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천 백사장이 품은 풍경
무등산 샘골에서 발원하여 광주의 중심부를 가로질렀던 광주천은 옛 광주인들의 생명수였고, 삶의 터전이었다.
광주천 건너편에 읍성과 4대문이 들어서고 주변 군데군데 마을이 생겨나던 조선시대 내내 광주는 수천 명이 모여 살던 조그마한 소읍이었다. 광주천이라는 공식 이름이 생겨날 때인 약 100여 년 전인 1916년, 광주는 최초로 1만 명이 넘게 되고 해방 직전에는 8만여 명이 넘는 도시가 된다. 150만이 살고 있는 지금 광주의 중심부를 황룡강과 극락강이 관통하면서 두 강의 주변에 송산 유원지를 비롯한 각종의 스포츠 시설 등 휴식 공간이 갖춰진다. 그러나 채 몇 만도 되지 않던 해방 이전, 아니 지금 50~60대가 어린 아이였던 시절까지도 광주천은 최고의 휴식과 오락 공간이었다.
무엇보다도 광주천은 어린이들의 신나는 놀이터였다. 계절을 바꿔가며 미역 감고, 낚시하며 고기 잡고, 썰매 타는 장소였다. 그리고 넓은 백사장은 공을 차고 하루 게임을 즐기는 운동장이었다. 대부분이 농사짓고 살던 시절 광주천의 물줄기는 경양방죽으로 흘러 농민들의 생명수가 되었고, 선풍기마저 없던 시절 강변의 거대한 버드나무 숲은 여름 더위를 식히는 최고의 피서지였다. 아낙네들에게도 광주천은 고마운 존재였다. 봄이 오면 겨우내 밀린 빨래터였고, 덤으로 강둑은 나물 캐는 장소였다. 아낙네들의 빨래하는 모습은 1960년대까지도 볼 수 있었다. 목욕탕 하나 없던 시절, 달 저문 그늘진 곳은 남자들 몰래 숨어 땀에 젖은 몸을 씻는 낭만도 있었다.
나이 드신 어르신들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광주천의 풍경 중 으뜸은 시장과 축제였다. 정월대보름에는 줄다리기가 벌어졌고, 추석에는 남사당패들이 들어와 각종 놀이판을 벌였다. 해방 후에는 약장수들의 차지였다. 가설무대를 차리고 가수까지 동원하여 만담과 노래로 인근의 주민들을 끌어 모아 회충약을 비롯한 각종 약을 팔았다. 광주 시민들의 기억 저 편에 남아 있는 나이롱 극장이 그것이다.
광주의 시장은 광주천이 중심이었다. 지금의 부동교 아래 넓은 백사장에는 작은 장이 섰고, 옛 현대극장 앞 백사장에는 큰 장이 섰다. 1928년 광주천 제방사업으로 두 시장이 합쳐져 1932년에는 옛 태평극장 앞 광주천 건너편 사동의 매립지에 사정시장이 개설되면서 2일과 4일, 7일, 9일에 장이 서기도 했다. 그러나 1940년 4월 사정시장 가까이의 광주공원 신사가 국가 관장으로 격이 높아지면서 지금의 양동시장으로 옮겨지게 된다.
축제와 낭만의 풍경으로 남아 있는 광주천은 또한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1919년 3월 10일(음력 2월 9일), 광주천의 작은 장터는 만세 소리로 뒤덮인다. 그리고 3일 뒤인 13일은 큰 장터에서였다. 그러나 대한 독립 만세의 함성이 가득 찼던 작은 장과 큰 장이 열렸던 광주천의 백사장 풍경은 더 이상 없다. 1920년대 광주천의 물줄기가 직선으로 바뀌면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불로동 앞의 작은 장터와 지금의 사동을 이어주던 흙다리 서천교 밑 백사장은 1908년 2월 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기삼연 의병장이 총살당한 현장이었다.
광주천이 광주천이란 이름을 가진 것은 1916년이었다. 광주천이라 불리기 이전에는 어떤 이름으로 불렸을까?
광주천을 일컫는 가장 오랜 이름은 건천이다. 건천은 중종 25년(1530)에 편찬된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등장한다. 건천은 “본현의 남쪽 5리에 있다. 무등산 서쪽 산록에서 나와 서북으로 흘러 칠천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건천이란 이름은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불렸던 이름인 것 같다. 이성계의 조선 왕조 건국에 반대하고 남구 진월동에 숨어 살았던 두문동 72현 중 한분인 정광의 호가 건천이었다. 이는 고려 말에 이미 광주천이 건천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음의 증거다.
동구 금동의 옛 이름은 금계리다. 옛 이름 금계리는 그 앞을 흐르는 내를 금계라 부른데서 연유한 것이다. 무등산에서 발원하여 급하게 내달린 물길이 이곳쯤에서 고운 비단처럼 부드럽게 흘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게다. 금계는 그 멋진 이름답게 오랫동안 광주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다. 해방 직후인 1946년 금정의 이름이 금류동, 금계동으로 바뀌었고, 이어 금동으로 바뀌어 오늘까지 남아 있다.
금동 아래 불로동에 이르면 금계는 조탄이 된다. 글자대로 풀이하면 대추여울이란 뜻을 지닌 정말 멋스러운 이름이다. 왜 조탄이라 불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15세기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나 16세기에 증보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광산현조에 대추가 토산물로 소개되고 있다. 조탄이란 이름도 토산물인 대추와 어떤 관련이 있어 보인다. 유래가 어떻든 조탄이란 이름이 굳어진 것은 지금의 서남대학교 병원(옛 적십자 병원) 앞에 조성된 조탄보(혹은 조참보) 때문이었다. 16세기 명종대에 예조참판, 충청도 관찰사 등을 지낸 양림동 출신 정만종의 호가 조계였다. 자신이 살던 집 앞을 흐르던 개울의 이름인 조탄을 호로 삼았는데, 조탄이라 하지 않고 조계라 했던 것은 문학적 운치를 더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밖에도 광주천의 별칭은 또 있다. 그 중 하나가 서천이다. 광주천이 서문(황금동 일대) 밖을 지나는 하천이었기 때문이다. 불로동 앞의 작은 장터와 지금의 사동을 이어주던 서천교란 다리 이름도 당시 광주천의 다른 이름인 서천에서 따온 것이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는 하천 이름을 정하기 곤란할 경우 그 발원지가 되는 산이나 하천이 지나가는 큰 고을의 이름을 따서 명칭을 정한다는 지침을 공표한다. 1916년 광주천이란 재미없는 이름이 지어진 연유다.
지금 건천, 금계, 조탄, 서천 등 옛 사람들이 온갖 느낌을 담아 부르던 멋스런 이름은 사라지고 없다. 구불구불하게 흘러내리던 광주천이 만든 넓은 백사장도, 그 백사장에 남은 아름다운 풍경도 직선화 공사에 밀려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그러나 광주천변에 남은 역사마저 기억 속의 풍경마저 사라질 수는 없다.
광주천 꽃바심의 주인, 석서정
광주천변의 사라진 기억 속의 풍경 중 정자가 없을 리 없다. 이전 광주방송총국이 있던 사직공원에서 양림동으로 돌아가는 오른쪽 모퉁이에 깊게 패인 웅덩이가 있었는데, 이를 꽃바심이라 불렀다. 1914년 광주의 부호였던 참봉 정낙교가 이곳 꽃바심 벼랑위에 정자를 세웠는데, 이것이 양파정이다. 그러나 꽃바심의 주인은 양파정 건립 당시에 이미 사라진 석서정이다. 석서정은 고려 우왕 때 광주목사 김상이 세운 조선시대 광주를 대표하는 정자였다. 그런데 석서정이란 정자의 이름이 참 재미있다. 석서란 돌로 깎아 만든 물소란 뜻을 지닌 말이기 때문이다. 왜 이곳에 정자를 세웠고, 정자의 이름을 석서정이라고 했는지는 고려 말 대학자 이색이 쓴 석서정기에 고스란히 사연이 담겨 있다.
무등산의 증심사 계곡과 용추계곡에서 흘러내린 광주천이 합류하면서 자주 범람해 사람들의 근심이 끊이질 않았던 모양이다. 이에 근심을 없애기 위해 주술적인 방법이 동원된다. 조선 초 학동 삼거리 부근에 지은 여행자용 숙소 이름인 분수원(分水院)이 그것이다. 지금 분수원은 원지교라는 다리 이름에 그 흔적이 남아 전한다. 지형을 살펴보면 무등산 자락의 두 계곡물이 만나는 곳이므로 합수원이라고 해야 맞다. 그럼에도 분수원이라 부른 것은 거센 물살을 조금이라도 덜어보고자 했던 민중들의 염원 때문이었다.
그러나 분수원이라는 이름만으로는 자연 재해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등장한 보다 합리적인 방법이 지금의 금교 근처에 인공 섬을 만들어 물길을 둘로 가르는 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상당히 타당한 치수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섬 위에 지은 정자가 석서정이었다. 돌로 깎아 만든 물소란 뜻을 지닌 석서는 중국 전국시대에 살았던 이빙의 고사에 나온 말로, 치수란 뜻을 지닌다. 그는 돌을 깎아 만든 물소 모양의 수위표를 만들어 치수에 성공했고, 이 후 돌로 만든 물소는 치수를 뜻하는 말이 된다. 이처럼 석서정은 광주천이 지금처럼 반듯하게 정비되기 이전 옛 광주인들의 근심이 무엇이었는지를 가장 잘 보여준다.
2006년 광주공원 대교 옆에 석서정이 복원되었지만 당시의 근심을 담은 풍경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