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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후 1: 4 네 눈물을 생각하여 - 딤후 1: 8 부끄러워하지 말고
딤후 1: 4 네 눈물을 생각하여 -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
1]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바울이 디모데를 보기 원함은 다음 두 가지이유 때문이었다.
(1) 네 눈물을 생각하여
이것은 밀레도에서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과 헤어질 때 에베소 교인들이 눈물을 흘렸던 사건을 가리킨다(Scott, Guthrie).
* 행 20: 37 -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바울은 그 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더욱더 간절히 디모데를 보기 원했다.
(2)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바울은 당시 2차 투옥되어 죽음을 기다릴 뿐만 아니라 자신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누가만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4: 9-11).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만나서 사랑의 교제를 나눔으로 위로받으며 기쁨으로 가득 채우기를 원하고 있다.
딤후 1: 5 거짓이 없는 믿음 -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
1]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본 절은 바울이 디모데를 기쁜 마음으로 만날 수 있는 근거이다.
'거짓이 없는'의 헬라어 '아뉘포크리투'(*)는 문자적으로 '위선이 아닌'을 의미한다.
디모데의 '거짓이 없는 믿음'은 외식적이거나 겉치레가 없는 믿음으로 율법적으로 매어있는 믿음이 아니라 복음으로 충만한 믿음을 시사한다.
'생각함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폼네신 라본'(*)은 문자적으로 '생각나게 하는 것을 가졌다'는 의미로 '외적인 조건에 의해서 상기(想起)되었음'을 시사한다(Lock).
혹자는 '디모데의 서신이나 다른 것에 의해서 디모데의 거짓 없는 믿음을 상기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Bengel, Earle, Guthrie).
2]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디모데의 믿음이 유대교적인가 아니면 기독교적인가에 대해서 혹자는 '로이스'와 '유니게'가 유대인이므로 유대교적 신앙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Lock, Calvin).
그러나 '로이스'가 '유니게'를 헬라인과 결혼시킨 것으로 보면 이미 '로이스'와 '유니게'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 행 16: 1 -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왜냐하면 유대교 신자들은 절대로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니게'에 대해 '믿는 유대 여자'라고 누가가 소개하고 있다(행 16: 1).
'믿는'이라는 표현은 기독교로 개종한자에게 적용되고 있다.
* 행 16: 14-15 - 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따라서 디모데의 믿음은 유대교적 신앙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를 통한 기독교적 신앙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Hendriksen, Guthrie).
이처럼 디모데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로이스'와 '유니게'에 의해서 신앙 교육을 받음으로 '로이스'와 '유니게'의 신앙을 전수받았다.
'확신하노라'의 헬라어 '페페이스마이'(*)는 '페이도'(*, '확신 시키다', '설득하다')의 완료 수동 직설법으로, '나는 확신케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바울이 완전히 확신하였을 때 사용하던 관용구로(Simpson) 디모데의 신앙에 대해 바울이 완전히 신뢰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디모데의 진실한 믿음은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의 외할머니 로이스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 속에 그런 참된 믿음이 있었고 그 동일한 믿음이 아들 디모데에게도 있었다.
경건한 자녀는 경건한 가정에서 나온다.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은 중요하다. 불경건하고 음란한 세대에 경건하고 거룩한 어머니들이 많이 필요하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안을 누리자.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긍휼과 평안을 사모하며 그것을 누리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성화를 이루며 그의 평안 중에 산다.
둘째, 동력자와 성도의 관계를 바로 세우자.
우리들도 바울과 디모데 같은 아름다운 동역자 관계, 성도 관계를 사모하며 이루어 가자. 모든 일을 믿음과 사랑으로 행하자.
셋째, 진실한 신앙인이 되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디모데에게 은혜로 주신 눈물 있는 진실한 믿음을 본받자. 우리는 감사와 회개와 전도의 눈물을 가지자.
넷째, 믿음의 가정을 이루자.
우리의 가정은 디모데가 자란 가정 같은 경건한 가정이 되기를 소원하고 또 우리는 디모데의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본받아 자녀들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바른 말씀으로 양육해야 한다.
딤후 1: 6 하나님의 은사를 불일듯하게 -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
사도들의 안수는 특별한 은사를 동반했던 것 같다.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이 사마리아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안수했을 때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려오셨었다.
* 행 8: 17 -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안수했을 때도 하나님의 은사가 디모데에게 주어졌다. 디모데는 그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해야 하였다. 그 은사는 복음의 일꾼으로서 필요한 사명감과 열심과 충성심 등을 동반한 은사이었을 것이다.
1] 그러므로
이것은 앞서 언급한 것이(3-5절) 이후에 언급될 내용의 근거임을 시사한다(Lenski, Guthrie, Scott).
2]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바울은 디모데에게 과거에 안수를 받았을 때 받았던 하나님의 은사를 상기시킴으로 디모데가 자신의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 딤전 4: 14 -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안수'는 교회에서 특별한 사역을 감당하도록 직분을 부여하는 의식이다. 이 의식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능력과 함께 성직(聖職)을 수여하는 것이었다(Scott). 그래서 디모데도 장로회에서 안수를 통해 '사역자'가 되었다.
디모데가 '장로회'에서 '안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본 절에서는 '바울' 개인이 안수한 것처럼 서술된다. 이것은 디모데가 바울 자신의 계승자이며 안수를 통해서 바울 자신의 기능과 권위를 위임받았음을 시사한다(Scott, Lock).
디모데는 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사'를 받았다(딤전 4: 14).
3]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바울은 그 은사를 계속해서 활용하도록 디모데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불일듯하게'(*, 아나조퓌레인)는 '아나조퓌레오'(*, '불길을 일으키다')의 현재 능동 부정사로 계속적인 행위를 나타낸다.
이것은 디모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사가 완전히 중단되었거나 그 불씨가 꺼졌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역에 대한 열의가 식어갈 때였기에 바울은 처음 안수 받을 때를 상기시킴으로 자신을 계승해서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격려한다.
디모데가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여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두려워하는 심령을 주지 않으셨고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심령을 주셨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교회의 직분자들은 주의 일을 함에 있어서 두려워하지 말고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심령으로 열심히 일해야 할 것이다.
딤후 1: 7 하나님이 주신 것 -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
본 절은 디모데가 안수 받을 때 받은 하나님의 은사를 활용해서 사역을 잘 감당해야하는 이유이다.
1]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바울이나 디모데에게 소명을 주신 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된 것이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직분임을 일깨우고 있다.
2]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두려워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일리아스'(*)는 '의기소침해 있거나 비겁한 상태'를 의미한다.
디모데는 나이가 어린 목회자여서 거짓 교사들을 대적할 때 두려워하였다.
* 딤전 1: 3-7 - 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 도다.
* 딤전 4: 6-7, 12 - 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육체적으로도 병약해서 늘 의기소침해 있었다.
* 딤전 5: 23 -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그뿐 아니라 바울이 투옥된 후 복음 전파하는 것을 두려워했다(7-8절).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님을 권면한다.
'마음'으로 번역된 '프뉴마'(*)를 혹자는 서술 소유격으로 보아 인간의 '영'이라고 주장한다(Guthrie, Lenski).
그러나 '프뉴마'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6절의 '네 속에 있는'과 연결된다. 6절의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는 곧 성령의 은사를 가리키므로 '프뉴마'를 '성령'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Scott, Hendriksen).
(1) 능력
이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난을 견디며 사역자로서의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시사한다(Scott, Guthrie).
(2) 사랑
이것은 사역자가 갖추어야 할 열매이다.
* 갈 5: 22-24 -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단순한 애정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타인을 돕는 것을 가리킨다(Scott).
(3) 절제
이것은 자신을 절제(節制)하는 것과 타인이 온전해지도록 영향을 끼치고 지시하는 것을 시사한다(Scott, Lenski).
이런 세 가지 은사는 사역자가 꼭 갖추어야 할 것으로 바울은 디모데가 과거에 받은 이 은사들을 잘 활용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자신의 직분을 수행할 것을 간절히 기대하며 권면한다.
딤후 1: 8 부끄러워하지 말고 -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
디모데는 하나님께로부터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심령을 받았기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와 또 주를 위하여 옥에 갇힌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을 위하여 그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했다.
하나님의 능력을 따른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도우시며 특히 고난 중에서 그러하심을 보인다. 디모데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도 주의 복음과 주를 위한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을 위해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1]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우리 주를 증언'을 혹자는 주격적 소유격으로 해석하여 '주께서 행하신 증언'이라고 주장하나(White) 그것은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주에 대한 증거' 즉 '복음'을 시사한다(Bernard, Lock, Guthrie).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처럼 디모데도 복음에 대하여 부끄러워 말 것을 당부한다.
* 롬 1: 16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더 나아가 디모데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인 바울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주를 위하여 갇힌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톤 데스미온 아우투'(*)는 문자적으로 '그의 갇힌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어떤 목적 때문에 바울 자신을 죄수로 만드셨음을 시사한다(Scott).
2]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는 디모데 자신이나 바울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능력에 의해 고난에 동참하여 견딜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함께 고난을 받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슁카코파데손'(*)은 '쉰'(*, '함께')을 합성하여 만든 바울의 조어이다.
이것은 바울의 언어적 특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 절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의미라기보다 차라리 '복음을 위하여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의미이다(Lock).
왜냐하면 '복음과 함께'는 '복음을 위하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Earle). 따라서 이것은 바울이 당한 고난을 디모데도 반복함을 시사한다(Scott).
주께서는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고 말씀하셨다(막 8: 38).
주께서는 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고 말씀하셨다(마 5: 11-12).
성경 역사상 믿음의 선진들은 많은 고난을 받았다.
* 히 11: 36-37 -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그러나 그들은 그런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께 충성하였다. 사도 요한을 살펴보자.
* 계 1: 9 -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 요한 사도의 자격 :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요한은 본문에서 자신과 수신자의 관계를 기술하고 있다. '너희 형제요 ... 동참하는 자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호 아델포스 휘몬카이 슁코이노노스'(*)로 하나의 관사 '호'에 의해 두 가지 칭호 즉 '형제'와 '동참하는 자'가 연결되어 있다. 이는 '형제'인 까닭에 '동참하게 된다.'는 인과 관계를 드러낸다.
① 주님의 뜻대로 하는 자.
* 마 12: 50 -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② 동일한 근원에서 나온 자.
* 시 34: 19 -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 도다
* 빌 4: 14 -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 살후 1: 4-5 - 4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2) 동참 - 조언하는 자로써의 역할 :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① 예수의 환난에 동참하는 자
'환난'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해 온전히 충성할 때 나타나는 고난을 가리킨다.
* 요 16: 33 -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 행 14: 22 -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 딤후 3: 12 -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② 예수의나라(하나님의 나라)
예수의 나라는 오는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나라로 '나라'는 메시야적 통치의 축복을 의미한다.
* 사 40: 18-26 - 18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 19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위하여 은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20 궁핍하여 이런 것을 드리지 못하는 자는 썩지 않는 나무를 택하고 공교한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서 흔들리지 않도록 세우느니라. 21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22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 같이 베푸셨고 23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24 그들은 겨우 심기었고 겨우 뿌리었고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의 부심을 받고 말라 회리바람에 불려가는 초개같도다. 25 거룩하신 자가 가라사대,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시느니라. 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 요 18: 36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 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 행 14: 22 -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 롬 14: 17 -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③ 예수의 참음에 동참하는 자
참음이란 충성된 성도에게 요구하는 적극적 인내를 의미한다. '참음'의 헬라어 '휘포모네'(*)는 '휘포'(*, '아래에')와 '메노'(*,'머물다')의 합성어로 충성된 자들에게 요구되는 적극적인 인내를 가리킨다. 이것은 요한도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축복을 기다리는 가운데 환난 속에서 인내하고 있음을 나타낸다(Johnson, Ironside).
* 롬 8: 24-25 -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오.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 약 5: 7-8 -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 딤후 2: 3-8 - 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6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7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8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요한이 '형제'라고 말한 것은 계시를 깨닫는 사람은 환난에 동참하는 '고난의 형제'라는 뜻이다.
* 계 10: 9-10 - 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 예수 보혈의 피로 산 형제다.
* 계 1: 5 -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 다시 예언할 형제다.
* 계 10: l1 -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 계 11: 3 -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 진리로 승리할 형제다.
* 계 17: 14 -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 계 19: 14-15 -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 순교의 형제가 될 때 그 나라(그리스도의 나라 = 천년 왕국)에 동참 한다.
* 계 11: 7-11 - 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가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 계 20: 4-6 -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3) 밧모 섬의 유배 :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에베소의 서남쪽 90㎞, 에게해의 스포라데스 군도(Sporades)에 속하는 작은 섬이다. 남북 16㎞, 동서 9㎞, 면적 40㎢로서 세 산괴(山塊)가 지협(地峽)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해안은 길다(60㎞). 화산암으로 되어 있으며, 밀이나 포도가 재배되고 있다. 일리아스(ProphitisIlias, 예언자 엘리아)산은 269m에 불과하나 전망은 아름답다. 조기(早期)에는 도리안인, 다음에 이오니아인에 의한 식민지로 로마 시대에는 범죄자의 유형지가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요한은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81-96)때에 유배되었다고 한다. 그는 여기서 계시록을 썼다.[1:9] 섬의 남쪽은 전부 성 요한 수도원에 속해 있다. 이 성은 1088년,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콤메누스(Alexius Commenus)의 허가에 따라 성 크리스토둘로스(St. Christodulos)가 일리아스 산정의 고대 신전 자리에 세웠다. 아래쪽에 '계시의 굴'이 있다. 요한이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작은 교회당이 있다.
'인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와 관련되어 요한의 밧모 섬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갔다(Spitta).
Ⓑ 하나님의 말씀, 곧 계시를 받기 위해 갔다(Weiss, Bleek, Lucke).
Ⓒ 복음 전파에 대한 박해로 말미암아 유배되었다(Moffatt, Charles, Vincent, Plummer, Johnson).
세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도미티안 황제 때 에베소 지방에서 전도하던 중 밧모 섬에 귀양 갔다가 후에 귀환하였다고 역사가와 교부들이 전하기 때문이다(Irenaeus, Clement, Eusebius).
① 하나님의 말씀.
② 예수의 증거.
요한은 땅의 길이 막혔을 때 하늘의 길이 열렸다. 육적인 일이 잘 풀어지지 않을 때 주님을 바라보면 사도 요한 같이 영적인 큰 축복을 받게 된다. 하늘의 길이 열릴 때 또한 땅의 길도 열린다.
③ 밧모 - 송진: 뜨거운 태양 아래의 소나무에서 나온 액.
예수의 고난에 동참함이 복이 있다(계 1: 9)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분주하게 살면서 주님이 성도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 십자가의 공로를 잊고 살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다.
(1)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 사 53: 4-5 -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 마 27: 45-46 - 45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는 예언을 하였다. 특별히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말씀하신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에게 평안과 화평과 자유 함과 허물과 죄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결정적인 역사이다. 가시면류관을 예수님의 머리에 씌울 때 그 가시가 살을 파고 들어가는 아픔, 양손과 양발에는 대못이 손과 발에 박힐 때 점점 뼈와 뼈 사이를 뚫고 들어갈 때 아픔과 고통 고난을 생각해 보라! 또 예수님 몸이 박힌 못에 의지하여 매달리는 고통을 받으셨다. 그 뿐 아니라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를 때 물과 피를 다 쏟아내신 그 십자가…. 그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의 허물과 죄악으로 인함이요, 우리는 그 십자가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고 여기까지 왔어도 또 죄를 범하고 있다. 히 6: 4-6에서는 또 범죄 하는 것은 예수님을 두 번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 말씀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 사함을 받고 여기까지 왔다. 이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두 번 못 박는 범죄자가 나오지 않아야 하겠다. 히 9: 12-14에 황소의 피나 염소의 피로 우리의 죄를 사함 받지 못하고 보배로운 어린양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룰 수 있다고 말씀했고, 계 1: 5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셨다고 말씀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의 결과로 우리는 자유 함과 평안함을 얻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평안함을 얻어서 더 범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왔을 때, 예수님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 한마디에 누구도 돌로 치는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죄로부터 자유 한 사람은 없다. 오직 자유 함을 주실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십자가의 공로인 것이다.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으면서 또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죄에 대한 의식과 죄에 대한 인식이 흐려지지는 않았는지….
(2)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들
* 계 6: 9-11 -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첫 순교자 아벨에서부터 우리 시대까지 순교자라 함은 주를 위해 복음을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람을 말한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하셨고, 그 말씀대로 제자들은 다 십자가를 지고 실제로 순교하므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다.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따라가려면 반드시 고난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가정적인 십자가, 개인적인 십자가라 표현한다. 순교자들은 자기의 가정이나 가족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았다. 지나간 역사를 돌아볼 때 순교자는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간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으며, 예수님으로 인하여 핍박받고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즐거움으로 삼았기에 순교할 수 있었다.
히 11: 35 그들이 악형을 받되 더 좋은 부활을 얻는다는 말씀은 계 20: 4-6에 첫째 부활로 살아나는 것을 말씀한다. 순교자는 하나님의 인 맞은 종과 함께 살아나서 주의 재림을 맞이하고,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 천년왕국에 들어가 왕과 제사장으로 참여하니 순교자에게 돌아가는 축복이 크다 하겠다. 그 축복이 순교자에 대한 최고의 대우이다.
(3) 예수의 환난에 동참한 사도 요한
* 계 1: 9 -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자신은 예수님의 환난에 동참했으므로, 그 나라에도 동참한다고 당당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증거로 밧모 섬에 와 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예수의 환난에 어떤 동참을 하였는가? 요 19: 25-27에 예수님이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사하시고 오천 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나타내실 때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곳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고, 제자들마저도 겁이 나서 멀찌감치 따라왔다고 성경은 기록했다. 십자가 밑에 따라간 사람은 두 여인과 사랑하는 제자라고 말씀해 놓고, 요한복음 21장에 와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저 사랑하는 제자는 어찌 되겠습니까’? 물은 그 사랑하는 제자가 사도 요한을 말한 것이다. 제자 중에 가장 연소한 것으로 알려진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마지막 날 밤 만찬석에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하실 때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여 내니이까? 하며 예수님을 팔 가능성을 보였는데, 사도 요한은 뉘시오니까? 여쭈며 전혀 예수님을 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씀이다. 그런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가 예수님의 유언을 받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그날부터 집에 모셨더라 하였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깨닫고 읽고 · 듣고 · 지키는 복 있는 사람은 요한의 형제가 되어서 예수의 환난과 고난에 동참하라는 것이다. 동참하는 그 사람이 계 11: 15 같은 그 나라(그리스도의 나라)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는 예수의 환난과 고난에 얼마나 동참을 하였는가? 깊이 생각하고 돌아보아야 하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과 아픔을 담당하셨는데, 우리는 과연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해 고난에 얼마나 동참을 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할 때 그 아픔과 슬픔은 컸지만, 밧모 섬에 오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엄청난 하나님의 비밀,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는 하나님의 영광과 큰 축복을 받게 되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접받고, 사랑받고, 영광을 받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도 요한과 같이 주를 위해서 받는 고난이 있다면, 반드시 갚아주시는 하나님의 공의로 복이 있을 줄 믿는다.
(4) 예수의 환난에 동참한 인 맞은 종들
* 계 14: 13 -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사도 요한은 계 7: 1-4에서 하나님의 인 맞을 종 14만 4천에 예수의 환난에 동참할 것을 예시하고 있다. 인 맞은 종들이 계 14: 3 순교함으로 예수의 환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순교는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계 6: 9-11처럼 육체가 죽는 순교가 있고, 육체는 살아있지만, 그 속에 육체의 소욕(인간성, 죄악성)을 죽이는 산 순교가 있다. 그래서 산 순교는 죽은 자라 하지 않고 주안에서 죽는 자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지서와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말씀을 읽고·듣고·지키면서 얼마나 산 순교자의 길을 가고 있는가? 생각해 볼 때다. 누군가는 될 일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위해 사는 사람은 복음으로 인해 오는 고통이나 어려운 일들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겪지 않으려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나사렛 이단이란 소리를 들어도 그 사람들을 찾아가 따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두란노서원에 모여서 온 종일 예수그리스도를 전파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사명이 있어 지중해 연안에 있는 밧모 섬에 가서 범죄자 가운데 있었어도 우울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실 때 그에게 어떤 축복이 왔는가? 요한계시록이라는 엄청난 하나님의 비밀을 기록하는 축복을 주셨고,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과 제사장이 되는 축복을 주셨다. 그리고 그는 계시록을 마감하면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고백을 하며 요한계시록을 마감할 수 있었던 사도 요한은 얼마나 기뻤겠는가.
행 4: 10-12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어떤 죄악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지 않고는 회개할 수도 죄 사함 받을 수도 없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 받고, 축복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고 구원을 받는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뒤에 온 은혜와 축복은 오직 그 이름 예수님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환난에 동참한 인 맞은 종들에게 두 증인의 권세로, 그리스도의 나라에 왕과 제사장이 되게 하시는 축복을 주시는 것이 환난에 동참한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다.
결론 :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는 축복이다.
* 살후 1: 5-10 -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6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참여할 때만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
* 롬 8: 17 -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