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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성형실패 같은 복의 근원되기>의 줄거리:
요즈음 자주 대할 수 있는 일들 중에 천하에 못할 짓이 실패한 얼굴 성형입니다. 많은 경우 얼굴 거죽을 뼈에서 분리해내면서 수술이 진행 되는데 참으로 갖가지 부작용과 죽기도 하는 등의 의료사고가 뒤 따름을 봅니다. 이런 때에 가장 큰 문제는 돌이킬 방법이 전혀 없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점입니다. 이처럼 천하에 못할 짓 같아 보이는 것이 바로 본문에 아브람이 복의 근원이 되는 과정입니다. 과연 누가 이런식의 복의 근원이 되기를 바랄 것입니까?
성형실패 같은 복의 근원되기
(창12:1~9)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성형실패 같은 복의 근원되기>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성형실패 같은 복의 근원되기’
오늘 본문에 소개되고 있는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아브람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은혜로운 약속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복의 근원 되어가는 아브람 인생의 과정과 여정을 잘 살펴보면, 꼭 성형수술에서 실패한 것 같은 일이 보여 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정말 천하에 못할 짓이 실패한 성형수술 같아요.
사람이 하는 일에 다 실패가 있습니다. 그래서 고치기도 하고 실패를 개선하기도 하고 실패를 거울삼아서 다음에는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가르침을 받기도 합니다.
실패가 나쁜 것만은 아닌데, 도무지 이 얼굴 성형이 실패를 하게 되는 경우는 이렇게 천하에 못할 짓이 다시없더라는 것이에요. 매스컴을 통해서 종종 그런 일을 접하게 됩니다.
유명 연예인이라든지 혹은 연예인이 아니더라도 평범한 여성들인 주부나 결혼하지 않은 아가씨들이 성형수술을 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불행에 빠지는 일들이 매스컴에 나옵니다.
제가 매스컴에서 본 경우는 40대 초반의 주부인데 얼굴이 참 잘생겼어요.
그런데 코가 약간 들렸다고 말하면서 강남의 엉터리 같은 의사에게 진단을 받아서 얼굴 18군데를 3,000만원을 주고 고쳤는데 결과가 어떻게 됐느냐면, 성형수술 받은 사람 당사자가 자기를 몬스터라고 말할 정도이고, 성형수술을 받은 이후로는 자식들이 괴물로 볼까 두려워서 가족들 앞에 나가지도 못하고 따로 산답니다. 이마 위에 머리 곳곳에는 엉터리 같은 의사가 모공을 잘못 건드려서 군데군데 섬처럼 구멍이 났어요. 모공을 건드렸으니 머리가 자라지 않지요. 눈썹도 모공을 건드려서 눈썹이 자라지 않습니다. 그리고 코의 양 옆으로 볼록한 부분은 꼭 벌레가 갉아먹은 것처럼, 남해의 다도해 섬처럼 만들어 놨습니다. 움푹 패여 들어간 거예요. 눈은 제대로 닫히지도 않고, 그렇게 잘 생겼던 얼굴이 완전히 어떻게 해볼 수가 없게 되어버렸어요. 저는 그렇게 수술을 한 당사자가 너무 밉더라고요. 자기 얼굴을 자기가 한 것이지만 그렇게 좋은 얼굴을 왜 그렇게 해놨을까요?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의 책임으로 돌리기에는 그 사람이 겪게 되는 마음의 불행과 고통과 좌절감이 값이나 수치로 측량하기 어려운 거예요. 돌이킬 수 있습니까?
한가지 길 밖에는 없죠.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여서 회개하고, 잘못 된 성형수술이 된 얼굴에 대해서 마음이 죽는 겁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싸울 듯이 기도해서 그 몸에 대해서 죽는 거예요. 죽어서 마음이 하나님과 연합이 되면 마음 안으로 들어오신 하나님께서 그 얼굴에 대해서 어떻게 하실지 처분을 기다리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봅니다.
여러분! 주변에 성형수술을 실패해서 낙담하며 인생에 좌절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십자가 복음을 전하세요. 길은 그것 밖에 없습니다. 돌이킬 수가 없는 거예요.
오늘 복의 근원이 되는 아브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성형수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을 받고 아브람이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납니다.
사도행전 7장에 성령이 충만하셨던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에 따르면 갈대아 우르 메소포타미아 남쪽 지방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출발하라고 하셨고, 그래서 800km이상인 북쪽 하란이라는 곳에서 머물렀다가 거기서 아버지 데라가 죽었습니다. 데라가 힘들고 피곤하니까 여기서 좀 머무르자고 해서 머물고 있다가 데라가 죽고 나서, 다시 하나님의 약속해 주신 땅 가나안으로 오는 과정을 오늘 본문이 그리고 있어요.
그런데 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이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왔는데, 가나안 땅에서도 스데반 집사님의 해석의 예를 들어보면 발붙일만한 땅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 옛날에 무려 1,200~1,300km를 식솔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에 왔는데, 그 가나안 땅에서 발붙일만한 곳도 주시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의 평생토록 끝내 주시지 않으십니다. 기껏 가나안 땅에서 얻었다고 하는 것은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에, 그 사라를 장사 지내려고 돈 주고 산 매장지인 막벨라 동굴이 다입니다. 끝내 안 주셨어요. 그러니까 이게 꼭 실패한 성형수술 같다는 거예요.
무슨 얘기냐?
콧날을 높이려고 성형수술을 한다고 하면, 입술 위에 코 부분을 잇몸 위쪽으로 해서 얼굴뼈로부터 살을 분리시켜낸 다음에 코뼈에 보형물을 붙이고 살을 덮어주는 거예요. 얼굴뼈에 잘 붙어있던 살을 분리해서 떼어 내야 양악 수술이든지 코 수술이든지 광대뼈나 턱을 깎는 수술이든지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성형수술이 끝났는데 이전에 자연스럽게 얼굴뼈와 가죽이 붙어있던 상태를 떼어내고, 그 어려운 고통을 견디고 끝냈으면 새로운 얼굴이 마음에 들어야 하는데 새로운 얼굴 어느 한 구석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는 거예요. 옛것도 떼어냈고, 새롭게 주어지는 것도 마음이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실패한 성형 아니겠습니까? 아브람이 딱 그 짝이 난 거예요.
고향 친척 본토 아비 집, 그 당시 씨족 사회를 형성하고 씨족 공동체 중심으로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에 그 씨족과 친족과 본토 아비 집을 떠나게 되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20년, 30년 얼굴뼈에 잘 붙어있던 얼굴 가죽을 뼈로부터 분리시켜 떼어 내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거기에 아픔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갔으면 가나안 땅이 새롭게 주어지는 곳에서 뭔가 마음을 붙이고 정붙이고 살만한 여건이 주어져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건 발붙일만한 곳도 없어서 오늘 마지막 9절에 보면 점점 남쪽으로 가서 가나안 땅에 머물지 못하고 애굽으로 가버리고 맙니다.
그러니까 내가 성형한 새얼굴을 도저히 어느 부분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실패한 성형과 똑같은 상태가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에 잘 있던 사람을 뼈에서 가죽 떼어내듯이 떼어내셔서 가나안 땅에 오게 했으면, 뭔가 그럴듯한 장소에 삶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게 해주셔야 되는데 발붙일만한 곳도 주시지 않으시고, 결국 아브람이 남쪽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끌려질 수밖에 없냐는 것입니다.
이래서야 복의 근원이 되겠습니까?
이래서야 누가 복의 근원이 되겠다고 나설 것이며,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고 할 때에 기꺼이 ‘예’하고 나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착각하지 마세요. 지금 아브람에게 주시는 복은 부귀영화나 오복 같은 것이 아니에요. 지금 그렇잖아요? 복의 근원이 된다고 했는데 실패한 성형수술 같은 상황이 주어진 겁니다.
이미 마음 붙이고 하란에서 잘 살았습니다. 복이잖아요? 그 자체가 복이잖아요.
그러면 그 안정된 상황 위에 더 부어주시면 되는 것이지, 더 큰 물질의 축복, 더 큰 건강, 더 큰 평안한 가정과 자손의 번영을 하란에서 일으켜주시면 되지, 무엇 때문에 가나안으로 불러서 아무것도 없게 만들어 버립니까?
옛것도 없고 새것도 없고, 아브람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는 이걸 몰랐겠어요?
아브람이 특이한 사람인 것이 우리가 앞으로 가면서 보겠습니다만 이런 것을 다 알고 나갔어요. 얻을 것을 생각하고 나간 것이 아니라 잃을 것을 알고 나간 사람입니다. 그런 부분들이 이제 나와요.
우리는 하나님 명령이라면 뭘 얻을 것을 생각하고 기대하고 순종하려고 하잖아요.
이 사람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럼 도대체 아브람에게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을 듣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가나안 땅에 왔고, 가나안 땅에 와서도 발붙이지 못하는 이 상황은 우리에게 무슨 내용을 말하려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이 성경을 해석하시는 분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아브람의 순종을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떠났다고 하면서 순종을 이야기해요. 만약에 이 행위가 고향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왔고, 가나안 땅에서도 발붙일 곳이 없어서 점점 남쪽으로 이주한다는 것까지 이 본문의 내용이 아브람의 순종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면,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이 아니라 순종의 조상이고 행위의 조상이었을 겁니다.
사도 바울이 행위로서의 구원과 믿음으로서의 구원을 대치시키지 않습니까?
그런 것처럼 아브람이 어려움이 예상됐는데도 불구하고 순종했다고 한다면,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이 아니라 행위의 조상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믿음의 조상과 행위의 조상이라는 말에서 우리가 아브람을 이해하기 위한 어떤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까? 아브람의 마음 상태를 본다는 것이에요.
믿음의 조상 아브람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아브람에 대한 얘기를 우리의 마음에 동일시하면 된다는 거예요.
믿음의 조상이니까 그가 움직인 대로 우리의 마음이 움직여야 되고, 그에게서 일어난 일들이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차원에서 일어나야 하고, 마음의 움직임을 가르쳐주는 삶이기 때문에 아브람이 행위의 조상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인 거예요.
믿음이 올바르면 행위는 뒤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아브람의 생애에서 도대체 그 마음속에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아브람은 이렇게 실패한 성형 같은 삶의 여정을 마다하지 않고 밟아가고 있는 것이며, 지금 어떤 마음의 변화가 일어난 겁니까?
하나님이 가라고 했으니 그 말씀을 듣고 간 겁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아브람이 고향을 떠난 이야기를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전의 설교에서 뭐라고 이야기하십니까?
아브람이 메소포타미아(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였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말에 포인트가 있다는 거예요.
사도행전 7장 2-3절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이 말씀은 창세기의 이야기를 성령의 충만함으로 해석을 넣어서 다시 쓴 겁니다.
그런데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였다’는 것은 마음에서 일어난 변화를 말합니다.
믿음의 조상이므로 마음에서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고 우리에게서도 그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거예요.
그럼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였다는 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영광은 1등 할 때 주어지지 않습니까? 어느 경우에나 1등 할 때에 영광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영광의 하나님으로 보였다는 이야기는 하나님은 객관적으로 나와는 상관없이 모든 면에서 1등이십니다. 지혜도 1등이시고, 능력도 1등이시고, 외모도 1등이실 거예요.
하나님처럼 아름다운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과 똑같이 닮았는데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습니까?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다 1등이세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 마음이 모든 방면에서 객관적으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1등으로 볼 수 없는 상태로 유지가 되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 마음에서는 돈이 1등입니다. 우리 마음에서는 자식이 1등입니다. 직장을 못 구하고 있는 대학졸업생들은 직장이 1등입니다. 마음에 그것이 첫 번째로 보이는 거예요. 내 마음의 관심을 끄는 일에 있어서 1등이 바로 내 마음에서 영광을 차지하는 존재입니다.
지금 아주 열애중이라면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요. 부모가 그 녀석은 놈팽이 같으니까 사귀지 말라고 해도, 일단 그게 내 마음에 1등이 되어버리고 나면 누구의 말도 안 듣습니다.
돈이 1등이 되고 나면 슬금슬금 거짓말도 하고, 슬금슬금 사기도 치고, 슬금슬금 부정부패도 해서 돈을 벌려고 하는 거예요. 누구말도 안 듣고 돈의 말만 들어요. 돈이 될 수 있는 길만 가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돈 벌기 위해서 사기 친 사람을 돈에게 순종했다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놈팽이 같은 남자에게 홀딱 빠져있는 딸내미가 그 남자에게 순종한다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건 행위의 문제가 아니에요. 순종하는 게 아니에요.
완전히 마음에서 영광스러운 자리인 1등자리에 있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에 순종하게 되어 있고 그것을 따르게 되어 있고 그것과 연합하게 되어있습니다.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움직이는 것이죠.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실패 같은 성형을 감행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마음에 1등을 차지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에게서도 믿음의 조상에게서처럼 일어나야 될 일이 뭐냐 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영광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철야기도 하는 동안에 내내 돈 문제만 가지고 기도했다면 돈이 1등인 것이죠. 그 사람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 것이죠. 믿음도 아닌 것이죠. 그냥 하나님을 종교적인 차원에서 부르고 우상시하는 것이죠.
그리고 두 번째 일어나는 변화는, 오늘 본문을 히브리서 11장 8절에서는 어떻게 이해를 합니까?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라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순종했다’는 말이 이제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순종은 마음에서 하나님이 1등한 상태에서, 1등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따라갔다는 말입니다.
지금 내 마음에 돈을 벌고 싶고, 자식이 잘 되는 것이 소원이고, 내 건강이 1등 관심사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므로 내가 간다면, 이게 나를 부인하는 순종이지만 아브라함의 상태는 그 순종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순종도 그런 순종이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순종은 먼저 마음에서 하나님이 1등이 되는 믿음의 상태를 요구하는 것이고, 순종은 거기에 부수적으로 딸려오는 것이며, 하나님이 1등일 때에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어떨지 몰라도, 놈팽이 같은 남자친구가 내 마음에서 1등일 때에 제일 쉬운 일은 그 놈팽이에게 순종하는 일입니다. 이게 실패 같은 성형을 감행하게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1등이 되시면 나타나는 연쇄적인 반응이 있는데 하나님이 계신 곳을 그리워합니다. 하나님과 같이 있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거나 우리가 세상에서 누구를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 사랑이 어떻게 증언됩니까? 사랑하는 대상이 있는 곳에 같이 있고 싶어 합니다.
놈팽이 같은 남자 친구라도 다른 사람 눈에 놈팽이지, 그 여자의 눈에는 놈팽이가 곰팡이 냄새나는 하숙집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하숙집에서 둘이 같이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한 겁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1등인 자가 있는 곳이 천국이니까.
천국이 뭡니까? 금은보화가 가득한 곳이 천국입니까?
내 마음에 1등한 대상이 있는 그곳이 천국이에요.
그러면 돈이 1등인 자는 뭘 원합니까?
돈이 많이 있는 그곳에 가고 싶어 하잖아요.
내가 돈을 번다는 이야기를 거꾸로 하자면 돈이 많이 있는 곳에 가서 내가 돈과 함께 있고 싶어 합니다. 지금 마음에 돈이 1등인데 내 주머니에 돈이 하나도 없으면 불행한 것이죠. 사랑하는 돈님과 같이 있게 되는 것이 바로 사랑의 증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1등 했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있는 그곳에 가고 싶어요.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어요.
그래서 창세기 12장 1-9절의 말씀을 아무리 두드려 봐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성령의 감동을 받은 히브리서 기자가 뭐라고 이야기했냐면, 아브람 자신이 일단 하나님의 명을 받고 떠난 뒤,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갈대아 우르와 하란을 떠난 뒤에는 이 세상에서 평생 외국인이고 나그네라는 겁니다.
왜 그러냐?
내 마음에서 1등한 존재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계신 곳은 하늘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에녹의 승천 사건이 그걸 말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있어서 에녹 사건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죠. 아브람에게 에녹 사건이 알려지지 않은 채 모세에게 넘어갔을 리는 없어요.
아브람이 에녹 사건을 아는 것이죠.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마음에서 1등 했으면, 그 다음에 나타나는 증상은 이 땅에서는 마음 붙일 곳이 없어요.
왜냐하면 사랑하는 애인이 하늘에 있기 때문이고, 에녹이 승천했다는 그 기사를 통해서 아브람에게도 깨달아지는 것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마음에서 1등하니까 바보처럼 그곳에만 가고 싶어지는 거예요. 이 땅에서는 자기 스스로가 외국인이고 나그네라고 증언하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5-16절에 보면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온 바 본향’이라는 것은 갈대아 우르와 하란을 이야기하는 것이에요.
가나안 땅에서 도저히 살 수가 없으면 돌이켜 가면 되잖아요. 그런데 돌이키지도 않았어요. 마치 성형수술이 잘못되어도 돌이킬 수가 없는 것처럼 돌아가지 않습니다.
왜 그랬느냐?
그들이 바란 것은 가나안 땅을 약속해주셨지만, 가나안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에요. 소위 말해서 이 땅에서 이루려는 비전을 향해간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이 비전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해석한 대로 보면 분명히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허락하시는 약속을 주셨지만 아브람이 마음에 본 것은 가나안 땅을 비전으로 본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에서 1등하고 있는 하나님이 계신 하늘을 바라보고 간 것입니다.
1등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가라고 했으니 간 것이지, 가나안 땅이 좋아서 간 것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가나안 땅을 이루고 싶은 비전으로 생각하고 간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땅에 마음을 붙이고 땅에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좋은 상황을 주실 것이고, 언젠가 복되게 잘 살리라는 것을 꿈꾸면 아브람의 여정은 완전히 잘못된 성형수술 같은 것인데, 내막을 알고 봤더니 아브람의 마음에서 하나님이 1등 하셨고, 1등 하신 하나님이 계신 그곳을 그리워하고 있는 상태에서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고, 가나안 땅에 가서도 머물 곳이 없다는 현실은 성형수술 실패가 아니라 로켓 발사대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땅에 두면 성형수술 실패 같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마음에서는 하나님이 1등이시고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 아브람의 모든 그리움이 다 쏠려있는 이 상태입니다. 얼굴뼈에 가죽이 잘 붙어있는 것을 도려내서 분리시키듯이, 이 고향 친척 본토 아비 집을 떠나고 가나안 땅에서도 마음을 안 붙이는 것은 로켓 발사대와 같습니다. 로켓이 연기를 뿜으며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이 땅의 것들을 버리고 죽음으로, 마음이 하늘로 박차고 올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을 잘 가져서 이 땅에서 오복을 누린다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복의 근원이 된다고 할 때의 핵심적인 내용은, 하나님 자신이었던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이 계신 하늘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복의 근원이 된 자들은 어떻게 살아가느냐?
이 땅에서 자기 스스로가 마음 붙일 곳이 없는 나그네인 것을 증언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나는 이 땅에서 마음 붙일 곳이 없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내 마음에서 1등은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계신 곳은 하늘이니까 내 마음은 하늘에 다 가있다는 것을 증언하며 사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아브라함이 살았던 삶의 유전자가 우리에게로 전달이 된 것이고, 우리가 바로 그의 후손인 것입니다.
5감각으로 만져지고 느껴지고 접촉이 가능한 모든 것들을 다 제쳐놓고 하나님이 1등이 되는 것이 바로 믿음의 조상의 첫 번째 마음의 변화이고, 두 번째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이 계신 하늘이 이 지구를 이기는 겁니다.
두 번의 이김이 일어나는 것이 믿음의 조상의 후손들의 일이에요.
첫 번째 이김은, 하나님이 내 마음의 관심거리를 끄는 모든 대상들 중에서 1등 하시는 것이고, 두 번째 이김은 하나님이 계신 천국이 마음 붙일 곳으로 지구를 내 마음에서 이겨서, 내 마음 붙일 곳을 이 지구에서 안 찾기로 결정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조상에게서 일어난 변화고, 우리 마음에서 그 변화가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아브람의 믿음의 두 가지 일을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죠.
세상에 대해 죽어야만 내 마음에서 하나님이 1등하시고, 하나님이 1등 하셔야만 하나님이 계신 천국이 지구를 이겨버릴 수가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죽을 각오로 붙잡고 살아서 언제나 어느 순간이나 어떤 상황에서나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1등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이 계신 하늘이 이 지구를 이기는 역사가 날마다 순간마다 일어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