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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 빈곤 극복
성경본문 : 잠언 30: 8
8.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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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6: 6~9
6 .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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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제2건국'이라는 제창으로 변화와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밖으로는 세계화, 개방화, 새천년에 부응하여 깨끗하고 공정한 정치, 건전하고 효율적인 시장경제, 건강한 사회를 구현하고자 다각적인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이러한 조치들은 권위주의가 낳은 정치적, 사회적 정통성 및 도덕성의 위기를 일소하고 새천년 21세기 세계 일류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 경제 사회에 만연한 왜곡되고 굴절된 가치관에 새로운 틀을 짜야되는 시점에서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생활개혁이 구체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삶이 우울하고 걱정스러운데도 서로 책임을 남에게만 돌리고 말싸움만 계속하는 정치권의 모습을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다시 한번 냉정히 생각해 보면 그들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참으로 보기에 역겹다. 그러나 정치가들만 그런가? 입장을 바꾸어 보면 다같은 우리가 아닌가? 정치권의 추하고 역겨운 모습이 사실은 우리의 모습이며 우리의 수준이다. 사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모든 어려움은 우리가 모두 돈만 알고 살아오다가 물에 잠긴 자초한 배의 모습과 같다.
경기침체가 계속되면서 어려운 것은 대다수의 소시민이고, 일부 부유층은 빈익빈 부익부의 원칙대로 아무 흔들림 없이 잘 지내고 있다. 교회는 빈곤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과 만연되고 고질화된 사회구조를 배려하고 참여하는데 인색하지 않았으면 한다. 교회는 물질지상주의 배금주의 앞에 단호히 서야 한다. 사실 물질적 풍요는 사람을 편하게는 해줄지언정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가난은 행복의 추구에 훨씬더 높게 평가되어 왔다. 중세 유럽 수도원의 탈박승이나 인도의 간디나 힌두교의 수도자들은 물질의 부유함으로는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가난은 커다란 축복이고 부유함은 커다란 고통이다"라는 진리를 선택했음은 무슨 연고였던가?를 생각해 볼 때이다.
우리 경제는 그동안의 고도성장으로 1963년에 100$에 불과하던 개인소득이 1977년에 1,000$를 돌파하고 1995년에 거의 10,000$를 달성했으니 비록 지금은 주춤한 상태이지만 그동안 한국경제는 초고속 성장가도를 질주한 것임에 틀림없다. 더 잘살게 되었지만 욕구불만은 더 커지고 여기에 따라 상대적 빈곤감도 더욱 증폭되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자가용이 필수품이 될 정도이고, 이동전화를 거의 보편적으로 사용할 만큼 부유해진 것 같은데 왜 생활의 풍족함 속에서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고 있는가? 아무리 내가 많이 가지고 있다해도 상대방과 비교해서 또는 내가 원하는 만큼 소유하지 못했을 때 사람들은 불만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갖게 되는 상대적 빈곤감은 개인이나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킬 수 있다.
이 상대적 빈곤감의 원인은 무엇인가?
근대화의 초기에는 절대빈곤의 해결이 중심과제였다. 이 때의 기본과제는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을 굶지 않도록 하고 놀지 않도록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자본을 마련하고 이것을 서둘러 투자하는데 모든 노력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효율을 중시하는 이런 경제 상황에서 공평의 문제는 가볍게 취급될 수밖에 없었다.
경제가 성장하고 절대빈곤문제가 해결되어감에 따라 사람들의 욕구는 끼니를 때우는 생존욕구에서 또 다른 욕구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의 욕구불만은 경제 성장률이 낮다든지 생활수준의 향상이 느리다든지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공평욕구가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경제가 성장효율만을 추구해온 나머지 욕구충족의 균형이 잡히지 못한데 근본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라디오가 귀하던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오늘의 칼라TV를 보고 스스로의 생활향상을 대견해 할 것이다. 그러나 갈수록 사람들은 과거의 생활과 현재의 생활을 종적으로 비교한 것이 아니라 현재시점에서 나와 남, 그리고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를 횡적으로 비교한다. 때문에 경제가 성장한다든지 생활의 절대수준이 개선된다고 해도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때는 만족과 성취감을 느끼게 해줄 수 있으나 상대적 빈곤감은 여전히 존재한다. 앞으로 경쟁이 더욱 심해지는 세계화 시대가 되면 이 공평의 문제 역시 더욱 심해질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달, 정보화, 지식화 사회로 21세기에 대한 희망도 크지만 또한 소득격차가 벌어져 고소득층 20%와 저소득층 80%로 나눠지는 소위 20대80의 사회가 될 가능성이 많아 질 것이라고 말한다.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는 경제위기는 이러한 사회구조의 양극화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 사회보장 혜택의 축소와 임금삭감이 경제위기 극복의 대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살기 좋아지는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많은 근로자들은 저임금의 빈곤층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고,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의 공평욕구가 해결되지 않으므로 상대적 박탈감이나 빈곤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 경제는 절대빈곤문제를 해결하고 고소득 사회에 진입하면서 소비문화가 크게 확산되고 있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필수품의 개념으로 상품을 구입하던 차원에서 벗어나 상류층과 중산층을 중심으로 하여 '소비를 통한 행복'이라는 인생관이 확립되고 '소비가 미덕이 되는 사회'의 생활양식이 일반화되면서 허위욕구와 과잉기대의 심리가 확산되어 이제는 '근검, 절약, 자선'의 정신에 기반을 둔 개신교 윤리는 사라지고 있다.
소비주의 문화에서는 인간의 행복을 소비를 통한 욕망 충족의 결과로서 얻게 되며, 인간의 사회적 지위와 소속감은 소비를 통해 스스로 과시할 수 있으며,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게 된다고 가르친다. 여기에 더하여 한국인의 전통적인 체면의식과 허례 허식주의가 작용하여 과소비 풍조를 낳게 한다. 이러한 소비주의 문화가 상대적 빈곤감을 부채질한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현실에 자족하는 마음을 공부해야 한다.
우리의 삶에서 늘 부딪치는 이상과 현실사이에서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해결의 출발점인 것처럼 상대방이 가진 것과의 비교 또는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욕구와의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 빈곤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키에르코르는 '비교는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했는데 남과 비교하게 될 때, 우리 자신을 비하시키고, 남에게는 상처를 주게 된다. 우리는 스스로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 안에서 늘 느끼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이런 귀한 존재인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가 경제적으로 지적으로 또는 재능면에서 남과 비교해서 부족함이 있다고 우리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빈곤감을 느끼며 살아간다면 이것은 잘못된 삶의 태도이다.
내 자신의 생활현실의 모습 또는 우리의 사회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변화를 위한 출발점이다. 상대적 빈곤감에 빠진 이를 교회가 치유하기 위해서 전인적인 변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올바른 치유를 위해서 우리는 개인의 몸과 마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조직 사회와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이 모든 것들은 상호 의존적인 것이므로 서로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구상의 인구가 100명밖에 되지 않는 마을로 축소된다면, 물론 현 세계의 인구 구성, 인구 비율을 그대로 보존한 채로 축소한다면, 이 조그맣고, 또 다양하다고 할 지구마을은 어떤 모습이 될까? 스탠포드 의대의 의학박사인 필립 M. 하터가 계산을 시도했다고 한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57명은 아시아인, 21명은 유럽인, 14명은 서반구(미주)인, 8명은 아프리카인 이다. 52명은 남자, 48명은 여자. 70명은 유색인종, 30명은 백인. 70명은 비기독교인, 30명은 기독교인. 89명은 이성애자, 11명은 동성애자. 6명은 세계 부의 59퍼센트를 차지하고 있고, 그 6명은 모두 미국 사람. 80명은 적정수준에 못 미치는 주거 환경에 살고 있고, 70명은 문맹, 50명은 영양 부족, 1명은 죽기 직전, 1명은 임신 중, 1명은 대학 교육을 받은 적이 있고 1명은 컴퓨터를 소유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좋은 집에 살고, 먹을 게 충분하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주 선택된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좋은 집, 먹을 것이 있는 데다 글을 읽을 수 있고 컴퓨터를 가지고 있다면, 아주 엘리트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또 만약에 전쟁의 위험, 감옥에서의 고독, 고문에 의한 고뇌, 기아의 괴로움 등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세계 인구 상류 500만 명중의 한 사람인 셈이다.
만약 고통, 체포, 고문, 혹은 심지어 죽음의 공포 없이 매주 교회를 다닐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는 곧 지구상 30 억 인구가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누리는 행운아이다. 냉장고에 먹을 것이 있고, 몸엔 옷을 걸쳤고, 머리 위로는 지붕이 있는 데다 잘 곳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 75%보다는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고, 은행에 돈이 있고, 지갑 속에도 있고, 어딘가 잔돈만 모아놓은 동전 통도 있는 사람이라면, 지구상에선 상위 8%의 부자에 속한다. 만약 부모님 두 분이 모두 살아 계시고, 아직 결혼한 상태라면, 아주 드문, 미국에서마저도 아주 드문 경우가 될 것이고, 만약 고개를 들고 얼굴에 웃음을 머금으면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축복 받은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곧 비록 대다수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긴 하지만, 대부분이 그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배가된 축복을 받은 셈이다. 지구상에 글자를 읽지 못하는 20억 인구보다 축복 받은 셈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경제가 당면한 근본적인 문제는 경기가 나쁘다든지 물가가 오른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배에 탔다는 생각이 희박하다는데 있다. 예컨대 나와 비교해서 부유한 사람을 보았을 때 돈을 모은 사람이 그만큼 사회에 기여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 사람의 부는 나의 이익과 보완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 그 사람의 부가 나의 이익에 설사 도움이 안되더라도 적어도 나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기보다는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고 자기도 열심히 노력해서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고 다짐을 할 수 있도록, 즉 부가 사회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는 사회를 이룩하도록 교회가 앞장서서 가르쳐야 한다. 이를 위한 부유한 자와 권력 있는 자들이 겸손하고 정직하도록 가르쳐야 하며, 의로운 질서, 공평한 질서가 세워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회는 이러한 공의와 공평을 위해 사회참여 활동, 예를 들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복지제도나 조세의 형평성을 위한 정책 등에 참여해야 한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개교회 중심의 외형적 성장에 치중하고 왜곡된 기복신앙을 강조한 나머지 그리스도인다운 삶 즉, 삶의 질을 생각한 생활을 가르치지 못했다. 그리고 외면해 왔다. 그러므로 부정과 부패에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연루되어 TV앞에 나와 거짓말하여 지탄의 대상이 되는 신앙인들을 많이 보게 된다. 사회정의 실현과 이웃을 섬기는 일에 그리고 한반도에 불어닥친 경제위기의 고통, 북한 동포들의 굶주림, 세계 인구 중 매년 1,800만 명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나눔과 섬김의 원리로 청빈의 삶을 열심히 살지 못한 잘못에 뉘우치고 회개해야 한다.
이 땅에 오신 예수의 첫 번째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다. 무엇에 대한 회개인가? 종교가 종교답지 못한 것에 대한 회개이다. 교인이 교인답지 못하고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것에 대한 회개였다. 사회가 사회답지 못한 것에 대한, 즉 인간의 총체적 죄에 대한 대각성이었다. 하나님 나라는 아직 임하지 아니하였을지라도 장차 나타날 그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회개함으로써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우리 모두에게 요청되고 있다. 그 요청을 우리는 여전히 완성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죄인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요청하여야 한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기도를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에서만 강조해 온 것이 아닌가 깊이 반성해야 한다. 예수의 사역에 나타난 진정한 회개는 반드시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한 즉각적인 반성으로 잘못을 고치며 모든 재물과 물건을 필요에 따라 나누는 이상적인 초대교회 공동체를 형성하였던 동기를 부여하였다.
우리에게 아무리 최악의 위기가 몰아친다 하더라도 우리는 자신이 세상에 처음 태어나던 날 이상으로 가난해 질 수는 없다. 또한 제 아무리 부자라 하더라도 결국 이 세상에서 소유하게 되는 것은 수의 한 벌과 하나의 관과 무덤뿐이다. 신약본문이 부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부하려 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데 주목한다. 사람은 흔히 자기의 이익을 위해 악한 방법을 사용하여 또한 다른 사람을 갈취하게 되기 쉽다. 그러므로 자족할 줄 모르는 지나친 욕심, 상대적 빈곤감을 버려야 한다. 욕구를 절제하는 개인, 욕구를 다스리는 가정, 욕구를 자제하는 사회, 그리고 분수를 아는 지혜를 가르치는 일에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욕구와 현실사이에는 점점 큰 차이가 벌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상대적 빈곤감은 더욱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고귀한 자들이며 물질에 대한 집착과 욕심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일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가 됨을 가르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무소유와 자기 비움을 몸소 실천하신 모델이 되어 주셨으니 예수의 삶의 패션이 빠르게 유행했으면 한다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