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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 좋은 영향을 주는 성도
21:25-29
25.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저가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음이라
26. 저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한것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
27.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한지라
28.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29.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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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열왕기상 21장 25절에서 29절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생활에 영향을 주는 성도"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천국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가루 서말속에 누룩을 가져다가 넣었습니다. 서말에 비하면 누룩은 극히 작은 덩어리일 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전부를 부풀게 합니다. 천국이 이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룩은 복음이라고 생각하시면 좋습니다. 생짜 가루와 같이 전혀 예수를 모르는 집안에 어느 한 사람으로 인해 복음이 들어가 믿기를 시작했습니다. 지나놓고 보니 온 가족이 복음화 되어지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누룩은 영향을 주었지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한번은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어느 곳에 가든지 소금이 되고, 빛이 되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하면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세상의 빛이 되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나가서 소금이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또 소금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 하십니까?
소금 노릇을 잘 하게 해 달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맛 잃은 소금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소금은 소금으로서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소금은 남에게 영향을 줄지라도 자기는 절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맛을 나게 하고, 썩는 것을 막아서 썩지 않게 하고, 상처 난 곳을 고쳐줍니다. 자기가 영향을 받게 되면 없어지고 맙니다. 여기에서 소금은 우리 성도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생활에 영향을 주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어떤 성도가 생활에 영향을 주는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결혼의 생활에 좋은 영향을 주는 성도 (25-26)
하나님이 에덴 동산을 만드시고 온갖 좋은 것을 다 갖추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담을 인류의 대표자로 세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언약을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동산을 함께 거닐면서 즐길 때는 문제가 생기지 않았는데 언젠가 아담은 없고 하와만 있을 때 마귀가 찾아왔습니다. 혼자 있는 하와를 얼마나 유혹하고 꼬였는지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남자 분들은 절대로 여자 혼자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담도 여자를 혼자 두었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자기만 먹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따 가지고 가서 남편에게 먹으라고 권합니다. 이 때 남편은 아직 죄를 짓지 않았을 때지만 여자는 이미 죄를 범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향을 받느냐, 주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 때 아담이 하와에게 야단치고 뉘우치고 회개하도록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담은 하와가 주는 대로 다 받아먹었습니다. 자기도 죄인이 되고, 오늘날 우리까지 얼마나 불행하게 만들었습니까? 영향을 주어야 할 사람이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혼 생활에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나쁜 영향을 받으면 불행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5절에서 26절을 보면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저가 그 아내 이세벨에게 충동되었음이라 저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한것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여러 왕들 중에 아합이라고 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이 왕이 장가를 가려고 하면 이스라엘 아가씨들 중에 예쁘고 훌륭하고 믿음 좋은 아가씨들이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아합은 이스라엘 아가씨들은 거들떠보지를 않고 외국의 여인을 아내로 삼습니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것처럼 외국의 아가씨는 뭔가 별다르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인접한 도시국가 시돈 왕 엣 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을 합니다. 그 나라가 바알신을 얼마나 섬기는지 왕의 이름이 엣 바알입니다.
그 왕의 딸이 이스라엘 왕궁으로 결혼해서 올 때 맨손으로 오겠습니까? 자기들이 섬기던 바알신을 가지고 오는 것 아닙니까?
그 때 아합은 "이것이 무슨 짓이냐? 당장 없애 버리지 못하겠느냐?"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믿도록 영향을 주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세벨이 왕궁에 들어온 날부터 영향을 받기를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섬기던 하나님을 저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세벨이 가지고 들어온 바알신에게 경배하고 모든 백성들에게 바알 종교를 전파하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렇게 된 까닭이 아내 이세벨의 충동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영향을 주어야 할 사람이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선지자들도 많이 죽이고, 나중에는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는 나봇까지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지 않습니까? 죽고 망할 짓만 한 것입니다. 좋은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나쁜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혼이 얼마나 불행합니까?
젊디 젊은 앳된 청년이었을 때 교회에 나가 열심히 봉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보이지 않던 청년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그 교회에서 믿음생활하고 봉사하니까 새로 나온 사람이 나를 찾아오기를 바라기 전에 제가 먼저 그 분을 찾아가서 인사를 청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가서 인사를 청하고 알아보았더니. 그 분에게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도 아무도 없었기에 그 날부터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을 오라고 해서 제가 살던 조그만 방에서 같이 잠도 자고 죽을 끊이든 밥을 끊이든 함께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주 다정한 벗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배운 것도 별로 없었고, 이렇다할 직업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아가씨들이 그 친구를 거들떠보지를 않았습니다. 딸 가진 어머니들이 딸을 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장가를 못 가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믿지 않는 아가씨를 중매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고민을 하면서 저에게 "이거 어떻게 하면 좋으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다가는 장가를 못가겠으니까 믿지 않는 아가씨라도 결혼을 하는데 그 아가씨를 꼭 예수 믿게 할 자신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그만 두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했습니다. 그 때 만해도 가진 것이 없어서 그 당시 일본말로 오꼬시 센베이라는 과자를 몇 봉지 사다 놓고 둘러앉아 예배를 드리고 결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부터 그 친구의 아내가 교회에 나오는데 얼마나 열심인지 모릅니다. 그리고는 이 친구가 장인도 인도하고, 장모도 인도하고, 처남도 인도하고, 처제도 인도하고 온 가족이 완전히 복음화가 되었습니다. 결혼하여 아들과 딸을 낳았는데 아들이 나중에 신학을 하여 목사가 되어 일산에 또는 인천에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가끔전화가 옵니다. 그러면 반갑게 만나곤 합니다. 이 친구는 나중에 그 교회 장로가 되고, 아내는 권사가 되었습니다. 기가막히지 않습니까? 믿지 않는 아가씨와 결혼을 하여 불신적인 영향을 받았으면 뭐가 되었을지 좋은 영향을 주다 보니 그렇게 멋진 가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결혼 생활에 좋은 영향을 주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신앙의 생활에 좋은 영향을 주는 성도 (27-)
아프리카에 가면 기독교 국가가 하나 있습니다. 에디오피아입니다. 에디오피아는 옛날 유대 나라의 솔로몬 왕 때 여자가 왕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번 찾아뵙고 싶어서 몇 천리 길을 멀다하지 않고 유대 나라에 갔습니다. 몇 일 동안 그 나라에 유하면서 여왕이 두 가지를 받아 가지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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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하나는 여호와 종교 즉 하나님 신앙을 가지고 갑니다. 두 번째로는 솔로몬에게서 씨를 하나 받아 가지고 갑니다. 그래서 그 왕통은 솔로몬의 피가 흐르는 왕통입니다. 세월이 흘러서 사도 시대에 그 에디오피아의 국고를 총괄하는 권세있는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갑니다. 그런 배경이 있기에 예루살렘에 예배를 하러 왔다 가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속이 답답하고, 내려가면서도 시원치 않았고 성경을 읽으면서도 속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을 읽으면서 내려가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성령이 빌립 집사에게 빨리 찾아가라고 명하였습니다.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내시가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가르쳐 주지 않으니 모르겠습니다. 털 갂는 자 앞에서 양이 잠잠함 같고, 사지로 끌려가는 양이 결국 끌려가서 죽었다고 했는데 이 양이 도대체 누구를 가리킵니까?" "그 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벌써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을 위해서 죽고 부활하고 지금 하늘 나라에서 당신이 있을 곳을 예비하고 있습니다"라는 뜻을 풀어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에디오피아 내시가 "그 예수를 내가 믿겠습니다"하여 그 자리에서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옆에 물이 있음을 보고 세례를 달라고 자청하여 세례를 받았고 혼연히 즉 기쁨으로 돌아갔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예배를 드리고도 복음이 없었습니다. 믿기는 믿어도 예수 없는 믿음이었고 또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성경공부를 통해서 예수를 만나고 복음을 접한 후에 전혀 믿음의 상태, 내용이 달라졌습니다. 믿음의 차원이 달라졌습니다. 요즘 흔히 쓰는 말로 이야기로 하면 그의 믿음은 업그레이드가 되었습니다.
그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그렇게 되어진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믿음 좋은 빌립 집사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즉 빌립 집사가 그에게 믿음 생활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을 접하는 사람들마다 믿음이 업그레이드가 되도록 영향을 주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7절을 보면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한지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라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아합 왕이 지금까지 망할 짓만 하고 죽을 짓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주 고약한 짓만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 집안에 남자란 남자를 깨끗이 쓸어버리겠고, 너희 집안을 거름덩이로 만들어 버리겠고, 그리고 네 자녀들 중에 도시에서 죽으면 개가 먹고 들에서 죽으면 새가 뜯어먹어 흔적 없게 하겠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그 말을 할 때 우리가 이곳에 앉아서 쉽게 이야기를 하는 그런 상황입니까? 수천년 지난 오늘날 민주국가에서도 대통령에게 직언을 한 번 해 보십시오.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하물며 몇 천년 전에 왕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표현을 쓰자면 죽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하라 하시니 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만 내 눈앞에서 없어져"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아합 왕은 그 자리에서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옷을 잡아 찢는 것은 자기의 마음을 찢는 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아합 왕은 '내가 어쩌다가 이런 짓을 했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굵은 베로 몸을 동였습니다. 우리는 굵은 베옷을 언제 입습니까? 부모님이나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 입는 것이 아닙니까? 가장 슬플 때입니다. 아합이 그렇게 슬퍼한 것입니다. 내가 어쩌자고 이랬나 하여 철저히 금식하며 회개하고 걸음걸이도 천천히 했습니다. 전에는 길길이 날뛰던 사람이 천천히 갔다는 것은 '죽을 놈은 바로 나요'라는 말이 아닙니까? 철저히 회개를 했다는 말입니다. 아합 왕은 지금까지 회개가 없는 믿음 생활을 했습니다.
여러분 10년을 믿었는데 철저히 회개해 본적이 있습니까? 회개 없는 믿음은 제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그의 믿음이 업그레이드 될 수 있고 질이 좋아질 수 있었다는 것은 엘리야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즉 엘리야가 아합의 믿음 생활에 좋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믿음의 좋은 영향을 주는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 시간에 누구를 위해서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주셨습니까? 누구를 위해서 지금 믿어 주고 계십니까? 나를 위해서 믿지 누구를 위해서 믿습니까? 저는 그 때 까지만 해도 외삼촌 위해서 예배당에 나가주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하는 말 한마디, 여러분의 모습 하나가 하나가 다른 사람들의 믿음의 질을 높여주는, 즉 좋은 영향을 주는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위인의 생활에 좋은 영향을 주는 성도 (28-29)
느헤미야 7장 2절을 보면 '내 아우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로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하나냐는 위인이 충성되어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에서 뛰어난 자라"고 하였습니다.
유대 나라의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관활하고 다스릴 일꾼을 세울 때 두 사람 중에 하나가 하나냐라는 것입니다. 하나냐에 대해서 성경이 설명하시기를 '위인이 충성되어'라고 하였습니다. '위인'이라고 하는 것은 위대하다 할 때 쓰는 '위'자와 사람을 가리키는 '인'자가 아닙니다. 훌륭한 사람의 전기를 보면 위인전기라고 하는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위'자는 누가 생일을 맞이하든가, 결혼을 하든가, 축하할 일이 있으면 잔에 무엇을 따라 들고 '위하여'라고 하지 않습니까? '위하여' 할 때 쓰는 '위'자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위인'을 '사람의 됨됨이'라고 해석이 되어 있습니다. 느헤미야에 나오는 '위인이 충성되다'는 말은 '사람 됨됨이가 충성되다'라는 말입니다.
누구에게서 한번 배신을 당하거든 그 사람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자기의 모든 것이 궁색하거나 또는 힘이 미약하다 싶으면 '나 죽었오'하고 가만히 있는데 그것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기회가 되면 그 사람은 또 다시 배신을 합니다. 배신하는 것의 첫 번째가 어렵지 3번, 4번은 쉽습니다. 사람 됨됨이 그래서 그런 것입니다. 충성된 것도 사람 됨됨이 때문에 충성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배신을 모르는 것입니다. 충성은 사람 됨됨이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사람 됨됨이에 좋은 영향을 주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8절에서 29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고 하였습니다.
아합 왕에게 엘리야가 얼마나 호되게 야단을 쳤는지 모릅니다. 그럴적에 아합 왕이 철저히 회개를 했습니다. 믿음 생활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디셉 사람 엘리야가 돌아갈 때 하나님이 불러서 "엘리야야 저것 좀 봐라, 아합이 어떻게 저렇게 겸비해졌느냐? 내 앞에 저렇게 겸손함을 인해서 내가 이제는 재앙을 내려 쓸어버리겠다고 한 것을 당대에는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거만하고 도도하던 사람이 하나님도 깜짝 놀랄 만큼 겸비해졌습니다. 겸비는 사람의 됨됨이의 문제입니다. 사람 됨됨이가 달라졌습니다. 엘리야가 좋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만나는 사람마다 '저 사람을 친구 삼더니 뭔가 달라졌다'고 할 만큼 사람 됨됨이에 좋은 영향을 주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삶에 또 너와의 관계에서 생활에 좋은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첫째, 결혼 생활에 좋은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결혼 생활에 좋은 영향을 주어여만 결혼 생활을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믿음 생활에 좋은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을 만나는 사람마다 믿음이 업그레이드가 되어 여러분을 만난 것이 행복이요, 영광이라고 생각할 만큼 되어야 합니다. 남의 믿음 생활에 좋은 영향을 주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사람 됨됨이에 좋은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엘리야는 아합의 됨됨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거만하고 도도하고 오만하던 사람이 우리 성도를 만났더니 하나님도 깜짝 놀랄 만큼 사람의 됨됨이가 달라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성도가 좋은 영향을 줄 때 하나님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