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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이루는 과정)
성경본문 : 아가서 8: 1-7
1.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2.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미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웠겠고
3. 너는 왼손으론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론 나를 안았었으리라
4.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찌니라
5.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 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6.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7.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찌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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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젊은 시절에 아가서를 읽다보면 연애편지를 쓸 때 인용해 보고픈 충동을 느끼는 글들이 제법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가서가 단지 남녀 간의 애절한 사랑을 다루는 노래로만 보기에는 너무나 깊고도 오묘한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가서를 통하여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신부가 된 교회의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너무나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가서를 보면서 말씀을 잘 이해하기란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아가서는 그 문맥이 난해하게 얽혀 있어 솔로몬이 무엇을 노래하고 있는 것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게 되면은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부된 우리를 사랑하는 모습에 너무나 큰 위로와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는 아가서를 통하여 주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 때 그 사랑에 감사하는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부모와 신앙의 갈등을 통하여 한 때 부모님의 사랑에 대한 잠시나마 잊고 살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너무나 그들이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런 내 자신의 모습 속에 우리 보모도 지금 내가 아이들을 사랑하듯이 나를 사랑으로 양육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잠시나마 잊고 살았던 부모님 사랑에 대하여 회개하고 지금은 부족하지만 부모님의 사랑에 대하여 감사하며 살고자 합니다. 사랑을 주는 사람의 마음을 알면 알수록 더 깊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가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더 깊이 알고 감사하는 삶이 넘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1. 진정한 사랑을 조건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진정한 사랑에 대하여 논할 때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이야기들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조건을 보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조건을 보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계산적인 사랑으로 오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결혼을 하면서 사랑보다도 조건을 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서로 좀 더 좋은 조건을 배우자를 만나보고자 합니다. 좀 더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서 자신을 포장하는 것입니다. 성형수술로 얼굴을 포장합니다. 학력을 포장합니다. 가문의 배경을 포장합니다. 결혼해서 살다보니 포장이 자연스럽게 벗겨집니다. 포장이 벗겨진 모습에 실망하여 이혼을 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성형수술을 하여도 결국 들통이 난다고 합니다. 여자 쪽이 성형수술을 하여서 조건 좋은 남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이의 얼굴이 말이 아닌 것입니다. 아이를 통하여 여자 쪽의 얼굴 성형사실이 밝혀져 이혼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옵니다.
오늘 등장하는 아가서의 사랑은 조건이 전혀 맞지 않는 사랑이야기입니다.
한 나라의 왕과 이방 여인인 술람미와 사랑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왕이 자신과 전혀 조건이 맞지 않는 이방여인인 술람미를 너무나 사랑하는 것입니다.
1절 말씀에서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고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술람미 여인이 신분이 미천하여 업신여김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방여인이 술람미와 왕이 사랑을 나누는데 조건이 맞지 않는 사랑이라고 주변 사람들이 시기하며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세상 조건에 전혀 개의치 아니하고 밖에서도 감추지 아니하고 당당하게 이방여인을 사랑해 준다는 것입니다.
왕과 이방여인이 술람미와의 사랑은 바로 예수님과 우리의 사랑 관계인 것입니다. 지금도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이방사람이며 죄인 된 우리와 전혀 사랑의 조건이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왕이신 예수님이 조건에 맞지 않는 이방인이며 죄인 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사랑입니까!
마태복음 20장에서 포도원 품꾼 비유가 나옵니다. 포도원 주인이 품꾼들을 다섯 번이나 부르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놀라운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였습니다. 세상에서 무익한 존재들을 포도원 주인이 불러서 일꾼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절과 7절을 보면은 장터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부르더라는 것입니다. 장터는 어떤 곳입니까? 장사를 해서 이윤을 남기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장소에서 놀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는 영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용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조건에 맞지 않는 우리를 부르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대상으로 조건에 맞지 않는 우리를 조건 없이 부르시고 사랑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진정한 사랑은 닮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진정한 사랑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얼굴의 남녀가 만나서 사랑하며 살다 보면은 얼굴도 닮고 성격도 닮는다고 합니다. 멋진 연예인 스타가 등장하면은 그 스타의 헤어스타일도 닮고자 합니다. 목소리도 닮고자 하고 얼굴도 고치면서까지 닮고자 합니다.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너무 좋아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의 스타들을 좋아하는 팬들만큼 예수님이 좋아서 닮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지 자문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 후배 중에 하나가 너무나 조용기 목사님을 좋아했습니다. 목소리까지 흉내 내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 제스처까지 흉내 내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 기도를 받고 싶다고 순복음 교회까지 찾아간 것입니다. 도저히 만날 수가 없었고, 그 날 따라 비도 많이 왔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승용차를 타고 떠나려하자 비를 맞으면서 차를 가로막고 기도를 받고 싶다고 할 정도니 보통 닮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조용기 목사님이 아침을 우유에 바나나와 콘 프레이크를 타서 드신다는 소식을 듣고 후배도 아침을 그렇게 먹기 시작할 정도였습니다. 한번은 저와 함께 청년에 수련회 가서 아침을 먹는 문제로 다툰 적이 있습니다. 저는 밥이 많이 남아서 버릴 수 없으니 밥을 끓여먹자고 하는데 제 의견을 무시하고 우유와 콘 프레이크를 잔뜩 사서 온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의 영성을 닮아야 한다고 하면서 사온 것이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처럼 될 수 있다면 저도 하루 세끼 우유에 콘프레이크를 먹겠다고 하였습니다. 휼륭한 목사님을 좋아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우리가 흉내 내는 것으로 그리고 먹는 것으로 어떻게 영성을 닮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2절 말씀에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미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고 합니다. 술람미 여인은 사랑하는 왕을 초청하여 교훈을 받으면서 그를 닮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닮는 것은 흉내 내는 것이나 먹는 것으로 되지 아니하고 교훈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님들이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정작 그분의 교훈을 따르려는 마음은 없습니다. 사실 그 분의 교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교훈을 받을 때 술람미 여인처럼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주님이 교훈을 받지 않는다면 그 마음에 있는 사랑은 진심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교훈은 잔소리가 아닙니다. 교훈을 받는 문제는 ‘죽느냐?’ 아니면 ‘사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주님의 교훈은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말씀이기에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다 나를 가장 많이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교훈을 받음으로 매일 매일 조금씩이나마 닮아갈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3. 진정한 사랑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진정한 사랑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4절 말씀에서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여 보면은 세 가지의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로 사랑은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 입장에 서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오늘 4절 말씀에도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요한복은 21장에서 예수님과 베드로의 이야기를 통하여 사랑은 상대방에게 맞추어 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조건없는 아가페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봅니다. 베드로는 우정의 사랑인 필레오로 답변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아가페의 사랑으로 베드로에게 물어봅니다. 베드로는 여전히 우정의 사랑으로 답변합니다. 세 번째 가서는 예수님이 베드로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필레오의 사랑으로 물어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필레오의 사랑으로 답변함으로 대화를 마무리합니다. 이처럼 사랑은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입니다. 내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 맞추어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랑의 관계는 평안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왕 된 신분으로 한 여인 앞에서 깊은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평안한 관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불편한 관계에서는 참된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명절에 한 번씩 어린 조카들을 만납니다.
처음에는 저를 어려워합니다. 그러다 좀 지나면 저에게 장난도 걸고 무등도 태워달라고 합니다. 옆에서 재수씨들이 자신의 아이들에게 저분은 목사님이셔 버릇없이 행동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곤 합니다. 그래서 드는 생각은 버릇이 없서서는 안되지만 때로는 버릇없다는 것이 평안한 관계를 나타내는 모습일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는 불편한 관계가 아니라 평안한 관계라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일하는 남편이 퇴근 후에 집에 들어 가면은 평안을 누릴 수 있어야 사랑을 이루어가는 가정인 것입니다. 또한 집에 있는 가족들도 남편이 집에 왔을 때 평안을 줄 수 있어야 가족들을 사랑하는 가장인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를 서로를 통하여 평안한 인식을 누리는 관계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주변사람들에게 부탁까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사랑하는 왕을 위하여 주변사람들에게 잠을 깨우지 말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처럼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고 보호해 주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헌신하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 주는 마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바보도 될 수 있고 미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크다 보면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예수님이 우리의 영혼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심으로 최고의 사랑을 보여준 것입니다.
다윗은 주님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앞에서는 왕으로서 자신의 체면도 내려놓았습니다. 주님의 법궤를 성안으로 움직이면서 춤을 추며 찬양을 하였습니다. 너무나 주님의 사랑해 취해서 그런지 자신의 바지가랭이가 내려온 줄도 모르고 춤을 추며 찬양한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하는 마음입니다.
4. 진정한 사랑은 함께 함으로 모든 고난을 극복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사랑의 힘은 모든 어려움을 이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5절 말씀에서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 오는 여자가 누구인고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고 합니다. 한 여인이 거친 들에서 올라옵니다. 그 험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올 수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여 함께 올라온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자가 함께 하면은 모든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가지 주신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표현을 “내 안에 거한다” 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말씀으로 요한복음 15장 7절 말씀을 보면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고 합니다. 여기서 ‘거한다’라는 의미는 거기에 산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얘기는 그분의 사랑으로 집을 삼는다는 뜻입니다.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환경과 조건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안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모든 것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집사님이 길거리를 지나다가 주방용품을 팔면서 노점상을 하는 할머니에게 전도할 목적으로 이야기를 건넸습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요즘 장사는 잘 되시는지요?" 할머니가 "예, 그럭저럭 잘 됩니다." 집사님이 "할머니는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할머니가 "물론 믿지요.” 집사님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정말 위대한 일인 것 같습니다." 할머니가 "그래요, 그렇지만 그보다 더위대한 일이 있지요" 집사님이 "그래요? 그게 뭔데요?" 할머니가 "그건 나를 구원해 준 그분이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이지요."
전도를 할려고 했던 집사님은 길거리에서 노점상을 하면서 예수님이 구원해주신 것뿐만 아니라 그분이 함께 하심을 믿고 힘든 삶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할머니의 믿음이 존경스러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단지 구원받고 죽어서 천국 가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서 그 안에서 매일 매일 천국 생활을 누리며 맛보기를 미리 원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아가서 말씀을 통하여
첫째로 진정한 사랑을 조건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로 진정한 사랑은 닮아가는 것입니다.
셋째로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주며, 평안한 안식을 누리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주변사람들에게 부탁까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로 진정한 사랑은 함께 함으로 모든 고난을 극복합니다.
이런 진정한 사랑을 우리 예수님과 매일의 삶 속에서 누릴 수 있는 귀한 영혼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