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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인사말 ( 1: 1 - 2 )
서 론
1. 데살로니가 후서
이 책은 여러 세기 이전의 것이지만 오늘날과 같은 시대를 위해 쓰였다. 이 책은 하나님의 방식들을 훼손시키는 모든 세속적인 가치에 대해 도전한다.
우리가 멋대로 흘러가는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순결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씨름해 본 적이 있다면 이 책은 그러한 당신을 격려해 줄 것이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중요한 도시다.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 때에 이곳에서 세 안식일에 걸쳐서 전도한 결과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그 성에 사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항하여 소동을 일으켜서 바울은 할 수 없이 그곳을 떠나게 되었으나 그곳의 어린 신자들의 영적생활에 걱정이 있었다.
바울이 고린도에 가 있는 동안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희망적인 소식이었다. 디모데는 그 교회의 두어 가지 문제를 가져 왔는데 바울은 이에 대한 편지를 써서 보낸다.
고린도에 있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를 기록한지 수개월 후에 기록한 것이다.
데살로니가에 갔던 디모데는 모든 일이 다 순조롭게 진행되어 간다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 왔으나 그러나 그곳의 몇 사람은 예수의 재림에 대하여 너무나 신경이 과민하여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주님이 오시기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남의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고, 비신자들의 비난이 비등하다고 해서 이 둘째 서신을 기록하여 다시 디모데 편에 보냈다.
2. 저 자
사도 바울. 그는 신약의 27권중 13권을 기록했다.
3. 수 신 자
바울이 제 2차 전도여행 때 설립한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에게 기록했다.
그곳에서 전도할 때 반대가 심했기에 바울은 일찍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들의 믿음을 붙들어 주고, 동시에 그들의 오해들을 바로잡아주기 위하여 썼다.
4. 기록년도
주후 50년 전후로 본다.
5. 주요사상
주님의 재림에 대해 전조가 되는 세 가지 사건이 있다.
(1) 배도하는 일이 먼저 있다 (살후 2: 3).
(2) 어떤 억제하는 영향의 움직임이 있다(살후 2: 6-7).
(3) 사탄의 역사를 따라 악한 자가 나타난다(살후 2: 4, 9).
여기에서 불법의 비밀과 그리고 그리스도의 비밀이 세상에서 병발하여 결국은 필연적으로 충돌하며 그리스도가 승리할 것이다.
이 승리가 그리스도의 재림이 되어 적그리스도를 멸하며 그리고 성도들에게 상을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데살로니가 교인은 주님의 재림은 저들을 악에서와 그리고 세상의 긴장에서 해방시켜 주시므로 일을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조심하여 날마다 자기의 해야 될 일에 충성을 다하면서 예비하고 있다가 주님이 오실 때에 그를 반가이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6. 주요 개론
(1) 박해중의 기대
핍박과 환난 중에서도 믿음이 자라고 사랑이 풍성하며 인내함에 대해서 감사하였다(살후 1: 3-4).
박해의 목적은 저희들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살후 1: 5).
박해의 결과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는 형벌을, 성도들에게서는 영광을 얻으실 것이다(살후 1: 6-10).
그리고 바울은 저들을 위해서 기도하였다(살후 1: 11-12).
다른 사도들도 바울의 사도됨을 인정하고 또 사도로 대우하였으며 자기는 이방인의 사도로 세움을 받았다고 증거 하였다.
(2) 사건들의 설명
예수의 재림에 대한 논란에서 바울은 동심 하거나 두려워하지 말 것을 경계하였다(살후 2: 1-2).
반드시 배교하는 일이 먼저 있고,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며(살후 2: 3-7),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다(살후 2: 8-12).
그러나 하나님이 저들을 택하셔서 거룩하게 하시고 구원을 얻게 하시기 때문에 믿음에 굳게 서도록(살후 2: 13-17) 격려하고 있다.
(3) 준비하라는 권면
바울은 주의 말씀이 널리 퍼져서 영광스럽게 되고 악한 사람에게서 건져 주시기를 위해서 기도해줄 것을 부탁 하였다(살후 3: 1-5).
그리고 교인들 대부분이 자기들의 상업을 중지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주님이 오시기만 기다리는데 대해서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살후 3: 10)고 말함으로써 일하기를 권면하였다.
7. 주안점
기독교의 진리에 대하여 적대적 문화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실제적 방법을 주의해 살펴보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관계들과 경계선들에 관한 지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제 1 장 : 인사와 주의 심판
1. 인사말 ( 1: 1 - 2 )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살후 1: 1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
실루아노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실라이다.
* 행 15: 22 -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제 2차 전도 여행 시 더베와 루스드라에서 만난 제자로서 그의 동역자가 되었다(행 16: 1-3. 17: 14. 18: 5. 19: 22. 20: 4).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제 2차 전도 여행 시 설립되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 일행은 그곳에서 세 안식일에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께서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야 할 것을 증명하고 예수께서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였다(2-3절).
그들의 전도로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권함을 받고 사도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4절). 그것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시작이었다.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이 세 사람은 본 서신의 공동 발신인이다. 그러나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본 서신을 쓰는데 협력하였을 뿐이며 본 저자는 바울이다.
바울은 그의 다른 서신서와 달리 본 서신에서는 굳이 자신의 사도권을 언급하지 않고 간결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그의 사도적 권위가 충분히 인정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세 사람의 명의(名義)로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낸 것은 이 세 사람이 데살로니가 교회와 깊은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루아노는 실라와 동일 인물로서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당시 바나바를 대신하여 바울을 수행하였다.
* 고후 1: 19 -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 행 15: 22 -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 행 15: 40 -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그는 바울의 진실한 동역자로서 빌립보 감옥에 바울과 함께 투옥당하기도 하였고 그를 도와 데살로니가 교회를 함께 설립했으며 베뢰아와 고린도에서 복음을 함께 전하기도 하였다.
* 행 17: 1, 10 - 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 행 18: 5 -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그리고 디모데(하나님의 보배)는 바울의 가장 사랑받는 제자이며 복음 전도의 동역자였다. 그는 경건한 유대인 어머니 유니게에게서 어려서부터 신앙 교육을 받았다.
* 행 16: 1 -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 딤후 1: 5 -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시 루스드라에서 바울과 실라와 합류하였다. 그는 데살로니가를 직접 방문하여 그곳 교회의 소식을 가지고 바울에게 오기도 하였다.
* 살전 3: 1-2, 6 - 1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생각하고 2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6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바울과 함께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에 복음을 전파하고 함께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졌고 가장 존경받는 전도자들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깊은 관계를 갖고 서로 협력하였던 실루아노와 디모데를 공동 발신인으로 하여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냄으로서 실루아노와 디모데도 서신을 쓰는 바울 자신만큼 데살로니가 교회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였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에 있는 지금의 살로니가라는 도시인데,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시 데살로니가에서 그의 복음 전도를 받은 많은 경건한 헬라인들이 개종하여 그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였다.
* 행 17: 1-9 - 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6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방인들에 의해서 세워진 한 지역 교회에 불과하였지만 바울은 그 교회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교회는 지역적으로 또한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모습을 띠지만 각각의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성도의 모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고백하는 신앙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몇 가지 의미가 있다고 본다.
첫째, 창조자의 의미이다.
* 사 64: 8 -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둘째, 구원자의 의미이다.
* 신 32: 6 -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사신]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 약 1: 18 - 그가 그 조물[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셋째, 보호자와 양육자와 공급자의 의미이다.
* 마 6: 26 -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우리 아버지라는 말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보이고 또 성도 상호간의 친밀한 관계도 보인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받은 한 가족이며 식구들이다.
신약성경에서 주로 예수께 사용된 '주'라는 명칭은 하나님의 의미로 약 667회 사용되었다. 구약의 '여호와'라는 명칭은 헬라어 70인 역에서 '퀴리오스(주)'라고 번역되었다.
'주'라는 단어는 온 세상의 주인, 왕, 통치자, 즉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진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크신 하나님이시다.
* 딛 2: 10 - 훔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참 하나님’이시다.
* 요일 5: 20 -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데살로니가 교회를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한 것은 구원이 연합의 관계임을 나타낸다.
죄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지게 하였다. 죄인은 영적으로 죽었고 하나님과 분리되었지만, 구원은 사람을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오게 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시킨다.
교회는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으로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이것은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의 존귀한 특권이며 놀라운 행복이다.
살후 1: 2 은혜와 평강이 -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의 서신들에서 매번 나오는 의미심장한 기도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사랑이다. 그것은 죄 사함과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뿐 아니라, 계속적 용서와 성화와 위로와 새 힘을 주시는 것을 포함한다.
평안은 죄 사함에서 오는 마음의 평안을 비롯하여, 몸의 건강, 물질적 안정, 및 환경적 평안까지 포함한다.
1]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바울 사도의 권면은 항상 삼위 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2]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의 서신서에서 서두의 인사말과 함께 흔히 쓰이는 표현이다.
본래 '은혜'는 헬라식 인사법의 표현이며 '평강'은 유대인 인사법의 표현이다.
혹자는 바울이 이 두 가지 인사법을 한데 결합시킨 것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헬라인과 유대인은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P. J. Gloag).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의미로 사용하기보다는 좀 더 깊은 의미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즉 '은혜'는 헬라어로 '카리스'(*)라고 하는데 그의 서신서인 고후 8: 9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부요하심에 참여함을 뜻한다.
* 고후 8: 9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울러 엡 2: 8-9에서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진술한다.
* 엡 2: 8-9 -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는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건을 믿는 모든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총임을 가리킨다.
그리고 '평강'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레네'(*)는 히브리어로 '샬롬'(*)이며 이는 적대감이 그쳤거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좀 더 깊은 의미로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행복 또는 화목을 말한다.
회개하기 이전에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였다.
* 롬 5: 10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 골 1: 21 -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
* 롬 5: 1 -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대속을 통하여 그를 믿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게 하셨다.
바울은 이런 의미에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시련과 박해 속에서도 '은혜'와 '평강'의 상태에 이르기를 원했다. 이에 바울은 그의 다른 서신 서에서처럼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