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1독서를 보면, 코르넬리우스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코르넬리우스한테 절을 못하게 만류합니다. 왜 베드로가 그렇게 행동했을까요? 겸손한 신앙인은 누구나 모든 사람을 동등한 사람으로 간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에게는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의 구분이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똑같은 제자들입니다. 세례는 거저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신앙도 거저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절을 하는 코르넬리우스를 극구 말렸던 것입니다. 코르넬리우스가 절을 하는 것을 베드로가 당연하게 생각했다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베드로는 교만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코르넬리우스가 절을 하는 것을 못하게 만류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암모니우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이 절을 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스스로를 코르넬리우스와 동등한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어떻게 우리가 다른 사람들한테 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암모니우스 『성경 주해 선집』(사도행전) 10,26-27.)
참고로, 암모니우스는 470년 경에 살았던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이자 교회 재산 관리인이었습니다.
오늘 2독서는 ‘서로 사랑하라’(요한 1서 4,7 참조)고 말합니다. 사랑은 모든 행동의 바탕이 되고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대해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와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라는 오늘 복음 말씀을 생각해보면, 하느님의 사랑과 우리의 사랑이 한데 얽히고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요한 복음 강해』 77,1.)
예수님께서 마치 다른 계명은 없다는 듯이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 “믿음과 희망과 사랑,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코린 13,13). …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 악마도 그리스도를 믿지만(야고 2,19 참조)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악마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도 있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가 어떻게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킵시다. 그러면 다른 모든 계명도 지키게 될 것입니다. 이 계명 안에 모든 계명이 다 들어 있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 『요한 복음 강해』 83,3.)
참고로, 요한이 워낙 강론을 잘 해서 ‘크리소스토무스’(황금의 입, 금구)라는 존칭을 받았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가 된 요한은 검소한 삶을 살면서 사제들과 황실과 귀족들에게 검소한 삶을 살라고 요구했습니다.
사치스러운 삶을 사는 에우독시아 황후가 화가 나서 황제를 꼬드겨 요한을 유배보냈습니다. 요한은 유배지로 가면서 “하느님은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찬미받으소서. 아멘.”이라고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2,000년 교회 역사 안에서 가장 위대한 교부입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 성녀가 아우구스티누스가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덕분에 세례를 받고 교회의 가장 훌륭한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의 사랑과 우리의 사랑이 사슬처럼 얽혀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하느님의 사랑과 우리의 사랑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반듯이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하고, 이웃 사랑은 반듯이 하느님 사랑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로 연결시켜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