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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주제 - 신발
2018. 11. 향기 이영란
모처럼 주말을 맞아 옷장 정리를 했다. 정신없이 들어앉아 있던 옷들을 모조리 꺼내어 방바닥에 쏟아내고나니, 한 사람에게 딸린 옷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나마 걸려 있는 옷은 두고, 개어져 있는 것들만 정리했는데...... 철이 돌아오면 사고, 예전에 입던 꼭 맞는 바지가 불편해 통이 넓은 바지들을 사 재고, 꽃무늬가 입고 싶어서 사고, 꽉 끼는 자켓이나 코트가 싫어서 편안한 가디건을 사고, 여름이나 겨울과 같이 긴 시간을 보내고 나면 하도 많이 입어 지겨워서 사고..... 집에 있는 물건 중에 가장 많은 것이 옷이라 생각된다. 그러고도 입을 옷이 마땅치 않고, 또 입는 옷만 계속 입게 된다.
아무래도 출근 할 때에는 새 것 위주로 입어서, 보풀이 일어나고 늘어진 니트나, 우중충한 색깔의 바지는 한쪽에 모아두었다. 나중에 농사를 짓거나 여러 가지 바깥 일을 할 때 꼭 입을 일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꼭 깔끔하게 정리한 상태를 유지하며 살아야 하는 굳은(?) 결심과 제발 옷을 쌓기보다는 내적인 충만함을 쌓아 가자는 다짐도 같이 했다.
이어서 아들들의 옷장을 정리했다. 요즘에는 작은 아이가 엄마가 고른 옷들이 죄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덜거리기 시작한다. 무채색의 맨투맨티셔츠, 후드티, 청바지, 체육복 등등 남자들 옷이 다 그렇지 뭐! 앞으로는 제발 네가 좀 골라 입어라 하며 반격을 했지만, 자신의 관점이 생기고 결정하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속으로는 기뻤다. 뻥 튀기처럼 성장하는 아들들의 옷은 1년을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둘째의 덩치가 많이 커지면서 형과 같은 사이즈를 입는다. 옷이나 물건에 관해 까탈스럽지 않은 아들들이 좋다. 잠옷, 가디건, 체육복 바지 등 작아진 옷을 학교 독서동아리 엄마의 아들에게 주려고 몇 벌 챙겨두었다. 아들의 옷을 열심히 입고 다니는 아이를 보면 그렇게 흐뭇할 수 없다.
얼마 후에는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는 원래 상태로 돌아가게 될 것이지만 일단 반나절 넘게 걸려 정리한 기분은 상쾌했다. 내가 정리해 주었노라고 아들들에게 생색을 한껏 내었으나 별로 통하지 않았다.
틈만 나면 사는 옷에 비해 가지게 되는 가방이나 신발, 벨트, 모자 종류의 비율은 급격히 떨어진다. 옷은 각자 방이나 공간에 있지만, 신발은 현관에 모두 모여 있고, 건장한 남자 세 명의 것이 한데 모여 있으니, 현관은 군함 같은 신발들로 가득하다. 남편의 신발 사이즈와 비슷하건만, 아들들의 신발이 더 커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더 커진 덩치, 더 커지는 목소리와 요구들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 같다.
을씨년스럽고 춥기만 했던 11월의 날씨다. 도무지 겨울로 갈 생각을 않고 게으름을 부리는 어느 가을 날, 나는 출근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집이 비어 있으리라 생각한 신발들은 무장해제한 채 저마다 쏟아내는 사연을 나는 듣고야 말았다.
1. 여자의 구두 a
여자가 특별한 날일 때 나를 골라서 신어. 나는 원래 창원의 대동백화점에 있었는데, 여자가 결혼할 때 나를 골랐어. 여자가 주로 신던 신발은 앞 부분이 조금 네모스럽고 굽도 네모였던, 구두보다는 단화에 가까운 디자인이었어. 신발의 바깥 쪽으로 끈을 거는 내 모습이 여성스럽다고 마음에 들어했어. 무엇보다 여자가 입을 결혼 예복에 어울린다고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했어. 나를 지친 솔로 생활을 마감하는 징표처럼 생각해 주었어. 그래서 항상 나를 특별하게 생각해 주었어. 특별한 것과 자주 신는 건 관계가 없나 봐. 여자는 학교를 다니면서 졸업식이나 앨범촬영처럼 차려 입을 일이 있을 때에만 나를 찾으니까 나는 항상 이 어두컴컴하고 곰팡이 냄새 나는 이 신발장을 벗어날 일이 없어 답답해. 지금은 밑창을 붙이는 본드가 너무 굳어서 거의 떨어진 상태인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준비성이 없어서 행사가 있을 때 미리 구두를 점검하는 게 아니라, 당일 아침에 갑자기 꺼내 신고 가서야 상태를 알아차리고는 해.
2. 여자의 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랑 비슷한 점이 많구나. 나는 3~4년 전 롯데마트 신발가게에 있었어. 마트는 가게주인들이 항상 피곤해 하고 또 나는 여름에만 진열이 되고 팔려야 하는 물건이어서 여자가 나를 마음에 들어했을 때 기분이 무척 좋았어. 그런데 내가 이 곳에 왔을 때 나는 조금 놀랐어. 나랑 비슷한 친구들이 거의 없었거든. 그나마 네가 가장 비슷했어. 나도 너처럼 신발 바깥쪽으로 고리를 걸어야 신을 수 있는 번거로움이 있어. 굽도 조금 있어서 나를 신기 위해서는 여러 댓가를 치러야 해. 여자는 바쁜 출근 날 나를 신고 후다닥 나가서 엘리베이터에서 낑낑대며 겨우 고리를 끼우고 가면, 학교에 도착해서 다시 허리를 굽혀 고리 풀기를 몇 번 하더니 나를 점점 짜증스런 눈빛으로 보기 시작했어. 그러더니 결국 그 다음 해에 다른 친구를 데리고 왔어! 그 후로 나를 잘 찾지 않아. 섭섭한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여자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싫지 않아. 늘 나를 안쓰럽게 생각하는 표정을 짓고 있거든. 그런데 지금은 신발 바닥의 얇은 막이 벗겨져서 조금 보기 흉해. 이번 여름엔 한번도 바깥에 못 나가 봤어!
3. 여자의 운동화
나는 등산복 매장에 있던 운동화야. 자기가 골라놓고는 나를 구석에 던져놓고 정말 관심이 없더라구. 무시 받아서 서러웠어. 이러려고 나를 데리고 왔나 싶었지! 나도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었어. 만드는 사람이 아주 공을 들여서 만들었거든.
그런데 얼마 전 여자가 학교 엄마들과 함께 김해를 가는 날이었어. 신발 여러 개를 아주 훑어보더니 자주 신는 운동화를 신고 갈까 하다가 너무 낡고 지저분해서 조금 망설이는 모습이 보였어. 보는 눈들이 있으니까 그랬겠지! 옆에 있는 나를 홱! 낚아채더니 그날 내내 함께 다녔어! 아~ 나는 그 날을 아름다운 시간으로 기억하고 있어. 오래된 왕릉도 좋았고, 시가 담긴 바구니가 있던 김해 도서관도 좋았어. 같이 간 여자들이 열 명이 넘었는데 발레 공연을 보고나서 남자 무용수와 스토리에 대해 너무 크게 떠들어서 힘들었어. 돌아오는 작은 버스 안에서까지 박수를 치고 깔깔거리며 내내 시끄러웠는데 그것만 빼고는 다 괜찮았어. 자세히 보면 모두들 알게 모르게 배려하고 있었고, 좋은 말들을 큰 소리로 하고 있었어. 여자는 도서관에서 봤던 그림책 몇 권을 사진으로 남기더니 통영에 와서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어. 여자는 책을 좋아하는 데, 정리는 잘 하지 않는 것 같아.
그날 이후 여자는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어. <보헤미안 랩소디> 영화를 볼 때는 나를 당연한 듯이 데리고 갔어. 덕분에 퀸의 노래를 실컷 들을 수 있었어. 오늘은 진주에 가서 가을 단풍 구경도 실컷 했어. 여자가 나뭇잎을 하도 많이 주워대니까 아들은 경상도 사람 답지 않게 왜 그렇게 감성적이냐고 퉁을 놓았어. 경상도 사람과 감성적이지 않다의 상관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여자는 색색깔로 물든 나뭇잎에 빠져서 아들의 핀잔도 들리지 않는 듯 했어. 아니 여자는 아들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았어. 나는 이제라도 여자가 나를 알아봐 준 것이 기뻐. 기다린 보람을 느껴.
4. 여자의 구두 b
나는 여자가 매일 출근할 때마다 신고 다니는 검정색 구두단화야. 너희들 말을 들어보니 여자는 어떤 신발을 처음부터 좋아하지는 않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듯 해. 나 역시 그랬거든. 디자인이 나이 들어 보인다고 나 보기를 꺼려했어. 그러더니 2~3년 전부터는 나와 같이 다니고 있어.
항상 같이 출퇴근을 하다보니 늘 찌들려 있는 모습 위주로 보게 되는데, 요즘 보면 여자의 발걸음이 어찌나 무거운 지 내가 힘들어 죽겠어. 진지한 데라고는 없는 아이들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또 오늘은 교원평가 학부모만족도 조사에서 거의 바닥인 점수를 준 학부형 때문에 마음이 상한 것 같기도 하고, 예의 없는 상사 때문이거나, 혹은 세대차이 나는 동료교사들에 대한 이질감일 수도 있어. 여자는 가만히 생각해. 누구나 가지는 인생의 무게이건만, 자꾸만 내려앉아버리는 자신이 한심하다고. 더 소심해지고, 조그만 일에도 잘 토라지고, 그런 자신을 자꾸 되돌아보지만 어찌할 수 없는 스트레스에 위염을 앓으면서 다녀.
여자와 함께 다니며 본 가을풍경이 예뻐. 봄의 모습은 환하게 환하게 예쁘지만, 가을은 성숙한 모습으로 아름다워. 가을에도 벌이 굶지 않도록 피는 국화꽃이 고마운 하루였어. 힘에 부치는 시간을 보내는 여자가 세상과 자신과 화해하며 살길 바래.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럴 수 있으리라 믿어.