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현대미학 강의> 중 '발터 벤야민'
신상조
조회 수 242 댓글 0
* “언어는 도구다. 언어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그리고 우리 모국어가 우리에게 아무리 소중하다고 해도, 언어가 도구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고, 그것을 우상으로 떠받드는 것은 비합리적이라는 사실은 오롯이 남는다.”
어느 소설가의 말이다. 이것이 근대의 도구주의적 언어관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언어에서 “도구” 이상을 보는 것은 “비합리적” 우상숭배라고 한다. 어떻게 이런 폭력적인 결론에 도달했을까? 아마도 기술합리성을 이성의 유일한 형태로 보았기 때문이리라. 기술합리성이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의 합리성, 따라서 목적 그 자체에 관한 물음 앞에선 무력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근대적 이성의 한계다. 그래서 도구적 이성이 아닌 또다른 합리성, 즉 목적 설정 자체의 합리성을 논할 더 높은 차원의 이성이 필요한 것이다. -17.
* 유년기의 인류는 자연을 그저 쓰고 버리는 도구로 간주하지 않았다. 말 못 하는 자연에서 언어적 본질을 보고, 그것과 평등하게 소통하여 미메시스mimesis를 했었다. ‘미메시스’란 철학에서 말하는 의식 속에서 대상의 ‘표상’이나, 미학에서 말하는 화폭 위에서 대상의 ‘모방imitation'이 아니다. 그것은 주위 환경에 몸을 맞춰 몸 색깔을 바꾸는 카멜레온과 같은 존재론적 닮기를 말한다. 가령 어린이들을 보라. 그들은 “장사꾼과 선생님만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풍차와 기차도 연기한다.” (중략)
“인간의 언어적 본질은, 그가 사물을 이름한다는 점에 있다.” 이 점에서 그것은 사물의 언어와 구별된다.
‘말함sprechen' 속에서 사물은 창조되고 또한 인식된다. 신은 말함으로써 세상을 지으시고, 인간은 이름함으로써 신의 창조를 계속한다. ‘있으라fiat’는 창조의 말함, ‘일컫다’는 인식의 말함이다. -18.
* 소쉬르는 ‘이름’을 사물과 아무 관계없는 무연적無緣的 기호로 보았으나, 이름하기는 결코 자의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사물의 언어적 본질을 담아야 한다. 신이 인간을 자연의 ‘주인’으로 드높였을 때, 이는 결코 제멋대로 자연을 소비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신이 사물 속에 담아놓은 언어를 보존하는 관리자walter가 되라는 뜻이었다.
“전달의 수단은 말, 그 대상은 사태, 수신자는 인간.” 이 “부르주아적 견해”는 “올바르지 못하고 공허한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는 전달 수단 이상이기 때문이다. 사물이 제 정신적 본질을 언어에 담아 인간에게 전달한다면, 인간은 제 정신적 본질을 언어에 담아 신에게 전달한다. 언어는 신을 향한 인간의 정신적 본질의 구현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durch'가 아니라 언어 ‘속에서’ 제 정신적 본질을 전달한다. 이로써 벤야민의 언어철학은 가볍게 현대적 수준에 도달한다. -19,20.
* 인간이 추상적 판단에 의존할수록 개별자들의 고유성을 보는 ‘직관’의 능력도 점점 사라진다. 이제 인간은 개념으로 사물을 본다. (중략)
유년기의 인류는 추수를 할 때 곡식이 낫에 베여 쓰러지며 지르는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래 전에 이 미메시스적 소통의 능력을 잃어버렸다. 우리가 자연과 소통하기를 멈추고 그것을 죽은 사물로 간주하자, 사물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기를 멈추었다. 그리하여 “그 모든 애도 속에서 자연은 말이 없으려고 한다”. -21,22.
* 언어의 진정한 본질은 신의 말씀Wort처럼 “없었던 것을 있게 하는” 존재수립의 기능, 혹은 아담의 이름처럼 사물의 참된 모습을 현전시키는 개시開示 기능에 있다. 벤야민과 하이데거는 언어의 이 근원적 힘을 되살리려 한다. 하이데거가 그 언어의 회복을 ‘탈은폐aletheia’라 부르고, 벤야민은 그것을 ‘상기anamnesis'라 부른다. -24.
* 벤야민의 예술비평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그의 초기 언어철학이다. 앞에서 소개한 「언어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관하여」(1916)에서, 그는 타락 이후에도 아직 아담의 언어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가령 “조각의 언어, 회화의 언어, 시의 언어”를 생각해보라. “시의 언어가 인간의 이름언어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조각이나 회화의 언어도 어떤 종류의 사물언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들은 “이름도 없고 음향도 없는 언어들, 물질로 된 언어들”이다. 따라서 “예술형식의 인식이란 그것들을 언어로 파악하고, 그것들과 자연언어들의 연관을 찾는 시도”라는 것이다. -25,26.
* 전통적인 예술론은 형식(기표)을 내용(기의)에 종속시킨다. 하지만 정작 진리는 기의가 아니라 기표 자체를 통해 표현된다. 이렇게 형식을 통해 이념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낭만주의는 내용을 통해 이상을 구현하는 고전주의와 구별된다. (중략)
『괴테의 친화성』(1924~25)에서 벤야민은 사태내실과 진리내실을 구별한다. 사태내실은 작품 속에서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내용을 가리키며, 진리내실은 초역사적인 예술의 이념을 가리킨다. 벤야민은 여기게 각각 주석과 비평을 대응시킨다. “비평은 한 작품의 진리내실을, 주석은 그것의 사태내실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27.
* 말을 못하기에 자연은 애도한다. 하지만 이 문장을 뒤집어야 우리는 자연의 본질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자연은 슬프기에 말을 못하는 것이다. (벤야민) -35.
* 모든 시대는 이전 시대를 인용하며 다음 시대를 꿈꾼다. -37.
* ‘아우라’는 원작을 감싸고 있는 영기靈氣를 가리키는데, 벤야민은 이를 “자연대상의 분위기”에 비유한다.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 상태에 있는 자에게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이 순간 이 산, 이 나뭇가지가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우라는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어떤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이다. 복제기술은 이 “일회적 나타남”을 파괴한다. 그것은 “일회적 산물을 대량 제조된 산물”로 대치시키고, 그로써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어떤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을, “아무리 멀리 있어도 어떤 가까운 것의 반복적 나타남”으로 바꾸어놓는다. (중략)
벤야민은 아우라의 붕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기술복제는 “전승된 것의 동요, 전통의 동요”를 가져온다. “전통적 가치의 절멸”이라는 “이 파괴적이며, 카타르시스적인 측면”에서 그는 복제예술의 “가장 긍정적인 내용”을 본다. 전통의 거부는 모더니즘의 첫째 계명이다. -43,44.
* 그리하여 정신분석학을 통해 우리가 “충동의 무의식의 세계”를 알게 된 것처럼, 카메라의 하강과 상승, 중단과 분리, 확대와 축소를 통해 우리는 “시각의 무의식적 세계”를 알게 된다. -49.
* 정신분석으로서의 오락(산만함)과 정신집중은 서로 상반되는 개념이다. (……) 옛날 중국의 전설에 어떤 화가가 자기가 완성한 그림을 보고 그 속으로 들어갔다는 식으로 예술작품 앞에서 정신 집중하는 사람은 그 작품 속으로 들어간다. 이에 반해 정신이 산만한 대중은 예술작품이 자신들 속으로 빠져들어오게 한다.(벤야민) -52
* “산만함”이란 표현은 원래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천박한 태도를 일컫는 경멸어에 가깝다. 그 경멸받던 대중의 태도에서 벤야민은 거꾸로 전통의 전복이라는 모더니즘의 강령을 본다. 대중이 역사상 최초로 예술의 수용자로 등장한 것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중략)
영화의 가능성에 열광할 때 그는 아마도 러시아 혁명영화의 실험을 염두에 두었을 게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이미 영화의 “진보적” 사용가치를 “교환가치”의 증식수단으로 써먹고 있었다. 소위 “산만한 검사자들”은 넋을 잃고 영화 속의 환상에 몰입하고 있었다. 비판적 태도를 가능케 한다는 “촉각적 지각”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이성의 여과 없이 그대로 대중의 몸에 기입하는 역효과를 낸다. “아우라의 붕괴”도 나치에 의해 영화가 정치적 아우라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53,54.
* 데리다는 존재의 ‘현전’을 부정하며 오직 존재자들의 ‘차이’만 인정한다. 하이데거에게 중요한 것은 존재자들의 ‘차이’가 아니라 존재의 ‘현전’이다. 반면 벤야민에겐 존재의 ‘현전’이 존재자들의 ‘차이’ 속에서 섬광처럼 이루어진다.
벤야민에게서 숭고와 시뮬라크르는 어지럽게 교차한다. 위에서 본 것처럼 그의 숭고는 시뮬라크르를 함축하고, 또 그의 시뮬라크르는 숭고를 배제하지 않는다.「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시뮬라크르’ 미학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이 안에는 유사와 상사의 차이, 원본과 복제 관계의 전도 등 시뮬라크르의 모든 요소가 들어 있다. 게다가 “아우라의 붕괴”는 ‘현전’의 미학을 배제하는 강한 세속성을 시사한다. 하지만 이때조차도 숭고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가령 이 논문에서 벤야민은 ‘가상의 파괴’를 찬양하며, ‘파편적인 것’의 선호를 드러낸다. 숭고는 이 안에 숨어있다. 숭고는 미를 파괴하는 몰형식formlosigkeit과 더불어 시작되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모더니스트이고, 리오타르의 말대로 모더니즘은 숭고하다.
“상징의 예술보다 알레고리의 기술.” ‘알레고리’에 대한 선호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 보여준 변함없는 취향일 것이다.
(중략)
‘표현 없는 것’은 “작품을 비로소 완성한다”.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그것은 작품을 “한 개의 조각으로, 참된 세계의 파편으로, 상징의 토르소로 분해한다”. 왜? 순수한 언어는 하나의 개별 언어나 하나의 개별 작품 속에 온전히 드러날 수 없으며, 진리는 오직 파편들의 불연속 속에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표현 없는 것’의 개념은 이렇게 그의 언어철학과 예술비평의 원리를 반영한다. 그것은 중단을 통해 작품을 파편으로 돌리고, 그로써 작품을 참된 것으로 완성한다. 그가 비평을 “작품을 죽임(금욕)Mortifikation"이라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숭고와의 관련은 분명하다. -57~59.
-진중권「발터 벤야민」,『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아트북스, 2003.
첫댓글 김학원조회 수 204 댓글 0
긍정
“인간의 언어적 본질은, 그가 사물을 이름한다는 점에 있다.” 이 점에서 그것은 사물의 언어와 구별된다.
‘말함sprechen' 속에서 사물은 창조되고 또한 인식된다. 신은 말함으로써 세상을 지으시고, 인간은 이름함으로써 신의 창조를 계속한다. ‘있으라fiat’는 창조의 말함, ‘일컫다’는 인식의 말함이다.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