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속의 얼굴들
서울의 아침은 언제나 바빴다. 해가 뜨기도 전에 거리는 출근길을 재촉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그들이 향하는 곳은 언제나 똑같았다. 지하철역. 회색빛 도시를 누비는 거대한 철마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실어 나르며 하루를 시작했다.
김진수, 29세, 마케팅 회사의 대리. 그도 어김없이 그 거대한 인파 속에 있었다. 2호선을 타고 강남으로 출근하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그는 지하철역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시계를 확인했다. “8시 12분. 8시 30분까지 회사 도착, 가능하겠지?” 그는 자신을 재촉하며 신용카드를 단말기에 찍고, 사람들 틈에 끼어들었다.
지하철은 이미 만원이었다. 몸이 겨우 끼어들 정도로 빽빽하게 찬 사람들. 누구 하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진수는 한 손으로 가방을 꽉 쥐고, 다른 손으로는 천장 손잡이를 겨우 붙잡았다. 문이 닫히며 열차는 삐걱거렸다. 그의 몸은 다른 사람들과 엉켜 있었다.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그저 버텨야 하는 상황이었다.
열차가 속도를 올리며 출발하자마자 진수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지하철 안의 공기는 무겁고 답답했다. 사람들의 옷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 가벼운 땀내, 그리고 아침부터 먹었을 법한 김밥과 커피의 흔적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마스크 너머로 들이쉬는 공기가 차갑지 않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 출근길은 늘 이랬다. 짜증나고, 숨이 막힐 듯한 답답함 속에서 또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여자는 조용히 휴대폰을 보고 있었고, 옆에 있는 남자는 이어폰을 끼고 고개를 떨군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모두가 같은 공간에 있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각자의 피곤함과 고통을 묵묵히 견디며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을 뿐이었다.
열차는 을지로입구역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잔뜩 내렸지만, 그 자리를 채우는 사람들로 인해 진수는 여전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오늘도 지옥이군.” 그는 속으로 씁쓸하게 생각했다.
진수는 지하철에서의 시간을 늘 생각했다.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매일 아침 서로 부딪치며 출근해야 하는지, 왜 이 도시에서는 좀 더 인간답게 살 수 없는지. 지하철은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삶을 압축해 놓은 공간 같았다. 사람들이 불편하게 몸을 부딪치며, 각자의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이곳에서 느껴지는 감정들은 고스란히 삶의 단면이었다.
진수는 그 공간에서 외로움을 느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지만, 누구 하나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 이 거대한 도시 속에서 그는 그저 하나의 얼굴일 뿐이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그저 출근길에 스쳐가는 익명의 얼굴. 이 도시에서는 모두가 그런 존재였다.
“오늘도 회사에서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진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매일 반복되는 보고서와 회의,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업무들. 그는 피로감에 젖어 있었다. 출퇴근 시간에 이렇게 고통을 견디며 도착하는 회사는 그에게 더 이상 의미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저 살아가기 위해 다녀야 하는 곳일 뿐이었다.
열차가 다시 출발하며 진수는 몸을 살짝 뒤로 젖혔다. 그때 그의 등 뒤에 누군가 툭 부딪쳤다. “죄송합니다.”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수는 고개를 돌려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딪치는 일은 이 지하철에서 흔한 일이었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나만 그런 건가? 아니, 다들 이렇게 힘든 거겠지.” 그는 스스로에게 위로를 건넸다. 모두가 같은 상황이라면 그 고통도 덜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뿐, 곧 다시 무력감이 밀려왔다.
열차는 사당역을 지나고 있었다. 출근길이 절정에 달하는 시간이었다. 진수는 어느새 어깨가 결리고, 다리에는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40분간 서서 가는 건 꽤나 고된 일이었다. 지하철에서의 시간은 늘 길게 느껴졌다. 주변의 얼굴들이 한없이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그 피로를 티 내지 않으려는 고요한 침묵. 그게 더 가혹해 보였다.
진수는 문득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토록 많은 시간을 출퇴근에 쓰고, 회사에서 죽어라 일해도 남는 것은 무엇인가? 승진? 연봉 인상? 아니면 그저 또 다른 내일? 그는 자신의 삶이 그저 돌아가는 기계의 톱니바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의 시선이 앞자리에 앉아 있는 한 노인을 향했다. 그 노인은 신문을 읽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진수는 그 노인의 주름진 손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 노인도 한때는 나처럼 지하철을 타고 출근했겠지.” 그는 시간의 흐름이 무서웠다. 자신도 언젠가 그 노인처럼 될까 봐. 젊음을 다 바쳐 일하고 나면, 남는 건 결국 지하철에 앉아 하루를 보내는 노인의 모습일까.
열차가 강남역에 도착할 때가 되었다. 진수는 한숨을 내쉬며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은 일제히 내렸다. 마치 길고 긴 전쟁이 끝난 듯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해방도 잠시, 진수는 다시 회색빛 거리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퇴근 시간. 진수는 아침과 똑같은 풍경 속으로 다시 들어섰다. 지하철은 여전히 만원이었고, 그는 또다시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출근과 퇴근의 반복. 그 속에서 그는 언제쯤 이 무의미한 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지하철 안에서의 그의 하루는 그렇게 반복되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도 서로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자신만의 목적지로 향하는 지하철 속의 풍경. 그 속에서 진수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지 계속해서 묻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