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업장 카운터 담당으로 청순가련형의 아가씨가 추천되어 왔다.
고향은 강원도이고 가녀린 몸매에 해사한 얼굴의 미스김.
도무지 그녀의 섬약한 외양이 미덥지가 않았다.
그러나 내 걱정이 기우였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고객이 연일
물밀듯이 밀려들고 때론 취객들이 적잖은 소란을 피우는데도
빈틈없이 신속 침착하게 일처리를 거뜬히 해냈다.
흙속의 진주를 발견한 것처럼 대견해하고 있었는데, 내 속내를 알기나
한 것처럼 입사 4년만에 내 고종과 결혼하여 도희라는 예쁜 딸까지 낳았
다.
얼마전 내 생일날 작은 선물과 함께 정성스런 글씨로 “열심히 살아가
면서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편지를 써놓아 콧등이 시큰했다. 동고동락
하고 있는 식구 모두의 마음일 것이라 생각하며 가슴이 더없이 훈훈해지
면서도 어깨가 무거웠다.
적수공권으로 사업에 투신한 이래,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도 무모
한 도전을 곧잘하여 욕심 사나운 사람으로 비치기도 했다. 어려운 일일
수록 내가 아니면 안될 것이라는 만용이 작용한건 사실이지만 추호도 재
물욕에 지나치게 매달린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보니 가족들로부터 사업가인지 남의 좋은 일만 시키는 자선사업
이나 하는 허풍장이인지 분간을 못하겠다는 원성도 수도 없이 들었다.
오죽하면 선친께서도 대복은 하늘이 내리는 것인 만큼 과욕을 삼가라고
나무라기까지 하셨다. 하지만 감히 어른 앞에서 ‘기업경영이란 것이 이
윤추구에만 목적이 있지 않다’고 설득력 있는 소신을 밝힐 수는 없었
다.
그러나 내겐 스스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경영이란 곧 입체적 사상이
며, 실천을 위한 지혜이고 예술일 수 있다는 확신이 끊임없는 도전의 의
욕이며 발판이었다.
뒤엎고 매달리며 쓰러지길 여러 번, 또다시 변신을 시도하고 있었다. 재
래시장, 백화점, 건축 자재전시장 등의 산고를 거쳐 목하 ‘부페식당’이
출범을 했다. 뭐니뭐니해도 상가의 기능은 장(場)을 세우는 것이 최상책
이었다.
나의 밀어붙이기식 강행군에 염려하는 축들이 없지 않았다. 사전지식
이 전무한 자가 워낙 대규모의 요식업을 기획하다보니 그럴 법도 했다.
무려 3개월간의 준비기간이 필요했다. 개업식에는 수천명의 손님을 초청
하여 한바탕 잔치를 벌였다. 타고난 허세가 대단했지만 딴에도 고민이
없지는 않았다.
마치 성시후의 파장같은 넓디넓은 홀에 덩그러니 혼자서 점심을 먹자
니 청승맞기까지 했다. 개점만 해놓으면 문정성시를 이루리라는 기대는
큰 오판이었다. 요식업에도 마케팅전략이 필요함을 비로소 느꼈다. 간부
들을 채근하여 매일 조기출근을 시켜 회의를 주재했다.
서비스업에 잔뼈가 굵은 전문인력을 리드해 가는 데에는 고충이 따랐
다. 그들의 고정관념을 깨는 일이 우선 난관이었다. 먼저 원가를 줄이는
일보다 매출을 늘이는 것을 우선과제로 삼았다. 홍보전략부터 수정했다.
신빙성이 모호한 광고비를 쓰는 대신 무료시식권 수만매를 발행하여 인
근 주민에게 있어 부페 무료시식권은 충분한 호기심을 유발했다. 호텔급
식당을 능가하는 메뉴와 쾌적하고 웅장한 규모에 이끌려 고객이 날로 증
가해 갔다.
점차 늘어나는 고객의 관리가 급선무가 되었다. 궁리 끝에 회원제로
하여 음식값에서 10%를 할인해주는 혜택으로 신선한 감동까지 주었다.
회원들의 인적사항을 기록하여 생일이나 결혼 기념일에는 어김없이 축하
엽서와 무료시식권 2매씩을 동봉하였다. 온 식구가 함께 와서 무료로 제
공한 케익을 놓고 파티를 열었다.
현대인들이 교우관계는 넓어지는데 생활공간이 협소하다보니 부모님 회
갑연은 물론 아이들 돌잔치까지도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결혼대례청으로도 연상작용이 일어난 것도 그때였다. 어린시절 고모님
이나 누님의 결혼식을 집안마당에서 일가 친지들이 모여 걸직하게 치르
던 모습이 정겹게 떠올랐다. 결혼 공장이나 다름없는 요즘 예식장과는
충분히 차별화 할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또 한번 간부들은 의문을 제기
했다. 전문성이 결여되면 이것도 저것도 다 안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았다. 결혼이야말로 일생에 한번 뿐인 경사가 아닌
가. 예복이나 집행 방법이야 서구식만을 선호하니 어쩔 수 없다고 치자.
그러나 한마당 가득 모여 정담을 나누면서 치러온 전통양식을 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쉽게 실행에 옮겨졌다.
‘웨딩부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놓고 TV, 라디오는 물론 지역신문
등으로 광범위한 홍보를 시작했다. 고작 병풍을 치고 진행되는 결혼식이
었으나 의외로 호응은 크게 나타났다. 예식부터 피로연까지 충분한 시간
과 공간을 배려하니 일반적인 예식과는 차원부터 달랐다.
하객도 주인공도 만족해 했다. 아름다운 드레스로 성장을 한 신부가
등 떼밀리듯 쫓기지 않으니 여유와 화기가 넘쳤다. 예식을 마친 혼주가
흡족하다며 고마움을 표시하니 정말 뿌듯하기까지 했다.
숱한 어려움을 겪어오면서도 내게 하나의 소망이 있었다면 모두가 환
희심을 내는 이같은 작은 감동들이었다. 당초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던
거래선과 간부들도 깊은 관심을 표명한 후 각자 사업구상을 하기 시작했
다. 사진업자, 해산물 납품업자, 참기름 납품업자 등이 경향 각지에다 웨
딩부페 개점을 서둘렀다. 이 신종 사업이 성업을 이루자 일반 예식장들
까지도 덩달아 웨딩부페로 방향전환을 시작했다.
지금와서 의장등록 하지 않은 것을 나무라는 축들도 있다. 그러나 정
작 나의 경영철학을 아는 이는 드물다. 무엇인가를 세상을 위해 기여해
보리라는 마음으로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면, 거기에서 오는 성취감의
희열 그것이 바로 기업 최상의 꿈이며 이상(理想)이라 확신했다.
요즘같은 다차원적 혼란기의 기업 경영일수록 공존의 순환원리를 우선
시해야 한다. 한겹 이기(利己)를 벗고 긍정적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굳이
너와 내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해 열심히 땀흘러 여러 사람들의
삶이 즐거울 수 있다면, 지난 시간 속의 온갖 치욕과 영광따윈 훌훌 던
져버려도 아쉬울 게 하나 없다.
그러나 다 버리고도 버려지지 않는 건 역시 경영은 성취의 희열이다. 인
생이란 그래서 농부의 마음으로 열성껏 경작해 볼만한 ‘농사’라는 생
각을 감히 해 본다.
주) 다래웨딩부페 대표이사. 수필문학가 김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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