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대한 역사왜곡
일본군 위안부 문제, 식민지 말기,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 규모가 가장 컸던 4년 동안 일시적으로 운영되었던 일본군 제도였다. 이 세상 모든 전쟁에서 위안부는 필수 요소였다. 일본군은 위안소만 운영했고, 위안부 조달은 민간업자들이 담당했다. 일본군 헌병이나 경찰이 위안부를 모집했다는 증거는 없다. 6.25 때 한국군 역시 일본군 위안소 시스템을 그대로 본떠서 한국군 위안소를 운영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전 사회적으로 공식화하여 홍등가 지역을 지정해주고 치안과 질병을 관리해주었다. 이는 자연 현상이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을 문제로 만들어낸 존재들이 바로 주사파, 대한민국을 찍어내리는 도끼족인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의 40%는 일본 여성이었다. 그다음이 중국이고 그다음을 조선, 버마,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피점령국들이 채웠다. 일본 여성 다음에 동참한 여성이 중국 여성, 1940년이었다. 조선여성은 1941년 처음으로 20명 단위로 위안소에 들어왔다. 조선 여성은 통상 2년간 일본군 위안소에서 생활하다 돈을 벌어 귀국했다. 위안부의 전형인 문옥주가 자서전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의 실체를 밝혔다. 한 여성은 일본군 병사의 애인이 되었고, 애인을 잊지 않기 위해 일본군 병사의 아이까지 잉태해 대구에 와서 잘 키웠다. 문옥주는 죽기 3년 전까지도 일본군 병사가 그리워 눈물지었고, 두둑한 팁을 받아 대구 중심가에서 부자로 떵떵거리고 살았다. 그동안 주사파 도끼족들에 확산시킨 위안부 신세와는 정반대가 아니던가? 정대협의 주장과 당사자였던 문옥주의 자서전 내용 중 어느 말이 맞는가?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군 위안부 시스템을 그대로 본떠서 설치했던 홍등가, 혐오의 공간이 아니다. 여타의 여성들에 대한 치안과 정조를 지켜주는 보호막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확산되고 있는 성범죄와 살인범죄의 상당 부분은 홍등가의 부재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강제징용? 강제징용 문제도 주사파 도끼족들이 사회여론을 조작하기 위해 위안부 문제와 함께 창조해낸 모략물이다. 1965년 6월 22일 체결된 '한일 청구권 협정' 제2조 및 제3조에는 일본 통치 시대에 발생한 모든 피해에 대한 보상은 이 협정으로 모두 해결된 것이며 더 이상의 개별적 집단적 보상요구를 하지 않기로 한다는 것이 명시돼 있다. 이에 따라 노무현 정부는 강제징용자의 배상을 대한민국 국가가 지급하기로 정책을 세우고 2007년부터 2015년까지 청구자 72,631명에 대해 6,184억을 지급했다. 1인당 평균 810만 원을 배상한 것이다.
그런데 왜 또 일본에 징징거리는가? 문제는 이명박이었다. 이명박의 출생지는 오사카이지만 1964년 반일운동인 6.3사태의 주모자가 되었고, 2012년에는 돌출적으로 독도를 방문해 일본 천황이 직접 사과하라는 주장을 하여 데모 근성을 또 한 번 과시했다. 그야말로 체신 없는 행동을 한 것이다. 그래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이춘식 등이 1997년 일본 기업을 상대로 오사카 재판소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가 2003년에 기각당했다. 2005년, 국내 법원에 같은 소송을 냈다. 1심과 2심은 모두 이 청구를 기각했다. 이 기각된 것을 대법원장 김명수와 대법관 김능환이 2012년 5월, 전격적으로 뒤집어 파기환송시켰다. 다시 5년에 걸쳐 2심이 열리고 3심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의 판결을 확정했고, 이에 일본을 자극하기 위해 한국에 투자한 일본 기업의 자산을 강제집행하는 절차를 확정했다. 이에 일본이 무역 보복에 나섰고 GSOMIA 군사정보협정을 파기할 것을 선언했다. 이는 순전히 북에 충성하는 문재인과 한패가 되어 움직이는 김일성 추종 판사들의 만행일 뿐 대한민국 국민의 뜻이 아닐 것이다. 문재인은 일본을 자극하기 위해 2019년 8월 25일, 매우 유치한 쇼를 벌였다. 이른바 '독도방어 훈련', 7,600톤급의 세종대왕함이 처음으로 동원됐고, 울릉도에는 특전사 부대가 배치됐다. 해군 및 해경 함정 10여 척, F-15 등 전투기 10여 대를 동원해 일본을 자극했다. 김정은의 화력쇼를 모방한 것이었다. 이에 미국 국무부가 화를 내며 문재인에 경고하면서 최후통첩을 보냈다. "한국이 최근 실시한 독도 방어훈련은 한·일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본과 한국의 최근 갈등을 생각하면 지난 25~26일 실시된 한국 독도방어 훈련의 타이밍, 메시지, 규모 등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비생산적이다. 독도는 무인도(리앙쿠르트)다. 문정부는 지소미아가 종료되는 11월 22일까지 원상복구하기를 바란다." 강제징용자 에 대한 돌출적 판결과 일본기업체 재산에 대한 강제집행 행위도 문재인이 주도한 것이고, 독도를 가지고 장난질친 것도 문재인의 반국가 소행이었던 것이다. 그 피해를 고스란히 국민과 대한민국이 본 것이다.
독도를 실효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도 실용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바위 위에서 장기간 생활하는 국민의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독도라는 바위가 귀중한가 그 사람의 일생과 삶의 질이 귀중한가? 독도가 우리에게 지금 무엇을 주고 있고 미래에 무엇을 줄 것인가? 이제까지 독도는 김일성주의자와 철 지난 국수주의자들이 일본을 자극하는 데에만 악용돼왔다. 일본을 자극하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가? 잃는 것뿐이다. 미래가 생산할 양국 공동의 시너지를 소멸시킬 뿐이다. 또한 독도에 국민을 상주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대한민국이 얼마나 인권을 경시하고 있는가에 대한 부끄러운 상징이 될 것이다.
독도 수역은 1999년 1월, 이미 신한일어업협정으로 한·일 공동수역이 됐고, 그로 인해 우리는 이미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하루아침에 쌍끌이 어선들을 포함해 3,000여 척의 어선들이 폐업을 했고 어구 생산업체들이 망연자실 직업을 잃었다. 공동수역 안에 있는 두 개의 바위가 왜 두 나라 발전에 걸림돌이 되어야 하나? 독도 수역뿐만 아니라 독도까지 공동 관리하여 거기에 근사한 시설을 만들어 한.일 간 열리는 세미나 등 공동행사들을 유치하여 교류와 만남의 공간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일 것이다. 천년만년, 일본은 자기 땅이라 주장하고 우리는 우리 땅이라고만 하면, 거기에서 무엇이 나오는가? 한 단계 더 나아가 미국을 유치하여, 한.미.일 문화교류의 공간으로 승화시키면, 안보 체제의 밀접화에도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교수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세미나에 참석하고, 일본사람들이 한국에 오지 않고라도 독도에서 세미나를 열 수 있고, 한.미.일 안보회의도 독도에서 열릴 수 있을 것이다. 독도 활용에 대한 신사고들이 많이 나와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욱일기는 일본의 것이다. 우리가 참견할 문제가 아니다. 이 또한 쌈 걸기, 찜짜붙기의 수단일 뿐이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일본의 문제다. 여기에 이장된 7명의 A급 전범은 미국 침략에 앞장섰던 일본의 우두머리들이었다. 미국이 가만있는데, 중국이 침묵하고 있는데, 가장 많은 피해를 본 필리핀까지 침묵하고 있는데 왜 유독 나설 자격조차 없는 한국인들만 나서서 소란을 피우는가? 이것이야말로 앉을 자리 설 자리 분수를 모르고, 체신만 깎는 행동이 아니겠는가?
'일제 강점'이라는 단어도 누워서 침 뱉는 자기 비하의 표현이며 사리에 맞지 않는 표현이다. '강점'이라는 말은 무력 충돌 즉 전쟁을 통해 강제로 점령당했다는 뜻이다. 독일군대가 나폴레옹 군대에 패해서 독일이 프랑스에 점령된 것은 강점이라 표현할 수 있지만, 독일은 그런 쪽팔리는 자학적 언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독일은 패전국이었지만, 조선은 일본과 싸우지도 않고 왕이 왕실의 안전을 담보로 하여 일본에 넘겨졌던 존재다.
일본은 '조선인구 90%를 노예로 학대하고 미개한 상태로 방치하는 조선 왕정 시스템'을 붕괴시켰다. 조선 백성을 교육시켜 일본시민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동등한 기회를 주었다. 평양과 신의주 서울 거리를 일본의 도쿄 거리와 유사하게 현대화시켰고, 산업화시켰다. 서양 열강들의 식민정책과 일본의 조선 정책은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서양 열강은 식민지를 개화시키고 문화의 동질성을 추구하는 대가로 많은 식량과 자원을 취했지만 일본은 '내선일체' 라는 모토를 내걸고 동질화와 동등화의 정책을 추구했다. 일본이 서구 열강에 비해 달랐던 것은 조선의 일본화였다. 마치 지금의 하와이가 미국의 주인 것처럼. 오사카 현이 일본의 땅인 것처럼, 조선도 일본의 땅으로 흡입한 것이다. 단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일시적 신분 차이가 있었던 것은 환경 여건과 개인 능력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본에서 출세한 조선인들이 매우 많았고, 해방 후 민주주의 국가를 경영할 공무원 역시 일본에서 교육받고 출세했던 사람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게 짐 지던 사람이 갑자기 장관을 할 수는 없는 일 아니 겠는가?
식민지 정책에서 일본이 서양의 열강들과 달랐던 것은 무엇이고, 무엇 때문에 달랐는가? 1853년 7월 8일, 미국 동인도 함대 사령관 페리 제독이 도쿄만 요코스카 앞바다에 증기선 2척과 범선 2척을 이끌고 나타나 일본에 개항을 요구했다. 선진국의 기술능력에 압도당한 일본인들은 개항을하여 서구문물을 열심히 배워 근대화에 성공했지만, 조선은 개항을 끝까지 거부해 일본에 흡수됐다. 이후 일본은 영국, 네덜란드 등에도 개항하여 유학생들을 보내고, 견학팀을 보냈다.
1835년에 태어난 후쿠자와 유키치는 1861년 유럽을 1년간 견학했고, 미국의 물질문명에 압도당했다. 그는 돌아와 1866년 [서양사정]이라는 제목으로 영국과 미국의 역사, 정치, 조세, 화폐, 기업, 외교, 군사, 교육제도, 도서관, 신문, 병원 등 많은 분야를 소개해 일본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1872년에는 [학문의 권장]이라는 책을 써서 370만 부나 읽혔다한다. 이때 조선에는 글도 없었고 인쇄기도 없었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아래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 “개인의 독립 없이는 국가의 독립 없고, 개인의 독립은 학문에서 나온다. 모든 인권은 평등하다.” 는 요지의 책이었다. 그는 해외 유학파들을 이끌고 옥스포드 영영사전을 영-한문사전으로 전환했다. 이 영한문 사전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도 없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덕분이다. 일본의 의식을 일깨운 후쿠자와는 일본을 영국이나 미국처럼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터를 잡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후 1840년에 태어난 시부사와 에이치는 '일본식 자본주의'의 창시자가 되었다. 영국과 미국 등 서양 선진국들에서는 기업의 목표가 '이윤극대화'였다. 하지만 시부사와 에이치는 '일본의 모든 기업은 주관을 공자의 도덕율 아래서 두라"고 가르쳤고, 이 도덕적 자본주의가 오늘날 일본을 산업계의 1등국이 되게 했다. 후쿠자와는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태어났다는 미국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을 전파했고, 시부사와 에이치는 도덕율을 국민정신으로 계몽했다. 이 시대의 조선에서는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강화도령이 강화에서 돌아와 철종이 되었다.
오늘날 일본이 산업계의 일등국인 것도 사실이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깔끔한 환경과 정중한 매너를 가진 국민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도 것도 사실이다. 이는 후쿠자와 유키치와 시부사와 에이치가 선도한 결과라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1983년부터 2023년까지 40년 동안 일본은행권 최고액인 1만엔권에 후쿠자와 유키치의 초상이 있었고, 2024년부터는 시부사와 에이치 초상화가 대신한다. 이런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고, 무조건 '일본은 원수다'하고 감정적으로만 나가는 것은 본인의 발전이나 나라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제 강점'이라는 고착된 언어, 이는 의식적으로 지워야 할 자기 비하, 국가비하의 쪽팔리는 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