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3
1.
병원 가는 거 즐거운 사람?
아마 없을테고,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유난히 병원을 싫어한다.
특유의 알콜 냄새도,
흰색으로 칠해진 내부도 맘에 안들고
우거지상을 하고 앉아서
진료순서를 기다리고 있거나
붕대나 기브스를 하고
링거병을 매달고
목발이나 휠체어에 의지한 환자들
병원의 어디를 보나
온통 아픈 사람들 천지고
시름에 찬 표정의 보호자들 뿐이다
물론
오죽 아프면 저럴까 이해도 되고
측은하기도 하지만
병원에 가면 기분이 가라앉는건 사실이다
그런데 솔직히 이런것들은 변명이고
내가 병원을 (특히 주사를) 기피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내일 허리 진료 (혹시 수술까지)를 위해
병원을 가야하지만
나에게 병원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트라우마다
2.
때는 바야흐로 나의 이십대
군복무를 하던 시절,
내가 근무한 부대는
파주 1군단 예하 2기갑여단
제 29전차대대 (탱크부대),
일명 <통일로의 야생마> 대대였다
벽제 쪽 지나다 보면
꽤 큰 규모의 필리핀 참전비가
지금도 있는데
그 뒤쪽 산기슭에
우리 부대가 있었다
(얼마 전에 가보니 없어졌더라)
여름에 혹서기 훈련을 나가면
우리 대대 35대의 탱크는
파평산, 봉일천, 문산, 금촌 인근에
진지를 구축하고
한달간 야외에서 생활을 했다
3.
한창 훈련 중이던 그해 여름 어느 날
안 그래도 가끔씩 아프던 사랑니가
퉁퉁 붓고 너무 아파왔다
이건 뭐, 도저히
사람이 참을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밥도 못먹고
겨우 진통제 몇알로 버티려니
거의 죽을 맛이었다
그런데 설상가상, 사랑니로 모자라
이삼일 후에 반대편 어금니까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충치 치료를 받다가
내비두고 입대를 했는데
그게 말썽이 난 것이었다
왼쪽은 사랑니, 오른쪽은 어금니...
양쪽에서 욱신대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안그래도 삼심몇도의 무더위에
야외 땡볕에서 훈련하느라 땀 뻘뻘인데
양쪽 볼따구니에서까지
열이 올라서 아무것도 못하고
아파서 잠도 안오고
결국 대대장에게 상황보고를 하고
육군병원 치과를 가기로 했다
4.
군인들 병원이지만
군복에 가운을 입은 군의관과
여군 간호 하사관들을 제외하면
일반 병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록 여군이지만 간만에 여자들도 보고
에어콘도 나오고 정말 좋았다 ^^
혹시 여기가 지상낙원? ㅎ
근데 그게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 순서가 돼서 진료를 보는데
환부를 본 치과 군의관이
사랑니는 빼고,
어금니는 신경치료를 하자고 했다
그래서 마취를 하는데
마취주사가 잠깐 따끔하더니
곧 양쪽 볼이 내 살이 아닌 듯
감각이 없어졌다
그리고 군의관이 집게를 들고
사랑니를 단숨에 쑤욱~ 뽑는데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썩은 어금니 치료 상황,
뭔가를 긁어내고 쑤셔대고
이빨을 갈아내는지
매캐한 냄새가 나는데...
서서히 통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좀 참아보려는데
점점 통증이 너무 심해져서
마취가 남아 있어서 어눌한 말투로
군의관에게 말했다
저... 군의관님...
제가 지금... 너무... 아프지 말입니다..
아.. 아야... 아악...
너무 아픕니다!!!!!!!... “
그러자 군의관은
”뭐 이새끼야?
마취 했는데 아프긴 뭐가 아파
이 쫄병새끼 이거
군기가 빠져가지고...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대한민국 군인이 이것도 못참나?
다 끝나가니까 쫌 참아 새끼야!!“
그리고 계속 시술을 하는데
결국 나는
생이빨을 갈아대는듯한
극심한 통증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다가
결국 실신... ㅠ
에어컨 빵빵 나오고
실컷 여군들을 겻눈질로 훔쳐보던
지상낙원은 온데간데 없고
한순간에 지옥이 펼쳐진 것이다
5.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눈을 떠보니
군의관과 간호사가
걱정스레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고
나중에 들어보니
내가 실신하자 당황한 군의관이
부랴부랴 마취주사를 더 놓고
신경안정제인지 뭔지 주사도 놓고
소생술인지 뭔지 하면서
지롤 염병 법석을 떨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호흡이 돌아오자
그때서야 다들 안심을 했다는 후문...
암튼 그 난리를 치고 난 후에
군의관은 나에게 사과하기는 커녕
후속치료가 계속 필요하니
며칠 후에 또 오라고 하길래
내가 미쳤냐?
환자에 따라 마취주사 양 조절도 모르는
돌팔이한테 내가 왜가?
쌩까고 안갔지 뭐~
그 끔찍한 경험 이후
극심한 주사 공포증이 생긴 나는
이가 아파도 병원에 안가고
나 혼자 그냥 집에서
실을 묶어서 뽑아버렸고
내가 다시 치과를 간 것은
수십년이 지난 재작년
뺀 이를 채울 임플란트를 하러 간 것이 전부.
아프리카에서 대상포진에 걸렸을 때도
주사 맞으라는 걸 안맞고
먹는 약으로 버티기도 했다
그 정도로 주사는 나에게
공포의 대상이었고
이것이 내 병원 트라우마의
근원인 셈이다
6.
에필로그로 조금 더...
지금은 모르겠지만 우리 때는
제대를 한달쯤 앞둔 말년 병장이 되면
의무반에 가서 고래를 잡았다
그리고 나면
헐렁한 추리닝을 입고
어기적 대면서
비로소 모든 일과에서
공식적으로 열외가 되는 것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닌지라
제대를 앞두고 고래를 잡았는데
의무병에게 라면까지 상납해 가면서
이쁘게...가 아니라
울퉁불퉁 오돌토돌 못생기게
므흣~~~~하게 잘 만들어 달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부탁했던 생각이 난다 ^^;:
물론 나만 그런건 아니고
도대체 뭘 안다고
다들 그런 부탁을 했음 ㅋ
혈기왕성한 한창때 나이라서
새벽이면 요놈이 성을 내는 바람에
엄청 아프고
꿰맨 곳이 두어번 터져서
피도 여러번 흘렸고
성난 꼬추를 달래느라
엉거주춤 자세로 면봉으로 귀를 파면서
열심히 애국가도 불렀지만
오히려 몇 번 터지고
지 맘대로 다시 엉겨붙고 아물어서
매끈한 것보다 모양이 오히려 더 좋....
아니 내가 지금 뭔 얘기를..
이 이야기는 넘어가고 ^^
암튼 그때 고래잡는 수술을 받을때도
잘라내고 한창 꼬매는 도중에
마취가 풀리는 바람에
결국 중간에 마취 주사를
하나 더 맞고서야 수술이 끝났다는...
그 후 내가 마취가 잘 안되는
특이체질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해외에서 살때는
목걸이에 동전만한 작은 메달을 달고
뒷면에 '마취가 잘 안되는 체질'이라고
써붙이고 다녔다
혹시라도 교통사고나 그런 상황에서
내가 혼수상태인데
마취를 덜 했다가 수줄중 각성이 일어나면
정말 큰일 나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그 목걸이를 하고 다녔던 것.
자, 이제 이 길다란 이야기를
마무리 해야겠다
그저께부터 통증을 느낀 허리를
고쳐야 할 것 같아서
내일 오후에 병원 예약을 했다
사진을 찍어보고 진단을 받아서
수술이 필요하고
며칠 입원을 해야 한다면 해야지
병원도 싫고 주사도 싫고
마취도 잘 안되는 체질이지만
허리가 이렇게 아픈 채로
계속 지낼 수는 없잖아?
기왕 결심한거 잘 고쳐서
좋아하는 산
더 열심히 다니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