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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kbi-미술이야기 스크랩 레오나르도: 도시설계가, 건축가, 물리학자, 의학자, 화가 1
녹비 추천 0 조회 24 11.01.09 11: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레오나르도: 도시설계가, 건축가, 물리학자, 의학자, 화가 1

 

 

 

레오나르도는 미켈란젤로와 마찬가지로 당대에 명성이 높았지만 두 사람 모두 사후에 더욱 위대한 예술가로 인식되었으며, 단지 르네상스의 대가들로서가 아니라 서양미술사 통틀어서 가장 뛰어난 인물들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근대의 초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술의 개념을 확고히 했으며, 서양미술의 규범이 되었습니다. 예술가가 부와 권력의 수족이 아니라 독자적이고 고유한 창작의 세계를 갖고 있다는 점을 생애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근대 예술가의 규범이 되었습니다. 화가들은 레오나르도의 작품을 모방함으로써 독특한 그의 양식을 좇으려고 했습니다. 레오나르도를 존경한 라파엘로 산치오는 <아테네 학당>을 그리면서 플라톤의 모습을 레오나르도로 대신했습니다.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1483-1520)는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와 더불어서 르네상스의 3대 거장으로 불립니다. 궁정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열한 살 때 아버지마저 잃어 사제인 숙부 밑에서 자란 라파엘로는 시인이며 화가였던 아버지에게서 회화를 배웠습니다. 아버지가 타계한 후에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Umbria 지방의 화파의 지도자인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gino(1446?-1524)의 공방에서 도제수업을 받았습니다.

 

화가, 건축가, 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1511-74)는 1550년에 『미술가 열전 Vite de piu eccellenti pittori ed architettori』을 출간했습니다. 미술가들의 전기를 포괄적으로 수집한 이런 종류의 책을 그가 처음 출간한 것입니다. 그는 초판에 레오나르도를 염두에 두고 찬사의 글을 썼습니다.

 

하늘은 이따금 인문학뿐만 아니라 신성까지도 대변하는 인물을 보내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모방하게 하며, 우리의 정신과 지성이 하늘나라의 영역에 다가갈 수 있게 한다.

 

그러나 1568년의 재판에서는 이 구절을 삭제했는데, 이때는 미켈란젤로를 최고의 예술가로 꼽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를 두고 누가 더 우수한 예술가냐고 묻는다면,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훨씬 많기 때문에 그가 미술에 끼친 영향이 월등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더 문명에 기여했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레오나르도의 업적을 꼽아야 할 것입니다. 레오나르도는 미술뿐 아니라 과학에서도 선구자였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르도에게 화가란 세계를 탐구의 대상으로 보고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을 지배하는 명료한 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계를 샅샅이 조사하려고 했으며, 또한 사물들에 감동을 받아 새로운 표현방법으로 재창조했습니다. 그는 만족을 모르는 실험가였습니다. 1519년 5월 2일 레오나르도가 타계하자 제자 프란체스코 멜치Francesco Melzi(1493-1570)는 “자연은 이제 그분과 같은 인물을 창조해내는 데 무력할 뿐”이라고 탄식하며 최대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자가 스승에 대해 쓴 글이라 객관성이 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예술가의 재능을 진정으로 아는 데는 제자가 오히려 더 적합할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타계한 지 한 달 뒤 멜치는 스승의 의붓남동생들에게 스승의 타계소식을 알리면서 “그분은 저에게 있어 최고의 어버이셨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밀라노 태생의 멜치는 어렸을 적인 1508년 이후에 레오나르도의 제자가 되어 그와 함께 피렌체, 로마 등지를 돌아다닌 뒤 프랑스의 앙보와즈에 함께 거주했습니다. 레오나르도가 타계한 후에는 유산상속인이 되었습니다. 화가로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스승의 유고를 책으로 편찬했습니다. 그가 편찬한 책은 현재 바티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무려 5천 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썼습니다. 글의 양으로 보면 그는 예술가라기보다는 저술가라고 해도 타당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기록이 책으로 출간되길 바랐지만 생전에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생전에 120종에 달하는 글을 쓰고 말했지만, 현존하는 건 50종에 불과합니다. 이것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였는데, 절반은 흘린 글씨로 왼손잡이가 동양식으로 쓴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다양한 주제의 책을 읽고 37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성서를 포함하여 이솝, 디오게네스, 오비디우스, 리비, 플리니우스, 단테, 페트라르카, 포지오, 피치노, 풀치의 저술들과 맨드빌의 여행기, 수학 논문집, 우주구조론, 해부학, 의학, 농학, 수상술, 병법 등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의 <어깨에 대한 해부학적 연구>, 28.9-19.9cm.

 

 

 

레오나르도의 <심장, 폐, 대동맥이 드러난 해부학상의 남자 모습>, 27.8-19.7cm.

 

 

레오나르도는 혈관, 신경, 근육의 조직을 세밀하게 관찰했으며 거의 정확했습니다. 왼손잡이 레오나르도의 글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적혀 있습니다, “심장은 그 밖의 근육보다도 훨씬 강하며 ... 피가 심장으로 돌아왔을 때의 열린 심장은 밸브를 잠갔을 때와는 다르다.

 

 

레오나르도의 <기하에 관한 도형과 노트; 우화적 표현>, 29.4-20.6cm.

 

 

레오나르도가 쓴 글을 양적으로 보면 과학과 미술에 관한 내용이 반반이며, 그 중 미술에 관한 것은 1651년에 『회화에 관한 논문』으로 처음 출간되었습니다. 당시 출판사가 편집했지만, 글이 중복되고 짜임새가 없으며 문법적으로도 문제가 있어 내용 면으로는 우수하지만 문장력은 매우 취약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프란체스코 멜치의 『회화에 관한 논문 Trattato della pittura』, 1520-50년경

 

 

레오나르도의 제자 멜치는 스승의 글을 정리하면서 주제별로 글 950편을 뽑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리한 글은 책으로 출간되지 못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회화를 오로지 회화로서만 익힐 수 있다는 당시의 사고를 부정하고 화가가 되려는 사람은 다른 화가의 작품을 모사하기보다는 자연을 연구하고 이해해야 한다면서 들에 나가 다양한 대상들을 바라보고 각 대상의 상이함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화가는 해부학, 원근법, 명암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지각과 경험을 중요시한 것으로 그의 사고의 근거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전래된 “우리의 모든 지식은 지각 안에 그 원천을 두고 있다”라는 문구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해놓은 증명들이, 경험 없이 얻어낸 판단으로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이들의 권위에 맞서는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날 비난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나의 작업이 나의 유일한 참스승인 순수하고 단순한 경험의 소산임을 알지 못하는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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