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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기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고려는 고려의 신하 이 성계와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패망했다.
그리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이씨 왕조가 들어섰다.
이것은 왕조의 성이 바뀐 역성혁명이었다.
그러면 조선을 세운 태조 이 성계는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이 성계는 당시 원나라 지배에 있던 함경도 영흥의 이자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꿈에 백두산 산신령이 나타났다는 둥 하늘에서 오색구름을 타고 선녀가 내려와 소매 속에서 황금 자를 주었다는 등의 탄생신화는 여느 건국왕들 처럼 신비화 되어 있다.
그는 체격이 좋고 활을 잘 다뤘다고 한다.
훗날 송나라 명장 악비의 자손인 퉁두란과의 활싸움에서 승리하고 자신의 부하로 삼았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퉁두란은 이성계가 이 씨 성을 하사해 훗날 이 지란으로 불리운 측근중 측근 부하였다.
이성계가 처음으로 중앙에 이름을 알린 것은 당시 고려 최고의 명장 최영장군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시점이었다.
이자춘과 이 성계는 최영을 도와 쌍성총관부 함락에 공을 세운다.
그리고 공민 왕으로 부터 서북면 병마사의 벼슬을 하사받았다.
훗날 이자춘이 죽자 그의 아들인 이성계가 벼슬을 승계했다.
그 후 이 성계는 홍건적을 무찌르고 전라도 일대에 침입한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를 이 지란과 함께 무찌르면서 존재감을 알리게 된다.
전북 남원시 운 봉읍 화수리. 사적 제104호.
고려 말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의 터.
이성계가 왕위에 올랐을 때 이미 그의 나이는 57세였다.
그리고 고려의 수많은 충신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다.
광덕산 기슭에는 100여명의 문신과 무신들이 들어가 살면서 세상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곳을 두문동이라 불렀다.
이 성계는 이곳에 사자를 보내어 새 왕조에 협조 할 것을 회유했지만 이들은 거부했다.
거부의 대가는 가혹했다. 모두 불에 타 죽고 말았다.
목은 이색과 길재 역시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고 은둔하면서 생을 마감했다.
태조는 도량이 큰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태조에게서는 동명성왕, 혁거세, 온조, 왕건까지 내려오는 관인대도의 평가는 찾아 볼 수 없다.
그와 최영의 대결에서 결국 최영이 죽자 촌 여자나 소먹이 아이들까지 슬퍼하였다는 기록으로 봐서는 대개 민중이 태조의 반란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경기도 구리 시에 위치한 태조 이성계의 능. 그는 1408년 창덕궁 별궁에서 7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문제는 나이 많은 태조를 대신해 왕위를 물려받을 세자의 책봉이었다.
이 성계에게는 배다른 아들 8명이 있었다.
이중 한 씨의 소생인 5섯째 아들 방원은 아버지를 도와 나라를 세우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래서 당연히 자신이 왕위를 물려받을 줄 알았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이 성계는 두 번째 부인 강 씨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것 같다.
그래서 강 씨의 소생인 막대 방석을 정도전과 남인의 지지를 등에 없고 세자로 책봉한다.
그러자 가만히 있을 방원이가 아니었다.
피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이 무렵 태조는 나라의 기운을 새롭게 세우고자 1394년 무악대사의 도움을 받아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했다.
이방원 지지파와 정도 전을 위시한 방석의 지지하는 피할 수 없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도전일파가 이 방원을 제거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이방원의 반격이 시작되어 방석을 살해하는데 성공했다.
방석이 살해되자 이성계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방원에게는 절대 왕위를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하고는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가 바로 정종이다.
하지만 이 성계는 옥새를 정종에게 넘겨주지는 않았다.
실질적인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도 1398년 이방원 일파에게 암살당했다.
당시 그는 측근인 남은의 첩이 살던 송현마루에서 술을 마시다가 급습을 당하고 말았다.
정종은 팔자에도 없는 왕이 되었지만 동생 방원이 때문에 늘 가시방석 같은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곧 야심 많던 넷째아들 방간이 난을 일으켰다.
방간은 동생 방원 이를 제거하려 했지만 방원의 세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는 결국 방원에게 패하고 만다.
이 싸움을 지켜본 방과 정종은 더욱더 방원이 두려워졌다.
그래서 왕위를 방원에게 내주고 그는 상왕으로 물러앉게 되었다.
방원이가 바로 조선의 3대왕 태종이다.
이 꼴을 지켜본 이 성계는 옥새를 가슴에 품은 채 오대산으로 들어가버렸다.
이 성계는 오대산 , 금강산을 떠돌다가 결국 고향 함흥으로 들어갔다.
한양의 방원이는 몸이 달아 안절부절 할 수 밖에 없었다.
상왕인 이성계의 허락 없이는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명분이 서지 않는 것이다.
방원이는 아버지가 있는 함흥에 많은 충신들을 보내 이 성계를 한양으로 오게 하려 했지만
함흥에 간 신하들은 모두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래서 생긴 말이 함흥차사 즉 가면 오지 않는다는 말이 생기게 된다.
결국 늙은 무악대사가 이성계의 마음을 돌려 결국 이 성계는 한양으로 오게 되고
옥새를 방원에게 넘기며 그를 조선의 왕으로 인정했다.
강원도 고산군 설 봉리 석왕사 . 지금은 북한 땅이라 가볼 수 없다.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꿈을 해석하여 장차 왕이 될 것임을 알려주었다.
형제들 간의 피의 숙청으로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왕인 된 후 민심과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실시했다.
신문고, 호패법, 그리고 한양의 홍수를 예방하기 위한 배수로를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 청계천이다.
야심가 이방원은 죽어서도 서울의 값비싼 땅 서초구 내곡동에 묻혀있다.
그리고 태종에겐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가 양녕, 둘째가 효녕, 셋째가 충녕대군이다.
셋째 충녕대군이 조선최고의 왕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이다.
충녕은 태종의 뜻을 미리 간파하고 미치광이 노릇을 해서 세자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효녕은 바로 절로 들어가 불교에 귀의했다.
세종은 과히 천재형 군주였다.
그는 1421년 집현전을 설치했다.
집현전에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인 성삼문, 최항, 유성원, 박팽년, 하위지, 이개, 신숙주등 이 포진해 있었다.
세종은 정인지로 하여금 고려사를 집필하게 했다.
물론 조선의 관점으로 집필한 역사서이므로 새 왕조의 명분을 내세우기 위해 왜곡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농사직설, 팔도지리지 등도 당시에 제작되었다.
세종은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악기도감을 두고 박연으로 하여금 악기를 개발하게 하는 한편 아악을 완성하기도 했다.
또한 장영실의 천체를 관측하는 간의를 만들게 했고 물시계인 자격루 그리고 세계 최초의 측우기도 세종때 만들어졌다.
조선역학의 기초가 된 철정산 외편도 제작되었다.
조선통보가 세상에 나온 것도 세종 때의 일이다.
군사적으로는 당시 김종서 장군이 활약했다.
그는 압록강 일대의 여진을 정벌하고 육진을 개척했다.
이때부터 국토는 백두산에서 두만강 , 압록강 일대로 확립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종의 업적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1443년 한글 창제이다.
한글 창제는 신하들을 통하지 않고 백성들의 여론을 직접 챙기고 소통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
세종은 왕위에 있는지 32년만인 1450년에 세상을 떠났다.
세종이 죽자 그의 맏아들인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세종이 병상에 있을 때 이미 나라일을 맡아 처리했는데
그 역시 병약하여 세종이 죽었는지 2년만인 1452년에 죽고 만다.
이때부터 다시 조선의 왕실에 피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문종이 죽었을 때 아들 단종의 나이는 12세였다.
단종은 무척 슬기롭고 총명했다.
그래서 할아버지인 세종이 이미 세손으로 봉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인지를 스승으로 삼아 글을 가르치게 했다.
세종은 정인지 이외에도 성삼문과 신숙주 등 집현전 학자들에게 단종의 안위를 부탁하기도 했다.
이렇게 어린 세손을 걱정한 원인은 바로 세종의 아들인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때문이었다.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집현전 학자들과 좌의정 김종서가 단종을 돕고 있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호심탐탐 어린 조카인 단종을 제거하고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모략을 꾸미고 있었다.
수양대군의 측근으로는 한명 회라는 자가 있었다.
수양대군은 가장 껄끄러운 상대인 김종서를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단종에게 이르기를 김종서가 모반을 하여 죽였다고 거짓으로 고한다.
이때부터 단종에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1453년 10월 수양대군인 벌인 사건을 우리는 계유정난이라 부른다.
수양대군은 동생 양평대군 마저 강화도로 유배보내 죽이고 집현전 학자들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찬양하는 글을 쓰게 한다.
당시 집현적 학자로 세종을 배반한 사람들은 정인지 , 신숙주 등이 있었다.
1455년 계유정난후 2년 만에 수양대군은 왕위에 오른다.
집현전 학자중 성삼문은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
성삼문의 이름 삼문은 그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 났는냐? 났느냐? 났느냐? 이렇게 세번 물어봤다 하여지은 이름이라 한다.
그 역시 하늘에서 낸 인물이었다.
1456년 명나라 사신이 세조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연회가 벌어지자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과 유응부가 운검을 맡게 되었다.
성삼문은 이날을 거사 날로 정한다.
이날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김질 등 여섯 명은 한명회, 권람, 정인지, 신숙주를 제거하기로 결의하였다.
하지만 김질의 배반으로 그만 거사는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그들을 기다린 것은 참혹한 고문과 죽음이었다.
이때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여섯 명 ,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등을 사육신이라 부른다.
단종 복위사건의 실패는 결국 단종마져 강원도 영월로 귀양을 가게 되고 청령 포에 감금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1457년 세종은 단종에게 사약을 내린다.
하지만 단종은 사약을 먹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때 단종의 나의 17세였다.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 모습. 양월은 단종의 채취가 많이 묻어 있는 곳이다.
생육신 김시습
세조 때에 사육신뿐만 아니라 생육신들도 있었다.
원호 , 이 맹전, 조여, 성담수,남효온, 그리고 김시습이 그들이다.
청한 자 김시습은 서울 반궁(지금의 서울 명륜동 성균관)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나던 날 밤 같은 마을에 살던 영해 박 씨들은 그 집에서 공자가 태어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가보니, 과연 아기가 태어나 있었다고 한다.
아기는 총명하여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저절로 글을 알고, 3세가 되자 시를 자유로이 지었는데, 유모가 맷돌에 보리를 가는 것을 보며 이런 시를 지었다.
우레 소리도 없는데 어인 천둥인가. 無雨雷聲何處動
노란 구름 조각들이 사방에 흩어지네. 黃雲片片四方分
그리고 5세에는 문리를 깨달았으며, 중용, 대학에도 통달하였다.
그러자 이름난 정승 허조가 찾아와 말을 시켰다.
“내 늙었으니, 늙을 노(老)자로 시를 지어 보라.”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老木開花心不老)”
김시습의 즉각적인 시작(詩作)에 허 정승은 연발 무릎을 치며 ‘신동’이라고 감탄사를 연발하였다고 한다. 그 다음에는 세종대왕이 대궐로 불러 시험하셨다.
“동자의 학문은 마치 백학(白鶴)이 푸른 소나무 끝에서 춤을 추는 것 같구나.”
“어진 임금님의 덕(德)은 마치 황룡(黃龍)이 푸른 바다 가운데서 노는 것 같습니다.”
이에 세종대왕이 기뻐하시며 비단 50필을 하사 하시고, 그 집에 일러 아이의 재덕을 감춰 기르라 하시며, 장차 크게 쓰겠다고 하셨다.
하지만 세종과 문종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고 단종이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그의 인생도180도 바뀌게 된다.
단종이 자리를 빼앗기던 당시 21살이었는데 삼각 산에서 글을 읽다가 그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읽던 책을 불사르고는 미쳐서 중이 되어 그 후 일생을 명산과 절 사이를 오가며 삶을 마감한 풍운의 조선인재다.
또 단종이 암살되자 계룡산 동학사에 몇몇이 모여 남몰래 제사를 모시고, 절의를 지켜 영원히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사육신의 시체를 아무도 거두려 하지 않차 그들의 시체를 거두어 노량진에 묻어 준 것도 바로 김시습이다.
이렇게 세속을 떠난 김시습은 한동안 영해 박 씨들과 행동을 같이 하다가, 나중에 설현을 만나 한 계산)에서 연단법(煉丹法)을 수련하게 된다.
설 현은 본래 원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권진인(權眞人)으로부터 도(道) 공부를 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권진인은 김시습의 사조(師祖)가 된다.
김시습은 설 현에게 선도(仙道)를 배운지 1년 만에 단(丹)을 이루었으며, 다시 금강산에 들어가 9년을 수련하여 득도하였다.
또한 김시습은 10여 년에 걸쳐 신라의 화랑들처럼 전국 국토순례(國土巡禮)를 하였다. 그리고 경주 금오산에서 7년 동안 묻혀 저술에 몰두하였으니, 이때 탄생한 것이 바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였다.
《금오신화》는 부정한 현실체제에 합류할 수 없었던 그의 이상(理想)과 그동안 전국을 순례하면서 얻은 신선사상(神仙思想)의 영감(靈感)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이렇게 7년 동안 《금오신화》를 완성한 김시습은 그것을 석실(石室) 속에 감춰두며 이렇게 말했다.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금오신화》를 바로 발표하지 못하고 ‘때’를 기다려야만 했을까?
조선시대는 주자학(朱子學)을 숭상하고 유교(儒敎)를 국교(國敎)로 삼은 왕조였다. 그러므로 유교 이외의 사상(思想)은 모두 이단(異端)으로 취급하였다. 그리하여 자칫 잘못하다가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영영 매장당하는 시대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시습은 스스로도 만족할만한 금오신화를 집필하였지만, 그 작품 속에 들어있는 선도사상(仙道思想) 때문에 바로 발표하지 못하고 ‘때’를 기다려야만 했던 것이다.
선도(仙道)의 특성 자체가 밀 의적(密意的) 비전성(秘傳性)을 띠는데다가, 조선조의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으로 인해 청한 자 김시습은 자신의 진면목을 두꺼운 베일 속에 감추었다.
김시습은 미친 사람처럼 행세하였으며, 와서 배우려는 자가 있으면 나무나 돌로 치려하고, 활을 당겨 쏘려고도 하며 그 성의를 시험하였다. 또 비단옷을 입는 집의 자제라도 반드시 일을 시켰다.
그리고 산에 살면서 나그네를 만나면 서울에서 자기를 어떻게 평하더냐고 물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욕하고 나무란다.” 하면 반드시 얼굴에 기뻐하는 빚을 지었고, 만일 “거짓 미친 체하고, 속에는 딴 마음이 있어 그런다.” 하는 말을 들으면 눈썹을 찡그리고 기뻐하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아무런 벼슬도 하지 않았던 청한 자 김시습이 누더기에 패랭이를 쓰고 14세 연상의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이 타고 가는 가마에 거침없이 다가가 서거정의 호를 부르며 수작을 하였다.
“강중(剛中)은 편안한가?”
그러면 대제학 서거정이 가마를 세우고 김시습과 한참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세상 사람들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또 40세 연상인 집현전 부제학 조상치(曺尙治)와도 허물없이 친구로 지내는가 하면 김수온(1410~1481), 서거정(1420~1488), 홍윤성(1425~1475) 등 모두 나이 많은 고관대작들이 김시습(1435~1493)을 깍듯하게 대접하며 상석(上席)에 앉혔다고 한다.
이는 김시습이 5세 신동(神童)이라거나, 유불 도에 통달한 학자 내지 도인(道人)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정도(正道)를 수행(修行)하는 힘, 즉 기세(氣勢)에서 항상 청한 자 김시습이 여타의 인물들보다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굽힐 줄 모르는 굳센 기세(氣勢)를 가졌던 청한 자 김시습은 승려의 신분으로서 운명할 때에도 선도(仙道)의 시해선(尸解仙)으로서 마지막 삶을 끝마무리 하였다.
시해선(尸解仙)은 바로 지상선(地上仙)이었으니, 그로 인해 청한 자 김시습이 조선시대 선도(仙道)의 비조(鼻祖)로 꼽히고 있는 것이다.
그가 운명할 때 승려의 신분으로 마땅히 불교의식에 따라 화장(火葬)을 해야 했으나, 그는 이렇게 유언하였다.
“내가 죽거든 화장(火葬) 하지 말고, 땅에 묻으라.”
그래서 절 옆에 임시로 묻었다가 3년 후에 장사지내려고 그 빈소를 여니, 얼굴이나 모든 것이 생시 모습 그대로였다. 바로 선도(仙道)의 시해선(尸解仙)이 된 것이었다.
이를 두고 율곡 이이(李珥)는 이렇게 말하였다.
“필경 외도(外道=仙道)를 닦은 때문에, 죽었어도 살았을 때처럼 모습이 그런 것이다.”
늘 비분강개하여 종이 두루마리를 가지고는 냇가에 앉아서 글을 지어 물에 띄어 보내고는 울기,
곡식을 심어놓고 자라자 갑자기 낫을 휘둘러 베어버리고는 또 울기.
양반벼슬아치 놈들이 잘못하는 것을 보고는 이백성이 무슨 죄가 있소 하며 부르짖고는 울기를 마다하지 않던 의혈남아 김시습...
그가 미친 것은 아마 의로 미친 것이었다.
그는 세조와 그의 측근들이 벌이는 서압에 대해 유령같이 음랭한 비웃을 음 던지는 자였다.
길가에서 오줌을 갈길 때 그것은 세조의 얼굴에 대고 싼 것이고 , 뒷간에 빠졌을 때는 제 몸이 아니라 그 시대를 빠뜨린 것이었다.
강원도 강릉에 있는 매월당 기념관. 그는 시대를 앞서간 천재였고 진정한 의인 이었다
조선시대 (중기) 한반도사
조선시대 중기 ( 예종, 성종, 연 산군, 중종, 인종, 명종, 선조)
서슬 퍼렇던 수양대군이 죽고 나서 왕이 된 사람은 예종과 성종이다.
이 시절을 사람들은 조선이 태평성대시절이라 하지만
사회는 겉보다는 그 속을 보아야 한다.
세조 때부터 성종에 이르는 시절은 의인들의 빚값이 아직 씻기지 않은 회칠한 무덤의 시절이었다
예종때 인물로 남이 장군이 있는데 그는 태종의 외손자 되겠다.
남이 장군은 훗날 한명 회와 함께 세조때 권세를 누렸던 권람의 사위가 되지만 결국 한명회의 모함을 받고 죽임을 당한다.
예종의 왕비는 한명회의 딸이었는데 남이의 권력이 점차 강성해지자 한명회가 그를 제거한 것이다.
"남이의 옥사" 라는 이 사건은 조선시대가 중기로 넘어오면서 당쟁의 씨앗을 키우던 시기이기도 하다.
유자 광이라는 소인배가 남이가 쓴 시 내용 중 남아이십미평국의 평자를 득자로 고치면서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누명을 씌운 것이다.
김종서, 남이 장군 모두 한명 회 일파에게 죽임을 당했다.
당시 병조판서였던 남이는 역모죄르 문책을 받던 중 같이 역모를 꾸민 자가 누구냐고 묻는
예종의 질문에 자신의 죄 없음을 잘 알고 있음에도 아무런 간언을 하지 않던 영의정 강순을 지목한다.
남이가 처형당할 당시 나이는 약관 28세였다.
세조의 차남 예종은 왕위에 있는지 1년만에 세상을 떠나고 그 다음 왕위를 이은자가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의 차남 자산군 성종이다.
성종은 당시 13세였기에 세조의 왕비인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성종의 어미니 는 인수대비 였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한명 회는 자신의 딸을 또 성종에게 시집보낸다.
그러나 성종 년 1474년에 죽고 만다.
그리고 문제의 윤기무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는데,
윤씨 부인에게서 세자 융 훗날 연 산군이 태어났다.
윤 씨 부인은 무척이나 질투심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정귀인, 엄소용, 군 숙의 세 사람과의 암투가 시작되는게 그 싸움의 도가 지나치게 되었다.
그리고 성종이 윤 씨 부인의 처소에서 비상과 저주를 부르는 주문서를 발견하고 왕비 윤 씨를 자수궁으로 옮겨 근시토록 하였고 왕비 친정 식구들의 궁궐 출입을 금했으며 급기야 세자를 보는 것조차 금했다.
이에 원망과 앙심을 품은 윤 씨는 자신의 처소를 찾은 성종과 다툼 끝에 용상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고 만다.
지금이야 부부싸움 끝에 그럴 수도 있다고 하지만, 당시 왕의 얼굴에 상처를 낸 것은 상상을 할 수 없는 대역죄에 해당되는바...
성종은 1479년 윤 씨를 패하고 친정으로 돌려 보낸 후 결국 1482년 사약을 내린다.
사역을 먹다가 윤 씨는 한삼 자락에 피를 토하는데 그 한삼 자락을 자신의 친정 어미에게 주면서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훗날 그 피 뭍은 한삼자락이 조선의 왕실을 피로 물들이게 했다.
성종이 1494년 세상을 떠나자 다음 왕위에 오른 자가 세자 융 즉 연 산군이다.
연산군은 그야말로 폭군이었다.
그는 후궁 장녹수에 빠져서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면 오히려 후궁 장녹수가 조선의 실권을 잡고 흔들었다.
조정의 벼슬아치들은 장녹수에게 뇌물을 바치고 벼슬을 샀다.
그리고 어느 날 간신배 임사 홍이 장녹수에게 폐비 윤씨에 관한 이야기를 흘린다.
연산군은 어릴 적 벌어진 어미의 일에 대해 전해 듣고는 외할머니 신 씨를 만나게 된다.
외할머니 신 씨는 연 산군에게 피묻은 한삼자락을 전한다.
그 다음 부터는 연산군의 피의 복수가 시작되는데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무덤에 있던 한명 회 마져 목이 다시 잘리는 끔찍한 일을 당했다.
연산군의 폭정은 날로 심해져 결국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이 연 산군을 몰아내고 1506년 중종 반정을 일으키는데 성공했다 중종은 성종의 세 번째 부인 자순대비에게서 난 왕자로 연산군과는 배다른 동생이었다.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쫓겨 가서 1506년 11월 31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성종 때에도 예종때 처럼 김종직 일파의 사림파와 서거정 일파의 반사림파의 대립이 있었다. 무엇보다 김종직을 사림파의 영수로 확실하게 기억시켜준 것은 그의 사후에 일어난 1498년의 무오사화였다. 사관(史官)으로 있던 그의 문인 김일 손이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수록하였고, 이것이 연산군 대에 필화 사건으로 이어진 것이다. 무오사화는 김종직의 이름 석 자에 ‘영남 사림파의 영수’라는 칭호가 늘 따라붙게 하는 대표적인 근거가 되었다. <조의제문>은 1457년, 김종직이 27세가 되던 해에 쓴 글이었다.
강화도 교동에 위치한 연 산군 유배지. 갑자사화후 2년 만에 그는 권좌에서
축출되었다.중종은 반정에 성공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지금껏 왕실을 지배해온 훈구파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 사람 파를 조정에 불러들이는데 신진 사림파의 우두머리가 바로 사림파의 시조 김종직 문하의
조광조이다.
그는 미신타파를 위해 소격서를 없애고 현량과를 실시하여 인재를 두로 기용하며 훈구파의 공훈을 없애는 개혁정치를 펼쳤으나 결국 훈구파와의 권력 갈등(1519년 기묘사화)이 벌어진다.
훈구파가 조광 조를 없애려는 계획을 모두 짜고 훈구파의 홍경 주는 중종의 사랑을 받고있는 딸 희빈 홍씨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다음날 궁궐의 나뭇잎에 주초위왕 (走肖爲王)의 글씨가 새겨져있었습니다.
희빈 홍 씨가 나뭇잎에 꿀을 발라 글씨를 만든 것이었죠.
주走 자와 초肖 자를 합친 趙(조광조의 성) 조 씨가 왕위를 세운다는 헛소문이 널리퍼져 임금인 중종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종 14년 (1519)년에 터진 기묘사화로 는 그만 세상을 떠나게 되고
조광조가 열심히 개혁했던 정치판마저도 훈구세력에 의해 다시 망쳐지고 말았습니다.
능주로 귀양 갔다가 그곳에서 사약을 받았다.
전남 화순군 능주면에 위치한 정암 조광조의 유배지터.
중종때 벌어진 기묘사화로 많은 사람 파들이 숙청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중종때 유명한 학자로는 황진이가 사모한 서경 덕이 있는데 그는 지방의 하층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 은둔 생활을 하며 한묵을 연구하다가 1546년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화담집이 있다.
중종사후 인종이 왕위에 오르나 9개월 만에 죽고 명종이 왕위를 계승한다.
명종 때에는 외척 윤원형의 세도를 떨쳐 왕실의 기강이 무너지고 있었는데 윤원형은 을사사화를 일으켜 권력을 잡는데 성공했다.
조선이 건국후 중기에 접어들자 점점 나라의 기강이 흐려지고 권력자들의 기강도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1559년에는 성호 이익과 조선의 3대도적 (홍길동, 장길산, 임꺽정) 백정 출신 임꺽정의 도적 때가 활약하기도 했다.
경기도 파주 감악산에 있는 임꺽정굴.
당시 유명한 학자로는 퇴계 이황이 있다. 이황은 조정이 점차 문란해지고 어려워지자 고향으로 돌아가 낙동강 상류에 영진 암을 짖고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그의 제자로는 유성룡, 김성일, 기대승, 조목 등이 있으며 이들은 영남학파를 이루어 한국 유학사상의큰 업적을 남겼다.
경북안동의 도산 서원모습. 이곳에서 퇴계는 조선을 이끌어갈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명종이 1567년 세상을 떠나자 왕이 된 자는 임진왜란으로 유명한 선조다.
선조 때 유명한 학자로는 단연 율곡 이이다.
그는 13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한 천재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에 몰입했다.
그는 수많은 저서를 남겼고 임진왜란이 일어나 기전 선조에게 10만 양병설을 제안했으나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1584년 4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율곡이 학문이 깊고 마음이 맑은 대인이라는 사실은 누구든 인정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당쟁에 대한 그이 태도에는 조금 모호한 점이 있다.
율곡은 당시 조정을 지배하고 있던 패악중 하나인 당쟁의 원인을 너무 가볍게? 생각한 듯하다.
이것은 그가 보인 이준경의 유차에 대한 태도에서 알 수 있는데
유차는 선조때 영상으로 있던 이준 경이 죽기전 유언4조로 임금께 올린 것을 가르킨다.
그 하나는 임금더로 학문을 힘쓰라는 말이고, 그 둘은 제왕의 위를 갖추라는 말이요, 그 셋은 군자와 소인을 갈라서 쓰라는 말이요, 넷은 지금 붕당이 있으니 속히 그것을 없애라는 것이었다.
선조 때는 이미 세조때 시작된 훈구세력과 예종, 성종, 연 산군, 중종, 인종, 명종을 거치면서 당파세력들의 싸움과 반목이 심화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하지만 율곡은 이준 경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린다.
심지어 귀담역설이란 표현으로 귀신같은 이야기며 물여우와 같은 설이다. 라는
울곡 답지 않은 다소 과격한 표현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울곡 만한 사람이 정말 당쟁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그리고 이준 경의 충심을 몰랐을 리도 만무하다.
울 곡이 걱정한 것은 당파의 기운이 무륵익은 조정에 그런 말을 하면
장차 화단을 더 일으킬 거라는 불안이었다.
끝내 조선선비를 위하는 마음, 사건을 될수록 확대시키지 말고 타협하여 원만히 해결짖고 싶은 마음,
모두 다 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은 사건의 본질을 외면하고 그 분쟁의 씨앗을 더 키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당시 선조의 신임을 받고 있던 율곡이 이준 경의 유차를 기회삼아 철저히 조선 조정을 수술했다면
훗날 흉한 꼴을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중병은 미적지근한 처방으론 결코 치유할 수 없다.
행여 그것이 나은 듯 일시적으로 불수는 있지만 점점 더 뿌리는 깊어가고 있는 것이다.
정말 동서간의 분쟁의 원인이 당시 척신이었던 심의 겸이 김효원의 이조전랑 천거 문제를 두고 벌인 사림파들 간의 갈등이 전부였던가? 당시 심의겸과 김효원의 문제는 이이의 상소로 해결이 된 듯 보였지만
결국 심의겸파인 서인과 김효원파인 동인의 갈등은 조선중기와 후기 모두를 망치고 만다.
강원도 강릉 시에 있는 율곡의 생가터 오죽헌의 모습. 퇴계의 영남학파가 동인으로 그리고 율곡의 기호학파가 서인으로 나뉘면서 나중에 당쟁이 격화되지만 퇴계와 율곡의 35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학문적 동지관계를 유지했다.
임진왜란 1592~1597년
1575년 일본은 전국시대가 끝나는 대회전 시대였다.
당시 일본의 군력의 핵심 인물 중 한명인 오다는 1575년 포루투칼 선교사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내가 곧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다.
그리고 곧 조선과 명을 점령할 것이다.
그러니 너희 나라는 함대와 포를 빌려주고
일본을 적극 도와라~
그러면 기독교 포교 권을 포루투갈에 주겠다.
그러나 1582년 혼 능사라는 절에서 아게지라는 부하에게 기습을 당해 죽는다.
오다의 죽음으로 피비린내 진동하는 사무라이 권력암투를 끝내는 자가 히데오시다.
그가 일본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히데오시는 당시 대마도가 조선을 지배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1589년 히데오시는 대마도로 사신을 보낸다.
그리고 조선은
1590년 3명(황영길,김성일, 허성)의 사신을 마지못해 일본으로 보냈다.
히데오시의 오만한 답서를 살펴보자
히데오시 답서 : 나 히대오시는 낮잠을 주무시다 어머니가 꿈속에서 태양이 치마 속으로 들어오 나은 자다. 태양의 아들이다.
그러니 아름다운 이름 나의 가명을 삼국에 드날리고 싶다.
바라건대 우리가 명을 치는데 길잡이가 되어 달라. 가도입명
이세상은 서쪽은 로마 동쪽은 내가 다스린다.
포르투갈 총독에게 1585년 히데오시가 보낸 서신의 내용이다.
이미 히데오시는 조선을 가교로 명을 정벌할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물론 그의 뒤에는 세계 최고의 강력한 군대를 거느린 포르투갈 형님 함대가 있었다.
반면 조선 왕조는 일본(왜국) 을 한수 아래 조공 국으로 생각하며
1470년 이후 사신을 한명도 보내지 않았다.
일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세계정세에 둔감했다는 뜻이다.
이미 당시 명은 쇠퇴하고 있었고 일본은 대항해 시대를 통한 서양세력과의 협력(포르투갈의 화약총을 이미 수입) 으로 군사적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우리에겐 영원한 큰 형님 명나라가 언제고 우리를 지켜 주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이렇게 명나라와 화친한 것이 일본에 대한 우월의식을 발휘하게 되는 조건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마치 지금 미국에 빠짝 붙어서 북한에 대한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 차이가 없다.
인진왜란은 일본과 조선이 벌인 전쟁이 아니라 외세를 등에 업고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의 야욕과
그것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려는 명나라를 대신해 조선이 자기 땅에서 대리전을 벌인
어처구니없는 국제 전쟁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후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는 사람은 조선왕조에 단 한명도 없었다.
이렇게 정치적 개혁에 실패하고 세계정세에 둔감함 조선왕조의 수구 꼴통세력들로 인해
또 다시 병자호란 그리고 한일합방의 치욕을 조선민중에 경험하게 하고
358년 후에 해방된 조국에서 이념갈등으로 인한 강대국의 대리전을 한반도에서 비극적으로 치르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다.
아~ 수구 보수꼴통들....
그럼
임진왜란 전개방향을 살펴보자~
1592 4-12 월 1시기
1593. 1596 12월 2시기(강화협상)
1597 강화협상 결렬 후 재침입(정유재란)
1477년 부터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다이묘들의 패권시대로 접어들며
전쟁의 실전경험을 100년 이상 쌓고 있었다.
한마디로 일본넘들은 100년 동안 칼잡이들에 의한 권력 이동이 빈번하게 일어난 혼란기였다.
자기들끼리 국내리그를 겪으면서 전쟁머신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15세기 조선의 군사제도는 진관체제에서 16세기 제승방약체제로 병역체제 바뀌었고 개병 제에서 면포 2필을 바치면 국가가 용병을 양성한다.
일찍이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가 죽을 때 남긴 말이 반드시 왜하고 사이가 나빠지면 안 된다고 했고, 율곡도 선조에게 십년이 못되어 큰 변이 일을 터이니 군사 10만을 양성하라고 간언했지만
유성룡은 태평성대에 군사를 기르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반대했다.
그리고 왜 나라의 풍산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교섭이 하도 시끄러워 결국 조선에선 동인의 김성일과 서인의 황윤 길을 사신으로 파병하여 왜의 동향을 살피고 돌아오지만
둘의 의견은 극명하게 나누게 된다. 짐승일은 풍산수길에 대해 평가하기를 " 그 눈이 쥐눈 같아 족히 두려울 것이 없더라." 라고 했으며 서인 황윤 길은 " 그 눈빛이 번쩍번쩍한 것이 과연 재주와 용맹이 있는 사람 같더라" 라고 전했다.
당시 조선은 동인세력이 지배하고 있던 시절, 당연히 김성일의 의견이 채택되고 결국 큰 국란을 당하고 만다.
1592년 왜란이 드디어 일어나자 왜군은 파죽지세로 한양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왜군과의 전투를 위해 성 인 남자들이 기록된 장부를 기준으로 군사를 지금의 동대문 운동장 자리에서 모집했지만 오합지졸 수십명의 사내들만이 모였다고 전해진다.
이 사실을 통해 당시 조선왕조 정치의 무능함과 행정관리 체제의 부실함에 통탄을 금할 수 없다.
암튼 전쟁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유약한 선조는 14명의 세자 중 광해 군을 왕세자로 지명하고 백성들의 원성을 뒤로하고 피난길에 오른다.
6.25 당시 이승만이 국민들을 서울에 남겨둔 채 한강다리를 끊고 대전으로 도망간 사실과
아주 판박이다.
이렇게 선조는 의주로 피천하고 우리의 영웅 이순신은 남해와 서해를 장악하며 왜군의 진군을 막아내고 있었다.
존경하는 의병장 곽재우는 의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왜군의 배를 갈라 심장을 구워먹는 호기를 부리며 왜군의 낙동강 진출을 필사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곽재우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제자이자 외손녀 사위이기도 했다.
나중에 망우정 곽재우 장군은 지금의 대구 달성군의 비슬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려고 했지만 결국
선조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목숨 걸고 조국을 위해 싸운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장들을 역모 죄로 몰아 탄압하고 처단한다.
금산에선 삼부자가 다 충의전사를 함으로 삼종사란 말을 듣는 고경명 장군이 활약하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진주에선 외롭게 성을 지키다가 형세가 이롭지 못하자 부자가 서로 안고 촉석루 아래에 푸른 피를 뿌린 김천일 장군이 있었으며 조헌장군은 금산을 지키다가 칼이 부러지고 화살이 다하자 육박전을 벌이다가 사망했다.
광주 무등산 자락에서 태어난 김덕령 장군역시 타고난 용기와 재주를 나라를 위해 한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충청도에서 일어난 이 몽학의 반란에 연류 되었다는 억울한 음모에 휘말려 죽을 때까지 매질을 당하는 비참한 죽임을 당했다.
이들은 모두 수없는 무명의 영웅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경남 의령에는 망우정의 생가 터가 있다.
의주로 도망간 선조와 조선 관리들은 명군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명나라에
역시 평양까지 왜군이 몰고 들어온다면 명나라의 영토 마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 원군을 파 명하고 벽제에서 강화협상을 요청한다.
6.25때 중국의 팽덕회가 김일성에게 했던 얘기나 임진왜란 때 명군의 이어송이 선조에게 했던 얘기는 본질적으로 같다.
명(중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싸울 뿐 조선의 독립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게 당연한 세상이치이다.
이렇게 임진왜란은 명나라가 개입되면서 외세에 의해 주도권이 넘어가게 된다.
명에 의해 제기된 협상대표로 명나라 심유경이란 자가 결정된다.
절강성 출신의 상인으로 일본어에 능통한 자였다.
일본의 요구는 명의 황녀를 일본천왕의 후궁으로 보내고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일대의 영토와 정치적 지배를 요구하였으며 조선왕조와 대신들을 인질로 삼고 중일 무역 제기를 요구했다.
그리고 일본군이 조선 땅에서 철수하면 명나라는 히데오시를 일본의 국왕으로 승인 할 것을 요구했다.
명나라가 보기에 일본의 요구는 너무 과한 처사였다.
하지만 일본은 전반적인 한반도 전투는 그들이 이긴 것으로 간주했고
승전국으로써 이정도의 전리품은 당연히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명나라 협상대표였던 심유경은 이러한 사실을 명나라 황실에 제대로 보고하지 않으면서 협상을 4년간 지속했다.
상인으로써 조선 땅에서 실리를 챙기기 위한 책략이 발휘된 것이다.
이렇게 임진왜란은 한반도 분할 역사의 시초였다.
암튼 일본군은 명나라에서 요구를 들어준 것으로 착각하고 한강을 넘어 경상도로 후퇴한다.
도강하는 일본군을 향해 분노의 공격을 권율 장군이 시작하려 하자 명나라 장군 송은 창은 오히려 일본과의 향후 협상을 위해 도강하는 일본군을 보호한다.
어이없이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조선은 아무런 힘도 없이 작전권을 명에게 양도하고 만 것이다.
조선의 지배세력들은 왜군철수는 명나라의 힘에 의한 것이므로 명나라가 조선을 구원한 것으로 생각했고 명나라에 대한 부채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마치 6.25 전쟁에 대한 남한 보수 세력들이 갖는 미국에 대한 부채의식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강화협상은 철저히 조선을 배제한 명과 일본과의 밀실회담이었다.
경상도로 남하한 일본군을 행해 조선의 의병 게릴라들이 맹렬히 공격했다.
군사적 전투감각이 전혀 없는 선조는 이 순신에게 왜군이 머무르고 있는 부산을 공격하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대마도와 인접한 부산을 섣불리 공격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이순신은
선조의 명령을 거부하고 백의종군한다.
조선 삼도 수군통제사로 원균이 임명되었지만
원균의 부대는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정유재란이 발생한다.
이순신이 없는 한반도의 바다는 이제 일본군의 차지가 되고 있었다.
일본은 전주까지 다시 무혈입성하고 천안 아산까지 점령하였다.
다시 위기의식을 느낀 명나라가 육군을 파견하고 겁에 질린 선조는
옥에 갇힌 이 순신을 다시 컴백시킨다.
당시 이 순신에겐 13척의 배만 남아있었다.
그는 진도앞바다에 진을 치고 율독목 해전에서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낸다.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함대를 물리친 것이다.
이것은 세계 해전 사에 기록될 정도로 대단한 승리였다.
원군으로 다시 파견된 명나라는 싸우는 척만 하고 결국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다.
이렇게 전투는 지속되었고 1598년 히데오시의 죽음으로 일본군은 철수를 결심한다.
히데오시의 죽음은 조선에겐 행운이었다.
하지만 명군은 일본군 철수 후에도 2년간을 한반도에 머물면서 온갖 만행을 저지른다.
점령군으로 한반도에서 행세하며 온갖 잇 권을 챙기고 부녀자를 겁탈하고 조선인들을 학대했다.
전쟁 후 조선의 상황과 상처를 살피보자~
이렇게 전쟁은 수많은 조선인들에게 씻지 못할 상처만을 남기고 끝났다.
한반도 국토는 완전히 유린되었고 민중들의 시체는 거리에 넘쳐났다.
전쟁의 책임을 지고 선조의 조선왕조는 혀를 물고 자결했어야 했다.
하지만 선조는 뻔뻔히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항복에게 논공행상을 지시한다.
이항복은 합리적인 관리로써 임진왜란 승리의 공을 목숨을 걸고 싸운 성무공 이 순신 그리고 의병장 곽재우 같은 장수라고 선조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옹졸한 선조는 인정하지 않았다.
왜군의 철수와 섬멸은 오직 명나라의 은공이라 칭했다.
우리나라 장군들은 그저 명의 뒤를 쫒아 다녔을 뿐 적 우두머리의 머리를 밴 적이 없다고 평가 절하했다.
선조가 이렇게 얘기한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임진왜란 전쟁에 대한 성과를 선조 자신과 자신을 따르던 서인세력들에게 돌리기 위함이었다.
명나라가 조선을 도운 것은 선조를 도운 대신들이 의주로 피신하여 울며불며 명나라에 원군 참전을 호소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신하들은 광해군도 공신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 선조는 이마져 부인했다.
일등공신인 호정공신에 선조세력인 서인들이 결정되었고 그 다음 선무공신으로 북인 의병과 이순신이 결정되었다.
목숨 걸고 죽어라 싸운 사람들 보다 의주로 도망가서 선조를 보필한 유약한 서인들이 모든 공을 독차지 한 것이다.
전쟁의 원인으로 마땅히 처단되어야 할 선조와 서인세력들은 또 다시 이렇게
조선권력의 핵심을 차지하게 된다.
친일파 청산에 실패하고 그들이 한반도 남한 권력을 착취하는 과정과 너무도 유사하지 않은가...
또다시 우리는 이 대목에서 통탄과 울분을 금할 수 없다.
그리고 10만의 명나라 군사가 조선에 8년간 주둔하면서
중국에서 화폐로 사용된 은이 엄청나게 유입된다.
그리고 이렇게 유입된 은을 획득하기 위해 명나라 장사꾼들이 조선으로 몰려오게 된다.
명나라 군인들의 수탈로 굶어죽는 조선민중들이 넘쳐났다.
싸울 의지도 없는 명나라 군대에게 조선민중은 식량과 물자를 제공했지만
반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의가 불타는 의병들에겐 아무런 군량도 지급되지 않았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단 말인가...
힘없으면 이렇게 당한다.
이 와중에도 명군의 위세를 등에 없고 호가호위하는 조선인들이 생기게 된다.
마치 영어열풍이 해방직후 미군의 진군으로 생긴 것처럼 명나라 말을 하는 조선인들은 출세가도를 달리며 경제적 부를 형성했다.
또한
명나라에 대한 조선왕실의 부채의식은 외교적 패착을 만들어내고 다시 한 번 병자호란과 식민지의 치욕을 경험한다.
전쟁으로 인한 전사자 속출로 노동력이 감소되고 조선농촌의 공동 노동제 조직인 두레가 생기면서 농악과 연결된다.
또한 전쟁이후 노비문서, 토지문서가 소실되면서 양반들의 경제적 기반도 변하게 된다.
그리고 왜란은 의약발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대부분의 조선의 의서는 임진왜란 이후 집필되었다.
명나라 역시 왜란 참전으로 만주의 누루아치 세략 견제에 실패함으로
청나라의 발흥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왜란을 통해 일본은 군사강국의 면모를 다시금 확인했고 조선에서 엄청난 분량의 서적과 도공, 인쇄술을 약탈하여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조선은 왜 일본과 국교를 재개 했는가 ?
왜란이후 조선의 대외정책 전반을 명나라가 관장했다.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일본은 도쿠가와 정권이 들어섰지만 도쿠가와는 정권창탈의 부담이 있었다.
히데요시는 죽었지만 당시 히데요시 다이묘들은 건재했고 그의 부인도 생존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도쿠가와는 히데요시 다이묘들을 무력을 제압하고 정권을 강탈한 것이다.
이에 도쿠가와는 대국인 명나라로 부터 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명나라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차 , 차선책으로 조선으로 부터 사신을 받고 강탈한 정권에 대한 명분을 받으려고 대마도를 중간에 내세워 국교재개를 타진했다.
조선왕조 역시 자존심상 회피하고 싶었지만 약소국의 입장에서 무조건 회피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리고 정말 일본이 국교 재개를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시 재침의 야욕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사명당과 유정스님이 탐적사란 명목으로 도쿠가와를 만나게 된다.
당시 사명대사는 문물의 번성함을 자랑하는 왜왕 도쿠가와에게 모두 모작일 뿐이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자 도쿠가와는 사명당을 무쇠막에 넣고 숯불을 피워 사 명당을 태워죽이려 하자,
사 명당은 빙(氷)자를 천자에 써 붙이고 도술을 부려 왜왕이 문을 열었을 때 수염과 눈썹에 고드림이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러한 설화는 왜적에 대한 민족적 적개심과 긍지를 반영한 문학적 표현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암튼 사명대사와 유정스님은 1604년 3000여명의 조선인 포로를 인솔하여 조선으로 돌아왔다.
이런 와중에도 조정의 당파싸움은 그칠 줄 몰랐다.
동인은 갈라져 남인, 북인(선조때 동인이 집권하면서 서인에 대한 탄핵문제에 있어서 강경론자들은 북인으로 온건론 자는 남인으로 갈렸다.) 훗날 서인은 노론,소론 (숙종때 경신환국으로 남인에 대한 처벌문제로 강경파는 노론, 온건파는 소론)으로 나뉜다.
경상남도 밀양에 있는 사명대사 유적지.
명나라가 쇠퇴하고 만주의 누르하치 세력이 날로 강성하여 조선역시 일본과의 적대감을 계속 유지할 수 없었다.
만세불공의 철천지원수인 일본이지만 누루아치 세력의 견제가 더 심각하다고 판단한 조선은
광해군 1년 1609년에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무기를 수입하려는 의지도 보였다.
누르아치 세력으로 인해 다급해진 명나라는 광해군 에게 파병을 요구하지만 광해군은 차일 피일 미루는 정책을 폈다.
그러다 1623년 친명세력인 서인들에 의해 인조반정을 당하게 된다.
인조반종 이후 인조정권은 당연히 친명정책을 펼쳤고 결국 또 누루아치에 의해 세워진 청나라에 의해
1636년 병자호란을 겪으며 동북아시아 국제정세에서 조선은 완전히 약체 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국력의 약세는 철저하게 세계정세를 읽는데 실패한 조선왕조 정치세력의 책임이다.
정치를 잘못하면 이렇게 그 안의 민중들은 개고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개고생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