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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젊은이와 늙고 둔한 왕
전도서 4 : 13 - 16
오늘 봉독한 말씀을 읽으면서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소년”이란 말을 보는데 문맥으로 보아 요셉을 상상하고 한 말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그래서 14절에 보니 “저는 그 나라에서 나면서 가난한 자로서 옥에서 나와서 왕이 되었음이니라”하였고
15절에는 “내가 본즉 해 아래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버금으로 대신하여 일어난 소년과 함께 있으며 저의 치리를 받는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한 마디로 말해서 지혜로운 젊은이와 늙고 둔한 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연세가 높아지면 모든 면에서 젊은 사람보다는 지혜가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 가지 상황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보고 듣고 느끼고 하면서 책에서 배울 수 없는 고귀한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연로하신 분들이 이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은 몸이 늙어 자유로이 거동은 할 수 없어도 의식이 분명하기만 하면 연륜이 쌓은 경험과 지혜로써 젊은 세대를 위해 조언 내지 충고해 줌으로써 경험이 없는 젊은이들이 하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젊은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실 수 있습니다. 기억하시는 대로 나이 많은 모세가 자기는 이제 직접 일선에 나가서 진두 지휘를 합니다. 이때 모세는 어떻게 했어요? 산에 올라가서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이스라엘 군대의 승리를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모세가 두 팔을 벌리고 기도하면 이스라엘 군대가 아말렉에게 이깁니다. 너무 피곤해서 팔을 내리고 기도를 쉬면 이상하게도 여호수아 장군이 인솔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전세가 불리해 집니다.
이 사실을 안 모세는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손을 들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나중에는 아론과 훌이 밑에서 모세의 팔을 붙들어서 내려오지 않게 하고 기도했더니 종래는 여호수아의 군대가 승리하였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어떻게 아말렉에게 승리했어요? 물론 여호수아 장군이 최선을 다해서 싸웠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노종 모세가 팔을 내리지 않고 기도하였다는 사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갈보리 교회가 어떻게 이처럼 승리하고 전진하는 교회가 되고 있습니까? 혹시 어제 조간 신문에 보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번 우리 63회 장로회 총회의 초청을 받고 내한한 미국 연합 장로 교회의 총무인 톰슨 박사가 월요일 오전 국무총리를 예방하고 30분 동안 만나기로 시간을 정했다가 55분씩 시간을 연장해서 이야기하면서 우리 갈보리 교회를 얼마나 자랑했는지 모릅니다. 어제 점심을 같이했는데 “나는 이렇게 훌륭한 장로 교회가 한국에 있는 줄을 몰랐다. 갈보리 교회는 세계 제일의 장로 교회다”라고 극구 칭찬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이렇게 된 것이 우연한 일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의 배후에는 노종 모세의 기도가 있었던 것처럼 이 교회를 설립하신 우리 원로 목사님이 아직 건재해 계시면서 연로하신 우리 믿음의 대선배 귀한 종들과 더불어 끊임없이 기도하여 주시고 계신 때문인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 동안 우리는 계속 승리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적으로도 연로하신 분들의 존재가 얼마나 귀한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나이 많으신 분들은 젊은 사람들에게 이 귀한 지혜를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하고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충고와 조언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지혜로운 소년이 될 수 있습니까? 지혜를 얻으려면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구약 잠언 2장 1-8절에 보면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대저 그는 공평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하였습니다.
여기 “나의 말을 받으며”했는데 ‘받는다’는 말은 마음의 문을 열고 영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영접이 꼭 필요합니다. 이것이 곧 믿음입니다.
귀한 손님이 오시면 자연히 방을 먼저 깨끗이 치우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을 우리 마음속에 모시려면 자연히 먼저 회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믿음이 같이 있게 됩니다. 믿음있는 사람이 회개합니다. 회개한 사람이라야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여러분은 한분 한분이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주로 마음속에 받아들였습니까? 지혜있는 젊은이가 되시기 원하십니까? 주님을 받아들이는 일이 제일 먼저 할 일입니다.
그리고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하였습니다. 시편 1편에도 “복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마음 간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배운 것을 연습하며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노트를 잘합니다. 그래서 혹시 잊어버리면 다시 노트를 펴서 기억을 새롭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도 꼭 그렇습니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명을 저축하고 모아 두고 정돈하고 소화시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하였는데 이것은 지혜를 얻으려는 능동적인 자세를 의미합니다. 자신이 지혜를 얻으려고 힘을 써야 합니다. 그러기에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혜를 얻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하였습니다. 구하는 자가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구하라고 했어요?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같이 그것을 찾으면” 찾겠다고 하였습니다. 지혜를 얻는 것도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끈기 있고 고통스러운 노력이 필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광부가 광석을 구하기 위해서 얼마나 찾아 헤메이고 광맥을 찾기 위해서 얼마나 애씁니까? 은이나 금을 얻기 위해서 사업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얼마나 애씁니까? 세계를 돌며 좇아 다닙니다. 하물며 은이나 금으로 살 수 없는 지혜를 얻는데 애쓰지 않고 얻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에 있다가도 없어지고 잡았다가도 놓치고 마는 그러면서도 참된 만족을 줄 수 없는 세상 물질을 얻기 위해서도 이렇게까지 애쓰면서 일하는데 하물며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귀한 지혜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십니까?
저는 우리 교회 젊은이들이 삼일 기도회 시간에 참예하기 위해서 학교에서 책가방을 든 채로 직장에서 저녁 식사도 못하고 그대로 예배당을 향해 발을 옮겨오시는 것을 감격하곤 합니다. 여러분의 애씀이 헛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하늘의 지혜로써 충만히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이렇게 하늘의 지혜를 얻을 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를 모든 악에서부터 지켜 주십니다. 주님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하였습니다.
하늘의 지혜가 있을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시험과 유혹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전도서 9장 16절에는 “지혜가 힘보다 낫다” 그랬고 전도서 9장 18절에는 “지혜가 병기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에는 말하자면 두 가지 세력이 잇습니다. 선과 악, 사랑과 미움, 광명과 암흑, 의와 죄가 언제나 있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기까지는 이 두 세력이 언제나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알던 모르던 우리는 어느 한 세력에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의와 진리, 사랑과 광명, 주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우지 아니하면 자연히 죄와 거짓, 미움과 암흑, 마귀로 가득찰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 12절 이하에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봉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왜요? 인생 길에는 시험과 유혹이 많기 때문입니다. 남자, 여자, 청년, 노년, 유식한 사람, 무식한 사람, 돈 많은 사람, 돈 없는 사람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시험이 있습니다. 세상에 시험 당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많은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닥치는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까?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소위 전쟁 술어로 전격전은 써야 합니다. 그래야 시험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시험이 들어올 때 당장 물리쳤습니다. 죄와 타협하거나 협상할 것 없습니다. 우물우물 하다가는 넘어집니다.
전쟁에 승리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신문에 보신대로 우리 나라의 방위 산업이 북괴의 방위 산업 수준을 이젠 능가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우리 기술진이 세계 7번째로 중・장거리 지대지(地대地) 유도탄을 만들어 시험한 결과 백발백중의 우수한 성능을 가진 무기라고 합니다. 왜 이런 무기를 우리 힘으로 만듭니까?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병을 예방하는 것도 위생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병균의 침입을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시험을 이기는 최선의 방법도 우리가 신앙 생활을 철저히 해서 우리의 심령이 튼튼하고 우리의 믿음이 건전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이 성령으로 충만해 있으면 시험이 침입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 말씀대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는 일”입니다. 무슨 일이나 자기가 맡은 일 열심히 충성되게 하면 시험들 시간 없습니다.
대개의 경우 자기가 할 일은 하지 아니하고 한가히 지내다 시험에 듭니다.
어떤 청년이 시험에 듭니까? 한가한 청년입니다. 자기 일에 바쁜 사람 시험들 틈도 없습니다.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 시험을 이기는 지혜입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지혜 있는 젊은이 되십시다.
그리고 끝으로 늙고 둔한 왕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노인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과 과거의 역사만 자랑하고 거기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의 간함을 받을 줄 모를 때 오히려 지혜 있는 소년이 더 났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왕은 통치권을 가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통치자는 국민의 소리를 잘 들을 줄 알아야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어떤 통치자는 간함을 들을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령 옛날 애굽의 바로는 하나님의 종 모세의 말을 듣지 아니하다가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고 나중에는 맏아들이 죽게 되니까 항복을 하였습니다.
전에 아합왕도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충고를 듣지 아니하고 그대로 이세벨 왕후의 말만 따르다가 큰 망신하지 않았습니까? 전에 헤롯왕 같은 사람은 세례 요한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그를 감옥에 가두고 목잘라 죽이고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칼로 죽이더니 그 말로가 얼마나 비참했던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멀리 갈 것 없이 독일의 히틀러 같은 사람 유대인을 학살하고 목사들을 감옥에 가두고 그러더니 그 마지막이 어떠했던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간함을 들을 줄 모르는 왕은 개인에게도 비극이거니와 그 국민 전체가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래서 잠언 29장 1-2절에 “자주 책망을 받지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탄식하느니라”하였습니다.
올바른 통치자는 국민의 간함을 들을 줄 압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 국민과 정부 사이에는 간격이 생기고 어려운 자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어느 통치자나 공통적인 것은 하는 일을 좋지 않게 말하면 좋아하지 아니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상정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중한 책임을 진 사람일수록 기분 좋은 말만 들으려 하지 말고 잘못됐다는 말도 들을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바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에 이승만 박사께서는 간함은 들을 줄 모르고 아첨만 듣다가 결국 국민에게 큰 누를 끼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저는 요사이 염려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우리 정부에서 긴급조치 9호를 발표해서 국민들의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까지는 특수한 상황하에 있는 나라의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집권자가 꼭 들어야 할 국민들의 충고까지라도 못듣게 하는 결과가 되어 버린다면 예기치 않은 불행과 비극이 초래될까 두렵습니다.
한 나라의 집권자만이 아닙니다.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이 곧은 사람, 돌이킬 줄 모르는 사람, 제고집만 부리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잠언 1장 12-33절까지를 읽어보십시오.
이사야 30장 12-14절 말씀에도 “이러므로 이스라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믿어 그것에 의뢰하니 이 죄악이 너희로 마치 무너지게 된 높은 담이 불쑥 나와 경각간에 홀연히 무너짐 같게 하리라 하셨은즉 그가 이 나라를 훼파함같이 아낌없이 훼파하시리니 그 조각 중에서, 아궁이에서 불을 취하거나 물웅덩이에서 물을 뜰 것도 얻지 못하리라”하셨습니다.
자주 책망을 들으면서도 돌이킬 줄 모르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때는 듣기에 거북해도 입에는 쓰나 속에는 단 양약입니다. 책망과 간함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지혜있는 사람이요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