 아름다워지는데 내가 도움을 준 것이 아닙니다. 내가 율법을 온전히 지켰다는 것만으로 끝나지 세상이 행복해지는데 내가 역할을 한 것이 아닙니다. 즉 사랑이 없으면 율법 자체는 무의미 한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율법 자체는 무가치 한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했다고 해서 의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사람이 율법을 온전히 행했다고 해서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율법보다 우선 하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 하나님의 가치와 원리, 즉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의 정신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에서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에서 도둑질하지 말라고,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라고,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 전부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시기에 앞서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하셨고,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고 하셨고, 안식일을 기억하며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알라고 말씀하십니까? 모든 사랑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저절로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 율법에 담긴 뜻, 즉 율법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사랑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율법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율법에 담긴 사랑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랑을 행하는 대신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데만 애를 썼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아름다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의 준수 여부를 기준 삼아 더 심한 구별과 더 심한 차별을 만들어 냈고, 스스로 불행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래서 오신 분이 누구십니까? 그래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율법에 담긴 뜻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셨고, 또 어떻게 사랑을 행해야 하는 것인지 본을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직접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의 예수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입니다. 또 몸소 죽으시며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사랑을 알고, 사랑을 이해하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주셨기에 은혜의 예수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립할 수 있는 말이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5:4-6]입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의의 소망은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예. 하나님의 소망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라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의의 소망, 하나님의 소망, 즉 사랑을 우리가 기다린다고 말합니다. 왜 기다립니까? 주시는 분이 있기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즉 사랑은 내가 노력해서 이루는 게 아닙니다. 사랑은 내가 싸워서 쟁취하는 게 아닙니다. 주시는 분이 있고, 우리는 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성령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사랑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5.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라고 권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입었으나’라고 표현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부른 게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불러주셨고, 하나님께서 찾아주신 것입니다. 즉 내가 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이 참으로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유자로 세워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자유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자유자가 된 우리에게 바울은 다시 뭐가 되라고 말합니까? 다시 종이 되라고 말합니다. 다시 종노릇 하라고 말합니다. 기껏 자유자로 만들어 놓고 다시 종이 되라고 하니, 다시 종노릇 하라고 하니 이게 얼마나 웃긴 표현입니까?
그런데 무슨 종입니까? 사랑의 종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베푸는 종입니다. 오로지 자신의 유익과 이익만을 추구하던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 이제는 온전한 자유자가 되었으니 이제 서로가 서로에게 유익과 이익이 되는 삶을 살아달라고 바울은 권면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의 종이 되는 세상,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의 노예가 되는 세상,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 때 이루셨던 세상입니다. 그 세상이 성도가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 게 어떤 것일까요? 어떤 삶이 서로가 사로에게 종노릇 하는 삶일까요? 그런 삶이 결코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삶이 결코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얼마 전에 태양의 후예라는 드라마가 아주 인기리에, 아주 성황리에 끝을 맺었습니다. 이틀 전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태양의 후예가 TV 드라마 부문 대상을 받았고, 송중기와 송혜교는 남녀 최고 인기상을 받았습니다.
유시진 대위와 강모연 선생의 달달한 러브스토리, 서 상사와 윤 중위의 애끓는 러브스토리, 초딩 의사 선생과 시크한 간호사 선생의 러브스토리 같지 않은 러브스토리가 모두 해피엔딩으로 끝나서 참으로 보기 좋았습니다. 그런데 태양의 후예, 이 드라마의 주제는 과연 무엇일까요? 작가는 이 드라마를 통해서 과연 어떤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었을까요? 그냥 단순히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드라마는 아니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두 장면에서 아주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첫 번째 장면입니다. 강모연 선생이 파티마라는 여자 아이에게 학비를 대줘서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후원자가 되어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유시진 대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유시진 대위는, ‘모든 사람을 다 도와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도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이때 강모연 선생이 하는 말이 저에게 아주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도와줄 수 있을 때 도와주는 것뿐이에요. 알아요. 제가 이런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 잘 알아요. 그러나 세상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파티마에 대하여 세상은 바뀌겠지요? 그럼 된 거에요.’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너무 너무 멋있는 말입니다. 기독교 원리에 아주 정확히 일치하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세상을 바꾸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종교가 아닙니다. 정치를 바꾸고, 경제를 바꾸고, 사회를 바꾸고, 문화를 바꾸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종교입니다. 무엇으로 바꾸고, 무엇으로 변화시킵니까? 바로 사랑으로 바꾸고,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눈에, 그 사람의 마음에 세상이 달라지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강모연 선생이 파티마라는 여자 아이에 대해서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강모연 선생이 법을 어긴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강모연 선생이 잘못을 범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 당시로 표현하자면 강모연 선생은 율법의 조항을 전혀 어기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조항을 어기지 않았기 때문에 율법대로 산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강모연 선생이 의로워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강모연 선생이 의로워진 이유는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파티마라는 여자 아이에게 사랑으로 종노릇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 사랑으로 종노릇 하는 일은 아주 조그마한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태양의 후예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던 두 번째 장면입니다. 강모연 선생이 죽은 줄로 알고 있던 유시진 대위의 기일에 맞춰 제사를 드리기 위해 알바니아로 떠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강모연 선생이 출국하는 길에 입국 금지 조치로 공항에 억류되어 있는 다니엘을 만나게 되고, 곧이어 다니엘의 인터뷰가 방송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장면도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 인터뷰 내용이 제게 아주 진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세상에는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보다 제약 회사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다국적 제약 회사가 자신들의 유익과 이익을 위해 독점적으로 약을 생산하고 독점적으로 약을 판매하기 때문입니다.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약이 없어서, 약이 비싸서 사람이 죽어갑니다. 다국적 제약 회사는 즉시 특허권을 포기하고 약이 양산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게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이런 취지의 인터뷰였습니다.
여쭈어 보겠습니다. 다국적 제약회사가 법을 어겼습니까, 법을 어기지 않았습니까? 법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특허권을 보유하고 있고, 그래서 법의 보호를 받으며 정당하게 생산해서 정당하게 공급하고 정당하게 이익을 창출했습니다. 그들의 행동에는 법적으로 아무 문제, 아무 하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어갑니다. 그들이 약만 풀면 사람을 살릴 수 있는데 그들이 침묵하고 있기에, 그들이 사랑을 베풀지 않기에 귀한 생명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법을 준수했지만 그 법이 사람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초반부에 바울은 현실적으로 편안한 삶이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부와 명예가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택하지 않고, 자칫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는 박해받는 길을 택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율법의 길을 택하지 않고 복음의 길을 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율법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기에 세상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러나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기에 세상도 변화시킵니다. 복음으로 변화된 세상, 사랑으로 변화된 세상, 그 세상이 어디입니까? 그 세상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 세상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지금 이곳입니다. 천국의 삶을 누리시고, 천국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 가시는 우리 다누림의 성도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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