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오 왕조(939∼968) → 딘 왕조 → 레 왕조(980∼1009) → 리 왕조(1009∼1225) → 쩐 왕조(1225∼1400) → 레 왕조(1428∼1789) → 응우옌 왕조(1802∼1945)
<동아시아사. 비상. 2015. 63쪽>
베트남은 중국에서 독립한 후 11세기에 율령을 반포하였다. 그리고 공자와 그 제자를 모신 문묘를 세우고 학교를 두어 유교적인 인재를 양성하였다. 베트남은 과거제를 부정기적으로 실시하였고, 합격자 수도 적어 관료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았다.
유교와 율령에 기초한 통치 체제는 동아시아 각국의 중앙 집권 국가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동아시아 각국은 관습과 전통적인 제도와 조화를 이루며 독자적으로 운영하였다. 이러한 율령과 유교에 바탕을 둔 통치 체제는 중국의 송, 명, 청뿐 아니라, 한반도의 조선, 메이지 시대의 일본,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에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 베트남에서는 1070년부터 문묘를 세워 계절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리고 문묘에 학교를 세워 왕족과 고급 관리의 자제에게 유학을 가르쳤다.
<동아시아사. 천재. 2015. 101쪽>
베트남의 리 왕조에서도 과거제를 시행하였으나 그 비중은 크지 않았다.
<동아시아사. 비상. 2015. 68쪽>
인도나 중앙아시아의 승려들이 바닷길을 통해 베트남 북부에 들어와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하였다. 이후 불교는 각 왕조의 후원을 받아 발전하였으며, 12세기 중엽 리 왕조 시기에 대중화되었고 지역적인 관습과 결합하였다. 특히, 마을의 수호신과 정령에 대한 신앙 및 숭배 의식과 융합하여 발전하였다.
<동아시아사. 비상. 2015. 84쪽>
베트남은 5대 10국의 분열기에 응오꾸옌이 출현하여 천여 년 간 이어졌던 중국 지배에서 벗어나 응오 왕조(939∼968)를 세웠다. 응오 왕조 이후 등장한 딘 왕조와 레 왕조 모두 자주성을 드러내며 송에 대항하였지만 건국자 사후 왕위 계승 분쟁으로 단명하였다. 이후 리 왕조(1009∼1225)가 세워져 발전하였다. 리 왕조는 참파는 공략해 남진을 추진하고, 베트남 경략을 도모한 송을 먼저 공격하여 유리한 조건으로 화친하였다. 이후 리 왕조는 남송의 책봉을 받아들였지만 독립을 인정받았다.
<동아시아사. 비상. 2015. 103쪽>
베트남은 한 대에 처음으로 유학이 전래되었다가 15세기 레 왕조가 들어서면서 점차 성리학이 보급되었다. 레 왕조에서는 국자감을 부활시키고 과거 시험으로 명경과를 설치하여 유학에 능통한 관리를 선발하였다. 이후 성리학의 보급에 노력하면서 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과거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불교의 영향 등으로 사회의 지배 이념으로 자리 잡지는 못하였다.
<동아시아사. 비상. 2015. 115쪽>
베트남에서는 15세기 중엽에 레 왕조의 성종이 사서 중심의 성리학 사상을 보급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문묘를 세우고 과거제를 시행하였다. 그리하여 성리학이 지배 이념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으며, 불교의 영향도 이전 시기에 비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 베트남에서는 유교가 들어오기 전까지 남녀를 차별하는 풍속이 없었다. 15세기 이후부터는 유교의 영향 탓에 사내아이의 출산을 더 기뻐하기는 하였지만 남아 선호가 그리 강하지는 않았다. 여자들도 남자들과 거의 동등하게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고, 집안에 남자가 없을 때는 딸이 조상에 대한 제사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상속받았다.
<동아시아사. 비상. 2015. 113쪽>
베트남은 세 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략을 물리치면서 민족의식이 성장해 쯔놈 문자를 공식 문자로 정하고 ‘대월사기’를 편찬하였다.
<동아시아사. 천재. 2015. 95쪽>
몽골군의 세 차례에 걸친 대월 침략도 쩐흥다오의 활약으로 저지되었다. 전쟁 후 쩐 왕조는 더 이상의 전쟁을 피하고자 몽골 제국에 조공 사신을 보내고 포로를 송환하였다.
대월에서는 쯔놈 문학이 유행하고, “대월사기”가 편찬되는 등 민족적 자긍심이 높아졌다.
<동아시아사. 천재. 2015. 121쪽>
대월의 쩐 왕조(1225∼1400)는 몽골의 침략을 물리쳤지만, 이후 전쟁에서 공을 세운 귀족 관료들이 농민의 토지를 빼앗고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면서 많은 폐단이 발생하였다. 그 후 농민과 노비가 봉기하면서 쩐 왕조는 멸망하였고, 대신 호 왕조(1400∼1407)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 때를 노려 명은 대군을 보내 호 왕조를 멸망시키고 베트남을 직접 지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레러이가 10여 년에 걸친 저항 운동 끝에 명군을 물리치고 레 왕조를 세웠다. 레 왕조는 1788년까지 장기간 존속하였다.
<동아시아사. 비상. 2015. 116쪽>
베트남은 15세기 초 영락제 이후 명의 지배에서 벗어나 레 왕조가 세워졌다(1428∼1788).
<동아시아사. 천재. 2015. 142쪽>
베트남에서는 레 왕조가 비교적 장기간 존속하면서 베트남 전통 사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레 왕조는 과거제와 관료제를 도입하여 중앙 집권적 유교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으며, 베트남 중부 지역에서 오랫동안 존속하던 참파를 무너뜨려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이후 남북 분열이 2세기 이상 지속되면서 끊임없는 전쟁과 농민의 저항이 이어졌다.
빈번한 농민 반란과 사회 혼란 속에서, 18세기 후반에 떠이 썬 왕조가 수립되었다가 곧바로 응우옌 왕조로 대체되었다. 응우옌 왕조는 남하하여 오늘날의 베트남과 비슷한 영토를 확보하는 한편, 중국 왕조에 대해 독자성을 유지하려 애썼다. 한과 대결하던 남비엣을 국호로 사용하려 한 것이라든가, 수도 후에에 자금성을 모방한 궁전을 세운 것 등은 그러한 자의식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응우옌 왕조는 건국할 때 도움을 받은 프랑스의 침략으로 19세기 중엽 이후 점차 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 남비엣 : 응우옌 왕조는 초기에 ‘남비엣’을 국호로 사용하려 하였으나, 청이 거부하여 결국 ‘비엣남(베트남)’이라는 국호를 사용하는 것으로 타협하였다.
<동아시아사. 천재. 2015. 145쪽>
상업 : 15세기에 레 왕조가 성립되면서 베트남은 안정을 되찾았다. 이에 수도 탕롱(오늘날의 하노이)이 인구 10만 명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하여 국내 상공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후 19세기 초에 성립된 응우옌 왕조는 수도를 베트남 중부의 후에로 옮겼다.
16∼17세기에 서구의 진출로 이른바 ‘교역의 시대’가 열리자, 중부 해안의 호이안은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각지의 상인이 모여드는 국제도시가 되어 크게 번영하였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이후 이 지역에서의 무역은 크게 위축되었다.
<동아시아사. 천재. 2015. 148쪽>
전통 시대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대체로 인구 증감이 급격하게 나타나고, 인구 밀도도 낮은 편이었다. 이에 비해 인구 밀도가 비교적 높았던 15세기의 베트남(레 왕조)은 사회 안정과 인구 유입으로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후 2세기에 걸친 남북 분열과 계속되는 전쟁, 잇따른 자연재해로 18세기까지는 인구 증가가 정체되었다.
<동아시아사. 비상. 2015. 172쪽>
베트남은 16세기 포르투갈과 무역을 시작한 이래 서양의 각국과 교역하였다. 프랑스가 천주교 신자의 박해를 구실로 침략하자, 베트남은 이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그리고 선교의 자유, 코친차이나 동부 3성과 곤륜도의 할양, 배상금 지급 등의 내용을 포함한 제1차 사이공 조약을 체결(1862)하여 개항하였다.
<동아시아사. 천재. 2015. 176쪽>
베트남은 16세기에 포르투갈인과 무역을 시작한 이후 다른 서양 국가들과도 교역하였다. 19세기에는 프랑스가 베트남의 크리스트교 탄압을 빌미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전쟁에서 패한 베트남은 제1차 사이공 조약(1862)을 맺어 프랑스에게 선교의 자유, 코친차이나 동부 3성의 할양, 다낭 등 세 항구의 개항, 배상금 지불 등을 약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