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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사투
중디 이원우
오늘도 산책을 하기 위해 해변 주차장에 도착했다. 아직 태양은 수평선 위로 한 뼘 가량 위에 떠 있으므로 지금부터 2시간은 족히 저녁 햇살을 받으며 여유 있게 산책에 임할 수 있다는 안도감에 그다지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 만약 태양이 수평선에서 반 뼘 정도 남아있었다면 쫓기듯 준비해야 하며 그렇게 하다 보면 꼭 준비물의 한 두 개를 빠뜨리게 되어 여간 곤란한 일이 생기고야 만다.
우선 그 날에 적당한 옷차림을 하나하나 확인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스피커를 멜빵식 가방에 넣은 다음 그것을 목에 건다. 전에는 목에 걸지 않고 가슴 쪽에 찼더니 가슴을 조여 오는 압박이 점점 강해지기 때문에 산책 중 은근히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에서 미리 내려 보온병에 담은 커피를 뒷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그다음 오랫동안 목에 걸고 다녀도 그 무게에 아프지 않을 정도의 크롭 렌즈 카메라를 챙긴다.
이렇게 산책에 필요한 마음가짐을 포함한 모든 장비의 준비가 끝났다고 확신이 들면 곧바로 자동차 리모컨으로 자동차 문을 잠근다. 그때 나는 "삐빅" 소리는 차 문이 잠겼다는 것을 귀로 확인하는 동시에 마음의 안정도 함께 확인하는 것이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손으로 차 문을 당겨봐서 진짜 문이 잠겼는지 다시 한번 확인한다. 지금까지 리모컨으로 잠근 후 잠기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왜 이러한 손수 확인 방법을 행해야 하는 이유는 정확하지는 않다. 아마도 지금까지의 아날로그의 습성에 젖어 온 인간의 디지털에 대한 꺼림칙한 불신일 것이다. 이러한 불신 습관은 집에서 외출할 때 꼭 다시 한번 가스 밸브의 잠금을 버릇처럼 확인하는 것이나 일본 전차 승무원들이 출발 전에 반드시 손동작으로 장치들을 확인하는 방식과 같은 것으로 제 손을 거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 장인들처럼 육체의 감각으로 확인을 해야만 안정되는 아날로그의 유전적 습성이 몸에 짙게 배어 있는 인간들이 현대 생활을 이어가는 방식과 같은 것이다.
산책의 목적이자 최고의 포인트이며 산책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얼마 전 구입한 포터블 스피커다. 정확한 품명은 JBL Flip 4이며 가장 최신 버전이다 가격에 비해 높은 성능을 가지고 있는 이 스피커는 초기 버전도 가지고 있지만 그에 비해 월등 높은 수준의 음향은 늘 들을 때마다 놀라고 있다. 얼마 전 당근 마켓이란 어플에서 저렴하게 나와 있어 구입을 하고 만족하고 있었는데 그다음 날 더 싼 가격에 같은 제품이 나온 것을 보고 살짝 배신감이 들었지만 이것의 사운드를 듣다 보면 고마울 정도의 가성비에 가격 따위에 대한 배신감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이 스피커는 손에 들거나 주머니에 넣어 다닐 수도 있는데 그보다는 몸에 붙이고 다니는 편이 두 손도 자유로울 뿐 아니라 스테레오 사운드의 좌우 분리된 음향을 잘 분배해서 들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효과적이다. 허리에 찰 수 있는 작은 가방을 구입해서 처음에는 허리에 찼는데 귀에서 먼 만큼 볼륨을 높여야 하므로 자칫 주변 사람들에게 폐가 될 수도 있어서 귀와 더욱 가까운 곳에 위치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목에 거는 방법을 알아냈다. 그러면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풍성한 사운드를 나 혼자 들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마치 컬러 선글라스 효과처럼 나와 풍경과 사물들 사이에 음악의 필터를 여과하여 보이게 되므로 그것들은 즉물적인 것이 아닌 환상적인 영상으로 내 눈을 투과한다. 그리하여 내 앞의 세상은 전혀 색다른 아름다운 세상이 되고 나는 누구와도 다른 나만의 세상을 창조하여 그 세상에서 즐기는 체험을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카메라를 챙긴다. 카메라는 되도록 가벼운 것을 매야 한다. 오랜 시간 매고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산책에서는 촬영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무거운 렌즈나 짐벌 등의 장비는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카메라를 무엇 때문에 가지고 걷는 것일까. 그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이며 나 또한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이유이다. 만약 카메라 없이 스피커만 맨 나를 상상해보자. 얼마나 일반적이지 않은 이상한 차림이란 말인가. 그들은 분명 이렇게 말하거나 생각할 것이다.
" 뭐야 저 남자...", "얘 저 사람 뭔가 수상해 가까이 가지 마."
이렇게 주변 사람들이 이런 괴상한 남자의 존재에 대해 신경 쓰일 것이 분명하며 나 또한 그들의 신경 쓰임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하는 불필요하고 비생산적인 신경을 써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 복장에 카메라를 매게 된다면 나는 더 이상 이상한 어둠의 존재가 아닌 밝은 관광객으로 변신하게 된다. 사람들은 관관객에게는 유독 그 자유분방함에 관대해진다. 자신들도 관광을 떠날 때 현실에서 할 수 없었던 개성 넘치는 복장과 행동이 그 어디에서나 용인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렇게 현실을 탈출한 외도의 짜릿한 행위도 자연스럽게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관광객만의 특권 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생활에 적응된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은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이고 일반적이지 않은 것에 전력하는 사람이다. 특히 광적인, 혹은 미친 사람.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일반적인 안정된 생활을 변화시키거나 그런 보수적인 안정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일반성의 품 안에서의 안정을 벗어난다는 것은 마치 도시를 벗어나 외딴섬에서 혼자 살아남아야 하는 매우 불편하고 두려운 삶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사회적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의 산책에서 카메라는 촬영이 아닌 배려의 액세서리이다.
산책의 시작점인 주차장 바깥의 바닷가 쪽 난간의 첫 번째 기둥으로 걸어갔다. 그 기둥엔 언젠가 갈매기가 싼 흰 똥 자국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나는 그 흰 똥 자국을 산책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출발하기 전에는 늘 전장에 임하는 군인들처럼 미묘한 긴장감이 살짝 맴돈다. 그래서 수축된 근육을 풀고 워밍업을 하듯 뒷주머니에서 커피가 장전된 보온병을 꺼낸다. 한 모금 또는 서너 모금 마신다. 아직 뜨거운 커피가 몸속으로 스며들면서 경직된 정신과 근육을 이완시켜 최상의 조건을 만들어준다. 그리고 첫걸음을 뗀다.
걷기가 시작되자 수평선에 이미 반 뼘으로 가까워진 태양도 나를 따라 함께 걷기 시작했다.
하루 중 아름다운 시간대는 두 번 있다. 한 밤의 별 하늘과 해 질 녘이다. 광대한 밤하늘에 이끌려 몇 백, 몇 만 광년을 헤매다가는 결국 자신의 깊숙한 곳으로 도착하게 만드는 별 하늘은 오직 밤에만 그것도 어두운 곳에서만 열리는 극장의 막 같은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일단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잠을 자서 각종 인공조명과 소음도 함께 잠들어야 하는 조건이 맞아야만 한다. 마치 우리가 감미로운 음악을 들을 때 주위의 작은 소음도 그 음악의 선율을 비틀어 엄청난 방해가 되는 것처럼. 인간이 어떤 것을 보려면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일단 눈을 떠야 한다. 눈꺼풀을 올리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볼 수 없다. 별은 원래부터 그곳에 항상 있는 것이지만 인간이 그 빛을 보기 어려운 것은 인공조명과 소음 그리고 무관심이라는 눈꺼풀에 가려 있기 때문이다. 그 눈꺼풀을 올리기만 하면 보이는 것이지만 현대인에게는 그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다. 휴대폰을 열었을 때 모든 별은 사라진다.
별은 태양처럼 에너지가 강하지 못해 존재감이 미약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별은 우리가 태어나기 이미 몇 억 년 전부터 그리고 태양보다 훨씬 전부터 이미 있었고 그 빛은 태고적부터 이미 우리에게 발사된 것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상기한다면 이 태초의 빛은 강약의 개념을 초월하여 영원과 불멸의 시원이며 때문에 인공적인 잡 광 들과는 섞이기를 거부하는 고고함의 원천이다. 이런 영롱한 별빛은 순수를 갈구하여 마음의 눈꺼풀을 열지 않는 한 아무에게나 보여지기를 거부한다.
한편 태양은 지구와 인류에게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하고 영향력 있는 존재이다. 지구와 인간의 생명을 지배하고 관장하고 있는 태양이므로 오죽하면 지구의 모든 종족이 태양을 신으로 숭배하고 있었지 않았던가.
태양은 인류에게 번영과 재앙을 주기도 하지만 또한 하루에 한 번씩 보너스 같은 선물도 하사하고 있다. 그것은 노을이다. 봄부터 여름까지 열심히 일해 준 나뭇잎들 에게 가을이 되어 일을 마무리하고 이제는 더 이상 일을 하지 않고도 화려한 금빛 단풍의 옷을 입혀 풍성한 여생을 지내는 황금기를 주는 것처럼 태양은 온 세상 구석구석에 노을 쇼를 무료로 공연하며 인간에게 감성적 위로를 베푼다. 그리고 인간은 그 노을을 보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와 대지의 아름다움 그리고 부모와 연인에 대한 애정과 인류의 평화, 나아가서 삶의 아름다움에 대한 심성을 싹 트이고 가꾸게 되었다.
공기와 구름을 이용하는 빛의 노을 쇼는 대개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며 매일 공연을 하면서도 그 컬러와 형태는 한 번도 같은 내용을 반복한 적이 없다. 나는 그 쇼를 하루도 빠짐없이 관람하는데 공연은 산이나 도시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지만 특히 해변은 무대가 자장 잘 보이며 편하게 관람할 수 있는 로열석과 같다. 게다가 지금 나처럼 공연 전부터 사전에 좌석 정보를 가지고 있고 푹신한 방석과 맛있는 음료를 준비하고 있다면 최상의 감동적인 관람이 될 것이다.
지금 공연을 앞둔 이 공연장의 로열석에는 나뿐 아니라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을 대충 분리하자면 관광객과 연인들, 반려견과 산책하는 사람 그리고 웨딩 촬영을 위해 온 신랑 신부와 촬영 스태프들이다. 그중에 관광객이 가장 많다. 그들이 이곳에 누구와 어떻게 왔는지는 모두 다르겠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촬영을 하기 위해 왔다는 것이다.
관광객은 두 부류가 있는데 관광버스를 타고 온 단체관광 그룹과 렌터카로 다니는 가족 또는 연인들이다. 이들은 대개 여행 일정이 정해져 있고 공통적으로 짧은 일정 안에 되도록 여러 곳을 다니는 바쁜 일정으로 쫓기듯 다닌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스스로 정한 것이다. 그 때문에 이들은 이곳에서의 촬영도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중년의 단체 관광객들은 그들의 말씨로 보아 충청도에서 온 것 같은데 느릿느릿한 말투와 다르게 매우 쫓기듯 촬영을 하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이런 말을 서로 자주 하고 있다.
"어이어이~ 빨리빨리 좀 와", "야! 이러다 늦겠다", "야! 아직 안 찍은 겨?"
그래도 그들의 표정에는 이런 쫓김도 여행의 일부로서 익숙한 듯 즐기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주로 이곳에 대표적인 상징물 같은 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데 <곽지해수욕장>이라던가 <과물해변 목욕탕>처럼 지역 이름이 들어간 표지 같은 곳에서 사진을 찍는데 모두들 서로 배려하듯이 줄을 서서 찍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앞사람의 포즈를 보며 학습한 듯 대개 같은 포즈로 찍고 있다. 또한 모두 같은 표정과 포즈, 손동작을 하고 있는데 예전에 유행하던 손가락 브이자는 아주 노인들 외에는 하지 않았으며 주로 손가락 하트나 손 하트, 팔 하트 등을 연출한다. 어째서 모두 하트를 그리는 것일까. 아마도 누군가에게 보내는 하트 라기보다는 자신에게 보내는 하트로 보인다. 자신이 이곳까지 와서 여러 사람과 즐겁게 놀고 있다는 대견함에 대한 스스로에게 보내는 하트이다. 또한 지금 이 순간은 자신의 일생 중에 몇 안 되는 풍요로우며 행복의 나날이라고 인생의 일기 속에 밑줄을 그어 강조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 찍고 있는 사진은 그 일기에 첨부하는 증거사진으로서 첨부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자료가 필요하므로 폰에 스틱을 연결한 일명 셀카봉을 이용해 최대의 광각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많이 담으려고 한다. 그것은 어쩐지 비록 먹지는 못하더라도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많이 차리는 것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양의 미학과 겉치레의 과시욕을 닮았다.
예전부터 흔히 말하는 "여행하는 거 딴 거 없어 남는 건 사진뿐이야"라는 속담은 모두 경험에서 생긴 것인가. 그들은 바로 이 사진 찍기를 위해 많은 비용을 지불했고 지불한 것 이상으로 실속을 챙기기 위해 그것이 연출이라도 관계없이 치열하게 찍어대는 것이다.
이들은 정말 짧은 시간 안에 요란하고 화끈하게 각자 사진 촬영을 마치자 인솔자에 부름에 따라 일제히 철수한다. 해변을 떠나는 그들의 얼굴에는 마치 전장을 정복한 승리의 군인들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이 묻어 있었으며 사진이란 전리품도 얻었으니 더 이상 이곳에 미련이 없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버스에 줄 서 올라탔다. 그리고 그들을 태운 버스는 다음 정복지를 행해 내 달려갔다.
그들이 황급히 떠난 자리에 연인들은 아직도 영혼을 바쳐 촬영에 여념이 없었다. 젊은 남녀들은 중년의 관광객에게 서는 찾을 수 없었던 전문 장비들이 눈에 보였고 연기에 있어서도 어쩐지 프로페셔널한 느낌이 강했다. 그들은 휴대폰 카메라뿐 아니라 미러리스 카메라와 각종 렌즈군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떤 이들은 짐벌과 드론을 이용하여 촬영을 하고 있었다. 한 커플은 드론을 날려 요란한 비행음으로 주위 사람들은 살짝 놀라게 하고 있는데 드론의 팔로우 기능으로 바닷가를 걸으며 행복에 찬 표정을 촬영하는 듯하다. 그들의 표정에는 주변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고 있는 드론이란 보다 상위 장비를 사용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섞여있다. 연기 또한 과격할 정도로 몰입해 있어서 껴안는다거나 키스하는 장면을 거침없이 하며 연기의 혼을 불사르고 있다. 그들에게 수줍음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어째서 이렇게 도전적인 것인가. 연인들이 관광객들과 다른 점은 촬영의 결과물을 SNS 등에 과시하려는 목적으로서도 사용하지만 본질적으로 그들에게 그것이 서로의 애정에 대한 다짐의 행위이며 서약과 같은 것으로서 사랑의 증거물을 생산하는 것이다. 연인들은 이런 명확한 증거를 다양하게 확보함으로써 서로를 얽히게 하는 선들을 짜내어 언제라도 다투거나 그래서 헤어지는 불행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안전 방지턱들을 만들어 두는 것이다. 또한 설령 그들이 헤어져서 또 다른 파트너가 접근할 때 새 애인이 그 증거물을 보고 구역질을 하게 만듦으로써 다시 재회할 가능성의 길을 닦아 둔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직 관계에 확신이 서지 않은 미성숙한 연인들 일수록 이런 전문 촬영에 망설이게 될 것이고 특히 바람기 있는 연애의 달인들은 자신에게 연애의 딱지를 붙이지 않으려 요령껏 피해 다닐 것이다. 그러나 어린 젊은이들은 이런 자물쇠와 같은 증거물로 위축되기에는 너무 다채색 기회들이 앞에 널려있고 그들의 가슴은 발화되기에 쉬운 뜨거운 온도를 가지고 있다.
이 연인들 사이사이에는 눈에 띄는 몇몇 촬영 팀이 있는데 이들은 연인들과 유사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그 스케일 면에서 그들과 비교할 수 없는 프로 집단이 있다. 신랑 신부와 그들을 찍는 웨딩 촬영팀이다. 제주도는 옛 부터 한국의 하와이 같은 신혼여행의 성지로서 지금 까지 수많은 신혼여행객들이 다녀갔는데 지금 중년에서 노년의 한국 부부들이 4분의 1 이상은 이미 이곳에서 신혼 촬영을 한 선배들이다.
그 당시는 주로 택시 운전사들이 촬영을 담당했지만 요즘 화질이 뛰어난 휴대폰이나 고화질 카메라와 안정된 삼각대, 그리고 뛰어난 성능의 짐벌과 간편하고도 효과적인 셀카봉이 그 시절 택시기사를 대신하고 있어서 이제 사진을 찍어주는 운전기사는 없다. 게다가 이제는 어설픈 자가 촬영이 아닌 전문가들이 기획을 하고 촬영과 제작을 하므로 연인들의 풋내기 촬영과는 레벨이 다르다.
그들의 촬영 현장 옆을 지나가면서 관찰을 했다.
"자~ 여기 보고~"
"얼굴을 왼쪽으로 돌리고~ 아니 너무 돌렸다"
"이 카메라를 보면서 천천히 앞으로 걷는다~ 좀 더 천천히~"
"자 이제 서로 손잡고 뛰어가는데 마주 보고 웃으면서~"
"고 실장 드레스 뒤로 잡아주고~"
"좋아 좋아"
"자 이제 다른 장소로 이동"
촬영 기사들은 마치 어린이집 교사가 애들 다루듯이 얼레고 달래면서 모델들을 유도하고 연출한다. 그리고 신랑 신부는 병원의 전문의 앞에서 진료를 받듯이 깊은 신뢰의 눈빛과 몸가짐으로 촬영 기사의 명령에 적극적으로 임한다.
어쩌면 이것은 마치 자신들의 행복 자체도 아마추어로서 스스로 기획하는 것이 두려워 비용을 들여 전문가에게 기획과 연출을 의뢰하는 것과도 같으며 청춘 시절을 졸업하고 결혼이라는 상급 과정에 진입하면서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진로 전문가에게 이력서를 청탁하면서 변호사에게 자신들의 상급 과정에 진입했음을 법적으로 공증받는 것과도 같다. 그리하여 아직 사회와 맞대 보지 않아 불확실한 자신들의 개성을 낮추고 경험 많은 전문가의 지시에 다소곳이 따르는 것이다.
전문 촬영 팀의 스탭 들은 이곳의 어디에서 어떤 것을 연출하고 촬영해야 하는지 잘 아는 듯하다. 정해진 촬영 시간표, 이동 경로와 각 포토존에서의 쓰이는 장비와 소품들을 각자 맡은 임무를 알고 일사불란한 진행이 이루어진다.
노련한 촬영을 모두 마치자 이제 막 어려운 실기시험을 마친 것처럼 기쁨과 홀가분함에 대한 박수를 쳤다. 하위 스탭 들은 소품을 챙기고 신부의 드레스가 끌리지 않도록 치마를 뭉쳐 둘러 안고 신부와 2인 1조로 더듬더듬 모래사장을 빠져나오고 있다. 신랑 신부를 가까이서 봤는데 멀리서 볼 때 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는데 한층 평범한 얼굴과 서민적 몸짓과 말투였고 피부는 거칠었다.
신랑 신부는 평소에 없던 전문 촬영을 하느라 찍을 때 느끼지 못했던 피로가 몰려오는 듯 살짝 비틀거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들은 많은 비용을 들여서 이런 힘든 노동까지 감수한 데에는 서로들 말은 안 했지만 마음으로 이미 교감된 한마디가 있다.
"일생에 한 번이니까...".
나는 사진 촬영 무리들을 빠져나와 조금 한산한 동쪽 해변으로 걷기 시작했다.
스피커 볼륨을 좀 더 올렸다. 음악 사운드가 커질수록 내 앞의 풍경들은 나의 감성에 덧 칠 되듯 조금 전과는 분명 다른 느낌으로 그 컬러와 형상까지 바뀌는 듯하다. 그것은 현실을 벗어난 초현실로 내게 다가온다. 나는 음악에 스탭을 맞추듯 느릿느릿하거나 리듬을 실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춤을 추기도 한다. 또한 찬란한 코르시카 바다에서 가슴이 벅차기도 했고 사랑을 잃은 그리스 여인의 애절한 슬픔에 흐느끼기도 하며 카보베르데의 짜고 건조한 사우다드에 젖기도 했다. 초현실이란 그것을 비현실로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꿈으로 사라지는 허상이다. 그러나 꿈도 현실의 일부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공간과 시간의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실제의 환상적인 현실 공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확장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이런 산책을 처음 시작할 때는 대부분의 중년의 사람들이 그러했듯 점점 근육이 노쇠해지며 굳어가는 듯한 두려움에 경각하여 자발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는 트레이닝 위주로 걸었으므로 산책이란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등에 땀이 날 정도의 빠른 걸음과 팔은 힘찬 왕복운동을 한다. 그리고 머리로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운동을 하며 어떠한 생각을 한다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잡생각이며 그것은 이런 충실한 운동에 방해만 될 뿐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기계적인 운동이 반복될수록 감성이 반항과 회의하기 시작했다. 마치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시험공부나 눈 내리는 겨울에도 새벽에 일어나 출근하는 일, 또는 의무적으로 아니 강제적으로 해야 하는 끔찍한 군 복무가 연상되었다.
그러나 음악과 함께 하면서부터는 그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것은 의무적, 강제적 운동이 아니라 낭만적 산책으로 목적이 반전된 것이다.
그러한 반전은 마치 항해 기술을 익히기 위해 거친 바다를 항해하다가 예상하지 않았던 신대륙을 발견한 것 같았다.
모래사장을 걸을 때는 이곳이 더 이상 목숨을 건 사막 행군이 아닌 북극곰의 모피로 만든 폭신한 양탄자를 걷는 호사스러운 느낌이 되었고 거친 바람과 파도는 나를 격려하는 환호와 손짓이 되었으며 시시각각 변화는 구름의 노을은 나에게 이국적이고도 로맨틱하며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속삭여주었다.
해변의 서쪽 끝에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식당가가 있다. 제주도의 옛 정취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개발이 이루어진 요즘으로서는 흔한 모양의 모던하고 건조한 상업건물이다. 원래 그곳은 마을 옆에 바다를 마주한 황무지로 옛날에는 그 옆 우물가로 물을 길어 오는 아낙들의 길목이었지만 지금은 마을의 개와 고양이들 외에는 아무도 가지 않던 먼지 날리는 황량한 곳으로써 하늘과 맞닿은 소나무들의 조용한 안식처였다.
건물의 윗 쪽에는 <글로벌 푸드 센터>라는 영문의 간판이 붙어있는 이 모던한 건물은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모양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형태의 디자인이 최근의 유행이고 제주 외곽의 바닷가 마을로서는 원래 제주도적이라는 형태의 건축이라는 것이 애초에 없다. 모두 슬레이트 지붕의 낮은 옛 가옥들 뿐이다. 그러니 이 건물이 주변과 가장 잘 어울리는 디자인을 채택한다면 그것을 건축물을 짓지 않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또한 주변에 있는 3층 이상의 건물들은 모두 이런 모던한 디자인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현실적으로 합당한 모양이라고 해도 특별히 뭐라 말할 수 없다.
이곳은 글로벌이라는 이름답게 세계 각국의 음식점이 12개 정도가 하나로 붙어있고 넓은 커피숍이 2개 있으며 2개의 건물 사이에 있는 넓은 공간에는 야외 식당 테이블들이 널려있다. 그런데 얼듯 보면 12개 국가의 민속 음식점이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일본, 중국, 베트남 음식점이 있고 나머지는 치킨, 떡볶이, 국수 등 글로벌이라는 이름과는 동떨어진 메뉴의 식당들이다. 국가를 표방한 식당들도 실은 매우 한국적인 맛의 음식으로서 그 나라 사람들이 먹어보면 이국적인 한국의 맛이 날 것 같다. 그래서일까 모두 "퓨전"이란 말을 붙여 넣었는데 그것은 왠지 그 전문성의 왜곡을 합법적으로 정당화하는 말처럼 보인다.
그리고 건물의 주변 곳곳에는 화살표 모양의 방향유도 이정표들이 있는데 모두 영문으로 쓰여 있고 그 영문표기가 가르치는 곳이 어떤 곳인지 안 수 있는 사람은 아미 그 건물의 관계자들 뿐일 것이다. 그것은 유도 표시 라기보다는 건물의 세련됨을 장식하는 액세서리에 더 가깝다. 그 영문 유도 표시 중에 유독 한 군데는 한글로 쓰여있는 표시가 있는데 <남당 암수>라고 쓰여있다. 예부터 바닷가 바위틈에서 용천수가 나오는 곳을 말하는 것인데 실은 <남당 암수>라는 한문 표기 또한 정말 예부터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을까 하는 의심도 생긴다. 아무튼 한글로 <남당 암수>라는 글자만 영문들 사이에서 어울리지 않는 고딕체로 외톨이처럼 끼어있는 모습은 어쩐지 많은 외지인들이 모여 떠들고 있는 관광지에 홀로 서있는 제주인의 어색한 어울림 같다.
건물의 이층에는 대규모의 휴게공간을 두 군데 만들어 놓았는데 규모가 크다기보다는 작은 규모를 강제로 넓게 늘려 놓은 것 같은 모양으로 마치 포토샵으로 해상도가 낮은 사진을 억지로 늘렸을 때 바둑판 형의 허무한 픽셀만 보이는 듯한 그런 느낌이다.
'지역의 세계화'라든가 '지속 가능한', '글로벌 인재' 등과 같은 공허한 공무원식 표현이 떠오른다.
또한 이 건축물은 '인생은 한방이다'식의 무모한 도전정신과 상다리가 부러져야만 대접하는 이의 정성을 인정하는 것처럼 질보다 양의 미덕이 뚜렷하고 '간판 우선주의' 같은 외모지상주의의 허세가 종합적으로 응축된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공간은 매우 비좁았다.
나는 당이 떨어진 듯한 약간의 어지럼증이 왔기 때문에 달콤한 것을 먹기 위해서 2층 커피숍에 올랐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예상한 것은 틀리지 않았다. 커피숍 이라기보다는 행사 홀과 같은 넓은 공간 안에는 테이블과 의자들 만이 있었다. 벽에는 어떠한 장식이나 그림도 붙어있지 않았다. 그 모든 테이블 세트들은 단 한 가지의 모양뿐이었고 줄이 반듯하게 맞춰져 있었다. 그것들은 자세히 보지 않아도 뭔가 몸에 해로울 것 같이 느껴지는 합성 재질의 테이블과 유난히 광이 나는 금도금한 가벼운 의자들 이였다. 저렴하게 구입하기 위해 대량으로 구입한 것이 확실하다. 또는 폐업한 다른 호텔이나 회의장에서 통째로 가져왔을지도 모른다는 의문도 들었다. 나처럼 이곳에 처음 온 사람들은 혹시 회의실이나 구내식당에 잘못 찾아 들어온 것으로 오해하여 멈칫하고는 다시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초기의 인테리어 컨셉은 아녔을 것이다.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든다면
첫 번째는 많은 건축비 지출로 인해 인테리어 비용이 대폭 감소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위에서 예상한 것처럼 저가의 가구를 들여왔으며 벽이나 주요 장식 공간도 장식품을 구입할 비용이 바닥났으므로 더 이상의 장식을 포기하고 심플함이라는 말을 혼자서 되 뇌이면서 자기 최면에 빠지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제주도는 아직 단체 관광객이 많으므로 관광버스를 타고 온 지방의 아줌마 아저씨들이나 중국인 단체관광객이 많을 것이라고 단정하고 그들을 위한 단체 공공시설처럼 만든 것이다. 그런 뜨내기 단체손님들은 자율적으로 이곳에 오는 것이 아니고 여행사의 일정에 맞춰 오는 것이므로 이곳의 분위기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할 필요도 없고 그저 저렴하게 마시고 가면 되는 것이다. 어차피 그들이 개인적으로 이곳에 다시 올 확률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단체를 상대로 하는 영업은 주인의 통 큰 한방 주의와도 잘 들어맞게 한방에 통 큰 승부를 하는 사업가로서 또는 화끈한 기개를 지닌 남자로서 동창이나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후배 사업가들의 모범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제 손까지 떨리려는 전조 증상이 왔으므로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주문을 하기 위해 카운터로 향했다.
주문 카운터에는 두 명의 여직원이 있었는데 휴대폰을 만지고 있는 그녀들의 두 손은 매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갔을 때 그녀들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는데 화면을 닫지는 않았다. 그리고 약간 귀찮은 듯한 눈빛이 내게 닿았다. 그러나 그녀들은 그것을 부정하는 하는 듯했고 내가 알아채지 못했다고 단정했다.
그녀들은 이 가게의 주인이 아니다. 나는 그녀들의 손님이 아니고 주인 양반의 손님인 셈이다. 그러니 그녀들은 굳이 나를 자신들의 기다리던 친구처럼 밝게 반기거나 할 이유는 없다. 그녀들은 정직원도 아니므로 스타벅스의 아르바이트생들처럼 매장에 대한 자긍심이 풍만한 듯한 거짓 표정과 혼이 담기지 않은 말투는 더욱 할 필요도 없다. 만약 이들 중 한 명이 그렇게 했다면 그녀는 태어나서 이런 일이 처음인 그야말로 세상 물정 모르는 소박하고 순수한 산골소녀일 것이다.
그녀들은 당연히 자신들은 산골소녀도 아니고 도시의 세련된 여성들이며 멋을 알고 지적이며 유머를 즐길 줄 아는 현대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녀들은 집안 형편이 그다지 어려운 편도 아니며 가정에서는 귀여움을 받는 딸이고 친구들에게도 인기가 있는 다소 예쁜 여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남는 시간을 알뜰히 활용하기 위해 이곳에 잠깐 알바를 하러 온 것뿐이고 이 업무를 마치면 또다시 자신들을 원하는 곳으로 가야 하는 다소 바쁜 여성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점주가 원하는 친절한 접객의 개념이란 과잉을 넘어선 비굴함이며 그것은 페미니즘적 인권이 결부된 중대한 자존심의 훼손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그녀들에게 내가 불친절을 지적하고 교정하기를 원하는 말이나 행동을 한다면 나는 그 다음날 포털사이트에 갑질 손님이라는 제목의 뉴스로 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오명을 쓰는 것이 두려운 나는 지금까지 생각한 모든 것을 머리에서 지우고 아무 말 없이 주문을 하게 되었다. 또한 나는 이곳에서 브런치만 주문하고 커피는 내 주머니 속에 있는 보온병 커피를 몰래 마실 요량이었으므로 오히려 내가 더 공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나는 치즈케이크를 주문했고 호출벨을 손에 들고 카운터를 벗어났다. 주위를 둘러보며 쾌적한 자리를 찾아보았다. 쾌적한 자리는 많았는데 그것은 이 홀에 손님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한적함은 내가 평소에 늘 바라는 상황이었다.
바닷가가 잘 보이는 최적의 자리에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마음 가는 데로 앉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자리는 건너편의 식당가와 야외 테라스도 모두 한눈에 보이는 곳이라서 마치 전망대에 올라온 것 같은 느낌의 자리이다.
파도가 치는 해변에 붙어있는 넓은 야외 테라스에는 낭만적인 분위기를 고취시키는 줄전구들을 공중에 많이 달아 놓았고 이곳의 정체성을 알려주듯 음악이 다소 큰 볼륨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모두 힙합이었다. 이러한 연출은 각국에서 여행 온 젊은이들의 성지가 된 포르투갈 해변의 유명카페나 홍대 클럽 같은 자유분방하고 물 좋은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의도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러나 그런 의도가 맞아떨어지는 때는 일 년 중 휴가 성수기 때의 며칠간 외에는 없었다. 지금은 매우 조용하고 적막하다. 젊은이들은 적적하다고 느낄 것이다.
지금은 저녁시간인데도 식당가에는 두 팀의 손님들만 있었고 음식 종류별 각 코너 안에는 한 두 명의 직원들이 각각 서있다. 직원들은 손님들 보나 자신들이 더 많음을 인식하고 있으므로 한가하게 휴대폰으로 무엇인가를 하고는 있지만 어쩐지 불편하고 집중이 안되었다. 그중에 몇 명은 아예 휴대폰을 내려놓고 먼 수평선을 다소 근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낚시꾼의 표정과 같았다.
모든 식당들은 외부와 오픈되어 있었으므로 가끔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 식사 손님은 아니고 그곳을 통과해 가는 마을 사람이나 사진 촬영만 하는 관광객들 뿐이었다.
이런 반복되는 한가한 일상에 익숙한 직원들은 이제 이곳에서의 어떠한 기대감도 해탈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자주 보고 있는데 그것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은 어서 빨리 이 지루한 시간이 지나 퇴근 시간을 기다리고 있거나 조금 더 멀리 보는 직원들은 퇴근시간을 넘어서 폐업의 날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의 일자리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손님이 없는 것과 그로 인하여 다가오는 주인의 눈치, 그리고 가시방석 같은 자리의 불안함 보다 정말 견디기 힘든 것은 무료함이 만들어 낸 무기력함이다.
모처럼 기대하고 들어간 직장에서 자신의 일거리가 없다면 처음에는 편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런 과도한 편안함은 오히려 과도한 업무로 인한 피곤함 보다 더 두려운 것이 되며 불안함을 자가 생산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 혹은 청춘을 썩히고 있다고 좌절할 것이다.
젊은이들이 사회에서 어떠한 험하고 힘든 일도 버티거나 감래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어떤 노동으로 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 기회에 대한 기대감이고 또 한 가지는 그런 희망과 관계가 없었다 하더라도 스스로 사회에 필요한 인재일 수도 있다는 희망적인 예측으로 피어나는 자존감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기대나 성취감 또는 자존감 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편한 일이라는 것은 그 어떠한 고되고 어려운 일보다 견디기 힘든 것이다.
젊은이들을 진정으로 괴롭히는 것은 평온과 정적이다.
건강한 젊은이들은 나태하지 않다. 생리적으로도 그들의 왕성한 근육과 뜨거운 피는 나태함이나 한가함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만약 그들에게 나태한 모습을 발견했다면 그것은 일 할 수 있는 그래서 그것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뿐이다.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벤치를 지키는 것이 편한 선수는 없다. 그들은 오히려 출전 선수들 못지않은 체력을 갖추고 준비하고 있지만 정원 초과로 벤치에 있을 뿐이다.
지금 이곳의 젊은 직원들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것은 자신은 어디서든 필요한 존재이며 그런 모습을 타인에게 겉모습 만이라도 보여주고 싶은 자위적 몸짓이며 이런 참기 힘든 한가함을 감추고 싶어 하는 몸부림이다.
호출벨의 진동에 놀라 카운터로 갔을 때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왔고 곧이어 한 그룹의 여자들이 몰려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들이 가게에 들어왔다. 한 묶음이었던 소리들은 각각의 낭랑한 고음의 목소리로 나누어져 들렸고 그런 날카로운 목소리들이 합쳐진 함성 같은 재잘거림의 진동은 이 조용한 가게를 뒤 흔들어 놓았다.
상기된 나의 뒷 목에서 땀이 솟아 나왔다.
주문했던 케이크를 받아 들고 내 자리로 왔는데 그 자리에는 조금 전까지는 없었던 불행이 앉아있었다. 그녀들이 내 바로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40대 후반의 이 여자들은 윤기 나는 머리카락과 광택이 있는 피부와 얼굴 그리고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이 착용한 액세서리들은 그런 단정한 옷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크기와 모양을 하고 있었고 그것들에게 서는 은근히 튀어 보이려는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들은 주로 핸드백과 구두, 스카프 그리고 반지나 목걸이 같은 귀금속이었고 차 열쇠도 있었다.
그녀들은 서로에게 '영희 선생님', 혹은 '숙희 선배' 같은 호칭으로 부르고 있었고 자신보다 아랫사람에게는 이름을 불렀다. 이런 호칭처럼 그녀들은 매우 친숙해 보이면서도 그녀들의 사이에 적당한 거리와 높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그런 적당한 온도의 거리를 깨거나 깨려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의 관계는 밝고 단정했다.
그녀들이 대화를 하는 방식 또한 그랬는데 그것은 한 사람이 말을 할 때 특정한 누군가를 향해 말하지 않고 그룹 전체에 대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도 한 사람의 개인적 답변 이라기보다는 모두의 공통된 의견 같은 뉘앙스로 말하는 것이다. 이런 대화의 암묵적인 우호적 예의는 다소 경직된 대화라고 상상할 수 있는데 실은 그와는 반대로 매우 쾌활하고 시끄러울 정도로 경쾌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 경쾌함의 근원은 웃음이다. 이들은 어떤 말이건 웃음으로 끝났고 그렇게 끝나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이야말로 유익하고 생산적인 대화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들은 과거에 어떤 직업적으로 같은 소속의 동료들 이였던 것 같은데 그때의 멤버들이 지금까지 그 친목을 유지하여 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당시에 대한 기억도 멀어졌을 뿐 아니라 그동안 삶은 변화가 다양했으므로 그때의 전문적인 대화보다는 일사의 일들을 주로 이야기하고 있다. 대개는 가정에서 일어난 일들로 남편에 대한 이야기나 자녀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 주변의 인물들에 대한 것도 많았다. 정치와 경제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도 없었지만 자신들의 또는 지인들의 투자에 대한 이야기는 많았다. 주로 부동산 투자에 대한 것이었다.
대화의 한 가지 특징이라면 자신과 그 그룹에 관계되지 않은 제3의 인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면 반드시 그 끝은 뒷담화 처럼 결론이 나곤 했다. 그리고는 모두 요란한 웃음으로 주제에 대한 결말을 맺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런 요란한 웃음이 매우 거슬렸지만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부터는 그 웃음이 그다지 거슬리지 않게 되었을뿐더러 어떤 대화에 대한 것은 궁금증도 생기기도 했고 그것을 물어보고 싶은 충동까지도 들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때 어떤 유형이 있는데 대개 두 가지로 나눠져 있다.
첫 번째는 자신의 실수담 같은 것으로 자신의 어이없는 실수로 인하여 벌어진 일들에 대한 에피소드이다. 그런데 그 실수란 것은 예를 들어 어려운 생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어둡거나 심각하거나 혹은 음흉한 종류의 것은 없고 즐겁고 밝은 생활 속에서 발생한 코믹 홈드라마에서나 나올 것 같은 실수로 자신의 바보 같은 실수라고 말은 하지만 그것은 어쩐지 자신의 그런 귀엽고 예쁘기까지 한 행동을 실수란 표현으로 돌려 말하는 듯 들렸다. 그리고 마지막은 어김없이 요란한 웃음을 쏟아낸다.
두 번째는 보고 형식으로 이어나가는 직접적인 자랑 이야기로 자신 혹은 가족에 대한 것이다. 자신이나 가족이 사놓은 부동산이 잘 팔려서 생각지 않게 이득이 생겼다든가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에 친척이나 남편에게 받은 값비싼 선물 이야기, 자녀에게 생긴 자랑스러운 사건, 차를 바꾼 일...
그러나 이들은 이런 좋은 사건들을 직접적이고 상세하게 전개하지는 않는다. 그저 툭 하고 던지는 식이다. 마치 그런 일은 그다지 큰 사건도 아니라는 듯 절재하여 이야기한다. 만약 자신이 그러한 행복을 유난히 목놓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여러 가지 오해의 여지를 줄 수 있는 것이다. 행복한 일은 자신에게는 기적 같은 사건이며 그렇다는 것은 결국 자신은 평소에는 불행한 일상을 살고 있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과다한 자랑은 그만큼 후에 자신에게 뒷담화로 돌아올 수도 있는 부담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좋은 사건은 자주 일어나고 있는 평이한 것이라고 순화하여 말을 함으로써 훗날 되돌아 올 화살을 애초에 차단하는 현명한 대화법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랑거리를 말로만 증명하기에는 어딘지 불신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사진이나 그것을 증거 할 수 있는 물건을 제시함으로써 좀 더 부드럽고 명확한 전개를 이어 나간다.
그리고 이런 주제에 대한 마지막은 웃음보다는 탄성이나 애교 섞인 부러움의 질타 같은 것으로 끝난다.
"와 좋겠다!", "어머 잘됐다!"라는 말이 들려온다.
그러나 그들의 부러운 웃음을 보내는 밝은 표정 속에는 "그동안은 불행했지만 이제 오랜만에 행복해져서 좋겠다"라는 가슴속 심연에서 들려오는 어두운 축하의 말도 중첩되어 있었다.
'행복은 나눌수록 부풀고 불행은 나눌수록 희석된다'라는 속담은 이 여자들 그룹의 목적이며 신념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로 잘 맞아 들어가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런 양지의 반대편에서는 여전히 양지의 공식으로는 맞아떨어질 수 없는 지하세계의 법칙이 거대한 빙산처럼 바닷속의 심연을 떠다니기 때문에 어느 날 서로 기원이 다른 공식들이 부딪쳤을 때는 거대한 마찰음과 함께 일각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것은 만약 그녀들의 이 적당한 거리가 유지하지 못하고 가까워졌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충돌일 수도 있다. 그것은 개인의 내면 혹은 서로의 관계에 대한 충돌이다. 어린이 동화처럼 밝음에 대한 반응은 반드시 모두의 기쁨이어야 한다고 하는 상식적인 접근은 위험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순진한 최면적 믿음을 언제까지 자신의 내면에 은근슬쩍 미루고 살 수도 없을 것이다.
물질의 얻음과 그에 대한 상식적인 접근으로써의 행복 스토리는 모두에게 잔잔한 물결처럼 부드럽게 퍼져 나갈 수도 있지만 그 물결이 과하여 잔잔함의 파동의 한계를 넘어선다면 그것은 파도가 되어 개인의 뚝에 부딪치고 그 뚝을 부서뜨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뚝에 있던 물은 파도에 합류되고 흩어져 없어진다. 약한 뚝 일수로 행복스토리의 잔 파도에도 쉽게 무너진다.
나는 그녀들의 대화를 몰래 엿보기도 하고 들으면서 이런 가정을 은유해 보았다.
행복을 나누는 화목한 테이블에는 각자 내놓은 행복들이 모여있다. 그것은 자신의 행복을 조금이라도 부풀려 볼까 하는 사람들이 모여 배팅하려고 내놓은 판돈이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강한 행복스토리를 가진 사람이 그 판돈을 모두 거두어 간다.
돈을 잃은 사람들은 양지의 상식으로 승리자를 부러워해 주거나 축하해 주고 승리자는 그것에 고마워한다. 그러나 돈을 잃은 사람들은 돌아갈 차비가 없으므로 승리자는 아량을 베풀어 자신이 딴 돈의 아주 일부를 나누어 준다. 그것은 기부이다. 모두들 감동한다. 그것은 경제학에서 배웠던 자본주의와 매우 잘 맞아떨어졌다.
행복은 나눌수록 한 사람만 비대해졌고 나머지는 점점 말라갔다. 행복에 중독된 사람들은 이제 또 다른 행복의 판돈을 준비해야 한다. 언젠가는 잃었던 자신의 행복을 되찾고 더불어 다른 이들의 행복을 싹쓸이하는 행복한 꿈을 내려놓을 수 없다.
깊은 가을이다. 아직 7시밖에 안되었지만 태양과 주황빛 노을은 벌써 수평선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밤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녀들의 대화에서 빠져나왔고 이어서 카페에서도 빠져나왔다. 조금 피곤해졌다.
집으로 갈 시간이 되었다. 바로 차에 오르기가 어색해서 해변을 한 바퀴 더 돌고 가기로 마음먹고 모래사장으로 걸어갔다.
해변에는 저녁때 관광객의 북적임도 사라지고 뜨거웠던 연인들과 신랑 신부의 촬영 열기도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가을 밤바다의 아련한 정취가 자리를 잡았다.
적막하기까지 한 이 해변에는 가끔 개와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보통 개들은 흥분한 듯 힘이 넘쳐났고 그 힘으로 주인을 끌고 다녔다.
걸으면서 나는 바닷가 난간에 앉아 있는 몇 마리의 고양이를 만났다. 고양이들은 낮 동안의 피곤에 쌓인 건조한 시선으로 삶에 지친듯한 눈동자를 느리게 깜박이고 있었다.
내가 그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고양이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냥 가던 길 가세요" , "피곤하다고요" , "관심 같은 것 필요 없어요"
나는 그 말을 재빨리 알아채고 눈을 돌려 가던 길을 갔다.
고양이의 말처럼 이 해변은 해가 지기 전까지 피곤할 만큼 분주했었다. 많은 이들이 이 해변에서 자신들의 삶을 연출했고 그런 증명사진을 찍어 증거물로 가져갔다.
그들은 이 시간에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들에게 이곳에서 예쁘고 행복한 나날이었다고 증거와 함께 외치고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양지의 상식으로 따뜻하게 답변할 것이다 부러움의 환호와 함께.
벌써부터 직원들의 퇴근 준비로 분주한 식당은 이제야 처음으로 활기가 넘친다. 그들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가족이나 친구들과 밤 시간을 시작하기 위해 이곳을 최대한 빨리 빠져나갈 것이다. 이들의 가족들은 이들의 하루의 노고를 위로하는 격려의 말을 할 것이다.
해변을 한 바퀴 돌아 주차장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좀 전의 그 여자 그룹도 카페를 나와 있었다. 그녀들은 마지막으로 화려한 모습의 식당가를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녀들 한 사람 한 사람의 표정은 오늘도 즐겁고 유익한 하루였다는 듯 성취감이 가득한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윽고 나는 차에 올라 요란한 시동을 걸었다. 해변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고 이제 방금 도착한 별들 만이 해변을 바라보고 있었다.
밤이 오기 전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 해변에서 각자의 행복을 발견하거나 줍고, 만들거나 모으며 행복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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