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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서한
양성에서 문학의 역할
1. 처음에 저는 사제 양성에 관한 제목으로 이 서한을 쓰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 주제는 사목 활동에 몸담은 모든 이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양성에도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서한으로 저는 개인의 인격 성숙의 여정에서 소설과 시를 읽는다는 것이 지니는 가치에 관하여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2. 종종 휴일의 무료한 시간에, 인적 없는 동네의 한적함과 무더위 안에서, 좋은 책을 찾아서 읽는 일은 유익하지 못한 선택들을 멀리하게 해 주는 오아시스를 우리에게 마련해 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권태나 분노, 실망이나 실패의 순간들에 내면의 평온함을 구하는 데에 기도가 도움이 안 될 때에도 한 권의 양서는 마음의 평화를 찾기까지 우리가 그 풍랑을 다스리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시간을 들여 독서하는 것은, 인격 성숙을 저해할 수 있는 강박적 사고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새로운 내면의 공간을 열어 줍니다. 실제로, 소셜 미디어와 휴대전화와 그 밖의 기기에 끊임없이 노출되기 이전에 독서는 우리가 흔히 경험하던 것이었습니다. 독서를 해 본 사람은 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완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 아닙니다.
3. 비교적 닫힌 구조라서 그 서사를 ‘풍성하게 하거나’ 깊이 이해하게 해 줄 시간도 여백도 빠듯한 시청각 매체와 달리, 책은 독자 개인의 더욱 깊은 참여를 요구합니다. 어떤 의미로는 독자들이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 책의 범위를 확장시키고 자신의 재능과 기억과 꿈, 드라마와 상징으로 가득한 개인사를 동원하여 하나의 온전한 세상을 창조함으로써 본문을 다시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저자가 쓰고자 의도했던 내용과는 상당히 다른 본문이 탄생합니다. 따라서 문학 작품은 수많은 방식으로 새롭게 말할 수 있고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독창적인 종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하나의 살아 있고 언제나 풍성한 열매를 맺는 글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저자에게서 받은 것으로 풍요로워지고 이로써 내적 성장이 가능해져, 우리가 읽는 새로운 모든 작품을 통하여 세계관을 새롭게 하고 확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그러한 까닭에, 저는 적어도 일부 신학교들이 문학에 지대한 관심과 시간을 할애함으로써 ‘화면’에 대한 집착 그리고 해롭고 피상적이며 폭력적인 가짜 뉴스에 대한 집착에 대항해 왔다는 사실을 매우 가치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 신학교들은 조용한 독서 시간과, 고전이든 신간이든 우리에게 끊임없이 많은 것을 시사하는 책들에 관한 토론 시간을 마련하여 이를 실천해 왔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품 직무를 위한 양성 프로그램에는 대체로 충분한 문학 기초 소양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문학은 그저 오락의 한 형태, 곧 미래 사제의 교육과 그들의 사목 직무 준비에 포함할 필요가 없는 일종의 ‘비주류 과목’으로 치부되곤 합니다. 거의 예외 없이, 문학은 필수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저는 이러한 접근이 건강하지 않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미래 사제들에게 심각한 지적 영적 빈곤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미래의 사제들은 인간 문화의 핵심 자체에, 더 구체적으로는 모든 개개인의 마음에 문학을 통하여 특별하게 접근하는 방법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5. 이 서한을 통하여 저는, 사제 후보자 양성의 맥락에서 문학에 기울이는 관심에 근본적인 변화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다음과 같이 밝힌 한 신학자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문학은 …… 한 개인의 신비 안에서, 더 이상 환원할 수 없는 그 핵심에서 솟아납니다. …… 온갖 언어 자원을 활용하여 충만한 표현에 도달할 때에 스스로를 인식하게 되는 삶입니다.”1)
6. 그러하기에 문학은 우리가 저마다 삶에서 간절히 바라는 것들과 여러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문학은 우리의 구체적 실존과 그 본질적 긴장과 열망과 의미와 긴밀한 관계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7. 저는 젊은 시절에 제가 가르치던 학생들에게서 이것을 배웠습니다. 1964년부터 1965년까지, 스물여덟 살이던 저는 산타페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쳤습니다. 고등학교 2-3학년을 가르쳤는데, 학생들이 「엘 시드」(El Cid)를 공부하게 만들어야만 하였습니다. 학생들은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대신에 가르시아 로르카(Garcia Lorca)의 작품을 읽어도 되는지 묻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엘 시드」는 가정 학습으로 돌리고 수업 시간에는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들에 관하여 다루기로 하였습니다. 물론 그들은 현대 문학 작품들을 읽고 싶어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흥미를 끌었던 작품들을 읽으면서 그들은 문학과 시에 전반적으로 맛 들여 나가게 되었고 이윽고 다른 작가들에게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마음은 언제나 더욱 큰 무엇인가를 찾고 있고, 모든 이는 문학에서 각자의 길을 발견합니다.2) 저의 경우에는 비극 작가들을 좋아합니다. 모든 이가 그들의 작품들을 자기 것으로, 곧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한 것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극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운명에 눈물지으면서 우리는 결국 자신 때문에 울게 됩니다. 우리 자신의 공허함과 결점과 외로움에 대하여 울게 됩니다. 제가 읽었던 것처럼 여러분도 똑같이 읽으라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각자가 자기 자신의 삶에 말을 걸고 자신의 여정에 참된 동반자가 되어 주는 책을 찾을 것입니다. 단지 다른 이들이 필수라고 입을 모으니 의무감에서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독서만큼 비생산적인 일은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언제나 조언에 열려 있으면서도 우리 삶의 매 순간 필요한 것을 발견하고자 노력하면서, 열린 마음, 놀라움에 대한 수용, 유연성, 배우려는 의지를 지니고 스스로 읽을거리를 선택하여야 합니다.
신앙과 문화
8. 문학은 진심으로 자기 시대의 문화와 대화를 나누기 바라는 신자들 또는 단순히 타인의 삶과 체험을 공유하고 싶어 하는 신자들에게도 필수적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렇게 확언한 것도 당연합니다. “문학과 예술도 …… 인간 본연의 특성을 배우려고 노력”하고 “인간의 불행과 기쁨, 욕망과 능력을 밝히려고 힘씁니다.”3) 실제로 문학은 우리 일상의 현실과 그 열정과 사건에서, 그리고 우리의 “활동, 일, 사랑, 죽음 그리고 우리 삶을 채우는 온갖 불행한 일”4)에서 단서를 얻습니다.
9. 옛 문화든 새 문화든, 가장 숭고한 이상과 열망 그리고 깊은 고통과 두려움과 열정을 담고 재현하는 문화들의 상징과 메시지, 예술 표현과 서사를 무시하거나 없애버린다면 그 핵심에 어찌 닿을 수 있겠습니까? 소설과 시로 자신의 생생한 체험의 드라마를 표현하려고 애쓰며 속속들이 밝히는 ‘이야기들’을 무시하고 제쳐 놓거나 감상하는 데에 실패한다면 우리가 인간의 마음에 어찌 말을 걸 수 있겠습니까?
10. 교회는 선교 체험을 통하여, 교회의 신앙이 뿌리내려 온 서로 다른 문화들과 만남으로써 -흔히 문학을 통하여- 주저 없이 그 문화에 참여하고 각각의 문화에서 찾은 가장 좋은 것들을 이끌어 내면서 교회가 지닌 모든 아름다움, 새로움, 참신함을 드러내는 법을 배워 왔습니다. 이러한 접근법 덕분에 교회는, 문화적 역사적 특정 ‘문법’이 복음의 풍요로움과 깊이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 근시안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자기중심성의 유혹에서 벗어났습니다.5) 오늘날 절망의 씨를 뿌리려 획책하는, 최후의 날에 관한 많은 예언들이 바로 그러한 자기중심적 믿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문학 양식과 문체를 접함으로써, 다양한 소리로 울려 퍼지는 하느님 계시를 잦아들게 하거나 우리의 필요 또는 사고방식 아래 두는 일 없이 그 계시를 언제나 더욱 깊이 탐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1. 그러하기에, 예를 들어 초기 그리스도교가 당대의 고전 문화와 진지하게 대면하여야 하는 필요성을 통찰하였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동방 가톨릭 교회 교부인 체사레아의 바실리오는 370년부터 375년 사이에 자기 조카들을 위하여 썼다고 여겨지는 「젊은이들에게 한 연설」(Oratio ad Adolescentes)에서 ‘바깥 사람들’(éxothen), 곧 그가 이방인 저자라고 불렀던 이들이 지은 고전 문학의 풍요로움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신학과 주석에 유용한 논증인 말들(lógoi)의 측면에서도, 수덕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도와줄 행실과 행동(práxeis)의 측면에서도, 바실리오는 그러한 풍요로움을 본 것입니다. 바실리오는 그리스도교 젊은이들에게 고전을 그들 교육과 양성을 위한 준비(ephódion, Viaticum), 곧 ‘영혼의 유익’(IV, 8-9)을 위한 수단으로 삼으라고 독려하면서 이 연설을 마칩니다. 바로 그 시대의 문화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이러한 만남에서 복음 메시지의 새로운 표현이 생겨났습니다.
12. 문화에 대한 복음적 식별 덕분에 우리는 다양한 인간 체험 안에서 성령의 현존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사건과 감성과 염원 안에 그리고 마음속 긴장감과 사회적, 문화적, 영적 상황의 긴장들 안에 이미 씨 뿌려진 성령의 현존을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사도행전에 나와 있듯이 바오로 사도가 아레오파고스에서 보여 준 접근법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사도 17,16-34 참조). 바오로는 하느님을 말하며 이렇게 단언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시인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도 그분의 자녀다.’ 하고 말하였듯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사도 17,28). 이 성경 말씀에는 두 인용문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에피메니데스(Epimenides, 기원전 6세기)의 시에서 간접 인용한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별자리와 날씨가 궂을지 갤지 그 징조를 노래한 솔리의 시인 아라투스(Aratus, 기원전 3세기)의 「파이노메나」(Phaenomena)에서 직접 인용한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바오로는 자신이 시의 ‘독자’임을 드러내며, 문학 텍스트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이 바로 문화의 복음적 식별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를 ‘떠버리’(spermologos) 곧 ‘수다쟁이, 허풍선이, 사기꾼’이라고 일축하였습니다. 그런데 ‘스페르몰로고스’라는 이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씨앗을 모으는 사람’입니다. 이는 분명 모욕을 주려 한 말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심오한 진리를 드러냅니다. 바오로는 처음에 가졌던 격분에서 벗어나(사도 17,16 참조), 이방인 시인들의 씨앗을 모으고 아테네 사람들의 ‘대단한 종교심’을 인식하여 그들의 고전 문학 작품의 내용들에서 참된 복음의 준비(praeparatio evangelica)를 알아봅니다.”6)
13. 바오로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바오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해하였습니다. “문학이 인간 내면의 심연에 빛을 비추면, 계시가 그리고 신학이 그 뒤를 이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그 심연을 꿰뚫고 들어오시어 빛을 비추시는지를 설명하는 역할을 맡습니다.”7) 문학은 이러한 심연을 향하는 길, 영혼의 목자들이 자기 시대의 문화와 풍성한 대화를 시작하도록 도와주는 “길”8)입니다.
육신 없는 그리스도가 결코 아닌
14. 미래 사제들의 양성 과정에서 문학에 대한 관심을 증진하여야 하는 구체적인 이유를 살펴보기에 앞서, 현대의 종교 상황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시대의 특징인 신성 회귀나 영성 추구는 그 성격이 모호한 현상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과제는 무신론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을 찾는 많은 사람의 목마름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질적인 해결책들로 이 목마름을 채우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또한 육신 없는 예수님으로 이 목마름을 채우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9) 우리 시대에 복음을 선포하여야 하는 시급한 과제를 위하여, 믿는 이들 특히 사제들은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시고 역사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이 만나 뵐 수 있게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을 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유의하여야 합니다. 곧, 열정, 감정, 느낌, 도전과 위로의 말씀,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손길, 해방시키고 격려하는 눈길, 환대, 용서, 의분, 용기, 담대함으로 이루어진, 한마디로 말해서 사랑이신 그리스도의 육신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15.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미래의 사제와 모든 사목 일꾼이 문학에 친숙해지면, 주 예수님의 온전한 신성이 그 안에서 드러나는 그분의 충만한 인성에 더욱더 민감해집니다. 이로써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 안에서만 참으로 인간의 신비가 밝혀진다.”10)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모든 이가 체험하도록 복음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떤 추상적인 인간의 신비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 삶의 일부를 이루는 상처와 열망, 기억과 희망을 지닌 모든 남녀의 신비입니다.
커다란 유익
16. 실용적 관점에서, 많은 학자는 독서 습관이 인생에 수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합니다. 곧, 방대한 어휘력 습득과 이를 통한 광범위한 지적 능력 계발에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독서 습관은 상상력과 창의성을 자극하며 더 풍부하고 표현력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합니다. 또한 집중력을 향상시키고 인지능력 저하를 막아 주며 심리적 긴장과 불안을 진정시켜 줍니다.
17. 더 나아가 독서는 우리가 인생에서 마주치게 되는 다양한 상황을 이해하고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줍니다. 독서하는 동안, 우리는 인생의 도전을 결국 극복해 내는 등장인물들의 생각, 고민, 비극, 위험, 두려움에 몰입합니다. 글의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가다 보면 장차 우리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될 만한 통찰력을 얻기도 합니다.
18. 독서 장려를 위한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저는 단 몇 마디 말로도 큰 교훈을 주는 저명한 작가들의 글 가운데 두 대목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소설은 “모든 가능한 기쁨과 불행을 단 한 시간 만에 우리 마음속에” 불러일으킵니다. “이러한 감정들은 우리가 인생에서 수년이 걸려야 겨우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것이고, 그 가운데 강렬한 감정은 너무나도 더디게 생겨나기에 우리가 좀체 알아차리기 어렵고, 그래서 우리는 최고로 강렬한 기쁨과 역경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모릅니다.”11)
“위대한 문학 작품들을 읽으면서, 저는 천 명의 사람이 되어 보지만 여전히 저 자신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 시에 나오는 밤하늘처럼, 저는 무수히 많은 눈으로 보지만, 보는 사람은 여전히 바로 저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경배를 드리거나 사랑할 때처럼, 도덕적인 행동을 할 때나 지식을 얻을 때처럼, 저 자신을 초월합니다. 그리고 이때만큼 저다울 때가 없습니다.”12)
19. 그런데 저는 독서로 얻을 수 있는 개인적 이점에만 초점을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독서에 대한 사랑을 다시금 일깨워야 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에 관하여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20. 문학이라고 하면, 저는 아르헨티나의 위대한 작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자기 학생들에게 들려주곤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이 생각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작품의 사상이나 논평에 집착하기보다는, 단순히 그 작품을 읽고 직접 접하며, 우리 앞에 있는 생생한 본문에 몰입하는 것입니다.’13) 보르헤스는 학생들에게 이를 설명하며, 처음에는 읽고 있는 내용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모든 경우에 다른 이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이것이 바로 제가 무척 좋아하는 문학의 정의입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도전을 제기할 때 그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듣지 않는다면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듣지 않으면, 우리가 신학이나 심리학을 제아무리 많이 공부했더라도, 곧바로 자기 고립에 빠지고, 우리 자신과 또 하느님과 맺는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일종의 ‘영적 듣지 못함’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21. 다른 사람들의 신비에 민감하게 해 주는, 문학에 대한 이러한 접근법은 우리에게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성 바오로 6세 교황께서 1964년 5월 7일에 작가들을 포함하여 예술가들에게 하신 용기 있는 호소를 떠올려 봅니다. “저희에게는 여러분이 필요합니다. 저희의 직무에는 여러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아시다시피 저희의 직무는 설교하는 직무입니다. 보이지 않고 형언할 수 없는 영의 세계, 하느님의 세계를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갈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게, 참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직무인 것입니다. 예술가 여러분은 이처럼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다가가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해 주는 일의 장인입니다.”14) 핵심은 이것입니다. 신자들 특히 사제들의 임무는 바로 다른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그들이 주 예수님의 메시지에 마음을 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임무에서, 문학과 시가 제공할 수 있는 기여는 비할 데 없이 큰 가치를 지닙니다.
22.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성찰한 시와 수필로 현대 문학에서 탁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시인 T.S. 엘리엇은 오늘날의 종교 위기를 널리 퍼져 있는 정서적 무기력의 위기라고 예리하게 묘사했습니다.15) 이러한 현실 해석에 비추어 볼 때, 오늘날 신앙에 관한 문제는 주로 개별 교리들에 관하여 더 믿느냐 덜 믿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동시대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그분의 창조물과 다른 인간들 앞에서 깊은 감응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감수성을 되살리고 풍부하게 만들려는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일본 사도 방문에서 돌아오는 길에 저는 서양이 동양에서 배울 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제 생각에 서양에는 시(詩)가 다소 부족해 보입니다.”16)
식별 훈련
23. 그렇다면 사제가 문학을 접함으로써 얻는 이점은 무엇이겠습니까? 훌륭한 소설들을 읽는 것을 사제 교육(paideia)의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고 증진하는 것이 왜 필요합니까? 사제 후보자 양성 과정에서 사제와 시인 사이에는 깊은 영적 연관성이 있다는 칼 라너의 통찰을 되새기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17)
24. 그 독일 신학자가 우리에게 해 준 이야기18)를 들으면서 이 질문들에 대답해 봅시다. 라너에 따르면, 시인의 말은 ‘향수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곧, “무한을 향하여 열리는 문, 형언할 수 없는 것으로 들어가는 문”과 같습니다. “시인의 말은 이름 없는 것을 부릅니다. 이 말은 부여잡을 수 없는 것을 향하여 뻗어 나갑니다.” 시는 “그 자체로는 무한을 선사하지 않고, 그 무한을 가져다 주지도 담아 내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 말씀에 속하는 것입니다. 라너가 이어서 말하는 대로 “시어(詩語)는 하느님 말씀을 부릅니다.”19)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은 하느님이시고, 우리 인간이 하는 모든 말에는 하느님에 대한 본질적인 향수, 바로 그 말씀을 향하여 이끌리는 성향의 흔적이 담겨 있습니다. 진정한 시구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분명히 언급하는 하느님 말씀(히브 4,12-13 참조)에 유비적으로 참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5. 이에 비추어 칼 라너는 사제와 시인 사이에 놀라운 유사점을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말로 표현되지 않은 모든 실재를 가두어 두는 것, 곧 하느님께로 이끌리는 본연의 성향을 말하지 못하는 것, 이를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말뿐입니다.”20)
26. 문학은 우리가 표현 방식과 의미의 상호 관계에 민감하게 해 줍니다. 문학은 식별 훈련의 기회를 제공하고, 미래의 사제가 자신의 내면과 주변 세계에 대한 통찰력을 얻도록 역량을 길러 줍니다. 이처럼 독서는 독자를 자기 존재에 대한 진리로 안내하는 ‘길’이 되고, 불안과 심지어 위기의 순간이 없지는 않을 영적 식별의 여정을 위한 기회가 됩니다. 실제로 이냐시오 성인이 말한 영적 ‘메마름’에 관한 수많은 문학 작품의 내용이 있습니다.
27. 이냐시오 성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적 메마름이란, 영혼이 어둡고 혼란스러우며 저급하고 세속적인 것으로 기울어지고, 또한 여러 가지 마음의 동요와 유혹에서 오는 불안감 등으로 불신으로 기울고 희망도 사랑도 사라지며, 게으르고 냉담하고 슬픔에 빠져서 마치 스스로가 자신의 창조주 주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상태입니다.”21)
28. 어떤 글을 읽을 때 느끼는 어려움이나 지루함이 반드시 나쁘거나 쓸모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나쁜 상태에서 더 나쁜 상태로 타락하는 영혼” 안에서 선한 영은 불안과 동요와 불만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작용한다고 보았습니다.22) 이는 이냐시오 성인이 제시한 대로 선한 영과 악한 영을 식별하는 첫 번째 규칙을 문자 그대로 적용한 것입니다. 이 규칙은 “대죄에서 대죄로 나아가는” 사람들에 관하여 다룹니다. 그러한 사람들 안에서 선한 영은 “이성의 분별력으로써 양심을 자극하고 가책을 일으키는”23) 방식으로 그들을 선과 아름다움으로 이끌 것입니다.
29. 따라서 독자는 교훈적인 메시지의 단순한 수용자가 아니라, 구원과 멸망의 경계가 선험적으로(a priori) 명확하고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은 변화무쌍한 토양 위에서 앞으로 나아가라는 도전을 받는 사람입니다. ‘식별’ 행위인 독서 행위 덕분에 독자는 독서하는 ‘주체’인 동시에 자신이 읽고 있는 것의 ‘대상’으로 직접 관여하게 됩니다. 소설이나 시를 읽을 때, 독자는 읽고 있는 글을 통하여 자신이 ‘읽히고 있는’ 경험을 실제로 합니다.24) 따라서 독자는 경기장의 선수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선수들이 경기를 하지만, 선수들이 그 행동에 온전히 몰입한다는 의미에서 선수들을 통하여 그 경기가 진행되는 것이기도 합니다.25)
주의 집중과 소화
30. 마르셀 프루스트의 잘 알려진 표현에 따르면, 문학은 그 내용과 관련하여 ‘망원경’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26) 이처럼 문학은 존재와 사물을 가리키고, 인간 경험 전체와 이에 대한 우리의 인식 사이에 있는 그 ‘엄청난 간극’을 깨닫게 해 줍니다. “문학은 또한 삶의 단상들을 다듬어 그 윤곽과 음영을 드러낼 수 있는 현상소에 견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문학이 있는 ‘이유’입니다. 문학은 우리가 삶의 단상을 ‘현상하도록’ 도와줍니다.”27) 또한 우리가 삶의 의미에 관하여 자문해 보도록 도와줍니다. 한마디로, 문학은 있는 그대로의 삶을 체험하게 해 줍니다.
31. 그런데 우리의 일반적인 세계관은 우리가 세운 실용적이고 단기적인 많은 목표에 따른 압박으로 ‘축소되고’ 좁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 전례, 사목, 애덕에 봉사하는 우리의 노력조차도 달성하여야 하는 목표에만 집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일깨워 주신 대로, 씨앗이 시간이 흐르면서 풍성한 열매로 무르익으려면 돌밭이나 가시덤불에 뿌려져 숨 막히는 일 없이 비옥한 땅에 떨어져야 합니다(마태 13,18-23 참조). 효율성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식별력을 무디게 하고 감수성을 약화시키며 복합적인 측면들을 간과하게 만들 위험은 늘 있습니다. 우리는 한 걸음 물러나 속도를 늦추고 시간을 내어 보고 듣는 법을 익힘으로써, 정신없이 바쁘고 무비판적인 생활양식으로의 이 불가피한 유혹에 맞서 균형을 갖추는 것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는 어떤 사람이 단순히 책을 읽으려고 멈출 때 가능한 일입니다.
32. 우리는 현실과 관계 맺는 방식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전략적이지도 않고 순전히 결과에만 목적을 두지 않으며 현실을 더 기쁘게 받아들이는 방식입니다. 그러한 방식을 통하여 우리는 존재의 무한한 존귀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문학에서 유일하지는 않지만 특권적인 표현 형태로 나타나는 현실 접근법의 특징은 균형감과 여유와 자유입니다. 그러하기에 문학은 개인과 상황의 현실을, 범주, 설명 체계, 그리고 원인과 결과, 목적과 수단의 선형적 역학 관계를 통하여 부분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는 넘쳐나는 의미로 가득 찬 신비로서 바라보고 살펴보며 식별하고 탐구하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33. 문학의 역할에 대한 또 다른 인상적인 표현은 인체의 활동, 특히 소화 작용에서 비롯됩니다. 11세기의 수도승 생티에리의 윌리엄과 17세기 예수회원 장 조제프 쉬랭은 소가 여물을 씹는 이미지인 되새김질(ruminatio)을 관상적 독서의 모습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쉬랭은 ‘영혼의 위(胃)’를 이야기하였고, 예수회원 미셸 드 세르토는 참된 “소화하는 독서의 생리학”28)을 논하였습니다. 문학은 이 세상에서 우리 존재의 의미를 성찰하고, ‘소화하여’ 완전히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며, 우리 경험의 표면 아래에 있는 것을 파악하도록 돕습니다. 문학은 한 마디로 삶을 해석하고 그 깊은 의미와 본질적 긴장들을 식별하게 합니다.29)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34. 말의 형태와 관련하여, 문학 본문을 읽는 것은 우리가 ‘타인의 눈을 통하여 보게’ 하고,30) 따라서 인류애를 확장시키는 폭넓은 관점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현실에 대한 타인의 시각과 경험과 반응에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도록 하는 상상력을 통한 공감 능력을 계발합니다. 이러한 공감 능력 없이는 연대, 나눔, 연민, 자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글을 읽으면서 우리 감정이 그저 우리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감정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가장 고독한 사람조차 혼자라고 느끼지 않게 됩니다.
35. 인간의 놀라운 다양성과 문화와 학문의 공시적 통시적 다원성은 문학 안에서 그 모든 다양성을 존중하고 표현할 수 있는 언어로 나타납니다. 이와 동시에 그 다양성과 다원성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고 공유되며 의미 있게 하는 상징적인 문법으로 옮겨집니다. 문학은 학문적 서술 방식이나 문학 평론의 비평처럼 경험을 객관화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깊은 의미를 표현하고 해석함으로써 경험의 풍요로움을 전달한다는 사실에 그 독창성이 있습니다.
36. 우리가 이야기를 읽을 때, 저자의 묘사력 덕분에 우리의 눈 앞에는 버림받은 소녀의 흐느낌, 잠든 손주에게 이불을 덮어 주는 할머니, 입에 풀칠하려 고군분투하는 상인의 어려움, 끊임없이 비난받는 이의 수치심 그리고 비참하고 끔찍한 삶의 유일한 탈출구인 꿈으로 도피하는 소년의 모습이 펼쳐집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우리 내적 체험의 희미한 잔상들을 일깨워, 우리는 다른 이들의 경험에 더욱 민감해지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 밖으로 나와 그들의 삶 안으로 들어가고, 그들의 어려움과 열망에 공감하며, 그들의 시선에서 바라보고, 마침내 그들 여정의 동반자가 됩니다. 우리는 과일 판매상, 성매매 여성, 부모 없이 자라는 고아, 벽돌공의 아내 그리고 언젠가는 멋진 왕자님을 만나리라고 여전히 믿고 있는 노파의 삶에 빠져듭니다. 우리는 공감 능력으로 때로는 관용과 이해로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37. 장 콕토는 자크 마리탱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문학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문학을 통하여 벗어나려 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사랑과 믿음이 우리를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가게 해 줄 수 있습니다.”31) 그러나 다른 이들의 고통과 기쁨이 우리 마음 안에서 불타오르지 않는다면 과연 우리가 정말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하여 저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에게 인간의 그 어떤 것도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38. 문학은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치관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학에서 개인의 삶과 집단의 역사적 사건들을 구현하는 선과 악, 참과 거짓의 상징적 표현은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라 맹목적이고 피상적인 단죄를 막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 7,3)
39. 우리는 다른 이들의 폭력성, 편협함 또는 취약함에 대한 글을 읽으며 우리의 이러한 모습을 더욱 잘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습니다. 문학은 인간 경험의 위대함과 비참함을 바라보는 시선을 독자에게 폭넓게 열어 줌으로써 우리가 다른 이들을 이해하려 할 때에 인내를, 복잡한 상황을 마주할 때에 겸손을, 사람들을 판단할 때에 온유를, 우리 인간의 처지에 대한 감수성을 가르쳐 줍니다. 판단은 분명히 필요한 것이지만 우리는 그 한계 범위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판단은 영혼 없는 법의 절대화를 위하여 인격을 말살하거나 인간성을 억압하면서 결코 사형 선고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40. 문학에서 샘솟는 지혜는 독자에게 더 넓은 시각, 한계에 대한 인식, 인지적 비판적 사고를 넘어서 경험을 소중히 하는 자질, 특별한 부요함을 가져다주는 가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역량을 불어넣습니다. 세상과 인류의 신비를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이라는 양극단으로 축소시키는 것이 무익하고 어쩌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독자는 판단을 내릴 책임을 지배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경청을 향한 동력으로서 받아들입니다. 또한 성령의 현존에서 비롯되고 은총으로서 주어진 역사, 곧 인간의 활동에 좌우되지 않고 우리 인류를 구원의 희망으로 재정의하는, 예측도 이해도 불가능한 한 사건으로서 주어진 역사의 특별한 풍요로움에 기꺼이 참여하려는 마음가짐으로 판단을 내릴 책임을 받아들입니다.
문학의 영적인 힘
41. 저는 이러한 성찰을 통하여 사목자와 미래 사목자들의 마음과 정신을 양성할 수 있는 문학의 역할이 강조되었다고 믿습니다. 문학은 이성의 자유롭고 겸손한 사용, 인간 언어의 다양성에 대한 깊은 인식, 인간 감수성의 확장, 나아가 많은 목소리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느님 목소리를 듣기 위한 영적 개방성을 매우 증진할 수 있습니다.
42. 문학의 도움으로 독자들은, 때로는 우리의 교회 담론을 오염시킬 위험이 있고 하느님 말씀의 자유를 옭아매는 자기 지시적인 언어, 거짓된 자기 충족적인 언어, 굳어진 관습 언어의 우상들을 무너뜨립니다. 문학적인 말은 언어를 생동감 있게 하고 해방시키며 정화하여, 궁극적으로 더 풍부한 표현과 확장의 전망을 향하도록 열어 주는 말입니다. 문학적인 말이 스스로를 충만하고 결정적이며 완벽한 지식으로 인식할 때가 아니라,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시려고’(묵시 21,5 참조) 오시는 하느님께 귀 기울이고 그분을 기다릴 때에, 인간의 말은 자기 자신 안에 이미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43. 마지막으로, 문학의 영적인 힘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류 가족에게 맡겨 주신 태초의 임무, 곧 다른 존재들과 사물들에 ‘이름을 붙여 주는’ 임무(창세 2,19-20 참조)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부여하신, 피조물을 돌보는 사람이 되라는 사명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고유한 존엄성과 다른 생명체들의 존재의 의미에 대한 인식을 수반합니다. 사제들도 마찬가지로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며 사람이 되신 말씀과 피조물이 이루는 친교의 도구가 되고 인간 상황의 모든 차원에 빛을 비추는 그분 권능의 도구가 되라는 이 태초의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44. 따라서 사제와 시인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은 하느님 말씀과 우리 인간의 말 사이의 신비롭고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성사적 결합 안에서 드러나고, 경청과 연민에서 비롯된 섬김이 되는 직무, 책임감이 되는 은사, 아름다움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진리와 선의 전망이 생겨나게 합니다. 시인 파울 첼란이 남긴 이 말을 우리는 성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는 법을 참으로 배운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에 가까워집니다.”32)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4년 7월 17일
교황 재위 제12년
프란치스코
1) R. Latourelle, “Literature”, in R. Latourelle & R. Fisichella, Dizionario di Teologia Fondamentale, 아시시(PG), 1990, 631.
2) A. Spadaro, “J. M. Bergoglio, il ‘maestrillo’ creativo. Intervista all’alunno Horge Milla”, La Civiltà Cattolica, 2014 I, 523-534 참조.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1965.12.7., 62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글판,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7(제3판), 278면.
4) K. Rahner, “Die Zukunft des religiösen Buches”, in Schriften zur Theologie, Benziger Verlag, Einsiedeln 1966, Bd. 7, 512.
5)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2013.11.24.,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제2판), 117항 참조.
6) A. Spadaro, Svolta di respiro. Spiritualità della vita contemporanea, 밀라노, Vita e Pensiaro, 101.
7) R. Latourelle, “Letteratura”, 633.
😎 성 요한 바오로 2세, 예술가들에게 보낸 서한, 1999.4.4., 6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12호(1999), 21면.
9) 「복음의 기쁨」, 89항.
10) 사목 헌장 22항.
11) M. Proust,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 Du Côté de chez Swann, B. Grasset, 파리 1914, 104-105.
12) C.S. Lewis, An Experiment in Criticism, 89.
13) J.L. Borges, Borges, Oral, 부에노스아이레스 1979, 22 참조.
14) 성 바오로 6세, 예술가들과 함께한 미사에서 한 강론, 시스티나 경당, 1964.5.7.
15) T.S. Eliot, The Idea of a Christian Society, 런던 1946, 30 참조.
16) 프란치스코, 태국과 일본 사도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열린 기내 기자 회견, 2019.11.26.
17) A. Spadaro, La Grazia della Parola. Karl Rahner e la Poesia, 밀라노, Jaca Book, 2006 참조.
18) K. Rahner, “Priester und Dichter,” in Schriften zur Theologie, Benziger Verlag, Einsiedeln 1962b, Band III, 349-375 참조.
19) “Priester und Dichter,” in Schriften zur Theologie, 316-317.
20) “Priester und Dichter,” in Schriften zur Theologie, 302.
21)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영신 수련』(Ejercicios Espirituales), 317.
22) 『영신 수련』, 335 참조.
23) 『영신 수련』, 314.
24) “Priester und Dichter,” in Schriften zur Theologie, 299.
25) A. Spadaro, La Pagina che Illumina. Scrittura Creativa come Esercizio Spirituale, 밀라노, Ares, 2023, 46-47 참조.
26) M. Proust,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Le Temps Retrouvé, Vol. III, 파리 1954, 1041.
27) La Pagina che Illumina. Scrittura Creativa come Esercizio Spirituale, 14.
28) M. De Certeau, Il Parlare Angelico. Figure per una Poetica della Lingua (Secoli XVI e XVII), 피렌체 1989, 139s.
29) La Pagina che Illumina. Scrittura Creativa come Esercizio Spirituale, 16.
30) C.S. Lewis, An Experiment in Criticism 참조.
31) J. Cocteau – J. Maritain, Dialogue sur la Foi, Firenze, Passigli, 1988, 56; 참조: La Pagina che Illumina. Scrittura Creativa come Esercizio Spirituale, 11-12.
32) P. Celan, Microliti, Milano 2020,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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