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가을이다 한쪽 귀가 툭 떨어져 국그릇에 잠긴다
하루 세 끼의 극약과 세 알의 독약으로 연명하는 거미
극(極)과 독(毒)으로 내공을 쌓는/ 독거미/ 허공의 대갈통을 끌어안는/ 거미/ 거미가 다 된/ 거미/ 혼잣말을 하는/ 거미
거미는 허공에 대고 대화를 시작한다 허공에 대고
인사를 한다 그리고
없는 문을
닫는다
밀담(密談) I
의자마다 목 떨어진 난쟁이가 앉아 있다면, 천 년 전부터 끓던 국물이라면, 추행하는 자와 추행 당하는 자의 이름이 같다면, 그 이유의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면, 계단 아래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지독한 염병이라면, 다음 기차가 30년 뒤에 온다면, 애인의 아버지가 네 어머니라면, 농담이라면, 구멍이 흘리는 농담, 아주 오래 된 농담이라면, 종점보관소에 보관된 더러운 쟁반이라면, 침대 발치에 미동도 없이 난쟁이가 앉아있다면, 슬며시 네 발목을 쥐고 있다면, 채널을 돌려도 돌려도 똑 같은 장면이 나온다면, 매 분 매 초가 절정이라면, 절정에서 절정으로, 막간 없는 極樂이라면,
볼레로
1
신음, 발효, 악몽, 侵水를 막고 있는 백지 한 장, 시는, 쓰자마자, 시가, 아니다
2
섹스의 찌꺼기, 딸꾹질의 찌꺼기, 불안의, 환멸의, 시의, 좌절의 찌꺼기, 너는 대입하는 X의 값, X의 화대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오는 음탕한 방정식
3
각막에 붙은 껌, 치모에 붙은 불, 이를 갈아대면서 웃는 거품 속의 개, 입은 없고, 혀만, 있다, 리본처럼 너훌너훌 공중을 부유하는
4
가공할 망상의, 음부, 망상의 분비물, 너는 네가 죽인 것을, 먹는다, 鳥葬, 새벽 세 시의 鳥葬, 人肉을 먹이는, 먹는, 앵무, 謹弔, 謹弔, 謹弔, 귀를 씹는 앵무
5
숙련된 갈보의, 산들거리는, 문자의, 恥毛, 리플레이, 리플레이, 리플레이 되는 집요한, 荒淫의 트랙, 시는, 쓰자마자,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 (민음사, 2000)
95년 시집 '트렁크'로 화제를 모았던 진주 시인 김언희가 새로운 파란을 예고하고 있는 문제작. 도발적이고 엽기적이며 가차없는 언어들로 괴기스런 지옥을 연출한기도 하고, 번뜩이는 광기와 노골적인 악마성, 추악한 범죄의 냄새, 그리고 역겨운 환상, 이 모든 것들이 반죽되어 비현실적인 악몽의 느낌을 주는 끔찍스런 지옥이 나타난다는 잔혹한 고통을 안겨 준다.김언희의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는 자서부터가 도발적이다. 임산부나 노약자는 읽을 수 없습니다. 심장이 약한 사람, 과민 체질,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도 읽을 수 없습니다. 이 시는 구토, 오한, 발열, 흥분의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드물게 경련과 발작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이 시집 속에서 낭만이나 서정, 아름다움 따위를 구할 생각일랑 아예 말라는 경고다. 아니나다를까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 속에는 토막난 시체와 비그러져 나온 내장, 악춰나는 오물들을 버무려 놓고 독자가 걸려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김언희의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는 [트렁크] 의 엽기적 상상력과 잔혹하고 비극적인 세계 인식을 일층 발전시키고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공포와 폭력과 쾌락과 배설이 이 시집 속에 가득히 흩뿌려져 있다. 창 밖으로 '벌레비가 주르륵 미끄러져 내리는'가 하면 공중으로는 '덜렁거리는 좆'을 단 나비가 날아다니고, 내 머리 위에 '돼지 대가리가 달리는'가 하면 어느 순간 나타난 정체불명의 구멍은 '내 머리를 옴쭉옴쭉 씹어 삼킨다'. 이처럼 그로테스크한 육체이미지와 도발적인 성적 은유는 시집 어디에서고 느닷없이 출몰한다. 그리고 그것은 알 수 없는 위협과 불안을 조성한다. 이 형용할 수 없는 위협과 불안과 공포야말로 김언희 시를 추동해 내는 주된 동력이며 그녀가 인식한 이 세계의 모습과도 맞닿아 있다. 인간의 실존을 배반하는 위험하고 폭력적인 힘들로 가득한 세계 말이다. 이 시집의 1, 2부는 바로 그같은 세계의 살풍경을 모골이 송연하게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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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펌] [김언희 시인 시모음]|작성자 허쉬나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