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의난(永嘉之亂, 307~312)으로 요서(遼西)와 몽골(蒙古)에서 살던 북방민족(北方民族)이 중원(中原)으로 들어가고 중국 동북지역에 공백(空白)이 생겼으므로 고구려가 패권을 장악했다. 수나라(隋) 중원 통일 후 수나라에 맞설 수 있는 나라는 고구려뿐 이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영양왕 9년(598)>에 “임금이 말갈군 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공했으나, 영주총관 위충에게 패했다. 수문제가 소식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며 한왕 양과 왕세적 등을 원수로 삼아 수군과 육군 30만으로 고구려를 침략했다.”[1]라고 적혀 있다. 두 나라 사이 패권싸움은 불가피해진 것이다.
『자치통감』<양황제상지하 대업 8년(612)>에는 수양제(隋煬帝)의 고구려 침공이 자세히 적혀 있다. 『자치통감』은 고구려를 고려라 했는데, 고구려 당시에도 고려라고도 불렀다. 이하 인용에서 표기를 생략한 것은 모두『자치통감』기록이다. 수양제는 고구려 정벌을 위해 탁군(涿郡, 북경)을 전진기지 삼아 대규모 병력을 차출하고, 강남에서 생산된 식량을 대운하(大運河)를 통해 탁군으로 운송하는 등 국력을 총동원해 전쟁을 준비했다.
“(봄 정월에) 병력은 1,133,800명이지만 2백만 대군이라 공표했다. 거기에다 수송을 담당하는 보급부대가 두 배나 더 있었다.”[2] 말하자면 대략 3백만 대군이 동원되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믿지 않으려는 학자가 많을 정도로 엄청난데 숫자가 너무 구체적이어서 믿지 않기도 어렵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보장왕 27년(668)>에 “고구려 5부, 176성, 69만여 호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만들었다.”[3] 했으므로 1호를 5명으로 계산한다 해도 얼추 고구려 전 국민 숫자와 비슷한 병력이다.
“황제가 직접 각 군 지휘관을 임명했는데 군마다 대장(사령관)과 아장(부사령관) 각 1명과 기병 40대를 두었다. 한 대를 100명으로 편성하고, 10대가 1단을 이루었다. 보병은 80대였는데, 4개 단으로 나누어 각각 단마다 편장 한 명씩을 두었다. 단마다 갑옷과 투구 끈 그리고 깃발 색깔을 서로 다르게 했다.”[4]
“계미일에 제1군이 출발했으며, 매일 1군씩 출발하되, 군과 군 사이는 40리(약 16km) 간격을 유지 시켰다. 각 군이 연속 출발하여 40일 만에 출발이 끝났다. 부대와 부대의 선두와 후미가 서로 연결되고, 북소리와 나팔소리가 연이어 들렸으며, 부대 깃발이 960리나 길게 뻗쳤다.”[5] 대규모 부대가 40일에 걸쳐서 요동(遼東)으로 출발했는데 길이가 약 400km에 달했다는 것이다.
“3월 계사일에 황제가 부대를 지휘하여 요수(요하)에 도착했다. 부대가 강변에 집결하여 큰 진을 구축했다. 고려군이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방어했으므로 수나라군은 건널 수 없었다.”[6]
“황제가 공부상서 우문개에게 부교[7] 셋을 만들라 명했다. 부교가 완성되어 연결했으나 길이가 1장(3m) 정도 짧아 건너편에 닿지 않았다. 기회를 틈타 고려군이 집중공격했다. 수나라군 중 날쌔고 용맹한 자들이 물속에 뛰어들어 싸웠으나 고려군이 높은 곳에서 공격하므로 언덕을 오르지 못했고 많은 병사가 죽었다.”[8]
“(여름 5월에 수나라 장수들이 동쪽으로 진군하려 할 때 황제가 친히 경계하여 말하기를) ‘각 부대는 진격하거나 후퇴할 때 반드시 먼저 보고하고 내 지시를 기다릴 것이며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했다. 고려군은 나가 싸우면 불리하다고 생각해 성을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았다. 황제가 명령해 성을 공격하게 하고, 또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고려군이 항복하면 받아들일 것이며, 병사들이 함부로 방종하게 행동하지 못하게 했다. 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고려군은 항복하겠다고 했지만, 수나라 장수들은 황제 명령 때문에 적절히 조치할 수 없었고 먼저 황제에게 보고를 올린 다음 명령을 기다려야 했다. 황제 명령이 떨어질 즈음이면 고려군이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전투태세를 갖추고 나와서 항거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 반복되었지만, 황제는 끝내 알아채지 못했고 요동성은 오랜 공격에도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9]
전쟁이 길어지자 수양제는 대군으로 요동성을 포위한 채 정예병 30만을 차출해 별동대를 편성하여 평양성을 직접 공격해 고구려의 항복을 받아 내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6월에) 좌익위대장군 우문술은 부여도로 출동하고,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은 낙랑도로 출동하고, 좌효위대장군 형원항은 요동도로 출동하고, 우익위대장군 설세웅은 옥저도로 출동하고, 우둔위장군 신세웅은 현도도로 출동하고, 우어위장군 장근은 양평도로 출동하고, 우무후장군 조효재는 갈석도로 출동하고, 탁군태수검교좌무위장군 최홍승은 수성도로 출동하고, 검교우어위호분낭장 위문승은 증지도로 출동하여 다 함께 압록강 서쪽 강변에서 집결하기로 약속했다.[10]
우문술 등은 부대가 노하(강 이름)와 회원(지명) 두 지역에 이르자 병사와 말에게 각각 100일 먹을 식량과 사료를 나누어 주고, 또한 갑옷, 짧은 창, 긴 창, 옷감, 전투 장비, 장막 등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하여 병사 한 사람마다 3섬 이상 무거운 짐을 지게 되어,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문술은 병사들에게 ‘도중에 식량을 버리는 자는 참수한다’고 강력한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장막 밑에 구덩이를 파고 식량을 파묻어 버려 짐의 무게를 가볍게 했다. 그리하여 겨우 중간쯤 행군했을 때 군량은 이미 거의 바닥이 나고 말았다.”[11]
* 각주 ------------------
[1] 王率靺鞨之衆萬餘侵遼西營州摠管韋冲擊退之隋文帝聞而大怒命漢王諒王世積並爲元帥將水陸三十萬來伐.
[2] 凡一百一十三萬三千八百人號二百萬其饋運者倍之.
[3] 分五部百七十六城六十九萬餘戶爲九都督府四十二州百縣.
[4] 帝親授節度每軍大將亞將各一人騎兵四十隊隊百人十隊為團步卒八十隊分為四團團各有偏將一人其鎧冑纓拂旗幡每團異色.
[5] 癸未第一軍發日遣一軍相去四十里連營漸進終四十日發乃盡首尾相繼鼓角相聞旌旗亙九百六十里.
[6] 三月癸巳上始御師進至遼水衆軍總會臨水為大陳高麗兵阻水拒守隋兵不得濟.
[7] 浮橋. 교각(橋脚) 없이 배나 뗏목을 잇대어 매고, 위에 널빤지를 깔아 만든 다리.
[8] 帝命工部尚書宇文愷造浮橋三道於遼水西岸既成引橋趣東岸橋短不及岸丈餘高麗兵大至隋兵驍勇者爭赴水接戰高麗兵乘高擊之隋兵不得登岸死者甚衆.
[9] 凡軍事進止皆須奏聞待報毋得專擅遼東數出戰不利乃嬰城固守帝命諸軍攻之又勑諸將高麗若降即宜撫納不得縱兵遼東城將陷城中人輒言請降諸將奉旨不敢赴機先令馳奏比報至城中守禦亦備隨出拒戰如此再三帝終不悟既而城久不下.
[10] 左翊衛大將軍宇文述出扶餘道右翊衛大將軍於仲文出樂浪道左驍衛大將軍荊元恆出遼東道右翊衛將軍薛世雄出沃沮道右屯衛將軍辛世雄出玄菟道右御衛將軍張瑾出襄平道右武將軍趙孝才出碣石道涿郡太守檢校左武衛將軍崔弘昇出遂城道檢校右御衛虎賁郎將衛文昇出增地道皆會於鴨綠水西.
[11] 述等兵自瀘河懷遠二鎮人馬皆給百日糧又給排甲槍矟並衣資戎具火幕人別三石已上重莫能勝致下令軍中遺棄米粟者斬士卒皆於幕下掘坑埋之才行及中路糧已將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